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관심을 반영하듯 좁은 세미나실은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가득 찼다.
이렇게 좁은 장소를 학술대회장으로 정하게 된 까닭을 전임 학회장인 조성을 아주대 교수는 "월례발표회는 원래 그렇게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전의 월례발표회처럼 '소규모'로 준비했다는 뜻이었다.
세미나실은 이내 사람들로 가득 찼고, 학회 측이 준비한 100부 가량 되는 발표문도 이내 동나는 바람에 늦게 도착한 사람들에게는 발표문을 이메일 발송을 해 주겠다고 약속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학술발표회는 불교사상사 전공인 최연식 목포대 교수의 사회로 모두 4편에 이르는 논문 발표와 그에 대한 개별 및 종합토론 순서로 진행됐다.
발표자 중 최연장자이면서 미륵사 서탑 사리봉안기를 국립문화재연구소 의뢰로 판독한 김상현 동국대 교수가 가장 먼저 '백제 무왕의 왕후와 미륵사 창건'이라는 발표를 통해 삼국유사의 미륵사 창건 기록에 너무 얽매이지 말 것을 강조했다.
삼국유사에는 미륵사를 백제 무왕과 신라 진평왕 딸인 선화공주가 함께 발원해 창건했다 했지만, 당시 백제인들이 작성한 이번 사리봉안기에는 무왕의 왕비인 사택(沙宅)씨가 창건한 것으로 나오는 만큼, 봉안기를 신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백제불교에 관한 연구를 주도하는 소장파 학자들인 국가기록원 길기태 박사와 한국학중앙연구원 조경철 박사는 봉안기 발굴로 학계가 봉착한 가장 난처한 문제일 수도 있는 미륵사 창건을 뒷받침한 불교사상을 탐구한 성과를 내놓았다.
이밖에 사리봉안기 서체에 관한 발표도 있었지만, 적어도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그다지 쟁점이 되지는 않았다.
사회자인 최연식 교수는 개별발표와 개별토론이 끝난 뒤 논쟁점을 ▲미륵사 창건 과정 ▲그것을 뒷받침한 불교사상 ▲선화공주의 문제 등 3가지로 정리해 종합토론에 부쳤다.
사리봉안기 발견 이전 미륵사는 무왕과 선화공주 부부가 석가모니 부처 입멸 이후 도래한다는 미륵불에 대한 신앙심에서 발원해 창건했다는 연구성과를 발표한 적이 있는 길기태ㆍ조경철 두 박사는 사리봉안기 내용을 종래의 자기 학설의 범위에서 해석하고자 했지만, 이는 첨예한 논란을 빚었다.
두 연구자 모두 사리봉안기에 미륵불에 대한 신앙은 전혀 보이지 않고, 석가모니 부처에 대한 신앙만 표출했지만, 그 이면에는 삼국유사 기록처럼 미륵불 신앙의 흔적을 여전히 엿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에 대해 첫 발표자인 김상현 교수가 포문을 열었다.
김 교수는 "불교사상을 석가모니 신앙이다, 미륵신앙이다, 화엄신앙이다 하는 식으로 갈라보는 시각 자체가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학계에서) 미륵신앙이라고 해서 그 근거로 드는 불교경전만 해도 불설(佛說) 즉,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으로 표현된다는 점에서 불교신앙은 그 어떤 경우에도 석가모니 부처를 떠나서 생각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에 의하면 미륵불 또한 석가모니 부처에 의해 미래의 부처로 약속을 받았으니, 미륵신앙 또한 그 근본은 석가모니 부처에 대한 신앙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맞물려 한국 고대 사찰에서는 유일하게 중원(中院)ㆍ서원(西阮)ㆍ동원(東院)의 삼원 체제를 갖춘 미륵사가 일시에 창건된 것인지, 아니면 순차적으로, 그리고 각기 다른 사람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보아야 하는지도 논란 대상이 되었다.
길ㆍ조 두 박사는 분리설에 무게를 두었다. 다시 말해 중원이 어느 시기에 먼저 이룩되었으며, 봉안기에서 말하는 서탑의 창건연대인 639년에 이르러 서탑과 동탑, 그리고 서원과 동원이 무왕의 왕비인 사택씨에 의해 건립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자연히 선화공주가 삼국유사 기록처럼 어떤 형태로건 미륵사 창건에 관여했을 것이라는 주장으로 발전했다.
