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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마지막 노래(1)
신 32:1-14
1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
2 내 교훈은 비처럼 내리고 내 말은 이슬처럼 맺히나니 연한 풀 위의 가는 비 같고 채소 위의 단비 같도다
3 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전파하리니 너희는 우리 하나님께 위엄을 돌릴지어다
4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5 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고 삐뚤어진 세대로다
6 어리석고 지혜 없는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네 아버지시요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 그가 너를 만드시고 너를 세우셨도다
7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
8 지극히 높으신 자가 민족들에게 기업을 주실 때에, 인종을 나누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백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9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
10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11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12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13 여호와께서 그가 땅의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시며 밭의 소산을 먹게 하시며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서 기름을 빨게 하시며
14 소의 엉긴 젖과 양의 젖과 어린 양의 기름과 바산에서 난 숫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밀을 먹이시며 또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게 하셨도다
신 32:1-14 / `나는 하늘을 증인으로 불러 말하며 또 땅을 증인으로 불러 놓고 입을 연다. 2) 내 말은 빗방울처럼 쏟아져서 메마른 땅을 적시고 이슬처럼 방울방울 풀잎에 맺히고 소나기처럼 모든 초목 위에 쏟아지고 단비처럼 연한 풀잎 위에 내린다. 3) 내가 이제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 그분을 모셔 오리니 그대들은 우리의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여라. 4) 반석같이 튼튼하게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 무슨 일을 계획하고 실천하시든지 언제나 안전하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어느 누구도 속이지 않으시는 하나님, 언제나 진실하셔서 말씀하신 그대로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시다! 5) 그러나 이 백성은 지조가 없고 비뚤어진 것들이 되었다. 완전히 종자가 달라져 버렸다.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도록 뒤틀리고 배배 꼬여 버렸다. 6) 이것이 여호와께 보답하는 꼴이냐? 미련하여 깨닫지 못하는 족속아! 하나님은 너희를 창조하시고 아버지처럼 너희를 돌보아 튼튼하게 키워 주신 분이 아니시냐? 7) 먼 옛날을 기억해 보고 대대로 내려 온 시대를 더듬어 보며 본래 너희가 어떤 족속이었던가를 너희 부모에게 물어 보고 너희가 어떻게 선민이 되었는가를 노인들에게 물어 보아라. 8) 그러면 그들이 가르쳐 줄 것이다.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세계 만민에게 땅을 나누어 주시고 족속들을 구분해 놓으시며 민족들에게 나라를 지정해 주시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도 그 지파대로 땅을 나누어 주셨다. 9) 그런데 여호와께서 특별히 야곱의 자손을 선택하여 자기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자신의 유산으로 삼으셨다. 10) 야곱의 자손들이 광야에서 맹수들에게 포위되어 어찌할 바를 모를 때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보시고 안전하게 보호해 주시며 마치 눈동자처럼 보호해 주셨다. 11) 독수리는 새끼들을 둥지에서 떨어뜨려 스스로 나는 것을 가르칠 때에 항상 새끼들 위에서 감시하고 지쳐서 떨어지는 새끼가 있으면 그 밑으로 날갯죽지를 펴 받아서 안전하게 다시 둥지에 내려 놓는다. 12) 이와 똑같이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가르치고 보호해 주셨다. 주께서 홀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셨다. 어느 다른 신도 그들을 도와준 일이 없었다. 13) 그 다음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기름진 땅을 정복하게 하시고 들녘에 곡식을 심어 먹으며 바위틈에서 꿀을 따며 돌짝밭에 올리브나무를 심어 그 기름을 짜먹게 하셨다. 14) 그들은 소와 양의 젖을 마시고 바산에서 자란 숫양과 염소 고기를 먹고 제일 좋은 곡식으로 떡을 구워 먹고 달고 붉은 포도주를 마셨다.
신명기 32장은 모세의 노래입니다. 모세는 죽기 직전에 이 노래를 모든 백성에게 가르칩니다. 노래의 목적은 약속의 땅에 들어간 후 백성이 언약을 범하였을 때 이 노래를 통해 다시금 하나님과의 언약의 소중함을 깨닫고 돌아오게 하기 위함입니다.
서론(1-4) 모세는 하늘과 땅을 소환합니다. 하늘과 땅은 모든 피조물의 대표자로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신실한 은혜에 대한 증거자들입니다(시 19:1). 모세는 이 노래를 교훈이라고 표현하며, 이 노래가 비, 이슬처럼 부르는 자들에게 생명을 준다고 말합니다. 거룩한 노래는 죄인들에게 비와 이슬처럼 영적인 생명을 줍니다. 이어서 모세는 여호와의 이름과 위엄을 선포합니다. 반석은 영속성과 안정성을 상징하는 이미지로서 언약을 반드시 이루시는 여호와의 완전한 성품을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완전함과 진실함으로 자기 언약백성을 끝까지 책임지십니다.
