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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 세대가 가기 전에 - 주는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시간의 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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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3장 1-9절 방월석 목사
오늘 본문에는 ‘말세’로 표현된 종말의 때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말씀이 등장합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1)하십니다. 여기서 ‘말세’라는 단어는 ‘에스카타이스 헤메라이스’라고 해서 ‘마지막 날들(last days)’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재림 사건으로 성취될 종말의 날들을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1절에서는 이 말세가 ‘고통 하는 때’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통 하는’에 해당되는 헬라어 ‘칼레포이’는 ‘참기 어려운’, ‘힘든’, ‘사나운’, ‘곤란한’, ‘고통스러운’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주의 재림이 임박할수록 세상이 점점 더, 고통스럽고,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 될 것인데 구체적으로는 사람들이 점점 더 사악해짐으로 종말의 날이 고통 하는 때가 될 것이라 하십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얼마나 사악해지기에 말세를 고통 하는 때로 묘사한 것일까요? 2절부터 5절까지가 말세가 될수록 사악해져가는 사람들의 특징을 19가지로 설명하고 있는데, 언뜻 보아도 이 말씀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사람들을 묘사한 말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는 그 내용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성경에서 예언하고 있는 마지막 때를 살고 있는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다가 주님 앞에 서야 할 지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1. “자기를 사랑하며”(2)
말세에 나타날 인간 군상들의 첫 번째 특징은 ‘자기 사랑’입니다. ‘자기 사랑’이 지나쳐 타인에 대한 배려나 이해가 사라지고, 필요하다면 남을 밟고서라도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날 것이라 하십니다.
요즘 뉴스에 중심이 되고 있는 고유정 사건이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자신이 꿈꾸는 삶에 방해가 된다고 전남편을 살해하고, 잔인하게 그 시신을 유기한 고유정 사건이 사회적인 이슈가 되고 있는데, 최근에는 이 고유정이 이혼한 전남편 뿐 아니라 재혼한 남편이 데려온 의붓아들까지 죽였다는 의혹이 불거지고 있습니다. 고유정 사건이야 말로 ‘자기 사랑’이 극단화되면 어떤 일까지 벌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2. “돈을 사랑하며”(2)
말세에 나타날 인간 군상들의 두 번째 특징은 돈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건 특별한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우리가 주변에는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인데, 문제는 요즘엔 이런 타락한 세대를 질타해야 할 교회마저 돈에 대한 사랑이 지나치다는 겁니다. 교회에서도 돈이 없으면 직분을 받기 힘들고, 대형교회 목사들 가운데는 분에 넘치는 사례비를 챙기고 그것도 모자라 천문학적인 비자금을 마련했다가 구설수에 오른 이도 있습니다. 돈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뛰어 넘고 있다는 겁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하셨습니다. 돈을 섬길 것인가?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돈을 사랑할 것인가? 하나님을 사랑할 것인가? 분명한 선택을 내려야 한다는 겁니다.
3. “자긍하며”(2)
‘자긍’은 헬라어로 ‘알라조네스’라고 되어 있는데, 이 단어는 본래 시골 장마당을 돌아다니며 효과 없는 약을 선전하며 파는 돌팔이 약장수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허풍쟁이, 자랑꾼(boaster)’이라는 뜻입니다.
요즘은 자기 PR 시대라고 해서 자기 자랑이 하나의 미덕처럼 여겨지고 있는데, 심지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자기 자랑이 지나친 사람들이 있는데, 자기가 40일 금식을 몇 번 했다고 아예 명함에다 새겨 넣고 자랑하는 장로, 목사들도 있다고 합니다. 예수만 자랑해야 할 목사가, 금식한 것을 자랑하고, 박사학위 받은 것을 자랑한다면, 그런 사람들은 경계하고 멀리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알라조네스’, 자긍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4. “교만하며”(2)
‘교만’이 마지막 때에 등장할 사람들의 인격적 특징이라는 말씀인데, 흥미로운 것은 사탄 마귀의 인격적 특징도 바로 교만이라는 겁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인격적 특징이 겸손이라면, 스스로 높아져 하나님과 비기려 했던(사 14:14) 마귀의 인격적 특징은 교만입니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뉴에이지 사상이 바로 “인간이 노력하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사단 마귀가 심어준 교만한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 옛날 루시퍼가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사 14:14)는 교만한 마음을 품고 하나님을 대적했다가 심판을 받은 것처럼,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교만한 마음을 품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이 세대도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5. “훼방하며”(2)
‘훼방하며’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블라스페모이’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에서 신성모독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blasphemy가 파생된 것입니다.
