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 영풍문고 앞에서 동학과 전봉준 장군을 회상하다.
2018년 4월 24일 아침, 우산을 쓰고 터미널에 가서 서울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녹두장군 전봉준의 동산 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동학의 상징인 전봉준 장군의 동상이 정읍 황토현과 전주 덕진공원에 이어 나라의 심장인 서울 종로 거리에 세워지는 역사의 현장을 보고, 정여립동상 건립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수십 여 권의 책을 쓰기 전, 제 일 첫 번째 책이 동학농민혁명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동학의 산 그 산들을 가다>였고, 1994년에 김개남장군 추모비(신영복 선생이 쓴 글씨)와 1995년에 손화중 장군 추모비를 세웠던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동학은 언제나 내 마음 속에 큰 짐으로 남아 있어서였다.
우금치 싸움에서 일본군에게 패배한 전봉준 장군은 태인에서 동학군을 해산하였다. 그 뒤 부하 접주였던 김경천의 고발로 순창 피노리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돼 전옥서(典獄署)에 수감 되었다. 그곳이 바로 지금의 종로 영풍문고 자리다.
전봉준에게 일본인이 찾아와 말했다.
“당신이 국사범이기는 하나 사형에까지 이르지 않으니 살려달라고 요청하라” 그러자 전봉준은 다음과 같이 거절하였다. 고 하자
“내 구구한 생명을 위하여 활로를 구함은 본의가 아니다. 그런 비열한 마음을 가리고 내가 어찌 살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죽음을 기다린 지 이미 오래다.” 그
드디어 전봉준은 법무아문으로부터 <군복기마로 관문에 작변한 자는 곧바로 참한다>는 판결문을 받았다. 전봉준은 말했다.
“정도를 위해 죽는 것은 조금도 원통할 바 없으나 오직 역적의 이름을 받고 죽는 것이 원통하다.”
전봉준은 1895년 4월 23일 재판소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서 다음 날 교수형에 처해 졌다.
을미년인 1895년 삼월 스무아흐레(양력 4월 24일) 봄비가 주절주절 내리는 가운데, 전봉준은 그의 동지였던 손화중, 최경선, 성두한, 김덕명과 함께 교수형을 받았다.
법관이 전봉준에게 마지막 할 말을 하라고 하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는 다른 할 말은 없다. 너희는 나를 죽일진대. 종로네거리에서 목을 베어 오고 가는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 옳은 일이거늘 어찌하여 컴컴한 적굴 속에서 암연히 죽이느냐! ”
최후의 순간까지 조선인의 굳센 기개를 잃지 않았던 전봉준을 두고 그 당시 집행총순을 맡았던 사람은 훗날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전봉준이 처음 잡혀 오던 날부터 끝내 형을 받던 날까지 그의 전후의 행동을 잘 살펴보았다. 그는 과연 보기 전 풍문으로 듣던 말보다 훨씬 돋보이는 감이 있었다. 그는 외모부터 천인 만인의 특으로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청수한 얼굴과 정채 있는 미목으로 엄정한 기상과 강장한 심지는 세상을 한번 놀랠 만한 대 위인, 대 영걸이었다. 과연 그는 평지돌출로 일어서서 조선의 민중운동을 대표적으로 대 창작으로 한 자이니 그는 죽을 때까지라도 그의 뜻을 굴치 아니하고 본심 그대로 태연히 간 자이다.”
오지영의 「동학사」에 실린 글이다.
어지러운 세상 수난의 땅 남녘에서 태어났던 의로웠던 영웅 전봉준은 가슴에 사무치는 유시 한편을 남겼다.
운명(殞命) 전봉준 유서
때를 만나서는 천하도 힘을 합하더니 (時來天時皆同力)
운이 다하여 영웅도 어쩔 수 없구나 (運去英雄不自謀)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위한 길이 무슨 허물이냐 (愛民正義我無失)
나라를 위한 일편단심 그 누가 알리. (愛國丹心誰有知)
그가 세상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던 그 자리, 영풍문고 건너편에 종각이 서 있고,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두고 구름처럼 사람이 모였다가 흩어진다고 해서 운종가라고 불렀다.
그 자리 구름처럼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전봉준 장군의 동산 제막식을 지켜보았다.
그가 이루고자했던 세상은 아직도 멀다. 하지만 그나마 이 땅에 민주주의가 꽃을 피우기 시작했고, 그래서 따라 부르는 파랑새 노래는 꿈이 되고 희망이 되고 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1.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2.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은 새야
녹두꽃이 떨어지면 부지깽이 매 맞는다.
3.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은 새야
엄마 죽은 넋새보오. 엄마 죽은 넋이외다
4. 새야새야 파랑새야 너는 어이 날라 왔니.
술잎댓잎 푸릇푸릇 봄철인가 날라 왔지.
‘새야 새야 파랑새야’란 참요만 남기고 그는 그렇게 갔다. 그의 나이 마흔 한 살, 그가 세상을 등진지 123년이 흐른 뒤, 그가 삶을 마감한 그 자리에 앉은 모습의 동상이 세워졌다.
역사는 세월이 흐르면서 수많은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역사 속에서 승자와 패자는 과연 누구인가?
2018년 4월 25일 수요일,
1994년 전주 덕진공원에 김내남 장군을 세울 당시 함께 준비했던 이이화 선생님과
그 당시 김개남가를 불렀던 소리 꾼 김연, 그의 딸이 소리를 배워 가업을 잇고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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