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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의 특성(1)
신 30:11-20
11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12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13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14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15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16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17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18 내가 오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할 것이니라
19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신 30:11-20 /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말씀]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전한 이 명령은 여러분이 깨달을 수 없을 만큼 어려운 것도 아니요 도달할 수 없을 만큼 먼 곳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12) 그것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로 올라가서 그것을 가져다가 우리에게 들려주어 우리가 그대로 할 수 있게 하겠느냐?' 하고 한탄할 필요가 없습니다. 13) 그것은 바다 건너편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것을 가져다가 우리에게 들려주어 우리가 그대로 할 수 있게 하겠느냐?' 하고 한탄할 필요도 없습니다. 14) 그것은 여러분에게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입 속에 있고 마음 속에 있어서 언제든지 행할 수 있습니다. 15) [생명과 죽음의 선택]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다음 두가지 가운데에서 하나를 선택하시기를 촉구합니다. 생명을 택하고 복을 받으시겠습니까? 죽음을 택하고 재앙을 당하시겠습니까? 16)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전한 여호와의 명령에 여러분이 순종하여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주께서 가르치시는 길로만 걸어가고 주님의 계명과 규정과 명령을 다 지키면 여러분이 살아 남아서 점점 더 번창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이제 들어가 차지할 땅에서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17) 그러나 만일 여러분의 마음이 변하여 여호와께 순종하지 않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을 경배하고 섬기면 18) 여러분이 틀림없이 멸망한다는 것을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일러둡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요단강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결로 오래 살 수 없습니다. 19)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생명을 택하고 복을 받으시겠습니까? 죽음을 택하고 저주를 받으시겠습니까? 부디 여러분은 생명을 택하여 후손들과 더불어 오래오래 사십시오. 20) 오직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분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며 그분에게만 매달려서 떨어지지 마십시오. 그러면 여호와께서 여러분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겠다고 맹세하면서 약속하신 땅에서 여러분이 오래오래 살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명과 장수가 모두 여호와께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복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11-14)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명령은 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아닙니다. 너무 멀리 있어서 누군가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받아 올 수 있어야 지킬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바다 건너편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누군가 바다를 건너가서 그 명령을 받아 와야만 지킬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매우 가까이에 있습니다. 입에 있고 마음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능히 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복잡하고 어려운 말씀을 주지 않았습니다. 순종하려는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이해하고 순종할 수 있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단지 사람의 무지와 뿌리 깊은 죄성과 연약성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없다고 핑계 대는 것입니다.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렘 13:23). 악에 익숙한 사람도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겸손히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바르게 이해하고 순종할 수 있기를 구해야 합니다.
그는 네 생명이요 장수니라(15-20) 하나님은 사람 앞에 두 길을 주셨습니다. 하나는 생명과 복의 길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사망과 화의 길입니다. 생명과 복의 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것입니다. 사망과 화의 길은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에게 절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어떤 길이든 선택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곧 요단 강을 건너가서 땅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날이 길지 못하고 오래 살지 못했습니다. 그릇된 선택의 결과 때문입니다. 반면에 생명을 얻는다면 그것은 올바른 선택의 결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 거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땅에서 번성하며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적용: 생명과 죽음, 복과 화의 갈림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이 읽고, 배우고, 묵상하기 위한 계획을 나누어 봅시다.
미국의 저명한 물리학자로, 이시도어 아이삭 라비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오스트리아에서 출생했지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해 코넬대학교에서 물리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1944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한 기자와 인터뷰를 가졌는데 어떻게 이처럼 영향력 있는 과학자가 될 수 있었냐는 질문에 그는 대답했습니다. "그건 순전히 어머니의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저를 과학자로 만들었어요. 학교에서 끝나고 집에 오면 어머니는 항상 오늘은 어떤 것이 궁금한지를 저에게 묻곤 하셨습니다." 우리의 아이들에게 사랑의 마음과 열린 자세로 물어봐 주세요. "무엇이 궁금하니?“
< 설 교 >
초심을 잃는 이유
(Why We Lose the Original Resolution)
신명기 30:11-14 / 김영봉 목사
저는 지난 월요일 저녁부터 수요일 오전까지 펜실베니아 랭카스타에서 열린 한인연합감리교회 동북부 목회자 가족 수양회(Family Retreat of Korean UMC Pastors of the North Eastern Jurisdiction)에서 강의로 섬기고 돌아왔습니다. 우리 교회 수양회가 끝난 바로 다음이어서 일정 상 부담이 좀 있었지만, 저와는 다른 상황에서 목회하시는 동역자들을 만나 말씀을 나누다 보니, 제가 선 자리가 새롭게 보였고, 또한 목회와 교회의 본질에 대해 강의를 하고 나니, 저 자신의 마음이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초심'(初心, original resolution)은 '처음 품었던 마음'을 말합니다. 무엇인가를 시작하면서 가졌던 '좋은 마음(good intention)을 가리킵니다. 흥미롭게도, 무엇인가를 새롭게 시작할 때면 우리는 선한 뜻, 좋은 의도를 가지고 다짐을 합니다. 결혼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죽음이 우리를 나눌 때까지" 참되게 사랑하며 살기를 다짐하고 시작합니다. '대충 살다가 안 되면 그만 두지'라고 생각하고 결혼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긴, 그런 사람이 없진 않았습니다. 2009년, 미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우스 캘롤라이나 주지사 마크 샌포드(Mark Sanford)가 그 예입니다. 그는 아주 지성적이고 매력적인 아내를 속이고 오래도록 외도를 즐겼습니다. 그 사실이 드러나 주지사 직에서 사퇴해야 했습니다. 나중에 그 아내 제니 샌포드(Jenny Sanford)의 회고한 바에 의하면, 마크 샌포드는 결혼식을 할 때 결혼 서약을 하지 않겠다고 고집하여 결국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내 사전에 이혼은 없다"고 결심하고 시작해도 속절없이 깨어지는 것이 결혼인데, 그런 결심도 없이 시작했으니, 그 결혼이 온전할 수 있었겠습니까?
결혼만이 아닙니다. 공부도 그렇고, 사업도 그렇고, 새로운 직장에 취직할 때도 그렇습니다. 누구나 처음 시작할 때는 아주 좋은 의도로 시작합니다. 목회나 선교와 같이 특별한 일을 시작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불순한 마음을 가지고 시작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대개는 거룩하고 순수하고 좋은 의도로 시작합니다. 평생토록 신실한 종으로 살기를 다짐하며 그 길에 들어섭니다. 그것이 초심입니다.
그런데 그 초심을 지키는 것이 어렵습니다. 결혼식장에서 먹은 마음을 그대로 지킨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사업을 새로 시작할 때의 그 마음이면 사업에 실패하지도 않을 것이고 돈을 만이 벌어도 타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목회를 처음 시작할 때의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산다면 그 사람이 섬기는 교회가 얼마나 은혜롭겠습니까? 모든 성도들이 세례 받을 때의 그 마음으로 산다면 교회마다 천국의 향기를 풍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어렵습니다. 누구에게나 어렵습니다.
저는 이 현상을 통해 인간 본성의 이중성을 발견합니다. 무엇인가를 새로 시작할 때면 누구나 선한 의도를 품는다는 사실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거룩하게 지어졌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잘 해 보려는 의지, 제대로 살아 보고 싶은 마음, 좋은 일을 이뤄 보고 싶은 뜻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주신 거룩한 본성이 완전히 깨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그 좋은 뜻을 끝까지 유지하고 실천할 능력이 부족합니다.
인간의 본성이 죄에 오염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잠에 곯아 떨어져 있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구나! (마 26:41)
이것이 인간의 실존 상황입니다. 거룩한 열망은 있지만 그렇게 살 능력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거룩하게 살기를 포기하고, 어떤 사람은 극단적인 처방을 택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매일 번민하며 살아갑니다. 믿음의 길을 걷는다는 말은 거룩하게 살기를 열망하며 그렇게 살도록 힘쓰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길을 걷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자주, 더 심하게 이 문제를 겪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지 못하면 믿음의 길에서 한숨과 탄식으로 우울하게 나날을 지낼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신명기(Deuteronomy)는 모세의 설교 묶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의 광야 방랑을 마치고 이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 살아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계명을 전해 줍니다. 온갖 잡신을 섬기며 부정하게 사는 가나안 주민들 사이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거룩하게 살도록 준비시키려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그 모든 계명을 전달 해 준 후에 결론처럼 덧붙인 말씀입니다. 여기서 모세는 율법의 본질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내리는 이 명령은, 당신들이 실천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고, 당신들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11절)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laws and commandments)이 얼른 보면 그들의 능력으로는 실천할 수 없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것이 어렵고 부담스럽고 힘겹게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이 명령은 하늘 위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당신들은 "누가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받아다가, 우리가 그것을 듣고 지키도록 말하여 주랴?" 할 것도 아닙니다. 또한 이 명령은 바다 건너에 있는 것도 아니니 "누가 바다를 건너가서 명령을 받아다가, 우리가 그것을 듣고 지키도록 말하여 주랴?" 할 것도 아닙니다. (12-13절)
여기에서 모세는 장차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것을 변명하기 위해 들이 댈 핑계를 예상하여 미리 일침을 가합니다. 누군가 하늘에 올라가서 계시를 받고 내려 온 것처럼 신령하게 말씀을 쪼개어 풀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율법을 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핑계할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멀리 외국에 나가 학문을 배워 깊이 있게 설교하는 사람이 있다면 더 잘 순종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핑계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핑계는 통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모세는 다음 절에서 밝힙니다.
그 명령은 당신들에게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당신들의 입에 있고 당신들의 마음에 있으니, 당신들이 그것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14절)
"당신들에게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는 말씀은 "당신들의 능력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당신들의 입에 있고 당신들의 마음에 있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명령이 우리에게 생소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행할 수 없는 것을 행하라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 이상한 부담을 지우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알고 보면 인간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 명령대로 살 때 인간은 가장 자유롭고 편안하며 행복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계명들을 찬찬히 읽다 보면, 우리의 마음에는 "그래, 인간이 이렇게 살아야지! 이렇게 살면 온 세상이 행복할 거야!"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실로, 십계명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의 모든 계명은 인간으로 하여금 가장 인간답게 살게 하고 가장 자유하게 하며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미워하며 사는 것보다 사랑하며 사는 것이 더 행복하고 자유하고 인간답습니다. 악착같이 모으며 사는 것보다 이웃과 나누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쉽고 편합니다. 스스로 신이 되어 살아가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사는 것이 더 인간답고 자연스럽고 자유하며 행복합니다. 율법은 그렇게 인간에게 가장 자연스럽고 편하고 행복한 길을 안내하는 도구입니다. 그것을 따르기 위해 고차원의 학문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신비한 계시가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보통의 지능과 상식만 있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또한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사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율법을 읽으면서 "그래, 인간이라면 마땅히 이렇게 살아야지!"라고 동의하기는 했지만, 막상 그렇게 살기에는 어려움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인간이 가장 행복해지는 길임을 아는데, 실제로는 그 반대 방향으로 기울어집니다. 우리의 본성에 자연스러운 것을 외면하고 불편한 것을 찾습니다. 우리의 본성에 가장 편한 것을 거부하고 불편한 것을 따라갑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할 것에 등 돌리고 불행하게 할 것을 찾습니다. 그러면서 핑계를 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너무 어렵고, 불편하고, 무겁다고!
어디에서 문제가 생긴 것일까요? 문제는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초심'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마음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것을 열망하며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초심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면,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에게 아무런 부담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 율법이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첫 마음이 하고 싶은대로 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행하게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선택을 함으로써 초심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인간의 마음은 죄의 바이러스에 감염되었고, 저절로 하나님의 뜻을 행할 능력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대로 놓아 두면 죄의 길로 기울어지는,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려 버렸습니다. 죄가 이끄는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가려고 다짐하고 결심해 보지만, 그 결심이 얼마 가지 못하여 변질되어 버립니다. 그것을 우리는 해마다 '새해 결심'(New Year Resolution)을 하면서 경험합니다. 또한 문득문득 "초심을 잃었구나!" 싶은 경험을 할 때마다 우리 안에 있는 타락성을 확인하곤 합니다.
미국에서 발행된 초대형 베스트셀러 중에 로버트 풀검(Robert Fulghum)이 쓴 <All I Really Need To Know I Learned in Kindergarten>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여기서 풀검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교훈들은 대학의 상아탑이 아니라 유치원의 모래성에서 배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만 잘 행해도 우리 각자와 우리 사회는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중 몇 가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것을 나누어라. Share everything.
공정하게 행동하라. Play Fair.
남을 때리지 말라. Don't hit people.
자신이 어지럽힌 것은 자신이 치우라. Clean up your own mess.
내 것이 아니면 가지지 말라. Don't take things that aren't yours.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으라. Wash your hands before you eat.
변기를 사용한 뒤에는 물을 내려라. Flush
저는 풀검이 나열한 항목들을 읽으면서 감탄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각자가 행복해지고 인간 사회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더 많은 박사가 배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배워 알고 있는 기본적인 규칙만 잘 지키면 됩니다. 인생과 사회에 가장 중요한 원리는 대단한 것도 아니고 생소한 것도 아니라, 우리 입술에 있는 것이고 우리 마음에 있는 것이며 우리 손발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 안 됩니다. 고차원 방정식은 잘 풀어내면서 이 기본적인 원리를 지키지 못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더 잘 지켜야 하는데, 더 지키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나누어라? 어른들의 세상은 '승자독식'(Winner-Takes-All)의 사회입니다.
공정하게 행동하라? 어른들의 세상에서는 자기의 이익만 따집니다.
남을 때리지 말라? 법이 무서워 그렇지, 하루에도 여러 사람 때려 눕혔을 겁니다.
자신이 어지럽힌 것은 자신이 치우라? 어른들이 놀다 간 자리를 보십시오. 아이들이 놀다 간 자리보다 더 지저분하고 어지럽습니다.
내 것이 아니면 가지지 말라? 남의 것을 통째로 먹으려고 머리를 굴리고 침을 삼킵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으라? 나이 들수록 씻기를 귀찮아 합니다.
변기를 사용한 뒤에는 물을 내려라? 흘리지나 말면 다행입니다.
