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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사無心寺에는 마음이 없다
이 홍사
강변의 갈대 위에 얹혀 있는 절이 있었다.
無心寺
갈대 위에 절이 아주 입체적으로 걸려 있었다.
낙동강 강바람을 고이 품는 절이다.
바람을 품는 게 아니라 바람이 저 혼자 깃든다고 해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강바람은 사정이 없다. 어디든 할퀴고 지나갔다. 시인은, 바람은 제 가슴에조차 생채기를 내며 지나간다고 했다. 그러나 무심사를 지나가는 바람은 순했다.
무심사에는 강바람이 법당에 들어앉아 목탁을 치며 불경을 외웠고 공양간에서 공양하시라고, 중생들에게 권하는 바람의 절이었다. 바람이 하는 일이라곤 고작 추녀 끝의 풍경이나 흔드는 다른 사찰의 바람과는 달랐다.
무심사로 들어가는 길은 무심하게 지나야 했고 이 절 앞에 서면 또 무심해야 했다. 무심하게 들어가면 되는데, 나는 늘 절 입구에서 항상 머뭇거렸다. 마음을 비우지 못한 탓인가. 무심사에는 마음이 없다고 했는데.
이제 이 절에 이모가 없다.
이모는 무슨 마음으로 무심사를 찾았을까? 마음을 비우기 위해서? 무심해지기 위해서?
무심사의 입장권은 마치 마음을 비우고 무심해져야 얻을 수 있는 거라고 이모는 언젠가 말했다. 웃자고 하신 말이 아니었다. 강바람에 날리는 무심사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다.
무심사에 오겠다고 마음먹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다. 예전에 들릴 적에는 이모를 만난다는 명분으로 마음을 먹고 왔지만, 이제 이모는 이 무심사에 없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오다 보니 여기, 강둑에 당도했다. 여기에 오겠다고 먹은 마음은 없었다.
왜 왔지? 돌아갈까?
매력은 가장 강력한 지배 수단.
이모의 말이었다. 이모를 찾아 이곳으로 와서 내가 왜 왔는지 모르겠다고 하면 이모는 늘 이 말을 하면서 매력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니 찾아보라고 했다. 그 말에 대입하자면, 이모는 없지만 무심사는 나에게 매력을 가진 대상인가 보다. 그 대상을 찾는 눈으로 무심사 경내를 다시 둘러보았다.
강바람을 머금은 절.
경내는 조용했다.
무심사는 강변에 지어진 절이다. 낙동강 강가의 절벽, 절벽이라고 할 것까진 없고 둔덕 위에 조그만 야산을 지고 지어진 절이다. 이 절의 역사를 따지자면 신라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고찰이다.
고찰이라곤 하지만, 조그만 암자처럼 여겨지는 작은 절이다.
강바람이 절로 불어오고 있다.
이모는 살아생전 이 절의 공양간에서 머물렀다. 밥을 해서 부처님과 스님께 올리는 공양주였다. 그 세월이 십오 년이 넘는다. 이모는 젊어서 혼자가 되고부터 절로 떠돌았다. 나는 이모부의 얼굴을 모른다. 내 기억에 그 얼굴이 각인되기 전에 이모는 혼자가 되었다.
이모도 외로웠겠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도 이모에 못지않게 외로웠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께서 새어머니를 들이고부터 이모는 집에 발길을 끊었다. 한 번도 집으로 온 적이 없었다. 아니, 정정하자. 새어머니를 두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오셨다. 그게 아버지를 위해서 찾은 걸음이 아니라는 건 안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이모의 하나밖에 없는 언니였다. 그 언니의 자리를 새어머니가 차지한 것이었다. 혈육이라곤 어머니가 전부였는데. 그 언니를 잃은 이모는 혈육과의 단절이거나 고립이었다. 이모는 어머니를 엄청, 닮았다. 엄마가 그리우면 이모를 보라는 말도 있지만. 닮기로는 그 말을 능가할 것이 분명하다. 새로 들어온 어머니는 이모보다 나이가 훨씬 적었다. 그래도 아버지의 아내로 자리매김을 하자 이모는 새어머니를 두고 언니라고 불러야 했다.
