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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실 우리말 스크랩 미당 서정주 탄생 100주년 특별기고 / 이경철
흐르는 물 추천 1 조회 77 15.01.22 09:32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미당 서정주 탄생 100주년 특별기고 / 이경철
‘천재시인’의 비결은 끝없는 퇴고 ―서정주 시작노트 개관
[81호] 2015년 01월 01일 (목) 이경철 abkcl@hanmail.net

 

 

‘만들면’을 ‘되면’으로 고쳐 이른 천의무봉

내가
돌이 되면
 
돌은
연꽃이 되고

 

연꽃은
호수가 되고

 

내가
호수가 되면

 

호수는
연꽃이 되고

 

연꽃은
돌이 되고

 

? 〈내가 돌이 되면〉

 

서정주(徐廷柱, 1915~2000)의 대표시 중 한 편인 〈내가 돌이 되면〉이다. 1978년 캐나다 낭송회에 초청돼 가서 다른 몇 편을 낭송할 땐 덤덤하던 청중들이 이 시를 듣고는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와 함께 “원더풀, 원더풀!” 외쳐댔다고 한다. 한 털보 시인은 단상으로 뛰어 올라와 덥석 끌어안고 뺨에 뽀뽀까지 해줬다고 생전에 서정주는 자랑하곤 했다. 그저 자명(自明)해 귀신도 울릴 이런 시에 무슨 번역의 어려움이 따르겠는가.

 

“특히 불교에서 배운 특수한 은유법의 매력에 크게 힘입었음을 여기 고백하여 대성(大聖) 석가모니께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한다.” 이 시가 실린 다섯 번째 시집 《동천》을 1968년 민중서관에서 펴내며 ‘후기’에서 밝힌 말이다. 《동천》은 신라정신과 불교, 즉 영통(靈通)과 윤회전생(輪廻轉生)의 진경(珍景)을 보여주는 시집으로 평가받고 있다.

 

서정주는 〈내가 돌이 되면〉 같은 시를 두고 ‘불교에서 배운 특수한 은유법’이라 했는지 모르겠지만, 이 시에는 원관념을 감춘,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나눈 이분법적인 상징이나 은유 하나 없이 그저 훤하다.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다’라는 고승(高僧)의 어법처럼 자명하고 자연스럽다.

 

서정주는 천의무봉의 이런 경지에 천부적인 시인 자질로 그저 이른 것이 아니다. “아무리 쓰고 고치고 저미고 붙여 봐도, 한동안 지나서 다시 읽어 보면 어느 때나 미비(未備)한 것만 같은 것이 시 아니던가.” 되물으며 고치고 또 고쳐가며 어렵게 이른 지경이다.

 

내가/ 돌을/ 만들면// 돌은/ 연꽃을/ 만들고// 연꽃은/ 호수를 만들고// 하눌 밑에 있는 것은/ 이 호수뿐이니// 여기에서/ 알라스카까지// 애인아 너는 혼자/ 왼켠으로 돌아가고/ 알라스카에서/ 여기까지// 나는 혼자/ 바른켠으로 돌아오고

 

1966년 6월 21일 밤에 시작노트에 제목도 없이 쓴 것이다. 이것을 《현대문학》 1966년 8월호에 〈여행가·3〉이란 제목을 달아 ‘하눌 밑’은 ‘하늘 밑’으로 교정을 보고 ‘너는 혼자’ ‘나는 혼자’는 서로 위치를 바꿔 발표했다. 다시 이것을 《동천》을 펴내기 직전, 노트에 ‘내가 돌이 되면’이란 제목을 달고 고쳐서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것처럼 그대로 실었다.

 

이것을 1972년 일지사에서 펴낸 《서정주문학전집》에서는 시 중간 ‘호수가 되고’ 다음에는 쉼표를 찍고 끝에는 마침표를 찍어놓았다가 1983년 민음사에서 펴낸 《미당 서정주 시전집》에선 빼고 처음처럼 돌려놓은 것이다.

 

정지용 시인은 호숫가에 앉아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픈 마음/ 호수만 하니/ 눈감을밖에.”(〈호수 1〉 전문)라고 보고픈 마음을 읊었을 것이다. 서정주도 처음에는 그런 연꽃이 피어 있는 호수를 연상하고 보고파도 만날 수 없는 애타는 그리움을 ‘애인아’라고 부르는 연시(戀詩)를 착상해 처음엔 그렇게 읊었을 것이다.

 

그러다 못내 찜찜했는지, 아니면 시의 귀신이 일러주었는지 2년 후 시집에 실을 때는 ‘만들면’을 ‘되고’로 고치고, ‘애인아’ 하고 부르는 뒷부분을 날려버려 시를 180도 확 바꿔버린 것이다. 부러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절로 ‘되가는’ 것이 도가(道家)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이요 불가(佛家)의 윤회전생이며 서정주가 단군 이래 우리 민족은 원래 그렇게 살아왔다는 풍류(風流) 아니겠는가.

 

그리움으로 출발한 연시풍의 시가 ‘만들면’을 ‘되고’로 고치면서 이리 군더더기 하나 없이 그리움을 우주의 이치로 순하게 끌어올린 절창이 된 것이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시작도 끝도 없이 돌고 도는 전생(轉生)을 위해 쉼표나 마침표는 물론 없어야 마땅하다. 그걸 문맥에 맞춘답시고 집어넣은 것은 혹여 일지사판 전집의 실수 아닐는지.

 

전심전력 다해 쟁기질한 생흙 파헤쳐진 시의 밭고랑

 

서정주가 2000년 12월 24일 85세를 일기로 타계하자, 그가 입학해 공부했고 또 교수로 정년퇴임했던 동국대에서는 2003년 2월 20일 유품 3백여 점을 전시한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전(展)을 열었다. 그때 서정주가 1950년 봄부터 1999년 2월까지 반백 년 간 써온 1천5백 쪽 분량의 시작노트 10권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첫 권에서부터 〈내리는 눈발 속에서〉 〈무등을 보며〉 등 아직 널리 읽히며 인용되는 시들이 반듯한 육필, 혹은 북북 지우고 첨가한 부분들이 그대로 드러나게 실려 있었다. 또 쓰고 고치고 또 고치고 하다 영 마음에 안 들면 페이지 전체에 가위표를 그어버렸거나, 반듯하게 고쳤으면서도 영영 발표를 안 한 작품들도 수없이 들어 있었다.

