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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나라와 한민족의 역사에 대하여
1. 들어가며 거란에게 발해가 멸망하고 금나라가 건국되기 까지 200년간 발해 부흥 운동은 지속되어 왔고 금나라가 건국되고 나서는 발해의 유민들은 모두 금나라의 역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금나라와 청나라는 중원을 장악한 만주족(여진족)의 역사임은 분명하지만 발해 후국들은 한민족의 역사이기 때문에 우리는 발해 후국의 역사를 정확하게 인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또한 금나라는 발해 후국을 흡수하면서 성립된 나라이기 때문에 금나라를 한민족의 역사 범주에 포함시킬 수 없다면, 만주사와 한민족사에서 금나라의 역사를 어떻게 분리하여야 하는지도 고민해 보아야 한다.
. 금나라 황족의 선조는 고려인이었고, 발해의 지배층은 금나라의 지배층이 되었고 금나라의 백성은 발해의 유민이었다. 금나라가 멸망한 후 요동의 지역주민은 고구려의 유속을 간직한 금나라의 유민과 고려인이 혼입되어 요동의 역사를 이어갔고 고려시대 말기 와 조선 초기의 한반도 북반부 여진인은 금나라 유민이었으나 조선 초기부터는 한민족의 역사속에 포함되었다. 청나라는 한민족 속으로 귀속되지 않았지만 금나라의 역사는 한민족의 족속을 원류로 하였고, 멸망 후의 유민들중 일정 부분은 한민족 속으로 다시 녹아 들어 왔다. 국수주의적인 사고로서 한민족과 함께한 고대시대의 역사만을 고려하여 대제국 금나라와 청나라의 역사를 한민족 사라고 해서는 안되겠지만 금나라의 역사 만큼은 칼로 무를 쓸듯 한민족사에서 싹뚝 잘라 내 버려질 사항은 아닌 것 같다.
발해 후국부터 중세시대에 이르는 한민족의 역사를 살펴보고 만주사와 한민족사를 언제, 어디서, 어떻게 분리할지 고민해 보자. |
2. 발해 부흥운동의 주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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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안 국 926년 거란에 의한 발해 멸망 929년 서경압록부를 중심으로 대씨의 후발해 건국 열씨정권의 정안국 교체 오씨정권의 정안국 교체 정권교체기에 후발해 백성 일부 고려 및 인접국 망명 986년 거란에 의한 정안국 오씨 정권 멸망 990년대 대씨(태씨) 정안국 부흥 활동 990년대 이후 송화강 일원의 부여부, 상경 등지에서 오사국이 후발해국 주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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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안국의 오씨 정권이 송나라에 보낸 국서에 의하며 정안국은 고구려의 옛땅을 찾이한 발해의 유예라고 하였으며, 발해의 부여부도 정안국에 포함되었다고 하였다. 부여부의 연파가 봉기를 하였다가 오사부와 협력하게 되었는데 부여부가 정안국에 포함되었다고 하는 국서를 보낸 것을 보면 압록강 일대를 근거지로 하였던 정안국의 오씨 정권이 부여부와 상경 용천부에 근거한 오사국의 오씨 정권을 주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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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사 국 975년 부여부에서 연파가 봉기 하였으나 거란의 추격을 받아서 오사국으로 이주 하였다. 995년 연파와 오소도가 연합하여 철리 말갈 격파(흑수말갈 남쪽 거주) 1004년 오사국왕이 변방의 주민에게 잡혀서 거란에게 바쳐짐 1114년 동여진 완완부 추장 아구타가 오사국을 멸망 시킴(1115년 금나라 건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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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국의 건국기원은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연파가 오사국으로 이주한 때가 975년 이므로 그 이전에 오사국이 건국 되었을 것이다. 흑수말갈이 남하하여 송화강, 압록강, 두만강 유역을 점유하게 되었다고 인식하고 있지만, 송화강 유역은 오사국이 있었고 오사국은 연파와 연맹하여 철리말갈을 공격하였는데 철리말갈은 흑수말갈의 남쪽지역에 해당하는 부락이므로 10세기경 까지 만주 일원의 족적을 변화시킬 만한 흑수말갈의 남하는 없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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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6년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키고 발해의 중심부에 동단국을 세워서 발해 유민을 통치하기 시작하였지만 발해 유민의 저항 때문에 동단국의 존립이 위협을 받게 되자 동단국을 요양지역에 옮기면서 일부 발해 유민을 끌고 갔다. 