고발(5-7)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간 후 언약을 깨뜨릴 것을 기정사실화합니다. 곧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간 후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할 것을 모세가 내다보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배신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아버지, 창조자, 그리고 그들을 그 땅에 세우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이스라엘 자손이 언약을 깨고 이방신들을 숭배합니다(삿 2:1-2). 그때에 젊은 세대는 이전 세대의 어른들에게 물으라고 권합니다. 즉, 출애굽과 광야생활, 가나안 정복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이전 세대를 통해 알아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어찌 그리도 빨리 잊어버리는지요.
자기 백성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8-14) 바벨탑 사건 이후 지구상에 수많은 민족과 인종이 있었지만 여호와께서 언약백성으로 택하신 민족은 오직 이스라엘뿐입니다(8-9). 또한 언약의 종주(Suzerain)이신 여호와께서 봉신(vassal)인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신실하게 인도하셨습니다. 광야에서 그들을 눈동자 같이 지키셨고(10), 독수리가 새끼를 날개에 업어 인도하듯이 무력한 이스라엘 백성을 대적들 가운데서 안전하게 인도하셨습니다(11-12). 또한 “땅의 높은 곳”은 바산 왕 옥을 물리치고 차지한 요단 동편의 바산 고원을 말합니다(13). 이곳은 매우 비옥한 땅으로 여기서 나는 밭의 소산, 꿀, 기름, 가축의 젖, 고기, 밀과 포도즙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먹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적용: 하나님을 반석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그의 성품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보세요.
모든 그리스도인의 본래 목적은 예배입니다. 우리는 회심한 자를 얻은 즉시 그를 일꾼으로 세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우선 예배드리는 법을 배우고 그 다음으로 일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감격하며 큰 기쁨으로 경외하는 마음을 담아 예배하는 사람들을 일꾼으로 사용하셔서 큰일을 이루십니다.
< 설 교 >
독수리 새끼같이
신 32:11-12 / 조용기 목사
할렐루야~ 주께서 나와 같이 계십니다. 따라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같이 계시면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서론>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읽으신 하나님 말씀 가지고 “독수리 새끼같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에는 우리 성도들을 독수리에 비유해서 말씀한 곳이 굉장히 많습니다. 세상에 독수리가 있는가 하면 하늘나라 독수리는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 예수 믿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독수리는 보면은 날 때 날개를 별로 치지 않습니다. 그냥 있는데서 흐르는 기류에 올라타기 위해서 날개 몇 번치고 그 다음에는 몇 시간이고 날개를 펼치고 있습니다. 저것 보십시오. 그런데 때를 지어서 날라다니는 법이 없습니다. 언제나 홀로 날지 외롭게 상승기류를 타고 나릅니다. 참새떼들은 떼를 모아서 짹짹짹짹짹 하고 요란스럽고 시끄럽고 함께 우르르 몰려다니지 않습니까? 참새 떼는 세상 사람들을 비유하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모이고 얽히고 섥히고 밀고 당기고 복잡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가 인정하든 인정안하든 그 마음속에 하나님 나라가 있고 하나님 나라에 그가 외롭게 하나님과 대화하는 시간과 장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 마음 속에 하늘나라를 갖고 있고 하늘나라 속에 독수리처럼 고독하게 하나님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있는 것입니다. 이 독수리는 일반새들과 틀린 것은 독수리는 회갑이 되면은 재회춘합니다. 독수리의 일생이 80년쯤 삽니다. 그런데 독수리 나이가 40이 되면은 입부리가 굳어져 가지고서 입을 잘 놀릴 수가 없어요. 그리고 발톱이 다 너무 석고가 되어 가지고서 짐승을 움켜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대로 있으면 얼마 안있으면 죽습니다. 그래서 40년쯤 되면은 독수리가 산속 깊은 바위에 가서 자기의 털을 전부 다 벗습니다. 입으로 털을 다 뽑아냅니다. 날개나 몸에 있는 털을 다 뽑아내고 발가벗게 됩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그 주둥이를 바위에다 쳐서 피가 철철 흐리면서 입부리가 뽑힙니다. 