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n.wikipedia.org/wiki/Battle_of_M%C3%BChlberg
군대
슈말칼덴 동맹
6천 명의 보병, 그리고 3천 명의 기병과 15문의 대포들
황제군
4만 4천 명의 보병 그리고 4천 5백 명의 기병과 20문의 대포들
전투 결과
슈말칼덴 동맹(패배)
2~3천 명의 (보병?) 전사 및 부상자 발생
5백 명의 기사들이 전사 및 부상당함.
1천 명의 병사들이 포로로 잡힘
황제군(승리)
약 50여 명의 병사들이 죽거나 부상당함.
배경
The spread of the Protestant Reformation in Germany after 1517 represented a major obstacle to the universalistic projects of Charles V, the Habsburg emperor. Attempts at reconciliation between Lutherans and Catholics at the diets of Speyer of 1526 and 1529 had failed, sharpening the mutual opposition between the two opposing sides.
1517년 이후 독일에서 개신교(프로테스탄트) 개혁이 확산된 것은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의 보편주의 프로젝트(주: 유럽 전체를 가톨릭교로 통일하려는 계획)에 큰 장애물이 되었다. 1526년과 1529년 슈 파이어의 식단에서 루터교도와 가톨릭교도 사이의 화해 시도는 실패했고, 양측의 상호 반대를 날카롭게 만들었다.
The Reformation offered to most independent German states the pretext to affirm their autonomy not only on the religious level, but also on the political one. For some of these small states, belonging to the Holy Roman Empire (a political reality that had been fragmented for centuries) was indeed considered not much more than a mere formal act.
대부분의 독립적인 독일인에게 제시된 종교 개혁은 종교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적 차원에서도 그들의 자율성을 확인하는 구실을 제시했다. 신성 로마 제국 (수세기 동안 분열 되어온 정치적 현실)에 속한 이 작은 국가들 중 일부는 실제로 단순한 공식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In 1531 some princes (most notably Philip I of Hesse and John Frederick, Elector of Saxony) were opposed to the Emperor's attempt to restore religious and political unity in the German lands through the re-roposal of the Worms Edict. This led to the formation of the Schmalkaldic League[8] (named after the town of Schmalkalden in Thuringia where the pact was stipulated), a militarily defensive alliance with a markedly anti-Habsburg and anti-Catholic stance.
1531년에 일부 왕자(특히 헤센Hesse의 필리프 1세Philip I과 작센Saxony의 선거인 존 프레드릭John Frederick)는 웜 칙령의 재 제안을 통해 독일 땅에서 종교적, 정치적 통일성을 회복하려는 황제의 시도에 반대했다. 이로 인해 슈말칼덴 동맹(조약이 규정 된 튀링겐의 슈말칼덴 마을에서 이름을 따서 명명 )가 형성되었으며, 이는 현저하게 반 합스부르크 및 반 가톨릭 입장을 가진 군사 방어 동맹이었다.
Although the birth of a Protestant coalition inside the Empire imperilled his power, Charles V did not initially attack the League. The League meanwhile received support from several free cities (Bremen, Hamburg, Lübeck, Ulm and Strasbourg), wishing to affirm their independence from the central power. The Protestant princes could also count on the support of the Kingdom of France, Charles' main foreign enemy. In need of the military support of the German states in his war against the Ottoman Turks in the eastern regions of his lands, the Emperor chose not to oppose the League and to grant wide autonomy to it. The Protestant leaders were therefore left free to support the Reformation and to fight the power of the Catholic bishops in the lands they controlled.
제국 내에서 프로테스탄트 연합(슈말칼덴 동맹)의 탄생이 그의 권력을 위태롭게 했지만 카를 5세는 처음엔 슈말칼덴 동맹을 공격하지 않았다. 한편 슈말칼덴 동맹은 중앙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확인하기 위해 여러 자유 도시(브레멘, 함부르크, 뤼베크, 울름 및 스트라스부르)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개신교 왕자들(진짜로 왕의 아들이란 뜻이 아니라, 강력한 독립된 영주들)은 또한 카를 5세의 강력한 외부 적수인 프랑스가 지원해 주리라고 믿었다. 그의 영토 동부 지역에서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에서 독일 국가들의 군사적 지원이 필요한 황제는 연맹에 반대하지 않고 광범위한 자율권을 부여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므로 개신교 지도자들은 종교 개혁을 지원하고 그들이 지배하는 땅에서 가톨릭 주교의 권력에 맞서 싸우기가 자유로워졌다.