왜 이럴까요? 이렇게도 쉽고 이렇게도 자연스러운 것을 왜 나이 들수록 더 못할까요? 왜 지식과 능력에서는 뛰어난 어른들이 기본적인 미덕에 있어서는 어린 아이만 못할까요? 자기 생각만 하고 자기 욕심만 차리고 귀찮은 것은 아무 것도 손 대기 싫어하며 자기 좋을 대로만 살려는 어른들을 어떻게 하면 고칠 수 있을까요? 하늘의 계시가 필요한 것일까요? 외국의 지식이 필요할까요? 문명이 더 발달되어야 할까요? 더 좋은 약이 필요한 걸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도 대답은 동일합니다. 문제는 우리의 타락한 본성에 있습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이 고쳐지지 않는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토착민들이 즐기고 있던 죄악에 그렇게도 쉽게 빠져 들어간 것처럼, 그리고 작심을 하고 나서 사흘도 되지 않아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삼촌들처럼, 아무리 마음을 단단히 먹고 결의를 다진다 해도 초심을 끝까지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대로 두면, 나이 먹는다는 것은 망가진다는 뜻이요, 철 없어진다는 뜻이며, 고집불통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을 가리켜 '꼰대'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이 들수록 꼰대로 타락하도록 자신을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거룩한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 중에 최고의 이스라엘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에게는 그럴만한 조건도 있었고 또한 자신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난 지 여드레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한 사람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빌 3:5-6)
이렇게, 율법에 대해 자부하고 자신에 대해 자신하며 거룩한 사람이 되기 위해 분투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율법이 짐이었습니다. 부담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마치 매일 죽는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끊임없이 그의 본성과 충돌했습니다. 너무도 불편하고 힘겨웠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로마서 7장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15절)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19절)
여기에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며, 내 지체에 있는 죄의 법에 나를 포로로 만드는 것을 봅니다. (22-23절)
바울 사도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구원 받기 전에 자신이 겪었던 내적 갈등과 고민에 대해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는 강력한 열정이 있었지만, 그것을 행할 능력이 부족했습니다. 그런 번민 끝에 사도는 이렇게 절규합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24절)
이렇게 매일의 분투와 번민 가운데 살던 바울 사도는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도는 마침내 자신을 죽음의 몸에서 건져 주실 구원자를 만났습니다.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분과 매일 거룩한 동행을 즐겼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박히고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그의 본성이 새로 지어졌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더 이상 옛 사람의 정욕대로 살지 않고 새 사람의 거룩한 뜻을 따라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율법이 더 이상 무겁지도, 불편하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아니, 율법이 필요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리스도는 율법의 끝이다"(롬 10:4)라고 적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 안에 거룩한 생각을 불어 넣어주시며 그것을 열망하게 하시고 또한 행하게 하셨기 때문에 율법이 필요 없어진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기억나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 11:28-30)
여기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은 율법의 짐 아래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죄된 본성을 치료받지 않은 채로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 힘쓰고 애쓰는 사람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좋은 일이 무엇인지 알지만 그것을 행할 능력은 나이가 들수록 감퇴하는 우리, 무슨 일을 시작할 때면 잘 해 보겠다고 다짐하지만 번번이 초심을 잃어버리는 우리, 그리고 거룩하고 고결하게 살아보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실제로는 부정하고 추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우리는 영혼의 안식과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늘 죄책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거룩하게 살기를 포기하거나, 아니면 극심한 영적 짓눌림을 겪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진정한 해결책이 우리 주님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분과의 거룩한 동행을 살다 보면, 우리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박히고 우리의 마음은 죄의 감염으로부터 벗어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영혼의 안식과 만족을 얻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부어 주시는 생각과 열망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게 살 때 우리는 가장 인간답고 가장 자유롭고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행복합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에 대해 우리는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될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뜻을 찾고 행하는 것에 대해 관심을 접고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분들에게 하나님은 오직 능력의 공급원일 뿐입니다. 이렇게 믿고 사는 분들은 하나님의 뜻에 대해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뜻한 바대로 되지 않아서 탄식으로 기도해 본 적은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찾고 이루기 위해 죄에 오염된 본성과 씨름하며 탄식으로 기도할 이유는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스스로를 생각해 보기에 자신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면, 심각하게 자신의 믿음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그런 믿음은 우상 숭배와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뜻을 찾고 이루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뜻을 찾고 행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는 있지만 죄에 물든 본성의 힘이 너무 강하여 바울 사도가 고백한 것과 같은 영적 짓눌림을 가지고 살아가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분들이 제일 많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인 것은 알지만, 미움의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거룩하고 성결하게 사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은 알지만, 음란하고 부정한 것을 탐하는 마음에 이끌립니다. 나누고 베풀며 사는 것이 바른 줄은 알지만, 이기심과 탐심을 뿌리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생각하면 늘 죄스럽고, 그래서 하나님의 낯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만일 스스로 생각해 보기에 자신이 여기에 해당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와의 거룩한 동행을 더욱 힘써야 합니다. 주님과 온전히 하나되지 못했기 때문에 옛 사람이 아직 주권을 휘두르고 있는 것입니다. 매일 주님께 주권을 내어 드리시고, 매일 성령의 은혜를 구하시며, 주님과의 거룩한 동행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서서히 그러나 필경 영적 짓눌림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셋째, 여러분 중에는 주님과의 거룩한 동행을 매일 사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럼으로 인해 하나님의 뜻을 찾고 행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아무런 거침이 없으며 또한 가장 행복하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사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잘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의 믿음이 여기까지 가야 합니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 8:31)라는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고는 불편해서 견디지 못하는 사람, 나누고 베풀지 않고는 불편해서 견디지 못하는 사람, 낮아져 섬기는 자리에 서지 않고는 자유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거룩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육신을 입은 존재이고,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은 완전히 죽지 않았고, 악한 자는 호시탐탐 우리를 넘어뜨릴 기회를 찾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하는 순간, 크게 넘어집니다. 영적 방심과 영적 교만은 치명적인 약점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과의 거룩한 동행에 금이 가지 않도록 늘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찾고 행할 수 있으며, 그 상태에 늘 머물러 살 수 있습니다. 초심을 잃었다 하여 한탄하고 낙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매일 주님과의 거룩한 동행을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자연스럽고, 편하고, 쉽게 느껴지기를, 그리고 그로 인해 가장 행복한 삶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신 주님,
죄에 오염된 본성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 보겠다고 몸부림 쳐 온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주님의 십자가 앞에 저희의 전부를 내려 놓습니다.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아 주시고
새 사람으로 지어지게 하소서.
주님과의 거룩한 동행을 사모하게 하시어
거룩한 삶의 길을 가게 하소서. 아멘.
말씀은 가까운 곳에 있다
신 30:11-14 / 김기석 목사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내리는 이 명령은, 당신들이 실천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고, 당신들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명령은 하늘 위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당신들은 '누가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받아다가, 우리가 그것을 듣고 지키도록 말하여 주랴?' 할 것도 아닙니다. 또한 이 명령은 바다 건너에 있는 것도 아니니 '누가 바다를 건너가서 명령을 받아다가, 우리가 그것을 듣고 지키도록 말하여 주랴?' 할 것도 아닙니다. 그 명령은 당신들에게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당신들의 입에 있고 당신들의 마음에 있으니, 당신들이 그것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위태로운 삶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그칠 줄 모르는 폭우가 우리 삶에 큰 상처를 남기고 있습니다. 산사태와 홍수로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한 모든 이들을 하나님께서 품에 안아주시기를 빕니다. 불철주야 긴장 속에서 일하고 있는 공무원들과 관계자들에게도 주님께서 친히 방패가 되어주시기를 빕니다. 물가에 살아도 산 밑에 살아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세월을 살고 있습니다. 창졸간에 사랑하는 가족을 잃어버린 사람들, 큰 재산상의 손실을 입은 이들이 절망을 딛고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빕니다. 재해를 당한 이들을 곁부축하려는 이들이 많아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최선을 다해 섬기려 합니다.
레바논의 수도인 베이루트 항구의 한 창고에서 일어난 대형 폭발사고로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레바논 사람들이 희망을 잃지 않고 다시금 일어설 수 있기를 빕니다. 여러 해 전에 레바논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제게 레바논은 칼릴 지브란의 나라로 기억되는 나라였고, 시로페니키아 문명과 만날 수 있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차를 타고 레바논 이곳저곳을 둘러보면서 마음 가득 아픔이 밀려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1975년부터 시작되어 1990년에 종료된 레바논 내전의 상처가 곳곳에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아랍과 이스라엘의 전쟁을 피해 레바논으로 유입된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로 벌어진 마론파 기독교도들과 무슬림 정파 사이에 벌어진 이 전쟁은 참혹했습니다. 노변에 있는 건물에 새겨진 총알 자국, 포탄 자국, 망가진 탱크와 장갑차의 잔해가 제거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남아 있어 그 땅의 슬픈 역사를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그 나라의 평화를 구하는 기도를 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번 폭발사고로 레바논은 또 다시 큰 위험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도우심과 아울러 국제사회의 도움이 필요한 때입니다.
대형 재해가 발생할 때마다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뚜렷하게 자각합니다. 4차 산업혁명이니 A.I니, 5G니 떠들고 있지만 우리 삶은 마치 활화산 위에 집을 짓고 사는 것처럼 위태롭기만 합니다. 기후 위기에 대한 경고의 나팔은 이미 울렸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나팔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매스컴이 기후 문제를 다룰 때 사용하는 표제의 변화가 눈에 띕니다. 기후 변화, 기후 위기, 기후 재앙, 기후 붕괴...길지도 않은 기간 동안 일어난 변화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이 오실 날을 기다린다 하면서도 도무지 자기 삶을 성찰하지 못한 채, 욕망의 벌판을 겅중거리며 사는 이들을 보며 탄식하셨습니다.
“홍수 이전 시대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며 지냈다. 홍수가 나서 그들을 모두 휩쓸어 가기까지, 그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였다. 인자가 올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마24:38-39)
지금은 위기의 시간입니다. 북극의 빙하가 녹아내리고, 알프스의 대빙하도 붕괴 직전이고, 시베리아 동토층이 녹으면서 산불이 연이어 일어나고 있고, 수 천 만 명이 사는 멕시코시티는 지하수 고갈로 인해 땅 꺼짐 현상이 빈발합니다. 이런 위기는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고, 그 규모는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돌이킬 수 있을까요? 돌이킬 수 없다는 비관론이 점점 사람들의 의식을 잠식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이런 시대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바라실까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은 질서를 창조하시지만 인간은 혼돈을 빚어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기뻐하셨던 세상이 너무 많이 망가졌습니다. 우리는 피조물의 신음이 아니라 통곡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무한 발전에 대한 기대나 낙관론이 무너지면서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낍니다. 불확실성이 증대되면서 삶이 위태로워졌습니다. 우리 상식이나 이성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많이 벌어집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당혹감에 사로잡힙니다. 그 당혹감을 파고들어 사람들의 영혼을 사로잡아 노예로 삼으려는 이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거짓 예언자들입니다. 그들은 자기가 정답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자기의 판단을 맡기고, 맹목적인 추종자가 됩니다.
스스로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일수록 하나님의 뜻에 집착합니다. 존 웨슬리는 ‘광신의 본성‘이라는 설교에서 광신자들을 경계하라고 말합니다. 광신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을 겁니다. 종교적 열광, 종말의 날짜에 대한 집착, 배타적 태도 등 말입니다. 그런 것들을 제외하더라도 광신의 무리에 속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스스로 성령의 특별한 능력을 받았다’고 상상하는 사람, “생활의 가장 사소한 일들에서까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지시’를 받고 있거나 받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사람들”(<웨슬리 설교전집3>, 대한기독교서회, p.25)입니다. 그들은 인류를 경멸할 뿐만 아니라, 교만하기까지 합니다. 답을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권면을 받을 생각이 없습니다. 이야기가 통할 리 없고, 설득당할 가능성 또한 없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사람들을 오도하는 이들이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린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추종자들로부터 경제적인 이익을 얻는 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뜻은 특별한 계시를 통해서만 인간에게 알려지는 것일까요? 세상에는 하나님께서 숨기시기 때문에 알 수 없는 일도 많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의 창의적인 사랑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이름을 불러 당신의 일에 동참시키시는 주님의 은총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데 필요한 가르침을 이미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의 긴 설교 가운데 일부입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꼭 명심해야 할 것을 일일이 일러주었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친 후에 모세는 말합니다.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내리는 이 명령은, 당신들이 실천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고, 당신들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신30:11)
그 명령은 하늘 위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바다 건너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입에 있고, 마음에 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안다는 말입니다. 다만 그 뜻대로 살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고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이들을 보면서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으라“고 외치자 사람들은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반문합니다. 요한의 대답은 아주 간명합니다. 속옷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세리들에게는 ‘정해준 것 보다 더 받지 말라’ 했고, 군인들에게는 사람들을 협박하여 잇속을 차리지 말라고 했습니다(눅3:10-14). 나눔, 배려, 존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회개를 뜻하는 헬라어 ‘메타노이아’는 ‘마음 바꾸기’라는 뜻이지만, 더 나아가 “새롭게 인식하고 반응하는 것”을 뜻합니다. 간단하게 말하겠습니다. 회개란 세상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이들, 무시당하는 이들을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주님은 세상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당신께 한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실천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고, 우리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거룩한 삶은 일상 속에서 시작되고 일상 속에서 마무리 됩니다.
전면적으로 하지 못하더라도 일단 시작해야 합니다. 섬김, 나눔, 돌봄, 존중의 삶으로 개종해야 합니다. 요즘 ‘싹쓰리 열풍’이 불고 있다고 하더군요. 대중들이 좋아하는 스타인 유재석, 이효리, 비가 만든 그룹 이름이라지요? 대중들은 환호하지만 저는 그 팀 이름이 영 마땅치 않습니다. ‘하나도 남김 없이 싹 쓸어 담다/없애다‘는 뜻의 ‘싹쓸이‘를 연상시키기 때문입니다. ‘싹쓰리’라는 팀명 속에서 이 시대를 사로잡고 있는 욕망을 본다고 말하면 너무 과한 반응일까요?
∙욕망의 종살이에서 벗어나라
앞에서 기후 붕괴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기후 붕괴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세계 정치 지도자들의 결단과 아울러 사람들의 인식 변화가 필요합니다. ‘더 많이‘, ‘더 편리하게’ 살고 싶다는 마음을 일단 내려놓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창조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대로 창조된 세상을 보시고 기뻐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만들어 놓은 이 세상을 보고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창세기는 실낙원 이후의 세상을 인류의 악행이 늘어난 시간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 의지를 가지고 세상을 망가뜨려놓은 인간을 보며 하나님은 탄식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시고서,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창6:5-6)
자기 작품을 부정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마음 아픔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우리가 정녕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런 하나님의 마음 아픔에 반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는 돌이켜야 합니다. 자유 의지를 가지고 세상을 망가뜨린 것도 인간이지만, 그 자유 의지로 망가진 세상을 고칠 수 있는 것도 인간입니다. 먼저 깨달은 사람이 시작해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의 책임이 큽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본주의 세상이 우리에게서 빼앗아 간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경탄의 능력입니다. 풀꽃 한 송이의 아름다움 앞에 멈춰 설 수 있는 사람, 바람과 햇빛과 노을과 구름, 달과 별을 가만히 바라보며 마음을 고요히 할 수 있는 사람은 욕망의 종살이로부터 조금은 벗어날 수 있습니다. 소유에서 행복을 찾는 이들은 영원히 목마를 것입니다. 하나님의 숨결에 잇대어 사는 이들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배의 진실됨은?