 

한시(漢詩)는 물론 영시, 프랑스시 등도 번역해가며 어떻게 우리말로 맛깔스럽게 쓰고 있는지도 들여다볼 수 있게 했다. 페이지 여백 곳곳에는 단상을 기록해 놓아 그런 것들이 어떻게 시로 발전해 가는지를 추적할 수도 있었다. 발상에서부터 쓰기, 퇴고 등 서정주 시 창작 비결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이 이 시작노트였던 것이다.

 

서정주는 타계 이태 전인 1998년 필자와 나눈 대담에서 “혹자는 나를 천재라고도 추앙하는데 나 자신은 소같이 미련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소라는 놈은 원래 미련하지만 전심전력을 다해 사람들에게 인정받듯이 시를 써놓고 나서는 아직 덜 됐구나, 덜 됐구나 하며 고치고 또 고치고 하고 있다”(졸고 〈미당 서정주와의 대화〉 《문예중앙》 1998년 여름호, 2~13쪽 참조)며. 그런 소처럼 전심전력 다해 쟁기질한 서정주 시의 생흙 파헤쳐진 밭고랑이 이 시작노트이다.

 

서정주는 반만년 살아온 민족의 정한(情恨)을 모국어의 혼과 가락으로 가장 잘 풀어낸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해서 서정주 시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우리 민족혼과 모국어의 깊이와 넓이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체감하고 많은 시인과 시학도가 오늘도 그의 시를 읽고 배우며 그 비결을 캐고 있다.

 

천부적으로 보이는 서정주의 모국어에 대한 시적인 감수성은 시작노트에서 보인 그런 소 같은 쟁기질, 절차탁마(切磋琢磨)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시창작법》이나 《시창작교실》 등을 펴내며 생전에 서정주는 끊임없이 자신이 체득한 창작의 비밀을 전하려 했다.

 

그러나 어디 이미 이론화돼버린 그 ‘법’이나 ‘교실’로 시 창작 전수가 가당키나 할 것인가. 하여 육필로 쓰고 고치고 저미고 붙인 이 노트가 서정주 시 창작 비의(秘義)를 전수하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구체적 현장임을 절감하며 일단 노트 전반을 개관해 보기로 한다.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읍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읍디다.

 

서정주 고향인 전북 고창 선운사 입구에 시비(詩碑)로 서 있는 시 〈선운사(禪雲寺) 동구(洞口)〉이다. 고향 사람들이 향토가 낳은 시인을 두고두고 기리려 육필 원고를그대로 돌에 음각해 1974년 세워준 것이다. 이 시를 서정주는 1967년 3월 26일 시작노트에 처음으로 써서 고치고 또 고쳐 나갔다. 너무 여러 번 고쳐서 추적 과정도 헷갈릴 정도였고 읽는 독자분들 또한 그러하시겠지만 퇴고의 실상을 그대로 들여다보기로 한다.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백이 가락에/ 작년 것만 아직도 남었읍디다./ 그것도 목이 쉬여 남었읍디다.”고 노트에 정리했다. 처음에는 ‘洞口으로’로 썼다가 북 긋고 ‘고랑으로’ 고쳤고, ‘막걸릿집’은 ‘주막(酒幕)집’으로 고쳤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작년 것만’은 ‘작년 것이만’, ‘남었읍디다’는 ‘남었읍데다’를 고친 것이다.

 

《동천(冬天)》을 펴내면서 ‘아직도’를 ‘오히려’로 고치고, ‘남었읍데다’는 ‘남았읍데다’로 잡았다. 일지사에서 전집을 펴낼 때는 다시 ‘오히려’를 ‘시방도’로 고쳤고, ‘육자백이’는 ‘육자배기’로 잡았다. 그러다 민음사판에서는 ‘시방도’를 ‘오히려’로 또 고쳤다.

 

왜 그리 고쳤는지 내 나름으로 살펴본다. 먼저 노트에서 ‘洞口으로’를 ‘고랑으로’ 고친 것은 운율을 위해서이다. 6행의 이 시는 운율 운용상 전반 3행과 후반 3행, 절반씩 전후반부로 나뉠 수 있다. 전반은 3, 4, 5 자수율, 후반은 4, 3, 5 자수율이다. 첫 행은 두 음보로 시작하다 남은 행들은 세 음보로 나가고, 또 여기에 전반의 3, 4 자수율이 후반의 4, 3 자수율로 나가는 변주(變奏)가 이 시를 자연스레 노래처럼 들리게 한다.


이런 자연스러운 운율을 위해 처음에는 ‘동구로’ 하면 될 것을 ‘동구으로’라는 어색한 자수를 택했다가 자연스레 ‘고랑으로’로 바꿨을 것이다. 이것은 ‘작년 것이만’의 다섯 음절을 ‘작년 것만’ 네 음절로 고친 것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서정주는 “시의 운율에 주목하라”고 가르치며 “시조와 같은 정형의 운율, 율려(律呂)의 전통의 토대를 디디고 서되 현재의 나와 우리의 몸짓, 리듬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운율과 변주로 전반, 후반을 나눈 것은 단순히 운율이나 형식을 위한 것만 아니라 시의 내적인 욕구에 의해서이다. 전반은 동백꽃이 아직 일러 피지 않은 선운사 고랑의 현재이다. 지금 여기의 현실이다. 이에 비해 후반은 저기, 저어기의 과거이다. 일제 말 부친이 타계했을 때 그 유산으로 술 사 마시던 선운사 동구 주막이다. 그때 주모가 불러주던 한스러운 육자배기 가락 소리에 아득히 넘어가던 저 먼, 머언 시공(時空)이다.