뽑혀 버립니다. 그러면 발톱을 쳐가지고서 다 뽑습니다. 그러면 완전히 벌거벗은 알몸뚱이 독수리가 됩니다. 그러는 동안에 친구 독수리들이 먹이를 갖다 주어서 그것을 먹고 40일 동안 아무것도 안하고 해만 쳐다보고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40일이 지나면 입부리가 새로 나옵니다. 발톱이 새로 나오고 몸의 털도 새로 나와서 완전히 청춘을 회춘을 해요. 그래서 아주 포효를 하는 높은 외침을 가지고서 높이 하늘로 솟아 올라가서 다음 40년을 용감하게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수리는 새 회춘을 하므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기다리는 시간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성령으로 새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피곤하고 지칠 때도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있으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새 힘이 와요. 야훼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해도 피곤치 않고 걸어가도 곤비치 아니하리라는 이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피곤할 때는 기도 안해도 하나님 앞에 그냥 기다리고 앉아만 있어도 성령께서 여러분을 새롭게 하는 역사를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본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독수리가 새끼를 낳아서 길러서 장성하게 만들어 내보낼 때까지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어떻게 섭리하는가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독수리는 둥지를 먼저 지어야 알을 낳고 새끼를 깔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독수리가 둥지를 지을 때는 가만히 보면은 찔레 가시 있는 그런 나무를 구하러 다닙니다. 찔레 나무에 가서 가시를 뜯는다고 발톱에 피가 나고 얼굴이 찢기고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가시넝쿨, 찔레 이런 것을 가지고 둥지를 만들어요. “도대체 저런 놈이 어딨냐? 가시를 둥지를 가지고 둥지를 만드는게 어디 있느냐?” 그래도 아무 말도 안하고 완전히 가시로 둥지를 만들기 때문에 “저 누가 들어가서 살 수 있겠느냐?”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 다음에는 이 독수리가 밖으로 날라가서 토끼를 잡고 쥐, 이런 동물들을 잡아서 알맹이는 핥아내고 그 껍데기를 자기 둥지에다 깝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가시가 스물스물하던 둥지가 완전히 가죽으로 깔고 거기에다 짐승 새나 꿩이나 닭이나 잡고 와서 그 털을 전부 뜯어가지고서 위에 푹신푹신하고 하니까 힐튼호텔 일등 침대 저리가라 합니다. 아주 멋있는 호텔방 침대같이 만들어 놓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가시둥지입니다. 가시둥지를 그와같이 만들어 놓고 그 위에 알을 낳고 새끼를 까서 새끼를 기릅니다. 새끼는 밑에 가시 둥지인줄 모릅니다. 어미가 갖다 주는 것을 열심히 먹고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의 한 비유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우리를 키우실 때 우리에게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나게 해주시고 기도응답 해주시고 축복도 해주시지만 사실은 알고 보면 가시둥지 안에 들어 있습니다. 언제고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시키려고 생각하면 우리를 가시둥지에 물어 놓아 버리는 것입니다. 가죽을 벗겨 버리고 털을 흩어버리면 가시둥지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축복을 받을 때 하나님을 경건하게 모시고 하나님 뜻을 받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는 것만큼 또한 하나님은 거룩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진노하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무리 좋은 아버지라도 화를 내는 때가 옵니다. 자식이 계속해서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면 아버지가 화를 내지요. 화를 낼 줄 모르는 아버지는 인형의 아버지입니다. 항상 웃기만 하고 항상 좋기만 하면 그게 무슨 아버지가 됩니까? 자녀들에게 잘하지만 노할 줄도 알고 꾸중할 줄도 알고 징계 할줄도 알아야 됩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노하고 징계하는 하나님입니다. 그것이 바로 가시둥지 안에 새끼를 키우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부드럽고 한없이 편안하고 좋은 침대지만 그 밑에는 가시가 스물스물 나있다. 