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화상 >
나는 세상을 향한 욕망의 눈을 닫고 살아왔습니다. 본능이라는 생물적 존재가 원하고 가리키는 방향으로 졸졸거리며 따라가는 강아지와 같은 모습이었음을. 지금은 정년퇴직을 하고 길지도 않은 인생길에서 자식들의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유전적인 순환의 고리를 느끼기도 합니다. 거기에는 나의 재현이 있으며 조금씩 눈이 아닌 마음으로 그냥 그렇게 느껴갑니다. 어릴 때 어둠이 거치지 않은 새벽녘 부모님의 눈 왔다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 조그마한 고무래를 들고 강아지와 함께 동구 밖 미루나무 뚝방길에 쌓인 눈을 밀치며 뛰어다닌 기억이 지금도 지워지지 않고 생생하게 내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의 기쁨이 내 생애에서 가장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아무런 오욕의 때가 끼지 않았던 시절이어서가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은 금방 지나가고 감정적이고 독선적인 성격을 본능으로 간직한 채 세상을 엄벙덤벙 살아왔습니다. 그저 내 손바닥만을 바라보며 세상과 담 쌓고 살아온 세월이 어느새 노년의 인생을 바라보는 시절을 맞이해 새롭게 삶을 되돌아보며 또 다른 인생을 꿈꾸어봅니다. 편리의 탄력을 잠재우고 삶의 끈끈한 점성을 덜어내 보고자 합니다. 돈을 경멸하고 지성을 경멸함으로서 스스로 왕따의 길을 방황하며 살아온 답답한 세월이었음을. 그런 길에서 내가 가야할 길이 어딘지는 너무나도 빤했습니다. 태생적 본능이 안내해준 물리적 노력의 세계였으며 그것은 운동이었습니다. 젊어서 섹스로 세월을 보냈다면 그 힘이 줄어들며 마흔 후반에 시작한 운동은 나름 나 자신의 길을 걸어가게 해주었습니다.
주구장창 산행에 매달리며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새롭게 시작한 것은 아침 수영이었습니다. 새벽 첫 6시부 수영을 50m 레인에서 몇 달하면서 4가지 영법을 마스터해갔습니다. 일 년 정도 지나면서 달라지는 나의 몸을 집사람도 알아차릴 정도였습니다. 구부정한 허리와 안으로 휘어들어간 어깨 그리고 창백한 안색은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몇 년을 지속하며 허리는 서서히 곧추세워지고 어깨는 넓어지고 일자로 평행을 잡아갔습니다. 어깨에 힘이 생기면서 조금씩 자신감도 나타났습니다. 십년 가까이 수영에서 얻는 탄력으로 투자자금이 조금 더 필요한 산악자전거의 매력에 빠져 동호회를 따라 강원도 산골자기를 헤매기도 했습니다.
집에서 당시 근무하던 남산 꼭대기까지 자전거로 편도 두 시간 왕복 세 시간 반을 출퇴근길에서 보내며 나름 신나게 다녔습니다. 그랜드 하얏트 서울 호텔을 지나 남산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언덕길을 자전거로 힘차게 넘어갈 때에는 주변의 놀람과 박수소리에 힘든 줄도 몰랐습니다. 허벅지의 근육은 프로선수들을 쫒아가는 듯 했고 몸은 새롭게 힘을 얻은 듯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탄력도 정신의 어리석음을 잠재우지는 못했지요. 어느 여름날 아침 출근길에서 약간의 젖은 한강 길 노면을 어리석게도 타이어 공기압을 너무 많이 넣는 바람에 서서히 가다가 앞바퀴가 삐끗하며 순간 넘어져 종아리뼈가 골절되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한 달 여 간을 입원으로 보내며 후회하는 마음은 나를 바라볼 시간을 주었습니다.