발해의 고지에서 거란의 어용 국가가 물러가자 발해 부흥운동은 가속화 하였고 929년 압록강 일대에서 발해 왕족인 대씨의 후발해국이 들어서게 되었다. 후발해국은 몇 번의 정권투쟁을 거치면서 정안국이 흡수 하였고, 대씨→열씨→오씨 왕조로 바뀌게 되었다. 발해 부흥운동의 초기에는 정안국의 오씨 왕조가 발해 부흥운동을 주도를 하였는데 송나라에 보낸 국서 등으로 추정해 보면 압록강, 두만강, 송화강, 한반도 북반부 일대를 장악하였던 것으로 보여 진다. 정안국은 고려, 송나라와 외교를 통해 거란을 압박하고, 거란과의 일전을 준비했지만 결국은 986년 거란에 의해 정안국의 오씨 왕조는 멸망하였다. 990년대에도 대씨 일족 중에 정안국 왕임을 자처한 자가 송나라와 외교를 시도하기도 했지만 정안국은 다시 성장하지 못하고 압록강 일대에서 발해 부흥국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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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쉬어가는 글 : 서희와 강동 6주 한국 정치인들은 서희 닮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어떤 정치인들은 자신이 서희를 닮은 정치가라고 자부하고 있다. 서희는 고려 초기의 장수요 정치가이다. 침략하는 거란족을 향해 무기 하나 사용하지 않고 협상을 통해 물리치고 오히려 강동 6주를 설치하여 일부 영토까지 확보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역사를 찬찬히 생각해 보면서 그 시대의 서희와 고려가 무엇을 했던지 살펴보자. 986년 압록강 일대의 정안국 멸망 990년대 발해 왕족 대씨가 정안국 왕임을 자처하고 부흥 운동을 시도해 봄 993년 거란이 송나라와 등거리 외교를 하는 고려를 정벌하기 위해 고려로 군사를 끌고 옴 서희가 거란의 장수 소손녕과 담판을 지음(고려는 거란과 국교를 맺고 싶은데 압록강 일대에 여진 족이 가로 막고 있어 거란과 국교를 맺으러 갈수가 없는데 여진족을 물리치고 거란과 국교를 맺으 러 갈테니 물러가서 기다려 달라고 주장함 - 그래서 거란족 돌아감) 994년 고려는 거란의 방해 없이 압록강 일대의 여진족을 물리치고 강동 6주를 설치함 990년대 압록강 일대에 누가 있었고, 고려가 정벌한 여진이 누구인지 잘 생각 해보기 바람 |
정안국이 멸망한 후 발해 부흥 운동은 부여부와 상경용천부의 오사국이 주도를 하였다. 송나라는 정안국과 협력하여 거란을 공격하고자 하였지만 양자 간에 협력이 이루어 지기 전에 정안국이 멸망하게 되었고 송나라는 정안국을 대신해 오사국과의 협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당시 동아시아의 질서는 어느 국가도 주도하지 못했다고 보아야 하는데 거란이 강성하여 발해를 멸망시키고 북중국을 장악하고 있었다. 거란은 송나라, 고려, 발해후국들과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란 주변의 국가들이 등거리 외교를 통해 결집하는 것을 막고자 하였고 송나라는 이와 반대로 자신들과 결합하여 거란을 공략할 세력을 찾고 있었다. 송나라와 오사국은 대 거란전에 입각하여 양자 모두에게 필요한 동맹 관계이었지만 거란 공략에 대한 전략적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별하게 되었다. 송나라는 거란을 공략을 파트너를 오사국을 대신해서 여진인을 선택하였고 오사국은 거란 뿐만 아니라 송나라 여진인 모두와 등을 돌리게 되자 발해 유민의 주도자 자리를 동여진에게 내어 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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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발해인과 여진인의 차이 여진은 발해 말기 시대에 흑수말갈을 여진으로 칭하면서 불리어지게 되었으나 발해가 멸망한 이후에는 압록강과 두만강 및 연해주 일대의 주민들을 여진인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해서 흑수말갈이 남하하여 여진인을 형성하였다고 하는 견해가 일반화 되어 있지만 이런 가설이 정립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선주민을 어떻게 축출하였는가를 설명하여야 하고 압록강, 송화강, 두만강 일대에서 발해 부흥운동을 담당 하였던 후발해, 정안국, 오사국의 주체세력과 백성들이 흑수말갈인이었다는 것을 입증하여야 한다. 발해가 멸망한 이후에 흑수 말갈인이 남하 하는데 제약 조건이 줄어 들었기 때문에 일부의 세력이 남하하였을 수도 있지만 그들로 인해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의 족적이 변하거나 정치세력이 변하였던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의 선주민이 흑수말갈에 의해 축출 되었다는 어떠한 단서도 없고 기록도 없으며, 발해 후국이 발해 유민 이었음을 부정하는 어떠한 견해도 제시되지 않고 있다.
