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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정복 촉구와 율법 낭독
신 31:1-13
1 또 모세가 가서 온 이스라엘에게 이 말씀을 전하여
2 그들에게 이르되 이제 내 나이 백이십 세라 내가 더 이상 출입하지 못하겠고 여호와께서도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3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과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보다 먼저 건너가사 이 민족들을 네 앞에서 멸하시고 네가 그 땅을 차지하게 할 것이며 여호수아는 네 앞에서 건너갈지라
4 또한 여호와께서 이미 멸하신 아모리 왕 시혼과 옥과 및 그 땅에 행하신 것과 같이 그들에게도 행하실 것이라
5 또한 여호와께서 그들을 너희 앞에 넘기시리니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명령대로 그들에게 행할 것이라
6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하고
7 모세가 여호수아를 불러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에게 이르되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들에게 그 땅을 차지하게 하라
8 그리하면 여호와 그가 네 앞에서 가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9 또 모세가 이 율법을 써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 자손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에게 주고
10 모세가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매 칠 년 끝 해 곧 면제년의 초막절에
11 온 이스라엘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그가 택하신 곳에 모일 때에 이 율법을 낭독하여 온 이스라엘에게 듣게 할지니
12 곧 백성의 남녀와 어린이와 네 성읍 안에 거류하는 타국인을 모으고 그들에게 듣고 배우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고
13 또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 거주할 동안에 이 말씀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자녀에게 듣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게 할지니라
신 31:1-13 /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세우다] 모세가 다시 온 이스라엘 백성 앞에 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2) `나는 이제 나이가 120세나 되어 더 이상 여러분을 이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도 내게 `너는 저 앞의 요단강을 건너가지 못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 그러나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여러분의 맨 앞에 서서 요단강을 건너시고 그 땅의 백성을 멸망시켜 여러분 앞에서 사라지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그들을 쫓아내고 그 땅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또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대로 여호수아가 여러분의 맨 앞에 서서 요단강을 건너갈 것입니다. 4) 여호와께서 이미 아모리 족속의 왕 시혼과 옥을 멸하시고 그들의 백성과 땅을 멸망시키셨던 것처럼 요단강 서쪽의 족속들도 똑같이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5) 여호와께서 이제 그들을 여러분의 손에 넘겨 주실 것이니 여러분은 내가 이미 가르쳐 준 대로 그들을 모조리 처단해 버리십시오. 6) 여러분은 강하고 담대하십시오. 여러분은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지도 말고 떨지도 마십시오.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여러분과 함께 가시며 여러분에게서 떠나지도 않으시고 여러분을 버리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들 앞에서 물러나지 마십시오.' 7) 그리고 모세가 여호수아를 자기 앞에 불러 세우고 온 이스라엘 백성이 보는 앞에서 그에게 이렇게 분부하였다. `그대는 강하고 담대한 사람이 되시오.! 그대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여호와께서 이미 이 백성의 조상들에게 주겠다고 맹세하며 약속하신 땅으로 들어갈 것이며 바로 그대가 그 땅을 이 백성에게 상속 재산으로 나누어 줄 것이오 8) 여호와께서 친히 그대의 앞에 서서 걸어가시고 친히 그대와 항상 함께 계셔서 그대에게서 떠나지도 않으시고 그대를 버리지도 않으실 것이오. 그러므로 그대는 어떤 원수도 두려워하지 말고 어떤 대적 앞에서도 겁내지 마시오!' 9) [율법을 정기적으로 낭독하여라] 모세는 이제까지 자기만 알아서 직접 백성에게 전해 주던 율법을 모두 책에 써서 레위 지파 가운데에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고 다니는 제사장들과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에게 그 율법책을 넘겨 주고 10) 그들에게 이렇게 분부하였다. `여러분은 7년마다 한 번씩 모든 빚을 면제해 주는 해의 초막절이 되어 11) 온 이스라엘이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의 얼굴을 뵈려고 주께서 지정하시는 곳으로 와서 모이면 여러분은 온 이스라엘 앞에서 이 율법을 낭독하여 그들의 귀에 들려주십시오. 12) 그때가 되면 남자와 여자와 어린아이와 여러분의 마을에 함께 사는 외국인들까지 온 백성을 불러모으십시오. 그들이 모두 이 율법을 듣고 배워서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게 하고 이 율법책에 기록된 주님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십시오. 13) 또 아직 이 율법을 모르는 여러분의 자녀들도 이 말씀을 듣고 배워서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순종하게 하십시오. 여러분이 요단강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사는 동안 언제나 그렇게 하십시오.'
하나님은 모세의 뒤를 이어 여호수아를 선택하십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제사장들과 함께 가나안을 정복하고 면제년의 초막절마다 율법을 낭독해야 합니다.
여호수아를 세우다(1-8) 모세는 어느덧 120세가 되었습니다. 먼저 보낸 다른 사람들처럼 모세도 뒤를 따라야 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들려주신 명령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합니다. 대략 두 가지 정도 됩니다. 첫째,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요단을 건너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므리바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세가 요단 강 동편 땅 일부를 정복하게 하여 가나안 땅 입성에 대한 아쉬움을 적게나마 해소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여호수아를 세우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고 아모리 왕 시혼과 옥을 정복하신 것과 같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실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로 세움 받습니다. 여호수아는 두려워하거나 떨지 않아야 합니다. 여호수아가 두려워하거나 떨지 않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을 때에 가능합니다. 여호수아는 지금까지 모세 옆에서 모세가 경험했던 모든 것을 보며 살았습니다. 모세가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하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써서 주고 행하라 명하라(9-13) 모세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명령하신 모든 말씀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넓게 보면 모세오경의 말씀 전부를 썼을 수도 있습니다. 좁게 보면 신명기나 일부의 단편들을 기록했을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고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렇게 기록한 말씀을 레위 자손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장로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줍니다. 그리고 매 칠년 끝 해 곧 정기 면제년의 초막절에 모든 백성, 즉 남녀와 어린 아이들과 종들과 심지어 그 땅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을 모은 후 그들에게 낭독하라고 합니다. 그들로 그것을 듣고 배우고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고 합니다. 이후 요단 강을 건너가서 그 땅에 거주할 때 이 말씀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자녀들도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게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세대를 흘러 다음 세대까지 계속해서 전해지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적용: 삶과 신앙이 쉽지 않습니다. 곳곳에 많은 위험과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귀한 가르침을 전하는 방법에 대해 나누어 보세요. 성경필사도 한 가지 중요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1954년 이전까지 1마일(1.6km)을 4분 안에 달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겼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 빨리 달린다면 폐와 심장, 근육 및 인대가 파열되고 심지어 뼈가 부러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1954년 5월 옥스퍼드 의대생 ‘로저 베니스터’는 3분 59초 4를 기록하며 '마의 4분'을 깬 최초의 선수가 되었습니다. 더 놀라운 일은 이후 2년 동안 300여 명의 선수가 4분 벽을 돌파했습니다. 그동안 모두 불가능할 것이라고 여겼는데 베니스터의 '마의 벽'을 넘는 모습을 보고 자극받아 노력한 결과였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믿는지에 따라서 그에 따른 행동을 하게 됩니다.
< 설 교 >
건강한 식단
신 31:12-13 / 윤창용 목사
우리 사람은 동물성 식품과 식물성 식품을 모두 먹는 잡식을 합니다. 아주 다양한 음식물을 통해서 영양분을 얻는 것입니다. 퀴퀴한 냄새나는 포유동물의 젖에서부터 곰팡이나 돌멩이도 먹고 소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마다 좋아하는 음식의 기호가 아주 다양하고 특이합니다.
인도의 힌두교도들은 쇠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를 혐오합니다. 반면에 지중해 사람들은 염소고기를 좋아하고 벨기에 사람들과 프랑스인들은 말고기를 좋아합니다.
인류 문화학자 마빈 해리스라는 분의 「음식 문화의 수수께끼」라는 책을 보면 중국 사람들은 우유를 사용한 요리가 하나도 없답니다. 우유와 계란은 인간이 발견해 낼 수 있는 완전식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가운데에서도 우유만 먹으면 설사를 하시는 분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몇 몇 포유동물을 제외하고는 모든 포유동물의 젖에는 락토즈라는 당분이 들어있습니다. 이 락토즈라는 것이 소장에서 글루코즈와 갈락토즈로 분해되는데 이때 우리 몸에 락타제라는 효소가 이 우유인 락타제를 분해합니다. 그런데 황색인종 약 50%가 이 락타제가 부족하기 때문에 락토즈가 분해되지 않고 장에 쌓여 가스를 만들어 내고 설사가 되어 몸밖으로 쏟아져 나오게 됩니다.
이런 분들은 우유가 아무리 완전식품이라도 먹으면 안됩니다. 말하자면 그런 분들에게 우유는 건강한 식단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지난 주 생명의 경기장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영적인 경기에서 승리하려면 영적인 기본 체력이 강해야 된다고 말씀드렸는데 그 영적인 체력의 가장 기본은 바로 성경말씀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건강한 식단의 주 메뉴는 바로 성경말씀이어야 합니다.
1953년 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즉위식이 런던에서 열렸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해공 신익히 선생이 유학생 신분으로 그 즉위식에 참석하고, 윈스턴 처칠의 생가인 옥스퍼드의 블렌하임 궁전에서 열린 만찬에 참석했다고 합니다. 올해가 엘리자베스 여왕의 즉위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지난 6월 1일 나흘 간의 공식적인 축하 행사가 열렸습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즉위식이 거행된 1953년에 아주 감동적인 장면이 있었습니다.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장인 핏 왓슨(Pitt Watson)박사가 새로 왕위에 오른 여왕에게 성경을 건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에 지혜가 있습니다. 이것은 왕의 법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달리 말씀드리자면 성경은 왕의 법입니다. 여왕과 국회는 영국을 다스릴 통치법을 만들지만 하나님은 여왕을 위한 법을 만드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그 법은 동의를 구하는 법이 아니라 다만 순종과 깨달음을 요구하는 법입니다.