 

그런 시의 내적 시공의 차원이 갈리니 운율의 형식도 전반 3, 4조를 후반 4, 3조로 변환시키기 위해 자수율에 맞는 시어로 고쳤을 것이다. ‘주막집’으로 고쳤다 다시 처음처럼 ‘막걸릿집’으로 되돌린 것 또한 운율 때문이다. 또 시의 구체적이고 총체적 이미지를 위해서이다. 그냥 관념적인 주막집보다는 막걸릿집이 훨씬 더 구체적이지 않은가. 목쉰 육자배기 가락의 청각적 이미지와 ‘막걸릿집’ 자체의 음상(音像) 이미지, 막걸리의 탁한 시각적 이미지가 그대로 맞아떨어지지 않는가.

 

‘남었읍데다’를 ‘남었읍디다’로 고친 것은 좀 더 토착어에 가깝게 들리게 하기 위해서이다. 시비에서 ‘고랑으로’란 좋은 음상을 ‘골째기로’ 고친 것 또한 시비가 서 있는 향토의 정서에 다가가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시집에 실릴 때 ‘육자백이’를 ‘육자배기’로 잡은 것은 교정 차원이다. 그러나 ‘남었읍디다’를 ‘남았읍디다’로 잡은 것은 꼼꼼한 교정이라기보다 서정주 시에 대한 실수이다. “뼈를 울리는 언어의 음색에 주목하라” “음성 이미지에 귀를 기울이라”며 서정주는 언어의 음상을 누누이 강조했는데, 그런 음상을 틀에 박힌 표준어로 날려버렸으니. 서정주 시는 그런 시니피에의 의미보다는 뼈를 울리는 시니피앙의 음상으로 가슴에 직격해 들어오는 시 아니던가.

 

모국어의 그런 시니피앙적 차원에서 부사 하나도 ‘아직도’ ‘오히려’ ‘상기도’로 고치고 또 고쳐 나간 것 같은데……, 글쎄? 나같이 덜떨어진 시인은 ‘오히려’나 ‘상기도’보다는 차라리 처음 것인 ‘아직도’가 더 나은 것 같은데, 아니면 서정주가 잘 쓰는 어법인 ‘여직도’가 더 자연스러울 것 같기도 하고.

 

양에 안 차면 가차 없이 내버린 줏대 높은 자기검열

 

초봄 어름짱이 풀리는 듯한 까닭모를 어지러움으로부터 나를 풀어주소서./ 쓰디쓴 쑥니풀이라도 한 포기 어서 나게 하소서./ 그 옆을 스쳐가는 강물과 같이 나를 있게 하소서./ 이 오얏꽃 피는 메마른 나라에, 주(主)여 되도록 나로 마지막 한숨을 삼으시옵소서.

 

앞에 ‘기도(祈禱)’라는 제목을 분명하게 달고 끝에는 ‘경인초동(庚寅初冬)’, 그러니까 6·25가 일어난 1950년 초겨울이라고 쓴 시기를 명기한 시이다. 이 시가 쓰인 같은 페이지 여백에는 ‘무제(無題)’라는 제목을 달고 “1950년의 여름부터 가을에 이르기까지/ 경기도에서, 충청도에서, 전라도에서, 경상도의 한쪽에 이르기까지/ 환장할 민족의 살육과 약탈이 계속되던 날들을”까지 쓰다가 이렇게 산문식으로 나가서는 시가 될 것 같지 않아서인지 그만 북북 그어버리고 이 시를 쓴 것이다.

 

1950년 6·25가 나자 서정주는 조지훈 시인 등과 함께 끊어진 한강대교를 다이빙해 나룻배를 잡아타고 한강을 건너 안양, 대전, 대구 등지를 거쳐 부산 영도까지 피난 갔다가 9·28 수복 때 서울로 돌아왔다. 전란의 포화 속에 폐허가 된 서울에서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며 기도를 올리는 심정으로 이 시를 썼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는 끝내 발표하지 않았다. 노트에 1951년 1월 4일이라 명시하고 쓴 ‘꿈’이라는 제하의 시는 〈기도 2〉, ‘기도 2’라는 제하의 시는 〈기도 1〉이라는 제목으로 1956년 펴낸 시집 《서정주시선》에 실렸는데 정작 제일 먼저 번듯하게 쓴 이 시는 빼버리고 이후 어떤 시집이나 전집에도 싣지 않았다.

 

‘주여, …… ~소서’라는 어투가 일상적 기도 그대로이고 또 다른 시인들도 ‘기도’라는 말이 들어가는 시들에서 너무 많이 써먹어서 빼버린 것이 아닐는지. 첫 시집 《화사집》부터 서정주는 시집을 낼 때마다 문예지 등에 발표했던 시 상당량을 빼버리곤 했다. 남들이 이미 발표한 시 냄새가 조금이라도 나거나 양에 안 차면 가차 없이 버려버린 것이다.

 

“시의 착상에서는 물론 그 표현에서도 남의 ‘에피고넨’이 된다는 것은 정말의 시인에게서는 있을 수 없는 일”(서정주 〈나의 문학인생 7장〉 《시와시학》 1996년 가을호, 51쪽)이라며 서정주는 문학인생 1장부터 에피고넨들을 철저히 혐오했다. 아류(亞流), 에피고넨이 아니라 누가 보더라도 서정주 시라는, 자신의 브랜드에 맞아떨어지는 시를 발표하려는 줏대 높은 자기검열이 위 시를 빛 못 보게 했을 것이다.

 

밤새여 긴 원고 쓰다 지친 아침은/ 찬 술로 겨우 기운 도리키노니,/ 회갑시(回甲詩) 써달라던 그 아주머니 그리워라./ 한 수에 2만 원짜리 회갑시 써달라던/ 그 아주머니 두서너 명 줄대왔으면 시퍼라.

