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친 물고기는 항상 크다. 그래서 아쉬움은 더욱 커진다. K-리그 입단이 진행됐으나 협상이 결렬된 외국인선수는 무수히 많다. 그 중 축구팬들이라면 누구나 알 법한 초특급 대어들을 한 접시에 모아봤다.
하칸 야킨 (스위스/알 가라파)
최강희 전북 현대 감독은 유로2008을 지켜보며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외국인선수를 찾던 최 감독은 유로2008 개막 직전 야킨측으로부터 영입을 타진하는 제안서를 받았다. 금액은 30만 유로(4억 8500만 원) 수준이었다. 최 감독은 야킨의 플레이가 담긴 DVD를 보고 무조건 영입하겠다고 결심했다. 풍부한 국제경험도 매력적이었다. 소속팀과의 계약기간이 끝나 이적료도 없었다. 최 감독은 야킨이 유로2008을 조용히 마쳐주길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나 야킨은 개막전에서 부상을 당한 알렉산더 프라이를 대신해 스위스를 이끌며 3골을 터트려 몸값이 천정부지로 솟았다. 전북이 감당하기 힘든 금액이었다. 결국 야킨은 유로2008이 끝난 뒤 카타르의 알 가라파와 200만 유로(32억 원)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에 계약을 맺었다. 최 감독으로서는 아쉽게 놓친 대어 생각에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리오넬 메시 (아르헨티나/바르셀로나)
안종복 인천 단장은 지난 2003년 구단 창단 작업을 준비하면서 유럽에서 외국인선수를 물색하던 중 메시의 플레이에 반해 영입을 추진했었다. 당시 16세로 바르셀로나 유소년팀에서 활약하던 메시는 아르헨티나 청소년대표팀 일원으로 유럽에서 훈련하던 중 안 단장의 눈에 띄었던 것이다. 메시의 개인기에 매료된 안 단장은 바르셀로나에 이적료 150만 달러를 제시했으나 메시 본인이 한국행을 거절했었다. 안 단장은 " 메시의 드리블과 슈팅 등 개인기가 매우 뛰어나 탐이 났었다. 그러나 성장 가능성이 큰 선수들은 세계축구계에 이름을 알리기 어렵다는 이유로 축구계 변방인 한국행을 꺼린다. 물론 메시가 만약 한국에 왔다면 지금처럼 성장하리란 보장은 없었을 것 " 이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디르크 카윗 (네덜란드/리버풀)
김호 감독은 수원 사령탑을 맡던 2002년 외국인선수를 물색하던 중 위트레흐트의 22세 공격수 카윗을 주시했다. 스스로 득점기회를 만들어내고 팀플레이에 능한 지능적인 공격수 카윗은 넓은 활동폭과 이타적인 플레이로 김호 감독을 매료시켰다. 수원은 김호 감독의 요구를 받아들여 위트레흐트와 이적료 협상을 진행한 결과, 이적이 상당 부분 진척됐었다. 그러나 카윗은 2002~2003시즌이 시작하자 무서운 득점행진을 시작해 총 20골을 터트려 네덜란드리그 빅 클럽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결국 카윗은 수원행을 거절하고 이듬해 이적료 100만 유로에 페예노르트에 입단했다. 카윗의 이적료는 수원이 제시한 금액과 큰 차이가 없어 김호 감독의 아쉬움은 더욱 컸다.
알리 다에이 (이란/이란대표팀 감독)
1994년 12월. 이란 국적의 선수 4명이 1994년 미국월드컵 이후 흥행몰이에 성공한 K-리그 입단테스트를 위해 한국을 찾았다. 이들은 안양LG(현 FC서울) 선수들과 함께 훈련을 받으면서 입단테스트를 치렀지만 " 형편없다 " 라는 통보를 받고 이란으로 돌아갔다. 이들 가운데에는 1996년 아시안컵에서 한국을 상대로 4골을 터트렸던 알리 다에이도 있었다. 다에이는 훗날 바이에른 뮌헨 등 분데스리가에서 5년간 활약하는 등 아시아 정상급 공격수로 활약해 K-리그 팬들을 안타깝게 했다. 그러나 다에이는 훗날 인터뷰를 통해 " 당시 부상 치료 후 정상 컨디션이 아니었다. 그래도 한국행이 불발된 게 결론적으로 잘된 일 " 이라며 안양 LG 입단테스트 탈락을 회상했다.