내가 이모를 만나면 이모는 늘 새언니 잘 있느냐고 안부를 물었다. 새언니라는 호칭이 이모를 불편하게 했을 것이라는 짐작은 누구나 할 수가 있다.
이모는 떠돌면서 거처를 옮길 때마다, 아버지를 통하지 않고 내게 거처를 알려주었다. 때로는 편지, 때로는 집에 있던 유선 전화, 그 이후에 핸드폰이 보급되고부터는 거처를 알려주는 방법이 수월했지만, 그 이전에는 내가 이모를 찾아가지 않으면 끊임없이 내게 이모가 있는 거처를 알려 왔다. 이모는 여러 절을 옮겨 다녔지만, 말년에는 이 무심사로 와서 거의 십오 년이 넘도록 공양주를 했었다.
이모의 언니인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피로 연결된 혈육이라곤 나 하나뿐인 셈인 이모의 외로움을 그때는 간파하지 못했다.
이모에게 거처를 옮겼다는 연락을 받으면 나는 꼭 그곳을 찾았다. 중학에 입학하고부터 그렇게 찾아가 이모를 안심시켰다. 이모는 내가 연락이 없으면 못 견뎌 했었다. 그 예전, 주소만 들고 어떻게 물어물어 찾아가면 이모는 가슴을 쓸어내리면 안도의 한숨을 쉬곤 했다. 이모를 그렇게 안심시키는 게, 당시엔 내겐 큰 숙제로 여겨졌다.
핸드폰이 보급되고부터 이모가 나에게 연락하기보다는 내가 수시로 이모를 두드렸다. 이모는 늘 내 존재에 대해서 불안했던 모양이다. 내가 전화를 걸어 연락하면 안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모의 전화번호는 내 핸드폰 즐겨찾기 상단에 배치되어 있었다. 어쩌면 이모와 나의 편리를 위해 핸드폰이 개발되었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이모가 있는 절을 찾아가면 나는 이모의 방에서 잤다.
이모 옆에 내가 자면 이모는 안심했다.
이모는 어느 절에 가든, 그 절의 요사채에 방 한 칸을 차지했다. 이 무심사로 오기 전, 신령의 거조암 부근에 있을 적에도 그랬고 그 이전에도 그랬다. 온돌방, 군불을 지펴 방바닥에 등을 지질 수 있는 방을 이모는 홀로 차지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모가 그 절의 월급이 없는, 공양주로 있는 조건으로 자신이 홀로 마음껏 쓸 수 있는 방 하나를 요구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이모는 내가 가면 절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나를 재울 수 있는 방 하나가 절실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모를 처음 찾아간 곳은 신령의 거조암으로 가기 전, 충북 영동에 있는 무슨 절이었다. 그 절의 이름은 잊었지만, 작은 암자였다. 그때가 중학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절로 기억한다. 이모가 보낸 편지에 적힌 주소를 들고 혼자 찾아갔다. 이모의 편지에는 그곳으로 찾아오는 방법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그런 방법이 적힌 편지는 집으로 오지 않고 늘 학교로 왔다. 이모는 내가 몇 학년 몇 반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담임선생님을 통해서 전해 받던 편지에는 내가 오던지 아니 오든지 그건 관계가 없이 옮기는 절마다 이모에게 닿는 길을 편지에 상세하게 기술했다. 어쩌면 이모를 찾아 나섰다가 길을 잃은 나를 염려해서 그렇게 상세하게 기술했는지 모르겠으나, 이모에게 닿는 방법, 아버지가 모르는 그 길, 그게 우리에게 비밀을 공유하는 것처럼 짜릿했고, 편지에 그곳으로 닿는 길을 일러주면 그게 오라는 말보다 더 진하게 와닿았다.
