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758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2 : 전라도 산과 물이 기이하고
순천은 백제 때 감평군(欿平郡)으로 불렸고 신라 때 승평군(昇平郡)으로 바뀐 뒤 여러 번의 변천 과정을 거쳐 순천시가 되었다.
산과 물이 기이하고 고와 세상에서 소강남(小江南)이라고 일컬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형승」조에 실린 글이다. 남수문은 그의 「기」에서 “남쪽으로 큰 바다에 연했으므로 곧 바다 도둑들이 왕래하던 요충지다. 인구의 많음과 물산의 풍부함이 남쪽 고을에서 제일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순천을 일컬어 삼산이수(三山二水)1)라고 부르는데, 삼산은 무등산의 맥이 이어 내려와 세 봉우리가 된 원산을 말하며, 이수란 순천시내를 흐르는 동천과 옥천에서 비롯한 말이다. 조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에 따르면, 백제 때 순천의 지명을 승평이라고 한 것은 “지형이 낮으며 함몰되어 평평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하였다.
이곳 순천에 팔마비가 있는데,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부사 최석이 임기가 차서 비서랑(秘書郞)으로 들어갔다. 고사(古事)에 태수가 바뀌어 돌아가면 반드시 말 여덞 필을 주었다. 석(碩)이 돌아갈 제 고을 사람들이 말을 주면서 “이 중에서 좋은 말을 고르라” 하였다. 석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말이 서울에 가면 족할 뿐이지 무얼 고른단 말인가!” 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그 말을 돌려보냈다. 이에 고을 사람들이 이것을 받지 않으니, 석은 말하기를 “내가 너의 고을에 있을 때 말이 새끼를 낳은 것까지 데려왔으니, 이것은 내가 욕심이 있는 것이라” 하고 그 새끼까지 돌려보내니, 이런 뒤부터는 말을 주던 폐단이 없어졌다. 고을 사람들이 그 덕을 칭송하여 비석을 세우고 팔마비라고 이름 지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이 팔마비를 바라본 노숙동은 “팔마비에 세월이 오래니 거친 이끼 끼었고, 연자루(燕子樓) 다리에 물결 출렁이니 떨어진 꽃 흐르네”라는 시를 남겼다. 순천을 흐르는 옥천 위에 걸쳐놓은 누각이 연자루였다. 그러나 누각은 없어지고 다리만 남은 이곳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서려 있다.
옛날에 이곳 태수를 지낸 손억이 관기인 호호를 사랑했는데 훗날 관찰사가 되어 다시 가본즉, 호호는 이미 늙어 있었다. 고려 때 문신 통판(通判) 장일이 시를 짓기를 “달 아래 연자루 서리 내려 처량한데, 낭관(郎官)은 가버리고 꿈만 아득하구나. 옛날 같은 자리에 앉았던 손, 늙었다고 탓하지 마소. 누각 위의 가인(佳人)도 머리가 세었네”라고 하였고, 서거정도 다음과 같은 시 한 편을 남겼다.
누각 밖에는 해마다 제비가 날아드는데,
누각 안에는 호호가 이미 늙었네.
풍류를 즐기던 사람들, 이제 어디로 갔는가.
비파 한 곡조에 해는 반이나 저물었구나.
전라선과 경전선이 지나는 이곳 순천의 선화루에 올랐던 성임의 시 한 편을 더 보자.
절(節)을 잡고 와서 바다 위의 구역을 순회할 적에
때때로 가장 높은 누각 바람 난간에 의지했네.
산이 비 뒤에 비꼈으니 푸르기는 소라 빛이요,
물이 성 둘레를 둘렀으니 푸른 옥이 흐르는 듯
천 리 길손의 근심은 풀 따라 자라나고
백 년 동안 사람의 일은 구름과도 같이 떠도네.
문부(文簿) 더미 속에 얼굴빛 늙어지니,
허연 수염 쓸쓸하게 또한 가을이네.
‘벌교 가서 주먹 자랑하지 말고, 순천 가서 인물 자랑하지 말고, 여수 가서 돈 자랑하지 마라’라는 말도 있듯이, 순천은 인물이 번듯한 사람들이 많다 하여 유명하지만 순천만의 갈대와 짱뚱어탕도 널리 알려져 있다.
순천이 자랑하는 관광지가 바로 순천만이다. 순천만에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순천만 습지가 있다. 순천만이 주목받는 것은 제10차 람사르 총회의 공식 방문지로 지정된 데다 ‘세계 람사르 습지 NGO 모임’이 순천에서 열리면서 유명해졌기 때문이다. 순천만의 연안 습지는 국내 최초로 2006년 1월 람사르 협약 습지로 등록되었다.
순천만 갯벌 © 순천시청
순천만에는 갯벌과 갈대, 철새가 조화를 이룬 습지가 청정하게 보존되어 있는데,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순천만엔 연간 2백 여 종의 철새 6만~7만 마리가 찾아오고, 이 중 검은머리갈매기와 큰고니 등은 멸종위기종”이며, “많은 갯벌이 개발에 밀려 훼손됐지만 순천만은 원형이 잘 보전된 상황”이다.