The conditions that forced Charles V to accept the actions of the League changed after a few years. In 1544 the signing of the Treaty of Crépy ended after decades the conflicts between the Emperor and Francis I of France for the control of the Italian peninsula. After the treaty the League lost the support of the French. Martin Luther's death in 1546 and the temporary cessation of the Turkish threat from the east also put Charles in the best possible condition to focus on the internal enemy that endangered the religious and territorial unity of Imperial Germany.
카를 5세가 슈말칼덴 동맹의 행동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조건은 몇 년 후에 바뀌었다. 1544년 크레피 조약의 조인은 이탈리아 반도를 장악하기 위한 프랑스의 프란시스 1세와 황제 사이의 갈등이 수십 년 만에 끝났다. 크레피 조약 이후, 슈말칼덴 동맹은 프랑스로부터 더 이상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1546년 마틴 루터의 죽음과 오스만 제국-터키이(신성로마제국 국경)의 동쪽을 위협하는 일이 일시적으로 중단됨에 따라, 카를 5세는 독일의 종교적 영토적 통합을 위협하는 내부의 적(슈말칼덴 동맹으로 대표되는 개신교 세력들)에게 초점을 맞출 수있는 최상의 조건에 놓였다.
The opportunity to begin the conflict was given by the rivalry between the elector of Saxony John Frederick I and his cousin Maurice, both belonging to the House of Wettin. Despite his Protestant faith, Maurice had in 1542 refused to join the Schmalkaldic League. In 1546, with the assistance of Ferdinand I, the younger brother of Charles V, Maurice invaded the territory of John Frederick.[9] When the attack begun John Frederick's armies were in Württemberg, but they managed to move to the occupied lands and repel Maurice's forces.[10]
갈등을 시작할 기회는 작센 존 프레드릭 1세의 선거인과 그의 사촌 모리스(둘 다 웻틴의 가문에 속한) 사이의 경쟁에 의해 주어졌다. 그의 개신교 신앙에도 불구하고 모리스는 1542년에 슈말칼덴 동맹에 가입하는 것을 거부했다. 1546년, 카를 5세의 동생인 페르디난드 1세의 도움으로 모리스는 존 프레드릭 1세의 영토를 침공했다. [9]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존 프레드릭 1세의 군대는 뷔르템베르크에 있었지만 점령지로 이동하여 모리스의 군대를 격퇴했다. [10]
The Emperor decided to take advantage of the divisions between the Protestant armies, and he joined the war in 1547. He occupied Ulm and Württemberg and defeated the Palatine Elector, forcing him to surrender and to leave the League. With the beginning of spring Charles then marched toward Saxony to help Maurice's army and to end his clash with John Frederick, the last Protestant prince still opposing him.
황제는 프로테스탄트 군대간의 분열을 이용하기로 결정했고 1547년 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울름과 뷔르템베르크를 점령하고 팔라티노 선거인을 무찌르고 항복시켰으며, 슈말칼덴 동맹을 떠나도록 강요했다. 봄이 시작되면서 카를 5세는 모리스의 군대를 돕고 여전히 그를 반대하는 마지막 개신교 왕자인 존 프레드릭 1세와의 충돌을 끝내기 위해 작센으로 행진했다.