가야지.
편지를 읽을 때마다 그렇게 마음먹고 가는 길을 새겨두었다. 중학 시절 처음 이모를 찾아 집을 나섰다. 새어머니의 치마폭에서 놀아나는 아버지께 간다는 말도 없이 집을 나섰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이모를 찾아간다는 사실을 아버지께 알리고 허락을 받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께서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왜 들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모에게 가는 것은 비밀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어린 나는 주소만 들고 집을 나섰다.
혼자 그렇게 먼 길을 나서기는 아마 그때가 처음이었다. 영동역에서 기차를 내려서, 이모의 편지에 적힌 대로 무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탔다. 당시에는 시외버스에, 요금을 받는 차장이 있던 시절. 그 여자 차장에게 무슨 마을에 내려달라고 부탁해서 그 마을에 내렸고, 그 길이 맞는지 확인조차 할 수 없는 인적이 뜸한 산길, 불안한 마음을 달래며 한 시간이 넘게 걸어가 길 끝에 매달린 암자를 찾았다. 다행이었다. 이모는 작은 암자에 스님 한 분과 기거하고 있었다.
이모는 그렇게 찾아온 나를 잡고 왜 그러셨을까?
한없이 우셨다.
어린 마음에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모의 눈물을 보며 나는, 이모에게 하나밖에 없는 혈육이라는 걸 확인했던가. 그리고 더 자주 이모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내 안에서 똬리를 틀곤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날 밤, 이모는 내 존재를 더듬었고 나는 이모의 정체성을 더듬었다.
산골의 밤은 일찍 찾아왔다. 스님과 겸상으로 저녁을 먹고, 저녁예불을 마친 다음, 이모가 아궁이에 군불을 지핀 온돌방에서.
내 기억의 도끼날에서 향내가 난다.
내 기억은 지금 무심사 앞에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향나무를 찍고 있는 건가? 그렇다. 이모는 어쩌면 향나무인지도 모른다. 아련한 기억에 무엇이라 단정 지을 수 없는 아련한 냄새만 남겨놓고 사라진.
무심사에는 강바람이 무심하게 불고 있다.
이모의 나이를 더듬어본다. 나랑 스물한 살 차이가 난다. 어머니가 스물여섯에 나를 낳았고, 이모와 어머니는 다섯 살 터울이다. 내가 초등학교 사 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당시에 어머니 나이 마흔에 이르지 못한 요절이었다.
그래도 나는 살았다.
어머니에 대한 선명한 기억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늘 이모가 마음속에 자리를 잡고 나를 지켰다. 나는 이모가 내게 그늘을 드리우는 또 다른 어머니라 여겼다. 이모가 존재했으므로 나는 외로움에 휘말리지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홀로된 아버지의 나이가 지금의 나랑 비슷하겠다. 아버지의 재혼은 당연했고 객관적으로 보아도 타당성을 지닌 거였다. 그러나 나로 생각하면 새어머니의 유입은 나를 먼 허공으로 튕겨내는 불편한 존재였다. 돌이키니, 나라는 존재가 설 자리를 잃는 것이었다. 그건 새어머니의 유입을 원인으로 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집안에서 사라진 내 존재를 찾겠다고 앙탈을 부리지 않고 이모를 가슴에 품었다.
이모는 늘 따뜻했다.
아무튼, 처음으로 이모를 찾아간 날, 그 암자의 작은 온돌방에서 이모와 잤다. 이모가 군불을 얼마나 지폈는지 온돌방은 따뜻함을 넘어 뜨겁게 여겨졌다.
한참 자는데 이모의 손이 어린 내 속옷 속으로 들어오는 걸 꿈결에서 보았다.
분명히 이모의 손이었다.