엔지니어의 기계적이고 기술적인 능력과 재능만이 최고인줄알고 고집해오던 나의 어리석기까지 한 맹목적인 삶이 보였습니다. 세상은 아무도 그런 기술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기계는 저절로 돌아가고 세상 또한 저절로 돌아갈 뿐입니다. 삶은 각자의 수단과 요령으로 살아갈 뿐이지 기술과 실력이 적용되는 창조적 현장이 아니었습니다. 사회에서 발생하는 대형 사건사고에서 근본원인을 밝히는 것을 누구도 원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자신도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내 시각과 다른 낯선 사회적 시각이 존재합니다. 즉 법이라는 결과론적 시각입니다. 거기에 원인적인 창조적 시각은 손쉽게 주어지지도 않겠지만 항시 베일에 가려있습니다. 그 베일은 바로 신념이고 이념이며 관습입니다. 내가 옳게 잘 살아가고 있는데 무슨 잔소리를 그리 많이 하냐고 거부의 역정과 투정의 얼굴을 내비칩니다.
삶을 욕망의 투쟁으로 앞서나가려 할 때에 남의 이야기들은 아무리 창조적인 사고라도 무시해야만 합니다. 내 욕망이 증식하는 현장에서 남의 평생에 걸친 노력에서 우러나오는 좋은 방향으로의 가리킴들을 먼지처럼 업신여기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회적 욕망의 모습입니다. 저 또한 젊어서 남의 이야기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모든 성인들의 말씀에 자신의 수신(修身)과 마음의 심성이 포함되는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으로 자신도 바라보라는 것이겠지요. 분명 육체적 눈은 외부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 목숨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는 하느님의 계시이자 인간의 업보입니다. 밖에서 얻는 것으로 자신의 목숨을 간수하라는 것임에도 우리는 내 몸의 치장을 넘어 부귀영화의 자손만대를 꿈꾸어갑니다.
세상은 인연의 연결고리와 함께 의식의 단절로 이루어져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생각과 내 마음은 내가 스스로 찾아나서는 것이지 남의 생각과 남의 권유와 남의 배려로 채울 수는 없습니다. 타자의 배려는 일시적 계기의 차원에서 필요할 뿐입니다. 스스로의 길을 찾아 나서려는 시기에 우연히 본사가 있은 여의도에서 퇴근 후 철학 강의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로 등록했습니다. 서양철학이라는 분야에 처음 발을 내딛었습니다. 강사는 명철한 철학적 신념을 가진 수리철학 박사 분이었습니다. 물론 무수한 삶의 고투를 통해 단련된 시지각적 인식능력이 대단히 우월한 능력자였다고 보여 집니다. 그분의 말씀은 따듯한 온실보다는 냉철한 개념의 세계에서 더 깔끔하게 세상은 펼쳐진다고 말합니다. 군더더기 없는 삶을 위해서는 형용사가 아닌 명사의 나열로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예술 그중에서도 미술과 음악에 조예가 깊은 그분의 말씀 중에서 인문학을 하면 돈도 안 들뿐만 아니라 노년의 삶도 금방 지나간다는 것이었습니다. 노년의 준비로 인문학에 빠지는 것이 최고라고 합니다. 그때는 그런가보다 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절실하게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조그마한 짬이 나든지 일거리가 없는 하루를 보내기에 최고입니다. 내 생각에서 우러나온 글을 내가 읽고 수정하다 보면 몇 시간이 금방 갑니다. 잠 안 오는 밤이 무섭지도 않습니다. 소변 때문에 한두 번 깨어나야 하지만 바로 잠들지 못할 때에는 글을 꺼내 수정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졸리면 바로 잠들 수 있습니다. 그런 노력덕분인지 쉴 때에도 편하게 쉬어집니다. 마치 무슨 큰일을 하고 난 다음의 나른한 휴식시간 같은 느낌이 듭니다. 저절로 지루하거나 불편함이 없어지며 몸까지 가볍고 부유하는 느낌을 받기도합니다.