전투
Charles was suffering from gout at that time and his army had to face the desertion of the Papal soldiers that had helped him in the first part of the campaign. 11] In addition the Saxon Elector's army was larger than Charles' forces. However, hoping to encourage a Protestant and anti-imperial uprising in Bohemia, John Frederick took the decision to split his forces and he deployed a large portion of his troops there.[12]
카를 5세는 그 당시 통풍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의 군대는 군사 작전의 초기 부분에서 그를 도왔던 교황령 병사들의 탈영에 시달렸다. [11] 또한 작센 선거인의 군대는 찰스의 군대보다 병사들의 수가 많았다. 그러나 보헤미아에서 개신교와 반 제국 봉기를 돕기 위해 존 프레드릭은 군대를 나누기로 결정했고 군대의 상당 부분을 그곳에 배치했다. [12]
He had also left some small detachments to protect the most vulnerable Saxon cities in order to prevent the entry of Charles' army from the south. With the intention of reaching the well-defended stronghold of Wittenberg, the Elector then marched northwards, abandoning his position in Meissen and camping at the end of April at the town of Mühlberg, leaving only a few troops as guards on the bank of the Elbe river, that he considered too wide to be easily crossed by the imperial forces.
그는 또한 남쪽에서 카를 5세의 군대가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가장 취약한 작센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작은 예비 부대를 남겨 두었다. 잘 방어된 비텐베르크의 거점에 도달할 의도로, 선거인은 북쪽으로 진군하여 마이센에서 자신의 지위를 버리고 4월 말 뮐베르그 마을에서 야영을 했고 엘베 강둑을 지키는 경비병들로 소수의 군대만 남겼다. 그는 카를 5세의 군대(황제군)가 쉽게 엘베 강을 건널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At the head of his army, Charles V arrived at the Elbe on the evening of 23 April. Despite the contrary opinion of his generals, he decided to attack the enemy forces, resting just a few miles away. At dawn on 24 April the first avant-gardes of the imperial army advanced, looking for a way for all the army to cross the river. Helped by the surprise and by the dense fog that had risen from the river, small groups of Spanish and Italian veteran soldiers managed to swim across the river and eliminate the few Saxon troops that were guarding the other side.
카를 5세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4월 23일 저녁 엘베강에 도착했다. 장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카를 5세는 몇 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적군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4월 24일 새벽에 황제군의 첫 번째 부대가 전진하여 모든 군대가 강을 건널 수있는 길을 찾았다. 강에서 솟아 오른 짙은 안개로 인해 (슈말칼덴 동맹의 병사들은 황제군 병사들이 엘베강을 건너는 것을 보지 못했고), 소수의 스페인 및 이탈리아 출신 베테랑 병사들은 엘베강을 건너고 헤엄쳐서 반대편을 지키고있는 소수의 작센 군대를 제거했다.
Meanwhile, some troops of the tercios of Lombardy and Naples, that were the most experienced soldiers in Charles' army, followed a plan set by Don Fernando Álvarez de Toledo, Duke of Alba[13] and commander-in-chief of the Imperial troops in Germany[2][page needed] and with the help of a local farmer,[14] they managed to spot a ford to use that would allow all the army to cross the Elbe. In addition to this, some veteran soldiers were able to prevent the demolition of a pontoon bridge built by the Saxons,[11] that was immediately used by the Imperial cavalry to pass safely to the other shore.
한편, 카를 5세의 군대에서 가장 경험이 많은 병사들이었던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드와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출신들로 구성된 테르시오(긴 창이나 화승총으로 무장한 보병 부대) 부대 중 일부는 황제군 총사령관인 돈 페르난도 알바레즈 데 톨레도 알바 공작이 세운 계획을 따랐다. 독일에서는 그 지역 농부의 도움으로 모든 군대가 엘베강을 건널 수 있는 여울(강의 얕은 곳)을 발견했다. 이 외에도 일부 베테랑 병사들은 작센인들이 만든 폰툰 다리가 즉시 다른 해안으로 안전하게지나 가기 위해 제국 기병대에 의해 사용된 철거를 막을 수 있었다.
According to some sources[15] John Frederick had considered an attack from Charles so unlikely that he would have ordered several commanders of his army to go to Mass just when the enemy army was about to complete the crossing of the Elbe. The Saxon forces were completely taken by surprise. As soon as he became aware of the fact, the Elector's first thought was to retreat towards Wittenberg. He soon realized though that his army would be too slow to be prepared to march in a short while; moreover, he was convinced that only a vanguard of the main imperial army was attacking. So he ordered his troops to prepare for battle.