최근에 개봉된 헐리웃 영화 어벤져스에 등장하는 우주 최악의 악당, 타노스는 하나님을 모독하기 위해 만들어낸 캐릭터입니다. 영화를 보면 타노스가 자신을 I AM 즉 여호와로 소개하는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또 특별한 능력을 얻기 위해 이 타노스가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자식을 희생하고, 이렇게 얻은 능력을 가지고 지구인의 반을 사라지게 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그 모습 그대로가 성경에서 묘사하고 있는 휴거의 사건을 패러디 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악당 타노스가 성경의 하나님을 염두 해두고 만든 캐릭터라면 그 반대편에서 이런 타노스를 물리치고 인류를 구원하는 어벤져스는 일루미나티를 상징하는 캐릭터입니다. 일루미나티가 휴거의 사건으로 인류를 사라지게 만든 사악한 기독교의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을 구원한다는 메시지를 담은 영화가 바로 ‘어벤져스 엔드게임’인 것입니다. 적그리스도의 세력들이 영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는 지금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한 마지막 때라는 것입니다.
6. “부모를 거역하며”(2)
부모에 대한 거역은 하나님이 세우신 기본 질서에 대한 거역(disobedient)을 의미합니다. 질서의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실 때, 자연의 세계 뿐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가정과, 국가와 교회에도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국민은 지도자를 위해 기도하며 법을 준수하고, 교회 안에서도 영적인 질서를 존중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문제는 패역한 이 세대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이런 질서를 파괴하는 것을 멋지고, 혁명적인 행동인 것처럼 가르치고 있다는 겁니다. 동성애의 확산과 페미니즘 운동을 통해 가정의 질서가 파괴되고 있고, 인본주의 사상으로 교회의 질서가 파괴되고 있고, 정치 이데올로기를 통해 국가의 질서가 파괴되고 있습니다. ‘아노미’, 무질서와 혼란이 권장되고 있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세우신 이런 질서들을 거역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위요, 이런 행위를 하는 자들에게는 무섭고 준엄한 심판이 내려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7. “감사치 아니하며”(2)
감사는 은혜에 대한 올바른 반응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감사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낳아주신 부모의 은혜에도 감사치 않는 자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감사치 않을 뿐 아니라, 아직 돌아가시지도 않은 부모의 재산을 상속 받겠다고 청부살인까지 의뢰하는 악한 세대입니다. 개나 고양이도 길러준 주인의 은혜는 잊지 않고 감사하는데,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의 마음속엔 감사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본문에서 경고하고 있는 말세가 가까웠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8. “거룩하지 아니하며”(2)
‘거룩’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도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벧전 1:16)하신 것입니다. ‘거룩’은 도덕적, 영적, 육적인 순결을 의미합니다.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고 도덕적, 영적, 육적인 순결을 지켜내는 것이 경건이요, 곧 거룩인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순결을 지켜내는 사람들이 바보 취급을 받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육체적인 순결을 지켜내는 사람들을 ‘모태솔로’라는 말로 조롱하고, 영적인 순결을 지키겠다고 우상숭배를 거절하면 편협하다고 몰아세우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타락한 동성애를 막아내 보겠다고 몸부림치는 성도들을 목사가 강단에서 ‘시대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는 꼰대’라고 조롱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시대가 아니라, 거룩한 삶을 조롱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겁니다.
9. “무정하며”(3)
‘무정하며(without natural affection)’에 해당되는 ‘아스토르고이’에서 ‘아’는 부정을 의미하는 접두어이고, ‘스토르고이’는 동물들을 포함한 어미와 새끼 사이의 본능적인 애정(natural affection), 즉 모정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런고로 ‘무정하다(아스토르고이)’라는 것은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인 모정마저 사라진 시대라는 뜻입니다.
최근 여성 단체를 중심으로 낙태법 합법화를 통해 뱃속에 있는 아이들을 제한 없이 죽일 수 있게 해달라는 청원이 빗발치고 있습니다. 얼마 전 뉴욕에서는 임신 6개 월 이상의 아이들로 제한 없이 죽일 수 있는 낙태법이 통과가 되었는데, 이는 그야 말로 방금 태어난 신생아라 할지라도 산모가 그 아이를 자식이 아니라 태아라고만 하면, 아무런 법적인 제재도 없이 마음대로 죽일 수 있는 법이 통과된 것입니다. 낙태법이 아니라, 아동 살해법입니다.
여성단체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이 법이 통과된 것을 환영하고 기뻐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 시대가 자기의 이기적인 욕망을 실현하기위해 모성마저 부정해버리는 사악하고 ‘무정한 시대’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인 것입니다.
