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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본당신부들의 주보성인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입니다.
복음 묵상 대신 그분 삶에 대한 글을 올립니다.
성 요한 마리 비안네 신부님(1786~1859)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모릅니다.
그는 첫 주임사제로 발령받은 아르스를 단 한 번도 떠나지 않고 죽기 직전까지 사목한 특별한 사제였습니다.
당시 그곳은 신자들이라 해봐야 농사짓는 시골사람들 230여명밖에 안 되는 공소 같은 본당이었습니다.
더구나 본당 신자들의 신앙심은 밑바닥이어서 동료 신부들이 다들 부임하기 꺼리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비안네 신부님은 아르스에 부임해가면서 230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영혼을 책임지고 있다는 생각에 너무나 두렵고 감지덕지해서 몸까지 떨었다고 합니다.
비안네 신부님의 영성생활 안에서 제 눈을 확 잡아끄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선택과 집중, 그리고 본질에 대한 충실성입니다.
비안네 신부님은 세상 것들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맛있는 음식이나 럭셔리한 가재도구, 메이커 옷, 취미활동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사제관은 거의 ‘유령의 집’과도 비슷했습니다.
그 대신 그는 하루 온종일 신자들 영성생활의 쇄신만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성심성의껏 고해성사에 전념하셨습니다.
매일 봉헌하는 미사는 마치도 생애 마지막 미사를 드리듯 정성을 다했습니다.
이 지상에 단 한명의 죄인도 남겨두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영웅적 사도직을 수행했습니다.
비안네 신부님의 청빈한 생활은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단 한 벌 밖에 없는 수단을 자랑스럽게 입고 다녔습니다.
워낙 전반적으로 너덜거렸기에 수선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보다 못한 신자들이 사람들 보기에 민망하니 수단 하나 새로 해 입으라고 돈을 마련해드렸습니다.
꼭 새로 해 입겠노라고 몇 번이나 다짐했지만, 몇 달이 지나도 그 옷 그대로였습니다.
화가 난 신자들이 다그쳤더니, 그 돈은 이미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눠준 후였습니다.
구두는 한 번도 약칠을 하거나 솔을 댄 적이 없이 그냥 되는 대로 신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어떤 날 하루 24시간 가운데 18시간을 고해소 안에서 보내셨다고 합니다.
사제로서 고해소에만 앉아있을 수 있겠습니까?
남은 6시간 가지고 미사도 봉헌해야 했습니다. 강론준비도 해야 했습니다.
잠도 자야했습니다.
외모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아서 쓰지 않은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비안네 신부님 성덕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사제로서 당연히 해야 할 역할에 대한 충실, 그것이 그분 성화의 비결이었습니다.
본당 사제로서 가장 중요한 성체성사를 지극정성으로 준비하고 경건하게 봉헌하는 것,
그리고 성체성사에 앞서 꼭 필요한 또 다른 성사 고해성사를 통해 신자들의 영혼을 치유하고
위로하는 것, 그것을 충실히 행함으로 인해 성인이 되신 것입니다.
양승국신부님 글입니다
8월4일 [연중 제18주간 화요일]
예레미야 30,1-2.12-15.18-22
마태오 14,22-36 또는 15,1-2.10-14
주님을 만나는 법; 불가능에 도전하라!
누군가가 저에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본 적 있어요?”라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머리로, 신학으로만 예수님을 아는 것이지 인격적인 만남의 체험을 하지 않은 것 같아서
그렇게 물어본 것입니다.
저는 그때 아직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정립이 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냥 “신학교에서 예수님 음성을 들은 때가 가장 인격적으로 만난 때였던 것 같습니다.” 라고만 말했습니다.
도대체 누군가를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저 역사 안의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바리사이-율법학자들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것은 그분에 대한 믿음이 생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생겼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바로 ‘불가능에 도전함으로써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실제로 인격적으로 만나고 있는 사람은 물 위를 걷고 있는 베드로뿐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왔어도 아직은 깊이 만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면 나도 할 수 있게 해주시는 선하신 분임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위해 오늘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 청한 이것을 우리도 청해야 합니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저도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위해 저 혼자만의 힘으로는 이루지 못할 꿈을 꿉니다.
그래서 그 꿈이 이루어지면 비로소 그분이 함께하셨음을 믿게 될 것입니다.
근래에 있었던 일입니다.
제가 이룰 꿈은 돈이 좀 필요할 것 같았습니다.
꽤 시간이 흐른 뒤에야 성취될 것이기에 지금부터 돈을 조금씩 모아놓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제 통장은 어느 선 이상은 돈이 넘지 못하게 스스로 그 액수를 정해놓았기 때문에
형에게 한 달에 얼마씩 돈을 맡기기로 하였습니다.