우리 속에 그런 여백이 있어야 욕망의 벌판을 질주하는 일을 멈출 수 있습니다. 쓰레기를 만드는 삶을 부끄러워하고, 기후 위기가 가난한 이들을 더 큰 위기로 몰아넣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우리가 편리하게 사용하는 플라스틱이 뭇 동물들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즐겁게 불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대규모 절멸을 향해 가는 인류의 수레바퀴를 되돌릴 수는 없다 해도, 그 몰락의 과정에 연료를 공급하는 일은 피해야 합니다. 코로나19로 모두 마스크를 쓰는 것이 일상이 된 것처럼 불편하고 소박한 삶을 의도적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인간의 탐욕을 위해 자연을 파괴하는 일을 멈추라고 요구해야 합니다. 얼마 전에 본 외국의 만평을 잊을 수 없습니다. 물에 잠겨 손만 내민 채 구해달라고 하는 젊은이를 보며 기성세대는 ‘대단해’라고 말하며 하이화이브를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10대들의 환경운동을 대하는 기성세대의 태도를 풍자한 것일 겁니다. 이제부터 우리의 모든 선택은 우리 후손들을 염두에 둔 선택이어야 합니다.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생명과 평화의 씨앗을 심을 뿐입니다. 훗날 우리 후손들이 그것을 거둘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뜻이 우리 입에 있고 우리 마음에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상식적인 삶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사랑과 신비를 붙들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자기를 희생하여 남을 살리는 삶이 영생임을 일깨워줍니다.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의 진실됨은 이웃들과의 삶을 통해 입증되는 법입니다. 교회 바깥에서의 삶이 우리가 참된 예배자인지를 드러냅니다. 비록 서 있는 삶의 자리는 달라도 우리는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깊이 결속시키는 끈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입니다. 이 꿈은 결코 허망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우리 일상에 하나님의 마음을 끌어들이며 사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통해 세상을 정화하려 하십니다. 그 꿈을 실천하며 기쁨의 노래를 부르십시오. 우리가 먼저 생명과 평화의 노래를 시작하면 그 노래는 온 세상을 울리는 합창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손 붙잡고 기쁨을 전하는 이들이 되십시오. 아멘.
성경이란?
신 30:11-14 / 박경수 목사
목적 : 말씀은 천국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길을 보이는 지침서이다.
“침묵” “예수의 생애”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널리 알려진 일본의 엔도 슈사꾸(遠藤周作)와 한국의 함석헌 선생이 똑같은 말을 했다. 교회 목사와 교인들이 하는 말이나 행동을 보면 도저히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는데, 성경으로만 돌아가면 성경 안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것이다. 왜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일까?
성경이란 곧 하나님의 살아있는 모습이며, 능력이자 말씀이다. 성경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모습을 보며, 하나님의 능력을 확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모른다면 성경은 한낱 서가에 꽂혀 있는 장식품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는 곧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다. 믿음이란 말씀에 대한 믿음이요, 순종이다. 말씀이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맞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직접 쓰셨다는 의미는 아니다. 성경은 약 1,500년에 걸쳐 40여 명의 손에 의해 기록되었다. 하나님의 손이 아닌 사람의 손에 의해 기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을 저자(著者)라고 부르지 않는다. 저자란 자기의 생각과 의도를 글로 표현해 내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래서 성경을 기록한 사람을 기자(記者)라고 부른다. 자기 생각이나 경험에 의지해서가 아닌 성령님의 감동에 의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말씀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무엇보다도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아무도 성경의 모든 예언을 제멋대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성령에 이끌려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말씀을 받아서 한 것입니다.”(벧후 1:20~21).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기록한 것이 성경이므로 그 기록자가 누구인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성경은 그 기록자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성령님의 감동으로 써졌다는 증거가 있는가? 물론이다. 성령님의 감동으로 써졌기 때문에 성경을 읽을 때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신다. 이것이 증거이다.
나는 영화를 참 좋아한다. 창의력을, 다른 세계를 배울 수 있기 때문에 가급적 영화를 많이 보려고 하는 편이다. 그런데 아무리 좋아하는 영화라고 하더라도 두 번까지는 보겠는데, 세 번 그리고 네 번 연속해서 읽고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평론가들은 반복해서 영화를 본다. 그것이 직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100번, 200번, 평생 영화를 보는 사람은 없다.
성경은 다르다. 100번을 읽어도, 200번을 읽어도 지겹다고 말하지 않는다. 일평생에 걸쳐 반복해서 읽을 때마다 감동이 엷어지기는커녕 더욱 짙어지기만 한다. 성령님의 감동으로 쓰였기 때문에 성령님께서 계속해서 쉬지 않고 역사하시는 까닭이다.
참 묘한 점이 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부 66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1,500년 동안 40여 명의 사람들에 의해 기록되었다. 같은 시대를 산 사람도 아니고, 서로 정보나 의사를 교환할 수도 없었다.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모든 말씀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한 통일성을 지니고 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1,500년 동안 40여 명에 의해 각각의 장소에서 기록된 책은 다른 주제일 수밖에 없다. 모순투성이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성경은 진작 폐기 처분되었어야만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동일하신 분이시다. 어디에나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당연히 성경을 쓰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하나님이시기에 성경의 내용이 같을 수밖에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막 13:37).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한 시대를 초월한다. 우리 조상들의 시대를 향한 말씀이었고, 우리 시대를 향한 말씀이었고, 우리 후손들의 시대를 향한 말씀이다. 앞으로 1만년이 흐른다고 하더라도 성경은 여전히 진리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환자 심방을 갔다. 예배가 마치고 나니 서로들 한 마디 한다. 오늘 말씀은 환자를 위해 준비되어진, 미리 기록되어진 말씀 같다고. 어찌 그 환자만을 향한 기록이겠는가? 사실은 내가 먼저 은혜를 받았기에 전한 말씀이었다. 나는 나를 위해 기록되어진 말씀이라고 먼저 생각했다. 그러나 그 환자는 마치 자기를 위해 기록되어진 말씀이라고 생각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다. 게다가 저주까지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베드로의 모습에서 내 모습이 보이는 것은 왜일까? 거지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향하여 목을 놓아 외쳐 부른다. 그런데 바디매오의 모습에서 내 모습이 보이는 것은 왜일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성경은 나를 향하여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성지 순례 중 한 목사님이 가이드에게 질문했다. 저기 보이는 교회 위에 왜 새가 있느냐는 것이다. 황당한 질문에 모두의 웃음보가 터졌다. 가이드가 한 마디 하고 지나갔다. 어떤 질문도 좋지만, 그 질문은 그 사람의 수준을 나타낸다고. 그 다음부터는 질문하는 사람이 없어졌다.
종교 개혁가인 J. Calvin이 성경공부를 가르칠 때 일이다. 한 사람이 일어나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는 무엇을 하셨느냐?” 질문하였다. 물론 그것은 칼빈을 곯려주려는 의도된 질문이었다. 질문을 위한 질문이었다. 칼빈의 대답이 걸작이다. “당신처럼 질문하는 사람들을 위해 지옥을 만들고 계셨소!”
성경은 인생사를 위한 백과사전은 절대로 아니다. 성경은 목적을 갖고 있다. 그 목적에 맞는 질문을 할 때 신앙이 성장한다. 하나님을 발견한다. 그 목적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올바른 질문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엉뚱한 것을 구하다가 인생을 낭비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목적이 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하지 않은 다른 표징도 많이 행하셨다. 그런데 여기에 이것이나마 기록한 목적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 20:30~31).
성경의 목적은 오로지 한 가지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 간단하게 ‘구원’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구원을 위해 그 오랜 시간 그 많은 사람을 동원하시어 성경을 기록하게 하시고, 모으시고, 우리에게 전해 주셨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의 카메라는 오직 구원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구원에 관한 한 성경은 백과사전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당연히 성경을 읽으며 우리가 맞추어야 할 초점은 구원이다.
사과씨앗을 심으면 나무가 된다. 그리고 열매가 생긴다. 씨앗의 모양과 나무의 모양이, 그리고 열매의 모양이 각각 다르다. 상황에 따라 모양이, 형상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땅 속에 심겨지기 위해서는 씨앗의 형태가 필요하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나무의 형태가 필요하다. 나무의 형태에서는 새로운 열매를 위해 사과의 형태가 필요하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 한평생 살게 되어 있고, 그 후에는 반드시 죽는다. 이 세상을 살기 위해서는 육신이라는 몸이 필요하다. 그러나 죽은 후에는 저 세상에서 살기 위한 새로운 몸이 필요하다. 새로운 생명이 필요하다. 마치 사과처럼 말이다. 새로운 생명, 바로 구원을 얻도록 자세하게 알려주는 목적을 가진 것이 성경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도 바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자 함이다. 구원은 곧 천국이다. 성경의 목적은 천국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함이다.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던 9∙11 테러를 경험한 두 교회 이야기가 가슴에 참 오래 남았다. 한쪽에는 한인들이 많이 다니는 교회이다. 평상시에는 많은 교인들이 쌍둥이 빌딩을 드나들었는데, 다행히 그 시간에는 한 명의 교인도 그 자리에 없었다. 덕택에 모두가 무사히 생명을 구원하여 감사예배를 드렸다. 또 다른 편 교회는 미국인들이 다니는 교회이다. 그 시간에는 하필이면 교인들이 많이 그 빌딩에 들어가 있었기에 대참사를 경험해야만 했다. 그 교회에서는 예배를 드리며 이런 감사를 드렸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하는 자리에 우리 성도들이 대신 그 자리를 감당하여, 대신 죽을 수 있는 은혜를 주셨기에 감사하다고.
가끔은 끔찍한 사고를 경험한 중에 살아남아 간증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얼마나 감격적인 일인가. 죽는 지경에서 살아났으니 말이다. 살아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감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일까? 죽은 자들 중에는 죽도록 고생만 하다가 그날 천국에 입성한 사람들도 있었을 터인데 말이다. 그 사람은 이 땅에서 할 일이 있기에 하나님께서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 것이다. 간증을 하려면 그 사실을 먼저 깊이 고민했었어야만 한다. 그 고민을 하지 못한다면 그 자리에서 천국 입성을 한 사람보다 귀할 것이 전혀 없다.
믿는 자에게 있어서의 모든 죽음은 은총이다. 죽음을 통해 천국에 입성했기 때문이다. 교통사고로 죽든, 병으로 죽든, 전쟁터에서 죽든, 죽음의 형태와 장소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렇지 않다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은 베드로나 목 베어 죽은 사도 바울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비참한 자일 것이다.
베드로가 순교했다는 그 자리에 베드로 대성당이 세워졌다. 다른 곳은 다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려 사진을 찍을 수 있지만, 그곳만큼은 불허한다. 왜냐하면 기도해야 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거룩한 죽음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서 기도를 하는데, 왜 그토록 가슴이 뭉클하던지……. 예수님처럼 죽을 수 없다며 십자가에서 거꾸로 매달리던 베드로의 모습이 내 눈앞에서 보이는 것만 같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중적인 신앙 간증을 한다. 자기는 죽으면 천국에 간단다.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러나 막상 고달프면 죽기 싫어서, 구차하게라도 살고 싶어서 안달한다. 말로는 천국이 좋다고 하지만, 죽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은 하지만, 죽기가 싫은 것이다. 이 세상이 너무 좋은 것이다. 신앙의 이중 인격적 모습이다.
분명 나는, 그리고 우리는 구원 받은 자이다. 그러기에 당연히 천국을 보장 받은, 유업으로 이어 받은 자이다. 누구도 내가 가진 이것을 빼앗을 자가 없다. 마귀가, 죽음이 어떻게 내 이름으로 등기가 되어 있는 천국을 감히 빼앗을 수가 있겠는가? 그걸 알기에 김활란 박사는 자신의 장례식을 천국 입성 잔치로 치렀다. 이 땅을 살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 천국을 우리에게 보장해준다.
“그대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대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줄 수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유능하게 하고, 그에게 온갖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딤후 3:15~17).
성경을 주신 목적, 첫 번째가 천국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함이라고 한다면, 두 번째는 ‘온전한 사람’과 ‘온전한 선행’을 이루기 위함이다. 구원 받은 자는 구원 받은 자답게, 천국의 백성된 자답게,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답게 살아가야만 한다. 바로 온전한 사람과 온전한 선행을 이루어 가는 삶이다. 성경 말씀의 교훈과 책망을 통한 훈련을 통해 온전한 사람과 온전한 선행은 완성되어 간다. 구원은 믿음으로 얻지만, 구원 받은 자의 바른 삶은 중단 없는 훈련에 의해서만 가꾸어진다.
성경을 읽지도 않으면서 천국의 확신을 갖고, 성경을 읽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과 특권을 꿈꾼다면 그것은 거짓말 중의 거짓말이다.
성경은 모두 66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66권은 구약과 신약, 둘로 나뉜다. 구약은 39권, 신약은 27권이다. 구약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신약은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다. 구약은 역사서, 시가서, 율법서, 예언서로 구성되었다. 신약은 복음서, 역사서, 서신서, 예언서로 구성되어 있다.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내리는 이 명령은, 당신들이 실천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고, 당신들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명령은 하늘 위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당신들은 ‘누가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받아다가, 우리가 그것을 듣고 지키도록 말하여 주랴?’ 할 것도 아닙니다. 또한 이 명령은 바다 건너에 있는 것도 아니니 ‘누가 바다를 건너가서 명령을 받아다가, 우리가 그것을 듣고 지키도록 말하여 주랴?’ 할 것도 아닙니다. 그 명령은 당신들에게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당신들의 입에 있고 당신들의 마음에 있으니, 당신들이 그것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신 30:11~14).