넓게 펼쳐진 갈대밭 사이로 보이는 순천만의 제방이 우리 시대의 빼어난 소설 중의 하나인 김승옥의 『무진기행』의 무대가 되었다.
모든 것이 선입관 때문이었다. 결국 아내의 전보는 그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이, 흔히 여행자에게 주어지는 그 자유 때문이라고 아내의 전보는 말하고 있었다.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이 세월에 의하여 내 마음속에서 잊힐 수 있다고 전보는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처가 남는다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랫동안 우리는 다투었다. 그래서 나는 전보와 타협안을 만들었다.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외롭게 미쳐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다. 꼭 한 번만.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약속한다. 전보여, 새끼손가락을 내밀어라. 나는 거기에 새끼손가락을 걸어서 약속한다. ······
“당신은 지금 무진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어디선가 나도 그와 같이 길가에 세워진 팻말을 볼 수 있을 것인가?
조계산 서쪽 기슭인 송광면 신평리에 자리한 송광사는 우리나라 불교 조계종의 본산이며, 조선 초기까지 보조국사 지눌과 진각국사 혜심을 비롯한 국사 16명을 배출했던 곳으로 ‘불’의 통도사, ‘법’의 해인사와 더불어 ‘승’의 절로 꼽힌다. 이 셋을 삼보 사찰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전통을 이으려는 듯 절에 깊숙이 틀어박혀 수도에만 몰두하는 스님들이 적지 않다.
송광사 © 유철상송광사는 우리나라 불교 조계종의 본산이며, 조선 초기까지 보조국사 지눌과 진각국사 혜심을 비롯한 국사 16명을 배출했던 곳으로 ‘불’의 통도사, ‘법’의 해인사와 더불어 ‘승’의 절로 꼽힌다. 이 셋을 삼보 사찰이라고 한다.
이 절터는 원래 신라의 혜린스님이 길상사라는 조그만 암자를 지었던 곳인데, 고려시대인 1204년에 보조국사가 이곳에 절을 크게 일으켜 세우면서 송광사가 되었다. 여러 차례 전란을 거치면서, 특히 한국전쟁 때 옛 절은 거의 다 불타 없어졌다. 한때는 크고 작은 건물이 72채나 딸렸을 만큼 규모가 컸다. 그러나 근래 들어 많이 복구되었다. 송광사에는 국보 세 점, 즉 국보 제42호인 목조삼존불감, 국보 제43호인 고려 고종의 제서(梯書), 국보 제56호인 국사전(國師殿)을 비롯하여 보물 제90호인 『대반열반경소(大般涅槃經疏)』와 보물 제176호인 금동요령(金銅搖鈴) 같은 보물 12점을 간직하고 있어 절의 오랜 역사와 빛나는 전통을 미루어 짐작하게 해준다.
한편 조계산의 동남쪽 기슭인 쌍암면 죽학리에는 태고종의 본산이며 보물 제400호로 지정된 쌍무지개다리, 즉 승선교(昇仙橋)로 유명한 선암사가 있다. 백제 성왕 때인 529년에 아도화상이 지었던 그 근처의 한 암자에서 역사가 시작되었고, 고려 때 대각국사의 힘으로 크게 중창되었다고 알려진 선암사는 일주문, 팔상전, 대웅전, 원통전, 불조전 같은 32채의 건물들도 아름답지만 병풍처럼 둘러쳐진 조계산의 풍광을 보배로 삼고 있다. 고려 명종 때의 문신인 김극기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적적한 산골 속 절이요, 쓸쓸한 숲 아래 중일세.
마음속 티끌은 온통 씻어 떨어뜨렸고
지혜의 물은 맑고 고요하기도 하네.
선암사의 들목에 비껴 선 삼인당(三印塘)은 남북국시대에 달걀꼴로 만든 연못으로 가장자리를 돌로 쌓았으며 가운데에 섬이 있는데, 호남 지역 전통 연못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런가 하면 이 절의 깊숙한 서고에는 대각국사가 그린 선암사 설계도가 있고, 평생에 걸쳐 방석 만드는 일을 기도하는 일로 여기고 손일을 하다가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해봉스님이 삼과 왕골로 엮었다는 해진 방석도 있다. 이 방석은 조형과 무늬가 우리나라 전통 예술에 맞닿아 있으면서도 현대 감각을 휘어잡을 만큼 아름답다.
봄이 가장 아름다운 선암사에는 몇백 년 나이를 먹은 매화나무 수십 그루와 영산홍 아홉 그루가 있다. 그래서 해마다 3월 하순에서 4월이면 온 경내가 매화 향기로 그윽하고, 5월이면 동백과 옥잠화, 영산홍 꽃의 그 붉으면서도 빨갛지 않은 빛깔이 답사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또한 9월이면 상사화가 절 구석구석에서 피어나 마음을 시리도록 아프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