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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의 특성(2)
신 30:11-20
11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12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13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14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15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16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17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18 내가 오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할 것이니라
19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신 30:11-20 /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말씀]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전한 이 명령은 여러분이 깨달을 수 없을 만큼 어려운 것도 아니요 도달할 수 없을 만큼 먼 곳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12) 그것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로 올라가서 그것을 가져다가 우리에게 들려주어 우리가 그대로 할 수 있게 하겠느냐?' 하고 한탄할 필요가 없습니다. 13) 그것은 바다 건너편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것을 가져다가 우리에게 들려주어 우리가 그대로 할 수 있게 하겠느냐?' 하고 한탄할 필요도 없습니다. 14) 그것은 여러분에게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입 속에 있고 마음 속에 있어서 언제든지 행할 수 있습니다. 15) [생명과 죽음의 선택]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다음 두가지 가운데에서 하나를 선택하시기를 촉구합니다. 생명을 택하고 복을 받으시겠습니까? 죽음을 택하고 재앙을 당하시겠습니까? 16)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전한 여호와의 명령에 여러분이 순종하여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주께서 가르치시는 길로만 걸어가고 주님의 계명과 규정과 명령을 다 지키면 여러분이 살아 남아서 점점 더 번창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이제 들어가 차지할 땅에서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17) 그러나 만일 여러분의 마음이 변하여 여호와께 순종하지 않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을 경배하고 섬기면 18) 여러분이 틀림없이 멸망한다는 것을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일러둡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요단강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결로 오래 살 수 없습니다. 19)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생명을 택하고 복을 받으시겠습니까? 죽음을 택하고 저주를 받으시겠습니까? 부디 여러분은 생명을 택하여 후손들과 더불어 오래오래 사십시오. 20) 오직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분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며 그분에게만 매달려서 떨어지지 마십시오. 그러면 여호와께서 여러분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겠다고 맹세하면서 약속하신 땅에서 여러분이 오래오래 살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명과 장수가 모두 여호와께 달려 있습니다.'
선 택
신 30:15-20 / 조용기 목사
우리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선택할 수 없는 것과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21세기에 살고 있다는 것은 우리 힘으로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대한민국에 한국인
으로 태어난 것도 우리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특정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자녀로 태어난 것도 운명이지 선택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도 많습니다. 지구촌 어느 곳에서 살 것인가, 어느 상대
를 인생 동반자로 삼을 것인가, 어떤 직업을 택할 것인가,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음식을 먹
으며, 누구를 만날 것인가 등은 우리가 선택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택
할 수 없는 것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예정 속에서
인생을 어떻게 살아 갈까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1. 아브라함의 예정과 선택
하나님은 아브라함에 대한 예정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으로 예정한 것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에서 3절에 “여호와께
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
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
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입니다. 절대주권적인 하나님이 만세전에 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예’, ‘아니오’라고 말 할 권한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예정
에 대해서 절대복종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정 안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예정한 뜻을 온전히 복종할 것이냐,
불순종 할 것이냐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으로 갈 때 불완전
한 순종을 했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고 했는데 아브라함은 친척을 거느려 조카
롯도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서 기근을 당했을 때에도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습니다. 그는 아내 사라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예
정안에서 선택은 스스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애굽에서 아브라함은 굉장한 모욕과 멸
시와 고난을 경험하고 회개한 뒤 원래 하나님이 예정하신대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습니
다. 가나안으로 돌아온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 함께 살 것인가? 아니면 롯과 결별할 것인
가?’의 선택의 기로에 놓였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 결별했습니다. 비로소 하나
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고 복종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85세때 자녀가 없으므로 아내 사라의 몸종인 하갈을 취해서 첩으로 삼았습니
다. 그런데 이것은 잘못된 선택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기다렸으면 좋았을
텐데 잘못된 선택을 함으로 개인뿐 아니라 주위와 후세에 지울 수 없는 치욕을 안겨주게 되
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된 선택을 하면 우리의 삶과 주위의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
치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잘못된 선택으로 하갈을 택해서 이스마엘을 낳게 되고, 이스마엘
은 아랍민족의 조상이 되었는데, 4천년이 지난 현재에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아랍과는 피비린내 나는 대결과 싸움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 각처에서 기독교대 이슬람 문명은 계속 충돌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와 이슬
람 문명의 충돌이 결국 3차 대전으로 이어지지 않을까하는 추측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
것도 근본적으로 아브라함의 잘못된 선택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입니다. 때문에 선택
이라는 것이 얼마나 우리 삶 속에 중요한 영향력을 미친다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입
니다.
2.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
우리의 구원은 선택할 문제가 아닙니다. 만세전에 예정된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겠다,
안 받겠다, 혹은 예수를 믿겠다, 안 믿겠다 하는 것은 우리 자유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
닙니다. 에베소서 1장 3절로 4절에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
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
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
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볼 때 창세전에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택하사
그리스도안에서 구원을 얻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것이요,
예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절대주권으로 우리를 택하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를
믿겠다 안 믿겠다 마음대로 주장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예정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시편 139편 16절에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
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
님께서는 영원전에 이미 우리들을 보시고, 아시고, 예정하시고, 택하사 크리스천이 되게 하
신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은 우리들이 얼마나 더 하나님의 은혜 속에 깊이 들어 갈 것인가, 안 들
어 갈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죄를 용서 받고 난 다음 우리가 의롭
게 살 것이냐, 죄와 타협하여 살 것이냐도 우리의 결단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4절에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우리가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
고 살 것이냐, 세상과 타협하고 살 것이냐는 우리의 선택과 결단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한 예정이지만 구원받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
라 신령하고 헌신적으로 살 것인지 아닌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
리의 행동에 대해서 나중에 책임을 지고 심판을 받아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병에서 해방되어 치료와 건강을 얻고 살 것이냐 병과 타협하여 살 것이냐는 것도
우리의 선택과 결단에 달렸습니다. 마태복음 8장 17절에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
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고 기록
하고 있는데 이 진리를 받아 들이고 병과 대결할 것인가 아니면 병과 함께 일생을 공존하
며 살겠는가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과 결정에 달려있습니다.
가난과 저주에서 아브라함의 복을 받고 살 것이냐, 가난과 저주 속에 그냥 뒹굴며 살 것이
냐는 하는 것도 우리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서 14절에 “그리스도께
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
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
려 함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저주를 다 제하시고 예수 그리
스도를 통해서 아브라함의 복이 임하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또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내게 더하시리라고 하셨습니
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진리요,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
이 아니요, 하나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
리가 이 말씀을 전적으로 믿고 순종하며 실천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는 우리의 선택
에 달려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 1절로 2절에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
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 기록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헛되이 받을 수도 있고 올바르게 받을 수
도 있습니다. 우리들의 삶에 성공과 실패는 우리의 선택의 열매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들은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신 은혜와 말씀을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결정 내려야 합니다.
또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해야겠다는 것도 우리가 선택하고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
다. 그리고 믿음으로 살기로 마음에 결단을 내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7절에
서 38절에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
느니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믿음으로 살고 뒤로 물러가지 말라고 하나님이 권면하셨는데
구원은 하나님의 예정을 통해서 받지만 구원받고 난 다음 얼마나 하나님께 헌신하고 순종
하고 믿고 하나님의 복을 받고 살 것이냐, 미지근하게 타협하고 온전한 헌신과 믿음으로 살
지 못하다가 나중에 하나님께 꾸중을 듣고 채찍을 맞고 견책을 당할 것이냐 이것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선택
우리들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그리스도 안에서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예
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택해야 합니다. 십계명의 제1계명이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이고 제2계명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들을 만들지 말고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입니다. 이것은 타협할 수 없는 문제입니
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조그마한 이익이 다가온다고 다른 신을 섬기고 우상에 절하면 하
나님께 버림 받게 됩니다
생명과 복을 마음에 택하고 사망과 실패와 저주의 생각을 택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생명과 복의 생각도 있고 사망과 실패와 저주의 생각도 있습니다. 그 중
에 우리가 생명과 복을 택하고 사망과 저주를 택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환경
이 어렵고 고통스럽고 스산하면 사망과 저주를 생각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택하게 됩니
다. 그러나 우리들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들
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을지라도 마음속에 하나님이 복 주시고 은혜 주시고 도와 주실 것
을 생각하고 생명과 복을 마음에 택하여 채우면 그 어려운 환경을 꿰뚫고 그대로 되는 것입
니다.
또 치료와 건강을 마음에 택하고 병과 죽음을 받아 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작은 병에 걸렸
을 때 ‘나는 병들어 죽겠지’는 생각을 가지면 그 생각대로 됩니다. 병에 동조하고 병에 완전
히 굴복당하면 그대로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병이 공격해도 ‘나는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저
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었다. 저가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
고 가시리니 나는 굴복하지 아니한다. 나는 건강하다’라고 단호하게 생각하면 그대로 됩니
다.
시편 103편 3절에서 4절에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
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와
서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동안에 생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희망과 낙관과 긍정적인 삶을 선택하고 절망과 비관과 부정적인 삶을 선택하지 말
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환경은 다 똑같습니다. 똑같은 환경에 노출되어 있지만 그
곳에서 희망과 낙관과 긍정적인 삶을 택하는 사람이 있고 절망과 비관과 부정적인 삶을 택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돛단배 두척 바다에 떴네. 불어오는 바람 따라 한 배 동으로 가고 다른 배 서로 가네’라는
시가 있습니다. 같은 바다 위에 같은 방향의 바람이 부는데 돛단배 두척이 한배는 동으로
가고 다른 배는 서로 갑니다. 그 돛의 방향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시편 91편 2절로 6절에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군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
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
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들리고, 손
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면 승리와 축복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우리가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희망과 낙관과 긍정적인 삶
을 택하고 절망과 비관과 부정적인 삶을 택하지 않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한 행복을 택하고 불행을 택하지 마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불행
을 택합니다. 신명기 10장 13절에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
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음 속에 불행을 택하고 행복을 택
하지 않는다면 생활에 언제나 그늘이 집니다. 그러나 역경속에서도 행복을 생각하고 행복
을 택하고 행복한 말을 하면 여러분의 생활이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사랑과 행복의 근원은
오직 주 하나님이시기에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고 그 안에서 행복을 생각
하십시오.
또한 성공을 택하고 실패를 택하지 마십시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실패자’라는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
라”(마가복음 9장 23절)고 하셨고, 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한삼서 1장 2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속
에 성공을 택하고 실패를 택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겸손을 택하고 교만을 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예수 그리
스도와 하나님을 높이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베드로전서 5
장 5절로 7절에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
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
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울왕은 처음에는 겸
손해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으나 후에 교만하고 불순종한 결과 하나님이 낮추고 버렸습
니다. 나아만 장군은 처음에 교만했으나 나중에 깨어지고 겸손해져서 요단강에 일곱 번 목
욕하고 문둥병이 나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을 택하고 교만을 택하지 말아야 합니
다.
그리고 용서와 사랑을 택하고 미움과 원한을 택하지 마십시오. 이 세상에 살면서 미운 사
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미움은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남
을 파괴하기 이전에 자기의 마음을 파괴합니다.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에 평안과
기쁨과 행복을 위해서 용서와 사랑을 택하고 미움과 원한을 택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그 마음에 가득한 것이 밖으로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생각은
마음에 자기에 대한 꿈을 낳게 되고 그 꿈은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그에 따른 믿음을 낳
고 믿음은 삶에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내가 이땅에 태어난 것은 운명입니다. 우린 선택권이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21
세기 서울에서 살고 있는 것은 예정입니다. 우리가 선택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도 하나님의 예정이십니다. 우리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우
리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예수님을 따라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행복하게
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은 우리의 자유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정적이고 비관적이
고 항상 절망적이 되어서 우리 인생의 파탄이 이는 것은 잘못된 선택에 달려 있는 것입니
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우리 삶의 열매가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붙어 있으라
신 30:15-20 / 홍문수 목사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금문교(Golden Gate Bridge)라 불리는 다리가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알려져 있죠. 그런데 그 아름다움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최고의 안전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된 데는 특별한 비결이 있습니다. 조셉 B. 스트라우스라는 건축가가 설계했는데, 레드우드(Redwood)라는 나무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이 나무는 수령이 긴 것이 특징인데, tfud이 수백 년에서 심지어 2천 년이 된 것도 있다고 합니다. 그 나무가 그렇게 오래 살 수 있는 비결은 뿌리가 아주 깊고, 특히 뿌리가 견고한 바위를 칭칭 감고 있다는 점입니다. 마치 바위를 꼭 붙들고 있는 모습이죠. 그래서 장구한 세월 모진 풍파에도 버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 착안해서 금문교를 세울 때 지하 암반까지 깊이 파고 지주를 촘촘히 세웠다고 합니다. 그 결과 강한 지진이나 바람에도 끄떡없이 최고로 안전한 다리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풍파가 있습니까? 도전이 있습니까? 그런 가운데 든든히 서서 승리하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강한 데 붙어 있으면 됩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게 무엇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을 가장 안전하게, 견고하게 붙들어 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인 줄로 믿습니다. 그 외에 세상 어느 것도, 그 누구도 우리 인생을 견고하게 지탱해주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 성경이 바로 그런 사실을 증거해 줍니다. 이 말씀을 통해 다시 한번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의 중요성을 확인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아무쪼록 하나님 한 분만 굳게 의지함으로 늘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은 출애굽 후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광야를 통과하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이제 광야 생활도 어언 40여년이 지나 가나안 땅이 지척에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는 임종을 예감하고 그동안 백성들에게 전했던 하나님의 말씀을 총 정리합니다. 그 기록이 곧 ‘신명기’입니다. 신명기라는 표제가 ‘두번째 율법’이란 뜻인데, 하나님 말씀을 다시 복습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모세로서는 유언과도 같이 심각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는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 중에서도 결론적인 부분입니다. 31장~35장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부록과 같은 것이고, 신명기 전체의 정말 중요한 결론은 본문인 것입니다.
[1] 모세의 마지막 당부 : 생명과 복의 길을 선택하라
여기서 모세가 강조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15절.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 백성 앞에 두 갈래 길이 있으니 잘 생각하고 결단하라는 겁니다. 그 두 갈래 길이 무엇 무엇입니까? 생명과 복의 길, 그리고 사망과 화의 길입니다. 생명과 사망은 각각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사망, 즉 천구과 지옥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복과 화는 각각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받는 축복과 저주를 가리킵니다. 그 두 갈래 길 중에 어느 길로 가느냐? 그것은 백성들이 각각 선택하고 결단하는 데에 따라 결정됩니다. 16절.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면 생명과 복을 얻게 된다는 겁니다. 17절~18절.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치 못할 것이니라” 하나님 대신 세상의 신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반드시 멸망한다는 겁니다.
[2] 생명과 복의 길을 위한 요구 : 하나님께 부종하라 = 붙어있으라
모세는 이 두 갈래 길을 제시하면서 그 중에 생명과 복의 길을 선택할 것을 다시 한번 강력하게 촉구합니다. 19절~20절. 19절에 천지를 불러서 증거를 삼는다는 것은 약속의 불변성, 영구성을 의미합니다. 천지가 변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도 변치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꼭 생명의 길, 축복의 길을 선택하라는 겁니다. 이를 위해 20절에 하나님을 사랑하라, 말씀에 순종하라, 부종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부종하라’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신앙을 선택하고 결단하되 신앙을 아주 견고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부종(附從)하다’ 이 말은 본래 히브리어로 ‘다바크’인데 ‘연합하다’ ‘밀착하여 달라붙다’ 등의 뜻입니다. 어느 정도로 밀착되느냐 하면 아교(접착제)로 붙여 하나로 만든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연합 관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신앙하되 그냥 대충 믿는 게 아니라 철저하게 믿고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라는 겁니다.
성경 보면 곳곳에 우리의 신앙을 가리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로 설명합니다. 그 관계는 긴밀한 연합 관계입니다. 그것을 잘 설명하게 위해 여러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그 중 두 가지 예만 들어보죠.
하나는, 부부 관계입니다. 창2:24 보면 결혼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여기서 ‘연합’이란 단어가 본문 20절의 ‘부종’이란 단어와 같습니다. 접착제로 붙여 하나로 만들 듯 하나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결혼의 비유를 가지고 예수님과 교회(성도)의 관계를 설명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엡5:31~32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니까 우리 신앙은 마치 부부 생활을 하는 것 같다는 겁니다.
다른 하나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입니다. 요15:5~6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포도 나무와 가지는 뗄 수 없는 생명적 관계를 가집니다. 그것처럼 하나님과 성도와의 관계는 밀착된 관계입니다. 이른 바 신비로운 연합 관계입니다. 그런 관계를 맺고 교제하는 것이 곧 신앙 생활인 것입니다.
[3] 하나님께 붙어 있는 자의 축복
하나님께 붙어있으면 어떤 축복이 주어지는가? 15절에 ‘생명과 복’으로 설명하는데,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영생의 축복과 형통의 축복입니다.
① 영생의 축복 : 인간은 죄인이므로 영원히 죽습니다. 육신이 멀쩡해도 영적으로는 이미 죽은 자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사망을 당하게 됩니다. 오직 생명이신 하나님을 만나야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입니다.(요14:6) 그래서 dyu일5:11~12은 예수님을 영접한 자만이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합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예수 그리스도)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고대 신학자 어거스틴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본래 방탕한 사람이요 마니교 같은 사교에 빠졌던 사람입니다. 그의 어머니가 오랜 세월 눈물로 기도하던 그 어느 날 밖에서 어린이들이 놀면서 부르는 노랫말을 듣게 됩니다. “Tolle, lege "(라틴어=취하여 읽으라) 그 소리가 마음에 부딪쳤고 그는 그 말대로 성경을 들고 읽기 시작합니다. 그때 읽은 구절이 롬13:12~14입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그후 그는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그리고 영혼의 참 평안을 얻게 됩니다. 그것이 그가 얻은 영생입니다. 영생은 장차 천국에 가서 영원히 사는 것은 물론이고 이 세상 사는 동안에도 주님 때문에 영적 평안을 누리는 삶 자체입니다.