 

1973년 1월 22일에 다 써놓고 나서 제목은 끝에 ‘아침 찬 술’이라 달은 시이다. 처음엔 ‘원고’로 써놓고 ‘글’로 고쳤다가 다시 ‘원고’로 잡았다. ‘아침은’은 ‘아침엔’이라 쓴 것을 고친 것이다. 시 값도 처음엔 만 원으로 했다 2만 원으로 잡은 것이다. ‘찬 술’도 처음엔 ‘맥(麥)주’로 써내려가려다 그리 잡은 것이다.

 

1976년 나온 일곱 번째 시집 《떠돌이의 시》에 실릴 때는 제목을 ‘찬 술’로 바꾸고 아래와 같이 또 많이 고쳐졌다. “밤새어 긴 글 쓰다 지친 아침은/ 찬 술로 목을 축여 겨우 이어 가나니/ 한 수에 오만 원짜리 회갑시 써 달라던/ 그 부자집 마누라 새삼스레 그리워라./ 그런 마누라 한 열대여섯 명 줄지어 왔으면 싶어라.”라고.

 

‘원고’를 ‘글’로 다시 바꾼 게 눈에 띈다. 딱 들어맞는 시어를 고르기 위해 이리저리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서정주도 “밥 먹을 때도, 뒷간에 가서도, 길 걸을 때도 그 많은 언어들을 골랐다간 버리고 골랐다간 버리고 하는 짓을 언제까지나 되풀이하고 사는 자”가 시인이라 하지 않았던가.

 

아무래도 전문적인 한자어 ‘원고’보단 ‘글’이 더 친숙했을 것이다. ‘맥주’보다는 ‘찬 술’이 더 시리고, 가난한 글쓰기를 솔직히 드러내고 있는 시 전체 맥락에 어울릴 것이니 그리 버리곤 또다시 골랐을 것이다.

 

‘찬 술로 겨우 기운 도리키노니’보다는 ‘찬 술로 목을 축여 겨우 이어가나니’가 더 순하고 의젓하다. 가난하고 기진맥진한 글쓰기를 그대로 전하면서도 자학적인 엄살은 피하고 있으니. 나머지 세 행도 순서를 바꿔 시가 자연스레 흐르게 하고 있다. 퇴고 과정에서 하나 더 눈에 띄는 것은 회갑시의 값. 만 원에서 2만 원, 5만 원으로 고쳐가며 현실감을 더하며 내심 자신의 시 값을 올리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서정주는 《떠돌이의 시》를 펴내면서 책머리에 실린 ‘자서(自書)’에서 일상의 삶에선 마지못해 악의 없는 거짓말도 더러 해 왔지만, 시에서만큼은 그럴 수가 없어서 제목을 ‘정말’로 붙이려 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렇지 않던가. 소설에서는 거짓말을 잘해야 큰 소설가가 될 수 있지만, 자신 심경의 표출이 시라는 장르의 본연일진대 어찌 자신마저 속일 수 있을 것인가.

 

이 〈찬 술〉이야말로 ‘정말’로, 리얼하게 쓰려고 당시 최고의 시인으로 대접받으면서도 그런 체면 다 내려놓고 가난하고 초라한 자신의 심경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시이다. 그러면서도 당시 세를 불려가던 리얼리즘 시가 아니라 빼어난 서정시로 읽힌다. 시는 표어가 아니고 예술이고 감동이니 자기가 먼저 감동하는 시를 쓰라고 가르쳐 온 서정주의 시관을 고치고 또 고치며 여실히 드러낸 시이다.

 

 외국시를 번역하며 절감한 모국어의 맛과 멋

 

이 하늘 밑 만나기도 쉽지 않은데/ 감옥 속에서 하는 이별 별나고말고./ 옛 맹세는 아직도 안 식었으니/ 국화 피건 또 한 번 찾아오게.
(天下逢未易 獄中別亦奇 舊盟猶未冷 莫負黃花期).

 

‘감옥 속에서 헤어지면서’라는 제목으로 번역한 한용운의 5언절구 〈증별(贈別)〉 전문이다.

 

서정주는 한용운의 한시 육필본 160여 편이 발굴되자 그걸 보는 즉시 “만해의 고통과 시인으로서의 당당한 격조를 한꺼번에 느낄 수 있었다”(《문학사상》 1973년 1월호, 34쪽)며 대뜸 번역해 잡지에 싣기 시작했다. 서정주 특유의 어법으로 읽을 맛깔을 한층 내며 67편의 시를 추려 노트에 번역해 나갔다.

 

먼저 직역하면 ‘이별하면서 주다’라는 제목을 ‘감옥 속에서 헤어지면서’라며 시의 전체 맥락을 쉽게 잡을 수 있도록 한 게 돋보인다. 적잖은 번역자들이 첫 구절부터 ‘천하에 만나기도 쉽지 않네만’ 등으로 그냥 직역해 나간 것을 ‘이 하늘 밑 만나기도 쉽지 않은데’로 완전 우리말로 친숙하게 의역해 나가고 있다.

 

특히 직역하면 ‘노란 꽃 기약을 저버리지 마라’는 마지막 행을 처음에는 ‘국화꽃 때 기약을 어기지 말게’라고 노트에 썼다 발표할 때는 ‘국화 피건 또 한 번 찾아오게’라 고친 대목에서는 지은이의 심중과 합치되어 얼마나 우리말로 맛깔스럽게 번역하려 애쓰고 있는지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서정주는 한용운의 한시뿐 아니라 당나라 시성(詩聖) 두보의 시를 비롯해 신라 때 최치원의 시 등 많은 한시를 노트에 번역하며 고치고 또 고쳐갔다. 한시 외에도 1950년대 후반부터 영시는 물론 프랑스 시들도 직접 번역해가며 신문에 연재하기도 했다. 이런 번역작업을 통해 모국어의 맛과 멋을 한층 더 절감하며 자신의 시를 “부족방언의 요술사이자 이 나라 시인 부족의 족장”이란 칭호에 걸맞게 끌어올렸을 것이다.