아마도 새벽이었지 싶다. 방바닥은 따뜻했다. 사타구니도 따뜻했으며 이모의 손길도 따뜻했다. 이모는 나를 더듬고 있었다. 그 손가락 끝에 달린 이모의 실체가 울고 있다는 건 느끼지 못했다.
이모는 나의 존재를 더듬었고 나는 이모의 정체성을 더듬었다.
이모가 구하는 게 뭐지?
어린 질문을 던지면서도 발기가 되고 있다는 걸 스스로 느꼈다. 민망하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어린 발기가 이모를 달래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었다.
잠에서 깨었을 땐, 이모는 새벽 예불을 위해서 법당으로 가고 없었다. 이모는 결혼하고 삼사 년, 짧은 신혼을 누리다가, 얼굴 기억은 고사하고 실체가 오리무중이거나, 전설로 남은 이모부를 무슨 사고로 보내고 공양주를 자처하여, 절을 전전하는 보살님이었다. 나는 이모의 신심, 그 깊이를 알지 못했다. 그 어린 새벽에는 그 깊이를 가늠하기는 고사하고 그런 신심에 단계가 있다는 것조차도 몰랐을 것이다. 그 어린 새벽에 깨어나 법당으로부터 목탁 소리와 알아들을 수 없는 웅얼거림 같은 염불을 들으며 먼 미래, 이모의 노후는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막중한 의무감 같은 것을 막연하게 느꼈다.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그 따뜻했던 방이 지닌 그 새벽의 기운이 아련하게 느껴지는 듯하다.
이모부,
이모를 생각하면 이모부를 거론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머니에게도 이모부의 이야기를 많이 듣지는 못했다. 이모부를 소재로 이야기를 많이 할 시간을 가지지 못했다. 지금도 이모부가 무슨 사고로 언제 죽었는지 나는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이모부에 대한 사안은 이모에게 물을 수가 없었다. 어찌 그런 생각을 했는지, 그건 이모에게 던지는 질문에, 빨간 밑줄이 그어진 금기사항으로 여겨져 늘 궁금증을 품고 살았다.
그 작은 암자에 이틀 밤을 잤는데, 다음날 밤도 이모의 손길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모는 내 존재를 그렇게 확인하곤 했다.
처음으로 이모를 찾아가서, 이틀을 자고 이모가 주머니에 넣어 주는 얼마의 용돈을 들고 갔던 길을 되짚어 집으로 왔는데, 아버지에게 호되게 혼이 났다. 아버지께 혼이 났지만 내 뒤에 이모가 있다고 생각에 혼을 내는 아버지를 가볍게 이길 수가 있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하시면 난 이모에게로 갈 거야,
혼이 나면서도 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버지가 이모를 대놓고 원망하면서 혼을 냈지만 나는 아버지가 이모에게 나의 존재를 놓고 시기하거나, 질투를 느끼고 있다고 생각하며 흘려들었다.
이모가 영동의 그 작은 암자에 있을 적에, 집에는 말도 하지 않고 두 번인가 더 이모를 찾아갔다. 갈 적마다 이틀씩 자고 와, 말없이 사라진 나의 부재로 집을 들쑤셔 놓았다.
왜 갔는가?
집은 들쑤셔 놓았지만, 새어머니가 진심으로 내 부재를 걱정했겠는가? 나의 부재는 새어머니에게 어떤 무게로 다가갔을까? 그 새어머니의 심리적 무게라는 것이 어떤 성질의 것인가? 그걸 가늠하고 싶은 마음을 바탕으로 하며, 또 한편으로는 이모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이모에게 기꺼이 살아있는, 발기하는 내 존재를 이모의 손으로 더듬게 해주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이 가슴에 아련히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돌이키니, 그 시절 나는 영악했다.