일부 주장들에 의하면 존 프레데릭 1세는 카를 5세의 공격을 고려했을 때 적군이 엘베 강을 건너기 직전에 군대의 여러 사령관에게 미사를 가라고 명령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작센 군대는 (황제군이 강을 건너자) 크게 놀랐다. 존 프레데릭 1세가 그 사실을 알게 되자 그의 첫 번째 생각은 비텐베르크로 후퇴하는 것이었다. 그는 곧 그의 군대가 너무 느려서 단기간에 철수할 준비를 하지 못할 것임을 깨달았다. 더욱이 그는 황제군 군대의 주력 중에서 일부 선봉 부대만이 공격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존 프레데릭 1세는 군대에 전투를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John Frederick chose to deploy his troops along the edge of a forest, in order to prevent a possible encirclement by the imperial cavalry and to have a safer escape route in case of retreat. The emperor Charles V also reached the battlefield and exhorted his troops to fight the Protestants. Due to gout, he was carried to the battle in a litter, rather than mounted in armour on the great warhorse as depicted by his court painter, Titian[16] and assisted to the battle from the rear.[4] The imperial army was made up of about 16-20,000 men. Among them there were the tercio of Lombardy, that of Naples, and that of Hungary, led by Álvaro de Sande.
존 프레데릭 1세는 황제군 기병한테 포위될 가능성을 방지하고 후퇴시 더 안전한 탈출 경로를 확보하기 위해 숲 가장자리를 따라 군대를 배치하기로 결정했다. 황제 카를 5세도 전장에 도착하여 군대에게 프로테스탄트와 싸울 것을 권고했다. 통풍 때문에 그는 그의 궁정 화가 티치아노가 그림에서 묘사한 대로 갑옷을 입고서 커다란 말에 올라탄 모습이 아니었고, 대신 가마에 타고 군대의 뒤에서 전투를 지휘했다. 황제군은 약 16~20,000 명으로 구성되었다. 그중에는 롬바르디아 출신 병사들로 구성된 테르시오 부대, 나폴리 출신 병사들로 구성된 테르시오 부대, 알바로 데 산 데가 이끄는 헝가리 출신 병사들로 구성된 테르시오 부대가 있었다.
The battle began in the evening; the Saxon army, mainly made up of peasants, succeeded in repelling the first assaults of the Hungarian cavalry, but the greater number and better preparedness of Charles' soldiers, among the best in the world at that time, decided the fate of the clash. The emperor had placed his cavalry on the two wings of his army. The right wing, under the direct command of the Duke of Alba, was heavier than the left one, led by Maurice of Saxony.
전투는 저녁에 시작되었다. 주로 농민으로 구성된 작센 군대는 헝가리 기병대의 첫 번째 공격을 격퇴하는데 성공했지만, 카를 5세가 지휘하는 더 많은 수의 병사들이 작센 군대에 달려들었다. 황제는 군대의 양 측면에 기병을 배치했다. 알바 공작이 직접 지휘하는 오른쪽 측면은 작센의 모리스가 이끄는 왼쪽 날개보다 수가 더 많았다.
Once the fragile wings of the Saxon army were defeated, the infantry tercios, placed at the center, had a good game in breaking enemy resistance, forcing the Protestants to retreat through the adjacent forest. The Elector of Saxony showed great courage on the battlefield, but was wounded in the face and captured by the imperial troops.[17][18] The main part of his soldiers were chased and killed or captured.
작센 군대의 나약한 측면이 패배하자 중앙에 배치된 (황제군의) 테르시오 보병들은 적의 저항을 무너뜨리는 데 뛰어난 모습을 보였고, 프로테스탄트 병사들은 가까운 숲을 통해 후퇴했다. 작센의 선거인은 전장에서 큰 용기를 보였지만 얼굴에 부상을 입었고 황제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그의 병사들 대부분은 달아나거나 살해당했다.