② 형통의 축복 : 하나님께 붙어 있으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책임져 주십니다.
험한 세상 살 동안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승리케 하십니다. 요일5:18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사41: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시121:5~8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 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때때로 어려운 일을 만나면 믿는 성도라도 순간적으로 갈등을 하게 됩니다. 당장 하나님이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눈앞의 현실이 너무 어렵다 보면 보이는 것에 붙으려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은 어려울 때일수록 결단하고 하나님께 붙어야 합니다. 그러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여순 반란(1948년) 당시의 일입니다. 여수에 교계 지도급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반란군이 유지들을 체포할 때 함께 붙들려 갔습니다. 반란군이 소리를 지르며 협박을 합니다. “이 중에 예수쟁이들 있으면 손들어!” “여기 목사도 있지. 앞으로 나와!” 순간 그 목사님은 마음 속에 갈등을 느낍니다. 앞으로 나가면 보나마나 죽는데 모르는 척 할까 ... ? 그러나 하나님이 보고 계신데 양심을 속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손을 들고 앞으로 나갔더니 ... 간부인 듯한 사람이 소리를 지르며 야단합니다. “내가 이 악질 분자를 산으로 끌고 가서 처형하고 올테니 그동안 동무들은 나머지 놈들 상본 조사를 하시오!” 목사님은 체념한 채 끌려갔습니다. 그런데 산 속에 들어가자 그 군인이 태도를 바꿉니다. “목사님! 저도 한 때 교회 다녔는데 이렇게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어서 피하세요!“ 하면서 공중을 향해 총을 난사하더랍니다. 그래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붙어 있으면 그 어떤 상황 속에서라도 하나님이 붙들어 주실 겁니다.
성경 인물들을 살펴봐도 이런 사실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 붙어 있던 사람은 반드시 승리했습니다. 반면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사람은 반드시 멸망했습니다. 아브라함을 버리고 떠난 롯은 세상의 부와 향락을 찾아 죄악의 도성 소돔으로 갑니다. 결국은 망하죠. 전쟁을 만나고, 나중에는 유황불 심판 와중에 빈 몸으로 도망 나옵니다. 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붙어 끝까지 가나안 땅을 고수했을 때 날이 갈수록 축복을 받게 됩니다. 오늘날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뿐 아니라 만민 중에 믿는 자의 조상으로 우뚝 서 있습니다. 룻과 오르바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오미 가족이 모압 땅에 이민 가서 얻은 며느리 룻과 오르바 ... 남편들이 죽자 나오미는 이스라엘로 돌아가려 합니다. 두 며느리가 측은해서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권합니다. 오르바는 떠나갑니다. 그 이름이 영영 사라집니다. 아마 그녀는 자기 민족에게 돌아가 모압신을 섬기다 멸망하고 말았겠죠. 그러나 룻은 끝까지 나오미를 따라갑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입니다!” 이게 룻이 끝까지 따라갔던 이유입니다. 결국 룻은 보아스를 만나 행복을 얻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메시야의 조상이 되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룻이 이렇게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한 가지 하나님께 붙어 있었던 것입니다.
[4] 하나님께 붙어있는 방법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붙어 있는 것일까요?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죄와 분주함입니다. 우리는 죄를 피하게 위해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현대인들에게 흔한 분주병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요즘은 이런 인사가 유행합니다. “많이 바쁘시죠?” 이렇게 인사하면 상대방을 대단한 인물로 인정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맹점이 있습니다. 덜 중요한 일에 분주하다가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는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르다보다 마리아를 칭찬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해야 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 다음의 세 가지를 열심히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 붙어있게 됩니다.
① 말씀 묵상 : 복 있는 사람은 늘 말씀을 묵상하는 성도입니다.(시1:2)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 붙어 있는 자로서 마치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와 같습니다. 반면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고 죄 가운데 사는 악인은 마치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했습니다.
② 기도 생활 : 기도는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하는 방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붙어 있기를 원하는 사람은 늘 기도해야 됩니다. 살전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루의 생활 중에 정규적인 기도 시간을 확보해야 됩니다. 그리고 생활 가운데 무슨 일을 하든지 순간순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실천해야 됩니다. 예수님은 늘 바쁘고 피곤한 생활을 하셨지만 하루가 시작되는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됩니다.
③ 성도의 교제=충실한 교회 생활 :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교회에 소속되고 교회 생활에 충실하게 참여함으로 하나님께 붙어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모임들, 예배는 물론이고 봉사, 교제, 교육 등 모든 활동에 자신의 형편 가운데 최대한 참여해야 됩니다. 특히 주일성수(主日聖守)는 중요합니다. 주일은 주유일(注油日)입니다. 주일은 예배 등 다양한 교회 활동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를 받는 날입니다. 그런데 이런 저런 핑계로 주일을 빼먹다 보면 한 주, 두 주 지나면서 영적으로 다운되고 고갈됩니다. 그럴 때 마귀가 틈타고 고난이 닥쳐올 때 무너지고 맙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 우리는 과연 뭣에 붙어 있습니까?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혹시 세상 것들에 붙어 있지 않나요? 재물에, 권세에, 인맥에, ... 그런 것들에 붙어 있다가 모래땅에 심겨진 나무가 바람이 불 때 뿌리째 뽑히는 것과 같이 망할까 두렵습니다. 세상 것에 붙어 있어봤자 마중에는 함께 망하고 맙니다. 개인이나 가정 외에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제에, 정치에, 강대국에 붙어 있는다고 보자오디는 게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 붙어 있어야 개인도, 가정도, 나라도 든든히 서게 될 줄로 믿습니다. 아무쪼록 모세가 마지막 유언처럼 엄숙하게 증거한 “너희는 여호와께 부종하라!” “너희는 하나님께 붙어 있으라!”는 귀한 말씀 붙들고 꼭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으니
신 30:15-20 / 황광민 목사
옛날 초등학교 교과서에 "3년 고개" 라는 글이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지금까지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어느 동네에 3년 고개라는 전설을 가진 고개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그 고개에서 넘어지면 3년밖에 못산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고개를 넘을 때면 조심해서 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영감님이 고개를 넘다가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순간 소름이 끼쳤습니다. 이제는 3년밖에 못산다는 생각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어디가 까졌는데 어디가 아픈지 그런 것은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는 허둥지둥 걸어 집으로 돌아와서는 자리를 펴고 들어 눕고 말았습니다.
영감이 3년 고개에서 넘어져 자리에 누웠다는 소문이 온 동네에 퍼졌습니다. 많은 사람이 찾아와 위로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중 지혜로운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끙끙 앓고 있는 영감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감님, 무엇을 그리 걱정하십니까? 한번 넘어져 3년 살 것 같으면 두 번 넘어지면 6년 살 것이고 10번 넘어지면 30년은 살 것 아닙니까? 그러면 만수무강 할 것입니다." 영감님은 이 말을 듣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고개로 달려가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수십 번 넘어진 뒤에 돌아와 오래오래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삶이 정해진 것으로 알고 쉽게 체념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운명론적인 요소보다 선택적인 요소가 많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은 이 사실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우리 앞에 생명과 복의 길을, 사망과 저주의 길을 놓으시고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오늘은 봉독한 본문을 중심하여 <복과 저주를네 앞에 누았으니>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말씀을 경청하시고 바른 삶의 길을 선택하라는 생명의 말씀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두개의 길
하나님은 우리 앞에 두 개의 길을 놓으셨습니다. 하나는 생명과 복을 받는 길이요, 다른 하나는 사망과 저주를 받는 길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너희 앞에 두었나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선언하십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 즉..." 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 앞에는 두 개의 길을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도 두 개의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장 13절-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고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가기는 힘들어도 생명으로 가는 길이 있고 쉽고 편해도 멸망으로 가는 길이 있습니다.
그러면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어떤 길입니까? 16절에 있습니다.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며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은총을 누릴 수 있습니다. 또한 망하는 길을 17-18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같이 봉독하십시다.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치 못할 것이라." 즉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반드시 망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풍족하게 주셨을지라도 누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을 찾는 사람들이 적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망하는 길을 택합니다. 얼핏 보면 망하는 길이 더 쉬워 보이기 때문입니다. 망하는 길은 겉으로 보기에는 즐거운 길처럼 보입니다. 그길은 편한 길입니다. 희생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손해 볼 것이 없습니다. 얼마든지 세상을 즐길 수 있는 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멸망으로 인도되는 길입니다.
생명을 택하라
여기서 문제는 생명길을 택하라고 합니다. 망하는 길을 택하지 말고 사는 길을 택하라고 요청합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망하는 길로 갈지라도 살기 원하는 사람들은 생명을 택해야 합니다.
인간은 책임적 존재입니다. 인간은 기계가 아닙니다. 인간은 노예가 아닙니다. 입력된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는 로봇이 아닙니다. 자신의 삶은 자신이 책임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창조하셨습니다. 운명론은 기독교사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운명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운명론은 아주 위험한 사상입니다. 운명론은 사람을 쉽게 체념하게 만듭니다. 진취성, 모험심을 갖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나약한 인간을 만들어 버립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운명을 정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선택하게 하셨습니다. 인간은 생명과 복 받는 길을 택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망하는 길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택한 결과에 대하여는 책임져야 합니다.
물론 인간의 삶의 한구석에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부분도 있습니다. 어느 정도 유전적 요소들이 있습니다. 부모의 잘못 때문에 유전되는 고통도 있습니다. 선대의 우상숭배로 인하여 유전되는 저주도 있습니다. 부모의 죄가 자손 3,4대까지 내려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인의 선택과 상관없이 결정된 부분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을 극대화시키면 운명론이 됩니다. 이것은 역학에서 사주팔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제라도 체념하지 말고 생명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택하고 운명을 바꿔야 합니다. 생명 길을 택하여 가계에 흐르는 저주도 끊어야 합니다. 유전적 요인에 굴복하지 말고 소망을 갖고 생명 길을 택하십시오. 지금이라도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생명 길을 택하면 삽니다. 우리도 살고 자손들도 삽니다. 힘들어도, 희생이 요구되어도 생명 길을 택하십시오. 그게 사는 길입니다.
옛날에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두 친구는 조용한 강둑을 거닐며 앞날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가다보니 갈래길이 나왔습니다. 한 길은 강둑을 따라 계속된 길로서 주위에 과수원도 있고 산책하기에 좋은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길은 언덕으로 향하는 길이었는데 언덕 위에는 작은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다정했던 두 친구는 여기서 헤어졌습니다. 한 친구는 강둑을 따라 계속 걸었습니다. 가면서 과수원의 과일도 몰래 따 먹었습니다. 몰래 따 먹는 과일이 더 맛이 있었습니다. 그 후 그 친구는 훔치는 일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훔쳤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집에 들어가 물건을 훔치다가 주인에게 들켰습니다. 그래서 주인을 죽이고 달아났다가 체포되어 사형언도를 받았습니다.
사형을 얼마 앞둔 어느 날, 신문을 집어든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오래 전에 헤어졌던 친구의 사진이었습니다. 언덕 위로 올라간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는 언덕 위의 불빛에 이끌려 예배당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날 밤 그 친구는 그 곳에서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의 생활은 놀랍게 변해갔습니다. 그는 열심히 공부하여 교수가 되었고 총장이 되었습니다. 또 하원의원이 되었다가 상원의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 신문에 난 것은 대통령이 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미국의 20대 대통령 제임스 아브라함 가필드입니다.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또한 본문에서 모세는 (생명을 선택한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요청합니다. 생명을 선택한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를 따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는 말씀에 이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에 따르라고 요청하는 말씀입니다. 생명의 길을 택한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돌이켜 우상을 숭배하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를 사랑합니다. 또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우상을 숭배합니다. 우상 숭배는 자기 충족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죽는 길입니다. 저주받는 길입니다. 17절을 다시 보십시오.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날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에 순종하고 그를 따르라
성도 여러분! 생명 길을 택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를 따르시기 바랍니다.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의 계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는 거짓말입니다. 그것은 위선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를 따라야 합니다. 생명 길을 택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말씀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아무리 완벽해도 깨뜨릴 수 없습니다.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를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빛으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참되게 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의미있게 만드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복도 주십니다. 16절의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향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할렐루야! 복은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십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기복종교를 배격하십니다.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망하게 되고 비록 풍족한 가운데 있을지라도 그것을 누릴 수 없습니다.
미국의 남북전쟁으로 동족상잔의 피가 강을 이루는 비극의 한복판에서 링컨은 1863년 4월 30일을 전 국민이 금식하는 날로 정하자고 호소하는 연설을 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미국의 비극을 종식시키는 방법은 우리 모두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 그의 자비와 용서를 받을 때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남북전쟁을 위시한 모든 문제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고 그 분의 말씀인 성경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석교가족 여러분! 생명의 길을 택하십시오. 인간의 삶은 운명 지어져 있지 않습니다. 비록 약간의 운명적 요소가 있더라도 이제 하나님을 택하시고 사랑하고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생명의 길을 택해야 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존재입니다. 쉽게 편하다고 사망 길을 따르지 마십시오. 다소 힘들고 희생이 따르더라도 생명 길로 나갑시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다. 그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따르십시다.
너희는 하나님께 부종(附從,cling)하라
신 30:15-20 / 지태일 목사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금문교(Golden Gate Bridge)라 불리우는 다리가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최고의 안전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이 다리가 최고의 안정성을 갖게된 데는 특별한 비결이 있습니다.
조셉 B. 스트라우스라는 건축가가 설계했는데, 레드우드(Redwood)라는 나무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합니다. 이 나무는 수령이 긴 것이 특징인데, 수명이 수백 년에서 심지어 2천 년이 된 것도 있다고 합니다. 그 나무가 그렇게 오래 살 수 있는 비결은 뿌리가 아주 깊고, 특히 뿌리가 견고한 바위를 칭칭 감고 있다는 점입니다. 마치 바위를 꼭 붙들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장구한 세월 모진 풍파에도 버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 착안해서 금문교를 세울 때 지하 암반까지 깊이 파고 지주를 촘촘히 세웠다고 합니다. 그 결과 강한 지진이나 어떤 바람에도 끄떡없이 최고로 안전한 다리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풍파가 있습니까? 도전이 있습니까? 요즘 같으면 얼마나 힘듭니까? 요즘 우리는 모두 힘들다고 합니다. 날씨만 봐도 그 어느 때보다 10년만의 무더위속에 누구나 더워서 밤잠도 제대로 못자는 그런 사정을 이야기합니다. 그 가운데도 체력이 약한 사람들은 새벽에 좀 춥거나 아니면 에어콘으로 인한 냉방병에 때아닌 여름에 감기 걸려 고생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경제사정이 너무 안좋다고 누구나 다 말합니다. 연일 기름값은 최고 가격을 고공하며 경제를 어렵게 하고, 경제 성장은 안되고 오히려 부동산 값이 자꾸 내려가 거래조차 제대로 안되고 전세가 나가지 않아 제 때 이사하는 분들은 이중 삼중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사회 분위기도, 정치형태에 따라 점점 더 복잡해 갑니다. 개혁이냐 반개혁이냐, 진보냐 보수냐, 성장이냐 분배냐, 정치적으로도 과거사 문제, 정체성 문제, 행정수도 이전 문제 찬성이다 반대다. 어느 곳은 땅값이 올라 좋아하는데 어느 곳은 피해 보는 것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아우성입니다.
경제가 심히 어려운데도 언론과의 보도 싸움이나 하고 현재 그렇게 중요치도 않은 사람, 옛날 벌써 죽어 고인인 된 사람들을 들춰내 뭐하겠다는 것인지 모름니다. 본인은 죽었으니 아무 말이 없지만 그 후손들을 어떻게 살라고 재평가니 과거청산이니 하고 있으니 얼마나 어렵습니까?
국외적으로는 일본에 이어 중국이 역사 왜곡을 함으로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문제, 해결 기미가 안보이는 이라크 사태, 우리 군이 파병된 곳은 안전한지, 왜 떳떳지 못하게 몰래 파병하냐, 남북 문제, 힘들어 어렵다 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상황입니다.
개인적으로도, 가정적으로도, 교회적으로도 다 좋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약하고 힘든 모습들, 어제는 그렇게 함께 섬기며 사랑했던 사람들도 짧게 혹은 길게 헤어지는 일들도 이제는 많습니다.
올 한해 정말 어떻게 살아갈까? 때로는 막막하기도 하고 때로는 힘겹기도 합니다. 하루하루가 정말 너무너무 버겁고 무겁기도 합니다.
저도 요즘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미래를 준비하고 앞장서서 인도해 오셨건만 어렵고 일이 지체된다고 해서 그때마다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잊어버리고 때로는 절망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좌절을 하기도 합니다.
주보 뒤에 써놓고 기도하듯이 교회가 귀한 사명 잘 감당하기까지 흔들리지 않고 기도하며 묵묵히 준비하는 교회가 되겠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실감합니다.
사실 지나간 몇몇 교인들은 개척교회를 섬기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닌지라 작은 어깨에 감당키가 어려웠던지 한 두가지 구실을 붙여 교회와 제 곁을 떠나가기도 했습니다. 좋은 일로 떠날 수밖에 없던 가정들도 있고, 또 그렇지 못하게 좀더 편하게 믿거나 살아 보려고 이 눈치 저눈치 보며 한 사람 두 사람, 한 가정, 두 가정 제 곁을 떠날 때마다 얼마나 상심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사랑하고 아꼈던 것만큼 그들이 미워지기고 했습니다. 미워지다가도 문득문득 그들이 보고 싶어지고 그들이 보고 싶을 때마다 남몰래 울고싶은 심정도 많았습니다. 못내 그들을 끌어안지 못한 좁은 내 가슴이 원망스럽기도 했고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한 마음이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줄 믿습니다. 한길을 막으신 하나님은 또 다른 새로운 길을 보여 주셨고, 또 보여 주실 것이고, 한사람을 거두어 가신 하나님은 새로운 사람들을 보내 교회를 섬기게 하셨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하실줄 믿습니다. 또 다시 만나서 귀한 일들을 나누며 감당하는 모습도 그려 봅니다.