정년을 하고 계약직으로 경기도 여주 쪽에서 2년을 더 회사생활로 보냈습니다. 월급은 예전의 모서리를 차지하지만 그래도 시골이라 한적한 마을분위기에 어울려 기숙사에서 이틀 집에서 이틀 나흘 단위로 반복되는 생활을 하며 미술철학 공부와 글쓰기를 시작했습니다. 두서도 없고 이해도 불가한 글쓰기였지만 일주일에 한편씩 글을 쓰며 시골의 조용한 곳에서 휴식과 명상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일 년간 52편의 글을 썼습니다. 계약직도 끝나면서 집으로 돌아온 나에게 갑자기 다가온 회의는 일 년 동안 글을 멀리하며 방황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방황에서 깨달은 것은 과거의 탄력을 지속해야겠다는 것이었으며 그동안 써놓은 글을 컴퓨터에서 꺼내 일어보았습니다. 아 그때 내 마음의 비참함은 새삼스러웠습니다. 그것은 글이 아니라 배설이었고 세상에 대한 원망적인 시각에 다름이 아니었습니다. 강제되고 딱딱하며 굳은 엔지니어의 기계적인 사고가 묻어나는 글들이었습니다. 결국 다시 해보자는 생각이 나면서 삶에서 묻어나는 철학적인 생각들을 바탕으로 글을 써보자는 나름의 욕심이 스멀스멀 우러나왔습니다.
나는 무수한 기계적인 경험을 겪었습니다. 그런 경험적인 시각으로 인문학적 공부를 하다 보니 그 세계가 너무나도 일천한 좁은 문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경험의 학교는 바보들의 학교라고 하지요. 문사철의 세계는 그 끝이 없는 무한의 세계에 걸쳐있었습니다.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세계에서는 말합니다. 그 순간이 가장 인생에서 좋은 시기라고. 비천한 나의 모습을 깨닫는 순간이야말로 언제든지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의지로서의 원동력과 삶의 역동성을 보여줄 좋은 기회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돈으로의 보답이 아니라 삶의 보람으로서의 기쁨이며 겸손과 배려를 향한 어른으로 성숙해가는 그루터기라 생각됩니다. 노력 없는 겸손과 배려는 실재의 세계에 이를 수 없습니다. 따듯한 온실 속 화초가 아니라 드넓은 광야에서 바람에 흔들리자만 결코 꺾이지 않는 갈대입니다. 거대한 나무는 바람에 쓰러지고 넘어질 수 있지만 갈대는 또다시 일어섭니다.
무지하고 어수룩한 내 모습을 탈피해 새롭게 세상을 인식하며 살아보려는 미천한 노력에 내 자신의 모습을 새기며 내 자화상으로 간직하고자 마음에 새겼습니다. 남이 그려준 선물로서의 자화상에 만족하지 않고 한걸음 더 광야로 나아가는 실천의 세계를 가져보려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위와 실천에 따른 자신만의 경험이라는 앙금이 남습니다. 도토리를 묵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떫은맛을 여러 차례에 걸쳐 물로 걸러내고 우려내서 앙금만을 굳혀 가루로 만들어내듯이 내 삶에서도 무수한 욕망의 찌꺼기와 떫음을 걸러내고 지혜의 앙금만을 얻어내고자 합니다. 도토리 가루를 나누어 먹듯이 그러한 지혜도 나누어 먹어야 풍요롭겠지요. 고대광실보다는 고즈넉한 시골 초가집의 정기어린 풍요로운 삶을 꿈꾸어봅니다. 인생의 무수한 떫은맛들을 떨쳐내고 간결한 형식주의적인 추상성에 삶을 내맡기며 감각적이기보다는 사유-적이고 시각적 optical이라기 보다는 개념적 conceptual이기를 꿈꾸어봅니다.
신년 새해의 덕담으로 대신해 봅니다.
읽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