 

한국어는 그에게 와서 노고지리로 솟아올랐다, 아스랗다./ 한국어는 그에게 와서/ 전혀 다른 원시(原始)   로 스며 스며들었다./ (중략)/ 한국어는/ 그에게 와서 유구한 세월을 마쳤다.                                                                                 ? 고은 〈서정주〉 부분

 

등단 무렵부터 ‘시의 정부(政府)’로 칭송하며 따르다 서정주의 전두환 지지 발언으로 영 갈라서고만 고은 시인이, 1999년 《창작과비평》 가을호에 발표한 시 〈서정주〉 한 부분이다. 삶과 행적은 다 부정하더라도 “부디 그이 어깨춤 같은 어깨춤 같은 시만 남거라”라고 맺은 시에서 이렇게 한국어의 알파요 오메가로 서정주 시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도 다 이런 노력과 절차탁마로 모국어의 묘처(妙處)를 찾았기 때문이다.

 

서름이러냐./ 서름이러나,/ 알고보니까/ 그것은 다아/ 눈웃음져야 할/ 어쩔 수 없는/ 서름이러냐./ 마흔살 넘은/ 과부의 설음을/ 보라빛으로/ 웃고 서 있는/ 오동꽃나무.

 

1992년 5월 15일에 쓴 시 〈오동꽃나무〉이다.

 

“그것은 다아/ 눈웃음져야 할/ 어쩔 수 없는”과 “보라빛으로”는 처음엔 없던 것을 행 사이에 첨가한 것이다. 처음엔 눈웃음‘쳐’야 할이라고 했다 ‘져’야 할로 잡았다. ‘쳐야 할’의 능동을 ‘져야 할’의 수동으로 바꾸면서 어쩔 수 없는 설움의 체념, 혹은 현실은 어쩔 수 없어도 살아내야 한다는 서정주 특유의 현실 순응적 자세를 강화하고 있다. “보라빛으로”를 집어넣음으로 해서 오동나무꽃의 색채 및 서러운 웃음의 이미지를 구체화시키고 있다.

 

이 시가 1993년 민음사에서 나온 열네 번째 시집 《늙은 떠돌이의 시》에는 둘째 행이 ‘서름이러냐.’로, ‘과부의 설음’이 ‘과부의 서름’으로, ‘보라빛’이 ‘보랏빛’으로 실려 있다. 첫 행과 둘째 행이 똑같이 반복되게 바로 잡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육필 그대로 놔뒀음이 나았을 것이다.

 

반복으로 운율을 내면서도 똑같이가 아니라 약간의 변주효과를 주는 게 훨씬 더 낫다는 것을 서정주도 익히 알기 때문이다. 더구나 ‘서름이러냐./ 서름이러나,’로 서름을 타령조로 읊으면서도 ‘냐.’ ‘나,’로 변주를 주어 서럽더라도 아주 설움만은 아닐거라는 의문 효과를 ‘-나’라는 종결어미가 주고 있지 않은가.

 

‘보라빛’을 ‘보랏빛’이라 잡은 것은 당연하지만 왜 ‘과부의 서름’으로 바꿨는지는 모르겠다. 표준말로 바로잡은 것은 아니요, 앞에서 ‘서름’ ‘서름’ 했으니 서정주 시의 시니피앙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설음’을 ‘서름’으로 잡았다면 오산이다. 음상이 부드럽게 흐르고 또 운율을 위해서 앞 두 행에서 ‘서름’으로 쓴 것을 밑에서는 ‘과부의 설음’이라며 육필로 분명하게 ‘설음’으로 썼다. 왜? 서럽게 혼자 살아오다 나이마저 이제 마흔을 넘긴 과부의 곱게 맺힌 한을 구체화하기 위해 풀어지는 음상의 ‘서름’이 아니라 ‘설음’이라 단단히 맺었을 것이다.

 

이게 바로 서정주가 항상 주목하라고 말한 ‘뼈를 울리는 언어의 음색’, 서정주 시의 시니피앙 아니겠는가. 오동나무꽃 그 보랏빛을 마흔 살 넘은 과부의 곱게 서린 한과 설움으로 노래한 위 시에서는 전두환 신군부 독재정권을 찬양했다가 세상으로부터 따돌림당한 한스럽고 외로웠을 시인의 심사도 묻어난다. 특히 첨가한 “그것은 다아/ 눈웃음져야 할/ 어쩔 수 없는” 부분에서 어쩔 수 없이 그런 심사가 드러나고 있다.

 

충청도라 속리산 화양골의/ 아홉 구비 흐르는 맑은 냇물에, 예,/ 구부정정 굽은 가지 드리운/ 옛 소나무들 이것이 우리 마음이예유./ 이것이 이로운 건지 해로운 것인지/ 그것까지는 잘 모르지만서두, 예,/ 이것이 정말로 우리 본마음이예유.

 

1994년 1월 8일 ‘팔도 사투리 시 연작’ 세 번째로 쓴 〈충청도라 속리산 화양골의〉이다. 처음에는 ‘구부정정 가지’로 했다 ‘굽은’은 집어넣은 것이고 ‘이로운 것인지 해로운 것인지’로 썼다가 운율에 변형을 주기 위해 처음 ‘것인지’를 ‘건지’로 잡은 것이다.

 

이 시가 열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시집으로 1997년 시와시학사에서 나온 《80소년 떠돌이의 시》에는 ‘냇물에’는 ‘냇물가에’로, ‘이로운 건지 해로운 것인지’는 ‘좋은 건지 언짢은 건지’로 바꿔 실었다. 똑 부러지게 이해관계를 따지는 것보다는 ‘좋은 건지 언짢은 건지’로 의뭉스럽게 바꾼 것이 더 나아 보인다.


딱 부러지게 직립하는 것보단 구부정정 굽은 옛 소나무 가지가 우리 본마음이라는 데서, 그것이 이로운 건지 해로운 것인지는 모른다는 육필에서 당시 시인의 심사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서정주는 이렇게 1997년 우리 나이 83세까지도 고치고 또 마지막 시집을 낼 때에도 다시 고쳤다.