이 시대에 성경은 영향을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유명한 시인 T.S 엘리어트와 같은 시인의 글에는 온통 성경구절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포로 수용소에 갇혀 있던 마르틴 나이뮐러(Martin Neimoller)는 성경 한 권만 갖고 어려운 수용소 생활을 견뎌내었습니다. 그리고 독일이 전쟁에서 패한 후 수용소 생활을 끝내고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 독방에서 그 오랜 고통스런 시간 속에서 이 책은 내게 무슨 의미가 있었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정말 나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위로와 힘, 인도와 희망, 낮의 주인과 밤의 친구, 굶주리지 않게 했던 빵, 그리고 내 영혼을 소생시키던 생명의 물이 되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혼자 갇혀 있어도 외롭지 않았던 것은 바로 말씀때문이었습니다."
영국에서 성경은 딱 한 해를 빼놓고는 항상 베스트 셀러였습니다. 유일하게 베스트 셀러가 아니었던 때가 1962년이었는데 법정에 갈 정도로 외설 시비로 떠들썩했던 D.H 로렌스의 '채털레이 부인의 사랑'이 최고의 판매량을 차지했던 그 해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책입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책이며,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책이 성경입니다. 성경은 어떤 말이나 글보다 수준높고 통찰력이 있으며 정확하고 권위가 있는 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글로 나타나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한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이 말씀인 성경에는 네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을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기초적인 원칙입니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알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영적인 빈곤상태에서 벗어 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란 것이 때론 이상하게 굳어진 전통, 그리고 신앙적인 미신, 감상, 편견이 뒤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타파하고 바른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필요한 것이 말씀의 낭독입니다. 하루에 꼭 한 문단이라고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말씀을 무작정 읽기보다는 목적을 정해 놓고 읽으시면 휠씬 더 유익합니다.
두 번째 말씀의 원칙은 듣기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우리의 몸으로 배워야만 합니다. 많은 분들이 말씀을 듣습니다만, 생활 속에 적용하려고 애를 쓰지 않습니다.
말씀을 들으시면서 이 말씀이 내게 의미가 무엇인가를 잘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와 나와 관련지어 나에게 의미를 살피는 두 가지 행동이 말씀을 들으면 일어나야 그것이 말씀을 배우는 것입니다.
신약성서에는 말씀이란 단어로 '레마'라는 말과 '로고스'라는 말이 나옵니다. 신학자인 칼 바르트는 이 레마와 로고스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레마이고, 보편적인 하나님의 말씀은 로고스다라고 말입니다. 즉 로고스가 우리의 생활속에 적용되어 질 때 레마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생활속에는 레마가 있어야지 로고스만 있어서는 머리만 커지고 귀만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다른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나에게 하신 말씀이고, 그 말씀이 나에게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올 때 효과적으로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이렇게 될 때 말씀이 우리에게 레마가 되는 것입니다. 로고스 상태에서 말씀이 머물러 있게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주님이 부활하신 후 베드로와 만나주십니다. 이 이야기가 요한복음 21장에 나옵니다. 닭울기 전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난 뒤 처음 만나는 자리입니다. 주님은 그 자리에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아주 간단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요한복음 21장 19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로고스가 베드로에게 레마가 되는 순간입니다. '나를 따르라'는 이 말씀은 베드로에게는 특별하고 베드로에게는 행해야 하는 명령이었습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로고스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고 레마가 되게 하기 위해선 여러분 주일 낮 선포되어진 말씀으로 한 주간 사시는 것뿐만 아니라 다시 깊은 주의력을 가지고 하나씩 적용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가끔 여러분들에게 지난주간 설교 제목을 묻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냥 묻지 않고 넘어가는 것도 괜찮다 싶기도 하지만 목회차원에서 너무 무책임하게 내버려두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세 번째 우리에게 주는 원칙은 오늘 신명기 말씀에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고"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듣고 여러분이 행하지 않으시면 그 말씀이 저절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괴롭히게 됩니다. "야! 내가 말씀대로 살지못하는구나!"라고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미칠 것 같습니다. 그때에는 도리어 말씀이 여러분을 옭아매는 속박의 끈이 됩니다. 그러니 말씀을 들으면 배우고, 배웠으면 실천해야 합니다.
결국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몰라서가 아니라 불순종하는 것이 가장 최대의 현안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세 번째 원칙입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가지 듣고 이해했고 순종했으므로 이제는 확신을 갖고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이 우리의 삶의 고백과 만나게 된다면 우리의 증거는 다른 사람들에게 굉장히 효과적으로 증거될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이 말씀을 증거하기 위한 열정으로 53년동안 8천 마일을 말을 타고 여행을 했습니다. 그는 해마다 천 번이 넘는 설교를 했습니다. 어거스틴 비렐(Augustine Birrell) 이라는 말은 요한 웨슬레에 대해서 "아무도 요한 웨슬레를 우리 영국 국민의 삶에서 떼어놓지 못할 것이다" 어떤 사람도 요한 웨슬레처럼 예수님 가까이에서 산 사람은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성령행전이라고 불리우는 사도행전의 선교 행적은 기독교인 1명이 3만명을 변화시킨 역사입니다. 말씀의 역사가 일어나기만 하면 생동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면 우리는 말씀의 역사를 일으키기 위한 방법을 알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공부하는 기본 단계는 본문이 말하고 있는 바를 그대로 파악하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 본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이유는 우리의 신학지식이나 성경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시력의 문제입니다. 실력이 아니라 시력입니다. 난해한 성경말씀보다 우리는 쉽고 자주 접하는 성경말씀에 더 잘 안다고 여기기 때문에 오히려 더 모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활동에 관해 적은 복음서의 경우 주일학교 때부터 동화식으로 들어온 터라 선입감을 가지고 본문을 대하기 때문에 깊이 있게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여러분들은 7가지 질문을 하면서 읽으시면 말씀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누가 등장인물인가를 먼저 파악하시길 바랍니다. 그 사람은 어떤 직위에 있었는지, 역할을 무엇인지 태도는 어떠한지, 또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어떠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2. 중심행동은 무엇인가를 살펴야 합니다. 논쟁을 벌이고 있는지, 아니면 기적이 일어났는지, 대화를 하고 있는지, 복음전도인지, 병고침인지 중심 사건을 이해하시면 됩니다.
3. 어디에서 사건이 일어났는지를 살피십시오.
4. 언제 행동이 일어났는지 살펴야 합니다.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의 집으로 갈 때인지, 변화산상에서 내려올 때인지, 아니면 웃시야 왕이 죽던 때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5. 어떻게 그 일이 진행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절정에 이르고 있는지, 그리고 그런 행동을 한 인물에 대해 성경은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6.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살핍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7. 마지막으로 '그러므로'를 말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적용해 보는 것으로 성경 읽기를 마치면 됩니다.
많은 성도들이 기도 응답에 대해 자신감을 잃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나 뜻을 알고 싶어하십니다. 사랑하는 동광 성도 여러분 !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들려주시고자 하는 음성은 분명히 성경 말씀을 통해서 들려주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성경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이야기하시는가 하는 점입니다. 어떤 분들은 성경을 잡고 펴서 임의대로 보이는 말씀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말씀이다'라고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마태복음 27:5절의 말씀이 나오면 어떻합니까? "유다가 목매어 죽었더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다시 폈더니 누가복음 10장 37절 말씀이 나옵니다. "가서 너도 이와같이 하라"
안될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간절히 알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은 우리 앞에 성경을 위엄있게 펴시고는 그 분의 답이 있는 구절로 우리의 눈을 이끄십니다. 이러한 방법은 항상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하는 분명한 확신이나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평강을 동반하는 성령의 내적 증거가 뒤따르게 마련입니다.
바퀴벌레를 먹는 종족이 있는가 뉴질랜드 원주민들과 하와이 사람들, 중국사람들, 우리나라 사람들은 개고기를 먹습니다. 이 모든 것은 각 나라의 생태 조건 속에서 최대한 적응한 결과로 음식문화가 생겼습니다. 식문화가 그 나라의 문화를 재는 척도가 될 수 없습니다. 서로에 대한 부당한 편견을 버리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먹는 음식이 무엇이냐에 따라서는 사람의 질이 달라집니다.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완전한 음식은 성경말씀밖에 없습니다. 시편기자는 119편 105절에서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나라에 이르는 길을 보이시기 위해 주님을 이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낮아 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책에 기록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한 권, 성경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기도하실 때 이 말씀의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대하는 5대 태도
신명기 31:9-13 / 이한규 목사
1. 말씀을 기록하라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그냥 흘려듣지 않도록 썼다(9절). 공동체가 망해도 나중에 회복되려면 공동체의 정체성이 분명해야 한다. 그 정체성 확립에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기록’이다. 공동체의 역사 기록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말씀 기록은 더 중요하다. 작은 공동체도 좋은 기록을 남기면 그 영향력이 오래 지속된다. 그 기록이 가치가 있으면 더욱 그렇다. 자기를 남기려면 기록을 남기라. 위대한 발견이나 발명품을 남기면 죽어도 실제로 자기 영향력은 죽지 않고 오래 지속된다. 그처럼 죽어도 지속적으로 사는 복을 추구하라. 기억도 중요하지만 기록은 더 중요하다. 기록이 기억을 앞선다. 은혜를 기억하라. 더 나아가 기록까지 하라. 거기서 뚜렷한 정체성과 놀라운 영향력이 나타난다.