중학 시절을 거쳐오며, 어린 나이에 일어나는 몸의 변화, 새벽에 발기한 아랫도리를 보면 이걸 이모에게 보여주지 못하다니, 안타깝다는 생각과 더불어 이모에게 보여주지 못해 참 미안하다는 아득한 생각을 품어본 날이 여럿이었다. 특히나 중학이 끝날 무렵, 사타구니에 어른이라는 이름의 털이 돋아나기 시작할 무렵에는 빨리 이 몸의 변화를 이모에게 알려 이모에게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그 기운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조급해지기도 했다.
이모는 내 몸에서 혈육을 더듬었고, 나는 이모의 마음을 더듬으며 혈육임을 확인하고 안도했다.
이 공식이 정확하다는 걸 확인하는 일은 늘 가슴에 숙제처럼 여겨졌다. 털이 돋아날 그 무렵에는 그 확인의 절차가 상당히 조급한 문제로 여지기까지 했다.
털이 났음을, 어른이 되어가고 있음을 확인시켜주러 가는 길은 영동의 작은 암자가 아니라, 대구 부근, 신녕의 거조암 부근에 있는 절이었다. 그 방면으로는 처음 가지만 이모가 어떤 방법으로든, 그 길을 상세하게 알려주었기에 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
그 길을 찾아가며 이모가 이렇게 가르쳐 주는 방법으로 내 앞날의 길도 가르쳐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아득히 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곳에 당도해보니 그 절이 잡리 잡은 골짜기는 팔공산 자락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꽤 규모가 있지만 아늑한 암자처럼 여겨지는 절이었는데, 그곳에서도 이모에게 할당된 온돌방이 있었다. 그때 나는 고등학생이었고 집에서는 별로 달가운 존재가 아니라,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며 새어머니가 나에게 주는 관심이나 집안에서 내 자존감에 대한 궁금증도 시들해져 있을 때였다.
이모에게 간다는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갔는데 이모는 내가 왔음을 인지하는 순간, 얼마나 반가웠으면 그랬을까. 털썩, 주저앉을 기색이었다.
그런 이모를 보는 순간, 정신과 몸이 짜릿했다.
그때는 절 마당에 들어서서 누구에게 관음심 보살님을 찾아왔다고,
이모는 절에서 얻은 법명이 관음심이었다.
누구에겐가 그 법명을 대며 이모를 찾고 누군가가 기별을 보내 내가 왔음을 전해 듣는 절차가 생략된 조우, 나와의 만남에 정신적으로 충격을 준비할 틈도 없이 마주친 그 순간, 무엇을 담았는지 대나무 바구니를 옆구리에 끼고 요사채 모퉁이를 돌아 나오던 이모와 바로 마주친, 내가 누구인지 인지하는 순간, 털썩 주저앉을 정도의 기색을 보인 이모,
그게 이모의 본 모습이었다.
아, 나의 존재가 이모에게 이렇게 크게 자리 잡고 있었구나.
그때야 비로소 내가 이모의 가슴에 얼마나 크게 자리 잡고 있었는지, 어쩌면 그게 내가 감당하지 못할 부담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내가 순간적으로 이모를 부축했고 이모가 내가 찾아왔다는 현실을 인지하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지금 무심사 앞에서 갈대를 스치고 내 얼굴을 할퀴고 지나가는 강바람을 맞으며 그날 휘청거리는 이모를 떠올리고 있다. 이제 찾아가면 이모는 팔공산 자락의 그 절에는 없다. 이모는 그 팔공산에서 나와 이 무심사로 왔다. 이 무심한 무심사에서 십오 년이 넘도록 공양간을 지키던 관음심은 이제 이 절마저 비우고 어디 갔을까. 무심사의 강바람은 무심하게 불었다. 이제 이 무심사의 공양주가 사는 따뜻한 온돌방은 나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 팔공산 자락의 절에서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나와 바로 마주친 날도 방은 아궁이에 군불을 얼마나 지폈는지 온돌방 방바닥은 뜨거울 지경이었다.
