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 결
박시현
내가 좋아하는 건 여름에 다 있다. 너와 과일. 너와 썩은 과일. 마가린. 들여다보게 되는 바다. 쇠. 쇠기둥. 고철과 비눗갑. 비눗갑을 열면 비누가 있고 여름을 열면 그곳에 여름이 있다. 여름이 사실 아무 데나 있구나. 깨닫는 그 사람이 여름이고 여름은 열리는 곳에 있나. 말없이 조성되나. 깨진 오이지 병에서 오이지가 쏟아져 나온다. 꽃병이었다면 단면이 쏟아지겠지. 우리가 여름을 가진다면 그게 뭘까. 그게 뭐든 쏟아지겠지. 거미와 매미. 매미와 개미. 다 쏟아지고 남는 게 여름. 복도를 달려서 복도를 끝낸다. 더 많은 걸 끝낼 수 있다. 믿음을 만지면 뜨겁다.
닌자비디오 연체료 갚기
가게는 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걸어서 갈 수 있었는데 이제는 날아서 갈 수도 없다. 점점 더 보이지 않는 가게……. 보이지 않는 가게 앞을 언제든 지나칠 수 있고, 빙 둘러 갈 수도 있는데 주인은 내게 전화하지 않았다.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전화하지 않았다. 거꾸로 꽂힌 하드 케이스를 보면서도 끝내 나를 기다리지 않았다. 기다렸다면 돌이 되었을 것이다. 고등학생 형들이 버린 비닐봉지에는 비디오 대신 본드가 들어 있었다. 이제 잘 보이는 가게……. 너무 멀리 있는 건 없는 것과 다름없다. 지금은 과학이 발전해서 비디오를 빌릴 수 없고, 개인의 미래는 전부 정해져 있다. 우주가 팽창한다는 얘기를 믿지 않아도 받아들일 수는 있어야 한다. 종료된 것을 골라 되감는다.
― 박시현 시집, 『사육공감각』(봄날의책 / 2026)
박시현
2021년 《시와반시》가을호에 「비의(秘儀)」 외 4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관람’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