2차대전 당시 독일군으로 참전했던 사람의 고백이다. 독일 군인 중 많은 사람들이 히틀러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런데 참 묘한 것은 일단 히틀러의 연설을 한번만 들으면 희한하게도 히틀러를 위해 죽을 각오를 하고 전쟁에 참전하게 되더라는 것이다. 자기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히틀러의 연설을 듣고는 참전하게 되었단다. 물론 목숨을 바칠 각오로 말이다. 입 하나로 독일 젊은이들을 열광시켜 온 세계를 상대로 하여 전쟁을 치를 정도라면 히틀러의 말은 확실히 힘이 있고, 능력이 있는 말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한 가지, 그 속에 없는 것이 있다. 참됨, 진리, 생명이 없다. 그래서 그의 뛰어난 말솜씨는 사람을 죽이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생명이 있다. 사람을 살리는 힘이 있다. 그 말씀은 멀리 있지 않다. 바다 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지키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내 입에, 내 마음에 있다. 그래서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고 세력을 확장하는 능력이 있다. 내 삶 속에서 점점 확장되어가는, 확장시키는 능력이 있다.
라디오를 통해 Volkswagen 자동차가 도난당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비싼 차라 뉴스에 보도된 것이 아니다. 쥐를 잡기 위해 과자에 독약을 발라둔 채로 앞좌석에 놓아두었는데, 그걸 모르는 차도둑이 먹을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라디오까지 동원해서 방송을 했지만 차도둑은 그것도 모른 채, 무시한 채 차만 달리고 있다. 자신을 도우려는 사람들을 피해 점점 더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구석으로만 달리고 있다.
성경은 거울이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나를 돌아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유일한 거울이다. 나를 돌아볼 때 하나님의 관점으로 나를 다듬을 수 있고,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답게 이 땅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서 공생애 활동을 하시며 말씀을 놓지 않으셨다. 내 입에 하나님의 말씀이 붙들려 있는가?
성경은 나를 붙들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가득하다. 그 음성 듣기를 원하는가? 라디오를 켜듯, 성경을 펼쳐야 한다. 들리는가? “이렇게 하여 주님의 말씀이 능력 있게 퍼져 나가고, 점점 힘을 떨쳤다.”(행 19:20).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는가?
우리와 우리 자손이 살기 위하여!
신 30:11-20 / 오정호 목사
미국의 서열1위 가구회사 허먼 밀러(Herman Miller)사의 최고경영자(CEO) 사장인 맥스 드프리(Max De Pree)는 '리더십은 예술이다(LEADERSHIP IS AN ART)'라는 그의 저서에서 "직장인들이 일에 대한 새로운 감각과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직장생활의 행복은 보장받을 수 없다. 일이란 생산과 보상, 의미와 성숙, 풍요, 만족, 치유, 그리고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이어야 한다. 또 그렇게 될 수 있다. 일은 우리가 누리는 가장 커다란 특권중의 하나이다. 일은 심지어 시(詩)가 될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일이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일 자체가 하나님이 부여하신 특권이요 축복이라는 관점이 확립되어야 그 사람의 직장생활에서 재능을 발휘하고 신앙적 자아를 실현함으로 행복과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독특한 이론입니다.
이러한 일에 대한 개념은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영적인 참된 자유와 만족, 치유, 기쁨, 열매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면 신앙생활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신앙생활은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주신 가장 축복된 특권중의 하나이며, 신앙생활은 시(詩) 이상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합니다. 신앙에서 시가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의 신앙생활의 동기가 두려움과 저주가 된다면 그 신앙생활은 참된 영적 자유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하나님께서 내게 부여하신 특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에서 점검해야 할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필요한 사람이 될 권리입니다. 나를 불러준 직장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될 권리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 꼭 필요한 존재, 사랑받는 존재가 될 권리입니다. 둘째, 참여할 권리입니다. 직장의 전략과 방향을 알 권리가 있는 것처럼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 권리입니다. 셋째, 자신의 미래를 직접 통제할 권리입니다. 다른 유력한 사람이 아닌 내 자신이 내 삶의 미래를 직접 열어갈 권리가 있습니다. 넷째, 책임과 헌신을 감당할 권리입니다. 선택한 직장에서 책임을 지고 최선을 다하듯이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주님께 충성하고 헌신할 수 있는 권리입니다.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마치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땅에 들어가기 직전, 모세는 신명기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하게 풀어 가르칩니다.
신명기는 하나님을 섬길 특권을 가진 백성들이 과거에 받았던 복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열리는 영광스런 축복의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세 개의 메시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세 개의 메시지 중 세 번째 메시지의 결론 부분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복을 받기 위한 원리를 제시합니다.
1. 은총의 기회를 허락해 주심으로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기회의 제공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을 알고 하나님의 복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에서 해방된 몸의 구원뿐만 아니라 약속하신 가나안땅에 정착할 수 있는 삶의 구원까지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은혜를 베푸신 이유는 첫째,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둘째, 축복된 미래를 열어감으로 열방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이 받는 복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이 구원받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답게 성숙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입니다.
2. 기회는 올바른 선택의 과정으로 채워져야 합니다(14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 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14절).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첫 번째 원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주신 말씀이 올바른 선택의 원리를 제시할 뿐만 아니라 계속적으로 그 원리가 효력을 가질 수 있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원리는 사랑의 동기입니다.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16, 20절). 올바른 선택을 하는 동기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동기가 되지 않는 일은 유익이 없고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선택의 동기가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의 동기로 행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미래를 확실하게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한 이름 없는 이방여인이었던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사랑했기 때문에 고향인 모압땅을 떠나 먼 타국인 유대땅까지 함께 갈 것을 결심합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룻기1:15-16). 룻의 선택은 하나님 사랑으로 연결되었습니다. 룻의 즉각적이면서 결정적인 선택은 그녀의 후손가운데 다윗 임금이 출생하고 메시야가 탄생하시는 영광된 가문이 되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신명기를 통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선택한 모든 결정에는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래서 신명기를 '선택의 신학'으로 채워진 성경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남편과 아내, 자녀들을 위한 선택의 동기가 순수한 사랑이 된다면 그 결정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탁월한 결정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선택은 인격적인 믿음의 반응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지성적으로 생각하고 의지적으로 결단해야 합니다. 마치 자연이 우리에게 풍성한 수확을 주지만 그 과정에 농부의 땀과 경작의 수고가 필요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를 실천하여 여러분의 남은 생애를 올바른 선택으로 채우시기 바랍니다.
3. 우리와 우리 자손이 살기 위한 선택은 하나님의 복주심으로 연결됩니다(19절).
선택에는 반드시 결과가 따릅니다. 이 시대에 정치적 선택이든지, 경제적 선택이든지, 영적 선택이든지 그 열매는 당대뿐 아니라 자녀세대에 반드시 그 결과가 따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과 복을 선택하면 반드시 우리의 자녀들에게 복이 임한다는 틀림없는 사실을 보장해 주십니다.
물론 모든 선택이 당대에 환영받는 것은 아닙니다. 1959년 미국의 49번째 주로 편입된 알래스카는 원래 러시아 땅이었습니다. 미국 국무장관이었던 수어드는 알래스카의 경제적 잠재력을 발견하고 불과 720만 달러에 우리나라 면적의 7배가 넘는 알래스카(153만k㎡) 땅을 사들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알래스카의 잠재적인 가치를 몰랐던 언론과 국민들은 수어드를 비난했습니다. 심지어 알래스카를 '수어드의 아이스박스'라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알래스카는 엄청난 지하자원의 보고요 수산업의 기지이며 군사전략의 요충지가 되었을 뿐 아니라 광활한 산림은 그 가치를 다 따질 수 없을 정도입니다. 수어드는 빗발치는 비난에도 당대뿐 아니라 다음세대를 위해서 위대한 선택과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여러분의 결단은 무엇입니까? 개인의 올바른 선택은 자신의 미래와 가문의 미래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의 복주심이 따릅니다.
"우리와 우리자손이 살기 위하여" 우리는 어떤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합니까?
첫째, 도전하는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14절). 실천적인 신앙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은 어떤 환경에서든지 할 수 있다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은 주를 기쁘시게 하고 이웃에게 축복을 안겨주는 가정이 되고 우리교회는 하나님과 세상을 향해 불가능을 극복해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 선택의 탁월성을 연마해야 합니다. 위대한 선택은 무수한 날들의 작은 선택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리차드 포스터는 그의 탁월한 저서 '기도(PRAYER)'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기도의 히말라야를 정복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먼저 당신의 앞동산부터 오르라" 기도의 원리는 선택에도 적용됩니다. "일상의 작은 선택이 신앙의 위대한 선택으로 연결됩니다" 선택은 시간의 산물이 아니라 인격과 경험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올바른 선택의 당사자가 되십시오. 믿음의 결단을 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과 후손들의 삶이 영광된 삶이 되도록 복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미래가 하나님의 복주심 가운데 힘있게 전개를 합시다. 비록 오해가 있다할지라도 묵묵히 우리의 길을 걸어갑시다. 우리 새로남 교회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며 주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는 교회가 되게 합시다.
어떤 일을 하든지, 어느 곳에 있든지, 언제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높이 들고 있는 깃발에 씌여진 격문은 "우리와 우리 자손을 위하여!"입니다.
잘 믿는 일에 투자하라
신명기 30:15-20 / 김삼환 목사
성경은 온 인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요, 축복의 말씀이요, 구원의 말씀입니다. 물건을 제대로 사용하려면 사용 방법을 알아야 하듯이 인간의 삶도 살아가는 방법을 알지 못하면 불행해지고, 고통을 당하게 되고, 무거운 짐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사는 길은 하나님 한 분만을 잘 섬기며 경배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이 만물의 창조자시요, 주인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나아갈 길을 알고 계시며, 우리를 도와주시고 축복하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건강도, 사업도, 권력도, 미래도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자녀의 앞날도, 나라의 미래도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내 공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수고하고 땀 흘릴 뿐이며, 햇빛을 주시고 열매를 거두게 하시는 분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잘 믿으면 자자손손 복을 받고 만사형통할 줄로 믿습니다.
인류 역사를 볼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나라는 복을 받아 잘되었지만, 하나님을 저버린 나라는 결국 멸망하게 된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일에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해야 합니다. 시간과 정성을 바쳐서 하나님을 잘 섬기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히 잘되게 하시고, 천대에 은혜를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축복받는 비결
요즘은 투자하는 시대입니다. 부동산이나 각종 예금, 연금, 주식, 채권, 펀드, 금, 석유, 곡물 등 모든 것에 투자합니다. 정치도 교육도 투자입니다. 외모에도 많은 돈을 들여서 투자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투자는 속임을 당하거나 망하는 경우가 많고, 실망하고 후회하는 일도 참 많습니다.
유럽에서 시작된 경제위기로 말미암아 주식에 투자했다가 손해를 본 사람들이 많습니다. 부동산 경기가 어려워져서 자살자의 숫자가 IMF시대만큼 늘어났다고 합니다. 자식에게 모든 것을 바쳤다가 자식의 배반으로 섭섭함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는 노인들도 많아졌습니다.
미국의 경우에는 주식이나 펀드에 투자했다가 학교 운영이 어려워진 대학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며칠 전 신문에는 투자를 잘하던 미국 최고의 은행이 50억 달러나 손해를 보게 되었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한번에 50억 달러의 손해가 났으니 기가 막힐 일이지 않습니까? 세계적인 투자 전문가들도 실수를 많이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투자한 만큼 오히려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치에 투자했다가 망한 가정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세상의 투자는 투자한 만큼 거두지 못하지만 분명히 성공하는 확실한 투자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투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투자하면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영적 불경기가 없는 하나님께 투자하면 속는 일도 없고 손해 보는 일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투자하는 것은 가장 확실한 생명보험에 드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보험에 들지 않아도 노후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힘이 쇠약해져서 지팡이를 의지할 때까지, 백수가 될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와 함께하시며 끝까지 지켜 주십니다.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나와 내 자녀를 지켜 주십니다. 하나님을 향한 투자는 종신보험이요, 완전한 신탁이요, 영원한 적금입니다. 천국에 가기까지 자자손손 영원히 이어지는 축복은 하나님만 이 주시는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투자하는 만큼 각자의 분량대로 복을 주십니다. 성경에 보면 아합 왕을 죽인 예후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4대에 걸쳐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는 복을 주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서 하나님께서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을 다윗 왕의 자손으로 오게 하시고, 다윗의 이름이 영원하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의 국기에는 다윗의 별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4천 년 동안 모든 것을 바쳐 하나님 앞에만 투자함으로써 세계 어디에서나 축복받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새로운 유대인이 되고, 거룩한 선민이 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투자하면 다윗과 같이 천대의 복을 누릴 줄로 믿습니다.
신명기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모세의 고별설교이자 유언입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하나님만 잘 섬기면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어 어떤 대적도 질병도 없게 하시고, 세초부터 세말까지 항상 함께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지켜 주시면 누구든지 존귀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공부도 열심히 하고, 일도 열심히 하고, 좋은 인간관계도 맺어야 하지만 하나님을 잘 섬기는 일을 주업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통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영원한 복을 받습니다. 출애굽기 20장 6절에 보면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에 투자하여 자자손손 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확실히 성공하는 투자
기도하는 것도 투자입니다. 열심히 기도하면 기도하는 만큼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기도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십시오. 주일성수 역시 투자입니다. 주일을 철저하게 지키면 하나님께서 높여 주십니다. 십계명 가운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이 따라오는 계명은 두 개밖에 없습니다.
첫째, 안식일을 잘 지키면 복을 받습니다. 이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복이 있는 날입니다. 엿새 동안 일하고 안식일을 지킴으로써 이날 복을 받으면 엿새 동안 복이 되는 것입니다. 엿새가 다 평안하고, 형통하고, 행복한 날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부모를 잘 섬기면 복을 받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이 복 받을 일은 하나도 하지 않으면서 축복을 받으려고 하니 안 되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기쁘시게 하며 끝까지 잘 공경하고 섬기면 큰 복을 받습니다.