이제 무더위도 어제의 비로 한풀 꺽이고, 여러 가지 힘든 상황 가운데도 우리 사랑하는 성도들이, 온 교회가 그런 가운데 든든히 서서 승리하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생각하며 고민하며 기도합니다.
여러분! 강한 데 붙어 있으면 됩니다. 도배지 종이는 힘도 없고 찢어지기도 쉽지만 그것이 강한 벽에 붙어있을 때는 찢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게 무엇입니까?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역사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을 가장 안전하게, 견고하게 붙들어 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인 줄로 믿습니다. 그 외에 세상 어느 것도, 그 누구도 우리 인생을 견고하게 지탱해주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 성경이 바로 그런 사실을 증거해 줍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사는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본문은 출애굽 후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광야를 통과하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이제 광야 생활도 어언 40여년이 지나 가나안 땅이 지척에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임종을 예감하고 그 동안 백성들에게 전했던 하나님의 말씀을 총 정리합니다. 그 말씀을 기록한 것이 바로 '신명기'입니다. 신명기(Deuteronomy)라는 표제가 '두 번째 율법'이란 뜻인데, 하나님 말씀을 다시 한번 복습한다는 의미입니다. 계명을 자세히 설명하는 책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모세로서는 하나님께 부름을 받기 전 마지막 유언과도 같이 심각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는 모세가 전하는 어느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하고 의미가 있는 말씀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 중요한 말씀들중에서도 마지막 결론적인 부분입니다. 31-35장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부록과 같은 것이고, 신명기 전체의 정말 중요한 결론은 본문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다시 보지 못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의 지도자로서 마지막 당부하는 말씀들이 무엇입니까?
1. 두 가지 길중 생명과 복의 길을 선택하라는 것입니다.(15-18절)
15절을 보면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보라"는 말은 주목하라는 뜻입니다.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우리 앞에는 두 가지 길을 하나님이 두셨는데 바로 생명과 복, 사망과 화라는 두가 길입니다. 인생은 항상 이 둘 중에 하나입니다. 생명과 복의 길, 그리고 사망과 화의 길입니다. 생명과 사망은 각각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사망, 즉 천국과 지옥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복과 화는 각각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받는 축복과 저주를 가리킵니다. 그 두 갈래 길 중에 어느 길로 가느냐? 그것은 백성들이 각각 선택하고 결단하는 데에 따라 결정됩니다.
16절을 보면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면 어떤 것이 보장되어 있습니까? "생존하고 번성할 것이요. 복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이 잘못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한 사람이라도 잘못되는 것 원치 않습니다. 혹시라도 잘못해서 사망을 택하고 저주를 택할지 몰라서 두 번씩 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꼭 생명과 복을 택하고 사망이나 저주를 택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말씀을 듣지 않고 다른 것을 택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다. 그럴 때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17-18절에 예방차원에서 미리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치 못할 것이니라" 두 가지 중요한 것을 말씀하십니다. 1) 너희가 반드시 망하리라. 2) 너희의 날이 장구지 못하리라/ 하나님을 떠난 생명도, 물질도, 번영도, 권세도, 즐거움도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 알려주셨으면 많이 알려주신 것입니다. 다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정답을 택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틀린 답을 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 준비해 둔 것은 생명과 복인데 그걸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받지 않아야 할 것은 받고, 받아야 할 것은 못받고 사망이나 저주나, 재앙을 받게 되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왜 사람들이 이렇게 될까요?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엉뚱한 선택을 하게 됩니까?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17절에 보면 중요한 단어가 하나 나옵니다. "마음"이라는 단어입니다. 17절 초반 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다.
"그러나 너희가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마음을 열고 듣고 따르면 될텐데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마음을 닫아버립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마음을 돌려버립니다. 반대로 가 버립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선택은 내 자유다'. '내 맘대로 할 수 있다'. '내 맘대로 한다는데 누가 뭐랄거냐?' 이성적으로 생각한다기보다는 감정적으로 고집 부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진리에 대해 마음을 닫아 버리면 그 다음 반드시 따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유혹'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다음에 나오는 표현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유혹을 받아서'라는 표현입니다. 사람이 진리에 대해 마음을 열면 유혹이 들어올 공간이 없습니다. 진리가 가득 차있는데 유혹이 어떻게 들어옵니까? 왔다가도 진리에 쫓겨 도망가게 됩니다.
그러나 진리에 마음을 닫아버리면 진리 아닌 것들이 들어오게 됩니다. 인간의 마음은 진공 상태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인가가 담아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항상 뭔가로 채워있어야 안정감을 느낍니다. 진리로 채워있던, 거짓으로 채워있던 하여튼 뭔가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채워져 있지 않으면 방황합니다.
사람들이 제일 방황할 때가 언제입니까? 마음이 공허할 때입니다. 이런 때는 무엇인가를 찾아 헤맵니다.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이나 먹고 마시고 채우려 합니다. 아무 곳이나 가지 말아야 할 곳도 가려고 합니다. 그래 뭔가에 미쳐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또 유혹이 찾아오면 사람은 분별력을 잊습니다. 그래서 뻔히 잘못된 길 인줄 알면서도 가게되고, 죽는 줄 알면서도 선택하는 것입니다. 손해를 그렇게 보면서도, 몸에 그렇게 나쁜줄 알면서도 먹고 마시고 가게 됩니다.
더구나 유혹이 가장 심할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뭔가를 선택할 때입니다. 이때는 마음의 갈등도 많습니다. 주변에서 여러 소리도 많이 들립니다. 충고한다고 한 마디씩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소리들이 터무니없이 들리는 것이 아니라 그럴 듯하게 들립니다.
그런데 우리가 또 하나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선택하는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사단도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는 것입니다. 사단은 사람이 잘되는 것 못 봅니다. 그래서 무엇을 선택할 때 잘못된 것을 선택하도록 연막을 치고 거짓말을 해대는 것입니다. 주로 이런 유혹은 평소 잘 아는 사람이나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옵니다. 사단은 가까운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사단의 유혹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40일을 금식하시고 배가 고팠을 때입니다. 사단이 와서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이 돌덩어리가 떡 덩이가 되게 하라" 무슨 의미일까요? 지금 40일씩이나 굶어 배가 고픈데 능력 있는 사람이 굶을 필요가 뭐 있어? 그 능력을 한번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돌을 떡을 만들어서 먹어, 배불러야 하나님의 일도 할거 아냐? 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히실 때도 사단은 다가와서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왜 여기서 고난 당하냐? 내려와 버려, 내려와서 너를 저렇게 조롱하고 비웃는 사람들 혼내 줘.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으니 능력을 보여줘 그러면 나도 믿을께! 이때는 사단이 사람들을 통해서 접근해 왔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보면서 조롱했습니다. 지금 이라도 당장 내려오면 믿겠다고 유혹했습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유혹을 받으셨는데 우리 사람이 유혹을 받지 않겠습니까?
아마 여러분께서 오늘 이 자리에 오시기까지 많은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유혹도 있었을 것입니다. 몇 번 망설여지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기고 나오셨습니다. 앞으로도 여러 가지 많은 유혹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열고 결단하십시오. 하나님을 믿기로 선택하십시오. 하나님은 결코 여러분을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찬송가 102장, 유혹과 핍박이 몰려와도 주 섬기는 내 맘 뺏지 못해...) 승리하시기를 바람니다.
하나님을 믿기로 선택한 순간부터 생명과 복이 여러분을 향해 열릴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행복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성품, 인격이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잘못되면 가장 마음 아파하실 분은 하나님입니다. 보통 사람은 남이 잘되면 배 아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릅니다. 여러분이 잘되고, 우리가 잘될 때 우리보다 더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지혜로운 선택을 하셔서 생명을 얻고, 복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 대신 세상의 신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반드시 멸망하고 장구하지 못하다는 겁니다. 모세는 이 두 갈래 길을 제시하면서 그 중에 생명과 복의 길을 선택할 것을 다시 한번 강력하게 촉구합니다. 그러면서 이를 위한 방법을 20절에 제시합니다.
2. 그러면 하나님께 붙어 있는 자의 복이 무엇입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생명과 복의 길을 선택할 수 있습니까?
20절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먼저는 하나님을 사랑하라, 말씀에 순종하라, 부종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부종(附從)하라'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영어성경에는 "hold fast Him" 또는 "you may cling to Him"이라 표현합니다. 신앙을 선택하고 결단하되 신앙을 아주 견고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부종하다' 이 말은 본래 히브리어로 '다바크'인데 '굳게 연합하다' '착 달라붙다'는 뜻입니다. 어느 정도로 밀착되느냐 하면 아교(접착제)로 붙여 하나로 만든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연합 관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신앙하되 그냥 대충 믿는 게 아니라 "철저하게 믿고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라"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가까이 하면서 그의 말씀을 굳게 붙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세의 마지막 고별설교의 주제로서 생명과 축복을 누리는 비결입니다.
이 말씀의 비유가 바로 요15장에 나오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입니다.
요15:5-6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포도 나무와 가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생명적 관계를 가집니다. 그것처럼 하나님과 성도와의 관계는 밀착된 관계입니다. 이른 바 신비로운 연합의 관계입니다. 그런 관계를 맺고 교제하는 것이 곧 신앙 생활인 것입니다. 떨어지면 살 수도 없습니다. 열매를 맺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붙어 있으면 어떤 축복이 주어집니까? 15절에서는 '생명과 복'으로 설명하는데,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영생의 축복과 형통의 축복입니다.
1) 영생의 축복입니다.
인간은 죄인이므로 영원히 죽습니다. 육신이 멀쩡해도 영적으로는 이미 죽은 자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사망을 당하게 됩니다. 오직 생명이신 하나님을 만나야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생명의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만나게 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예수님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입니다.(요14:6)
그래서 요일5:11-12은 예수님을 영접한 자만이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합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예수님을 영접한 자만이 영생을 얻는다 말씀합니다.
2) 형통의 축복입니다.
하나님께 붙어 있으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책임져 주심니다. 험한 세상 살 동안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승리케 하십니다. 요일5:18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사41: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시121:5-8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 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때때로 어려운 일을 만나면 믿는 성도라도 순간적으로 갈등을 하게 됩니다. 당장 하나님이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눈앞의 현실이 너무 어렵다 보면 보이는 것에 붙으려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은 어려울 때일수록 결단하고 하나님께 붙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더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면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1948년 여수순천 반란 사건 당시의 일입니다. 여수에 교계 지도급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반란군이 유지들을 체포할 때 함께 붙들려 갔습니다. 반란군이 소리를 지르며 협박을 합니다. "이 중에 예수쟁이들 있으면 손들어!" "여기 목사도 있지. 앞으로 나와!" 순간 그 목사님은 마음속에 갈등을 느낍니다. 앞으로 나가면 보나마나 죽는데 모르는 척 할까 ...? 그러나 하나님이 보고 계신데 양심을 속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손을 들고 앞으로 나갔더니 ... 간부인 듯한 사람이 소리를 지르며 야단합니다. "내가 이 악질 분자를 산으로 끌고 가서 처형하고 올테니 그 동안 동무들은 나머지 놈들 성분 조사를 하시오!" 목사님은 체념한 채 끌려갔습니다. 그런데 산 속에 들어가자 그 군인이 태도를 바꿉니다. "목사님! 저도 한 때 교회 다녔는데 이렇게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어서 피하세요!" 하면서 공중을 향해 총을 난사하더랍니다. 그래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붙어 있으면 그 어떤 상황 속에서라도 하나님이 붙들어 주심니다.
성경 인물들을 살펴봐도 이런 사실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 붙어 있던 사람은 반드시 승리했습니다. 반면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사람은 반드시 멸망했습니다.
창세기 19장 이하에 보면 아브라함을 버리고 떠난 롯은 세상의 부와 향락을 찾아 죄악의 도성 소돔으로 갑니다. 결국은 망합니다. 전쟁을 만나고, 나중에는 유황불 심판 와중에 그렇게 열심히 모앗던 재물도 다 잃고 빈 몸으로 도망쳐 나옵니다. 나오다가 뒤를 돌라본고로 소금기둥이됨으로 아내도 잃고 딸들과 불행한 삶을 살게 됩니다. 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붙어 끝까지 가나안 땅을 고수했을 때 날이 갈수록 축복을 받게 됩니다. 오늘날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뿐 아니라 만민 중에 믿는 자의 조상으로 우뚝 서 있습니다.
룻기에 나오는 룻과 오르바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오미 가족이 약속의 땅, 떡집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 땅으로 내려가 얻은 두 아들의 자부 룻과 오르바입니다. 남편들이 죽자 나오미는 이스라엘로 돌아가려 합니다. 두 며느리가 너무 측은해서 친정으로 돌아가 새출발 할 것을 권합니다. 그 때 오르바는 영어 성경에 보면 kissed good-bye 하고 떠나갑니다. 그 이름은 그 때부터 영영 사라집니다. 아마 그녀는 자기 민족에게 돌아가 모압 신을 섬기다 멸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끝까지 나오미를 따라갑니다. 시어머니의 고향 베들레헴까지 따라갑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입니다! 어머니가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가 유숙하시는 곳에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1:16-17)
이것이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끝까지 따라갔던 이유입니다. 결국 룻은 영적으로, 육적으로 유력한 남자 보아스를 만나 행복을 얻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메시야의 조상이 되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룻이 이렇게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비록 이방여인이었지만 단 한가지 그 시어머니가 믿던 하나님께 붙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과연 무엇에 붙어 있습니까?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람니다. 혹시 세상 것들에 붙어 있지 않나요? 재물에, 권세에, 인맥에, 세상적인 쾌락에... 그런 것들에 붙어 있다가 모래 땅에 심겨진 나무가 바람이 불 때 뿌리째 뽑히는 것과 같이 망할까 두렵습니다. 세상 것에 붙어 있어봤자 나중에는 함께 망하고 맙니다. 오래 못감니다. 개인이나 가정 외에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제에, 정치에, 권력에, 강대국에 붙어 있는다고 복이 오는게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 붙어 있어야 개인도, 가정도, 나라도, 교회도 든든히 서 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아무쪼록 모세가 마지막 유언처럼 엄숙하게 증거한 말씀 "너희는 여호와께 부종(附從)하라!" "너희는 하나님께 붙어(holding, cling) 있으라!"는 귀한 말씀 붙들고 어려운 이 때에 꼭! 넉넉히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좋은 일이 있기를 항상 생각하십시오
신 30:15-20 / 김경수 목사
인류 문명은 강줄기와 함께 시작되고 발전되어 왔습니다. 그만큼 강물은 인류 문명에 있어서 절대적 존재인 것입니다. 선진국에서는 이런 강물의 절대적 중요성을 알기 때문에 잘 관리하고 보존합니다.
정부에서는 2012년까지 4년 동안 약 14조를 들여 4대강 정비사업을 벌린다고 합니다. 홍수를 예방하며 수질을 개선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물론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고 일자리 창출에도 커다란 도움이 되기 때문이죠.
지난주에 경북 구미에 다녀올 일이 있어서 내려가는 동안에 낙동강을 바라보니 참담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강줄기는 메말라 있고 그 폭과 깊이도 초라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이왕에 4대강 정비사업을 한다고 하니 잘 진행이 되어 보기도 좋고 아름다운 강으로 거듭나기를 기원해 보았습니다.
진정 강을 잘 관리 보존하면 더욱 사람들에게 유익하고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각하게 정비해야 할 사업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생각입니다. 인류의 문명이 강줄기와 함께 태동되고 발전되어 왔듯이 사람의 미래와 행복은 그 사람의 생각과 함께 시작되고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강과 같습니다. 생각에 의해 사람의 삶은 결정되고 진행됩니다. 생각이 없으면 방향이 없는 삶을 살게 되고 생각이 나쁘면 불행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무슨 생각을 해야 할까요?
먼저는, 당연히 좋은 생각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들에게 매우 중요한 인생의 인사이트(통찰력)를 제공해 줍니다.
(15)-“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우리들 미래에 생명과 복, 사망과 저주가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택하라고 하였을까요? 선택하는 대로 그런 인생을 살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들이 알아야 할 사항은 인생은 이미 정해진 운명을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미래는 잘 될 수도 있고 못될 수도 있습니다.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습니다.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또 다른 하나는 우리들 앞에 놓여 있는 생명과 복, 사망과 저주 중에서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우리들 자신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들은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요? 당연히 생명과 복을 선택해야 하겠죠?
그러면 우리들의 미래는 생명과 넘치는 복을 누리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정비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죄로 오염된 이 세상은 사람들에게 좋은 것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낙동강이나 영산강은 이제 농업용수로도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오염되었다고 합니다. 정비가 하루라도 속히 시작이 되어야 한다고 아우성입니다. 왜 그렇게 식수로 사용할 수 없는 악취가 나는 물이 되고 말았을까요? 정비 내지는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듯이 우리들의 생각도 그대로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의 생각에는 많은 불순물들이 내포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어쩔 수 없습니다. 수많은 유혹과 죄의 타락이 우리들의 생각들을 썩게 하며 더럽게 합니다. 부정적이고 패배적인 생각을 갖게 합니다. 우상숭배를 하게 합니다. 금수와 버러지 형상을 만들어 놓고 절을 하면서 온갖 영적 간음과 더러운 짓을 합니다. 악한 생각을 하고 남을 비방하며 험담합니다. 정의를 외치며 의롭다고 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자신의 더럽고 악한 것을 포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즘 회자되고 있는 강도 살인죄를 지은 사람의 겉모습은 천사와 같습니다. 그렇게 친절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내면을 들추어 보면 온갖 악취가 나는 악한 생각이 내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부정적이고 패배적인 생각은 독극성 생각입니다.