 

죽을 때까지 공부하고 쓰고 고치고 또 고친 시의 삶

 

나는 아침마다/ 이 지구 위의 산들의 이름을 부르고 산다.// ‘에베레스트!’하고/ 내가 히말라야를 향해 부르면/ 에베레스트는/ 그의 맑은 산골에서 억년을 두고 기른/ 그 이쁜 석류들을/ 내 마음속을 향해/ 내밀어 오고

 

1994년 1월 28일 ‘80살의 시’라는 제목으로 여기까지 써내려가다 큰 가위표로 지워버린 시이다. 이렇게 버린 시에서도 ‘이 땅 지구의’로 썼다 ‘이 지구 위의’로, ‘큰 석류들을’을 ‘그 이쁜 석류들을’로, ‘그 산골에서 기른’을 ‘그의 맑은 산골에서 억년을 두고 기른’으로 고치고 있었다.

 

이렇게 고치니 만물과 교감하며 영생을 향하는 서정주 시 브랜드가 그대로 살아나고 있지 않은가. 특히 ‘그 산골’에 ‘의’라는 소유격 조사를 삽입해 ‘그의 맑은 산골’로 고치니 ‘그’라는 에베레스트에 대한 지시대명사가 아연 생물처럼, 친구처럼 활물화(活物化)되고 있지 않은가.

 

공부하며 시를 쓰다가/ 마음이 너무나 울적해질 때,/ 생각하며 느끼고 있다가/ 가슴이 그만 두근거릴 때,/ 그대 그리워 애태우고 있다가/ 두 볼이 붉으스레 달아오를 때,/ 나는 할 수 없이 구석기 시대의/ 싸늘한 돌칼을 집어 뺨에 대인다./ 20만 년 전의 구석기 문명 때에/ 우리 퉁구스 족이/ 바이칼 호숫가의 바이칼 산맥에서/ 캐내인 비취로 만든/ 그 싸늘한 쑥빛의 돌칼을/ 더운 내 두 뺨에 대고 또 대며/ 내 감정과 사상을 식힌다./ 1742미터 깊이의/ 이 세상에서 가장 맑은 바이칼 호숫가의/ 바이칼 산맥에서 캐낸 비취옥의 돌칼!/ 이것을 뺨에 대고 또 대어/ 내 감정과 사상을 식힌다./ 그러면 그 구석기 문명 시절의/ 그 맑은 해가 떠올라 와서/ 나를 일깨워 세운다.

 

1996년 1월 14일에 쓴 〈바이칼 호숫가의 비취의 돌칼〉이다. 이 시도 처음엔 ‘격렬해질 때’로 쓴 것을 ‘울적해질 때’로, ‘더워질 때’를 ‘달아오를 때’로, ‘돌칼을 들어’를 ‘돌칼을 집어’로, ‘해가 떠와서’를 ‘해가 떠올라와서’로, 마지막 행 ‘나를 제대로 회복시킨다’를 ‘나를 일깨워 세운다’로 고치고 있다. 그리고 다시 시집에 실릴 때는 ‘쓰다가’를 ‘쓰고 살다가’로, ‘대인다’를 ‘댄다’로, ‘일깨워 세운다’를 ‘제대로 일깨워 세운다’로 바로잡고 있다.

 

팔순을 훌쩍 넘기고도 이렇게 시를 쓰고 또 고치는 것도 놀랍지만 위 시 첫 행부터 대뜸 “공부하며 시를 쓰다가” 할 정도로 학구열과 창작열, “그대 그리워 애태우고 있”는 연심(戀心)은 전혀 식지 않은 것이 더 놀랍다. 오히려 싸늘한 돌칼을 뺨에 대가며 감정과 사상을 식힐 정도로 마지막까지 시혼을 활활 불태우고 있다.

내 길은/ 한정없이 뻗혀있는/ 안 끝나는 길이로라.// 산을 넘어가면/ 또 산,/ 그 산 넘어도 또 산의/ 첩첩산중 길이로라.// 사막을 건네가면/ 또 사막/ 그 사막 넘어가도 또 사막뿐인/ 아득한 아득한 사막길이로라.// 그러나 이 길엔/ 바이칼 호수 같은/ 세계에서 제일 깊고/ 세계에서 제일 맑은/ 호수 물도 있나니,/ 이런데서 쉬어쉬어/ 내어갈 길이로라.

 

1994년 7월 7일에 쓴 시이다. ‘나의 길’이라 제목을 정하고 고쳐가며 썼지만 끝내 발표하지는 않았다. 한정 없는 시 쓰기의 막막한 심사를 산과 사막에 관념적으로 비유해 구체성이 떨어져서인지, 아니면 ‘쉬어쉬어 내어갈 길’이 너무 안이해서 그랬는지 아무튼 양에 안 차 발표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버렸어도 그 모티프는 1년여 후 〈바이칼 호숫가의 비취의 돌칼〉 속으로 들어와 구체화되고, 그 심사는 또 마지막 시집 ‘머리말’에서 아래와 같이 구체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시라는 것 이것은 말하자면 ‘절입태산(浙入泰山)’인 것으로, 오래 쓸수록 깊은 산골 속의 애로들만 더 첩첩히 많이 겪어야 하는 것인만치, 이걸 또 한 권 내는 현재의 내 심경은 미련하게 늙은 숫소 한 마리가 어느 마당가에서 그 먹은 풀들을 거듭거듭 되뱉어내 되새김질하고 있는 꼬락서니만 같이 느껴질 뿐인 것이다.