말라기 3장 10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생활에 충성하고 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투자입니다. 하나님 앞에 시간을 바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시간을 주시고, 물질을 바치면 하늘과 땅에서 영원히 잘살도록 물질의 복과 건강의 복을 내려 주시고, 주일을 잘 지키면 우리의 삶에 평안과 안정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만 잘 섬기면 어떤 저주도 받지 않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온갖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저주받지 않고, 슬피 울며 부르짖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잘 믿는 것이 가정을 지키며 행복하게 사는 길이요, 자녀를 잘 양육하는 길이 요, 높은 자리에 올라가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끝까지 잘되는 길입니다. 시편 75편 6-7절에 보면 “무릇 높이는 일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쪽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요셉을 높여 주셨습니다. 잠깐 동안이 아닌 영원한 복을 내려 주시는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 교회가 창립 32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개척하고 얼마 후부터 장학관을 세워 지금까지 4천여 명의 학생들을 돌보아왔습니다. 우리 장학관 출신들이 세계 곳곳에 진출하여 많은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소년소녀가장과 홀로 되신 목회자 사모님들을 위해 아파트를 지었으며, 이번 창립기념일을 기해서 일본군위안부 가족과 다문화가정을 위한 건물을 마련하여 오는 10월에 문을 열 예정입니다. 우리는 복을 받을수록 더 많은 일에 헌신하고 낮아져야 합니다. 선교와 봉사와 구제와 나눔에 더욱 힘쓰며, 서로서로 받은 복을 나누며 다 함께 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더욱 앞장서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열심히 투자합시다. 남은 생애에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바쳐서 충성하면 한 사람도 후회하지 않을 줄로 믿습니다. 신명기 5장 29절에 보면 “다만 그들이 항상 이 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이 세상에서 아무도 해칠 자가 없으므로 두렵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고 자유함을 얻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이 나라와 이 민족이 복을 받고, 우리의 가정과 온 세계에 영원한 축복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기도
우리를 축복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일에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을 바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의 헛된 일에 몰입하거나 투자하는 성도가 한 사람도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잘 경외하고 섬기면 자손만대에 복을 누릴 줄로 믿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을 잘 섬김으로 세계 어디에서나 복의 근원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
신명기 30:15-20 / 성흥모 목사
오늘은 ‘부흥의 시작-신앙고백’이라는 영상을 보신 후에 말씀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주간에 WMTC(World Mission Training Center) 선교사수련회에 강사로 다녀왔습니다. 개회예배와 폐회예배에서 설교하였고, 첫째 날 저녁 부흥집회를 인도했습니다. 이번 선교사수련회에는 중국에서 추방된 선교사 가정이 4가정이 있었습니다. 선교사님들의 부인 선교사들이 중국의 선교를 위하여 기도하는데,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던지, 기도하는 모습이나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음성을 다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추방될 때에 겪은 어려웠던 일들을 보고하는데, 정말 가슴이 메어지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선교사님의 어린 자녀들이 보는 가운데, 공안들에게 끌려가서 종일 심문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선교지를 옮기고 사역하는데, 홍콩으로, 마카오로, 태국의 치앙마이로 미얀마로 선교지를 옮기고, 동남아시아에 나와서 살고 있는 많은 중국인들에게 전도하고, 중국교회의 현지사역자들을 불러내어 재교육에 힘쓰고, 장기적인 신학교육을 위하여 장신대의 분교 설립을 위하여 힘쓰고 있었습니다. 토요일 아침에 돌아올 계획이었지만, 교회에 바쁜 일들이 있어 하루 일찍 돌아왔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는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압평지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이제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선택하셨습니다. 400년간 노예생활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떠나서 기나안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면서 바로에게 말을 붙였습니다.
출5:1에서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하나님 앞에서 절기를 지켜야 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이집트를 떠나겠다고 하였습니다.
출10:9에 모세는 여호와 앞에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떠나겠다고 선언합니다. “모세가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인즉 우리가 남녀노소와 양과 소를 데리고 가겠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는 것은 그곳, 가나안, 약속의 땅, 축복의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하나님 앞에 제사를 잘 드리고, 하나님의 율법을 말씀대로 신실하게 살기 위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고 하였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은 가서 잘 살고, 번성하게 살기 위함이 아니라, 그런 축복은 다음 순서이고, 있으면 더 좋고 없어도 문제가 될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잘 믿고 경배하고 제사하고, 절기를 잘 지키려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고 합니다.
우리가 돈을 열심히 벌고, 사업을 잘 하고, 안정되게 살려는 것은 그것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잘 믿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온전히 예배하는 삶을 살기 위함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예배 잘 드리기 위하여 열심히 살고, 잘 살고, 안정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제 모세를 통하여 고별설교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놀라운 축복을 누리면서 살아가기를 바라시면서 한 명령을 주시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놀라운 축복을 누리고, 복된 삶을 살아가라고 한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을 주는 목적은 그 율법을 잘 지켜 행할 때에, 잘 살고, 또 오래 살고, 복된 인생을 살아가라고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가 그의 자녀들에게 잘 살고 복된 인생을 살기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김기원목사님이 ‘사랑하는 딸에게 주는 77가지 지혜’, “아빠의 러브레터”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품격 있는 여성이 되어라, 지혜롭고 따뜻한 말을 하여라. 절제의 훈련이 필요하다. 하나님 제일 중심으로 살아라. 교만하면 덕을 잃어버린다. 가치있는 일에 부지런하여라. 목표를 세우고 살아라” 아주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 77가지 지혜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친구보다 부모의 말이 더 깊이 있단다.”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사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고별설교의 말씀을 주시고 있습니다. 고별설교는 꼭 들어야 하는 말씀의 진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15)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앞에는 생명과 복도 있고, 사망과 화도 있습니다. 생명과 복을 생각하면 좋습니다. 사망과 화를 생각하면 겁나는 것도 사실입니다.
보라, 보아라, 눈여겨보라는 뜻입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라, 주목하라고 하십니다. ‘보라(라아)’는 보다, 바라보다, 조사하다, 느껴보라, 주목하라는 뜻입니다. 이 ‘보라’는 말 ‘라아’에서 ‘선견자-로에’, ‘선지자-나비’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주목해보고, 판단해보고, 비교해보고, 관찰하고, 눈으로 확인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각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건을 볼 때에, 그 사건이 주는 교훈이 무엇이며,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깨닫게 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볼 때에, 섭시(?視)해야 합니다. 섭이란 속삭일 섭, 시는 볼시입니다. 속삭이고, 소곤거리고, 조용히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어야 하고, 그런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 나에게, 이 자리에서, 주시는 하나님을 음성을 들어야겠습니다. 그 때, 그곳의 그 사람들이 아닙니다.
믿음의 선진들, 믿음으로 살아온 조상들을 눈여겨보면,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해답이 보입니다. 악하게 살고, 비명에 횡사한 사람들을 보면 인생은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는 정답이 나옵니다. 보라, 보아라, 눈여겨보라, 주목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가는 길에 두 가지의 결과를 놓아두셨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길에는 믿음의 길과 불신의 길, 단 두 갈래 길만이 있을 뿐입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마7:13-14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인생길에는 두 갈래의 길이 있습니다. 풍성한 생명, 번영의 복된 삶이 우리 앞에 놓여 있고, 사망과 화, 즉 파멸과 저주의 삶도 놓여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두 가지로 대별되는 결과를 우리 앞에 내어놓아주셨습니다. 우리 앞에는 생명과 행복, 그리고 죽음과 저주의 불행이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생명과 행복, 그리고 죽음과 불행을 함께 놓아주셨다는 말씀에 불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 인생들 앞에 천국만 놓아두셨다고 하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은총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지옥과 심판도 있어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천국을 은총으로 알게 됩니다.
천국이 좋은 곳입니다. 예, 천국은 축복이요, 좋은 곳입니다. 행복입니다. 그러나 지옥은 나쁜 곳입니다. 나쁘다는 말은 ‘나 뿐이다’는 말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지옥은 이기적인 사람들이 모여 살기에 지옥입니다. 행복한 천국이 있으니, 지옥은 나쁜 곳이요, 저주받은 곳입니다. 이 세상에 지옥만 있다면, 누구나 지옥에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곳이 선택의 여지가 없다면 나쁜 곳이 아닙니다. 누구나 다 들어가야 하는 곳이 지옥이라면, 좋은 곳인지 나쁜 곳인지 모릅니다. 비교해볼 수 없으니, 좋은 곳도 좋은 곳이 아니요, 나쁜 곳도 나쁜 곳이 아닙니다.
우리 앞에 생명과 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망과 화도 있지만, 결심하고 결단하고, 생명과 복을 선택하여 잘 살고 번성하시면 됩니다. 우리가 가는 길에 사망과 화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지 말고, 생명과 복을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 우리에게 더 유익하게 하시고, 좋게 하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가진 모세오경의 마지막 책, 신명기에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신명기에는 수없는 명령과 약속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명기4:1에서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할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
구약 신명기에는 “그리하면”이라고 하신 말씀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신명기5:32-33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복이 너희에게 있을 것이며, 너희가 차지한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들은 수없이 찾아보게 됩니다.
“그리하면”이란 말은 목적, 의도, 의향, 의지, 결과를 말하려는 접속사입니다. “~~ 을 위하여” “~ 때문에” 의도와 의향, 목적을 나타냅니다.
“그리하면”이라는 공식은 과연 하나님의 절대적인 말씀입니까, 아니면 경계의 말씀으로 주신 말씀이냐 하는 의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으면 복을 받는다고만 주장하면 그런 신앙은 샤머니즘에서도 말하고, 우리가 주의하고 경계해야하는 기복신앙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으면 무조건 복을 받는다는 말은 일편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번영의 신학을 가지고 있으며, 번영의 신학을 경계하기도 합니다.
우리 하나님을 복 주시는 하나님, 무슨 기도든지 다 이루어주는 하나님, 무골호인의 할아버지와 같이 손자가 떼를 쓰기만 하면 다 좋은 것으로 들어주시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란 존재가 우리 전래동화에 나오는 도깨비와 같이 방망이를 휘두르면서 ‘금 나와라 와라 뚝딱, 은 나와라 와라 뚝딱’ 말하면 무조건 금이 쏟아지고, 은이 쏟아지게 하시는 그러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계적인 갑부집의 집사장처럼 ‘1억만 내오시오’ ‘예, 여기 1억을 대령했습니다’라고 말하고 실행하는 그런 집사장이나 청지기가 아닙니다. 그런 종교는 샤머니즘이요, 기복종교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거룩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역사를 심판하는 엄위하신 하나님으로 알지 못하고, 만능의 열쇠를 가지고 계셔서 무슨 간구든, 다 들어주신다고 말하는 것은 진정한 기독교가 아니요, 우리가 믿는 창조주 하나님이 아닙니다. 기도요,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가 진정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재물을 하나님보다도 더 높은 우위에 올려놓고 사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 예수님을 믿는다는 많은 성도들이 자기들의 이기적인 욕심을 이루어내는 목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려고 합니다. 회개의 기도가 사라진지 오래되었습니다. 성황당에 가서 빌던 마음 그대로, 예배당에서 와서 비는 정도에서 더 이상 자라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의 실체를 알아야 하고, 죄를 아파하면서 회개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회의 강력한 주제는 구원, 죄, 고통 이런 것들인데, ‘솜사탕 복음’을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유명한 신학자 마이클 호턴(Michael Horton) 교수는 ‘긍정의 힘’을 말하는 조엘 오스틴의 세계관을 ‘솜사탕 복음’이라고 혹평하였습니다. 긍정신학의 핵심은 하나님은 우리가 소원하는 대로 주시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긍정신학이나 만사형통의 신앙은 이단입니다. 그런 긍정신앙인들은 정통기독교를 왜곡시켰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긍정을 말한 사람이 물질 축복 때문에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종교는 전적으로 하나님에 관한 것인데, 종교를 우리에 관한 것으로 끌어내리고, 사교로 만들었습니다.
오늘은 정말 복을 받는 비결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복된 삶을 사시면 그것이 복입니다. 복되게 사는 그의 삶이 복이요, 복을 받게 됩니다. 그는 이미 복을 받은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많은 관점이 있습니다.
1)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은 오로지 복 받기 위함입니다. 성경에는 많은 율법과 명령과 규례와 율례들이 있습니다. 복 주신다고 했으니, 복종하고, 복 받으려고 믿습니다.
2)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은 두려운 마음에서 마지못하여 복종합니다. 모든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엄위하신 말씀이요, 하나님의 지엄한 명령이기에 지킬 수밖에 없다고 하면 그것은 참 순종이 아니라, 기계적인 복종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에 벌을 무서워하여 율례를 따라 살아갑니다. 역사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시고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던져 사른다는 생각으로 두려운 마음으로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가장 좋은 관점은 3) 사랑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가 말씀대로 살아가려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대하고 지켜야겠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대로 살아갑시다.
1.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16절의 말씀입니다.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명령보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권고가 먼저 나옴을 알아야 합니다. 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우리 성도들의 마땅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사실 경건도 무의미합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자연스러운 외적인 표현입니다. 사랑하는 자는 사랑의 진실성을 입증할 때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됩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들어줍니다. 사랑하면 분별력을 잃을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몰입합니다.
2. 그 모든 길로 행하며- 동행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삶, 곧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누구와 함께 동행하려고 하면, 자기를 낮추어야 하고, 자신을 말씀으로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암3:3)라고 했습니다.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5:21-24)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고 동행하였습니다. 에녹은 365세를 살았는데, 당시 900세를 넘게 살 때에 한 1/3 정도 살아간 사람이라면 청년시절에 죽은 사람이었는데, 그는 짧지만 굵게 살아간 사람입니다.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습니다. 우리가 일생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좋아서, 하나님과 함께 있고,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길이 좋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3.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준행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도 말씀대로 살아가는 행동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명령과 규례와 법도는 모두 동의어로 반드시 지켜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다양한 표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지 말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말씀대로 준행하여야겠습니다.
괴테의 시에 ‘경고’라는 시가 있습니다. “너는 아직 멀리서 방황하는가?/ 보라, 좋은 것은 바로 가까이 있다./ 행복은 차지하는 방법만 배울지니/ 행복은 언제나 거기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행복은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우리 앞에는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가 놓여 있습니다. 우리가 번성하여 살고, 장차 남은 생애에 땅을 차지하고 살고, 건강하게 장수하고, 복을 누려야겠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 의지하여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준행하면서 살아야겠습니다.
오늘 말씀에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고 하셨습니다. 조금은 이기적이란 말로 들릴 수 있습니다. 복 받기 위하여,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워 말씀대로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좋아서,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하여,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된 삶을 살고 복을 받은 사람으로 살고, 복되게 살아서 복 받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두신 것들
신명기 30:15-20 / 배 혁 목사
‘보통 아빠의 보통 아닌 육아’라는 책에, 저자가 첫돌을 맞은 아이의 돌잡이를 준비하는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저자가 아내에게 묻습니다. ”돌잡이때 윤이가 뭘 잡으면 좋겠어? 청진기, 판사봉 이런 건 별론데. 직업이나 돈 말고 우리가 심어주고 싶은 가치를 돌잡이 캐릭터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 그리고 부부는 돌잡이를 준비하며 아이에게 심어주고 싶은 가치 여섯 개를 캐릭터로 만들었습니다. 정의(슈퍼맨), 유머(유재석), 건강(에너자이저), 성실(박지성), 인격(김대중), 창의(스티브 잡스). 남편은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윤이가 어떤 걸 잡으면 좋겠어?” “아 어렵다. 뭐 하나 뺄 게 없네.” “아하! 아무거나 잡아도 줄줄이 다 딸려 올라오게 실로 몰래 묶어 놓는 거야!” “우와 완전 기발한데? 여보는 진짜 천재야!”
