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찍는 사진

가슴으로 찍는 사진                                                      김 영 애  커다란 그릇에 담긴 물인 냥, 안동댐 수문을 빠져나온 물은 흐르는지 멈추었는지 고요하기만 하다. 가을 햇살이 수면 위에 내려 앉아 반짝이며 놀고 있었다. 물길을 따라 늘어 선 은행나무에는 아직도 노란 잎이 그대로 인데 도로를 덮고 있는 은행잎은 다 어디서 온 것일까? 파란 물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노란 건 노래서 더 예쁘고, 빨간 건 빨개서 더 예쁘고, 초록은 초록이래서 더 예쁘다. 분명 지금 우리는 횡재를 하고 있다. 예정에도 없었던 일이니 예상하지 못한 횡재를 하고 있는 셈이다. 며칠 전 텔레비전에서 올해는 고운 단풍이 없을 거라고 했고 실제로 보이는 산과들의 단풍의 빛깔이 작년과는 달라 고운 가을 단풍 보기를 포기하던 차에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가을을 보고 믿을 수 없었다. 횡재가 아니고서야 어덯게 그 귀하고 고운 단풍을 이리도 많이 눈앞에 둘 수 있으며,날씨까지 11월 중순이 되었는데 이리도 따사로울 수가 있을까.  물가에서 자라서 저리 고울까? 물들어 있는 단풍보다 물들어 가는 단풍의 오묘한 색상이 가슴을 흔들어 대는데 건너 보이는 고즈넉한 비탈길에 선 한 무리의 하얀 잎은 또 뭘까? 온 산천이 물들어 가는데 물들지 않은 흰색으로 당당히 서서 부드러운 손짓을 보내 주는 이름 모를 나무가 섞여 있는 모습도 참으로 대단한 광경이었다.  어울림의 산에선 변하지 않는 흰 색이 이미 변한 색을 더욱 곱게 보이게 하며 흰색도 하나의 색이 되어 가을 산의 색깔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 있었다.  가을 정적이 깔린 오솔길에 먼저 와 있던 하얀 승용차 한 대가 조용히 출발을 한다. 보도에 깔려 있던 은행잎이 발딱발딱 일어서며 쪼르르 자동차를 따라간다. 날개를 편 노란 병아리들이 어미닭을 따라가듯 앙증맞게 날아가는 모양을 보고 탄성을 질렀다. 차 안에서만 있을 수 없었다.  “우리 한 번 걸어 보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이구동성 합창을 한 소리였다. 노란 은행잎을 밟으며 걸어 보면 잃어버린 소녀 시절을 찾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을 다들 했는지 모른다. 가을 하늘을 이고 낙엽을 밟고 서 보니 뜻밖에도 이 곳은 우리들만을 위해 준비된 공간이 되어 있었다. 보이는 곳곳에 머물고 있는 가을과 가을 볕 아래 물들어 가는 산천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품으로 우리를 안아 들였다.  구름 없는 파란 가을하늘 아래 봄날 같은 따스함이 있고 소리 지르면 깨질 것 같은 정적이 깃든 고요가 펼쳐져 있었다. 수면을 흔들기 싫어하는 미풍은 우리들 앞에도 선물을 주듯이 팔랑팔랑 은행잎 몇 장을 나비처럼 내려 주었다.  아직 마르지 않은 폭신한 은행잎을 밟아 보는 발밑의 감촉이라니……. 정말로 감사하기 짝이 없는 순간이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저만치서 팔을 벌리고 은행잎을 받으러 뱅뱅 돌면서 뛰어가는 친구는 이미 소녀 시절을 되찾아 보인다.   “지금 우리가 바바리코트를 입고 있어야 하는데 그지? 이렇게 코트 깃을 턱 세우고…….”   은행잎을 밟고 서서 뒤돌아보며 말하는 친구는 적어도 청춘 시절은 찾았나 보다.  우리에게 언제 이런 시간이 있었던가? 일기 관계로 그렇게 귀하다는 단풍이 뜻하지 않게 지천으로 널려서 붉어지고 조용히 익어 가는 늦가을 공간을 통째로 우리끼리 차지하고서 보는 이가 없다고 소녀 시절, 청춘 시절을 마음 놓고 찾아 대는 이러한 시간을 가진 적이 있었던가? 차를 몰아 높은 곳으로 올라와 단풍잎을 밟고 만수된 댐과 멈춘 듯 조용히 흐르는 긴 물길을 내려다보는 것도 벅찬 광경이었다.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이는 하얀 수면, 숲 속에 숨었으나 우리들에게 들킨 선이 고운 정자들. 