그날은 좀 이른 시간에 도착했으니 절에서 점심을 먹었다. 산자락이나 한 바퀴 돌고 오라는 이모의 말을 무시하고 오후 내내 이모를 따라다니며 이모가 하는 일을 지켜보았다. 이모의 손은 절에서 다듬는 손이었다. 법당에 물을 정갈하게 다시 올리고, 부처님 전에 시든 꽃을 다시 다듬어 올리고, 저녁 공양을 준비하며 나물을 다듬는 손, 이모의 손이 어딘가 모르게 버둥거리고 있다는 걸 눈치챌 수가 있었고 그 허둥거리는 손은 나와의 재회로 인한 것이라는 걸 알 수가 있었다.
그 뜨거운 온돌방에서 이모와 잤는데 새벽쯤에 이모의 손길이 나를 더듬는다는 어렴풋이 느꼈다. 어쩌면 나는 그 손길을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이모는 내 사타구니에 막 돋기 시작한 털을 찬찬히 쓰다듬고 있었다. 그런 이상한 행위를 하는 이모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신음과도 같은 말을 잠결에 조립해 보았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얘가 이렇게 어른이 돼가고 있네요. 이렇게 키워주셔 부처님 감사합니다. 이건 가피입니다. 나무관세음.
어렴풋이 조립하니 이모의 입에서 띄엄띄엄 나오는 신음, 그건 완벽한 언어였다. 그거였다. 이모에게, 나의 성장은 바로 부처님 가피였다. 이모는 내 안에서 부처를 찾고 있었고 나를 통해 부처를 형성했던 거, 뭔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어렴풋하게 정리한 것이 내가 부처라는 거.
다시 잠들 수가 없었다.
벌떡 일어나면 이모가 놀라거니와 감미로운, 그 손길이 거두어진다. 절대 눈을 뜨거나, 일어나서는 안 된다. 그래서는 절대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나를 지배했고 몸을 누르고 있었다. 눈을 감고 이모의 손길에 아랫도리를 맡기고 오랫동안 누워 이모의 입에서 나오는 부처를 더듬었다. 이모의 부처는 내 몸에 있었다. 부처님의 가피도 역시 내 몸에 있었다.
그 새벽, 이모는 나를 더듬었고 나는 이모가 지닌 부처를 더듬었다.
그 시간이 상당히 길었다.
뭔지는 모르지만,
이모에게 귀한 무엇을 안겨주고 있다는 마음이 뿌듯했다.
이모가 새벽 예불을 위해 법당으로 올라간 뒤에 눈을 떴다. 이모는 손길에서 나오는 따뜻한 온기만 남겨두고 새벽 예불을 드리러 간 새벽이었다. 나는 이모가 내 아랫도리에 남겨놓은 온기를 고스란히 품고 그대로 누워서 많은 언어를 곱씹었다. 곱씹은 언어들은 마음을 먹어서 찾아낸 것이 아니라 저절로 어디선가 생성된 낱말이었는데 내가 당시에 일상으로 쓰던 말은 아니었다.
그리움, 성장, 혈육, 근친, 확인, 외로움, 듬직함, 핏줄
낱말을 곱씹으며 생각하니, 어느 것이라도 이모와 연결되지 않은 말이 없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그 질문과 함께 그 새벽, 나를 찾아 허우적거렸다. 따뜻한 방바닥의 온기가 느껴지는 산사의 작은 온돌방의 새벽, 나는 그곳에서 부처를 발견했고, 그날부터 나는 내 안에 지나칠 정도로 많은 부처를 키웠다. 그 부처를 흠모했다. 내 몸에 있는 부처를 보며 그 깊이가 어디일까, 섣불리 가늠하기도 했고 부처 속에 들어앉은 이모를 찾기도 했다.
