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론 한 권, 나의 인생 한 길
개암 김동출
2025년 11월 19일, 쾌청한 가을 날씨 속에서 우리 부부는 결혼 46주년을 맞았다. 휴대전화 캘린더에 메모해 두었지만, 그 전날까지도 아내와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딸이 점심 외식을 권하며 문자를 보내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작년엔 아들 부부가 꽃바구니를 보내왔지만, 올해는 조용하다. 그래도 섭섭하지 않다. 아들은 평소 자식의 도리를 다하려 애쓴다. 딸의 권유대로 외식했지만, 밥값은 주일마다 만나는 원로 헬레나 자매님이 대신 내주셨다.
1979년 11월 19일, 우리는 부산 조방 앞 “금탑예식장”에서 친지와 친구들의 축하를 받으며 모교의 교수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나는 25세, 아내는 한 살 연상이었지만 부모님께는 동갑이라 속였다. 혹여 말띠라는 이유로 반대하실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아내는 나의 첫 임지에서 함께 하숙했던 선배의 사모님 직장 후배였다. 그해 6월, 전화 소개로 인연이 시작되어 60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처음 만난 곳은 부산 서구 충무동 연안부두의 다방. 생머리에 투피스 정장을 입은 아내는 시골 교사였던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되고 아름다웠다.
두 달 후, 아내에게서 휘갈긴 남자 필체의 편지를 받고 청혼의 용기를 냈다. 토요일 수업을 마친 뒤 뱃길로 부산에 올라가, 다방에서 퇴근길의 아내를 만나 “칼 힐티(arl Hilty)의 행복론” 책 한 권을 건네며 에둘러 마음을 전했다.
6남매의 막내딸이 아내는 나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 부모님께 인사시켰다. 처음 뵌 장인어른께 “대선소주” 큰 병을 선물로 드리고, 하얀 모시 적삼을 입고 소파에 앉아 계신 장인어른 앞에 넙죽 절을 올렸다. 장인어른은 손주 대하듯 인자하게 맞아주셨고, “옥포교회” 앞 최 아무개에 관해 물으며 흐뭇해하셨다. 그해 8월 하순, 양가의 허락을 받고 아내를 생가로 안내했다. 병석에 계신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렸고, 예비 며느리가 따라드린 콜라 한 잔을 마신 후 이틀 뒤 영면하셨다. 양가 상견례를 마친 뒤 우리의 결혼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아내는 사직서를 내고 거제의 산골 고향 집으로 따라왔다. 도시 생활에 익숙했던 아내는 불편한 환경에 많이 힘들어했다. 나는 엄한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이듬해 군내 전근을 신청해 집을 나왔다. 그 일로 미운털이 박혀 전세방도 얻지 못하고, 교장 사택 문간방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해야 했다. 전용 부엌도 없이 한 해를 보내며 아내는 고생이 많았다. 지금 생각하면 참 미안한 일이다.
1981년, 우리는 창녕군 대합면 D 초등학교로 전근하며 고향을 떠났다. 나는 대구 D 대학에 편입해 졸업하고, 대학원까지 마쳤다. 그 사이 남매가 태어나 가족이 완성되었다.
1986년부터 부곡면 B 초등학교, 1987년 신마산 O 초등학교로 전근하며 자녀 교육을 위해 마산에 정착했다. 우여곡절 끝에 2015년, 전망 좋은 바닷가 아파트에서 부부만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결혼 생활 46년 동안 기쁨도 많았지만, 건강 문제로 위기도 많았다. 아내는 2006년 뇌수술을 받았고, 나는 2020년 서울아산병원에서 심장이식 수술을 받았다. 그때마다 올곧게 자란 남매가 우리를 일으켜 세웠다.
명절에 온 가족이 모이면 아들은 우리 부부의 생존을 “기적”이라 말한다. 현대의학의 도움이 없었다면 벌써 하늘나라 별이 되었을 거라고.
1984년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우리는 처가댁에 많이 의지하며 지냈다.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 친가의 정은 서러웠지만 대신 외가에 정은 넘치도록 받았다. 손재주가 남다르셨던 장모님은 추운 겨울이 오면 아이들에게 입힐 손수 짠 털조끼를 보내주셨다. 방학이면 아이들과 함께 처가를 찾았다. 여름에는 처가댁 식구들과 함께 양산 천성산 자락에 있는 내원사 계곡을 찾아 피서를 즐겼고, 겨울이면 손위 동서 댁에서 통닭을 시켜 먹으며 놀았다. 마음 한편으로는
정 없는 계모 밑에서 중, 고등학교에 다닐 두 자매 생각에 남모르게 눈물 흘렸다. 막내 사위에게 온정을 베풀어 주신 은공을 생각하며 장인어른이 돌아가신 뒤 우리 부부는 마산 “정법사”에서 천도재를 올려드렸다.
꽃길보다는 가시밭길로 힘들게 살아 온 우리 부부는 영혼의 안식을 찾기 위해 2013년 “호계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출발했던 우리의 결혼은 박봉에 쪼들리며 늘 힘들고 외로웠지만 두 아이에게 희망을 걸고 살아왔다. 뒤늦게 평화를 찾은 지금, 46년간의 결혼 생활을 뒤돌아보면 아내에게 고생만 시킨 것 같아 더없이 미안하고 감사하다. 이제 남은 일은 건강하게 살다 ‘Well Dying’ 하는 것이다. 검은 밤을 지새우는 계곡의 물소리 같은 시린 이야기는 이제 가슴에 묻기로 하였다. 오늘의 우리가 있게 된 것은 조상님과 가족의 힘, 그리고 자비하신 “주 하느님”의 은총이다. 세상의 그 무엇보다 기쁜 일은 5학년, 3학년으로 자란 두 손녀가 방문할 때다. 그 순간이 우리 가정의 가장 큰 기쁨이며 축복이다. “아멘.”
2025-11-20
첫댓글 동백꽃처럼 활짝 핀 사모님의 근황을 접하니
지난번 고생했던 모습이 가슴 한켠을 짓누루고 있었는데
마음을 내려 놓게 하네요.
우리네의 지난 세월은 그분의 섭리에 따라 엮어진 드라마이니 늘 감사해야겠어요.
야생초에겐들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겪어 핀 아름다운 꽃이겠어요?
시인님 부부도 끔찍한 시련의 열매로 지금의 행복이 암팡지게 열린 것이라 봅니다.
귀한 작품 감사합니다.
정겹게 토닥여 주시는 온정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