시기와 질투, 미움과 분열, 무자비와 무정함, 거역과 도전, 조급하고 무분별한 생각, 불순종과 거짓된 생각들은 모두 독극성 생각입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에 대하여 시기와 질투의 마음을 갖습니다. 물론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동시에 말입니다. 결국 동생 아벨을 죽이려고 살인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그 순간에는 동생을 죽이기만 하면 행복은 자기의 것이 될 줄 알았습니다. 드디어 기회를 엿보다 부모가 없는 들판에서 돌로 동생 아벨을 쳐죽입니다. 행복할 줄 알았던 가인은 무서운 저주의 죄책감이 엄습해 들어오면서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동생 아벨로 인해 가인이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고 그를 찾아오셔서 생각을 정비할 것을 권고하셨습니다.
(창4: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그 사람은 생각을 정비하지 못했습니다. 생각을 관리하지 못했습니다. 죄를 다스려야 했습니다. 용암이 분출하듯이 죄가 올라오지 못하도록 제어했어야 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인 야곱이 요셉만을 편애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동생이니까 그렇겠지 하고 처음부터 생각을 정비하고 관리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나쁘고 악한 생각들이 자신들의 마음과 언어구조에 흐르도록 하였습니다. 생각이 흘러가는 대로 방치했습니다. 급기야 그런 악한 생각은 동생을 죽이고야 말 것이라는 결단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동생 요셉을 죽일 기회가 조성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볼 수 없는 곳, 아무도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는 한적한 들판에서 동생 요셉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죄의 특성은 공모입니다. 10명의 형들은 의기투합하여 동생을 죽이려고 구덩이를 파고 그를 던져 넣었습니다. 구사일생으로 요셉은 상인에 의해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지만 행복할 줄 알았던 형들은 죽지 못하는 죄책감과 두려움에 휩쌓여 일생을 살게 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들을 되돌아보지 않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살펴보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조차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아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면서 왜 자신은 불행한지 실망해 합니다. 실망하는 믿음의 사람들은 자존감도 낮고 행복하지도 않습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와 같이 죽은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믿음의 형태는 있지만 믿음의 능력은 상실한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하고 나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런 생각은 나의 삶을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악인의 꾀를 좇지 말아야 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오만한 자와 함께 자리에도 앉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좋은 생각을 해야 합니다. 생명과 복을 생각하십시오. 그런 생각이 나로 하여금 행복하게 만들어줍니다.
두 번째로, 좋은 생각을 하기로 선택하였다면 지속적으로 하기로 결심을 하고 훈련을 하여야 합니다.
좋은 생각을 한 두 번 하였다고 내 미래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내 삶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만약에 한 두 번의 생각으로 하루가 달라지고 내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면 이 세상에는 불행한 사람을 별로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 행복보다는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도 한 두 번의 좋은 생각은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사실은 무엇입니까? 지속적으로 좋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좋은 생각을 해야 한다면 하루에 몇 번 정도 하면 좋을까요?
저는 여러분들에게 권면하고 싶습니다. 매 순간마다 하십시오. 늘 좋은 생각에 젖어 사십시오. 잠을 자면서도 좋은 생각을 하십시오. 좋은 생각을 하면 나쁘고 악한 생각들이 틈타지 못합니다. 더불어 좋은 생각 쪽으로 나의 삶이 진행되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
보십시오.
왜 나아만 장군에게 더러운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그라고 하였을까요? 그로 하여금 일곱 번 몸을 담그면서 그의 생각을 정비하는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생각이 정비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흘러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아만 장군은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그면서 자신의 교만하고 분노에 찬 마음과 생각들을 정비하였을 것입니다.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앞에 무례하고 불순종했던 자신의 추한 생각들을 정비하였을 것입니다. 드디어 일곱 번 몸을 담그고 나올 때 그의 피부는 어린 아이와 같이 깨끗하게 변하였고 그의 나병은 치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와 함께 여리고 성을 돌 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침묵으로 하루에 한 번씩 6일을 돌고 일곱 번째 날에는 일곱 번 돌고 나팔을 불면서 큰 소리로 외치라고 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 이런 병법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병법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에 한 점의 불신이나 불순종과 같은 불순물이 없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 성을 돌면서 좋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성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생각했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행하고 난 후에 여리고 성은 지진이 일어나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흘러 들어왔던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안에서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믿음입니다.
그 생각대로 되어질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히11:1)-“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악이 범람하는 우기에도 훙수가 나지 않도록 생각을 정비하십시오. 환경과 상황이 불리하고 우겨쌈을 당하는 지경에 빠지는 갈수기에도 매마르지 않도록 생각을 정비하여야 합니다. 항상 좋은 생각을 하십시오. 지속적으로 하여야 합니다.
낳을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완치될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사업이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직장이 복될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생각을 하시되 지속적으로 하여야 합니다. 매순간마다 해야 합니다. 좋은 생각 속에 젖어야 합니다. 아침에 출발할 때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외치십시오. “좋은 일을 기대합니다.”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좋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을 만나려 갈 때 이렇게 하십시오. 병원에 갈 때 이렇게 하십시오. 차를 타면서 이렇게 하십시오. 끊임없이 좋은 생각을 하여야 합니다. 하루에 10번 정도 해서는 안 됩니다. 좋은 생각을 항상 하면서 사십시오.
세 번째, 이렇게 좋은 생각은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까요?
요셉을 보십시오. 그는 꿈쟁이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생각하며 삽니다. 하루 한순간도 그 꿈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꿈은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항상 좋은 생각을 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좋은 생각은 소극적으로는 죄가 틈타지 못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루는 얼굴은 예뻤지만 행실이 좋지 못한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합니다. 아무도 보지 않습니다. 자신이 먼저 유혹을 한 것도, 원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요셉은 앞으로 누릴 원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잠시의 죄의 쾌락과 바꿀 수 없었던 것입니다.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좋은 생각이 제공해 준 것입니다.
좋은 생각은 적극적으로는 그 생각대로 삶이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요셉은 극적인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애굽의 국무총리가 됩니다. 자신의 주인이었던 보디발도 그의 발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자신을 팔아 버렸던 10명의 형들도 하나님께서 오게 하시고 요셉의 발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 안에서 갖는 좋은 생각은 결코 배신하지 않습니다. 좋은 생각은 절대로 잘못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좋은 생각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이 흐르기 때문입니다.
좋은 생각을 하시되 지속적으로 하십시오.
여호수아와 갈렙은 비록 10명의 정탐꾼들의 부정적 보고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광야에서 40년간을 살아야 했지만 결코 좋은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를 보십시오. 그는 지금은 광야에서 생활을 하고 있지만 40년이 끝나고 나면 자기는 하나님의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것을 생각하고 또 생각합니다. 모세를 뒤따라 기도의 열망을 더 갖습니다. 더 소망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10명의 부정적 보고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믿음의 선언을 했던 갈렙을 보십시오. 그 역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대한 좋은 생각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 두 사람만이 애굽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더럽고 악취가 나는 강물은 마실 수도 없고 다른 용도로도 사용할 수 없지만 깨끗하고 살아 있는 강물은 사람들로 하여금 많은 유익을 주고 물고기들이 살게 되고 좋은 주변 환경을 가져다줍니다.
생각은 강물과 같습니다. 시기와 질투, 미움과 거짓, 불순종과 무자비, 도전과 대적, 부정적이고 패배적인 생각은 악취가 나고 썩은 강물과 같습니다.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이 정비가 잘 되어 깨끗하고 정결하면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 생명과 부흥이 흘러 들어옵니다. 행복해집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좋은 생각을 하십시오. 지속적으로 하십시오. 하루 종일 좋은 생각을 하며 사십시오. 좋은 생각을 말로 선포하십시오.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전염되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고백하십시오.
“좋은 일을 기대합니다.”
사람들을 만나러 갈 때, 출발, 도착, 운행중, 등등. “좋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고 선포하십시오.
생명과 복을 선택한 사람들
신 30:15-20 / 성흥모 목사
요즈음에도 온갖 잡신에게 매여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적 한 장이 수천만 원 나가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너무나 비싸게 주고 사들인 부적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을 꺼려하는 어리석은 사람도 있습니다. 죽은 우상에게 매이고 귀신에 사로잡혀 사는 이들이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저의 친구 목사님 교회에 두 자매가 교회를 나오게 되었습니다. 언니는 서울대를 나오고 동생은 이화여대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 집에서 가서 두 자매가 벌벌 떠는 가운데, 부적을 떼는데, 시뻘건 부적이 안 붙은 곳이 없었답니다. 냉장고에도 붙였는데 음식이 상하지 말라고, 물을 마시고는 탈나지 말라고 정수기에도, 교통사고 날까봐 차에도, 잠 잘 오라고 베개 속에도 온 집안 구석구석에, 여러 옷 속에 부적을 붙여놓았습니다. 무려 3000만원 어치 부적을 사다 붙여놓았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그 찰떡 같이 붙여놓은 온갖 부적을 하루 종일 떼고 왔는데, 부모님들이 물려준 것은 겨우 부적신앙이었습니다. 부적을 붙이지 않고는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는데, 전화가 왔더랍니다. “목사님, 오늘 처음으로 부적을 붙이지 않고 용산공원을 다녀왔는데, 아무런 이상이 없었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예, 본래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귀신에 사로잡혀서 벌벌 떨고 귀신의 종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야, 생명나무 그늘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의 심령, 우리의 마음, 우리 안에는 성령이 내주하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의 사람, 성령의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각 사람을 성전 삼으시고 우리 안에 거하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이 안보해주시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고 지켜주시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거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사람, 하나님의 자녀, 구원받은 성도가 아닙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고 고백하는 순간, 우리 안에 성령님이 들어오셔서 우리의 구원을 인쳐주시고 보장하여 주시고 우리와 동행하시고 있습니다.
롬8:9에서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과 같은 시대에 주일을 지키며,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뵙겠다고 교회에 나오신 성도들은 주님을 영접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면, 이런 날 왜 교회에 나오겠습니까? 무엇하러 딱딱한 의자에 앉아서 그것도 헌금까지 내면서 예배를 드리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이니,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 찾아왔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오늘 교회에 가라고 하니 교회에 나왔습니다. 구원받으셨습니다.
저와 함께 계시는 성령님과 여러분이 모시고 있는 성령님이 한 성령님이십니다. 그래서 선포되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되고,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3000년 전 유대 광야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들려주신 말씀이지만, 오늘 이 자리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 때 그곳에서 그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 오늘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성경 말씀은 영원히 현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달라지지 않았으니, 그 때 말씀을 주신 동기와 말씀이 가져오는 결과는 오늘에도 똑 같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정말 하나님은 은혜와 긍휼이 풍성한 하나님이시며, 공의로우시며,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하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신가, 하나님이 진정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말씀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를 지어 이 땅에 보내어주시고,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시고, 진정 바라시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아버지의 간절하신 소원, 아버지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진정 요구하시고 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람이 잘 되기를 바라고, 잘 살고 복되게 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소중한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세상의 못된 애비라고 하여도 자식들에게 좋은 것을 주려고 하며, 자식만은 소중한 존재로 살아가라고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생명과 복을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 하나님을 복잡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항상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선택이라는 것은 결단입니다. 이것이 참된 지혜를 요합니다. 오늘은 “생명과 복을 선택한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제가 부목사로 목회할 때에, 제가 돌아보는 교구에서 가장 살기 어려운 가정이 있었습니다. 남편은 직업이 없고, 부인이 이집 저집 다니면서 일해주고 양식을 얻어먹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식은 7남매인데, 지하실 단칸방에서 칼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인 집사님이 하루는 하소연을 합니다. 자기는 죄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인물도 있었습니다. 처녀 때에 교회에 믿음이 좋은 청년이 있어 그와 약혼을 하였는데, 가난한 청년이 신학교를 가겠다고 하여 자기는 목사 부인이 될 여자가 아니라면서 눈물로 붙잡는 약혼자를 뿌리치고 돈 많은 지금의 남편에게 시집을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업에 실패하고 절망에 빠져 있다고 합니다. 그가 말하기를 옛날 약혼한 그 청년은 32년 전, 당시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교회 담임목사라고 했습니다. 차마 누구라고 말하지는 못하면서 자기는 어리석은 여자요, 나쁜 여자라고 탄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선택의 문제라고 봅니다. 보람과 의미를 가질 것이냐, 아니면 안정과 화려함을 선택할 것이냐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책임져야 하는 것으로 선택의 문제입니다.
미국에 ‘유로 마드리아’라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오하이오 주립대학 의학과를 다니며 미인대회까지 나갈 정도로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인기 있는 여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남자가 그녀에게 프로포즈를 했습니다. 남자는 호텔 옆 구석진 조그만 사무실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데, 가진 것도 없고 대학도 아직 졸업 못하고 몸도 바짝 마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프로포즈를 받고 “도대체 당신 같은 남자가 나를 어떻게 보고 프로포즈 하느냐?”며 화를 냈습니다. 거절당한 이 남자는 40세가 되기 전에 세계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마이크로소프트사의 회장 ‘빌 게이츠’였습니다. 반면에 빌 게이츠의 부인이 될 뻔하였던 그 여자는 어느 요트업자와 결혼했다 이혼한 후에 혼자 외롭고 쓸쓸하게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녀는 세계최고의 부자의 아내가 될 수 있었지만,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아마 후회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빌 게이츠의 부인 멜린다 게이츠는 세계 가장 존경받는 여성 1위에 항상 오르는 여성으로 지구촌 곳곳에 다니면서 가장 기부를 많이 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자선재단을 운영하면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인생은 선택이 중요합니다.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운명이 바뀔 수 있기에 우리는 선택을 잘해야 합니다.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만, 오래 전에 이런 광고가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업은 항상 2등하고 있습니다. 정작 그들은 좋은 광고를 가지고 있었지만, 한 발 뒤늦게 선택하므로 2등에 쳐져 있습니다. 지금 세게 시장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종교의 선택은 영원을 좌우합니다. 선택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깨달아야 합니다. 생명과 복을 선택하는 것은 생명의 말씀과 복된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데 있습니다. 생명과 복이 어디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길을 가시고 복된 삶을 사시면 생명이 주어지고 복되게 사시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신명기의 말씀은 축복과 저주의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택한 민족이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하여도 말씀대로 살아가면 복을 받을 것이요, 말씀대로 살지 아니하면 저주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5절 말씀입니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 앞에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두셨습니다. 제가 히브리어 성경을 가지고 낱말을 차례로 설명을 드립니다. 레에 : 너는 보아라. 나타티: 내가 두었다. 레파네카 : 네 앞에. 하이욤: 오늘. 에트 하하임 : 생명을. 웨에트 하토브: 그리고 복을. 웨에트 함마웨트 : 그리고 사망을 웨에트 하라아 : 그리고 악을, 이렇게 직역할 수 있습니다. “너는 보라. 내가 오늘 네 앞에 생명과 복을 그리고 사망과 불행을 내어놓았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주 좋은 것과 아주 나쁜 것을 우리 앞에 내어놓고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보라”는 말씀은 “너는 보아라”는 말씀입니다. 너는 보아라, 볼지어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라, 똑똑히 관찰하고 주목하여 살펴 보아라고 하십니다. 가장 올바른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인도하면서 주목하여 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예비해놓으신 길은 두 길밖에 없습니다. 생명과 복, 사망과 화입니다. 이 두 길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복잡하신 것을 원치 않습니다.
예수님도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과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문’이 있을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마7:13-14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고 하셨습니다.
16절입니다.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오늘 본문을 잘 보셔야 은혜를 받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들어가서 차지할 땅 가나안에서 복을 받고 번성하게 살아가려면, 하나님이 명령하는 모든 말씀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에게 주신 율법과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야 하는데, 먼저 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말씀에 순종하라고 무엇을 지키라는 말씀에 앞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성도들의 마땅한 본문입니다.
요14:15에“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하셨습니다. 계명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요, 우리는 먼저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의 말씀을 듣게 되어 있습니다.
요14: 24에서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셔야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다.
16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의 말씀입니다. ‘오늘’이란 말씀이 적어도 4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15절에서, “보라 내가 오늘” 16절에서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18절에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19절에서도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오늘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어제도 말씀하셨고, 내일도 말씀하시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들여질 때는 항상 오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인간답게 살고 풍성한 은총을 누리면서 살기 위하여 많은 율법의 말씀, 규례와 명령을 주시고 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십계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 전체에서 말씀하신 율법은 613가지의 규례가 있다고 합니다. 율법, 법률, 명령, 규례, 법도 증거 말씀 거의 다 같은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다양하게 표현할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대로 살아가기를 바라시면서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규례를 주시는 것은 우리를 얽어매고 부자연스럽게 하고 무거운 짐을 지으려고 주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유대교에서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또 율법, 규례에 보태어 수많은 규례를 정하면서 백성들에게 강요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 율법학자들은 사람들의 어깨위에 무거운 짐을 묶어 지우고 강요하면서 자기들은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고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마23:4입니다.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율법이 짐이 될 수 있습니다.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면 그 율법은 우리에게 무거운 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인간답게, 구원받은 가치 있는 사람으로 살라고 주신 은혜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해주셨다는 것만 생각해도 놀라우신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감히 우리들이 무엇이라고 그 소중한 말씀을 허락해주시는 것입니까? 우리는 도무지 어떤 은혜도 받을 수 없었는데, 하찮은 피조물들에게 소중한 규례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로 가치 있는 사람으로 살라고 하는 은혜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으로 계시는 것도 은혜입니다.