물 따라 굽이도는 하얀 길, 시키지 않아도 소리 없이 살금살금 기어가는 한 대의 차,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다.    멀리 선착장에 배들이 머리를 맞대어 모여 있고 먼저 올라 온 차에서 젊은이들이 작게 경쾌한 음악을 듣고 있었다.  주적대는 춤이 나왔다. 한 순간 시름을 잊은 나는 젊은 기분을 찾은 것인가?   얼어 있듯이 잔잔한 파란 물길을 가로 질러 놓인 서너 개의 정겨운 다리와 우아한 자태의 월영교를 보니 부서지는 물빛에 시린 눈을 비비며 이 쪽에서 저 쪽으로 건너고 싶은 충동이 인다.  고즈넉한 정적을 깨는 이가 아무도 없으니 햇볕이 살금살금 기어 내려와 은행잎에 내려 앉아 놀고 있는 것이 보인다. 몸을 뒤척이며 빨갛게 물들어 가는 단풍나무가 아직 파란 채로 옆에 선 나무에게 따뜻한 가을볕이 결코 오래 머물지 않을 것이라며 재촉하는 소리도 들린다. 한 친구가 방금 떨어진 빨간 단풍잎을 두 손으로 긁어모아 운전석 유리창 앞에 소복이 쌓아 놓고 정적을 깨뜨리며 깔깔 웃는다.   “이거, 오늘 차비다.”  항상 계산이 바르고 반듯한 이 친구는 오늘도 계산을 분명히 하며 뜻밖의 횡재를 하게해 준 친구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하는 것이다.  말 하지 않아도 고마운 마음은 한이 없다. 이 곳에 가끔 와 보긴 했지만 늘 댐의 아래쪽에서 머물다 식사나 하고 급히 돌아갔는데 오늘처럼 이렇게 조용하게 붉어져 가는 산천에 싸여서 이 나이에 넉살좋게 소녀 시절을 찾게 해 주니 고맙지 않을 수가 없다. 더구나 이곳은 평소에는 닫혀 있는 곳인데 가을이 익으면서 시민에게 잠시 개방된 곳이라니 정보가 빠른 이 친구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모르고 지나갔을 가을 풍경이었다.  단풍잎 차비를 흔쾌히 받은 친구는 안내하기가 바빴다.  “빨리빨리 봐, 어제 밤에 내가 와서 칠해 놨어. 너들 보라고. 저기는 공원이 될 거고…….여기도 봐 ,저기도 봐.”  친구의 손끝을 따라 보다가 단풍처럼 가슴이 물들었어도 맞은 편 산에 나 있는 하얀 길이 궁금해 그냥 오기 싫어  나는 친구를 졸랐다.  다리를 지나서 오던 길을 돌아보니 멀리서 조금 전에 우리가 머물던 곳이 한 장의 풍경화가 되어 가을볕 아래서 평화롭게 보인다.  하얀 색으로도 위풍당당하던 나무가 우리를 반겼다. 이 나뭇잎은 앞쪽은 녹색이고 뒤쪽은 흰색이어서 우리 눈을 붙든 것이다. 멀리서 우리에게 뒤 쪽의 흰색만 보이게 한 것은 가을바람의 힘이다. 흰색의 부드러움을 보여 우리를 설레게 한 가을바람의 힘이다. 손에 닿게 서 있는 나무가 지금 열심히 시시각각 물들어 가는 모양이 보인다. 노란색 주황색 빨강색이 한 장의 잎에 다 모여서 결국은 빨간색으로 되어 가고 있는  이 진기한 장면을 본 사람이 몇이나 되며 가슴의 떨림이 없이 이 진기한 장면을 보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소리없이 진행되는 자연의 법칙은 너무도 정교하여 눈물이 난다.   은행나무와 상록수를 한 그루씩 번갈아 심어 놓은 것은 또 누구의 생각인가?  노랑과 초록이 교대로 서서 산기슭을 돌아가는 모습은 아기자기함이 넘쳐 나 조경을 한 사람의 감각에 감탄이 끊이질 않았다.  “하필 오늘 카메라가 없어서 놓친다.” 늘 카메라를 갖고 다니던 친구가 카메라를 잊고 가져오지 않아 아름다운 색깔 앞에 설 때마다 안타까워했지만 후회한들 어쩌겠나. 이제 주부의 일상으로 돌아와야 할 시간인데. 카메라가 없을 땐 가슴으로 찍는 거다. 가슴으로 찍는 사진은 야! 야! 할 때마다 한 장 씩 찍힌다.    일에 묻혀 사느라고 ‘나’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는데 늦가을 정경을 보고 이리 마음이 셀레이는 행복을 느끼니 우리, 아직은 괜찮은 여자들이다 라고 주고받으며 차를 돌렸다. “결혼식을 안동에서 하길 잘 했어.” “오늘 정말 좋았어.” 돌아오는 차 안에서 꺼내 보는 사진에 알록달록 안동 댐의 가을이 담겼다. 은행잎처럼 나폴거리며 나폴거리는 은행잎을 받으러가는 마음, 낙엽 위에서 바바리 코트 깃을 세우고 싶은 마음, 단풍잎으로 차비를 계산하는 마음, 아직도 우리에게 국화차 한잔 사주고 싶어 핸들을 돌리는 친구 마음이 찍혔다. 친구들과 함께해서 더 선명한 색이 된 일요일 한나절의 가을이 한 시간의 행복이 되어 덤으로 찍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