2. 말씀을 들으라
모세는 그 기록한 율법을 매 칠 년 끝 해인 면제년의 초막절에 온 이스라엘이 여호와 앞 그가 택하신 곳에 모일 때 낭독해 다 듣게 하라고 했다(10-11절). 면제면은 안식년을 뜻한다. 성도의 기본은 말씀을 듣는 것이다. 힘들고 피곤하면 판단력과 지혜가 떨어질 수 있기에 늘 말씀의 기본으로 돌아가는 습성을 키워야 한다. 힘들어도 정체성은 흔들리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말씀은 자기 존재와 현실을 일깨워주면서 현실 극복 방법도 알려준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래되었지만 현재의 길잡이가 되기에 충분하다.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 말씀을 새겨들을 때 바른 목표도 생기고 바른 길에 대한 시야도 열린다.
3. 말씀을 배우라
모세는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거하는 누구도 예외 없이 어린이와 성읍 안에 거하는 타국인도 말씀을 듣고 배우게 했다(12절). 배움의 다른 말은 과정이다. 과정이 생략된 채 얻은 결과는 지속력이 없다. 배움에는 참음과 기다림의 기간이 요구된다. 참음과 기다림이 수반된 배움을 통해 머리의 지식이 가슴의 열정으로 변하고 그 가슴의 열정이 손발의 행위로 나타나면서 부족한 것들이 채워진다.
배움을 통해 배고픔이 해결된다. 말씀을 배울 때 막연한 꿈과 소원은 확실한 비전과 소망이 된다. 왜 오래 신앙생활을 해도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지 못하고 욕심에 잘 흔들리며 말씀의 실천 능력이 부족한가? 배움에 진지하게 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할수 있으면 말씀을 암송하라.
4. 말씀을 지키라
왜 모세는 이스라엘이 말씀을 듣고 배우게 했는가?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기 위해서였다(12절).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지키는 것까지 해야 한다. 말씀을 지킬 때 평안도 얻고 축복도 얻는다. 요한복음 14장 15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 (말씀)을 지키라.” 말씀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려는 삶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이다. 감정과 기분과 상황에 따라 말씀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고 내 형편과 입장에 따라 말씀을 달리 적용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말씀대로 살려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분명한 증거이고 성령충만의 분명한 표식이다.
5. 말씀을 가르치라
부모와 선대와 선배의 가장 큰 책임은 자녀와 후대와 후배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다(13절). 말씀을 가르치려면 지식적으로 가르침 이상으로 삶으로 모범이 되라. 바른 가르침이란 바른 가리킴이다. 고등학교 3학년에 되었다고 말씀 교육보다 입시 교육을 중시하는 모습을 추호도 보이지 말라. 입시 때문에 주일성수를 잠시 등한시하면 입시 후에는 아예 교회를 멀리하는 경우도 많다. 외형적인 성취에 집착해 말씀을 멀리하지 말라. 대학에 떨어져도 교회에 나오겠다는 것이 성도의 자세이고 작은 순교자의 자세다. 유대인처럼 말씀 교육을 철저히 하면 그 자녀는 궁극적인 의미에서 실패한 인생이 되지 않는다.
이 율법을 낭독하여
신 31:9-23 / 양인국 목사
1. 모세는 본문을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다음 세대에도 복된 삶을 살기 위하여 마땅히 행해야 할 일들을 말해 주었다. 그것들 가운데 하나는 제사장들과 이스라엘의 장로들로 하여금 면제일과 초막절에는 항상 백성들에게 율법서를 읽어 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율법서를 노래로 만들어서 이스라엘에게 가르침으로 그들로 하여금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모세는 이렇게 한 것은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지속될 때 비로소 이스라엘 가운데 변함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은 신명기를 통하여 거듭 반복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자손 대대로 복된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말씀해 주셨다. 그 길은 바로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이와 같은 반복된 가르침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 모두는 복된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알고 있었지만 그 길로 행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기 보다는 오히려 불순종하며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째서 그들은 복된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길로 행하지 않았을까? 우리가 이 물음에 대하여 주목하는 것은 이 물음이 이스라엘에게만 제기 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시대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제기 되는 물음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복된 삶으로 부르심을 받은 이스라엘과 모든 시대 믿음의 사람들이 복된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가 동일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본문을 통하여 이 물음에 대하여 주시는 대답을 듣고 그 말씀에 따라 행한다면 우리는 잃어버린 복된 삶을 다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모든 시대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시는 대답은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지속하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이 각각 가지고 있는 성향과 처한 환경은 다를 지라도 그들 가운데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계속된다면 말씀의 생활화가 이루어 질 것이고 이로 인하여 언제나 말씀에 따라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믿음의 공동체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 가운데 생활화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수단들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다. 왜냐하면 우리가 말씀을 듣지만 속히 잊어버리고 세상이 하는 말에 따라 사는 것은 우리 곁에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세상의 말이 더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구조를 바꾸지 않는다면 우리 가운데 말씀의 생활화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위하여 본문은 두 가지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하나는 면제일과 초막절에 항상 지도자들이 백성들 가운데 율법서를 낭독해 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율법서를 노래로 만들어서 백성에게 가르쳐줌으로 그들로 하여금 노래를 부르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와 같은 권고의 말씀에 따를 때 그들 가운데 말씀의 생활화가 이루어질 것이고 이렇게 되면 그들이 속해 있는 공동체는 말씀이 중심이 된 문화가 창조될 것이다. 그리고 이 문화는 공동체에 속해 있는 모두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줄 것이고 이로 인하여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그들은 경외하는 자들에게 약속된 복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이것은 공동체 안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문화가 정착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자연스럽고 그렇지 않은 삶이 부자연스럽게 된다는 의미다. 이처럼 공동체 가운데 어떤 문화가 창조되느냐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문화를 중요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고 또한 그들이 속한 공동체에 하나님 중심의 문화를 창조하여 정착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은 본문을 통하여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면제일과 초막절에 백성들에게 율법서를 낭독해 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 면제일과 초막절과 같은 특정한 날을 언급하신 것은 정기적으로 말씀을 가르치라는 의미다. 즉 지도자들은 매년 초막절마다 그리고 칠년마다 한번 있는 면제일에 백성들에게 율법을 낭독해 주어야 했다. 이렇게 함으로 이스라엘이라는 믿음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정기적인 시간을 구조적으로 마련할 수 있었다. 우리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을 영적부흥 또는 영적인 삶을 살기 위하여 구조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사건들 가운데 중요한 사건들 중의 하나인 오순절에 일어난 영적 부흥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예루살렘에 모여 기도하던 백이십명의 성도들을 통하여 일어난 사건이다. 우리가 이 사건에서 주목하는 것은 그들이 한 곳에 모여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에 전념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함으로 오순절 영적 부흥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할 수 있는 환경(구조)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음 말씀은 이와 같은 사실을 말해 준다.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행1:12-15)” 만일 그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장소와 함께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지 않았더라면 이처럼 기도에 전념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들이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하지 않았더라면 오순절 영적 부흥이 일어날 수 있었겠는가? 우리는 이와 같은 물음들에 대하여 “아니오”라고 대답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1:4)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들 가운데 영적 부흥이 일어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신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오순절 영적 부흥이 일어난 이후에도 그 부흥이 지속되었다. 이와 같이 될 수 있었던 이유도 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 다음은 사도행전2장 44-47절의말씀이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이 말씀은 예루살렘교회 성도들 가운데 재산을 통용하고, 날마다 성전에 모이는 그리고 애찬을 통하여 성도의 교통을 할 수 있는 것이 구조화 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만일 그들 가운데 이와 같은 구조가 없었다면 영적 부흥이 지속될 수 있었겠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 역시 “아니오”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믿음의 공동체 안에 정기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이런 구조는 말씀을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특정한 날과 시간을 정해 놓음으로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가정에서 가족들 모두가 그리고 교회에서 성도들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정기적으로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구조화 한다면 가정과 교회 안에 하나님 중심의 문화가 정착될 것이라는 것이고 또한 이로 인하여 경외하는 자들에게 약속된 복된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말씀의 생활화를 이루기 위하여 요청되는 것들 가운데 또 다른 하나를 말해 주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율법들)들을 노래로 만들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부르게 함으로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언급한 면제일과 초막절이 율법서를 낭독하는 것이 공동체 안에 하나님 중심의 문화화를 위한 것이라면 율법서를 노래로 만들어서 백성들 개개인이 부르도록 한 것은 개인의 삶 가운데 말씀의 생활화를 위한 구조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19-21절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르쳐 그들의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 그들이 수많은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이스라엘 모두가 노래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그 말씀을 마음에 새겨 둔다면 이로 인하여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고 또한 세상의 유혹으로 인하여 세속에 빠져 재앙과 환란을 당할 때도 노래를 통하여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그릇된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향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특별히 우리는 개인의 영성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노래로 만들어 그 노래를 부르게 하셨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믿음의 사람들 개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쉽게 마음에 새기고 기억할 수 있는 은혜의 수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오늘의 우리에게 이와 같은 노래를 대신할 수 있는 수단은 경건의 시간이 될 것이고 감사의 일기가 될 것이다. 서신의 성도 모두가 영적 생활을 위하여 적용하고 있는 것들 가운데 하나는 은총으로 허락해 주신 하루를 경건의 시간으로 여는 것이고, 하루를 마칠 때 하루 동안 베풀어 주신 은혜들을 돌아보며 감사로 마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율법서를 노래로 만들어 매일 그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우리가 매일 아침 경건의 일기를 쓰고 하루를 마칠 때 감사의 일기를 쓴다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져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게 해 줄 것이고 또한 우리가 그릇행할 때마다 우리의 마음에 새겨진 말씀들을 생각나게 해 줌으로 회개하고 다시 믿음의 삶을 살도록 이끌어 줄 것이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이끌어 주는 것은 오직 말씀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만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가르쳐 주고 또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은혜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이 하나님의 말씀뿐이라는 의미이고 또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앎으로 우리는 믿음을 더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처럼 하나님을 보다 더 깊이 알고 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더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할 때 경외하는 자들에게 약속해 주신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와 같은 사실을 안다면 개인과 가정과 교회 안에 항상 말씀을 가르치고 배울 수 있도록 구조화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될 것이다. 서신 가운데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정기적으로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시간이 지속될 수 있도록 하자. 그리고 서신에 속한 우리 모두는 은총으로 허락해 주신 하루를 경건의 시간으로 열고 또한 하루를 마칠 때 베풀어 주신 은혜들에 대한 감사로 마치자. 이를 위하여 이스라엘이 율법서를 노래로 만들어 항상 그 노래를 불렀던 것처럼 경건의 일기와 감사의 일기를 노래처럼 부르며 살기 원한다. 이렇게 한다며 우리는 복된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알지만 그 길로 행하지 않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땅에서 영원히 복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3.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말씀을 가르치고 배울 수 있게 해 주옵소서 그리고 이로 인하여 하나님을 더욱 경외하는 삶을 살게 해 주옵소서.
