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28.연중 제34주간 목요일
다니6,12-28 루카21,20-28
하느님만 찾으며
-영적靈的혁명의 전사戰士로 삽시다-
참 절박한 현실들입니다.
낙관적으로 보기에는 날로 심각해지는 내외적 현실입니다.
늘 말세라는 이야기가 나돌지만 요즘 상황은 심각합니다.
과연 지속가능한 세상인지 묻고 싶습니다.
무한한 욕망에 유한한 지구 자원의 현실입니다.
“지구는 모든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킬 만큼 풍요로운 곳이지만,
모든 사람의 탐욕을 충족시키기에는 척박한 곳이다”라는
간디의 생태적 세계관에 공감합니다.
이젠 탈성장의 시대라 합니다.
더 이상의 성장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대로는 안된다는 비관적 관점이 날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대체 에너지를 말하지만 결국은 소비를 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쓰레기로 귀결된 근대문명입니다.
참으로 절제, 극기, 자제, 자발적 가난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4차 산업혁명의 장밋빛 미래를 꿈꾸지만 과연 답일까요?
과연 인간은 행복할 것이며 일자리도 잘 확보될까요.
4차 산업혁명은 이뤄질 것입니다만 이와 필히 함께 가야하는 것이
인간의 영적혁명, 내적혁명입니다.
참으로 예나 이제나 변함이 없는 인간의 본질같습니다.
과연 인간이 희망이 있는 존재인가 묻게 됩니다.
역시 답은 그리스도교인들뿐 아니라 모든 이들의 철저한 회개입니다.
영적 삶, 내적 삶으로의 전환입니다. 외적 성장, 경제 성장의 추구에서 영적 성장,
내적 성장에로의 전환입니다.
하느님을 찾아야, 기도해야 삽니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의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삶으로의 전환입니다.
어제 읽은 글의 마지막 결론같은 말마디도 잊지 못합니다.
“지구 앞날 전체가 위기다.
공익추구는 다다익선多多益善이지만 사익추구는 다다공멸多多共滅이다.
우리는 언제쯤 ‘돈과 경제성장의 신화’(물신주의)로부터 벗어나 인간해방을 이룰까?”
하여 철저한 하느님께로의 방향전환의 회개가 답이라는 것입니다.
회개의 참 좋은 선물이 겸손과 지혜입니다.
그러니 물신주의의 악령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출구는 끊임없는 회개를 통한
내적혁명뿐이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셋으로 요약됩니다.
하느님, 인간, 자연입니다.
하느님을 잊었기에 인간은 삶의 본질을, 의미를, 방향을 잊었고,
더불어 인간도, 자연도 날로 피폐해가고 망가져 가는 현실입니다.
아무리 4차 산업혁명이 이뤄진다해도 인간이, 자연이 병들고 파괴된 미래라면
그런 발전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지요.
지금 현실을 보세요.
농촌의 붕괴와 더불어 부단한 개발과 착취로 자연도 사람도
병들어가는 현실이 아닙니까.
하느님 안에서 인간이 자연 및 온갖 피조물이 함께 공존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이 참 좋은 세상입니다.
요즘 수도원에는 새들이 유난히 많습니다.
가볍게 더불어 날라다니는 새들이 주는 무공해, 무소유, 무집착의 가르침도 고맙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많은 새들을 보기는 처음입니다.
수도원의 개들을 돌보는 자매들이 이런 새들을 배려해
비 가리개 우산 아래 설치해 놓은 모이터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온갖 동식물과도 함께 공존공생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결국은 하느님만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만을 사랑하여 찾을수록 필요도 점차 줄어져 최소한의 필요에 만족할 수 있습니다.
영적성장이 관심사이기에 저절로 이탈의 초연한 삶입니다.
참으로 하느님만을 찾는 이들은 어디에서나 한결같은 삶이요
머무는 곳이 고향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제1독서의 다니엘이 그 영적인간의 전형적 모범입니다.
외적환경에 좌우되지 않고 하느님만을 향해 살기에 부화뇌동,
경거망동하지도 않습니다.
하느님만을 피신처, 안식처로 삼기에 어디에서나 정주의 삶에 충실합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며 온갖 재난의 현실의 와중에서도
하느님께 희망을 두며 그분께 눈길을 두기에 안전합니다.
재난이 끝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하는 새로운 시작임을 봅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끝은 시작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하느님만 찾는 이들은 늘 주님과 함께
새로운 구원의 시작이 있을뿐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다니엘을 보십시오.
사면초가의 유배지에서도 하느님만을 찾고 섬기는데 항구하고 충실하기에
부족한 것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다리우스 임금도 찬송과 찬양의 사람, 다니엘을 한없이 신임하고 사랑하며
사자굴에서 하느님의 도움으로 구출됐을 때 함께 기뻐하며 조서를 내리어
다니엘의 하느님을 고백하고 섬길 것을 권합니다.
“누구나 다니엘의 하느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해야 한다.
그분은 살아 계신 하느님,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나라는 불멸의 나라, 그분의 통치는 끝없이 이어진다.
그분은 구해 내시고 구원하시는 분, 하늘과 땅에서 표징과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
다니엘을 사자들의 손에서 구해내셨다.”
다리우스 임금의 하느님 고백이 감동적입니다.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유배지에서도 다니엘은 한결같이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를 올리며 항구히 충실히 주님을 섬겼다는 사실입니다.
예나 이제나 똑같은 하느님이시며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이런 하느님을 매일 새롭게 만납니다.
이런 하느님만이 우리의 무한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참으로 살아 계신 주님과 만남의 맛, 만남의 기쁨으로 살아갈 때
참 행복일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절대적 삶의 중심이자 의미인 하느님을 잊음이 불행의 원천임을 깨닫습니다.
영적 혁명은 비상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의 부단한 전환, 회개의 삶을 뜻합니다.
하느님 향한 끊임없는 기도, 끊임없는 말씀 공부와 실행,
끊임없는 회개가 뒤따를 때 영적혁명입니다.
평생 ‘영원한 현재 진행형’중인 끊임없는 내적초월의 영적혁명, 영적전쟁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끊임없는 영적혁명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첫댓글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