저는 성장 가능성이 큰 종목의 주식에 그 돈을 조금씩 넣어놓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묵상을 준비하다 보니 불가능한 것을 청하는 것은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느님처럼 완전하게 되라고 하십니다.
불가능합니다. 그 불가능한 것은 세상에서 큰 업적을 내는 일이 아니라 우선 자신을 이기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처럼 완전해지라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이것을 알고는 형을 통해 저축하는 일을 멈출 결심을 하였습니다.
사제로서 재물을 모으는 일은 자신을 이기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생존할 만큼만 가지고, 생존할 만큼만 먹고,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하루를 살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세상을 바꿀 수 있지, 무조건 세상을 바꾸려다가는 자기 자신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어떤 분은 세상을 바꾸려거든 먼저 이불부터 정돈할 줄 알아야 한다고 충고합니다.
1996년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사제서품 50주년을 맞는 해였습니다.
이때 함께 금경축을 맞는 몇몇 사제들을 초청하여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제비를 뽑아 순서를 정하였는데, 첫 번째 이야기를 시작하신 분은 학자셨습니다.
자신이 50년 동안 사제생활을 해 오며 이룬 업적들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두 번째로 선정된 분은 알바니아 예수회 사제이신 ‘안톤 룰릭’이었습니다.
다음은 바로 안톤 신부님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알바니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곳은 제가 사제서품을 받은 직후, 얼마 되지 않아 바로 공산독재치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무자비한 종교탄압이 즉각 시행되었고 저의 동료 예수회 사제들에게는 임의 재판을 거쳐 사형이 선고되었습니다.
모두 믿음의 순교자로 기쁘게 죽어갔습니다.
마치 조국의 구원을 위하여 빵이 쪼개어지고 피를 흘리듯이 말입니다.
1946년 그렇게 그들은 그들의 마지막 미사를 온 몸으로 봉헌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저에게 산채로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혀, 저의 팔을 벌리고 그분과 함께 있도록 하는 희생을 원하셨습니다.
저의 사제적 희생제사는 사제로서의 전 삶을 조롱과, 배척과, 고문과, 감옥살이에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서품을 받은 해 12월 19일, 공산정권은 제가 정부에 반대선동을 한다는 구실로 체포한 후
17년간은 감옥에, 그 후 다음 17년간은 노동수용소로 보냈습니다.
저의 첫 번째 감옥은 아주 추운 외딴 산골마을의 한 작은 화장실이었습니다.
9개월간, 저는 누울 수도, 다리를 펼 수도 없는, 그 비좁고 더러운 곳에서, 그것도 강제로 인분 위에 앉아 있어야만 했습니다.
서품을 받은 바로 그 해, 성탄절 밤에 그들은 저를 감옥의 1층에 있는 다른 화장실로 끌고 가서 옷을 벗기고 밧줄에 묶어 천장에다 발가락이 겨우 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하게 매달았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혹독한 냉기가 전신을 휘감았고 그것이 제 가슴까지 차 올라왔을 때, 심장은 곧 멈출 것만 같았습니다.
갑자기, 너무나 엄청난 절망감으로 저는 크게 소리를 내고 울었습니다.
그러자 저를 심문하던 사람이 달려와 밧줄을 잘라 저를 바닥에 내려놓고 다시 마구 구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로 그 날 밤, 그 더럽고 혹독한 곳에서 저는 참으로 예수님의 강생과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 고통 안에서 바로 저와 함께 제 안에서 힘을 주시는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는 너무도 강하게 저를 지탱해 주셨기 때문에 저는 그 고통 중에서도 위로를 느꼈고, 심지어 마음 깊이 신비로운 기쁨이 차올랐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사제로서의 제 삶의 거의 모든 것을 다 빼앗아버린 그 고문자들에게 저는 어떤 미움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1989년, 제가 79세 되던 해, 처음으로 감옥에서 석방되었는데 길거리에서 우연히 저를 고문하던 사람 중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곧장 그에게로 다가가 그를 진심으로 껴안았습니다.
이것이 사제로서의 제 삶이었습니다.
[출처: ‘안톤 룰릭 SJ 신부 이야기’, 김영석 신부(예수회), ‘기도의 사도직’ 카페]
‘고정원 루치아노’ 형제님은 자신의 일가족을 살해한 유영철을 용서하고 자신의 양자로 삼았습니다.
그 용서의 길은 멀고도 험했습니다.
한 번에 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밤새 기도를 해야 조금씩 마음이 누구러졌습니다.
그러나 이 길은 세례와 동시에 선택이 아니라 필수여야 했습니다.