이것이 보통 부모의 마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녀가 성장하면서 세상에서 잘되며 있는 복을 다 누리며 살아가기를 원하는 마음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은 곧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고 대기하는 이스라엘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셨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간의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아 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놓여진 것이 무엇인지를 그들에게 말해 줍니다.
모세는 그 동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이러한 풍요를 누리면서 살아갈 것을 기대했습니다. 가나안 땅에만 들어가면, 애굽에서의 430년의 노예생활과, 40년간의 광야 생활을 보상받기에 충분한 복이 그들앞에 보장되어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대와는 조금 다른 말을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무엇을 두었는지를 말해 줍니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가나안 땅은 그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복과 생명이 보장된 만사형통의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에서 사망과 화를 만날 가능성이 여전히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망과 화를 말씀하신 것은, 그들이 사망과 화를 경험하는 삶이 아니라, 복과 생명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라고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우리의 앞에도 하나님은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앞에 두셨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이들은 생명과 복을 누리는 이들이 있고, 어떤 이들은 사망과 화를 당하는 이들이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이들이 복과 생명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 방법을 알지 못하기도 하고, 알아도 그 방법대로 살지 않기 때문에 저주와 화를 당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앞에 놓인 복과 저주, 생명과 사망 가운데서, 하나님은 우리가 복과 생명을 누리도록 하시기 위해 어떤 방법을 주셨는지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20절에 보면 명확히 나와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생존하고 번성하게 되고 복을 받기 위해서 해야 할 일 세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라. 청종하라.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1. 먼저 하나님의 복을 받고 잘 사는 길은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랑하지 말아야 할 대상에게 마음을 빼앗겨서 엉뚱한 것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에 살고 있었던 원주민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살면서도 그 복을 누리지 못하고, 그 땅에서 쫓겨나는 것도 사랑해야 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우상을 만들어 그것을 사랑하며 섬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복의 근원이시라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생명을 주시고, 또한 복을 주시는 분이라는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말라고 해도 그 어떤 것보다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믿지 못하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돈이 나의 복이고 생명이라고 믿는 이들은 돈이 없으면 못산다고 믿고 살아갑니다. 배우자를 너무나 사랑하거나 자녀를 너무 사랑하게 되면, 그들이 없으면 죽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돈이 없고,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면 죽을 것 같지만, 막상 그러한 것들이 없어도 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물질과 사람은 우리에게 복과 생명을 주는 주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없으면 죽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고, 또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에도 다른 것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강조합니다. 신명기 6장에서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그 방법까지도 말해주고 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적당히 사랑해야 할 분이 아닙니다. 시간되고 여유가 되면 사랑하고 그렇지 않으면 뒷전으로 밀어버리는 사랑을 하나님에게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서 사랑해야 할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적당하게 사랑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시기까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죄인된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11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고 하셨습니다. 목자가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단 한가지 이유가 있다면, 그 양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목자되신 예수님은 십자가위에서 양된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증명해 보여 주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나를 사랑해서 목숨까지 바치신 분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텐데,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복과 생명을 주신다고 하셨으니 더욱 감사한 일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드려, 심지어 생명까지 드려서 사랑해야 할 분인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고, 또한 그들에게 생명과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2. 두번째로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라”고 명령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말을 잘들어주는 사람이 좋습니까? 아니면 사사건건 이렇게해라 저렇게 하라고 지시하는 사람이 좋으십니까?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말을 잘 들어주고 자신이 해달라는대로 해 줄 것 같은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우상을 만들고 그것에 빠지는 이유가 그 이유입니다. 우상은 말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우상을 만들어 놓고, 자신들의 말을 우상하게 하면, 우상이 그 말들을 이루어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면으로 볼 때 하나님이 외면을 당하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향하여서 지속적으로 말씀하시고, 사람들은 그 말씀을 청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때에 복을 받고, 잘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16절에,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고 합니다. 명령과 규례, 법도는 모두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명령으로 들어야 합니다. 명령은 강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왕이시고 주인이심을 인정할 때에 그 명령 his commandments 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규례는 his statutes 법령, 규정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삶의 법으로 여길 때에 지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법도 His judgements 를 지키라고 합니다. 법도는 재판장의 판결을 의미합니다. 내가 내 삶의 재판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고 믿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습니다.
모세는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키다’라는 말은 ‘솨마르’라고 해서, 본래 의미는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다.’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이 소중하게 여겨지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8:11-12절에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농부가 씨를 뿌릴 때에 새가 와서 그 씨를 먹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해석해 주십니다.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의 소중함을 아는 존재가 있습니다. 마귀입니다. 이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이 복이고 생명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질 때에 그것이 그 마음에 뿌리내리고 열매맺지 못하도록 낚아채 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사람들은, 그 말씀의 가치를 알고, 울타리를 치고 그 말씀을 잘 지켜내야 하는 것입니다. 악의 세력들이 그 말씀을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지켜야 합니다. 내 생각과 감정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서지 못하도록 내 주권을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합니다. 마음의 밭에 그것을 간직하고 잘 지켜 나갈 때에 그것이 뿌리를 내리고, 줄기가 솟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라고 하셨고, 또한 미간에 붙여서 표를 삼고, 집 문설주나 바깥 문에 기록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시험을 보기위해서 공부할 때에 그 답을 외우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쓰는지 모릅니다. 노트에다가 반복해서 글을 적고, 그리고 입으로 몇번씩 반복하면서 답을 외웁니다. 그런데 그 어떤 공부보다 열심히 해야 할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저는 몇년 동안 일대일 제자양육 성경공부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성경공부에 참여하는 교인들은 매주 2구절을 암송해야 하는데, 그 말씀을 암송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십니다. 어떤 분은 그 말씀을 열번 이상씩 쓰시는 분도 계십니다. 그리고 어떤 분은 운전석 대쉬보드에 성경구절을 붙여 놓고 지속적으로 암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암송하고 마음에 두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복과 생명을 받는 방법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사람 사이에도 자신이 말한 것을 우습게 여기면 기분 안 좋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의 말씀을 경청하지 않으며, 자신의 생각과 말을 앞세우는 이들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여기며, 그 말씀을 마음에 두고 행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 삶을 복되고 잘되게 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3. 또한 하나님의 복을 받고 잘사는 길은, 하나님의 의지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고 걱정하는 것 중에 하나는,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들을 의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생활이 힘들었지만 유익했던 것 중에 하나는, 광야에서는 하나님 한분만 의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다고 하나님께 불평하기도 했지만, 결국 하나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대적자들이 나타날 때도 결국 하나님의 힘을 의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에 들어오니 풍요하게 되니까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도 다른 것들을 의지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만나를 안주셔도 자신들이 농사지으면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옷과 신발이 헤어지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만들어 입고 신으면 됐습니다. 심지어 그들이 필요로 하면, 신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우상을 만들고 하나님을 버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풍요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속에는 하나님 말고도 의지할 만한 것이 많아 보이고, 스스로의 능력을 의지하면서 살아가기도 합니다.
이럴 때에 우리에게도 잠언기자와 같은 기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굴이라는 사람은 잠언 30:7-9절에,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사람이 부하게 되면 필요한 것을 스스로 구하고 해결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보니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심지어 하나님이 없다고까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과 생명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의지하라’는 영어는 Hold fast 로 본연하고 있습니다. 단단히 붙잡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의지하는 존재를 붙잡습니다. 돈을 의지하는 이들은 돈을 꽉 붙잡습니다. 사람을 의지하는 이들은 사람을 꽉 붙잡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들은, 하나님을 붙잡기 위해 날마다 하나님 앞으로 나옵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는 이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 것을 의지하기 위해서 좇아가는 이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붙잡기 위해 기도하며, 예배하며 주님께 나오는 이들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소개했지만, 그곳에서는 하나님의 복뿐만 아니라, 저주와 멸망도 놓여 있음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스라엘 백성이 복과 풍요를 추구하면서 살아갈 때에, 도리어 하나님의 저주와 멸망이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복은 복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은, 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를 찾고 구하는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복은, 복받기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과 힘, 생명을 다해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순종하는 이에게 주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복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복은, 복받기 위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능력이 되심을 믿고 꽉 붙잡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가나안에 있던지, 애굽에 있던지, 광야에 있던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지키며, 그분을 의지하면서 살아간다고 한다면, 우리가 언제 어디에 있던지 상관없이 그것이 복된 삶인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하나님은 복과 생명만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저주와 사망도 내리시는 분입니다.
17절에 보면,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을 절하고 그를 섬기면… 그러면 복과 생명이 아니라 사망과 저주가 있을 것이다.” 라고 명백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과 생명을 주시기를 원하지만, 그에 합당하지 못한 자들에게는 저주와 사망을 주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0:28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하나님은 단순히 사랑해야 대상만이 아니라,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두려워하는 이들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령한 복과 풍요의 길로 인도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두신 복과 생명을 누리기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선 택
신 30:15-20 / 지성래 목사
나라나 부모는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남녀의 성별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게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가면서 끊임이 없는 수 많은 것들을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된다. 학교, 전공, 직업, 배우자 등은 나의 선택이다. 사소하게는 중국 식당에 가서 짜장을 먹을까 짬뽕을 먹을까 하는 고민은 누구나 하게 된다. 그래서 어떤 중국 식당에서는 그릇을 남북으로 나누어서 절반은 짜장, 절반은 짬뽕을 담는 짬짜라는 메뉴도 개발하였다. 어떻게 보면 짜짱과 짬뽕을 한 그릇에 절반씩 주문해서 먹는 것도 또 하나의 선택일 뿐이다.
아파트에서 살까 개인 주택에서 살까도 선택이다. 내 나라에서 살까 이민을 가서 살까도 선택이다. 남자라면 육해공군과 해병대 중에서 선택하여 군에 입대할 수도 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갈 때에 비행기로 갈까 기차로 갈까 고속버스로 갈까 아니면 직접 운전해서 갈까 하는 것도 선택에 의한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살아가면서 끊임이 없이 수 많은 것들을 날마다 결정하며 살아가게 된다.
신명기의 거의 끝 부분인 신명기 30장에서 모세는 백성들에게 선택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생명과 사망, 복과 화 중에서 생명을 택하고 복을 택하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온전한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사망 대신에 생명을 화와 저주 대신에 복을 택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모세 시대의 출애굽한 후에 광야 생활을 이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상을 보면 꼭 그렇지는 못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화와 저주를 자초하고 재앙과 책망과 심판을 자초한 사건들이 끊임이 없었다.
우리는 최근에 창세기의 말씀 묵상을 새롭게 해 나가면서 노아 홍수 시대의 물 심판으로 죽어간 인류의 역사를 다시 보았다. 소돔과 고모라 성의 유황불 심판에 대하여 안다. 설마 하늘의 문이 열리고 사십주야로 비가 내리는 그런 물 심판의 날이 있으리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하늘에서 내린 유황불로 소돔과 고모라 성이 역사에서 사라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신명기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동안 모세를 통해서 누누이 말씀하신 법도와 규례와 계명의 말씀들을 다시 반복해서 강조하신 내용을 담고 있다. 신명기 30장 1절에 보면 모세는 “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라고 말하였다. 운전자들이나 보행자들이 교통법규를 잘 지킬 때에 서로 안전한 일상이 가능한 것과 같은 원리이다. 음주 운전이나 졸음 운전은 자신만 불행해 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나 주변 사람에게 큰 상해를 입게 하거나 죽음에 이르게 하는 큰 불행을 불러올 수 있다.
신앙 생활이란 것이 그렇지 않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누가 사망이나 화나 저주를 택하겠는가. 당연히 생명과 복을 택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생명과 복을 택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이라면 구체적으로 생활 중에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나.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그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게 한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생명과 복을 택한 자의 신앙생활이란 어떠하여야 할까.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하나님이 가장 못 마땅하게 여기시고 금지하신 것이 우상 숭배이다. 우상 숭배란 하나님 대신에 피조물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을 말한다. 십계명의 제 일 계명이 무엇인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이다. 제 이는 “우상을 만들거나, 절하거나, 섬기지 말라”라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이 절대로 하나님만 섬기고 경배하고 사랑하며 살아가길 원하신다.
본문인 신명기 30장 17-18절에 보면 “우상에게 절하고 섬기면....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라고 엄중하게 경고하셨다. 18절에 후반절에 보면 지금은 광야 생활 중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지 않으면 앞으로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할 것이니라.”라고 경고하셨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무엇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일까. 신명기 30장 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너와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셔서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라고 말씀하셨다. 마음에 할례를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99세 된 아브라함과 13살된 이스마엘과 집안의 모든 남자들에게 할례를 행하게 하셨다. 할례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겠다는 성별 의식이다. 몸에 남기는 증거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로 마음에 할례를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였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누이지 않는 마음이다. 그렇지 않나.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그 마음과 뜻과 생각이 눈에 보이는 세상 물질 세계에 빼앗겨져 버리면 안된단 말이다. 이것이 쉽나. 어렵다. 쉽지 않다. 그렇지 않나. 우리는 모세 시대와 그 이후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서 역사의 교훈을 깨닫게 된다. 오늘 날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등 따뜻하고 배 부르면 하나님 멀리하고 우상 숭배할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있다.
우리가 밤낮 예배할 때마다 두 손을 높이 들고 “사랑합니다. 나의 아버지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요.” 그렇게 찬송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예배당의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이 세상의 수 많은 우상 숭배의 유혹 앞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아니, 예배당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누가 나보다 좋은 차만 타도, 누가 나보다 좋은 옷만 입어도, 누구네 아들딸이 우리 아들 딸보다 더 나은 대학에만 들어가도 내 마음의 평화는 금이 가고 깨어지고 만다. 교회 안에서 조차 누구네 가정에 경사가 있고 좋은 일이 있으면 겉으로는 축한한다고 말하면서 속으로는 부러워서 배가 아프다. 우리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속담처럼 말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산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간단한 명령이 아니다. 생각해 보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대단히 추상적이고 막연하다.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일까. 야고보서의 교훈에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 중의 하나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약4:8)라고 하였다. 그렇지 않나. 하나님을 어쩌다 집안의 애경사에 잠깐 만나서 인사하고 헤어지는 먼 친척 대하듯 하면 되겠는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 중의 하나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다.