앞서 인도하시는 하나님
신명기 31:6-8 / 김필곤 목사
코로나 19가 급속히 확산되면서 사람들은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의 특징 중의 하나는 불안입니다. <불안의 시대(기디언 래치먼 저)>라는 책을 보면 1978-1991년까지를 전환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1991-2008년까지를 낙관의 시대라고 말하고, 2008-현재까지를 낙관했던 모든 것이 흔들리는 불안의 시대라고 구분하였습니다. 오늘 이 시대 사람들은 불안이라는 만성 염증에 걸려 삽니다. 불안은 시대의 암으로 도미노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코로나에 걸리지 않을까 불안해합니다. 암에 걸리지 않을까 불안해 합니다. 집값이 폭등하는데 아파트나 구입할 수 있을까 불안해 합니다. 조금만 통증이 와도 혹시 암이 아닌가 불안해 합니다. 직장을 잃지 않을까 불안해 합니다. 부채가 많은데 금리가 오르지 않을까 불안해 합니다. 결혼하지 않는 자녀를 보면서 자녀는 결혼이나 할까 불안해 합니다. 자신의 노후 생활에 대하여, 자식의 진학에 대하여 불안해 합니다. 북한 핵이 남한에 떨어지지 않을까 불안해 합니다. 진학에 대한 불안, 취업에 대한 불안, 결혼에 대한 불안, 노후에 대한 불안, 잉태에 대한 불안, 건강에 대한 불안, 자녀에 대한 불안... 등 각종 불안이 만성적으로 삶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10대는 진학, 20대는 취업, 30대는 결혼, 40대는 노후, 50대는 고립, 60대 이상은 건강에 대해 불안을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급격한 변화의 시대에는 더욱 불안이 가중됩니다. <세계 미래보고서 2021>라는 책을 보면 코로나 팬데믹 후 마주하게 될 핵심적인 변화를 8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코로나 이후 부의 판도가 바뀐다는 것입니다. 최근 추정에 따르면 모든 실제 자산의 현재 가치는 전 세계적으로 약 256조 달러 정도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현금의 종말이 온다고 합니다. 이미 동전을 꺼내 물건을 지불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트에서 장으로 보거나 택시를 타거나 현금을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동산, 주식, 금, 미술품 등 모든 자산은 토큰화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도심 부동산 불패의 신화는 깨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아파트 문제로 난리인데 재택근무로 미국은 구글 본사가 있는 켈리포니아 마운틴뷰 지역의 임대료는 30% 떨어졌고, 애플 본사가 있는 쿠퍼티노는 14.3 %가 떨어졌다고 합니다. 샌츠란시스코 방 1개짜리 아파트 월세가 2019년 6월에 비해 11.8% 하락했다고 합니다. 뉴욕 맨해튼은 25%나 집값이 하락했다고 합니다. 미래를 빨리 읽는 삼성그룹은 최근 2년간 서울 도심에 있는 빌딩 3조 원어치를 팔았다고 합니다. 재택근무 보편화로 도심이 공동화되고 외곽으로의 이주가 늘면서 부동산 시장이 전면 달라지고, 디지털화폐 전쟁과 핀테크의 발달로 금융권도 새로이 재편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교육도 급격히 변화되는데 대학 학위 무용지물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온라인 교육의 보편화, 디지털 학습의 대변혁으로 10년 안에 대학이 붕괴된다고 말합니다. 2020년 7월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등이 대학교 졸업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답니다. '포춘 100대 기업' 중 대학 졸업장을 기피하는 기업은 절반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 외 우주시대, 시민, 국가와 정치, 복지, 비즈니스와 일자리, 기술과 문명 등의 변화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예측을 벗어난 거대하고 급격한 변화들이 속속 일어날 것이라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불안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닙니다. 생명과 인식, 능력의 한계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 역사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존재하는 것이 불안입니다. 오늘 성경이 기록될 당시도 불안한 시대였습니다. 민족적 불안이 극에 달했습니다. 모세는 이제 120살이 되어 죽을 때가 되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아직 지도자로 검증이 되지 않았습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땅입니다. 수많은 백성이 한꺼번에 쉽게 건널 수 없는 요단강이 있습니다. 낙공 불락의 여리고성이 있습니다. 잘 무장된 가나안 7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전술핵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장되고 훈련된 군인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40년 고생하여 요단강 앞까지 왔는데 한 순간에 생명도 가족도 다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전쟁에 참전하여 자식을 잃어버리고 남편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민족이 몰살당할 수도 있습니다. 예측하지 못할 미래에 대하여 지극히 불안할 때였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무슨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까? 우리가 오늘 읽은 8절을 크게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 그가 네 앞에서 가시며”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불안해 하지 말라 하나님이 앞서 가신다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네”는 모세 대신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야 할 여호수아를 말합니다. 오늘날 코로나 팬데믹 상태에 있는 두려워하는 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수능 시험을 앞두고 염려하는 수험생들을 말할 수 있고, 사업에 실패하고 고민하는 사람을 말할 수도 있고, 수술을 앞에 논 환자가 될 수 있고, 몸의 통증으로 큰 병에 걸리지나 않았나 불안해 하는 우리가 될 수 있고, 어려운 때 사업을 접고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는 사람을 말할 수 있고, 결혼하고 이제 부모를 떠나 새로운 삶을 사는 신혼 부부를 말할 수 있고, 직장을 퇴직하고 이제 새로운 삶을 계획하며 염려하는 은퇴자를 말할 수 있고, 건강히 살다 질병이 걸려 수술을 하려고 계획하면서 두려워하는 환자를 말할 수 있고, 새로운 도전 앞에서 불안해하며 망설이는 젊은이를 말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저와 우리 성도님이 될 수 있습니다. “네 인생”, “네가 앞서가면” 무엇인가 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앞서가신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3절도 보십시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보다 먼저 건너가사”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보다 앞서 행하신다고 강조해 주시고 있습니다. 신명기는 모세가 천국 가시긴 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설교한 내용입니다. 첫 번 설교를 할 때도 이 사실을 강조하였습니다. 신명기 1장 30절을 보십시오.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실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33절을 보십시오.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기하신 자이시니라” 믿습니까?
시편 68편 7절에 "하나님이여 주의 백성 앞에서 나가사 광야에 행진하셨을 때에 …"라고 하였습니다. 출애굽기 23장 20절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시기를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를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23장 23절에서는 “나의 사자가 네 앞서 가서 너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에게로 인도하고 나는 그들을 끊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이사야서 45장 2절에서는 “내가 너보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하게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빗장을 꺾고”라고 했습니다. 너무 불안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리두지 않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하나님은 쓰레기 청소하는 미화원 정도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쓰레기같은 문제만 던져놓고 청소해 달라고 하면 안됩니다. 지난 주 해외 학교를 건축하기 선교헌금을 드렸습니다. 어느 장로님이 많은 헌금을 했습니다. 그 장로님이 수요일에 점심식사를 하자고 해서 식사를 하며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직장 생활할 때 선교를 위해 마련한 헌금인데 이제 나이들어 해외에 선교 봉사도 갈 수 없어 이번 기회에 했다고 간증하였습니다. 노 부부가 하나님을 가장 존중히 여기며 매일 새벽에 나오시고 수요예배에 드리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하나님을 쓰레기처럼 취급하면 내가 쓰레기처럼 취급당합니다. 하나님을 가장 존중히 여기며 시간과 재능, 물질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존중히 여겨주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하2:30)” 올해 들어와 어느 권사님께서 시간을 내어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며 교회에 나와 매주 나와 열심히 봉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존중히 여기며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해 힘쓰시면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더해 주시는 축복이 임하실 줄 믿습니다. 불안할수록 더욱 앞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야 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하고 했습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실 것이라고 약속해 주었습니다. “주께서 내길 예비하시네 주께서 내길 예비하시네 이제 하루하루를 주를 위해 살리라 주께서 내 길 예비하시네. 나 이제 주를 따라 가려네 나 이제 주를 따라 가려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앞세우고 뒤에서 따라오시며 뒤치다꺼리는 분이 아니시고 우리보다 앞서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 하나님이 앞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믿음으로 승리하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보다 앞에 행하시면서 무슨 일을 하십니까?