밀란 라파이치 (크로아티아/NHK트로기르)
2002년 한일월드컵과 유로2004에 출전해서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상대로 한 골씩 터트렸던 라파이치는 2006년 7월 FC서울 입단을 위해 한국을 찾았다. 이장수 FC서울 감독은 공격수와 공격형 미드필더로 기용 가능한 라파이치를 연습경기에 몇 차례 투입시켜 기량을 점검했다. 그러나 라파이치는 이 감독으로부터 불합격 판정을 받고 소속팀(스탕다드 리에주)으로 돌아갔다. 역대 K-리그 외국인선수 가운데 월드컵과 유럽선수권대회에서 골을 기록한 선수는 아직까지 없다. 그래서 축구팬들의 아쉬움은 더 컸다. 그렇지만 당시 라파이치는 전성기를 훌쩍 지난 33세 노장이었다. 라파이치의 K-리그 이적을 진행했던 한 관계자는 " 체력적으로 준비가 덜 되어 있었고, 의욕적인 모습도 부족했다 " 라고 말했다.
피에르 판 호이동크 (네덜란드/은퇴)
한국은 1998년 프랑스월드컵 네덜란드전에서 0-5 대패를 당하며 세계무대의 높은 벽을 실감했다. 당시 네덜란드의 네 번째 골을 터트렸던 판 호이동크는 2003년 페예노르트와 계약기간이 끝난 뒤 새로운 소속팀을 물색하던 중 K-리그 입단을 추진했었다. 그는 에이전트를 통해 수원과 입단 현상을 벌였고 김호 감독도 OK사인을 냈다. 그러나 수원 구단 수뇌부가 판 호이동크의 많은 나이(34세)와 높은 몸값(30억 원)에 난색을 표시하면서 입단협상이 결렬됐다. 2001~2002시즌 UEFA컵 우승과 프로통산 335골(551경기), A매치 14골(46경기) 등 화려한 경력도 세월 앞에서는 소용없었다. 결국 수원행이 결렬된 판 호이동크는 터키 슈퍼리그의 페네르바체에 새 둥지를 틀어 2년간 32골(53경기)을 터트려 건재를 과시했다.
하칸 수쿠르 (터키/은퇴)
월드컵 역사상 최단시간 골 기록(10.8초)을 보유한 수쿠르도 수원의 영입 대상이었다. 김호 전 감독은 공격력 강화를 위해 유럽에서 활약하는 공격수를 찾던 중 갈라타사라이에서 노익장을 과시하던 수쿠르를 눈 여겨 봤다. 실제로 2004년 6월 한국대표팀과의 두 차례 친선전을 위해 한국을 찾았던 수쿠르는 한국 언론과 인터뷰에서 " 2003년 수원행 가능성이 있었지만 적극적인 것 같지 않아 마음을 돌렸다 " 라며 '수원맨'이 될 뻔했던 사연을 공개했다. 2004년 초에는 성남행이 논의되기도 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한국의 축구열정에 크게 감동한 수쿠르는 " 한국에서 2~3년 정도 선수생활을 하고 싶다. 지도자 생활도 한국에서 시작하고 싶다 " 라며 끝없는 한국사랑을 과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Tip) '믿거나 말거나' 이들도 올 뻔했다
헨릭 라르손(스웨덴)은 2006년 7월 바르셀로나와 계약기간이 끝나자 수원 입단을 추진했다. 그렇지만 당시 고국으로 돌아갈 뜻을 굳혔던 라르손은 결국 고향팀 헬싱보리와 입단계약을 체결했다. 부산 김호곤 감독은 2002년 1월 베베토(브라질)의 영입을 신중히 고려했으나 높은 몸값(9억 원) 탓에 포기했다. 베베토는 결국 알 이티하드(사우디아라비아)와 계약을 맺으며 선수생활 말년에 짭짤한 부수입을 올렸다. 모하메다 누르(사우디아라비아)는 2004년 12월 컬프컵 도중 한국 취재진을 만나 " 내년에 전북에서 뛰게 됐다. 한국에서 다시 만나자 " 라며 인사하며 한국행을 기정사실화했다. 누르는 2004년 AFC 챔피언스리그에서 준결승에서 전북을 상대로 빼어난 활약을 펼쳐 알 이티하드이 결승행을 이끌어 신빙성을 더욱 높였다. 그러나 전북 구단측은 " 사우디아라비아 선수와 어떤 만남도 갖지 않았다. 브라질 선수를 알아보고 있다 " 라며 강하게 부인했다. 이밖에 얀 콜러(체코),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아리엘 오르테가(이상 아르헨티나), 마우로 실바(브라질), 파트리크 음보마(카메룬), 루이스 에르난데스(멕시코), 마르틴 막스(독일), 파울로 완초페(코스타리카) 등이 K-리그 진출을 추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글_최종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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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헐..................................
메시 ㄷㄷ
메시 ㄷㄷㄷㄷㄷㄷㄷㄷ 라르솒ㄷㄷ
메시 .......... 카윗 아킨 ..
헐...메시 ㅡㅡ...메시는 처음 들어봤는뎅...왔더라면...흠;;;정말 지금만큼 컸을까??우리나라의 선수마케팅이...
메시우리나라왓으면안됫다...그래도 잘하긴잘햇을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