이와 관련해 길 박사는 선화공주가 무왕의 정비가 아닌 후궁 일종인 부인(夫人)이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래서 사리봉안기에는 그가 창건 주체로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조 박사는 재위 기간이 40년에 이르는 무왕시대 그의 왕비가 사택씨 외에 다른 왕비가 있었을 것이며, 그런 점에서 선화공주가 미륵사를 처음 창건할 때 왕비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주장 또한 김 교수의 반격을 받았다. 김 교수는 "미륵사지 발굴성과를 존중하면, 미륵사가 창건 당시 삼원 체제를 염두에 두고 디자인되었으며, 다른 무엇보다 봉안기 자체에서 왕비 사택씨가 서탑 외에도 '가람'을 발원해 창건한 것으로 나오므로 근거가 없다"고 강조했다.
이런 반박에 곤혹스러워진 길 박사는 급기야 "그럼에도 선화공주는 버리기엔 너무 아깝다"고 말해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미륵사 사리장엄구 발굴이 촉발한 이런 논쟁은 일주일 뒤인 21일 신라사학회와 국민대 한국학연구소가 공동주최하는 학술대회에서 2라운드를 맞는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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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현 교수의 말이 백 번 옳죠. 만약 선화공주가 미륵사지 건설에 전체 또는 부분적으로 관여햇더라면 봉안기에 '선화공주가 발원하여 짓기 시작했으나 안타깝게도 완성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시고 그 뒤를 이어 사택지적의 딸이' 또는 ' 선화공주가 미륵사지 중원,동원을 완성하고 사택지적의 딸이 서원을 건설하여 다 완성되었으니 미륵보살님의...."식의 기록이 나왔어야 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
그나저나 길 교수 말이 웃기는군요. 백제 멸망후 600여년 뒤 1281년 지어진 책 '삼국유사' 내용에 너무 얾애이다 보니 이런 농담 아닌 농담 한 거 같은데.....설화라고 해서 가치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실제 역사로 단정지으시면 안 되시죠.
첫댓글 '미륵사'의 창건과정에 있어서의 '선화공주'와 '사택왕후'에 관련된 연구는~ 아직 걸음마 단곕니다!!!ㅎㅎ 벌써부터 어느 한쪽이 "백번 옳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연구가 진행된 상태는 아니잖습니까???^^; 물론 '봉안기'라는 중대한 "고고학적 유물"이 발견되어~ 다른 쪽이 우세해졌지만, 아직 '삼국유사'의 '서동설화'를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라고 단정하기는 너무 이릅니다^^;; 특히 '설화' 중에서도 매우 구체적이고, 그 시대에 적확성을 가진 '서동설화'는 단순히 '전설'로 치부하기에는 그 의미가 결코 작지 않아요ㅎㅎ '미륵사'를 세우지는 않았더라도, 최소한 그런 인물(선화공주)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다분합니다^^;;;
그리고 오랜만에 글을 올려주셔서 잘 읽었습니다만, 전에 줄기차게 이야기 하셨던 '민족주의'에 관한 후속글은 어찌되어 가는 것인지 궁금하군요^^;
이론적으로는 백 번 옮다고 판단하기 힘들다 하더라도 이런 상황에선 '하나 보고 열을 안다' ' 싹이 노랗다'란 말이 딱 맞아 떨어지죠. 디시 인사이트 같은 막장 토론 사이트에서도 저런 ' 이거 포기 못해'식의 뻘말은 절대로 안 하는데, 말과 글로 먹고 살아야 하는 교수 입장에서 - 자기가 주장하는 학설이 부정되면 그만큼 자기영향력이 줄어드니- 더더욱 피해야 할 자폭질을 했으니 - 이런 발언은 두고두고 회자될텐데 말이죠- '선화공주 창건자'설이 논리가 빈약하기 그지 없다는 명백한 증거이죠. 그리고 솔직히 선화공주 설화가 당시 상황과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결정적 단점이 있었죠. 백제 무왕이 신라와 싸워 기록에 남은 전투수만
큰 걸로만 따져봐도 13번이나 되는데, -그래서 시호가 武자이죠- 이렇게 험악했던 두 나라 상황에서 이런 해피엔딩이 있다는 건...말이 안 되죠. 선화공주 인물 자체는 실존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지만...맛동과의 헤피엔딩 스토리는 없었다는 게 맞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건은 ............ 솔직히 빠른 시일 내 올리기는 힘들 거 같군요. 쥐마왕이 워낙 경제를 망쳐놔서 일자리 구하는 것이 우선이라서요 ㅡㅡ 그래도 약속은 지킬 것이니 차분히 기다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