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성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시오며 주의 종이 이 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주의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 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께서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증거된 아래의 본문 말씀에 있어서 처음에는 포로된 잡혀간 바벨론 땅에서 그렇게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기도했지만 시간에 지나면서 그 성전이 불타게 되었기에 아래 본문 당시의 시점에서는 그러한 성전이 있었던 예루살렘을 향해서 기도한 것이었는데 어쨌든 그러한 성전과 관련해서 가장 전심으로 간구했던 자들에 있어 대표적인 믿음의 선배들 중 한 사람은 다니엘이었던 것으로..
다니엘 6장 10절에서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라고 증거되어 있는 것에서도 잘 확인할 수 있는 것이듯이 심지어는 그 이방 바벨론 땅에서 대적들의 음모로 인해 목숨을 잃게 되는 상황이고 세상적으로는 사자굴에 던져 지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 보이는 함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까지 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오늘날의 우리들로 치면 그 있는 자리에서, 그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으며 가장 절실하고 치열한 믿음과 함께 오직 한 분 바로 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과 근본적으로는 다를 수 없는 것으로..
요한복음 2장 19~21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라고 증거되어 있는 말씀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듯이 바로 그러한 성전이라는 것이 구주 예수님과 어떤 식으로든 직결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우리들과는 달리 구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시기 전의 구약의 믿음의 선배들과 권속들은 오늘날의 우리들과 같이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에 있어서, 또한 그 예수님의 이름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명료할 수 없었고, 심지어는 예수님의 이름도 정확하게 알 수 없었던 시기였던 것인데..
물론 그렇다고 그러한 구약의 믿음의 선배들과 권속들이 구원에 참예케 된 자들이 아닌 것일 수는 없는 것이며, 게다가 아무리 구약 시대라 하더라도 구주 예수님 외에 다른 방법과 통로로 구원에 참예케 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고, 실상은 아예 그러한 발상 자체부터가 완전 모순인 것이고 아예 불가능인 것으로 그 구약의 때에는 굳이 표현하자면 다만 메시야, 곧 오실 메시야 정도로 구주 예수님과 생각 이상으로 연계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구약의 믿음의 선배들과 권속들이 믿음으로 구원에 참예케 될 수 있는 것일 뿐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들이 순간순간마다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고 붙잡으며 그 이름으로 기도하고 찬미하면서 바로 그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으로 인한 시공을 넘는 하늘의 힘과 은혜와 실제를 덧입어 죄악들과 싸우고, 혹 범하게 된 죄악들에 있어서는 최대한 빨리 자복하고 돌이킴과 함께 다른 그 무엇보다 최우선으로 말씀을 정말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모하고 가까이할 수 있게 되는 것과 근본적으로는 동일하게..
실제로 아담과 하와 때부터 여자의 후손에 대한 계시를 위시해서 여러 모양의 피 제사와 희생 제물들, 유월절 어린 양, 모세를 통한 장대 위의 놋뱀, 모세의 지팡이, 깨어진 반석, 회막, 지성소, 제사장, 선지자, 멜기세덱, 제사장과 선지자 역할을 했던 믿음의 선조들 등과 같이 미리 구주 예수님에 대해 보이시고 안내하시며 연결될 수 있게 하신 다양한 예표와 모형과 그림자들, 약속과 계시와 상징들 등을 통해 말 그대로 오실 메시야를 믿고 의지함으로 인해 구원에 참예케 되고 살아 있는 말씀의 신앙이 될 수 있게 하신 것이며,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들 중 하나가 바로 아래의 본문에서와 같은 예루살렘의 성전인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구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그렇게 구주 예수님에 대한 예표와 모형과 그림자들, 약속과 계시와 상징들 등을 통해 상대적으로 명료하지 못한 것이기는 하나 어쨌든 구주 예수님과 다를 수 없는 분인 오실 메시야를 믿고 의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온갖 모양의 구원의 일들이 가능할 수 있었고 생생할 수 있었던 것은 단적으로 말하면 그 정도로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 목숨값 구원이 시공을 뛰어 넘고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한 것이고, 그 이상으로 합당할 수 있었던 것이기 때문인 것으로..
곧 온 세상과 전 인류, 모든 시간과 공간보다 더 크시고 온 우주보다도 더 크시며 영원보다도 더 작으실 수 없는 성자 하나님이시자 구원자이시며 중보자이시고, 특히 아담과 하와 때부터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깨어지고 단절케 되며 본질적으로는 말씀을 잃어버린 것이고 영적으로는 진노와 저주와 사탄과 음부와 사망과 심판들의 노예 상태에 빠진 우리 인생들과 하나님 아버지 사이의 길과 통로와 접점 등의 위치와 역할의 구주로서 십자가에서 그 목숨값으로 우리 인생들에 있어 이 세상에서 뿐 아니라 세상 끝 날과 신령한 몸으로의 부활, 영원한 나라,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대속과 대신, 나음과 화평 등을 위한 값과 대가들을 대신 다 치르심과 함께 시대와 나라들을 넘어 모든 구원을 다 이루신 구주 예수님으로 인한 십자가 목숨값 구원에 대략 2000년이라는 시간과 어마어마한 공간들을 뛰어 넘어서 오늘날 이 시대의 우리들 뿐 아니라 아래 본문 당시의 솔로몬을 위시한 모든 구약의 믿음의 선배들과 권속들까지도 다 포함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성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시오며 주의 종이 이 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주의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 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께서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열왕기상8:29~30)
*양범주목사의 '21세기 두란노서원'/2024년 9월 24일(화)1부/사진 조연진사모, 이미지 박원영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