언제든지 원하면 그 가시둥지 속에 집어 넣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항상 감사하고 찬송하고 경건하게 따라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축복만 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하나님 뜻을 따라 거룩하게 살기를 간절히 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욥기 39장 27절로 29절에 보면 “독수리가 공중에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어찌 네 명령을 따름이냐 그것이 낭떠러지에 집을 지으며 뾰족한 바위 끝이나 험준한 데 살며 거기서 먹이를 살피니 그 눈이 멀리 본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열심히 새끼를 기르면 나중에 새끼가 상당히 커지지. 이제 어미가 볼 때는 공중에 날 수 있을 정도로 날개도 자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날개를 완전히 잡아당겨 보고 그 몸통을 보고 이만하면 독수리가 밖으로 날라 갈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갑자기 하루 어미가 둥지 곁에 앉으면서 날개를 쫘악 폅니다. 그 새끼들이 놀라서 보고 있는데 “올라타라. 너 올라타라. 올라타.” 전부다 움츠려들어요. 안 올라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독수리 부부는 먹이를 사냥해 와서 바로 그 둥지 곁에 둘이가 열심히 서로 나누어 먹고 새끼들에게는 안줍니다. “굶어봐라.” 금식기도 시키는 것입니다. 이 새끼들을 기가 막힌다 말입니다. 아휴 안 먹여 주니까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어요. “배고프지?” 그 다음 또 날개를 쭉 펴고 “올라 오너라. 날개 위에...” 몇 번 거절을 하다가 나중에는 정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으니까 그중에 용감한 새끼 한놈이 “이판저판 사판이다. 날개 타고 날라 가다가 떨어져 죽으나 굶어죽으나 죽는 것은 한가지이니까 날개 타보자.” 용감하게 날개 위에 올라갑니다. 그러니까 둘째 놈, 셋째 놈, 넷째 놈 날개 위에 다 올라 탔어요. 그러더니 휭하고 하늘로 올라가서 큰 산과 개천과 강과 집들을 구경시켜 주고 빙 돌아서 바위 위에 오니까 거기에 짐승을 잡아서 이미 요리를 해 놓았어요. 그 요리를 잘 먹고 그 다음 날개 위에 태워 또 둥지로 데려와요. 아 그러니까 이것 참 좋다 말입니다. 그냥 날개만 타는 것이 아니라 맛있는 것까지 주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그 다음에는 둥지에 와보고 하나 놀란 것은 그렇게 좋던 둥지에 부드러운 가죽이 다 없어지고 가시둥지가 되어 있습니다. 다시는 둥지를 사랑하지 못하게 완전히 가시 둥지를 만들어서 둥지에 새끼들을 밀어 넣으니까 전부 새끼들이 고함을 치고 안들어 가려고 하고 어머니 날개 위에 올라타려고 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 믿음, 목사님의 믿음, 아버지 어머니의 믿음, 구역장 믿음, 지역장 믿음, 우리 장로, 집사님들의 믿음에 의해서 저들의 도움으로 예수를 믿고 기도도 하고 찬송도 하고 그렇게 하다가 이제 자랄만한 때 자기 스스로 기도도 하고 감사도 하고 믿고 소망 사랑을 가질 수 있게 되면은 하나님이 자꾸 네가 스스로 하라고 합니다. 기도도 네가 스스로 해라. 찬송도 스스로 해라. 전도도 좀 네가 해라. 안하겠다고 합니다. 나는 그것 나 못한다고.. 그럴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우리를 가시둥지 속에 밀어 넣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여러 가지 시련과 고통이 다가오고 그 다음에는 금식을 시키는 것입니다. 문제가 해결이 안되고 고통이 다가오고 괴로움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타락하기는 늦었고 내가 하기는 싫고 그런 시련을 겪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반드시 우리가 있는 처소가 가시 둥지가 되고 우리의 환경에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다가오면 하나님께서 독립하라는 것입니다. 자립하라. 네 개인적인 믿음을 가져라. 개인적인 소망과 사랑을 가져라. 개인적으로 철야기도도 하고 예배당에도 나가고 기도원 기도도 해라. 독립하라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32장 11절로 12절은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야훼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독수리 날개로 가시 둥지에 데리고 왔습니다. 광야는 가시둥지입니다. 그러나 가시둥지에 하나님이 같이 계시므로 바위에서도 물이 솟아오르고 만나도 내려오고 필요한 것은 다 공급이 되는데 실상은 가시둥지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반역하면 하나님이 그 부드러운 털을 제하여 버리고 가죽을 제하여 버리니까 광야에서 먹고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우성을 치지요.