. 금나라 건국 전의 여진은 크게 압록강 일대의 서여진과 두만강 일대의 동여진으로 구분되는데 여진인과 발해인의 차이는 족적의 차이가 아니라 정치적 성향과 그들을 기록한 기록자의 사고에 따른 구분이었지 실질적인 차이가 아니었다. 발해 부흥국의 주도자 이었던 정안국조차도 [요사]에서는 여진으로 기록하였고, 정안국이 멸망하자마자 동시다발적인 진행형으로 고려는 압록강 일대의 주민을 축출하였는데 발해나 정안국의 유민이 아닌 여진인으로 기록되어 졌다. 발해가 멸망하고 발해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던 사람들은 발해시대의 왕족과 출처가 확인되는 지배층 이며, 그리고 발해 부흥운동에 참여 하였던 발해 후국의 지배자와 지배자와 함께 족적이 기록된 사람만이 발해인이 었고 발해 후국에 참여하지 않았던 모든 백성들은 여진인으로 기록되어졌다. [송사 정안국 편]을 살펴 보면 발해 후국의 국서를 송나라에 전달한 사신 모두도 여진인으로 기록되어 졌는데 발해 후국이 송나라와 연합하여 거란을 정벌하고자 송나라와 교류를 시도 하였는데 모든 국서를 흑수 말갈인을 이용하여 전달 하였다면 망할려고 작정을 했다고 보아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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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금나라의 주체 세력의 족적 및 성장 배경 오사국이 국제 정세를 주도하지 못하게 되자 발해 후국의 변방 지역에 있었던 발해 유민(여진인)들은 독자적인 노선을 강구하여 세력 확대 및 재편이 이루어 졌다. 송나라는 거란을 제압하기 위해서 여진인과 협력이 필요 하였고 거란은 발해 후국에 참여 하지 않았던 여진인을 이용하여 발해 후국의 세력을 제압할 필요성이 요구 되었다. 정안국과 오사국이 강성하였을 때 발해 후국의 변방에서 여진인이라 불리었던 주민들은 자신들의 주도자를 발해 후국으로 바라 보았지만 발해 후국의 세력이 약화 되자 여진인들은 실리의 추구와 안전 확보는 거란이 아닌 고려에서 찾고자 하였으나 동여진의 완완부는 이러한 국제 정세를 적극 활용하여 거란과 송나라를 배경으로 세력을 확장 시킨다.