우리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구원받은 사람답게,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멋지고 바르고, 신실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아주 몰상식하고 양심도 없고, 우상숭배에 절어 살다면 그곳이 애굽의 노예로 살던 땅이나 다름이 없지가 않습니까?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서 살려고 하면 사람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생각하는 것이 고상하고, 말하는 것도 품위가 있고, 생활하는 모든 하루하루가 가치 있고, 보람 있고, 의미 있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저도 몇 가지 운동을 합니다만, 수영 잘하는 사람들이 정말 부럽습니다. 저도 수영을 열심히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격이 아주 소심하여 바다에 나가서 수영하는 것은 그렇게 좋아하지 않습니다. 바닥이 있는 풀장, 실내 수영장, 수심이 160cm 정도 되어야 안심하고 수영을 즐깁니다. 숨이 차면 발을 디디면 됩니다.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은 물에서 땀을 냅니다. 물에서 노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물에서의 자유로움 그것은 수영을 즐기는 사람이 느끼는 만족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능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우리의 삶을 실어놓고 말씀의 물결을 따라 그 말씀을 즐겨야 합니다.
요일5:3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경고하시고 심판하시며, 축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고 반드시 축복하십니다. 우리 앞에는 좀 무시무시하시지만 사망과 화도 놓아두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불꽃같은 눈으로 감찰하시고 지켜보시고, 하감하시고 살펴보신다고 하셨습니다.
시33:13에서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 곧 그가 거하시는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들을 굽어살피시는도다 그는 그들 모두의 마음을 지으시며 그들이 하는 일을 굽어살피시는 이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감찰하십니다. 원하시는 무게가 나가는지 달아보십니다. 하나님은 책임을 물어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최종 평가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맡겨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감찰하시고 달아보시고 내어놓으라고 하시는 것을 은혜로 여깁니다. 만일 하나님이 심판하시도 않으시고, 감찰하지도 않고, 어떻게 살던지 내버려두신다고 하면 그것은 저에게 저주입니다. 저는 공의로운 하나님의 심판, 죽음과 파멸을 내어놓으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사실 두려운 마음, 거룩한 두려움에서 세상으로 나가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그래도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이것 저것은 하지 말라고는 규례를 주신 것도 하나님이 우리를 잘되게 하시려고 주신 은혜였습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은혜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십계명이 없다고 해보세요. 우리 사회는 엉망진창이 되었을 것이 아닙니까?
20절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나안에서 사는 것처럼, 천국에서 사는 것처럼 감사와 찬양이 가득하며, 하나님 말씀 중심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어주신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하나님만 의지하여 생명과 복을 차지하고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있습니다. 온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생명나무입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과 함께 생명과 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너와 네 자손을 위하여
신 30:19 / 박덕기 목사
어제 인터넷 뉴스에 이런 기사가 실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2006년 초 반기문 당시 한국 외교부 장관이 유엔 사무총장에 도전하겠다고 나섰을 때, 그는 다른 나라들이 거의 주목하지 않는 후보였다. 한국은 분단국인 데다, 중국과 일본을 제치고 아시아의 대표를 자처하기에는, 국가의 크기와 국력 등에서 밀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6년 10월 한국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1991년 유엔에 가입한 한국의 외교관이, 유엔 가입 15년 만에 세계 평화와 정무(政務) 사안 전반에 관여하는 유엔의 수장에 오른 것이다. 반 유엔 사무총장은 지난해 재선에 성공해 6년째 유엔을 이끌고 있다. 그런가 하면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한국계 미국인인 김용 다트머스대학 총장을 세계은행 총재 후보로 지명한 것은, 반 총장의 당선 못지않게 의미 있는 사건이다. 김 총장이 세계은행 총재에 선임되면, 유엔과,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IMF)등 세계의 정치·경제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제기구 빅3 중 2개 기구를 한국인 또는 한국계가 이끌게 된다. 국제사회의 정무(유엔)와 경제 및 개발(세계은행)을 책임지는 자리를 2명의 한국인이 맡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이 그만큼 커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
그리고 내일부터는 서울에서 53개 국가와 4개 국제기구 58명의 정상급 인사들이 참석하는 제2차 핵 안보 정상회의가 열리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이미 잘 아는 사실이지만, 우리나라는 5천년 역사 가운데 지금처럼 부강한 때가 결코 없었습니다. 외형적으로 나타난 수치만 보더라도 우리나라는 지난 해 세계 7위 무역 대국으로 발돋움 했습니다. 무역규모 1조 달러를 달성한 국가는 92년의 미국, 98년의 독일, 2004년의 중국 및 일본, 2006년의 프랑스 및 영국, 2007년의 네덜란드 및 이태리 등 8개국에 불과하며, 우리나라는 2011년 12월 5일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무역 1조 달러를 달성한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1953년 1인당 국민소득 67달러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1960년대 초반까지 한국은 아프리카 대부분의 나라와 같은 처지였습니다. 봄이 찾아올 때마다 고픈 배를 움켜쥐고 보릿고개를 넘어야 했고, 미국의 식량원조에 매달려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처지였습니다. 그랬던 나라가 50년 만에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로 변했고, 국민소득 2만 달러를 뛰어넘어 선진국의 기본 틀을 갖춰가고 있습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우리나라가 세계 제 5위를 하여 스포츠 강국으로 등극하였습니다. 세계적인 IT 강국에다가, 세계 제1의 선박 수출국이 되었으며, 세계 제 5위의 자동차 수출국이 되었습니다. 하루 세 끼 밥 먹고 살기기 그토록 힘들었는데, 지금은 너도나도 다이어트 하기에 바쁜 세상이 되었습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산아제한을 그토록 주창하던 나라에서, 지금은 오히려 출산 장려 정책으로 뒤바뀌었으니, 참으로 격세지감이 듭니다. 우리처럼 이렇게 격변하는 세상을 경험한 사람들이 일찍이 결코 없었습니다.
극동의 변방 국가로서 세계에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하던 나라가, 아니 쓰레기더미에서 장미가 필수 없듯이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기란 불가능하다고 멸시받던 나라에서, 민주주의가 찬란하게 꽃을 피웠고, 한류 열풍은 동남아를 넘어 온 세계를 휩쓸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위상은 나라 밖으로 나가보아도 피부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스위스의 필라투스 산정에 올랐더니 한국어로 환영하는 글귀가 쓰여 있었고, 융프라우로 올라가는 알프스의 등산 열차에서는 5개 국어로 안내를 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한국어 안내 방송이었습니다. 바티간의 베드로 성당이나 파리의 루블 박물관이나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도 한국어로 된 안내 책자가 어김없이 비치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지금 5천년 역사 중에서 그야말로 세계 어디에 가도 어깨를 펴고 다닐 수 있는 황금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민족이 이렇게 부강하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요? 저는 2002년 약 70일 동안 유럽 배낭여행을 하면서 많은 대학생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위상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그 현장에서, 우리의 대학생들에게 우리나라가 이토록 부강하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느냐? 라고 물어보았지만, 제대로 대답을 하는 학생들이 거의 없어서 안타까웠습니다.
여러분은 우리나라가 지금 이만큼 잘 살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국민이 부지런해서 일까요? 우리의 조상들은 지금 우리보다 훨씬 더 부지런하고 힘든 농사일을 많이 했지만, 그러나 세 끼 밥도 먹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높은 교육열 때문입니까? 자녀들에 대한 교육열이야 우리나라뿐만이 아닙니다. 자녀들에 대한 교육열은 다른 나라 부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원이 많아서는 더욱 아니고, 그러면 우리가 정치가를 잘 만나서입니까? 그것도 결코 아닙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 개발 계획을 세워서 우리나라의 발전에 상당히 기여한 것은 인정하지만, 그러나 모든 원인을 그에게만 돌릴 수는 결코 없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이 국회 청문회에서 뭐라고 한 줄 아십니까? 자기가 집권하고 보니까 나라 살림이 빈 깡통이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저기에서 차관을 많이 들여와 나라 형편이 온통 빚더미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전두환 노태우와 같은 군 출신 대통령들이 경제를 아는 사람들입니까? 그런데 그 기간에도 나라는 발전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 때는 IMF를 초래했고, 김대중 대통령도 민족의 메시아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나, 현재의 이명박 대통령 역시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나라가 이만큼 부강하게 된 원인은, 정치인들이 정치를 잘해서가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5천년 역사 가운데서 오늘과 같은 황금시대를 구가하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한 마디로 그것은 우리나라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 때문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와 이화 학당이며 배제학당을 세워 신학문을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세브란스 병원 등을 세워 현대 의학의 혜택을 입게 했으며, 언문이라고 하여 천시하고 버려두었던 한글을, 각 교회에서 가르쳐 한글 보급에 기독교가 크게 기여한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또한 3. 1 독립운동 시 민족대표 33명 중 16명이 목사님 장로님이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은 승려에서 기독교로 개종을 한 분이고, 남강 이승훈, 월남 이상재, 고당 조만식, 도산 안창호 등 우리나라의 선각자들이 대부분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은 제헌 국회 개회 시 기도를 하게 하였고, 윤보선 대통령, 장면 총리,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이 모두 기독교인들이었고, 현 이 명박 대통령 역시 기독교인입니다.
세계 각국에 파송한 한국 선교사는 20000명을 넘어서 미국 다음으로 세계 제 2위의 선교대국이 되었고, 세계에서 가장 큰 10대 교회 가운데 한국의 교회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해마다 대통령 참석 하에 열리는 국가 조찬기도회는 미국 다음으로 성대한 규모이고, 국회에서도 역시 조찬 기도회를 갖는 나라가 우리나라입니다. 이 고장 우리 광주는 어떠합니까? 지난 2007년 1월 4일 밤 시청에서 가졌던 신년 하례회에서 문화수도와 1등 광주 건설을 위해 기도하는 순서를 맡게 되었는데, 광주 시장을 비롯한 5개 구청장들이 모두 기독교 신자들인 것을 확인할 수 있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 광주에 복을 주셔서, 2006년 부산의 수출은 91억불이고, 대구는 50억불에 그친 반면에, 광주의 수출은 100억불을 넘겼다고 하면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힘주어 역설하는 시장의 말을 듣고 크게 공감한 바 있습니다.
서울에서 목회할 때에 금요일이면 삼각산에 가서 기도를 하는데, 수 만 명의 성도들이 온 산을 뒤덮고 밤새도록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 이래서 우리나라가 망하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매일 새벽마다 전국 방방곡곡의 교회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이만큼 부강하게 해주신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유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순천자(順天者)는 흥(興)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亡)한다.”고 했습니다. 유교에는 우리 기독교와 같은 분명한 신관(神觀)이 없으므로, 하나님을 하늘로 묘사해서 하늘에 순종한 자는 흥하고, 하늘을 거역한 자는 망한다고 했습니다만, 하늘을 우리 기독교의 하나님으로 바꾸면 “하나님께 순종하는 나라는 흥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민족은 망한다.”는 말과 똑 같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국교로 삼았던 로마는 1천년 동안 세계를 지배했고, 서구의 문명은 음악이며 미술이며 문학이며 할 것 없이, 한 마디로 기독교 문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해적의 후예인 영국은 기독교를 받아들여 대영제국을 이루고 신사의 나라로 변하였으며, 그 영국의 퓨리탄 후예들이 세운 미국은, 오늘날 세계의 초일류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 미국인들의 모든 돈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습니다. “IN GOD WE TRUST” 자본주의 본산지 자본주의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인들의 돈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는 신앙고백이 들어 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신앙의 힘이 오늘의 미국을 있게 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무신론적 유물사관에 입각하여 하나님을 대적했던 소련과 공산주의는 망했습니다. 휴전선 하나를 두고서, 1천만 신도가 있는 대한민국은 너무 배가 불러 비만이 걱정이고, 입만 열면 어버이 수령님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김일성 김정일 부자를 우상처럼 떠받드는 북한은, 수많은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굶어 죽어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역사관을 어찌 한 사람 목사의 편협하고 왜곡된 역사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아니 너무도 명약관화한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역사관이 아닙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할렐루야! 이 말씀을 확실히 믿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열심히 전도하여 우리나라를 복음화 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국민들은 헛되고 헛된 사신 우상을 버리고, 사시고 참된 하나님만을 섬겨야 합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만을 섬겨야 합니까? 사 45:5-6절에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고 했으며, 신 4:39절에 “그런즉 너는 오늘 위로 하늘에나 아래로 땅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라고 하였고, 수 2:11절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모든 구절들에 의하면, 상천하지 곧 위로 하늘에나 아래로 땅이나,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공자도 석가모니도 마호멧도 다 사람이지, 하나님 곧 신이 아닌 것입니다.
성경은 상천하지에 홀로 하나이신 그 하나님만이 인간의 생사화복, 가정과 사업, 국가와 민족, 인류 역사의 흥망성쇠의 대주재가 되신다고 말씀합니다. 삼상 2:6-7에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시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 도다.”고 했으며, 사 45:7절에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대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나라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세계 30개 선진국 가운데 28개 나라는 기독교를 주요 종교로 믿는 나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반면 아프리카 다음으로 빈곤 국가들은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미얀마 등 불교를 신봉하는 나라들입니다. 그런가하면 지금 중국이 미국과 자웅을 겨루는 G2로 급부상하고 있는데, 중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대략 1억 5천만 명이나 된다고 하니, 일본 전체 인구보다 많은 숫자입니다. 중국을 급성장하게 하고 있는 동력도 따지고 보면 기독교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듯 인간의 생사화복, 가정과 사업, 국가와 민족, 인류 역사의 흥망성쇠의 대주재이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생들에게 지금도 말씀합니다. 신 28:1-14절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 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행하며,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십계명 1.2계명에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자리에 나온 우리들은, 나와 후손들을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을 오늘의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키엘케에골은 인생이란 선택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순간순간 이것이냐? 저것이냐?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고, 선택으로 말미암아 인생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인생에게는 두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과 복의 길이며, 다른 하나는 사망과 저주의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두 길을 두시고, 선택할 기회를 우리게 주신 것입니다.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것은 각자의 자유입니다. 19세기말 미국의 뉴저지 주 한 마을에 있었던 일입니다. 두 사람의 친구가 만나 하루를 즐기게 되었습니다. 한 친구는 주일이니 예배당으로 가자고 제의했습니다. 다른 친구는 모처럼 쉬는 날이니 술집으로 가자고 우겨댔습니다. 결국 모처럼 만난 친구들은 제각기 원하는 대로 가기로 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예배당으로 가자던 클리블랜드(S. Cleveland)는 미국의 제 22대, 24대 대통령이 되어 국가와 민족을 위해 혁혁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한편 다른 친구는 후일에 변호사가 되었으나 부정사건으로 투옥되어 일생을 망쳐 버렸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이런 등식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매우 크다고 생각합니다. 클리브랜드 대통령은 늘 이런 믿음으로 살았었다고 전해집니다. “하나님이 받아 주실 때, 다른 생각하지 말고 그분의 품에 안겨야 한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아주신다고 말씀하실 때, 그 분의 품에 안기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지혜인 것을 잊지 마십시오.
동서양을 막론하고 복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중국 사람도 한국 사람도 일본 사람도 서양 사람도 모두 복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복은 일시적이고 유한합니다. 권력도, 쾌락도, 명예도, 부귀영화도 다 유한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들은 예화입니다. 임종직전의 청년에게 죽도록 사모하는 여인으로부터 결혼 승낙 편지가 왔습니다. 잠시 후에 박사 학위 논문이 통과되었다는 편지도 왔습니다. 혈육이 없는 가까운 친척으로부터 수백억을 상속받게 되었다는 변호사의 편지도 함께 받았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앞 둔 청년에게는, 이 모든 것은 다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가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천국의 영생복락 속에 인간이 꿈꾸던 모든 기쁨과 평안과 행복이 다 들어있습니다. 나는 이 시간 여러분에게 간곡히 호소합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후손을 위하여, 사망 대신 생명을 택하십시오. 저주 대신 복을 택하십시오. 어느 것을 선택하는 것이 정말 내 인생을 복되게 하는 것인지, 어떤 결정이 나와 내 자손을 살리는 것인지, 오늘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나와 내 자손을 위해 생명을 택하고 복을 선택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 여러분의 선택이 여러분의 생에서 결코 후회 없는 가장 복된 선택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온 생명을 살리는 예수 그리스도”
신 30:19~20, 요 1:4, 고전 15:45 / 박용래 목사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셨던 에덴동산은 죽음이 없는 생명이 풍성한 세상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던 사람들에 의하여 생명은 위협을 받고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에게 지은 죄는 크게 보면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단절이었습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 하여 죄를 지음으로 생명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이웃과의 단절이었습니다. 가인이 자기 형제를 돌로 쳐서 죽임으로 생명은 파손당하고 말았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는 생명의 풍요로움이 아니라 생명을 위협하는 죽임의 문화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최근 경제 성장을 빌미로 한 무분별한 개발은 지구 온난화 등 자연생태계의 훼손이 매우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이상 기후 현상 등 자연생태계가 균형을 잃은 데서 비롯되는 여러 가지 현상을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제 지구의 온난화와 자연생태계의 훼손은 지구촌 전체 안에 있는 모든 생명을 위협하는 무서운 위기를 직면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의 탐욕으로 천연자원은 고갈되고 에어컨과 자동차와 공장에서 나오는 매연과 폐수로 인하여 지구촌은 병들어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각종 이상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자연재해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또한 각 나라마다 전쟁의 무기를 구입하는 데는 수억 달러를 사용하면서도 가난과 질병을 막는데 사용하는 기금을 마련하는 데에는 인색하고 외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지구촌 안에 모든 경제를 독점하고 살아가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하루에 1000원도 벌지 못하여 굶주리면서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사람들이 수백만 명에 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양극화 현상은 언제나 평화로운 지구촌 안에 생명을 위협하는 분쟁과 전쟁이 도사리고 있게 됩니다.
지구촌 곳곳에서 테러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파괴시키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요즈음 비행기나 열차나 대형 건물에 대한 폭파위협에 긴장을 감추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가난하게 살며 불평등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억압을 받으면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21세기에는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한 요소들이 얼마나 지구촌 안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야말로 죽음의 문화가 지배하는 어둔 세상으로 전락하여 가고 있는 모습은 지구의 종말을 향하여 떠 밀려가고 있는 모습과도 같은 것입니다.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죽임의 문화가 온 세계를 사로잡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면서 어떻게 하면 생명을 살리는 운동을 통하여 위협받고 있는 모든 생명을 위기 속에서 건져낼 수 있을까 ? 고민하고 있는 총회 주제가 바로 “온 생명을 살리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정한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오늘아침 성경 본문에 있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생명과 죽음, 복과 저주를 선택하며 살도록 자유를 주셨는데 오늘날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대신에 죽음을 선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요10:10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서 풍성함을 얻게 하려고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할까 ? 본문 말씀 안에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 저 합니다.