신명기 8장 2절에 보면 “네 하나님 야훼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시험을 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받고 당분간은 굉장히 좋다가 좀 지나면은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가시둥지에서 건져내주는 것만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루는 날개를 타고 기분좋게 밑을 내려다 보는데 저 높은데 올라가서 어미 독수리가 확 날개를 낮춰 버립니다. 날개를 오므려 버리니까 날개를 붙잡고 있던 새끼들이 그냥 돌맹이처럼 떨어지는 것입니다. 떨어지면서날 살리라고 고함을 치면서 열심히 날개를 칩니다. 그러니까 조금 날라가는 놈도 있고 돌맹이처럼 그냥 직선으로 떨어지는 놈도 있습니다. 그러면 아버지가 떨어뜨리면 어머니 독수리가 밑에 가서 떨어지는 것을 받고 받아서 살려줄 줄 아는데 올라가서 또 떨어뜨립니다. 그러면 아버지 독수리가 또 와서 받고.. 하루 종일 낙하산 훈련을 합니다. 죽을 지경입니다. 하루 종일.. 이렇게 어떻게 사느냐. 왜냐, 아직까지 바람을 탈줄 모릅니다. 자기 날개로만 날려고 하니까 굉장히 힘이 듭니다. 독수리는 2시간, 3시간 공중에 떠있는 것은 기류를 타고 자기 힘으로 날지 않습니다. 바람 힘으로 나는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를 잘 믿고 신앙이 깊어진 사람은 성령충만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삽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 모든 것이 성령 바람타고 성령이 24시간 우리와 같이 계셔서 우리를 돕고 계신 것입니다. 보혜사라는 것은 우리를 돕기 위해서 항상 우리 곁에 와 계신 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4시간 성령바람 탈 수 있어야 진짜 믿는 사람입니다. 기도도 성령의 능력으로 하고, 전도도 성령의 능력으로 하고, 즐거움도 성령의 능력으로 즐거워하고, 성령 바람을 탈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성령바람을 타지 못하는 이 독수리 새끼는 날개 힘으로 자기 힘으로 납니다. 자기 힘으로 믿고 자기 힘으로 소망을 가지고 자기 힘으로 살아가려니 죽을 지경이지요. 그 독수리는 보통 날개를 펴서 하늘 날아 5천 미터까지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높이 날라올라 가는데 참새 보고 5천미터 올라가라고 해보십시오. 올라가기도 전에 죽어 버립니다. 참새는 요 울타리에서 저 울타리까지 땅 하면 헉헉헉헉~
한 50미터, 100미터 날라가서는 가슴이 터지려고 합니다. 그것은 왜냐, 자기 힘으로 날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 가장 큰 문제가 독수리 신자가 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참새 신자가 되어 있다. 모두 자기의 힘으로, 자기의 능력으로, 자기의 노력으로 인생을 살아가려고 하니까 그렇게 힘이 드는 것입니다. 사람의 힘은 한계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령이 와서 상승기류처럼 불고 있으면 성령바람 타면은 얼마든지 높이 올라갈 수 있고 힘 안든다 말입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을 내가 보면 하나님이 축복의 성령바람을 불게 해 놓으셨어요. 좋은 일이 많이 생기지 않습니까?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될 수 없는 G20 선진국 20개국에 상임국이 되었고, 또 엄청난 원자로를 건설할 수 있는 특권도 얻게 되었고 또 원조를 받던 나라가 원조를 하는 나라가 되었고..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우리 한국 사람들의 GNP가 개인당 60불에서 100불이었습니다. 아프리카 여러 나라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불과 50~60년 만에 60불에서 100불 되던 GNP가 2만불이 되었습니다. 상승기류를 안타고는 인간의 힘으로는 안되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배도 제일 많이 만들고, IT산업도 제일 잘하고, 자동차도 열손가락에 들어가고 철강도 포항제철로 시작해서 세계적인 철강회사가 되고 뭐 한국 요새 무엇을 해도 열째 안으로 하나님이 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새하고는 틀리지 않습니까? 우리는 참새 아니고 독수리 새끼들인 것입니다. 이 독수리 새끼들은 날개로써 날면 안됩니다. 바람타고 날아야지.. 성령의 바람 타야지.. 하나님이 성령이 우리 한국에 역사할 때 교회도 잠에서 깨어나고 우리 국민들도 잠에서 깨어나서 성령바람타고 나가면 기적이 모든 것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욥기 23장 10절에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하나님께서 남의 믿음이 아닌 자기 믿음에 서도록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날개 위에 올라타서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날개로 날으며 자기 스스로 먹이를 취하는 새끼가 되도록 키우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미 독수리가 새끼 독수리를 키워 가지고서 이제 얼마 안있으면 어미 독수리가 새끼 독수리를 거느리고 함께 납니다. 함께 날고 함께 사냥을 하고 함께 먹고 아주 단란한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신명기 8장 14절로 16절 우리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야훼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야훼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따라 말씀하세요. 하나님은 마침내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다. 마침내 너를 망하게 하는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믿을수록 마침내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복 주는 훈련 시키려고 가시둥지에 자라나게 하고 날개 위에 올라타고 떨어지게 하고 시련을 주는 것은 마음이 변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서 살아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부끄러움이 없게 자라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든 권한을 다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낮추시며 우리를 시험하사 마침내 복을 주려 함이라. 