1. 앞서가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3, 8)
8절을 보십시오. “그가 네 앞에서 가시며”라는 말은 앞에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3절에 보면 “너보다 먼저 건너가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거느리고 요단강을 건너가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건너가신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1장 33절에서는 "그는 너희 앞서 행하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너희의 행할 길을 지시하신 자니라."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13장 2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광야 길은 동서 남북도 분간하기 힘들고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을 잡기 힘든 곳입니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좇아가면 가나안 땅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십니다(창22:14). 믿음 생활이라는 것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 앞서 인도하시는 사실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오늘날 무엇으로 인도하십니까?
첫째는 하나님께서는 주권적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명하시고 상황을 만드셔서 우리를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인도하십니다. 가나안 땅에 가는 것은 모세의 계획도 여호수아의 계획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아브라함을 통해 400여년 후에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에 갈 것을 예고해 주었고 하나님이 구원사를 이루기 위해 주권적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힌 것은 그들을 통하여 간수와 그의 가족을 구원시키기 위해 인도하신 것입니다(행16:24-34). 이것은 바울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은 지시하심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냥 무작정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해 주시고 인도하십니다. 가나안 땅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구체적으로 말씀을 통해 지시해 주십니다.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원수를 사랑하라, 490번도 용서하라 성령 충만을 받으라 겸손하라” 등으로 지시하시며 인도하십니다.
셋째는 분별하도록 하면서 인도해 주십니다. 일상생활의 대부분의 선택과 결정들은 성경에 구체적으로 지시 사항이 없습니다. “서울대에 들어갈 것인가? 연세대에 들어갈 것인가?” 이런 경우에 영적인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로마서 12장 2절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자신의 실력, 자신의 인생 목표, 자신의 장점, 가정 환경, 시대적 필요 등 다양한 것을 참조하여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이성을 통해 분별해야 합니다.
넷째는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인도하심입니다. 베드로가 기도하는 가운데 고넬료에게 가게합니다. 사도행전 8장 26절을 보면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2. 앞서가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승리하게 해 주십니다(3).
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앞서 가셔서 무엇을 합니까? “이 민족들을 네 앞에서 멸하시고 네가 그 땅을 차지하게 할 것이며”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일 뿐 아니라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이십니다(출17:15). 이 민족은 가나안 땅에 이미 살고 있었던 헷, 기르가스, 아모리, 가나안, 브리스, 히위, 여부스 족속들입니다(7:1) 하나님이 앞서가시며 어떻게 승리하게 해 주셨는가 예를 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아모리 왕 시혼과 옥과 및 그 땅에서 행하신 것과 같이(2:24-3:11;29:7;민 21:21-35) 그들(가나안 7족)에게도 행하실 것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그들을 너희 앞에 넘기시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여호수아도 임종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기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 앞에서 그들을 쫓아내사 너희 목전에서 그들을 떠나게 하시리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그 땅을 차지할 것이라(수23:5)”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승리에 대한 약속만 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싸워주셨습니다. 요단강을 가르게 해 주셨습니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려 주셨습니다. 사사시 4장 14-15에 보면 “드보라가 바락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넘겨 주신 날이라 여호와께서 너에 앞서 나가지 아니하시느냐 하는지라 이에 바락이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에서 내려가니 여호와께서 바락 앞에서 시스라와 그의 모든 병거와 그의 온 군대를 칼날로 혼란에 빠지게 하시매 시스라가 병거에서 내려 걸어서 도망한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솔 왕 야빈은 철병거 구백 승으로 20년 동안 이스라엘을 학대해 왔으나 우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앞서 행하사 그 모든 병기와 군대를 쳐서 파하게 하신 것입니다. 앞서 행하시며 싸 우시는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불레셋과 싸울 때도 사무엘하 5장 24절에 “곧 공격하라 그 때에 여호와가 너보다 앞서 나아가서 블레셋 군대를 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나단도 질 수밖에 없는 전쟁이지만 하나님이 앞서 행하시며 승리하게 해 주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넘겨주시는 그들은 무엇입니까? 성도님들께 그들은 무엇입니까? 새로운 사업입니까? 진학입니까? 성공입니까? 노후입니까? 질병입니까? 결혼입니까? 잉태입니까? 직장입니까?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 8:28)”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승리를 보장하면서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너희에게 명한 모든 명령대로 그들에게 행할 것이라”
6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리 말라”
7절을 큰 소리로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모세가 여호수아를 불러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에게 이르되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들에게 그 땅을 차지하게 하라”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백성을 거느리고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한 땅에 들어가 차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저와 우리 성도님이 차지할 땅은 무엇입니까? 건강입니까? 사업에 성공입니까? 인격 성숙입니까? 자녀 잉태입니까? 취업입니까? 진학입니까? 부흥입니까? 선교입니까? 가족 구원입니까? 원수 용서입니까?
하나님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담대하게 두려워하지 말고 그 땅에 주신 재능을 다 가지고 그 땅에 들어가 차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는 담대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오직, 용기>의 저자 레나테 다니엘은 "지금 당신이 마주하는 실패, 두려움, 불안을 극복하는 힘은 오직 용기뿐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용기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는데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신앙의 영웅들은 한결같이 용기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윗은 골리앗 앞에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 있게 물맷돌을 가지고 나아가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민족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난 것은 아브라함의 용기 때문이었습니다. 75년이나 정든 땅이지만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과감하게 버린 용기가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믿음으로 우뚝 서 기적의 가문을 만들려면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 과감하게 버리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모세가 80살 노인으로 민족을 이끄는 데는 용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다니엘과 친구들이 풀물불과 사자굴 앞에서도 무릎을 꿇지 않게 한 것은 그들의 용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드온이 300명의 용사로 수많은 적과 싸우는 데는 용기가 있어 가능했습니다. 엘리야가 이방 신을 섬기는 선지자 850명 앞에 담대히 설 수 있었던 것도 용기이고,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고 왕 앞에 나아가 민족을 구한 것도 용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이 행복하게 살려면 어떤 두려움에도 문제 앞에 무릎 꿇지 않는 용기,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할 용기, 열등감을 극복하고 행복하게 살 용기,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을 용기, 미움 받을 것을 피하지 않는 용기,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용기, 싫은 사람을 용서할 용기 등이 있어야 합니다. 변화와 위기의 때에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용기입니다. 이미 제4차 산업혁명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모바일과 인공지능, 사물 인터넷, 로버트, 빅데이터 등에 의해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산업사회가 시작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일자리가 살아질 것입니다. 앞으로 다가올 세계에서 승리하고 성공하려면 무엇보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진정한 용기는 하나님이 앞서 가시면서 승리하게 해주신다는 사실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소멸, 절단, 자유 상실, 분리, 자아 죽음이라는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두려움들은 미래의 불확실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확실하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과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보다 먼저 건너가사 이 민족들을 네 앞에서 멸하시고 네가 그 땅을 차지하게 할 것이며 여호수아는 네 앞에서 건너갈지라(신 31:3)" 마른 막대기로도 홍해를 가르시고, 돌멩이로도 골리앗을 무너뜨리고, 5병 2어로도 5천명을 먹이시고, 나귀 턱뼈로도 천명을 죽이고, 찢어진 옷으로도 물을 가르십니다. 누구의 문제가 아니고 무엇의 문제가 아닙니다. 꼭 능력 있는 사람, 꼭 힘 있는 사람, 꼭 좋은 도구, 능력 있는 도구가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쓰시면 승리하고 성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미래의 불확실 성 앞에서 하나님은 너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농사꾼 아모스, 소모는 엘리사, 장애인 에후, 주부 드보라를 사용하여 민족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을 성취하게 하였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소멸되게 하지 않게하고 절단나지 않도록 하면, 우리를 노예로 방치하지 않으며 하나님과 분리되어 죽도록 방치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루려 승리하게 만드십니다. 이 사실을 믿고 시대가 어떻게 변하든 담대하게 주어진 사명을 성취하여야 합니다.
3. 앞서가시는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십니다(6,8)
앞서가시며 우리를 인도하며 우리에게 담대하게 차지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왜 두려워하지 말고 떨지도 말고 그 일을 담대하게 감행하라고 말씀하십니까? 6절을 다시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이는”이라는 말은 왜냐하면 이유를 말하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이 말씀을 믿습니까? 우리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죽어 지도력의 공백이 생겨도, 요단강이 앞에 있고, 백성의 수는 많고, 전쟁 경험이 없고, 전략 무기는 없다할 지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지만, 미래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요단강을 어떻게 건너갔습니까? 여리고성을 어떻게 무너뜨렸습니까? 아이성을 어떻게 점령하였습니까?”를 모르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어느 곳에든 어느 때든 함께 하십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우리 하나님은 어떤 경우든 떠나지 않고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눈빛 하나에도 삐지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원하는대로 대해주지 않는다고 서운해하며 변덕을 부리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알아주지 않는다고 섭섭해하며 떠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실수하고 넘어져도 하나님은 떠나지 않습니다. 죄를 지어도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상 장사의 아들 아브라함, 부인을 누이라고 속인 실패의 사람 아브라함, 살인자하고 도망간 모세, 간음하고 살인한 다윗, 여러번 실패하고 예수님을 부인 한 베드로, 기생의 아들 입다, 기생 라합, 바람둥이 삼손, 겁쟁이 기드온 등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집 나간 탕자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떠나고 남편이 떠나고 자식이 떠나고 동업자가 떠나고 믿었던 사람들, 친구들이 떠난다 해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은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주님 말씀합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20)" 이 사실을 안 바울은 노년에 사랑했던 데마도 세상을 사랑하여 자신을 버렸고 그레스게도 디도도 떠나 버렸지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떠났을 때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후 4:17-18)"
요셉이 노예로 팔렸을 때도,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받을 때도,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도 함께 하셨습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라는 책을 쓴 존 파피가 있습니다. 양팔이 없는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매일 수많은 절망에 부딪쳤습니다. 옷입고 용변을 보는 사소한 일도 그에게는 절망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상실의 아픔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라는 말씀을 붙들고 우등생으로 공부하였고 박사학위를 받아 회사를 경영하는 전문 강사가 되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할 뿐 아니라 함께 가십니다. 시험장에도 함께 하시고 입원실에도 함께 가시고, 군대에도 함께 가시고, 결혼식장에도 함께 가시고, 분만실에도 함께 가시고, 죽음의 현장에도 함께 가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떠나지도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십니다.