 

83세, 시력(詩歷) 환갑이 훌쩍 넘었는데도 시의 길은 안 끝나는 길이고 또 자신은 “아직도 철이 덜 든 소년 그대로고, 또 도(道)도 모자라”라니 시를 소처럼 일곱 번이나 되새김질하며 고치고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이렇게 고치는 것뿐 아니라 부지런히 공부하며 시도 끝까지 써나갔다. 1990년 들어서며 《이집트 사자(死者)의 서(書)》 영역판 한 권 전체를 정성 들여 필사해 놓고 모르는 단어의 뜻을 써가면서 연구해 〈에짚트의 어떤 저승의 문 앞〉 등 이집트 시편 등을 써 발표했다. 또 《구약성서》도 원문으로 그대로 노트에 옮기고 공부해가며 〈솔로몬 왕의 시적 구상〉 등의 시를 써 발표하는 등 그야말로 죽을 때까지 공부하고 시를 쓰고 고쳐나갔다.

 

시 쓰기의 막막함이 결국은 삶의 일상이었나니

 

결국은/ 겨우 숨쉬는/ 이 무주공산(無主空山)에/ 낮이란/ 먼 산 뻐꾹새 한 마리 살아서 우는구나./ 그리고 밤이란/ 솟짝새 한 마리 뒤대여 우는구나.

 

 마지막 시집 머리말을 넘기고 난 직후인 1997년 5월 22일 써뒀다가 1998년 1월호 《현대문학》에 ‘솟짝새’만 ‘소쩍새’로 교정보아 발표한 시 〈결국은〉이다. 아무래도 소쩍새 울음소리가 서정주 귀에는 ‘솟짝’으로 끝까지 들렸고 그 들리는 음상에 충실하려 했지만, 교정은 ‘소쩍새’로 잡을 수밖에 없었나 보다.

 

2행 ‘겨우 숨쉬는’과 4행 ‘낮이란’은 처음엔 없다가 노트에서 삽입한 것이다. 또 ‘살아서 우는구나’는 ‘살아있구나’를, ‘한 마리 뒤대어 우는구나’는 ‘한 마리 한 마리 우는구나’를 고친 것이다. 이렇게 고치니 운율도 세련되고 현실감도 훨씬 살아나고 있다. 특히 ‘겨우 숨쉬는’ 한 구절이 무주공산 앞에 들어가면서 아무도 없는 허공에 비로소 생령들의 숨길이 불어넣어지고 있다.

 

평생 쓰고 또 고쳤지만 결국은 뻐꾹새, 소쩍새 울음소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시 쓰기의 이 막막함이라니. 그러면서도 첫 시집 《화사집》에서부터 시혼(詩魂)을 온통 사로잡기 시작해 죽을 때까지도 제대로 다 형상화해내지 못할 것이라 누누이 말한 그 뻐꾹새, 소쩍새 울음의 한없는 깊이와 설움이 이 무주공산에서 결국은 제대로 들려오게 한 시로 필자에겐 읽힌다.

 

〈결국은〉 외 4편을 발표하며 서정주는 “60여 년 시를 써온 결과 우리가 나날이 살아가는 일상생활에서 살며 느끼며 생각하고 공부하는 모든 내용에서 고른 것들은 두루 다 시가 돼야 한다는 생각으로 나는 요즘 시를 쓰고 있다”(《현대문학》 1998년 1월호, 127쪽 참조)고 밝혔다. 일상이 곧 시, 시를 착상하고 쓰고 고치기일 정도로 평생을 살아왔다는 것이다. 해서 서정주에게는 시작노트가 곧 일기였다.

 

유품을 정리하다 이 시작노트를 어렵게 찾아낸 동생 서정태 시인은 “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이 시작노트를 찾고 보니, 그렇다면 혹여 일기도 있지 않을까 다 뒤져보았으나 나오질 않았다”고 최근 전화통화에서 밝혔다. 페이지 귀퉁이에 간혹 비망록 같은 메모도 보이는 이 시작노트가 일기 구실도 한 것이다.

 

오랜 가난에 시달려온 늙은 아내가/ 겨울 청명한 날/ 유리창에 어리는 관악산을 보다가/ 소리 내 웃으며/ ‘허어 오늘은 관악산이 다아 웃는군!’ 한다/ 그래 나는/ ‘시인은 당신이 나보다 더 시인이군!/ 나는 그저 그런 당신의 대서(代書)쟁이구……’하며/ 덩달아 웃어본다.

 

시작노트가 끝나는 1999년 2월 3일에 쓴 시이다. 서정주 말마따나 일상이 결국은 시가 되고 있다. 제목을 처음엔 ‘노처송(老妻頌)’으로 달았다 ‘겨울 어느 날의 늙은 아내와 나’로 고쳤다. 서정주는 제목을 본문과의 조화를 염두에 두고 개성적이고 인상적으로 달으라 했다. 무엇보다 상식적이고 진부하고 유식해 보이는 것보단 무식한 듯한 평범한 제목이 낫다고 했다. 해서 ‘노처송’을 이리 고쳤을 것이다.

 

‘소리 내 웃으며’는 처음엔 ‘쓰윽 웃으며’로 썼다가 고친 것이다. 위아래 입술 스치며 ‘쓰윽’ 웃는 것은 서정주 특유의 웃음이고 아무래도 아내의 웃음이니 ‘소리 내’로 고쳤을 것이다. ‘오늘은’ ‘나보다’ ‘그런’ 등은 나중에 삽입한 것이다. 시를 더욱 실감 나게 하기 위해서이다.

 

노부부 말년 일상의 한 에피소드를 자연스레 시화한 이 시에도 서정주의 활물론적인 시세계는 물론, 시관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관악산이 살아서 웃는 것, 그것을 보고 감동한 다른 이들의 그 감동, 만물조응을 꾸밈없이 그대로 대신 전하는 대서쟁이가 시인이란 것을.

 

1995년 들면서 시작노트의 필체는 가늘게 떨리기 시작한다. 그래서 글씨도 알아보기 쉽게 크게 꾹꾹 눌러 쓴 것이 확연히 드러난다. 1999년 가을부터 관악산 자락 자택을 뻔질나게 찾아가 새 밀레니엄 첫날 〈중앙일보〉에 싣고자 필자가 받아낸 시〈2000년 첫 날을 위한 시〉 원고도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서정주 생전에 마지막으로 쓴 시이기도 한 이 시는 전용 원고지인 ‘봉산산방용전(蓬蒜山房用箋)’에 쿡쿡 눌러 칸칸이 다 찰 만큼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글자 획들이 톱니처럼 심하게 떨려 기력이 쇠진해가고 있는 그 원고지 위에서도 또 고치고 있었다.