Some sources report that Emperor Charles V commented on the victory with the sentence Vine, vi y venció Dios (in Spanish "I came, I saw, and God won"), a paraphrase of the famous exclamation pronounced by Julius Caesar.[19][20][21]
일부 소식통은 카를 5세가 카이사르가 말했던 유명한 문장을 인용하여 스페인어로 "내가 왔고, 보고, 신이 이겼노라."라는 문장으로 자신이 거둔 승리에 대해 묘사했다고 주장했다.
전투 이후
The battle ended with a complete defeat of the Saxon army which suffered severe losses, estimated at around 2000-3000 men. In addition, the Protestants suffered the almost complete capture of their artillery, ammunition, and banners; many soldiers also ended up prisoners. On the imperial side, around fifty soldiers were killed.[6][11]
전투는 약 2000-3000명으로 추정되는 심각한 손실을 입은 작센 군대의 완전한 패배로 끝났다. 게다가 개신교 군대 측은 포병, 탄약, 현수막을 거의 완전히 잃어버려 회복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많은 군인들도 황제군에 의해 포로가 되었다. 반면 황제군 측에서는 불과 50여 명의 군인들만 죽었다.
John Frederick was responsible for not preparing an adequate defense on the river Elbe; that could have prevented the imperial troops from crossing it. His surrender symbolically sanctioned the end of the Schmalkaldic League. Charles decided to spare his life, but he had to exchange it with the capitulation of the stronghold of Wittenberg. He was condemned as a heretic and imprisoned, and was forced to leave the electoral privilege to his cousin Maurice, who for his help in the imperial victory, was given the control of the Electorate of Saxony. John Frederick was later released in 1552,[22] two years before his death.
존 프레드릭 1세는 엘베강에서 적절한 방어를 준비하지 않은 책임이 있었다. 그것은 황제군이 강을 건너는 것을 막을 수있었다. 그의 항복은 상징적으로 슈말칼덴 동맹의 최후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카를 5세는 존 프레드릭 1세의 목숨을 살려주기로 결정했지만 그 대신 비텐베르크 요새를 자신이 가져갔다. 존 프레드릭 1세는 이단자로 비난을 받고 감옥에 갇혔으며, 그의 사촌 모리스에게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선출할 수 있는 선거에 참가할 수 있는 권리를 넘겨주어야 했고, 모리스는 정말로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선출할 수 있는 작센 선거권의 권한을 받았다. 존 프레드릭 1세는 죽기 2년 전인 1552년에 풀려났다.
The surrender of Philip of Hesse soon afterwards ended the Schmalkaldic War, but the Protestant problem remained unsolved. Many of the princes and key reformers, such as Martin Bucer, fled to England, where they directly influenced the English Reformation. The peace reached between Catholic and Protestants in Germany (Augsburg Interim, 1548) was not enough to bring peace inside the Empire and only in 1555 the Peace of Augsburg stated the end of the wars of religion in the Empire, allowing each ruler to choose between Catholicism and Lutheranism. That principle ended the project to reunite Germany under a single religious confession.
얼마 후에 헤센의 필립은 곧바로 항복했고 그로 인해 슈말칼덴 동맹의 전쟁은 끝났다. 하지만 프로테스탄트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었다. 마틴 부서(Martin Bucer)와 같은 많은 왕자와 주요 개혁자들은 영국으로 도망쳐 영국 개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독일의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도달한 평화인 아우크스부르크 화의(1548년)는 제국 내부에 평화를 가져 오기에 충분하지 않았으며 1555년에야 아우크스부르크 평화는 신성로마제국의 종교 전쟁이 끝났음을 선언하여 각 통치자가 다음 중에서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천주교와 루터교. 그 원칙은 단일 종교 고백으로 독일을 통일하는 계획을 끝냈다(비록 카를 5세가 뮐베르크 전투에서 개신교 군대를 무찌르기는 했지만, 개신교를 완전히 박멸하여 가톨릭교로 독일을 통일하겠다는 그의 계획은 끝내 실패했다는 뜻).
아래는 16세기 독일(신성로마제국)의 군사들을 묘사한 그림들. 아마 카를 5세가 이끌었던 군대의 모습들도 대부분 저러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