10.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3)
사사로운 일에도 원한을 품고 이를 범죄로 실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작년에 일어났던 강서구 피시방 살해사건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데, 범인인 김성수가 1,000원을 환불해달라는 요구를 알바생이 거절했다는 이유로 앙심을 품고 30회나 칼로 얼굴을 난도질해서 죽인 사건입니다.
지난 2015년에도 노인정에서 고스톱을 치던 80대 할머니가 냉장고에 있던 사이다에다 살충제를 타서 여러 노인들을 죽고 다치게 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 사건도 고스톱을 치는 과정에서 다투다가 앙심을 품은 이 할머니가 저지른 일로 밝혀졌습니다. 사사로운 일에도 원한을 품고, 이 “원통함을 풀지 않는” 악한 이 시대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들인 것입니다.
11. “참소하며”(3)
‘참소한다’는 헬라어로 ‘디아볼로이(false accusers)’라고 해서 악한 의도를 가지고 거짓으로 상대를 비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참소’는 사단 마귀의 특징이기도 해서 요한계시록 12장 10절에서는 저를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의인 욥을 참소했던 사탄 마귀처럼, 오늘날에도 악한 의도를 가지고 거짓으로 상대를 참소하여 해를 끼치려는 자들이 많은데, 대표적인 사례라면 광주사태 때 전두환 독재 정권에 항거했던 시민들을 북한군이라 참소하여 법원에서 벌금형까지 받은 지만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일부 그리스도인 가운데도 이런 지만원의 참소를 진실인 것처럼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인데, 거짓으로 이웃을 참소하여 해를 끼치는 자가 바로 사단 마귀의 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2. “절제하지 못하며”(3)
‘절제하지 못한다.’는 것은 감정이나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하는데, 요즘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는 마약 중독, 게임 중독 같은 현상이 절제하지 못하는 세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 중독의 일종인 ‘동성애’도 성적인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고 이를 탐닉하다가 변태적인 성욕으로 발현된 것입니다.
잠언 25장 16절에서는 “너는 꿀을 만나거든 족하리만큼 먹으라 과식하므로 토할까 두려우니라.”하십니다. 인생을 살다가 만나는 꿀을 즐기는 것은 좋으나, 지나치게 이를 탐내다가 해를 입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매사에 절제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13. “사나우며”(3)
‘사나운’에 해당되는 헬라어 ‘아네메로스’는 ‘잔인하다’, ‘난폭하다’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요즘 청소년들이 즐기는 게임을 보면 얼마나 잔인하고 난폭한지 모릅니다. 잔혹하게 사람들을 사냥하는 게임들이 많은데, 이런 사나운 게임에 빠져 살다 자신도 모르게 잔혹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피시방에서 일하는 알바생을 잔혹하게 죽인 김성수가 바로 그런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을 겁니다.
14.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4)
마지막 때가 되면 사람들이 아름답고, 선한 것을 찾기보다 오히려 괴기하고 사악한 것을 좋아하고 찾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좀비 영화가 유행하고, 10여 년 전 영화 해리포터가 개봉된 이후에는 사악한 영을 섬기는 오컬트 문화가 유행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선한 것보다 악한 것을 좋아하는 세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배출한 대표적인 감독이라고 하는 박찬욱, 봉준호의 영화들도 보면, 무척이나 변태적이고 기괴하고, 사악합니다. 박찬욱의 대표작인 올드보이는 근친상간을 소재로 하고 있고, 봉준호의 이번 영화 기생충은 영화 말미에 뜬금없이 피가 낭자한 살육장면이 등장합니다. 인신제사를 묘사한 장면입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사악하고 오컬트적인 영화들을 비판하기보다 오히려 칭송하고, 즐기고 있다는 겁니다.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악한 세대의 단면인 것입니다.
15. “배반하여 팔며”(4)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여 판 것처럼,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 은혜로 되갚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를 배반하고 팔아먹는 일들이 많이 일어날 것이라 하십니다.
얼마 전에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유진 박이 그가 형제처럼 믿고 의지하던 매니저에게 사기를 당해 큰 빚을 지게 되었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몇 년 전 방영되었던 한 다큐프로그램에서 유진 박을 위해 그렇게 애쓰는 것처럼 연기하던 매니저가, 뒤로는 자기 도박빚을 갚겠다고 사채를 끌어 쓰고 앵벌이를 시키면서 자기 욕심을 채웠다는 겁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도 언제 나를 배반할지 모르는 배반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겁니다.
16. “조급하며”(4)
‘조급하다’는 단어 ‘프로페테이스(reckless)’는 말과 행동이 경솔하고, 부주의하다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깊은 생각이나 고민 없이 말을 하고, 행동하는 하는 사람들을 ‘프로페테이스’라 하는 것입니다.
