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일(위령의 날) 죽음이 아니라 삶
나는 언젠가 죽는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도 죽어 묻히셨다. 이 땅에 살아있는 모든 건 백 년이든 천 년이든 때가 되면 다 죽는다. 내가 두려워하는 건 죽음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선다는 사실이다. 이는 사실이니 믿으려고 노력할 필요 없다. 참 좋으신 하느님께 가고 그분과 하나가 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건데 왜 그분 앞에 서는 게 두려운 걸까? 그것은 내가 내 죄를 알기 때문일 거다. 그 훌륭한 다윗 왕도 이렇게 고백했다. “저의 죄악을 제가 알고 있으며 저의 잘못이 늘 제 앞에 있습니다(시편 51,5).” 하느님 앞에 선다는 건 모든 것이 다 드러난다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처럼 따먹지 말라는 열매를 먹고 나서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고 나무 뒤에 숨어도 소용없다. 그분 앞에 모든 이가 다 알몸이고 그의 모든 속내가 다 드러나 있다.
모든 게 다 드러나 있다는 게 두려운 건 내 죄를 알기 때문이고 하느님을 무서운 심판관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죄인을 살리려고 외아들까지 내어주실 정도로 나를 사랑하신다. 그러니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건 아직 하느님을 모르고, 알아도 잘못 알고, 하느님을 완전히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1요한 4,18).”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을 알 수 없으니 하느님은 이런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셔서 당신을 좋아하고 보고 듣고 따를 수 있게 해주셨다. 예수님도 우리처럼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셨다. 그분을 사랑하고 따른 이들도 그분과 같은 일을 겪는다. 부활한다. 아담의 죄를 물려받아 하느님을 따르지 않는 유전자가 내 안에 있어서 아무리 거룩한 뜻을 품어도 이상하게도 자꾸 하느님 뜻을 거스르게 돼버린다. 이 저주스러운 악순환은 이 몸이 죽어야 끝나니 거기에 너무 마음 쓰지 않는다. 이 불편한 동거를 배워 익힌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렇게 불쌍한 나를 그 고리에서 빼내신다. 예수님을 따라 죽으면 예수님을 따라 부활한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1코린 15,22).”
특별한 장소에 가거나 야릇한 분위기를 만들지 않아도 언제 어디서건 예수님을 부르며 마음이 하느님을 향할 수 있어 좋다. 그런데 그분도 역시 가족이나 친구들처럼 내 곁에 계시는 건 아니라서 아쉽다. 그분도 역시 믿어야 한다. 이런 나를 위해 주님은 가장 작은 이들과 함께 그들 안에 계시겠다고 철석같이 약속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그리고 그들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주님에게 해드리지 않은 것이다. 주님이 이렇게 하신 이유는 아주 분명하다. 가난한 이들을 돕게 하시려는 게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게 해주신 것이다. 가난 타파가 예수님 선교 사명은 아니었다. 이스카리옷 유다는 비싼 향유를 낭비하는 그 여인을 비난했지만 예수님은 그런 그녀를 옹호하셨다.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요한 12,8).” 연민은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있다. TV를 보면 다른 동물도 있는 거 같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장 작은 이들에게 해주는 것이다. 이웃 사랑은 내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다. 허공을 껴안는 게 아니라 가난한 이웃을 돕고 잘해주는 거다. 고민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고 믿어야 한다. 어린이가 부모 말을 듣는 거처럼 가장 작은 이들 안에 계시겠다는 주님 말씀을 그렇게 듣는다. 하느님은 하늘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이렇게 드러내 보이신다(마태 11ㅡ25).
누구나 가진 연민을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는 것도 그렇지만 그보다는 그것을 지속하고 일상적이 되게 해야 한다. 배려, 도움, 봉사, 희생 등이 몸에 배어 그런 것들이 자연스러워 내 삶에서 특별한 것이 아닌 것이 되기를 바란다. 하느님이 그렇게 내게 가까운 분이 되기를 바란다. 끊임없이 기도해야 하는 이유다.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으면 바로 세속적인 것으로 마음이 기울어지게 되어 있다. 가장 친한 친구보다 더 친근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부르고 내가 마주하는 크고 작은 모든 일에 대해서 그분과 대화한다. 특히 어려운 상황에 놓였을 때는 ‘주님 같으면 이럴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고 여쭙는다. 그렇다고 답을 주시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하는 사이 나도 모르게 주님의 뜻을 따르게 될 거다.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등잔만이 아니라 등불이 꺼지지 않게 기름도 준비해야 한다(마태 25,4). 마지막 날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마태 25,12).”라고 말씀하시는 건 그 생각만으로도 앞이 깜깜해지고 정말 두려워진다.
예수님, 위령의 날인데 죽음이 아니라 삶을 묵상합니다. 죽음에는 제 노력이 필요 없습니다. 또 하루 회개하고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어머니를 사랑합니다. 이 사랑을 주님께 전해주십시오. 제가 아는 최고의 공경과 사랑은 어머니 사랑뿐입니다. 교리는 하느님을 흠숭해야 한다지만 그게 뭔지 잘 모릅니다. 제 어머니 사랑이 하느님 사랑입니다. 이 순례를 마칠 때까지, 특히 어려움과 유혹으로 제 발이 휘둘릴 때에 저를 꼭 붙잡아주시고, 그 강을 건널 때 마중 나와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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