1) 생명을 택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신명기 30:19-20)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세상에는 생명과 사망의 갈림의 길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생명의 길로 살아갈 수 있는데 사람들은 말씀에 불순종하고 자기의 고집과 탐욕의 길을 선택하여 사망의 길로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생명을 선택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에서 고통을 겪던 이스라엘 백성을 살려내셨습니다. 애급에서 죽을 것 같은 노동만을 강요당했던 백성들은 자유와 해방의 감격을 누리도록 하나님은 도와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백성들 앞에는 평탄한 길만 있고 탄탄대로만 놓여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출 애급하여 해방을 받은 백성들은 또 다시 애급의 군사적 위협을 겪어야 했으며, 또 한편으로는 고기 가마의 유혹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가는 길에는 물이 없는 사막에서 수많은 고난의 길을 가야만 했습니다.
이런 사막의 길을 걸어가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그 백성들이 사는 길은 생명을 선택하는 길은 자기의 고집과 탐욕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항상 가르쳐 주셨습니다.
▶ 오늘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 앞에 놓인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의 갈림길에서 어떻게 살아야 생명을 선택하는 삶인가 ? 그것은 우리의 탐욕과 고집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만이 진정으로 생명과 복을 택하는 길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시겠습니까. ?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입니까 ? 자신의 탐욕과 고집으로 사는 길입니까. ?
◐ 옛날 초등학교 교과서에 "3년 고개" 라는 글이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지금까지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어느 동네에 3년 고개라는 전설을 가진 고개가 있습니다. 그 고개에서 넘어지면 3년밖에 못산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고개를 넘을 때면 사람들은 아주 조심해서 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영감님이 고개를 넘다가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영감은 그 순간 소름이 끼쳤습니다. 이제는 3년밖에 못산다는 생각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어디가 까졌는데 어디가 아픈지 그런 것은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는 허둥지둥 걸어 집으로 돌아와서는 자리를 펴고 들어 눕고 말았습니다.
영감이 3년 고개에서 넘어져 자리에 누웠다는 소문이 온 동네에 퍼졌습니다. 많은 사람이 찾아와 위로를 하였습니다. 그래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영감은 다 죽어갈듯 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지혜로운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끙끙 앓고 있는 영감님을 찾아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감님, 무엇을 그리 걱정하십니까? 한번 넘어져 3년 살 것 같으면 두 번 넘어지면 6년 살 것이고 10번 넘어지면 30년은 살 것 아닙니까? 그러면 만수무강 할 것입니다.
영감님은 이 말을 듣고 귀가 번쩍 뛰어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고개로 달려가서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수십 번 넘어진 뒤에 돌아와서 걱정근심 다 버리고 오래오래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 인간의 삶은 운명론적인 요소보다 선택적인 요소가 더 많은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 앞에 두 개의 길을 놓으시고 우리에게 선택하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 하나는 생명과 복을 받는 길이요, 다른 하나는 사망과 저주를 받는 길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너희 앞에 두었나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선언하십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 즉..." 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앞에는 두 개의 길이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도 두 개의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장 13절-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고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가기는 힘들어도 생명으로 가는 길이 있고 쉽고 편해도 멸망으로 가는 길이 있습니다.
▶ 그러면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어떤 길입니까?
16절에 있습니다.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며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은총을 누릴 수 있습니다.
▶ 또한 망하는 길은 어떤 길입니까 ?
17-18절에 있습니다. 같이 봉독하십시다.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치 못할 것이라." 즉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반드시 망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풍족하게 주셨을지라도 평강과 생명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길을 선택해야합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생명 길을 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망하는 길을 택하지 말고 사는 길을 택하라고 권면하십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망하는 길로 갈지라도 살기 원하는 사람들은 생명을 택해야 합니다.
▶ 그런데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을 찾는 사람들이 적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망하는 길을 택하고 있습니다. 얼핏 보면 망하는 길이 더 쉬워 보이기 때문입니다. 망하는 길은 겉으로 보기에는 즐거운 길처럼 보입니다. 그 길은 편한 길처럼 보입니다. 희생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손해 볼 것이 없습니다. 얼마든지 세상을 즐길 수 있는 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멸망으로 인도되는 길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물론 인간의 선택 때문에 만나는 고통이 아니라 어느 정도 유전적 요소들도 있습니다. 부모의 잘못 때문에 유전되는 고통도 있습니다. 선대의 우상숭배로 인하여 유전되는 저주도 있습니다. 부모의 죄가 자손 3,4대까지 내려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본인의 선택과 상관없이 결정된 부분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을 극대화시키면 운명론이 됩니다. 이것은 역학에서 사주팔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운명도 사주팔자도 아닙니다.
▶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제라도 체념하지 말고 생명 길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택하고 운명을 바꿔야 합니다. 생명 길을 택하여 가계에 흐르는 저주도 끊어야 합니다. 유전적 요인에 굴복하지 말고 소망을 갖고 생명 길을 택하며 살아야 합니다.
불교 국가들 가보면 그렇게도 못살 수 없습니다. 사회주의 국가들 가보면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조상대대로 우상을 섬기며 유전되어 오는 저주된 삶을 지금이라도 끊어 버려야합니다. 모든 우상을 버리고 탐욕을 버리고 자신의 고집을 버리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이라도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생명 길을 택하면 삽니다. 우리도 살고 자손들도 삽니다. 힘들어도, 희생이 요구되어도 생명 길을 택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게 사는 길입니다. 생명의 길입니다.
▶ 사람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도 잘 정비하고 낡은 것을 바꾸는 것은 사람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위험한 일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것도 사람이 선택하는 일입니다.
제가 지난 주간에 월요일 새벽 기도회를 인도하고 아침 8시에 총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대전에서 두 분 목사님을 모시고 경주로 출발을 했습니다.
고속도로를 운행하면서 그 많은 차량들이 운행되고 있는 것을 보면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기름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수많은 차량들이 굴러다니는 것을 보면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대구 밑에 휴게소에 들어가 쉬었더니 총회 참석하기 위해 오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다시 차에 시동을 걸려고 하니 시동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난감해 있다가 한참 만에 다시 시동을 걸으니 시동이 걸렸습니다.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속도를 완전히 줄이고 경주 톨케이트쪽을 빠지다가 갑자기 운행 중에 시동이 꺼지는 것이었습니다. 급하고 당황하여 브레이크를 밟아도 브레이크도 듣지를 아니했습니다. 그래도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톨게이트로 나가는 길이었기에 핸드 브레이크를 사용하여 같길에 차를 멈출 수 있었습니다.
차에서 내린 두 분의 목사님도 너무 놀라서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불과 몇 초전에 고속도로에서 달리다가 갑자기 시동이 꺼졌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이 대형 사고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하니 끔직한 일이었습니다.
차를 견인할 수밖에 없어 견인차를 호출했더니 경주에서 와도 톨게이트를 들어오면 다음 톨게이트에 가서 차를 유턴하여 오기 때문에 약 1시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시동이 꺼진 차안에는 더워서 있을 수 없고 차 밖으로 나와 서 있으니 총회에 참석하러 들어오시는 분들이 경주 톨게이트로 빠지면서 고장 난 차 옆에 서있는 것을 보고 한마디씩 위로해 주고 갔습니다.
다른 두 분의 목사님은 총회에 참석하는 다른 차에 승차시키고 1시간 후에 견인하여 대우 써비스 센터에 가서 확인하여 보았더니 타임벨트가 끊어져서 엔진에 헷드도 파손돼서 한 두시간에 차가 수리되는 것이 아니라 내일 하루 종일 고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할 수 없이 차를 맡기고 총회에 참석을 했더니 개회 예식은 다 끝이 나고 휴식시간에 만나는 총대들마다 괜찮았느냐 왜 차가 고장이 났느냐 인사를 했습니다.
서울 인천 수원 청주 전주 전국 각처에서 총회에 참석하시는 분들이 나오다가 고장난 차옆에 서 있는 것을 다 본 것입니다.
제가 총회 부서기 서기도 하였기에 장로 총대들도 많이 알고 있습니다.
다른 노회 장로들이 모인 곳에 제가 가면 고속도로에서 고장 난 차 옆에 서있던 것을 본 분들이 다 인사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교회 장로님들은 차를 바꾸자고 바꾸자고 하시는데 나는 아직 더 타겠다고 타겠다고 했는데 내가 정비를 잘못해서 고장 난 것이라고 말했는데도 어떤 장로님은 대전교회 수석 장로가 누구시냐고 물으십니다 . 우리교회 수석장로는 이민영 장로님이신데 아주 부자 장로님인데 참 좋으시고 훌륭한 분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 가만히 생각해보니까는 자동차가 고장 났는데 왜 대전교회 수석장로까지 나오게 되는가.? 대전교회 담임목사가 탄 승용차는 대전교회 얼굴이 되더라고요. 제가 연합회장으로 있을 때 기관장 모임에 가서 보면 차가 연합회의 얼굴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연합회장으로 일할 때에도 중요 기관장 모임에 갈 때면 서기 목사님 차를 오라고 해서 같이 다녔습니다. 그래서 교회이름을 써 붙인 교회 승합차는 언제나 깨끗하게 운행을 해야겠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 실로 어느 교회 심방을 담당한 전도사가 운전을 배우고 새 차를 구입하기 전에 운전연습 겸 타고 다니는 차가 찌그러들고 일그러지고 하여간 페 차장에서도 볼 수 없는 흉측한 차를 몰고 심방을 해서 어느 여 집사님 가정에서 믿지 않는 남편과 함께 사업이 잘되도록 간절하게 축복기도를 많이 해주고 돌아왔는데 그 여 집사의 남편이 하는 말이 여보 ! 당신교회 전도사는 다른 사람 축복해주지 말고 자기나 축복을 받아서 찌그러진 차나 바꾸어 다녔으면 좋겠다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안 믿는 남편의 눈에는 찌그러지고 망가진 차나 타고 나니는 주제에 다른 사람 축복을 할 정신이 어데 있느냐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우리교회 성도들 차를 잘 정비하고 점검하여 안전 운행하시기를 바랍니다.
고장 난 차는 주인의 생명을 위협하는 살인 무기로 등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차를 바꿔주시고 하나님께서 차를 정비하여 주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차를 바꾸고 잘 정비하는 것은 사람이 선택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 앞에도 생명과 축복의 길과 사망과 저주의 길을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선택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 인간은 책임적 존재입니다. 인간은 기계가 아닙니다. 인간은 노예가 아닙니다. 입력된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는 로봇이 아닙니다. 자신의 삶은 자신이 책임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은 생명과 복 받는 길을 택할 수 있습니다. 망하는 길도 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택하고 운명을 바꿔야 합니다. 생명 길을 택하여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합니다. 유전적 요인에 굴복하지 말고 소망을 갖고 생명 길을 택하여야 합니다.
지금이라도 생명 길을 택하면 삽니다. 우리도 살고 자손들도 삽니다. 힘들어도, 희생이 요구되어도 생명 길을 택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사는 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5:4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셨으나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지금은 우리에게 생명을 살리는 영으로 함께 하시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생명을 살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에 동참하는 사역자들입니다.
오늘 온 생명은 실로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맨 처음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름답게 지어진 세계는 지금 가혹한 죽음의 악순환 속에서 그 존립을 위협당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탐욕으로 세상은 심각한 위기를 만나고 있습니다. 자연이 고갈되고 생태기가 파괴되어 지구의 종말이 예고되고 있습니다. 이제라도 생명 살리는 운동이 필요합니다.
우리나라의 말 가운데 살린다는 말은 아주 적절하게 표현되었습니다. 서양언어로서는 살린다는 말이 없습니다. 살린다는 말은 Help help ! 도와줘 라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사람 살려 ! 하면 위험을 느끼고 있음을 알고 달려갑니다. 살려줘! 하면 달려갑니다. 그런데 헬프! 헬프 ! 도와 줘 도와줘 ! 그러면 위급함을 느낄 수 없습니다.
▶ 살린다는 말은 어렸을 때 팽이를 돌리다가 속도가 다 줄어들면 팽이가 죽는다고 말을 합니다. 다 죽어 갈 때 팽이채로 다시 돌리면 팽이가 살아났다고 말을 합니다. 옛날 초롱불을 사용할 때 기름이 없으면 불이 작아지다가 가물가물 죽어간다고 말을 합니다.
죽어가던 등잔에 기름을 주면 꺼져가던 불이 다시 살아나서 방안을 환하게 비추는 것을 보았습니다. 불을 살린다고 말을 합니다.
▶ 저는 지난 금요 겟세마네 기도회에서 성도들은 10/1, 100/1, 1000/1 생활을 실천하여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10/1 은 인간의 탐욕대로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의 생활입니다. 이 길이 생명을 얻고 복을 받는 길입니다.
100/1 은 100마리의 양 가운데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기 위한 목자의 심정으로 전도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혼을 사랑하고 구원하고자 하는 복음의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1000/1 은 주의 전에서 한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낳은 것을 고백하고 주의 성전을 가까이 하고 주의 성전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주의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는 삶입니다.
이 길이 생명과 복을 선택하면서 사는 길입니다.
▶ 이제 생명을 살리는 일은 생명을 위협하는 모든 인간의 탐욕을 버리고 무절제한 개발정책이 아니라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한 환경운동에 동참하는 것이 생명을 살리는 운동입니다
지구촌 안에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하여 나눔과 사랑을 실천하는 운동이 생명을 살리는 운동입니다. 전쟁을 막고 사랑과 용서로 화해와 평화 통일을 만들어 가는 일도 생명운동입니다. 인간을 억압하고 있는 모든 악법을 철폐하고 남녀평등으로 살아가는 생명운동입니다.
반생명적 죽임의 문화에 기여해 온 우리 스스로를 반성하고 회계해야 합니다.
온 생명을 살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이 반생명적 죽임의 문화에 동참하고 기여해 온 사실을 참회해야합니다. 우리는 때로는 우리의 편의를 위하여 사실상 죽임의 문화에 동참하기도 했고, 때로는 알지 못하는 가운데 죽임의 문화에 기여해 온 것도 인정해야합니다.
오늘 우리는 생명을 택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무엇이 진정으로 생명을 살리는 길인지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제 모든 성도들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생명을 선택하는 기도와 운동에 더욱 정진할 것을 다짐하시기를 바랍니다. 생명을 살리는 지혜를 간절히 구하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깨달음을 주실 것이며 죽어가는 이 땅의 생명을 살리는 일꾼으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쓰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온 생명을 살리고자 원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모두 동참하셔서 생명운동에 쓰임 받는 복된 성도들의 삶이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선택의 자유
신 30:19-20 / 조용기 목사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선택의 자유’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우리의 삶속에 운명지어진 것과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일이 양분되어 있습니다. 나의 부모는 내가 선택할 수 없습니다. 운명지어진 것입니다. 아무리 탄식을 해도 소용없습니다. 부모님은 내가 택한 것이 아닙니다. 저희 아버지는 조, 두자, 천자이시고 우리 어머님은 김, 복자시고 선자신데 내가 택한 것 아닙니다. 하니님이 택해서 결혼시켜서 그 가운데 나는 운명적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선택할 여지가 없습니다. 내가 태어난 시대도 환경도 내가 택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일정 말기에 태어났고 또 굉장히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것도 내가 택할수 있는 것 아닙니다. 운명입니다. 이와같은 것들은 결코 내가 선택할 자유가 없습니다. 그냥 운명지어진 것으로 받아 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육 훈련은 내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내가 교육을 받고 훈련을 받는 것 다른 사람이 선택 안해 주어도 내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저는 어릴때 영어를 열심히 공부해야 온천하에 나가서 복음을 증거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영어를 공부하는 길을 내가 택했습니다. 어마어마하게 열심히 영어도 공부하고 일본어도 공부하고 불어도 공부하고 독일어도 공부했습니다. 내가 택한 것입니다. 누가 시켜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육이나 훈련은 내가 선택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결혼도 직업도 내가 살곳도 나의 선택할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이 운명지어진 것이 아니며 모든 것이 또한 선택의 자유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느 분이 TV 방송에 나와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저는 상당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빚을 지고 애기와 함께 고층 아파트에서 뛰어 내리는 여인을 막지 못했는가! 이 세상에 전쟁과 질병과 고통이 이처럼 많은데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는가! 그것을 볼때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 내 마음이 바로 하나님이다.” 그렇게 TV에서 말을 하는걸 보았습니다. 정말 듣기에 민망스럽고 당황했습니다. 이분은 성경도 하나님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크게 오해한 것입니다.
1. 인간의 운명과 선택의 자유
첫째로, 운명과 선택은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인 것입니다.
아담이 지음을 받아 에덴의 낙원에 거하게 된 것은 선택의 여지없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요, 운명이었습니다. 아담은 스스로 자기를 지은 것은 아닙니다. 자기가 스스로 에덴을 짓고 그곳에 있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 미리 에덴을 만드시고 아담을 지어 주신 것이므로 운명적인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6절로 27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는 자기가 원튼 원치 않든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에덴에 살도록 운명지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아담과 하와에게도 하나님은 선택의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동산 중앙에 있는 생명나무와 선악과 나무가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생명나무의 열매 따먹는 것은 좋아도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는 따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잘못된 선택은 무서운 결과를 갖고 온다고 경고를 했습니다.