그렇게 물 위를 걷고 이 과정에서 가장 확실하게 주님을 만난 사람은 본인 자신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통해 수많은 사람을 용서의 길로 이끌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만나려면 물 위를 걸어보아야 합니다.
물 위를 걷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는 일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할 수 있다면 그 과정에서 참으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저는 이제 하루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하루에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감사한 마음과 사랑의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정말 물 위를 걷는 것처럼 불가능함을 느낍니다.
그런데도 비틀거리며 하루하루 나아가다 보면 물 위를 걷고 있는 저를 발견하리라 믿습니다.
이것이 그분과의 인격적 만남을 위한 유일한 길입니다.
그분이 되지 않으면 그분을 온전히 만나지 못합니다.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위한 우리의 궁극적 길은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자신을 이기는 불가능의 길을 시작하며 우리도 주님께 청해봅시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8월4일 [연중 제18주간 화요일]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마태 15,1-2.10-14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그때에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어깁니까?
그들은 음식을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않습니다.’(마태 15,1-2)”
“‘너희는 듣고 깨달아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바리사이들이 그 말씀을 듣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을 아십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 심지 않으신 초목은
모두 뽑힐 것이다.
그들을 내버려 두어라.
그들은 눈먼 이들의 눈먼 인도자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마태 15,10-14)”
여기서 ‘조상들의 전통’은 '할라카' 라고 부르던 '생활 행동지침'을 가리킵니다.
식사 전의 정결 예식은 그 지침 가운데 일부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것을 어기는 것을 ‘종교적인 불경죄’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 있든지 간에
정결 예식을 행해서 몸만 깨끗하면 깨끗한(거룩한) 사람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형식만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속은 깨끗하게 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겉만 깨끗하게 하려고 하는 것은 ‘위선’이고, 또 속은 깨끗하지 않은데도 겉이 깨끗하다고 해서
“나는 깨끗한 사람이다.” 라고 잘난 체 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이렇게 꾸짖으셨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마태 23,25-28).”
하느님은 우리의 ‘속’을 보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하느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진실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물질’이 죄의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형식적인 정결 예식만으로 깨끗한(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라는 말씀은, 죄의 원인은 ‘마음’에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참으로 깨끗한(거룩한) 사람이 되려면
마음으로부터 깨끗해지려고(거룩해지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에 대한 설명이 뒤의 17절-20절에 나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나 배 속으로 갔다가 뒷간으로 나간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느냐?
그런데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데 바로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살인, 간음, 불륜, 도둑질, 거짓 증언, 중상이 나온다.
이러한 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
그러나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마태 15,17-20).”
하느님 앞에 참으로 깨끗한 사람으로 나서려면 마음을 먼저 씻어야 합니다.
마음을 씻는 방법은 ‘회개’와 ‘보속’입니다.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 심지 않으신 초목은 모두 뽑힐 것이다.” 라는 말씀은, 바리사이들의 ‘율법주의’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에 심판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잘 섬기기 위해서” 라는 명목으로 조상들의 전통과 율법 준수를
강조했지만, 그들 자신들의 위선과 교만 때문에 그들의 율법 실천은 형식적인 율법주의가 되어버렸고, 그래서 결국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들을 내버려 두어라.” 라는 말씀은 “율법주의자들이 심판을 받는 것은 그들 자신들의 탓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회개와 구원을 포기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꾸짖으신 일이 많은데, 그 일은 모두 그들을 회개시켜서 구원하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회개시키려고 타이르고 꾸짖어도,
고집이 너무 세서 듣지 않으면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눈먼 이들의 눈먼 인도자다.” 라는 말씀은, “그들은 율법을 모르는 백성들에게 그것을 가르치지만 그들 자신들도 율법을 제대로 실천하지 않는 눈먼 자들일 뿐이다.” 라는 뜻입니다.
제대로 실천하지 않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 라는 말씀은, “율법을 제대로 실천하지 않는 자가 율법을 모르는 자를 인도하면
둘 다 멸망하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위선자라면,
그는 자기 자신도 죄를 짓고, ‘남을 죄짓게 하는 죄’도 짓는 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의 속을 모르고,
그래서 그 사람이 위선자인지 아닌지도 모릅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보고서 다른 사람을 함부로 위선자라고 판단하는 것도 죄를 짓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나는 위선자인가? 아닌가? 나는 율법주의자인가 아닌가?”를 반성하는 일입니다.
(“나는 지금 겉으로만 깨끗한가? 겉과 속이 똑같이 깨끗한가?”)
사실 자기 자신이 위선자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더욱더 엄격해져야 합니다.