예수 믿는 사람은 끝장이 좋습니다. 너희 시작은 미미하나 끝은 창대하리라. 출발은 미약하나 끝은 1등으로 들어옵니다. 주를 믿는 사람은 개인이나 가정이나 세월이 흘러갈수록 더 나아지지 못해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서양 격언에 “참호 속에는 무신론자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전쟁 시 군인들은 적군의 총탄이 빗발처럼 날아 오는데 참호에 엎드려서 그냥 하나님 살려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테레사(Agnes Gonxha Bojaxhiu) 수녀는 “고통은 성장의 법칙이요, 우리의 인격은 이 세계의 폭풍우와 긴장 속에서 만들어 진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어미 독수리가 새끼를 날도록 하기 위해 하늘에서 떨어뜨리듯, 하나님께서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을 40년 동안 광야 시험을 치루게 한 것은 더욱 굳건한 믿음에 서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마침내 복을 주는 것입니다. 굳건한 자기 믿음에 서도록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자유롭게 기도하고 스스로 믿음을 가지고 스스로 소망을 가지고 스스로 사랑을 가지고 평안을 마음 속에 누리면서 살 수 있게 만들어 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 하늘나라에 귀한 용사로써 살아갈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 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고난 안당할 사람 누가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우리의 삶이 가시둥지입니다. 예수 안믿는 사람 말할 필요없고 예수 믿는 여러분 우리가 사는 것도 하나님이 가시둥지 위에 우리를 지금 살려놓고 있는 것입니다. 가시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 가시가 우리를 찌르지 않도록 가죽을 덮어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를 이기게 만들어 주는 것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시를 극복하고 이기게 만들어주지 가시가 없는 세계를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가정에도 가시가 있고 개인에게도 가시가 있고 남편에게도 아내에게도 자녀들에게도 우리의 생활에도 전부다 가시가 있습니다. 가시 둥지에서 우리가 살아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의지하는 신앙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폭풍우가 늘 다가오는 것입니다. 인생 풍파 없는데가 어디 있습니까? 다 인생풍파 있습니다. 여러분, 아무도 나는 인생풍파가 없다고 자신하는 사람 있습니까? 없어요. 다 인생풍파가 있어요. 그런데 독수리 어미는 새끼에게 풍랑을 당하면 오히려 풍랑을 의지해서 더 빨리가고 더 높이 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불어오는 바람에 의지하여 독수리는 더 높이 날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새끼들을 데리고 바위 끝에 데려갑니다. 폭풍이 와서 막 바람이 불고 집이 물에 떠내려가고 하천이 범람하고 야단입니다. 그렇게 되면 독수리는 새끼들에게 날개를 90도로 펴도록 만듭니다. 바람을 정면으로 부딪치도록 날개를 90도로 펴도록 하고 그 다음에는 발로 꽉 바위를 잡고 있다가 하나, 둘, 셋 해서 바위에서 발을 뗍니다. 그러면 90도로 바람이 날개에 부딪치니까 직각으로 하늘로 솟아 올라가는 것입니다. 바람은 부는데 독수리는 직각으로 하늘로 구름을 뚫고 와서 얼마 있지 아니하면 구름 위에 폭풍우도 없고 비도 내리지 않고 햇빛이 쨍쨍 쬐는 곳에 떼를 지어 날게 되는 것입니다. 더 높고 깊은 신앙을 갖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폭풍우를 통하게 하는 것입니다. 폭풍이란 바람이 불어오면 그 바람 타고서 우리는 더 높고 더 깊이 가야 되는 것입니다. 폭풍우를 당해서 신앙이 약해지고 뒤로 물러가고 무너지면 그것은 잘못된 신앙인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같이 계셔서 폭풍우가 우리 생활에 굉장히 큰 축복의 근원이 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창공 높이 오르게 되면 날개를 넓게 펴서 공기의 상승기류(上昇氣流)를 타고 하늘을 나는 것처럼 독수리는 언제나 바람타는 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한쪽 바람은 믿음이고 한쪽 바람은 소망인 것입니다. 한쪽 바람은 꿈이고 한쪽 바람은 희망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가지고 기도와 믿음으로 항상 역경을 타고 우리는 승리하는 것입니다. 독수리는 바람을 탈줄 알기 때문에 폭풍우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폭풍이 불어와도 바람에 의지하여 더 높고 더 깊은 공중으로 날라 올라가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우리에게 개인, 가정, 생활, 자녀, 사업, 여러 가지 폭풍우가 다가오면 옛날에는 두려워했지만 이제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 우리는 그 폭풍우가 선으로 변할 수 있는 믿음의 날개, 소망의 날개, 꿈과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다 날개가 있습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믿음의 날개가 있습니다. 소망의 날개가 있습니다. 사랑의 날개가 있습니다. 필요할 때 그 폭풍에 따라서 내 날개를 펴면 그 폭풍우는 우리 신앙 생활하는 사람은 그 폭풍우가 더 높이 더 빨리 날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요셉이 17살에 형들에게 팔려서 종으로 애굽에 내려갔습니다. 굉장히 개인적으로 불행한 폭풍우입니다. 그러나 그 폭풍우를 맞이해서 요셉이 낙심을 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의지한 결과에 10년 종살이에 3년 감옥살이가 합동하여 유익이 되어서 평생을 국무총리로 지내게 만든 것입니다. 