창세기 2장 15절로 1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생명을 얻는 나무 실과는 아담과 하와가 자유로 먹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악을 아는 나무의 실과는 먹으면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선택은 아담과 하와에게 달렸습니다. 그것은 선택의 자유를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유혹을 받아 잘못된 선택을 했습니다. 뱀이 와서 하와를 꾀었습니다. “정말 동산에 모든 실과를 다 먹지 말라고 하더냐?” “아니야~ 모든 실과를 다 먹되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아는 실과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죽을까 하노라 하더라” 마귀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아니라~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네가 그 열매를 먹으면 눈이 밝아 네가 하나님처럼 될까 하나님이 두려워해서 그런다.” 유혹했습니다. 탐욕이 들어온 하와는 스스로 선택해서 선악과를 따먹고 아담에게 주었을때 아담이 거부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선택해서 그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그들은 타락했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게 되었습니다. 에덴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2.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의 오해
그러므로 오늘 두 번째 여러분께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TV에서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의 오해를 제가 여기에서 풀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지구상의 비극은 인간이 스스로 택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아파트에서 뛰어 내리는 사람을 못뛰어 내리게 하지 않았느냐. 왜 전쟁과 가난과 고통과 슬픔이 세상에 있는 것을 막지 못했느냐? 그러므로 하나님이 안계신다. 여러분 하나님은 하늘과 땅과 세계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하나님이 지으신 것을 보시기 지극히 좋았더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름답고 좋은 세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보는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의 비극적인 세계는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가 스스로 선택한 삶인 것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반역하고 먹으면 죽는다고 한 선악과를 따먹고 이 비극적인 운명을 초래한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죽음이라는 나무의 뿌리에서 나온 것이 오늘날 이 세상의 비극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반역하고 선악과를 따먹고 영적으로 죽고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땅은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컹퀴를 내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3장 17절로 18절에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그리고 여인은 해산의 고통을 하고 남편과 아내는 서로 지배하고 지배 당하는 갈등과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3장 16절에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다스리는데 이것이 갈등의 시작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종국적으로는 육체적 죽음을 선언했습니다.
창세기 3장 19절에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보는 이 세상에 죄, 마귀와 세속, 질병과 저주와 가난과 전쟁과 죽음과 좌절과 절망 이런 것은 하나님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런 것을 만들지 아니했고 이러한 것을 취하지 않도록 아담에게 경고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아담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마귀와 짝을 지어 스스로 택한 운명이고 이것을 자기의 후손인 인류에게 물려준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는 하나님이 아담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었다고 했는데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제일 조건은 자유입니다. 아담이 주어진 삶의 선택의 자유가 없다면 그는 꼭두각시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꼭두각시를 만들어 놓지 아니했습니다. 로봇을 만든 것 아니에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어서 인간을 만들어 놓았지 인간을 로봇으로 만들어 놓지는 아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의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 있는 이상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져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못 택했으면 잘못 택한 책임을 져야합니다. 책임을 남에게 전가시킬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령 죽으리라고 경고했는데도 경고를 알고도 선악과를 택한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고 사망의 열매로써 오늘날 우리는 온 세계의 비극과 고통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잘못된 선택을 남의 탓으로 돌리면 안돼요. 성경에도 보면은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하나님 탓으로 하와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당신이 지어서 내게 주신 그 여자가 주므로 먹었나이다. 자기가 선악과를 먹어 놓고 난 다음에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고 하와에게 돌렸습니다. 하와는 뱀이 나를 꾀임으로 내가 먹었나이다. 자기 책임을 뱀에게 돌렸습니다. TV에 나와서 어떤 사람 말하는 것을 들으니까 자기가 도박으로 패가 망신이 되었는데 끝까지 자기 아내 때문에 패가망신 되었다고 합니다. 도박을 할때 아내가 자꾸 돈을 빌려다 주었기 때문에 그렇다는 주장입니다. 그 아내는 말하기를 “남편이 나를 주먹으로 두들겨 패고 칼로써 죽이겠다고 협박하므로 내가 돈을 안빌려 올수가 없었다. 사돈의 팔촌까지 가면서 다 돈을 빌렸는데 안 빌리면 때리고 칼로써 죽인다고 하니까 내가 빌려왔다.” 그런데 남편은 나중에 경찰에 잡혀서 “이것은 내 죄가 아니고 내 아내 죄입니다. 내 아내가 돈을 대 주었기 때문에 내가 도박을 해서 패가망신했다.” 사람들은 자기가 선택한 길을 남에게 책임을 자꾸 짊어지우려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11장 3절에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라고 바울이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벗어나 부패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잘못된 선택이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택하고 성령충만하고 열심히 기도하며 진실하게 사는 것을 택할수도 있고 게으르고 기도하지 않고 말씀 읽지 아니하고 세상과 마귀하고 짝해서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큰 호수는 물고기가 만들지 못합니다. 큰 호수는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호수에 사는 물고기가 오른편에 살것인가 왼편에서 살것인가 바로 헤엄을 쳐갈것인가 있는 자리에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자기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호수라는 그 자체는 운명지어진 것입니다. 많은 것에 우리가 운명지어져 있지만 많은 우리의 삶에 우리 스스로가 선택해야 될것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시험과 선택
셋째로, 오늘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예수님은 어떻게 선택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십주 사십야 금식하시고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당할 때 다른 시험이 아닌 선택의 시험인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시험을 당했습니까? 예수님도 아담과 하와처럼 시험에 넘어질수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시험한 것이지 전혀 시험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면 시험할 필요 없잖습니까. 예수님도 완전한 하나님이시지만 완전한 사람으로 오셨기 때문에 선택의 자유가 있어서 시험에 빠질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귀가 시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십주 사십야 금식하신 후에 굉장히 굶주렸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와서 말했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하나님 사업도 좋지만 먹는 것이 중요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이 돌을 변하여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우리가 시인하겠다.” 아예 식욕을 채우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십주 사십야를 금식해 본 사람은 얼마나 배가 고픈지 압니다. 제가 예전에 우리 기도원에 애들을 데리고 가서 사흘동안 금식을 시켰는데 그런데 둘째 녀석이 엉엉 울면서
“밥줘~ 밥줘~”
“하루만 더 참으면 밥먹을수 있다.”
“나는 죽으면 밥될래. 나는 죽으면 밥될래.”
어린 아이지만 너무 배가 고프니까 죽으면 밥된다고 했습니다. 우리 교회 그때 나오던 어느 여전도사님이 일주일 동안 금식하고 난 다음 기도원에서 기르는 소가 여물을 먹는 것보고 “소야~ 팔자 참 좋다. 나도 소가 되어 여물이라도 실컷 먹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탄식했답니다. 사람이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굶게 되면 눈물을 뚝뚝 흘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십주 사십야를 굶었으니 얼마나 배가 고픈 상태였겠습니까. 예수님이 마귀의 꾀임을 받아 돌을 변하여 떡으로 만들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마귀의 꾀임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단오하게 거부했습니다. 그러니까 마귀는 예루살렘 거룩한 성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사람들이 많이 예배보러 왔다 갔다하는 것을 내려다 보게 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당신이 이 세상에 인기를 얻으러 왔지 않느냐? 하나님의 아들로써 인기를 얻으려고 왔는데 제일 인기를 얻을수 있는 것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고 날씬하게 내려 앉으면 만인이 보고 당신을 박수 갈채를 하고 당신이 하나님께서 보낸 사람이라고 따라갈 것이 아니냐? 그러니 인기를 얻으려면 이렇게 기적을 행하라”고 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유혹을 받을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천사가 와서 발을 받들어 돌이 발에 부딪히면 굉장한 뉴스 거리가 되고 사람들 앞에서 인기를 얻을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것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단오하게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높은 산에 올라가서 온 천하 영광을 보여 주었습니다. 부귀와 영광을 다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 안믿는 사람들이 저보고 말합니다. “예수 안믿는 일본도 저렇게 잘살고 예수 잘 안 믿는 홍콩이나 싱가폴 사람들도 잘 사는데 꼭 예수 믿어야 잘산다고 하느냐?” 여러분 마귀도 이 세상에 부귀와 영광을 줄수가 있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꾄 마지막 유혹은 높은 산위에 올라가서 천하 만국의 영광을 보이면서 말하기를 “너가 내게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주신 것인데 내게 절하는 자에게 내가 주겠다”고 한것입니다. 마귀를 따라가도 부귀와 영광을 마귀가 줍니다. 그러나 마귀가 주는 것은 부귀와 영광과 함께 영안을 빼앗아 가고 영의 귀를 빼앗아 가고 깨닫는 마음을 빼앗아 가서 결국에는 지옥에 떨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세상에 부귀, 영화, 공명이란 잠시있다 사라지는 안개와 같습니다. 잠시있는 것 취하게 하고 난 다음에 그로 하여금 영원히 하나님을 저버리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금세에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염려하는 것이요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더하시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모든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일을 넘치게 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진실한 그리스도를 통한 부귀와 영화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부귀와 영화를 받으면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고 체험하게 되고 금새에도 은총을 입고 영원한 천국까지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이 세상에 부귀와 영화를 누리게 하고 난 다음 그것을 미끼로 해서 천국을 빼앗아가 버립니다. 영혼을 멸망으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마귀의 유혹을 뭐라고 말했습니까?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 자랑을 선택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 때문에 일생에 하나님의 성령이 주님과 함께 계십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선택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령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4장 14절로 15절에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최후의 선택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것을 알았습니다. 어마어마한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고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고 치욕의 고통을 당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몸서리치는 고통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에 유혹이 왔습니다. 헬라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을 헬라로 모시고 가려고 했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20절로 21절에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빌립을 통해서 헬라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유대 사람들이 당신을 배반하고 당신을 죽이려고 하는데 우리 헬라로 오면 환영하겠다. 유혹입니다. 예수님은 능히 헬라로 가서 대접받고 편안하게 여생을 살수도 있었습니다. 헬라로 갈것이냐 유대에 남아서 죽을 것이냐. 선택해야 되었습니다. 아주 어려운 선택입니다.
그러나 23절로 2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이 죽어야 많은 영혼을 구원합니다. 살겠다고 헬라로 가면 온 인류가 다 죽을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유대땅에 남을 것을 선택했습니다.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을 피할수 있습니다. 그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것을 가롯유다가 알았기 때문에 로마의 군인들과 대제사장 바리새 교인, 사두개 교인 하숙들을 데리고 잡으러 온것입니다. 그러므로 겟세마네 동산을 피할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피하고 남음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그 자리에서 기도할 때 피할까 피하지 말까는 주님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얼마나 주님께서 그 선택이 어려웠던지 그가 기도할 때 이마에서 땀이 핏방울로 변했습니다. 오늘 의사들은 말하기를 사람이 너무너무 스트레스를 받으면 피하에 있는 모세혈관이 터져서 피가 탐구멍으로 넘쳐 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으셨기에 모세혈관이 터져서 땀구멍으로 피가 톡톡톡 떨어졌습니다.
마가복음 14장 36절에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여러분 예수님이 그 몸부림 치는 것 보십시오. 몸서리칩니다. 완전한 하나님이시지만 또 완전한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버림당하고 고통을 당하고 죽을 것을 생각할 때 몸서리 치니까 피할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마가복음 10장 45절에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음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예수님이 선택한 것입니다. 누가 강요한 것 아닙니다. 주님이 스스로 선택했습니다. 당신이 죽음으로 우리를 살릴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체포 되어서 안나와 가야바 뜰에서 온갖 곤욕과 괴로움을 당할 때 또 빌라도의 법정에서 생명을 구걸하지 않고 그는 장엄한 침묵을 지켰습니다. 예수님께서 살기 위해서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빌라도가 “내가 너를 살릴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말한데도 주님께서는 생명을 구걸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택한길을 뒤돌아 보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일단 죽기로 각오하고 그길을 택한 이상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27징 11절로 14절에 보면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소를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저희가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거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한마디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
장엄한 침묵입니다. 주님께서는 죽기로 작정하고 그 길을 택한 이상 뒤돌아 보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 선택하여 희생제물이 되었고 그 자유의지로 선택하므로 우리의 구주가 되신 것입니다. 첫 아담은 하나님을 배반하므로 선택하고 선악과를 따먹고 배반했지만 마지막 아담 예수님은 하나님을 순종하기로 결힘하고 죽기까지 순종하는 길을 택하여 주신 것입니다. 처음 아담의 잘못된 선택으로 우리가 다 죽었지만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의 올바른 선택으로 우리가 다 살게 된 것입니다.
4. 우리의 행사하는 선택의 자유
넷째, 우리가 행사하는 선택의 자유에 관해서 말씀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늘 알아야 될 것은 삶의 큰 틀은 운명지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부모님 내가 선택하지 못하고 운명지어 있고 내가 나온 시대와 내가 낳은 땅은 운명지어져 있고 내가 선택할수 없지 않습니까? 그런 것은 내가 선택할수 없지만 그러나 그 안에서 살면 우리의 선택의 자유가 많이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내가 예수님을 선택하랴, 세상을 선택하랴. 우리 선택해야 됩니다. 우리가 복음 전도함을 받았을때 내가 예수님을 선택할수도 있고 예수님을 버릴수 있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나중에 하나님 앞에 심판 받을때 “너가 왜 예수를 안믿었느냐?” “하나님이 나를 믿도록 안해 주었기 때문에 안믿었습니다.” 그런 변명은 할 수 없습니다. 다 복음을 듣고 난 다음에 내가 하나님을 믿을 것이냐, 안 믿을 것이냐. 성령께 순종할 것이냐, 아니할 것이냐. 자기가 선택해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은 말하기를 부름을 받은 사람은 많되 택함을 받은 사람은 적다. 하나님이 불러 주셨는데 대답을 하느냐 안 하느냐는 우리에게 달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에 버릴 사람은 부르지도 않아요.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 사람을 통해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불러주셨을 때 여러분이 예하고 대답해서 따라 나왔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을 하나님이 부르시되 듣고도 귀를 돌리고 대답하지 않으므로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든지 그 다음 결과를 우리의 책임입니다.
신명기 30장 19절로 20절 자세히 들어 보세요.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
하나님의 소원은 우리가 생명을 택하고 사망을 택하지 말고 복을 택하고 저주를 택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라고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함게 놓았는데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보혈을 통해서 죄악과 절망 대신에 용서와 의와 사랑을 택하고 세속과 마귀 대신에 성령과 거룩함을 택하고 병과 고통을 대신해 치료와 건강을 택하고 저주와 가난 대신에 아브라함의 축복과 예수 그리스도의 형통을 택하고 죽음과 지옥과 영원한 멸망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활과 천국과 영광을 택하라.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정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잘 택했습니다. 영원히 후회하지 않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정말로 여러분 복많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복이 없는 사람은 이 길을 택하지 못합니다.
제가 저희 할머님을 전도해서 예수를 믿게 했는데 우리 할머님 많이 연로하셨는데 아무리 예수 믿으라고 해도 “ 나는 원래부터 불교를 믿었고 그동안 친구들도 다 불교 믿는 친구들이니까 난 내 길로 갈테니까 너는 예수를 잘 믿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할머니! 그러면요. 이땅에서 할머니와 손주지만은 이제 죽고 나면 할머님은 극락에 가고 나는 천당에 가버립니다. 극락과 천당이 거리가 얼마나 먼지 압니까? 거기에는 비행기 타고도 못가요. 할머니하고 나하고는 영원히 영원히 이별입니다. 아시겠어요?” “서로 왔다갔다 못하니?” “못하지요. 나는 천당에 가고 할머니는 소히 불교계에서 말하는 극락으로 간다고 하니까 그리 가버리면 우리는 생이별하고 영원히 못보지요.” “어이 그러면 안되지. 그러면 내가 너를 만나봐야지.” “그러면 손주 따라 가야지요.” “그럼 어떻게 하노?” “예수를 구주로 모셔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 할머님이 손주따라 오려고 회개를 하고 예수를 구주로 모시고 그 다음에 성령 받고 난 다음에는 늘 하신 말씀이 이 말씀인 것입니다. “복이 있어야 예수를 믿지 복이 없으면 예수를 못믿는 거야. 아무나 믿는줄 알아? 복있는 사람이어야 예수를 믿는거다.” 나는 그 말씀이 내 귀에 쟁쟁하고 내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복이 있어야 예수를 믿지 복없으면 예수를 못믿습니다. 여러분은 너무나 복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오늘 예수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의 선택의 갈림길에 있습니다. 알콜 중독자인 아버지 밑에 자란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은 다 자라서 결혼하여 분가해 나갔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고 난 다음에 심리학자들이 이 알콜 중독자의 자식으로 태어난 자란 이들이 어떻게 사느냐 가보니까 맏아들 집에 가보니까 맏아들은 아에 술을 입에도 안댑니다. 몸서리 칩니다. 아버지가 알콜 중독자였기 때문에 우리 가정이 얼마나 고통을 당했는데 나는 술을 보지도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는 아주 깨끗하게 잘삽니다. 자기 아내와 자식들과 잘살고 사업도 잘합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을 찾아 가니까 아에 알콜 중독자가 되어 곤드레 만드레가 되어 있습니다. 정신 차리지 못하고 부인도 도망치고 자식들은 고아원에 가고 처참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두 아들에게 심리학자들이 똑같이 물었어요. 어떻게 해서 똑같은 알콜 중독자 아버지 밑에 태어났는데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러니까 맏아들도 똑같이 물어요. “선생님! 선생님의 아버지가 술망나니라면 선생님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술을 피해야지~” 둘째 아들도 똑같이 물었습니다. “선생님의 아버지가 술주정뱅이요, 술독에 빠져 살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이고~ 아버지 영향을 받아서 나도 술먹고 술독에 빠지겠지” 선택에 달린 것입니다. 똑같은 아버지의 똑같은 두 자식이 그 모양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시를 지었는데 돛담배 두척 바다에 떳네. 한배 동으로 가고 다른배 서로 가네. 똑같은 돛단배가 바다에 떳는데 왜 한배는 동으로 가고 다른배는 서로 갑니까? 그것은 바람은 똑같이 부는데 돛의 방향에 따라서 한배 동으로 가고 한배 서로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똑같은 세상에 살고 똑같은 시절에 살아도 마음 먹기에 따라서 한 사람은 성공하고 한 사람은 실패하고 한 사람은 복받고 한 사람은 저주받고 한 사람은 천당가고 다른 사람은 지옥갑니다. 마음에 어떻게 선택하는 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지 다른 사람을 원망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앞에는 항상 두길이 있습니다.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하나님의 길과 세상길이 있습니다. 생명의 길은 좁고 험합니다.