매일 정오가 되면 큰 예배당의 본당에 들어가서 기도하는 짐(Jim)이란 이름을 가진 노인이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면 곧 예배당의 본당에서 나와서 돌아가고는 하였다. 하루는 예배당 관리인이 물었다. “어르신은 왜 날마다 정오에 예배당에 다녀갑니까”, “아, 네 기도하고 갑니다.”, “아니 그렇게 짧은 시간에 무슨 기도를 합니까.”, “아, 네, 저는 긴 기도를 잘 못합니다. 단지 ‘예수님 저 왔습니다. 짐(Jim) 말입니다.’하고 인사하고 갑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얼마 후에 그 노인이 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런데 그 노인과 함께 지내는 병실의 모든 환자들에게 그 노인은 기쁨을 주었다. 간호사가 물었다.“주변에 기쁨을 주는 기별이 무엇인가요”, “나에게 날마다 찾아 오는 문병객 덕분이야”,“아니 어른을 찾아 오는 분이 거의 없으신데 누가 문병을 날마다 오신단 말입니까.”, “아, 나에게는 매일 정오가 되면 예수님이 찾아 오시지 ‘하이(Hi) 짐(Jim) 잘 있었나 나 예수야’그렇게 인사하고 기쁨을 한 아름 안겨 주고 가시지”라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나는 늘 기쁜거야” 라고 말이다.
그렇지 않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 믿는다면 나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분명한 일상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 다 같이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을 찬송하자.
이런 강 같은 평화와 바다 같은 사랑과 샘 솟는 기쁨과 반석 같은 믿음이 날마다 풍성한 주인공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주의 말씀을 청종하고 지키라.
하나님 안에서 생명과 복된 삶을 살아가는 증거 중의 또 하나는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잘 청종하고 지키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나. 법을 만들고 법을 집행하는 국회의원들이나 판검사들이 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다면 어떻게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겠는가. 학교에서 윤리와 도덕 과목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학교와 가정과 사회에서 윤리적이지 않고 도덕적이지 않게 살아간다면 누가 그를 존경하고 알아 주겠는가.
16절에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며 살아가면 “네가 생존하고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가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라고 약속해 주셨다.
15절과 19절에 보면,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이라고 하였다. “네 앞에 두었은즉”이 무엇인가. 사람은 앞에 있는 것들 중에서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 문화 중에는 돌잔치상에 이것 저것을 올려 놓고 ‘돌잡이’라는 순서를 갖는다. 옛날에는 붓, 책, 엽전, 쌀, 실타래 등을 얹었다. 붓이나 책을 잡으면 공부 잘해서 과거 급제 할려나, 엽전이나 쌀 잡으면 부자로 살려나, 실타래 잡으면 무병장수 하려나 하고 기뻐하고 축하하였다. 의미를 부여해서 좋은 것만 올려 놓았으니까 손이 닿는 것 중에서 붙잡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 돌잡이 용품은 훨씬 다양하다. “청진기, 마우스, 회의 의사봉, 비행기, 축구공, 골프공, 마이크, 돈, 실, 연필, 칫솔” 등등을 올려 놓는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하여야 한다. 사람은 눈 앞에 보이는 것에 마음이 끌리고 당장 내 앞에 있는 것으로 인하여 마음이 흔들린다. 술 있으니 술 마시고 마약 있으니 마약에 손을 댄다. 그 작은 시작이 인생을 망치기도 한다. 그렇지 않나. 에덴 동산의 하와와 아담이 어떻게 하다가 마귀의 시험에 넘어 가고 말았나. 에덴 동산에 하나님이 안 계셨나. 에덴 동산에 생명 나무가 없었나. 하나님이 거니시는 동산 에덴, 생명 나무가 자라나는 아름다운 동산이 에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와와 아담은 뱀의 유혹에 넘어 가고 말았다.
사람은 가까이 하는 것과 가까이하는 사람에게서 영향을 받는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만나 본 적이 없는 아프리카 사람이나 남미 사람 때문에 시험에 빠지고 유혹에 넘어지나. 내 곁에 있는 사람, 내 가까이에 있는 물건으로 인해서 시험에 빠지고 유혹에 넘어지는 것이 아닌가.
여호수아 때의 아이 성 전투를 보라. 여리고 성 전투 승리의 사기로 충천했던 이스라엘은 군대 삼천명으로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싸움이 시작되자 마자 36명 쯤이 죽임 당하고 말았다. 순식간에 이스라엘 군대의 사기는 무너지고 말았다. 여호수아의 군대는 그 마음이 물처럼 녹았다. 순간 두려움에 휩싸였다. 여호수아를 통한 하나님의 전쟁 명령은 분명하였다. 그 어떤 소유물이라고 취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간은 달랐다.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와 금 덩어리 은 덩어리를 취하여 자기 짐 장막 땅 속에 숨겼다. 그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여호수아의 군대는 아간과 그의 아들 딸을 아골 골짜기로 끌고 가서 돌로 친 후에 불태워 흔적까지 없앴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청종하지 않은 역사적인 사건의 사례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 하나님을 따른다는 것,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과거나 오늘 날이나 마찬가지이다. 모세 때나 여호수아 때나 오늘 날이나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청종하지 않을 때에 모세의 광야 생활 중에서 하나님은 때로는 전염병으로, 때로는 땅이 갈라지는 지진으로, 때로는 전쟁으로 큰 위기와 시험을 겪게 하셨다.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또 다른 표현 중의 하나일 수 있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자녀를 낳아 키울 때에 사랑하기 때문에 잔소리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책망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훈계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벌하는 것이 아닌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라고 하였다.
맞다. 하나님 안에서 생명과 복을 누리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지켜야 한다. 신명기 30장에 보면 1절부터 마지막 절인 20절 까지에 가장 반복되는 강조가 ‘청종하면’이라는 말씀이다. 2절, 8절, 9절, 20절에 보라. 청종하고 지켜 행하라는 강조가 반복된다. 그렇지 않나.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알면 무슨 소용이 있나.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따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야 복된 것이 아닌가.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라. 판검사와 변호사들로 구성된 법조계는 물론이고 국회, 정부를 보라. 법을 공부하지 않은 이들이 누가 있나. 거의 대다수가 법을 전공하고 어려운 사법 시험에 합격한 이들이다. 그런 저들이 법을 잘 안 지킨다. 교묘하게 법을 가지고 진영 논리로 끌고 가서 여와 야가 힘 겨루기만 계속한다. 중간에서 어려움을 겪고 마음이 상하고 실망하는 것은 순진한 국민들 뿐이다. 마치도 1945년에 출간된 인도 출신 작가 조지 오엘의 <동물농장>처럼 세상이 돌아가고 있다.
세상이나 신앙 공동체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면 타락하고 만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하는 일과 후손과 육축과 토지의 소산에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신명기 30장 10절 끝에 보니까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라고 약속하셨다. 그 앞에 9절에 보니까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이 율법책에 기록된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이라고 조건부의 약속을 하셨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에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의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15:10)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이는 개인이나 가족 관계나 세상의 모든 사회 생활이 다 마찬가지 아닌가. 서로 지킬 것을 지킬 때에 서로가 복되고 서로가 행복하고 서로가 평안해지지 않나. 요한일서 2장 5절에도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라고 교훈하였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아는 것으로 위안을 삼지 말고 힘써 지켜 행하는 은혜와 간증의 주인공들이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그를 의지하라.
하나님 안에서 생명과 복을 택한 자의 또 하나의 모습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다 의존적인 존재이다. 절대 사람은 자기 혼자서는 못 산다. 한자의 사람 인(人)자를 보라. 두 사람이 서로 의지하고 있는 형상이다. 신명기 30장 20절의 ‘의지하라’는 <개역한글성경>에서는 ‘부종하라’라고 번역되어 있다. 원 단어인 ‘다바크’는 ‘연합하다. 밀착하여 달라 붙다’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남편과 아내가 부부가 되는 것을 뜻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열왕기하 18장 6절에서 히스기아 왕의 믿음을 칭찬한 할 때 쓴 단어가 바로 이 단어‘다바크’이다. “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라는 말씀이다.
요한복음 15장 포도나무 비유에서 예수께서는 포도나무 가지인 인생이 포도나무 줄기인 예수께 꼭 붙어 있는 신앙을 교훈하셨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 줄기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셨다. 맞다. 주님을 의지하는 것은 주님께 붙어서 사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계속해서 “주 안에, 주 예수 안에,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라고 강조하지 않나. 536장 <죄 짐에 눌린 사람은>의 1절 가사와 후렴을 보라.
“죄 짐에 눌린 사람은 다 주께 나오라
주 말씀 의지할 때에 곧 평안 얻으리
의지하세 의지하세 주 의지하세
구하시네 구하시네 곧 구하시네”
주님을 의지하되 주께 연합하여 주님과 하나가 되고 주 안에서 떠나가지 않는 은혜와 말씀과 순종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인생의 선택
신명기 30:15-20 / 황의봉 목사
오래 전입니다만 국민일보에는 금강의 발원지를 추적하는 기획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몇 곳의 발원지가 소개되는 중 저의 눈길을 끌게 한 것은 시골 어느 농부의 지붕 용마루가 발원지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빗물이 용마루 북쪽으로 떨어지면 금강이 되고 남쪽으로 떨어지면 섬진강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한평생을 살다보면 수많은 갈림길을 만나게 되고 그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됩니다.
우리가 인생길을 선택하는 것은 세 종류가 있습니다. ①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선택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부모를 만나고, 국적을 갖게 되는 것이 그렇습니다. 또 종교의 경우를 보세요. 여러분이 스페인에 태어났으면 대부분 가톨릭 신자가 되었을 것이고 사우디아라비아나 시리아에서 태어나 자랐다면 이슬람교를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② 선택의 결과를 예측할 수 없지만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대학을 선택할 때 합격할지 불합격할지 모르지만 한 학교를 선택해야 합니다. 직업을 선택하고, 배우자를 선택하고, 이사 갈 집을 선택해야 합니다. ③ 선택의 결과를 분명히 알고 선택해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커피 자동판매기 앞에 서서 블랙커피를 선택할까, 설탕만을 넣을까, 프림까지 넣을까 선택할 때는 그 맛을 알고 택합니다.
어떤 경우든 선택의 결과는 자신이 책임져야 합니다. 가나안땅을 눈앞에 두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선택은 세 번째의 경우입니다. 선택의 결과를 분명히 알려 주시고 나서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 하셨습니다. 하나는 생명과 복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사망과 저주의 길이므로 당연히 생명과 복의 길을 선택할 것 같은데 사망과 저주의 길을 택하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1. 우리의 삶속에는 운명 지어진 것과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나의 부모는 내가 선택할 수 없습니다. 운명 지어진 것입니다. 내가 태어난 시대도 환경도 내가 택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6.25 전쟁 때 태어났고 또 굉장히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것도 내가 택할 수 있는 것 아닙니다. 그러나 교육과 훈련은 내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결혼도 직업도 내가 살 곳도 내가 다니는 교회도 나는 선택할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이 운명 지어진 것이 아니며 또한 모든 것이 선택의 자유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신명기 30:19-20을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하나님의 소원은 우리가 생명을 택하고 사망을 택하지 말고 복을 택하고 저주를 택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라고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함께 놓았는데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보혈을 통해서 죄악과 절망 대신에 용서와 의와 사랑을 택하고 세속과 마귀 대신에 성령과 거룩함을 택하고 병과 고통을 대신해 치료와 건강을 택하고 저주와 가난 대신에 아브라함의 축복과 예수 그리스도의 형통을 택하고 죽음과 지옥과 영원한 멸망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활과 천국과 영광을 택하라.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 밑에 자란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은 다 자라서 결혼하여 분가해 나갔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고 난 다음에 심리학자들이 이 알코올 중독자의 자식으로 태어난 자란 이들이 어떻게 사느냐 가보니까 맏아들 집에 가보니까 맏아들은 아예 술을 입에도 대지 않습니다. 몸서리칩니다.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자였기 때문에 우리 가정이 얼마나 고통을 당했는데 나는 술을 보지도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는 아주 깨끗하게 잘삽니다. 자기 아내와 자식들과 잘살고 사업도 잘합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을 찾아 가니까 아예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곤드레 만드레가 되어 있습니다. 정신 차리지 못하고 부인도 도망치고 자식들은 고아원에 가고 처참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두 아들에게 심리학자들이 똑같이 물었어요. 어떻게 해서 똑같은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 밑에 태어났는데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러니까 맏아들도 똑같이 물어요. “선생님! 선생님의 아버지가 술망나니라면 선생님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술을 피해야지.” 둘째 아들도 똑같이 물었습니다. “선생님의 아버지가 술주정뱅이요, 술독에 빠져 살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이고, 아버지 영향을 받아서 나도 술 먹고 술독에 빠지겠지.” 선택에 달린 것입니다. 똑같은 아버지의 똑같은 두 자식이 그 모양인 것입니다.
2. 많은 사람들은 고생하려고 하지 않고 그저 편하고 쉬운 길만을 찾습니다.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7:13-14) 하셨습니다. 사람이 많이 간다고 반드시 올바른 길만은 아닙니다. 빨간 신호등에 모두 간다고 내가 따라 가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향할 때 블레셋 사람의 길은 가까운 길이요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이었지만 하나님은 그 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홍해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40일을 금식하신 예수님에게 마귀가 시험한 내용도 “지름길로 가라. 쉬운 길로 가라”하는 것입니다. “왜 쉬운 길이 있는데 사람이 겪는 고생을 다 겪고, 천대 받다가 십자가 지고 죽어야 할 필요가 있느냐? 십자가 없는 길도 있다. 인생문제는 떡이니까 돌로 떡만 만들어 봐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기만 해봐라. 아니 더 쉬운 방법이 있다. 나에게 절해봐라. 내가 다 도와주마”한 것입니다. 사람이 많이 간다고 그냥 따라가지 마십시오. 사망의 길도 있습니다. 편하고 쉬운 길만 찾지 마십시오. 저주의 길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시를 지었는데 “돛단배 두 척 바다에 떴네. 한 배 동으로 가고 다른 배 서로 가네.” 똑같은 돛단배가 바다에 떴는데 왜 한 배는 동으로 가고 다른 배는 서로 갑니까? 그것은 바람은 똑같이 부는데 돛의 방향에 따라서 한 배는 동으로 가고 한 배는 서로 가는 것입니다. 똑같은 세상에 살고 똑같은 시절에 살아도 마음먹기에 따라서 한 사람은 성공하고 한 사람은 실패하고, 한 사람은 복 받고 한 사람은 저주받는 것입니다. 마음에 어떻게 선택하는 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지 다른 사람을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앞에는 항상 두 길이 있습니다.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하나님의 길과 세상길이 있습니다. 생명의 길은 좁고 험합니다.