믿습니까?
우리 앞서 행하시며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우리 하나님이 이 땅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들에게 그 땅을 차지하게 하라”
너가 바로 우리 성도님과 저입니다. 이 백성이 바로 우리 자녀들과 우리 직원들과 우리 교회, 우리 민족,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나만 차지할 땅이 아니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드로가 함께 그 땅을 차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까?
8절을 큰 소리로 같이 읽겠습니다.
“그리하면 여호와 그가 네 앞에서 가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세상이 어떻게 변한다고 해도 신앙 생활하면서 가나안 땅을 앞에 놓고 두려워하며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앞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앞서가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십니다(3,8)
앞서가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승리하게 해 주십니다(3).
앞서가시는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6, 8)
그 땅에 들어갈 때까지 / 신명기 31:1-8, 마가복음 11:7-10
신명기 31:1-8, “1 또 모세가 가서 온 이스라엘에게 이 말씀을 전하여 2 그들에게 이르되 ‘이제 내 나이 백이십 세라. 내가 더 이상 출입하지 못하겠고 여호와께서도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3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과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보다 먼저 건너가사 이 민족들을 네 앞에서 멸하시고 네가 그 땅을 차지하게 할 것이며 여호수아는 네 앞에서 건너갈지라. 4 또한 여호와께서 이미 멸하신 아모리 왕 시혼과 옥과 및 그 땅에 행하신 것과 같이 그들에게도 행하실 것이라. 5 또한 여호와께서 그들을 너희 앞에 넘기시리니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명령대로 그들에게 행할 것이라. 6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하고 7 모세가 여호수아를 불러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에게 이르되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들에게 그 땅을 차지하게 하라. 8 그리하면 여호와 그가 네 앞서 가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마가복음 11:7-10, “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8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 들어가는 말
오늘은 부활주일을 한 주간 앞 둔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 목적을 수행하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던 그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바로 그 날,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고,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를 외치며 환영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한 것은 예수님이 로마를 물리치고 나라를 세우는 구원자, 즉 독립국의 왕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 반대로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의 죄의 값을 대신 치르시기 위한 죽음을 위한 입성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는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따르던 제자들마저 실망과 좌절로 뿔뿔이 흩어지고 물러갔습니다. 갈릴리 호수로 물고기 잡으러 가버린 일곱 제자들, 엠마오 고향으로 낙향하는 두 제자, 두려움으로 숨어버린 제자들 등. 그들은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한 선지자이거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며 절망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예수님이 여러분의 참된 소망이십니까? 이 시간에는 구약과 신약 두 본문을 중심으로 하여 우리가 소망하는 바로 ‘그 땅’ 즉 약속의 땅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려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신명기 본문말씀은 모세가 약속의 땅인 가나안이 멀리 보이는 모압 평지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을 받아, 애굽에서 종노릇하는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끌어 내어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인도한 영도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시내 산에 유다백성들과 율법으로 언약을 세우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삼아 ‘이스라엘’나라를 일으키셨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여 38년의 세월을 광야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훈련을 해야 했습니다. 이제 애굽을 나온 지 40년이 지나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땅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가나안은 유목민인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는 가슴 두근거리는 전혀 새로운 세계였습니다. 이 새로운 세계를 앞두고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영도자 모세는 백성들과의 결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시대의 지도자로서 불순종했던 백성들과 함께 광야에서 그 생애를 마감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새로운 지도자인 ‘여호수아’에게 영적인 담대함을 갖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새로운 세계는 가만히 앉아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예비하셨고 허락하신 땅이지만 싸워서 쟁취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재무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지금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신앙의 원리입니다.
마가복음 본문말씀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예언된 말씀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행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새끼 나귀를 타신 것도 그러합니다. 이 사실은 이미 스가랴 선지자에 의하여 예고되었습니다. 9:9절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하며 “호산나”를 높이 외쳤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왕을 맞이하는 듯 한 환영이었습니다. ㅁㅁ이 두 본문은 전혀 다른 내용이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라는 면에서는 의미가 잘 통하고 있습니다. 즉 광야의 삶을 지나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는 이스라엘 자손들과 유월절의 어린양으로써 대속의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는 영적인 이스라엘 자손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땅에 들어갈 때까지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이 말씀을 통하여 지금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찾는 지혜를 얻으시기를 축복합니다.
※ 지금 자신의 자리를 깨닫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왜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메마른 광야를 이리저리 떠돌아야 했습니까? 직접적인 원인은 ‘불순종’이었지만, 실질적인 원인은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 어리석음’입니다. 신명기 8:2-3절을 봅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훈련을 사십년이나 해야만 했던 원인은 그들의 완악한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이들 이스라엘 자손들은 조금만 힘들면 원망하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습니다. 자신들을 그토록 아끼시며 돌보신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방금 읽은 다음 구절인 4절을 봅시다.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매일 하늘에서 음식이 내렸으며, 옷이 낡아지지도 않았고, 발이 부르트지도 않는 희한한 기적을 매일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지극한 배려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시공을 뛰어넘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그 날로 가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스라엘 자손들이 익히 알고 있는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대로 ‘메시아의 행적’을 충실하게 따르고 계십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슥 9:9)한 대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과 그 지도자들은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을 메시아가 아닌, 시대를 혼란스럽게 하며 민심을 미혹하는 악한 존재로 매도했습니다. 성경에는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도 선지자들의 글을 익히 알고 있었던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앞세워 예수님을 배척했고,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그 숭고하신 사랑의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마가복음 15:10-11절입니다. “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유대인들의 요구를 따라 예수님을 심문하던 총독 빌라도도 유대인들과 그 지도자들의 음흉한 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하지만 선민이라고 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죽을 짓을 하면서도 무슨 짓을 하는지 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도 가나안을 앞에 둔 이스라엘 자손들이나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앞에 둔 이스라엘 자손들처럼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그 사랑의 뜻을 깨닫지 못하여 오히려 자신의 이익에 혈안이 되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 그 땅을 차지하도록 믿음의 재정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겠다고 약속하신 그 땅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이겠습니까? 민수기 14:22-24절을 봅시다.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여 온전히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에 20세 이상으로 계수된 사람이 60만 명 정도였는데 이들 중에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따랐던 오직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 뿐이었습니다. 나머지 모두는 원망하거나 불평하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에 온전하게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영적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약속하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이겠습니까? 마가복음 10:14-15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신약시대인 지금 우리들의 시대의 영적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땅인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아이처럼 순전하게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토록 길었던 40년을 지나서 이제 다시 가나안 땅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또 다시 불순종하여 지난 40년간의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신신당부합니다. 본문 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과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보다 먼저 건너가사 이 민족들을 네 앞에서 멸하시고 네가 그 땅을 차지하게 할 것이며 여호수아는 네 앞에서 건너갈지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그 땅을 차지하게 할 것이니 순종하고 따르라고 합니다. 4절이하 8절까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라.’고 강조합니다. 본문 5-6절을 봅시다. “또한 여호와께서 그들을 너희 앞에 넘기시리니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명령대로 그들에게 행할 것이라. 6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하고”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을 인도할 여호수아에게도 당부합니다. 본문 7-8절입니다. “모세가 여호수아를 불러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에게 이르되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들에게 그 땅을 차지하게 하라. 8 그리하면 여호와 그가 네 앞서 가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이렇게 모세가 거듭 강조하는 이유는 이제는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도록 확실하게 믿음을 재정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약속의 땅인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의 땅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2-3절에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는 거처입니다. 이 곳에 들어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신약본문 9-10절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이 찬송을 부르던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한다고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노래를 부르던 사람들은 불과 며칠 후에 이렇게 기뻐하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라고 소리쳤습니다. 지금 우리들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며 찬송하고 기뻐할지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전한 믿음으로 준비되지 못하거나 순종하는 삶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그 땅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땅에 들어갈 때까지 믿음을 지키며 순종하는 삶을 계속해야 합니다.
깨어 있으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깨에 있어야 합니다. 기도의 줄이 끊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사탄과 그의 세력들은 할 수만 있다면 우리를 택하심에서 끊어지게 하려고 안일한 마음으로 잠들게 하려 합니다. 약속하신 그 땅에 들어갈 때까지 마음을 놓지 말고 깨어 있어 주님과 동행합시다. 그리하여 부활하신 주님과 진정한 부활의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주님을 따르시기를 축복합니다.