고등학교를 거치는 동안 서너 번 더 이모를 찾아 그 팔공산 자락으로 갔다. 갈 때마다 내 안에 든 부처를 이모에게 확인시켜야 했다. 나는 부처임을 인정해야 했다. 껄끄럽게 비늘을 세우지 않고 순종적인 자세로 비늘을 몸에 착 붙여야 했다. 아가미마저 이모의 손에 걸리지 않도록 굳게 닫았다. 이모는 그런 자세가 되어 있는 내 몸을 매끈하게 쓰다듬으며 무엇을 찾아갔다. 그렇게 이모가 찾아간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더 이상 팔공산 자락으로 가지 않았다. 이모가 그 절을 나와 이 무심사로 왔기 때문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가기 전까지 나에게는 개인적으로 약간의 혼돈기가 있었다. 그 혼돈기마저 이모에게 해결책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 기간은 이모를 찾아 이 무심사에 오지 않았지만, 우리에겐 핸드폰이라는 새로운 연결고리가 서로를 연결하여 옭아매고 있었다.
핸드폰, 늘 들고 다니지만, 이모가 나에게 전화를 먼저 한 적은 없다. 내가 늘 발신인이었고 이모는 늘 수신인으로 존재했다. 내가 이모에게 전화하면 이모가 얼마만큼 내 전화를 간절히 기다렸다는 걸 단박에 알 수가 있었다. 전화를 할 적마다 그 점이 죄스럽고 미안했다. 가끔 이모는 나에게 원수를 감동시키라는 말을 문자 메시지로 날렸을 뿐이다.
원수를 감동시켜라.
잊을 만하면 날아오는 문자, 그 원수가 누구인지, 아니면 무엇인지 알기 전에 이모는 갔다. 이모는 죽음을 이틀 앞두고 내게 문자 메시지로 죽음을 알려왔다. 그 문자 메시지가 죽음이라는 걸 해독하기에는 너무 난해한 시였다. 뭔가 섬찟한 메시지여서 아득히, 조속한 시일 내에 이 무심사를 찾아야 하겠다는 생각만 했을 뿐, 그렇게 다급하게 생을 문을 닫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 메시지를 받고 이 무심사로 늙은 공양주 보살님을 찾아왔을 땐 나에게 짐이 되어 요양원에 갈 것을 염려한 이모는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었다. 이곳에 와서 소식을 듣고 가까운 장례식장으로 바로 걸음을 돌렸다.
이모가 없는 무심사를 돌아본다. 절은 바람을 품고 있다.
이 무심사 십오 년, 참 여러 밤을 이 절에서 보냈다.
이 무심사에도 공양간 옆에 이모만 쓰는 온돌방이 붙어 있었다. 군에서 휴가를 나올 때마다 이곳으로 들어와 이모의 밤을 보내며 부처가 국방부의 밥을 먹으러 가서도 건재함을 확인시켜 드려야 했다. 당시에 이모의 부처는 상당히 성숙한 철학을 지니고 있었으며, 왕성한 건강미를 자랑하고 있었다. 이모는 상당히 흡족해한다는 걸 알 수가 있었다.
그 이후 수시로 이 절을 찾았다.
결혼을 앞두고 이모의 부처가 결혼을 맞은 준비가 되었다는 사실도 이모의 밤에 확인시켰다. 그때 이모도 늙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이모가 늙고 있다? 그건 믿기지 않지만, 현실이었다.
늙은 이모는 내 결혼식에 참석했다.
아버지의 빈 자리, 혼주석에 새어머니와 나란히 앉은 모습이 고왔다. 정작 중요한 건 첫날 밤, 아내라는 이름이 붙은 신부에게 다가가는데 몸이 열리지 않았다. 신부는 몸을 다 열고 있는데, 무엇이 잘못되었나? 곰곰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답이 바로 나왔다. 그건 바로 이모에게 검열받지 않았다는 사실, 나는 신부의 열린 몸을 보며 바로 돌아앉아 아랫도리에 이모의 손길을 느끼며 뭔지도 모르는 기운을 받아 뜨거운 밤을 만들었다.