마태복음 7장 14절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예수 믿고 하나님 섬기고 사는 것이 쉽지가 않으니까 사람들이 그 길을 찾는 사람이 적지요. 여러 가지 절제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려니까 힘이 들지요. 그러니까 좁고 험한 길이지만 예수를 믿고 안에 들어와 보면 참으로 넓고 좋은 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의 성령과 사는 것보다 더 의와 평강과 희락과 믿음, 소망, 사랑이 넘치는 것이 없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그 안에 들어오기도 전에 벌써 좁은 길을 걷지 못하고 세상으로 나갑니다.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길은 넓고 편합니다. 마태복음 7장 13절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3.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따라갈 때 복을 받게 됩니다.
오늘 읽어드린 15-16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우리가 복을 받는 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여 복을 주려고 준비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가까이 하면 하나님이 주신 그 복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신명기 11장 26절-28절에도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으리라.” 하셨습니다. 복과 저주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남을 원망할 수가 없습니다.
미국에 아주 친한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젊은 시절에 좋지 못한 길을 가고, 안 갈 데를 가고, 죄도 많이 짓고 지냈습니다. 어떤 주일 저녁에 둘이 역시 못된 곳을 가다가 마침 교회 앞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교회 앞에는 그날 저녁의 설교제목이 붙어 있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 그들은 지금 죄를 지러가는 길인데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한 친구는 놀러갈 마음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가자, 가지 말자, 둘이서 옥신각신 하다가 결국 둘은 갈라졌습니다. 한 청년은 그대로 놀러가고 한 청년은 집으로 돌아오는 체 하다가 아무래도 마음이 불안해서 도대체 목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나 보자 하고 혼자서 교회의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그는 맨 뒤에 앉아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 후, 이 청년은 진심으로 회개하고 몸을 예수님께 온전히 바치고 변화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열심히 공부하고 정치방면으로 나가서 끝내는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대통령 취임식 날이 되었습니다. 모든 신문이 대통령 취임기사로 가득 찼습니다. 그런데 그때 미국의 유명한 교도소에 어떤 늙은 죄수 하나가 있었습니다. 대통령이 취임했다는 신문보도를 보면서 혼자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30년 전에는 내 친구였는데 이제 이 사람은 대통령이 되고 나는 일생을 교도소에서 보내다 죽게 되었으니 이런 분한 일이 어디 있는가”하면서 눈물을 흘리더라고 합니다. 이 대통령은 클리블랜드 대통령이었습니다.
미국 역사상 가장 뛰어났던 대통령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미국 역사상 가장 정직했던 대통령이 클리블랜드라는 것에는 대부분 이견이 없습니다. 클리블랜드 대통령의 좌우명은 ‘오직 진실만을 말할 것’이었습니다. 한국과는 달리 미국의 잡지나 신문은 특정 후보를 지지하거나 정치적인 의견을 적극 개진하는데, 뉴욕 월드지는 클리블랜드가 대선 후보로 나왔을 때 그를 지지하는 다섯 가지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첫째, 그는 정직한 사람이다. 둘째, 그는 정직한 사람이다. 셋째, 그는 정직한 사람이다. 넷째, 그는 정직한 사람이다. 다섯째 그는 정직한 사람이다.” 심지어는 클리블랜드의 상대편 후보도 그를 비난할 때 ‘꼴사납게 정직하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그의 정직성만큼은 인정했습니다. 클리블랜드가 가장 뛰어났던 대통령은 아니었지만 국민들은 그의 말을 믿었고 또 신뢰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3절에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하였습니다. 인간은 잘되면 자기 탓이요 잘못되면 조상 탓이라고 말합니다. 자기의 잘못된 선택은 남의 책임으로 돌릴 수가 없습니다. 잘못된 선택을 회개하고 내일을 위하여 새롭고 올바른 선택을 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생각, 자기 판단 자기경험을 버려야 합니다. 히브리서 11:24-26을 보세요.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는 무엇을 택했습니까?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죄를 지으면서 일시적인 부귀영화 누리는 것 보다 좀 고생하더라도 하나님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을 따라 살기 원했습니다. 바로가 볼 때는 얼마나 어리석은 선택입니까? 그러나 그는 정말 잘 선택한 것입니다. 이것이 복 받는 길이요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눈을 뜹시다. 지금은 좀 힘들고 고달파도 하나님께 나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 따라가 복과 영생을 소유하는 평안 가족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합니다
신 30:15-20 / 김영주 목사
힐러리의 선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전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의 아내였던 힐러리 클린턴에 대한 책입니다. 이 책에 보면 힐러리의 가장 위대한 점은 탁월한 선택에 있다는 것입니다. 힐러리는 위기 때마다 탁월한 선택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고 지금까지 성공적인 정치인으로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책의 서문에 보면 이런 힐러리의 고백이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선택을 할 수 있다. 나에 대한 실망감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타인이 내게 준 고통을 용서할 수 있는지, 내가 타인에게 준 고통을 솔직하게 인정할 수 있는지를 결정해야 하는 우리의 나날은 선택의 순간들이다. 선택은 새 천 년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들 앞에 놓인 하나의 벅찬 과제이다....."
그러고 보면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어떤 것을 선택했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지고 인생이 달라집니다. 문제는 이런 선택은 내 스스로 해야지 누가 대신 해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선택의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의 얘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가족이 조언을 해줄 수 있습니다. 친구가 조언을 해줄 수 있습니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정보를 가지고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선택은 내가 합니다. 혼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책임도 내가 집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여러 가지 특권 중 하나가 무엇입니까?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권이지만 책임도 있습니다. 나는 이것 선택하고 싶었는데 하나님께서 막무가네로 다른 것을 선택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선택은 인간에게 주신 독특한 권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잘 읽어보시면 이런 권한을 주시면서도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호소, 기대가 있습니다. 선택을 잘하라는 것입니다. 선택권은 인간 고유의 권한이기에 하나님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선택권을 잘못사용해서 엉뚱한 것을 선택할 것에 대한 염려도 있습니다.
그래서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도록 충분한 지침을 주십니다. 오늘 읽었던 본문에 그 지침이 나와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입니다. 당시 상황은 이렇습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광야 생활을 청산하고 저 멀리 보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게 될 것입니다. 그 땅은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땅입니다. 아주 지름진 땅입니다. 얼마나 그 땅이 좋았던지 그 땅에는 젖과 꿀이 흐른다고 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에 부담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 땅에 가면 살기 좋고, 먹기 좋고, 지내기 좋은데 신앙이 무너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 땅에는 이미 가나안 원주민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 원주민들은 하나님 아닌 우상을 섬기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만 섬겼던 사람들입니다. 한번도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하고 어울려 살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을 보면 매력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야 저들은 우리가 모르는 신을 섬기고 있네"
"그런데 우리하고 믿는 방법이 다르네, 저렇게 믿는 것이 더 멋있어 보이는데..."
"우리 하나님은 보이지 않아서 믿기 힘들 때가 있는데 저 사람들은 직접 저렇게 뭘 만들어 놓고 직접 보면서 절하네, 우리도 저렇게 믿어볼까" 하면서 같이 어울려 따라갈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길이 생명의 길이고 잘되는 길이라면 좋지요. 그러나 겉보기엔 잘되는 길이요, 생명의 길인 것처럼 보이는 데 마지막까지 가보면 사망의 길이요, 재앙의 길입니다. 이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되지 않도록 진지하게 설명하십니다. 그 내용이 오늘 읽으신 본문입니다.
먼저 15절을 보시겠습니다.
보라--주목하라는 뜻입니다.
내가 오늘날--오늘입니다. 먼 훗날이 아닙니다. 선택하는 순간은 늘 오늘입니다.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우리 앞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생명과 복, 사망과 화. 인생은 항상 이 둘 중에 하나입니다.
16절입니다.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잠시 19절-20절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든 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내가 거하리라"
방금 몇 구절을 읽으셨는데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마치 답 알려주고 시험 보는 느낌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 앞에는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가 있다. 그런데 너는 꼭 생명을 택하라. 그리고 하나님 사랑하기로 택하라. 그러면 된다." 마치 시험 보는 아이들에게 선생님이 답을 알려주시는 것 같습니다.
"답은 1번이다. 그러니 다른 것 택하지 말고 1번만 택하라" 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했을 때 어떤 것이 보장되어 있습니까? 생존하고 번성할 것이요. 복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이 잘못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한 사람이라도 잘못되는 것 원치 않습니다. 혹시라도 잘못해서 사망을 택하고 저주를 택할지 몰라서 두 번씩 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꼭 생명과 복을 택하고 사망이나 저주를 택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말씀을 듣지 않고 다른 것을 택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다. 그럴 때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17절-18절에 미리 말씀하십니다. 예방의 차원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치 못할 것이니라"
두 가지 중요한 것을 말씀하십니다.
1)너희가 반드시 망하리라.
2)너희의 날이 장구지 못하리라--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 알려주셨으면 많이 알려주신 것입니다. 다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정답을 택해야죠. 그런데도 틀린 답을 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걸 보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말할 수 없이 아픕니다. 왜냐하면 사망이나 저주나, 재앙은 그들을 위해 준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위해 준비해 둔 것은 생명과 복인데 그걸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받지 않아야 할 것은 받고, 받아야 할 것은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왜 사람이 이렇게 될까요?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엉뚱한 선택을 하게 되는 것입니까?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17절에 보면 중요한 단어가 하나 나옵니다. "마음"이라는 단어입니다. 17절 초반 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다.
"그러나 너희가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마음을 열고 듣고 따르면 될텐데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마음을 닫아버립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마음을 돌려버립니다. 반대로 가 버립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선택은 내 자유다'. '내 맘대로 할 수 있다'. '내 맘대로 한다는데 누가 뭐랄거냐?' 이성적으로 생각한다기보다는 감정적으로 고집 부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진리에 대해 마음을 닫아 버리면 그 다음 반드시 따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유혹'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다음에 나오는 표현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유혹을 받아서'라는 표현입니다. 사람이 진리에 대해 마음을 열면 유혹이 들어올 공간이 없습니다. 진리가 가득 차있는데 유혹이 어떻게 들어옵니까? 왔다가도 진리에 쫓겨 도망가게 됩니다. 그러나 진리에 마음을 닫아버리면 진리 아닌 것들이 들어오게 됩니다. 인간의 마음은 진공상태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항상 뭔가로 채워있어야 안정감을 느낍니다. 진리로 채워있던, 거짓으로 채워있던 하여튼 뭔가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채워져 있지 않으면 방황합니다. 사람들이 제일 방황할 때가 언제입니까? 마음이 공허할 때입니다. 이런 때는 무엇인가를 찾아 헤맵니다.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이나 채워 넣으려고 합니다. 그래 뭔가에 미쳐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유혹이 찾아오면 사람은 분별력을 잊습니다. 그래서 뻔히 잘못된 길 인줄 알면서도 가게되고, 죽는 줄 알면서도 선택하는 것입니다. 유혹이 가장 심할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뭔가를 선택할 때입니다. 이때는 마음의 갈등도 많습니다. 주변에서 여러 소리도 많이 들립니다. 충고한다고 한 마디씩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소리들이 터무니없이 들리는 것이 아니라 그럴 듯하게 들립니다.
또 하나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선택하는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사단도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는 것입니다. 사단은 사람이 잘되는 것 못 봅니다. 그래서 무엇을 선택할 때 잘못된 것을 선택하도록 연막을 치고 거짓말을 해대는 것입니다. 주로 이런 유혹은 평소 잘 아는 사람이나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옵니다. 사단은 가까운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사단의 유혹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40일을 금식하시고 배가 고팠을 때입니다. 사단이 와서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이 돌덩어리가 떡 덩이가 되게 하라" 무슨 의미일까요?
--배고픈데 능력 있는 사람이 굶을 필요가 뭐 있어? 그 능력 사용해!
--돌을 떡을 만들어서 먹어, 배불러야 하나님의 일도 할거 아냐? 라는 말입니다.
십자가에서 못 박히실 때도 사단은 다가와서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왜 여기서 고난 당하니?
--내려와 버려, 내려와서 너를 저렇게 조롱하고 비웃는 사람들 혼내 줘.
--그러면 나도 믿을께!
이때는 사단이 사람들을 통해서 접근해 왔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보면서 조롱했습니다. 지금 이라도 당장 내려오면 믿겠다고 유혹했습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유혹을 받으셨는데 우리 사람이 유혹을 받지 않겠습니까? 아마 여러분께서 오늘 이 자리에 오시기까지 많은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유혹도 있었을 것입니다. 몇 번 망설여지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기고 나오셨습니다. 앞으로도 여러 가지 많은 유혹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열고 결단하십시오. 하나님을 믿기로 선택하십시오. 하나님은 결코 여러분을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믿기로 선택한 순간부터 생명과 복이 여러분을 향해 열릴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행복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성품, 인격이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잘못되면 가장 마음 아파하실 분은 하나님입니다. 보통 사람은 남이 잘되면 배 아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릅니다. 여러분이 잘되고, 우리가 잘될 때 우리보다 더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이렇게 말씀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나는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데. 내가 잘되는 것하고 하나님하고 무슨 상관 있나? 상관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모르는 중에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알고 계십니다. 더구나 저희들이 여러분의 이름을 불러가면서 기도했기에 하나님은 더 잘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얼마나 잘 알고 계시는지를 아시면 깜짝 놀랄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머리카락이 몇 개인지 까지 아십니다.
고민이 무엇인지도 아십니다.
무엇가지고 잠 못 이루시는지 아십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한번도 무관심한 때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지도 못할 때부터 말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생명을 얻고, 복을 얻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어떤 책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어떤 소녀가 있었습니다. 어머니에게 몹시 꾸지람을 듣고 울면서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산에서 골짜기를 향해 외쳤습니다.
"미워! 미워! 미워!"
조금 후 아이는 맞은 편 골짜기에서 자기를 향해 외치는 낯선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미워! 미워! 미워!"
뜻밖의 음성에 깜짝 놀란 아이는 즉시 엄마에게로 달려와 숨을 헐떡이며 말했습니다.
"엄마, 산골짜기에 아주 나쁜 사람이 살고 있어요. 그 사람이 나에게 '미워, 미워, 미워'라고 외쳐댔어요".
묵묵히 아이의 말하는 것을 듣고 있던 엄마는 조용히 미소를 머금었습니다. 그리고선 아이의 손을 잡고 언덕위로 올라가면서 말했습니다.
"얘야, 골짜기를 향해 있는 힘을 다해 '사랑해'라고 외쳐보아라"
아이는 엄마가 시키는 대로했습니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그러자 골짜기에서도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그때 엄마가 말했습니다.
"얘야, 인생은 메아리와 같은 거야, 네가 인생을 대하는 방식대로 인생은 너를 대한단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과 사망, 복과 화를 택할 기회를 주셨는데 그 선택은 매우 중요합니다. 선택여하에 따라 그 결과가 메아리처럼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이 지혜로운 선택을 하셔서 생명을 얻고, 복을 받기를 원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