 

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미당의 마지막 절창

 

떨리는 손으로 그렇게 고치고 또 고쳤으면서도 양에 안 차면 발표를 끝끝내 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노트 속에 매장돼 있는 시 중 말년에 쓴 이 한 편만큼은 시를 보는 내 깜냥에선 정말 아쉽고 아깝다.

 

더 없이 아름다운
꽃이 질 때는
두견새들의 울음소리가
바다같이 바다같이
깊어만 가느니라.

 

1995년 5월 1일 떨리는 필체로 크게, 한 번의 고침 없이, 페이지 한가운데에 보란 듯이 써놓은 시이다. 그 옆 페이지에는 ‘아름다운 것은 슬픈 것이니라’라는 제목으로 아래와 같이 짓고 있었다.

 

아름다운 것은/ 슬픈 것이니라/ 한없이 한없이/ 슬픈 것이니라/ 슬픈 것이니라.// 저 찬란한 봄꽃동산에서/ 끝없이 울어대는/ 서러운 서러운 두견새 소리를/ 들어보아라./ 들어보아라.

 

첫 행은 처음 ‘고운 것은’이라 했다가 ‘아름다운 것은’이라 고친 것이다. 그렇게 고쳐봤어도 너무 자주 드러나는 반복법과 ‘슬픈’ ‘서러운’ 등의 투사체(投射體) 형용으로 감상(感傷)에 젖어 시가 늘어지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구상과 구성을 에피그램식으로 확 바꿔 이리 압축 정련되고, 힘 있고 깊이 있는 아름다운 시가 됐을 것이다. 무엇보다 평생 천착해온 뻐꾹새, 소쩍새, 두견새 소리가 꽃 지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이리 잘 형상화되어 있지 않은가. 삼라만상이 교호, 협력해 한창때인 〈국화 옆에서〉 시절에는 그 새소리들이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웠다면, 말년 이 시에 이르러서는 더없이 아름다운 깊이로 더없이 아름다운 꽃을 지게하고 있지 않은가.

 

체험된 감동의 침묵을 기초로 하는 ‘꿀 먹은 벙어리’의 언어가 시인의 언어라고 서정주는 가르쳐왔다. 도(道)나 본질을 다 드러내지는 못하는 언어의 불구성에도 불구하고 그런 침묵에 봉사하는 언어가 우주를 대변하는 것이고, 정신의 비약을 주는 시의 묘처임을 강조해왔다. 하여 필자는 그런 침묵으로 압축 정련된 이 시를 ‘꽃이 질 때는’이라는 제목을 달아 요즘 시단에서 부쩍 관심이 높아진 극서정시(極抒情詩)의 절창으로 내세우고 싶은데.

 

그러나, 아서라! 이 또한 서정주의 추상같은 자기검열에 반하는 줏대 없는 필자의 비루한 욕심일 것을. 세상으로부터 호되게 버림받은 말년의 시인과 시의 심사를 행여 ‘더없이 아름다운 꽃이 질 때’와 ‘바다같이 깊은 두견새들의 울음소리’에 빗대 항변하고 자만하는 시로 비치면 남사스러우니 발표 안 했을지도 모를 일이니.

 

그러나, 어쩌랴! 그런 서정주의 마음과 시와 시세계를 평생 발표한 1,000여 편의 시 중, 이 시만큼 개결하고 품격 있게, 한스럽고 아름답게 드러내고 있는 시는 필자의 안목에선 드물게 보이니.

 

그러나 시인은 아래 글과 같은 그 ‘미완감(未完感)’으로 이 시를 고치고 또 고치려다 그만 이승을 떠났을 것이다. 그러니 저 세상에서도 이 두견새들 울음소리의 한량없는 깊이를 재고 또 재보며 온전하게 다 형상화해 내고 있을 것을.

 

아무리 쓰고 고치고 저미고 붙여 봐도, 한동안 지나서 다시 읽어 보면 어느 때나 미비(未備)한 것만 같은 것이 시 아니던가. 적으나마 내 경우는 언제나 그렇다. 그렇다고 이걸 요량했다 해서 ‘어차피 미완(未完)이니, 결점이 좀 많으면 어때?’하고 덤비는 시작 태도여서는 물론 안 된다. 최선을 다하여도 생기느니 미완감(未完感)뿐인데, 하물며 게으르기라도 하면 그 미비가 여북할까.

 

? 《서정주문학전집 2》 일지사, 1972, 59~60쪽

 

시작 과정을 가르치며 퇴고의 중요성을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대목이다. 서정주는 그래서 자신의 호를 아직 덜된, 미비한 집이란 ‘미당(未堂)’이라 쓰지 않았겠는가. 서정주는 또 “스스로 체득한 시인의 생명의 결정인 작품을 통하여서만 그 최상의 시작법을 듣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는 것”이라 했다. 때문에 이 시작노트들은 미비한 시들이 어떻게 일가를 이뤄 가는지를 가르쳐줄 최상의 시 창작 교실로 보아도 될 것이다. 

 

 

이경철 abkcl@hanmail.net / 문학평론가·시인. 2010년 《시와시학》으로 등단. 저서로 《천상병, 박용래 시 연구》 공저 《대중문학과 대중문화》 《천상병을 말하다》 편저 《꽃필 차례가 그대 앞에 있다》 《시가 있는 아침》 등이 있음. 현재 동국대 문창과 겸임교수, 만해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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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5.01.22 19:29

    첫댓글 정보 감사하구요.
    시간날때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 15.01.23 04:45

    정말 이 새벽녘 일어나서 소중하게 읽고 갑니다.
    모르는 단어가 있어서 어려움도 따랐으나,다시금 읽어도 읽어도 되꼼씹어야할 좋은 내용이네요.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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