신혼살림을 차리고도 우리 부부는 집을 비워두고 이 무심사로 와서 잤다. 그 작은 온돌방에 신혼부부와 이모, 셋이서 잤다. 그렇게 자는 것만으로 이모에게는 부처가 건재하다는 게 확인되었던 모양이다. 안도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돌아가곤 했다. 신혼이었지만, 가끔은 아내를 집에 두고 혼자서도 이 절을 찾았다. 아내를 동반하지 않은, 그런 밤이면 이모는 더 깊게 부처를 확인했다. 아내에게는 성기가 되고 이모에게는 부처가 되는 나는, 나를 지니고 다녔다. 부처인 나를 확인할 이모는 이제 이 무심사에 없다.
이 무심사에 왜 왔을까?
발길이 닿는 대로 가다 보니 온 것이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새로운 부처가 생기고 있음을 이모에게 전하고 싶어 이 무심한 무심사에 온 게 아닐까?
아내의 몸에 태기가 나타난 것이다.
이모가 늘 신경을 쓰고 답답하게 여기던 부분이다. 아내는 결혼하고 구 년이 넘도록 소식이 없었다. 남 달리 피임을 하는 게 아닌데 그랬다. 이모는 늘 그 아내의 자궁에서 들려올 소식에 귀를 기울였다.
이모의 분신인 사리가 아내의 속으로 들어갔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모를 화장했는데 사리가 나왔다. 그 장례를 주관했던 주지 스님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 정작 스님의 다비식에서는 사리가 나오지 않고 절 아래 사는 늙은 보살의 몸에서 사리가 나온다는 말을 들은 터라, 놀랄 일은 아니었으나 이모의 신심 깊이가 경이로웠다.
그 사리가 아내의 몸으로 들어가 아이로 다시 환생하는 것이 아닌가?
아내에게 태기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산부인과에서 임신이 확실하다는 소리를 들으며 그런 생각을 했었다.
아내의 몸에서 무게를 더하는 부처.
이 소식을 전할 이모는 이 무심사에 없다. 주지 스님이라도 뵙고 싶지만, 주지 스님은 이모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 무슨 연유로 계룡산으로 들어가시고 지금은 새로운 주지가 내려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 무심사에는 아는 사람, 나를 나로 인정해줄 사람이 없다. 혹시 법당의 부처님은 알고 계실는지 모르지만.
발길을 돌리는 게 맞다.
등 뒤 강에는 바람이 불고 있다.
경내로 들어서기는 주저하는 사이, 이상한 기시감이 밀려들었다. 이모가 나에게 남겨둔 간곡한 물건이 있는데, 이모의 장례에서 미처 챙기지 못한 간곡한 무엇, 들어가면 새로 온 공양주가 은밀하게 챙겨줄 무엇이 분명히 있을 것 같은 기분.
나는 무심사 앞에서 서성이고 있다. 그렇게 챙겨줄 물건을 받는다면 그게 이 무심사와의 단절이 아닐까? 그렇게 된다면 이 무심사에는 정말로 마음이 없어지게 된다. 마음을 거두어 간다. 참 무서운 상상이다.
무심사 앞에서 내 머릿속에 그려진 무심사를 떠올렸다.
갈대 위에 입체적으로 올라앉은 절, 바람 너머에 자리 잡은 대웅전의 용마루.
이 절을 생각하면 내 머릿속에는 항상 그런 구도로 그려졌다. 갈대 위의 절.
무심사, 참 무심하고 책임감 없는 구도였지만 나는 머릿속에 박혀, 굳어버린 그 구도가 마음에 들었다. 오늘은 그 구도에 절 앞에서 서성이는 사내를 하나 더 추가하면 사실적인 그림이 될 것 같다.
이 그림 한 장을 머리에 남겨두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강바람이 내 뒤를 할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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