새 시대의 새 지도자
신 31:1-8 / 피영민 목사
우리 교회에서는 안수집사님들을 장로로 호칭하여 부르는데 오늘 저녁에 지도자인 호칭 장로를 선출하는 투표를 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정치지도자, 경제 지도자, 혹은 교육 지도자가 아닙니다. 교회 지도자는 영적인 일의 지도자입니다. 기도생활과 예배생활, 전도생활을 지도하고, 성도들을 돌보며 위로하는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자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지도자를 뽑는 것과는 목표와 질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이제 모세가 120살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지팡이 하나들고 애굽 왕 바로 앞에 가서 ‘내 백성을 가게 하라’고 큰소리를 쳤던 사람입니다. 모세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 애굽에 재앙이 내렸고, 홍해가 갈라졌으며, 반석에서 물이 나왔습니다. 또한 시내산에서 사십 주야로 음식과 물을 먹지 않고 금식하며 인류 최고의 법인 율법인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40년 동안 200만이나 되는 대군을 먹이고 입히면서 광야생활을 인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모세는 하나님과 친구처럼 지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탁월한 모세도 인간이기에 그의 지도력은 영원할 수가 없었습니다. 본문에서 모세는 “곧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오늘날 일백 이십세라 내가 더는 출입하기 능치 못하고 여호와께서도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2절)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더 이상의 지도력을 행사할 수 없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출입하기에 능치 못하다’는 말처럼 체력적인 이유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 모세에게 지도력을 행사하지 말라고 지시하셨기 때문입니다. 모세 같이 위대한 사람도 하나님께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가데스의 므리바라는 곳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지팡이를 가지고 반석을 가리켜 물을 내어야 했는데, 모세는 백성들 앞에서 화를 내며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이나 쳤습니다. 모세가 여호와의 회중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는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이유로 모세는 더 이상 지도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모세는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습니다. “여호와,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원컨대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워서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으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민 27:16-17).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신(神)에 감동된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라”(민 27:18)고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어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지도자는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에 국가가 되었든, 학교가 되었든 어떤 조직이든 간에 지도자 한 사람을 잘못 뽑으면 어려운 일이 많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조직이든 조직의 흥망성쇠는 지도력에 달려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도력이 변한다는 것은 한 조직의 흥망성쇠를 결정하는 대단히 중대한 사건입니다. 오늘 저녁에 혹시라도 투표를 하지 않겠다고 생각하신 분들이 계시다면 지금 결심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지도자를 뽑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1. 영적인 지도자의 자격
하나님께서 모세의 후계자로 여호수아를 결정하신 사건을 보면서 영적인 지도자의 바람직한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영적인 지도자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격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지도자는 첫째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자원하여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뽑는 것입니다. 군대로 말하자면 자원병이 아니라 차출병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교수로 근무할 때, 학생들이 입학상담을 하면 저는 가급적 학생들을 돌려보냈습니다. 아무리 돌아가라고 해도 끝까지 하겠다는 학생들을 뽑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들이기 때문에 쉽게 돌아가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과 같이 여호수아가 너를 거느리고 건널 것이요”(3절a)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모세에게 말씀하신 바처럼 여호수아가 모세를 이은 지도자가 된다고 택하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저녁에 시행할 투표도 사람이 뽑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통해서 성령님의 인도를 받고 ‘하나님, 우리 가운데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보이시옵소서’ 하는 마음으로 투표에 임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신다면 그냥 딱 찍어서 쓰시면 되지 왜 번거롭게 투표하는 방법을 쓰십니까?”고 질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해서 자살하자 이에 사도들이 죽은 유다의 뒤를 이어서 누구를 후계자로 뽑을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 제비뽑기라는 원시적인 방법을 채택하여 사용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행 1:26). 그러므로 제비를 뽑든, 아니면 투표가 되었던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라는 생각으로 투표에 임해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믿음이 검증된 사람이어야 합니다. 영적인 지도자는 신앙의 연조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은 지 1-2년밖에 안된 사람은 교회의 안수집사나 목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연조를 통해 그 사람의 믿음이 검증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13-14장에 모세가 가데스바네아에서 열두 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으로 보낸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40일의 정탐 후에 열두 명이 가데스바네아로 돌아왔는데, 그 중 열 명은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고 그들은 대장부 같다”(민 13:33)고 보고하며 가나안 7족과 자신들을 비교합니다. 이들은 가나안 7족과 하나님을 비교하지 않고 자신들과 비교해서 자신들을 메뚜기 같다고 비하하는 메뚜기파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민 14:9)고 선포합니다. 밥파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열 명의 메뚜기파를 좇아갔습니다. 그래서 돌을 주워 여호수아와 갈렙을 쳐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40년 동안 방황하는 고난을 겪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잘못된 지도자를 뽑은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을 인정받았습니다. 하나님과 모세의 인정을 받아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지도자는 믿음이 검증된 사람이어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께서 지도자를 선출할 때에도 믿음이 검증된 사람을 선출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영적인 지도자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자기 몸을 드려서 백성들과 함께 하는 사람이 지도자입니다. 영적인 지도자는 뒤에서 리모컨을 가지고 지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천국에 가만히 앉으셔서 누구는 구원 받고, 누구는 구원 받지 못하게 리모컨으로 조정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성육신(Incarnation)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셔서 배고픔과 피곤, 목마름, 고통과 같은 모든 고난을 함께 겪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능히 우리를 불쌍히 여기실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더 이상 자신이 출입하기에 능한 사람이 아니라고 고백했습니다(He was not going to be with them). 이처럼 백성들과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에 지도력을 행사할수 없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예배에도 함께 해야 하고, 기도에도 함께 해야 하고, 성경공부에도 함께 해야 합니다. 또한 기쁜 일에도, 슬픈 일에도 함께 해야 합니다. 기도회에는 얼굴도 비추지 않고, 성도들의 슬픈 일, 기쁜 일에도 함께 하지 못하며, 예배도 한 주는 드리고 한 주는 빠지는 사람이 어떻게 지도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지도자는 백성과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과 함께 삶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넷째로 지도자는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신앙연조가 오래 되어서 영적인 일에 기쁨도 느껴보고, 위험도 겪어보면서 쌓인 경험으로 어떤 사안이든지 균형 있게 파악할 수 있는 성숙도를 가져야 합니다. 한 가지만 보고 한 가지만 이야기하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이 아닙니다. 두루 돌아보고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영적인 성숙도가 반드시 나이와 비례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이가 많아도 영적으로는 어린 아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이는 비록 어릴지라도 영적 성숙도가 높아 영적인 지도자가 되는 경우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딤전 4:12)고 말하였습니다. 디모데는 어렸지만 영적으로 성숙했기 때문에 교회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스펄젼 목사님이 16살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때부터 벌써 설교를 시작한 것으로 유명한 분입니다. 어느 날 설교를 하기로 예정되어있던 집사님이 미처 설교 준비를 하지 못하여 16살이었던 스펄젼에게 설교를 부탁했습니다. 어린 스펄젼은 갑작스러운 부탁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보배로우심을 생각하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한 할머니가 “젊은이, 자네는 몇 살인가?(Young man, how old are you?)”라고 질문하였습니다. 그러자 스펄젼은 설교와 상관없는 질문을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보배로우심만 생각하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래도 이 할머니는 끈질기게 스펄젼에게 나이를 물어보았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다시 이 할머니가 스펄젼의 나이를 물어보자 스펄젼은 “저는 60살 미만입니다(I’m under sixty)”라고 대답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나이의 많고 적음보다, 영적으로 성숙했는지 그렇지 못한지가 더욱 중요합니다.
여호수아도 어린 나이가 아니었습니다.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지만 가데스바네아에서 20살 이상이었던 여호수아가 40년 동안 광야를 방황했으므로 최소한 60살 이상은 되었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여호수아도 120살인 모세 앞에 서면 어린아이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영적으로 성숙했던 사람입니다. 온갖 영적인 훈련을 다 받았습니다. 출애굽기 17장을 보면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르비딤에서 전쟁을 할 때, 모세는 산에 올라가서 기도하였고 여호수아는 장군으로서 칼을 가지고 아말렉과 싸웠습니다. 여호수아는 이 르비딤 신학교에서 모세가 기도하면 전쟁에서 이기고 기도하지 않으면 진다는 사실을 배웠을 것입니다. 또한 출애굽기 24장에서는 시내산에서 40주야를 금식하며 율법을 받는 모세와 함께 했습니다. 이곳에서 여호수아는 하나님앞에서 금식하며 몸부림칠 때, 하나님께서 큰 계시를 주시므로 영적인 지도자는 하나님과 일대일로 씨름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배웠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수아는 40년의 광야 방황기간 동안 모세를 따라다니면서 큰일이건, 작은일일이건 가리지 않고 훈련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수아는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된것입니다. 미성숙한 사람은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영적인 지도자는 자기가 최상의 지도자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지도자 위에는 또 다른 지도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만약 또 다른 지도자가 없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최상의 지도자로 계십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지도자는 자신의 판단과 권위가 최종적인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자기 위의 합법적인 지도자가 누구인지를 분별해서 충성해야 합니다. 자기 위의 지도자에게 충성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의 영적인 지도자는 궁극적인 지도자이신 하나님께 충성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최종 지도자인 담임목사와 뜻을 맞추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담임목사에게 반대하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면 그 교회에는 문제가 일어날 것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영적인 지도자는 내 위의 지도자가 누구인지를 잘 생각하고, 자기 위의 지도자가 나이가 어리거나 조금 부족한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순종하고 충성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영적인 지도자의 권위
지도자는 권위를 가진 사람입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딤전 5:17). 여러분들도 장로님들을 배나 존경할 사람으로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지도자의 권위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첫째로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동행하시는 데에서 권위가 옵니다. 영적인 권위는 재물의 소유나 사회적 지위, 명예와 학식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사람인지 아닌지에 따라 권위의 여부가 달라집니다. 본문 6절과 8절을 보면 모세가 여호수아를 격려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행하실 것임이라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6절).