순식간에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폭풍우가 보통 사람 같았으면 종으로 영원히 있든지 감옥살이를 영원히 하든지 자살하던지 해버릴 것인데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서 폭풍우를 당하니까 그 폭풍우가 그로 하여금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도록 만들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폭풍우를 무엇을 가지고 대하느냐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폭풍우를 통과해서는 안됩니다. 일반사람들은 폭풍우를 통과하는데요. 고난의 폭풍우가 다가오면은 야고보서 1장 3절로 4절에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폭풍우가 우리를 부족함이 없는 인격자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3절로 4절에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
폭풍우가 불어오면 닭은 어떻게 합니까? 닭은 날개 밑에 머리를 집어 넣고 폭풍우를 피해서 나무 밑이나 담벼락 밑이나 지붕 밑으로 도망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독수리는 폭풍우가 다가오면 절대로 날개 밑에 머리를 숨기고 담 밑에나 지붕 밑에 숨어 피난가지 않습니다. 정면으로 폭풍우를 대면해 나가서 날개를 펼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바람 타고 구름 위로 올라가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폭풍우가 다가오면 원망, 불평, 탄식하고, 뒤로 물러가고,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정면으로 대결해서 기도하는 것이 대결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우리가 기도합니다. 왜, 성경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고 말했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했었습니다.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보여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게 다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믿음의 날개인 것입니다. 믿음의 날개, 소망의 날개, 사랑의 날개 이 성경에는 우리가 사용하는 날개가 다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어떠한 폭풍우가 불어와도 거기에 처방할 수 있는 날개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성경의 말씀을 받아가지고서 폭풍우와 정면으로 대결해야 되는 것입니다. 폭풍우를 피해서 도망을 치면 안되는 것입니다. 정면으로 대결하면 그 폭풍우가 우리를 도와서 우리가 가고 싶은 곳에 더 빨리 가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풍랑이 일어서 우리가 더 빨리 목적지에 도달하고 더 빨리 성공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닭형 인간”이 되어서 사태에 대처하지 못하고 도망치지 말고 “독수리형 인간”이 되어서 담대하게 기도와 믿음을 대처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 생활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독수리는 불어오는 바람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 바람에 의지하여 더 높이 날아오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려움과 고난의 폭풍이 몰려올 때 두려워하여 피하지 말고 오히려 담대하게 맞설 때 놀라운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어려움과 고난을 당할 때 우리가 움츠리고 집에 들어가서 이브자리 깔고 머리띠 묶고 눕지 말고 기도원으로 가요. 기도원으로... 보따리 하나 들고 기도원으로 가서 기도원에서 철야하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 안나오거든 앉아 있어도 좋아요. 그냥 앉아 하나님만 쳐다봐도 재생의 능력이 나타날테니까. 이것이 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독수리로 자라서 이 땅에 살면서 우리는 환경을 극복하고 환경을 이기고 마침내 승리하며 행복하게 살게 만들기를 원해서 그런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미국의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Paul Robin Krugman) 교수는「불황경제학」이라는 그의 책에서 불황에서 성공하기 위한 원리를 설명했습니다. 불행이 다가오거든 그는 말하기를 첫째, 모험정신, 개척정신을 가져라. 피하지 말고 어려움이 다가오면 모험정신, 개척정신을 가지고 대결하라. 둘째는,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미래지향적인 사고를 가져라. 과거에 내가 잘살았는데 과거에 내가 잘했는데... 과거를 보지 말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지고서 나가라는 것입니다. 셋째,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을 최대한 활용해서 노력을 하라. 우리 삶에 폭풍이 몰아칠 때 두려움으로 웅크리고 주저앉으면 폭풍에 휘말려서 뒹굴러갈 따름인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폭풍을 뚫고 정면 돌파할 때 더 높은 창공으로 날라 올라가는 것입니다. 야~ 저 사람 요사이 믿음이 왜 저렇게 좋냐. 왜냐, 폭풍우를 통과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와~ 저 사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는데 그 기도소리 들어봐라. 완전히 다른 사람 되었는데.. 