“네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잠 29:20)하십니다. 우리 옛말에도 “삼사일언 (三思一言), 삼사일행 (三思一行)”이라 해서 한 번 말하고 행동하기 전에 세 번 생각하라 했습니다. 조급히 말하고 행동할 때, 실수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 때를 기다리는 우리의 마음도 이제 조급함을 버리고 인내함으로 하나님의 때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17. “자고하며”(4)
헬라어로는 ‘테튀포메노이’(highminded)라고 해서 ‘자만’과 ‘허세’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중국에서는 최근 부자놀이라고 해서 일부러 값비싼 차에서 내리다가 넘어진 것처럼 그 앞에 온갖 명품들을 늘어놓고 사진을 찍어 SNS에 게재하는 것이 유행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연예인들 가운데도 SNS를 통해 일부러 값비싼 시계와 차를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자고하기’를 즐기는 말세의 현상인 겁니다.
18.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4)
‘쾌락’에 해당되는 헬라어 ‘에도네(pleasure)’는 성적 쾌락을 포함한 세상의 일락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런 쾌락에 탐닉하다가 동성애에 빠지고, 마약에 빠지게 되는 겁니다.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 5:6)하셨습니다. 세상 일락에 빠져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9.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한다.”하십니다(5).
말세에 등장할 타락한 인생들의 모습을 열거한 19가지 가운데, 마지막인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니”라는 이 말씀은 타락한 인생들 가운데 특별히 하나님의 사역자들을 자처하는 자들이 타락할 때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지를 설명한 말씀입니다.
a. 구체적으로는 5절부터 9절까지가 이에 대한 설명인데, 5절에서는 먼저, 저들을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라 하십니다. 겉으로는 경건한 듯 자신을 꾸미지만, 실제로는 경건의 능력을 받지 못한 자들이기에 저들의 삶 속에서 경건의 열매를 찾아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회칠한 무덤처럼 경건이라는 가면을 쓰고 성도들을 속이는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는 겁니다.
b. “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다.”(6)하십니다.
이는 사도 바울 당시에 순진한 성도들을 찾아가 그럴듯한 말로 저들을 미혹했던 거짓 선생들을 묘사한 말씀인데, 오늘날 한국 교회 안에도 교회와 인터넷 공간에 가만히 들어와 거짓된 교훈을 전파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정치 이데올로기로 성도들을 미혹하는 자들이 있고, 전쟁이 일어난다고 겁박하고, 환상과 계시를 앞세워 미혹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을 분별하여 물리쳐야 한다는 겁니다.
c. 거짓 선지자의 교훈을 좇는 자는 항상 배우나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한다 하십니다(7).
목이 마렵다고 썩은 물을 마시면 안 되는 것처럼, 영적인 궁금증이 있다고 거짓 선생들의 교훈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이들의 교훈에 미혹되면 항상 배우나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하는 허망한 일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d. 얀네와 얌브레와 같이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이라 하십니다(8).
얀네와 얌브레는 오늘 본문에서만 언급되고 있는 이름인데, 이들은 구약 성경에는 그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구약의 외경과 초대교회 당시 유대인들이 참고하던 문헌을 보면 이들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구체적으로는 모세가 바로 왕 앞에 섰을 때 모세를 대적했던 애굽의 술객들의 이름이 바로 얀네와 얌브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바로 왕 앞에 선 모세를 대적했던 얀네와 얌브레처럼 신실한 하나님의 종을 대적하는 거짓 선생들이 있다는 겁니다.
예전에 한 번 블로그를 통해 다미선교회 이장림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글을 올린 적이 있는데, 그 때부터 한 기독교 카페에서 제가 블로그에 올리는 글마다 꼬투리를 잡아 비판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Again 1992”라고 외치며 이장림을 데리고 다미선교회의 영광을 재현하려던 젊은 친구였는데, 블로그를 통해 그 정체가 드러나자 더 독을 품고 지금까지 블로그 사역을 대적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이 친구야 말로 모세를 대적했던 얀네와 얌브레같은 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얀네와 얌브레같은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일어나 신실한 하나님의 사역자를 대적할 것이라 하십니다. 하지만, 장차 주님이 오시면 저들을 심판하시어 저희의 어리석음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9).
20. 결 론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5하)하십니다. 5절의 이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 전체의 결론이라 할 수 있는데, 세상이 타락하고,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타락했다고 너도 함께 타락하여 죄의 길로 가지 말고, 타락한 세대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가 되라는 겁니다. 소돔성이 불의 심판을 받기 전에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성을 빠져나온 것처럼, 악한 세대에 휩쓸리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거룩한 삶을 살라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