“여호와 그가 네 앞서 행하시며 너와 함께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8절). 여호수아의 영적 권위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신다는 약속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강남중앙침례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은 세상 것으로 권위를 세우지 말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증거로 영적인 권위를 세우는 지도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영적인 권위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권위가 따라올 수 없습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전에도 우리에게 복 주셨고, 앞으로도 우리에게 복주시는 변함없으신 분이라는 사실, 즉 하나님의 불변성을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시기에 큰 변화를 겪기 시작했습니다. 광야에서 유목민으로 살던 사람들이 땅을 얻어서 농사를 지으며 농경민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또 광야 방황 시기에는 모세를 따라다니기만 했지만, 가나안에서는 손에 칼을 들고 여호수아를 따라 가나안 7족과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삶의 터전과 방식이 모두 바뀌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따라야 될 지도력도 바뀌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아서 모세 오경을 기록하고 백성들을 가르친 ‘책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칼의 사람’입니다. 칼을 들고 전쟁에 나가서 지도력을 발휘하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지도력의 목표와 역량과 방향도 달랐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삶의 방식과 지도력이 변화되는 과도기를 겪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변해도 한 가지만큼은 결코 변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멸하신 아모리왕 시혼과 옥과 및 그 땅에 행하신 것과 같이 그들에게도 행하실 것이라”(4절)고 기록되었습니다.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변함없이 동일한 하나님께서 아모리왕 시혼, 바산왕 옥을 멸하신 것처럼 가나안 7족들도 동일하게 멸하실 것이므로, 하나님의 불변성을 믿고 믿음으로 전진하라고 권면합니다. 영적인 지도자가 되려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침례교회는 모태신앙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믿는 성도들에게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스스로 복음을 듣고 깨달아 예수님을 믿어야 침례를 줄 수 있습니다. 우스개소리로 모태신앙을 ‘못해신앙’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마지못해 예배는 참석하지만 믿음이 없기 때문에 목사님이 봉사를 요청하면 ‘못해요’라고 대답하기 일쑤입니다. 이처럼 모태신앙이 ‘못해신앙’이 되는 경우를 우리는 주변에서 많이 봅니다. 따라서 모태신앙만으로는 영적인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제가 28세에 대흥침례교회에서 예수님을 믿고 총각 집사가 되었습니다. 그 때 담임목사님께서 저에게 예산위원회 서기를 하라고 임명하셔서 5년 동안 예산위원회에서 봉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함께 봉사하던 어떤 안수집사님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예산위원들이 어떤 사안을 가지고 열심히 의논을 하다가 나중에 그 집사님께 물어보면 그 집사님은 언제나 “해 봅시다”라는 대답을 하셨습니다. “안 됩니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 분은 오랜 신앙의 연조를 통해 신앙의 무게중심이 든든하게 서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렇게 늘 긍정적으로,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하시더니 자녀들이 모두 목회자가 되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하나님께서 전에도 강남중앙침례교회를 축복해 주셨으니 앞으로도 축복해 주실 줄을 믿습니다”라는 자세를 가진 사람들을 선출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영적인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데서 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너희 앞에 붙이시리니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명령대로 그들에게 행할 것이라”(5절). 명령대로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시고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사람에게 무슨 권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무슨 일을 하든지 순종하는 일에는 책임을 져 주십니다. “내가 올해 주식에 투자를 했는데 대박이 터질까요?” 하나님께서는 주식투자의 성공을 보장해주시지 않습니다. 성공할 수도 있지만 망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는데 하나님께서 성공시켜주실까요?” 하나님께서 사업의 성공은 보장해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시겠습니까?”라고 묻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당연하지. 승리를 줄 것이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먼저 가나안 땅에 건너가서 그 백성을 치고 그 땅을 점령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 축복을 누리기 원하십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십시오. 순종은 승리와 축복을 보장합니다.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학생들의 시험지를 채점하면서 겪었던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몇 가지 있습니다. ‘만유인력을 발견한 사람은? 답) 죽었음’. ‘불행한 일이 겹쳐서 일어나는 것을 네 글자로 설( )가( )이라고 한다. 정답은? 답) 설사가또’. ‘부모님은 왜 우리를 사랑하실까요? 답) 그러게 말입니다’. 아직 어린 학생들의 엉뚱하지만 귀여운 대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실까요?’라는 질문에 ‘그러게 말입니다’라고 대답해서는 안 됩니다. 정답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승리를 얻게 되고, 순종한 사람에게 영적인 권위가 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영적인 지도자의 어려움
영적인 지도자에게는 어려움이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조금 어렵다고 포기하고 욕먹었다고 사표를 내는 사람은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여호수아에게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지도자에게는 어떤 어려움들이 있을까요?
첫째로 영적인 지도자에게는 고독함이라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지도자는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고독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과 같이 여호수아가 너를 거느리고 건널 것이요”(3절a). 거느리고 건넌다는 것은 여호수아가 앞장을 서서 백성들을 이끌고 건너간다는 말입니다. 세상 군대의 전쟁에서는 지도자가 뒤에 서 있지만 하나님의 전쟁에서는 지도자가 앞서서 갑니다. 앞에 가는 사람이 얼마나 고독합니까? 의논할 사람도 없고, 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그 고독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비록 고독했지만 하나님께서 앞서 행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을 때에 고독감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영적인 지도자는 고독해도 이겨내야 합니다. 고독을 이기기 위해서 영적이지 못한 사람들과 어울려서는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을 믿고 고독감을 이겨내야 합니다.
둘째로 영적인 지도자의 맡은 사명이 크다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맡은 사명은 본문 7절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여호수아를 불러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그에게 이르되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들로 그 땅을 얻게하라” 거대한 땅에 들어가서 지금 살고 있는 강한 민족인 가나안 7족을 몰아내고 거기에 국가를 건설하라는 명령이 얼마나 어려운 사명입니까?
저는 지금까지 하고 싶은데 못해본 일이 하나 있습니다. 조그만 땅을 사서 거기에 제가 살 집을 직접 지어보고 싶은 일입니다. 거기에 남성용 화장실도 만들고, 멋진 서재도 만들어서 꾸며보고 싶은데 집을 짓는 일이 대공사이기 때문에 아직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집 한 채 짓는 일도 엄청나게 고민하고 결정해야 하는 일인데 가나안 땅을 차지해서 국가를 건설해야하는 여호수아의 사명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아마 마음 한 구석에는 사표를 내고 싶은 충동이 일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워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나간 여호수아는 결국 큰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영적인 지도자는 사람으로부터 오는 어려움을 겪습니다. 가장 큰 어려움은 사람으로부터 옵니다. 사람이 밤에 혼자 산길을 갈 때, 가장 무서운 것이 무엇일것 같습니까? 뱀일까요? 귀신일까요? 호랑이일까요? 아닙니다. 바로 사람입니다. 뱀을 만나도 무섭지 않습니다. 피하거나 아니면 잡으면 그만입니다. 월남에 파견된 한국 군인들이 뱀이 득실득실한 소굴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월남 사람들은 조금 있으면 모두 시체가 되어서 끌어내야 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고 있었는데 조금 있다가 한국 군인들이 이를 쑤시며 모두 굴에서 나왔다는 우스개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어두운 산길에서 사람을 만나면 무섭습니다. 모세도 사람이 무섭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면서 인간에 대해 내린 결론이 27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의 패역함과 목이 곧은 것을 아나니 오늘날 내가 생존하여 너희와 함께 하여도 너희가 여호와를 거역하였거든 하물며 내가 죽은 후의 일이랴.” 하나님을 직접 대면해서 계시를 받은 모세에게도 거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에게는 얼마나 거역할지를 걱정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사람으로 인해 겪는 어려움을 잘 이겨내야 합니다.
결 론
지도자를 뽑는 것은 참 즐거운 일입니다. 어떤 분들은 패가 갈라지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투표를 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논리는 국민과 나라가 갈라지기 때문에 대통령 선거도 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와 같습니다. 교회가 민주주의를 하지 않으면 어떻게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투표를 통해 패가 갈려서는 안 됩니다. 원하는 사람들에게 투표를 하되, 패는 가르지 않는 성숙한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지도자가 되는 일도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대통령, 국회의원, 하다못해 시의회 의원만 되도 집안의 경사라고 좋아합니다. 하물며 하나님 나라의 지도자가 되는 일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제가 가끔 목사님들의 모임에 가면 신앙의 계보를 자랑하시는 목사님들을 종종 봅니다. 3대째 기독교 신앙이라, 4대째 기독교 신앙이라, 혹은 목사님, 장로님, 순교자들을 배출한 집안이라는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영적인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자손 대대로 가문의 영광이 된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곤 합니다.
여러분도 모두 영적인 지도자가 되기를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소망은 나쁜 소망이 아닙니다. 세상의 지도자와는 다르게 섬기는 지도자, 낮은 위치에 서는 지도자, 희생할 줄 하는 지도자, 성도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는 지도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지도자는 남을 누르고 꺾으면서 지도자의 위치에 올라가지만 영적인 지도자는 섬기고 순종하면서 지도자의 위치에 오릅니다. 그러므로 오늘 좋은 지도자를 선출할 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도 영적인 일에 좋은 지도자가 되도록 성장해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