마태복음 7장 14절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
예수 믿고 하나님 섬기고 사는 것이 쉽지가 않으니까 사람들이 그 길을 찾는 사람이 적지요. 여러 가지 절제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려니까 힘이 들지요. 그러니까 좁고 험한 길이지만 예수를 믿고 안에 들어와 보면 참으로 넓고 좋은 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의 성령과 사는 것보다 더 의와 평강과 희락과 믿음, 소망, 사랑이 넘치는 것이 없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그 안에 들어오기도 전에 벌써 좁은 길을 걷지 못하고 세상으로 나갑니다.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길은 넓고 편합니다.
마태복음 7장 13절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신명기 11장 26절로 28절에 "내가 오늘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좇으면 저주를 받으리라"
복과 저주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지요. 남을 원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미국에 아주 친한 두 친구가 있었어요. 그들은 청년때 똑같이 망나니였습니다. 술을 퍼먹고 싸움도 하고 방통도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두 사람이 술집에 손을 잡고 가다가 교회 앞을 지나가는데 그 교회에 간판이 있는 겁니다. “오늘 저녁 설교는 죄의 값은 사망이다”하는 것으로 설교한다고 간판이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은 “야~ 교회 들어가자.” 다른 사람은 “야~ 웃기는 소리하네. 교회는 전부다 미친 사람들이 들어가는 거야. 이 세상에 술먹고 방탕하고 얼마나 자유롭고 좋으냐? 나는 안들어간다.” 그러니까 한 친구가 “오늘 나는 너와 함께 술집에 가지 않겠다. 나는 교회 들어가겠다.” 그래서 그 사람은 교회 들어가고 다른 사람은 술집에 들어갔습니다. 수십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술집에 간 이 사람은 살인을 범하고 중죄인이 되어서 감옥에서 신문을 받아 보니까 그날 같이 가다가 교회로 들어간 그 친구인 로버트 클리브랜드는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똑같은 사람의 길이 이렇게 달라질수 있습니까? 다같이 청년의 시절에 술먹고 방탕했는데 하루저녁 갈림길에 섰습니다. 교회로 가느냐, 술집으로 가느냐. 갈림길에서 로버트 클리브랜드는 교회를 택했고 친구는 술집을 택했고 세월은 흘러가서 한 사람은 대통령이 되고 한 사람은 사형수가 되어서 감옥에서 신문에 그 기사를 보고 눈물을 줄줄 흘리게 된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될까요? 우리는 마태복음 6장 29절로 33절의 말씀대로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다른 것은 하나님이 돌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를 택하시고 하늘나라의 의를 선택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코카콜라의 창업자인 아사지 캔들리는 알콜 중독자였습니다. 항상 술에 찌들려 있었습니다. 캔들리는 자기 의지력으로 술을 떼려고 노력을 해도해도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루 술이 취해서 집에 들어오는데 귀에 벼락같은 소리가 들리어 자신의 본능적 욕구를 절제하는 사람이 성공한다. 캔들러는 들어오자마자 자기 아내에게 “여보 여보! 내가 술취해서 비틀 거리며 오는데 내 귀에 소리가 들리기를 자기의 본능을 절제하는 사람이 성공한다고 그러는데 이게 뭡니까?” “하나님이 당신에게 계시해준 것입니다. 당신은 나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주님께 부르짖어 본능을 제어하십시오. 십자가에 못박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며 십일조를 드리고 살면 우리에게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내의 말을 듣고 아내의 간절한 기도를 받고 술을 딱 끊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나가면서 그의 수입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기회가 왔습니다. 영세한 코카콜라 회사가 있는데 코카콜라를 처음 만든 영세한 회사가 법원에 경매 처분을 당했는데 그것을 2,300불에 사들여서 그 코카콜라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그 부부가 키웠습니다. 1920년 딴 사람에게 매도될때 그 가치는 무려 2,500만 달러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내와 그는 정말 하나님을 믿고 주님 선교 사업으로 일생을 보내게 된것입니다. 술에 찌들어진 사람이 하루에 그의 길을 올바르게 선택했습니다. 술 주정뱅이 길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고 십일조 드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길을 선택하자 하나님이 사업의 기회를 주었고 법정관리에 들어간 망한 조그만한 시작하는 코카콜라의 회사를 인수해서 그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웠습니다. 오늘날 코카콜라란 온 천하에 안 들어가는데가 없고 모르는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서면 하나님이 정말로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3절에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자유를 가졌으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 자랑을 따라가는 길을 걸어가지 말고 믿음, 소망, 사랑의 길을 택해서 가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잘되면 자기 탓이요 잘못되면 조상 탓이라고 말합니다. 자기의 잘못된 선택은 남의 책임으로 돌리수가 없습니다. 잘못된 선택을 회개하고 내일을 위하여 새롭고 올바른 선택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하나님 섬기는 것을 택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을 택하고 예수님을 택하고 말씀을 택하고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을 택하면 하나님이 여러분 일생에 같이 하여 주어서 여러분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할 뿐 아니라 천국 영생을 얻어 영원한 영광속에 들어갈수 있게 되실 것입니다.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운명지어진 것도 있지만 그러나 우리의 삶에 많은 것을 스스로 선택할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운명지어진 것은 하나님께 내어 맡기고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에는 언제나 하나님을 택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택하고 말씀을 택하고 천국을 택하고 영생을 택하게 도와 주시옵소서. 그래서 영원히 후회하지 않는 우리들이 되게 주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
온 생명을 살리는 예수 그리스도
신 30:19-20 / 이상호 목사
오늘은 총회선교주일입니다. 설교자가 택한 본문이 아니라 총회가 정한 본문입니다. 먼저 이시간 우리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에게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먼저 교단출범에 관한 역사적 증언입니다.
1952년 제37회 총회(대구 서문교회)에서 다음 사항을 결의
조선신학교 졸업생에게 목사 안수 안하기로, 김재준 목사를 목사직에서 제명 지시, 성경축자 영감설를 부정한 조선신학교 교수 서고도 목사를 심사키로, 위 두교수의 사상을 찬성 지지하는 자는 처벌키로 했습니다.
1952년 5월 제37회 총회에서의 불법 결의에 항의하는 호헌대회를 소집하여 (대구) 총회 불법결의 철회 요청, '성명서'도 발표했습니다.
1953년 4월 제38회 총회(대구 서문교회). 전북노회, 충남노회 총대 회원권 박탈
1953년 6월10일 제38회 호헌 총회(한국신학대학)를 소집하고 선언서를 발표한 것이 계기가 되어 한국기독교장로회가 새롭게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사회참여, 인권운동, 민주화운동, 생명.평화운동, 통일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요즘 미국 쇠고기 수입 에 따른 촛불집회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정권은 불법집회라고 물대포를 쏘고 경찰 방패와 군화발로 하늘같은 국민을 폭력으로 다스리려 합니다. 1919. 3.1운동, 1960. 4.19혁명, 1980. 5.18 광주민주화운동, 1987. 6월 항쟁, 그리고 2008년 5-6월의 촛불집회 ... 그 어느 것 하나 당시 집권자 입장에서 보면 불법집회 아닌 것 있나요? 그러나 역사는 민중민주, 생명, 자유, 인권, 정의의 방향으로 도도히 흐를 것입니다.
우리 교단은 학문의 자유와 진리, 개혁정신에 입각하여 신앙과 삶을 역동적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단불법집단처럼 보여지기도 했고, 투옥과 고통을 받기도 했습니다.
우선 본문을 살핍니다.
신명기 30장 19-20절은 시내산 계약에서 수여된 율법 선포의 맥락에서 선포된 말씀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생명과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을 준수하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이 주신 생명과 복을 상실하지 않고 계속 누리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 4절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생명’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요약한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었고 이 생명은 곧 사람들의 빛이었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은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미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은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심으로써 이제 살리는 영, 곧 살리는 능력을 행사하시는 영적 존재가 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 본문이 구원의 내용으로 제시한 공통 요소는 생명입니다. 생명이란 무엇이며 생명은 과연 신구약성서의 구원의 내용을 표현하는 적절한 개념인가? 부활하셔서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죽은 사람들을 살리시는 능력을 행사하기 위하여 대기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도 참 생명으로 살리시는 능력을 행사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살리다’는 낱말의 의미의 폭을 여기서 원래보다 훨씬 더 확대시켜야 합니다. 요 5:21, 롬 4:17, 고전 15:36에 사용된 이 낱말은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것을 뜻하며 요 5:21, 롬 8:11, 갈 3:21에서는 살아 있는 사람을 살리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 생명을 살리십니다.
선택은 중요합니다. 잘못된 선택을 해 놓으면 그 후의 책임이 무한합니다.
1. 자기 좋게, 사람 좋게 결정하고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을 빼놓고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 2절에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했습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에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실 것인지를 먼저 생각하고 세상적인 조건을 따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2. 재물 때문에 잘못된 선택을 합니다.
잘못된 선택을 하는 이유가운데 대부분은 재물 때문에, 돈 때문에 잘못된 선택을 합니다.
여러분이 아마 많이 들으신 얘기일 것입니다. 어떤 아가씨가 동시에 두 사람과 선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동쪽에 사는 사람은 무척 가난하고 형편이 어려웠습니다. 너무 너무 어렵게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참 잘생겼고 똑똑했습니다. 그리고 서쪽에 사는 사람은 참 못생겼고 바보같지만 굉장히 부자였습니다. 그 아가씨가 중매쟁이한테 '내가 동가숙 서가식하면 안될까요?'라고 말했습니다. 잠은 동쪽 남자하고 자고 밥 먹고 사는 것은 서쪽 남자하고 살면 안되겠느냐는 말입니다. 동시에 두 남자하고 결혼하겠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이런 물질적인 것, 자기가 즐기려고 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선택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어느날 부자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마 19:21)"라고 물었습니다. 어떤 일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마 19:21).
재물과 영생의 선택에서 청년은 재물을 택했습니다. 재물과 하나님을 택하는 것에서 여러분들은 어느 것을 택합니까? 재물과 사랑 가운데 여러분은 어느 것을 택합니까? 지금은 어떤 시대입니까? 돈 때문에 생명 보험을 들어 놓고 남편을 죽입니다. 돈 때문에 자식의 손가락을 자릅니다. 돈 때문에 자기의 발목을 자르는 시대입니다. 재물 때문에 부모 형제에게 배신을 당합니다. 물질 때문에 잘못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밖에 여러 가지가 많습니다. 명예나 권세나 여러 가지 때문에 잘못된 선택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선택은 어떤 것일까요?
1.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택입니다.
신명기 30장 15-20절까지 오늘 본문 말씀에 "하나님 말씀을 지키라 그리하면 생존하겠고 번성하겠고 복을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복에 대한 약속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약속된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약속된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모든 선택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는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일을 했는지, 한번 스스로 생각해 보시라는 말입니다.
2. 믿고 순종(Trust and Obey)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에 믿고 순종하는 것이지 믿고 확인하고 점검해 보고 두드려 보고 가는 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민수기 23장 19절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고 했습니다.
제가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힘들수록, 어려울수록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노래 부르는 가수는 한 곡만 히트하면 평생 먹고 살 수 있습니다. 두만강만 부르던 할아버지는 지금 돌아가셨지만 그분은 나오기만 하면 두만강만 부릅니다. 그런데 이 설교는, 매일 똑같은 설교만 한다면 얼마나 제가 편하겠습니까? 그런데 할 때마다 다른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참으로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들고 설 때마다 '하나님 오늘도 말씀을 전하는 기술자가 되지 말게 하시고, 오늘 말씀을 전하는 가운데 성도들의 가슴이 찔림을 받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하옵소서. 노아시대의 노아처럼, 소돔과 고모라성의 롯처럼 이 시대에 정말 빼내고 싶은 사람이 우리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며 말씀을 전합니다.
열왕기상 18장 21절에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쫓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쫓을지니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 24장 15절에 "너희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점점 주일 성수하기가 어려워지고 밤 예배를 드리기가 어려워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단하십시오. 세상적인 유혹과 세상적인 조건에, 세상적인 마귀에 끌림 받아 쓰임 받는 사람이 되지 말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인물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럼 무엇을 택할 것인가?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생명을 택해야 합니다. 캄캄한 밤입니다. 어디선가 “사람 살려!!!” 하는 외마디 비명이 들려옵니다. 위급한 상황입니다. 이 소리를 듣는 사람이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그 소리나는 방향으로 달려갈 것입니다. 혹시 겁이 나서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무력함과 비겁함에 대하여 양심의 문초를 당할 것입니다. 이 경우에 사용된 ‘살리다’라는 동사는 오직 우리말에만 있는 소중한 낱말입니다. 다른 어느 언어에도 우리말의 이‘살리다’에 해당하는 낱말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식인종’이라는 것은 서구 사회가 조작해 낸 허위의식입니다. 식인종이라는 인종의 존재를 개관적으로 입증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식인종이라는 것은 서구인들이 야만인 세계를 마음대로 정복ㆍ약탈해도 된다는 구실로 이용되었습니다.
서구인이 이른바 식인종 추장에게 조롱 섞인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왜 사람을 잡아먹소?”
추장이 대답했습니다.
“아 그건 먹고 살기 위해서 그러지요. 당신들은 정말로 이해할 수 없소. 우리는 먹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지만 당신들은 왜 전쟁을 먹지도 않을 사람들을 수천 명, 수만 명 씩이나 쓸데없이 죽이는 것이오?”
우리는 과연 식인종을 경멸할 자격이 있는가?
미군 3만 8천명이 희생되면서 공산군을 막았기에 자유대한의 변영과 자유가 보장된 역사적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미국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미국이 좋은 일도 많이 했지만 현대사를 보면 꼭 그런 건 아닙니다.
베트남전쟁에서 미군에 의해 날라간 정글의 그 수많은 초록 잎같은 베트남 청년들과 무수한 사람들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현대전쟁의 대부분이 미군에 의해 지구마을 곳곳에서 인도주의적 차원의 개입이라는 명분으로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미군의 군홧발이 밟는 곳 어디서든 민간인 학살 사건, 미선이 효순이 장갑차 압살 사건, 윤금이 살해 사건, 이라크 침공, 아프카니스탄 침공, 니콰라과이, 쿠바 침공은 모두 미국의 침략전쟁입니다. 찬찬히 생각해 보세요. 미군이 가는 곳에 평화의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다시 식인종 추장의 말을 되씹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식인종이 아니라고 해서 살인 행위로부터 깨끗합니까? 전투에 직접 참가하여 적군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는다고 해서 살인 범죄에서 깨끗합니까? 공해 물질의 배출, 생활쓰레기 양산, 무분별한 농약 사용, 과도한 에너지 소비, 소비주의, 성장지상주의, 너 죽고 나 날자는 식의 무한 경쟁, 패권주의, 냉소주의, 허무주의, 쾌락주의, 제도적 폭력, 사회적 불의 등등의 해악을 묵인하고 방관하는 것은 간접적으로 살인 행위에 가담하는 것이 아닐까요?
‘생명’은 오늘날 인간이 당면한 문제 중에서 맨 첫째가 되는 화두입니다. 오늘날 인간은 자연의 자정 능력을 능가하는 환경오염, 생태계 파괴, 핵전쟁이나 핵사고 등의 가능성으로 인하여 인간을 포함한 지구상의 전 생명이 멸절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생명운동은 ‘웰빙 운동’처럼 단순히 건강하게 잘 살자는 식의 한가한 운동이 아닙니다. 생명운동은 사느냐 죽느냐의 양자택일을 놓고 결단해야 하는 급박한 문제입니다. 시인 김지하는 '생명은 인간 해방의 열쇠'라고 주장했습니다. 그것은 생명운동은 단순히 생명의 보존이라는 한 가지 문제 해결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 문제의 근본, 즉 민중해방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된다고 본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회가 생명을 그 선교 사명의 화두로 삼는 것은 지극히 적절합니다. 그래서 ‘생명선교’라는 용어도 사용되고 그러한 선교단체가 활동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교회가 생명운동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시의(時宜)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복음의 본래적 뿌리를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팽이가 돌아가는 현상을 일컬어 팽이가 살았다고 합니다. 팽이가 살았다는 것은 팽이라는 물체와 더불어 있는 현상이지 팽이를 떠나서 별도로 존재하는 어떤 현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구원을 '생명' 또는 '영생'이라는 용어로 설명했습니다. 인간 구원으로서의 인간의 생명, 인간의 영생은 영육으로 구성된 인간이라는 현실적 존재와 더불어, 그 존재(몸)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리스도교의 구원을 영혼의 구원으로 보는 것은 영지주의라는 이단 사상에 오염되어 생겨난 그릇된 가르침입니다.
오늘날의 생명운동은 인간의 구원만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자연계의 생명의 구원도 목표로 합니다. 인간의 생명과 자연의 생명은 별개가 아니고 하나의 거대한 생명 사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연의 생명을 보호한다는 것은 자연을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본래적 권리를 회복시킨다는 것을 뜻합니다. 인간의 종말론적 구원이 성취되는 그 날에는 인간만이 구원을 받아 어느 허공으로 이주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갖가지 짐승들, 곤충들, 새들, 물고기들, 그리고 꽃동산으로 변한 사막에서 피어난 갖가지 아름다운 식물들과 함께 춤출 것입니다.
오늘날 “생명 살려!” 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 사방에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이 소리 없는 절규를 들을 귀를 가진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참다운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는 생명입니다. 온 생명을 살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진리편에 서서 생명을 살리고 역사를 진보시키는 성도들이 되시기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