<사람들이 ‘깨끗한 사람’이라고 나를 칭찬할 때,
또 ‘거룩한 사람’이라고 나를 존경할 때, 그때가 위험한 때입니다.
바로 그때 마귀의 유혹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깨끗한 사람이다.” 라고, 또 “나는 거룩한 사람이다.” 라고 나 스스로 생각하는 것은, 이미 마귀의 유혹에 넘어갔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욕을 먹는 것보다는 칭찬을 듣는 것이,
그리고 비난을 받는 것보다는 존경을 받는 것이 더 좋지 않은가?
‘더 좋다.’는 그것이 함정입니다.
그 함정에 빠지기 전에 자기 자신을 더욱 엄격하게 다스려야 합니다.
그렇지만 항상 열등감과 자기 비하에 사로잡혀 있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객관적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8월4일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복음: 마태오 15,1-2.10-14: “사람을 더럽히는 것”
오늘 복음에서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온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믿음을 가지려 온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았다고 따지러 왔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어깁니까?”(2절)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은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일이었다. 원래 정결례 규정은 하느님께 대한 경외와 이웃 사랑을 돕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들은 그 정신을 잃어버리고 문자와 관습 자체에 집착하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불러 말씀하신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11절) 주님께서는 율법을 폐지하신 것이 아니라, 율법의 참된 중심이 마음의 정결에 있음을 드러내신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대목을 해설하며, 예수님께서 음식 규정을 문제 삼으신 것이 아니라 위선과 교만을 문제 삼으셨다고 말한.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악한 의지와 부패한 마음”이라는 것이다(“마태오 복음 강해”, 51강). 성 아우구스티노도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손의 씻김보다 양심의 씻김을 바라신다.” 겉은 깨끗해 보여도 마음 안에 미움과 시기와 거짓이 있다면 참된 정결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음식 자체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고 하신다. 창조된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창세 1장 참조)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창조된 것은 모두 좋은 것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으면 배척할 것이 하나도 없다.”(299; 1티모 4,4 참조) 그러므로 문제는 음식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마음이다. 교회는 외적 절제와 단식의 가치를 인정하지만, 그것은 마음의 회개를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열거하신 “살인, 간음, 불륜, 도둑질, 거짓 증언, 중상”(19절)이야말로 사람을 참으로 더럽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음식이 사람을 거룩하게 하지 않는다고 해서, 성체성사의 은총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성체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과 피이다. 성 바오로는 경고한다. “합당하지 않게 빵을 먹고 주님의 잔을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1코린 11,27) 교리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중대한 죄를 의식하는 사람은 먼저 고해성사를 받은 뒤에 성체를 모셔야 한다.”(1385) 성체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은총의 성사이지만, 그것을 합당하지 않게 받아 모시면 오히려 심판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핵심은 “성체가 거룩하게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거룩한 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정결해야 한다는 데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 말씀하신다.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 심지 않으신 초목은 모두 뽑힐 것이다.”(13절) 성 히에로니모는 이 말씀을 해석하며, 하느님께서 심으신 것은 믿음과 사랑과 진리이고, 인간의 교만에서 나온 가르침은 오래 남지 못한다고 말한다. 바리사이들의 문제는 전통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전통을 하느님의 뜻 위에 놓은 것이었다. 교리서도 같은 원칙을 가르친다. “전통은 하느님 말씀에 봉사해야 하며, 그 위에 군림해서는 안 된다.”(83-87 참조) 참된 전통은 복음을 보존하고 전달하지만, 인간적 관습이 복음의 정신을 가리게 될 때는 끊임없이 정화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그들은 눈먼 이들의 눈먼 인도자다.”(14절) 성 그레고리오는 “진리를 보지 못하는 사람이 다른 이를 인도하려 하면 함께 넘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영적 지도자의 첫 번째 조건은 지식이 아니라 겸손과 회개이다. 교리서는 양심에 대해 이렇게 가르친다. “양심은 진리에 따라 형성되어야 한다.”(1783-1785) 성경을 자기 생각대로 왜곡하면 우리도 눈먼 인도자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말씀을 배우고, 성령의 빛 안에서 분별해야 한다.
오늘 주님께서는 외적 형식에 머무르지 말고 마음의 회개로 나아가라고 부르신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권고한다. “입술을 깨끗하게 하려 하지 말고, 먼저 마음을 깨끗하게 하라. 마음이 깨끗하면 말도 깨끗해진다.” 우리의 손은 씻겨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씻겨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오늘 하루 주님께 이렇게 청하자. “주님, 제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고, 제 입에서 나오는 말이 형제를 살리는 말이 되게 하소서. 저를 눈먼 인도자가 아니라, 당신 빛을 따르는 참된 제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