. 동여진의 완완부가 후대에 여진을 통합하고 금나라를 건국하는데 [금사]에서 완완부의 추장은 고려의 자손이라고 하였다. 두만강과 연해주 일대의 동여진 속에는 흑수말갈이 남하하였을 수도 있지만 동여진의 근거지가 한반도와 연결된 공간 이었기 때문에 금나라 황제 일족과 마찬가지로 다른 고려인도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동여진의 근거지는 전 시대에 옥저와 동부여의 활동지역인데 이지역의 주민들은 고구려의 지배층도 아니었고 당나라에게 큰 피해를 입은 전투지도 아니었기 때문에 고구려가 멸망하고 나서도 정처 없이 떠돌아 다녀야할 이유가 없었던 주민들이다. 최근에 러시아와 한국이 공동으로 연해주 일대의 유적을 발굴하였는데 기원전후 시기의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온돌 등을 포함한 단결문화인의 양상을 지닌 옥저유역 이었음을 확인한 바가 있다. 예맥계통의 지역주민이 기원전후 시기부터 계속 눌러 살았고 발해시대에는 발해의 지방행정 조직중 용원부가 있었던 곳이며 [신당서]에서는 발해의 용원부는 예맥과 옥저류의 발해 지방행정 조직임을 밝혔다. 고려사에는 두만강과 연해주 일대의 지역주민이 흑수말갈을 피해서 대거 남하하여 내투한 기록이 없으므로 흑수말갈이 남하하여 두만강과 연해주 일대를 장악하였다면 예맥계통의 선주민이 갈 곳은 바다 밖에 없다. |
5. 금나라의 여진족과 한민족의 역사 구분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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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가 멸망하자 발해인들은 발해 후국을 건국하여 발해 부흥운동을 주도 하였으나 발해 후국의 주도권이 미치지 않는 변방의 발해 유민(여진족)들은 고려에 조공을 하거나, 약탈을 자행하는 등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고려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이용하여 북방 영토를 개척하게 되었는데 초기에 개척한 북방 강역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발해 유민(여진족)의 세력이 확장됨에 따라서 함주를 경계로 하여 고려와 동여진이 대치를 하였다. 동여진은 발해의 지방행정 조직중 남해부,용원부,솔빈부등의 발해 유민이었고 원류 족적은 예맥, 옥저류의 유민이었고 정안국이 멸망하기 전에는 정안국과 오사국의 세력권속에서 발해 부흥운동을 시도 하였으나 정안국이 멸망하고 오사국이 주도권을 상실하자 변방에 있었던 동여진은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으며 각기 독립된 세력들은 거란에 의해 추장의 지위를 보장받기도 하였다. 고려는 서여진을 정벌하여 여진에 대한 우위를 확보하게 되었으나 동여진과 마찰이 발생하게 되자 북벌을 계획한다. 윤관은 북벌을 성공하여 공험진의 선춘령에 이르렀고 그곳에 고려의 경계비를 설치하고서 북벌을 마무리 하였다. |
5-1. 선춘령 및 공험진의 지리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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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 장군 윤관이 북벌하여 공험진의 선춘령에 고려 경계비를 설치 2) 함길도의 크기는 남쪽의 철령과 북쪽 공험진 사이의 거리 1천 7백여리 이다. 3) 두만강에서 접한 경원에서 선춘령까지 700백리 4) 윤관이 천리의 땅을 개척하고 여진을 몰아 냈다. 5) 두만강 회질가탄에서 거양성 까지 260리(윤관이 쌓은 성) 6) 두만강 두만강탄에서 공험진 까지 250리 7) 선춘령 주변에 수빈강이 흐르는데 백두산에서 발원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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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의 기록은 이해를 할 수 없다. 너무 광활한 영토 이므로 믿을 수 없다. 이런 두 기록이 일정 정도 유사성이 있으므로 표기 오류는 아닌 듯 보이지만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는 없다. 사서 작성 당대에 그렸던 지도가 전해지지 않음을 원통하게 생각할 따름이다. 5), 6)은 두만강 하류에서 200~300리 이내의 선춘령이 있었음을 기록하였는데 이 기록을 쫒아서 선춘령을 찾고자 한다. 이 내용은 서북피아양계도의 지리정보와 유사하다. 공험진, 선춘령, 윤관비 앞으로 하천이 흐르는데 기록된 수빈강 일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수빈강의 물줄기는 백두산에서 발원한다고 기록하였는데 현재 지리정보로 파악하면 도저히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하천이 아닐 것 같지만 지도상의 하천 또한 시작 지점에서 백두산에서 발원함을 언급해 두었다. 이런 견해로 파악한다면 조선시대 동국지도와 팔도지리지를 작성한 양성지의 위 4) 기록 또한 유사한 내용으로 이해가 된다. 윤관이 개척한 천리의 영토 중에 한반도 북반부의 강역이 칠백리 정도 이었고 두만강 건너 삼백리 정도의 영토를 개척하였던 것으로 사료되어 지는 바이다.
5-2. 선춘령 이남의 선점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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