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며칠전 '신과 인간, 인공지능'에서 이미 밝혔다. 신이 인간을 만들었는데 그 인간에게는 신과 다른 한계가 있는 인생 그리고 자기의 의지와는 별개의 삶을 살도록 했다고 말이다. 참 신이라는 존재는 심술꾸러기인 모양이다. 왜 유한한 삶을 주면서 무한의 세계를 생각할 수 있는 사고방식을 동시에 줬느냐 하는 것이다. 편안한 개나 고양이처럼 그렇게 살면 참 좋으텐데 말이다. 자체적으로 고민과 번뇌를 수없이 겪으라는 의미 아니겠는가. 시지프스의 신화와도 맥을 잇고 있다고 본다. 지금도 삶이 무엇인가 인생이 무엇인가를 찾아 수많은 인간들이 길을 떠나고 있지 않은가.
무한한 생을 가진 신이 저주처럼 준 것이 바로 유한한 생명과 무한한 사랑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백년을 지탱하지 못하는 삶속 그 속에서 그 무엇 미련이 있기에 찾고 또 찾고 찾았다는 느낌이 들다가도 못 찾은 것 같은 것 바로 그 삶의 의미 그리고 그 삶속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랑을 찾아 오딧세이처럼 헤매는 인간의 처참한 몸부림 그것이 인생 아니든가.
인간은 과연 자신의 의지대로 살 수 있는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인간이 태어나고 싶어 태어났든가. 신이 내린 가장 가혹한 짓이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인간은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어느날 의식이 들어 깨어나 보니 어느 집 어느 구석에서 처음보는 남녀가 지켜보는 속에 인생이 시작되는 것 아니였든가. 아니지 남녀 아니 남과 녀 아니 아무도 없는 그 가운데서 자신의 자리를 얻은 것 그렇게 인간은 이 세상과 첫 만남을 가지겠지. 태어나는 아이의 의지는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다.
그러게 살다 살다가 너무 힘들어도 시지프스처럼 그렇게 살 것인가. 아니면 떠나는 것은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인가를 궁리하다 나온 것이 바로 자살이라는 그 단어 아니겠는가. 너무 현생이 힘들어 스스로 떠나고 싶어 택하는 것이 바로 자살 아니든가. 신은 인간에게 태어날 때 의지를 주지 않았지만 인간은 살다가 스스로 택한다. 바로 떠나는 자유를 말이다 . 하지만 인간마다 다르다. 자신의 의지대로 행하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누군가가 대신 행하여 주기를 바라는 그런 부류말이다. 그나마 신은 인간에게 태어날 때는 의지를 주지 않았지만 떠날 때 자유라고 포장한 그의지를 그나마 준 것 같아 보인다.
그런 생각에 길을 걷다가 우연히 마주치는 한 작품...영화 미 비포 유(me before you)였다. 모든 것을 다 갖춘 한 남자 그런데 불의 사고로 인해 전신이 마비되는 중상을 입는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누워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살아 있는 지옥이다. 한 여자가 있다. 그녀는 그다지 갖고 태어나지 못했다. 생활을 유지하기도 힘든 나날이다. 험한 일을 해야만 생을 지탱할 수 있다. 그녀의 삶도 참으로 비참하다. 그런 남여가 우연히 만난다. 여자가 남자를 돌보는 아르바이트로 말이다. 남자는 6개월있다 이 세상을 하직하는 그런 프로젝트에 가입한 상태다. 즉 스위스에서 행하는 안락사말이다. 그 안락사를 앞둔 6개월동안 그를 돌보는 직업을 택한 것이 바로 그녀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그런 판단을 되돌리고 싶었다. 그래도 이 세상은 할 일이 많고 아직도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곳도 많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녀의 그런 마음을 그가 모를리 있겠는가. 하지만 그가 그녀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즐거워하는 것을 멀리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것 ...자유롭고 멋지고 예쁘게 살아가고픈 그녀에게 그는 결국 무거운 짐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그것이 자신뿐만아니라 그녀에게도 얼마나 큰 슬픔과 고통인가를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야말로 사랑했기에 떠난다는 그 유치한 그 노래가 잘 맞아 떨어지는 그런 사연이지만 나는 그런 유치함이 결코 몰상식하거나 정의롭지 않게 느껴지지 않는다. 노래 한 곡 들어본다. 이정석의 '사랑하기에' 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떠난다. 인간은 언젠가 떠나게 돼 있다.단지 스스로 조금 앞당겼을 뿐이다. 그 스스로 어쩔 수 없었기에 택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간곡한 말을 남긴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으라고 말이다. 자신은 신이 내린 그 지시 그 규범에 위배된 판단을 하면서 왜 그녀에게는 그런 부탁을 하는 것일까. 영화라서 그런 것일까. 우리에게 참다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길이 있는 것일까. 있는 것처럼 바라며 자기 최면속에서 살려고 발버둥치는 것일까. 그리고 마지막 삶의 포기 권한을 인간이 갖고 있는 것일까. 왜 인간은 태어날 때 그 불합리한 의무속에 평생 살다가 결국 떠나는 것도 자신의 판단에 의하면 안되는 것인가를 깊숙히 던지는 질문을 이 영화는 담고 있다. 혹자는 단순 멜로 영화다라고 평하고 있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영화를 보는 중요한 평가가 있다. 바로 감동이다. 감동이 없는 영화 그리고 의미만 따지면서 감동을 일부러 숨기는 그런 작품을 나는 결코 좋게 평가하지 않는다. 인생은 결코 자신의 의지대로 되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래서 신이 있다는 것이다. 그 신이라는 존재는 아주 멀리서 인간이 노는 모습을 편안하게 즐기며 보고 있을테니까 말이다. 아니다. 신은 그럴 여유가 없다. 해야할 일이 너무 많으니까. 결국 인간은 인간대로 신은 신대로 살아간다. 평생 그 업보를 간직한 채 말이다.
2021년 3월 7일 화야산방에서 정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