알고 보면 고난을 통해서 그렇게 달라진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의 환경과 폭풍우를 당하면 그것을 닭처럼 피하거나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도망을 치는 사람은 결코 자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독수리같이 담대하게 날개를 활짝 펴고 믿음의 날개, 기도의 날개, 꿈의 날개를 펴고 대결을 하고 달라들면 희안하게 그 폭풍우들이 합동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더 높이 날고, 더 깊이 날고 성령으로 날라 올라가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동남풍아 불어라 서북풍아 불어라. 가시밭의 백합화 예수 향기 날린다. 우리 최자실 목사님 늘 이렇게 춤추면서 그 찬송을 부르신 기억이 나는 것입니다. 우리 가만히 한번 뒤를 돌아 보십시오. 우리가 언제 기도 많이 했습니까? 환난당할 때, 언제 철야하고 기도원에 가서 기도했습니까? 고통스러울 때.. 등따숩고 배부를 때 뭘 했습니까? 잠 잤지요. 집에서 즐거워 했지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종종 고통을 보내는 것은 고통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독립적으로 운명과 환경을 다스리고 나갈 수 있는 독수리로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거대한 폭풍우 인류에게 반드시 한번 다가오는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 날 마지막 폭풍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 날이 이제 가까워 왔어요. 왜냐하면 우리 인간으로 계산을 하면 구약 4천년에 신약 6천년 다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언제 주님 오실지 우리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로 17절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우리가 공중으로 끌어올려 구름 속으로 구름을 통과해서 주님과 함께 항상 있는 영생으로 들어갈 날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마지막 폭풍인 것입니다. 마지막 폭풍우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의 날개를 활짝 펴므로 올라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은 산 속으로 바다로 도망을 치지만 도망이 그를 살려줄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는 천국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독수리가 새끼들을 데리고서 훈련을 다 시키고 난 다음에는 훈련 과정이 끝나면 어느날 갑자기 말합니다. “이제 너희들 짝을 지어서 가라.” 더 따라 다니지 마라 그러고 새끼들을 쫓아 버리는 것입니다. 가시난 둥지에서 새끼를 키워서 그곳에서 새끼를 나는 것을 가르치고 먹이를 잡는 것을 가르치고 폭풍우를 통하는 것을 가르치고 이런 것을 다 가르치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는 쌍쌍이 짝을 지어 내보내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여러분 우리 예수 믿게 하고 난 다음 그냥 우리를 내던져 놓지 않습니다. 우리를 신앙의 둥지에서부터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시련을 겪으며 폭풍우를 견뎌내며 괴로움을 극복하고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가르치는 역사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시도 쉬지 않고 성령으로 여러분과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24시간 성령바람 타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도 내 힘으로 하지 말고 성령바람 타고 기도하고, 전도도 성령바람 타고하고, 믿음도 성령바람 타고하고, 어려운 고난이 다가왔을 때 고난과 싸우는 것도 성령바람 타고하고, 참새 신자가 되지 말고 독수리 신자가 되자는 것입니다. 독수리는 몇 번 자기 날개를 치고 난 다음에는 곧장 바람타고 그 바람의 힘으로 몇 시간이고 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는데 출발할 때 여러분 힘을 조금 내어서 기도하고 난 다음에는 그 다음 성령바람을 타면은 아주 기름 부어서 기도가 자연적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저의 설교도 그래요. 아주 힘들고 피곤하고 고달플때도 강단에 서서 자기 인간의 힘으로 조금 설교를 하고 성령께만 죽도록 의지하면 성령이 올라 오셔서 인수인계를 받으면 그 다음에는 힘이 하나도 안듭니다. 우리가 불광동에 있을 때는 땅에 펌프를 박아놓고 펌프로서 물을 길렀는데 아무리 그냥 펌프를 눌러도 물은 안올라와요. 물 한 두 바가지를 위에 부어놓고 그 다음에 막 이러면 그다음 나중에 물이 푹푹푹 쏟아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한 물 두어바가지가 여러분의 노력인 것입니다. 여러분 노력을 조금하고 주의 성령바람을 타려고 하십시오. 성령바람 타면은 무엇이든지 피곤치 않고 고단치 않고 능력있게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녀들도 잘 기를 수 있고 사업도 잘할 수 있고 예배도 잘 드릴 수가 있고 전도도 잘할 수 있고 무엇이든지 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령 바람 타고 살지 인간의 힘으로 살기를 원치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40장 28절로 31절에 보면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야훼,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야훼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그러니까 모든 것에 하나님을 앙망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라는 것은 먼저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먼저 하나님께 맡기고 난 다음에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앙망하고 기도하고 믿고 의지하는 것이 바람을 타는 것입니다. 성령바람을 타는 것입니다. 그러면 “야훼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달음박질해도 곤비치 않는다. 그것은 생활이 어려워서 막 쫓기고 뛰어도 좌절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걸어가도 피곤치 않는다. 걸어가면 천천히 걸어가는 것 아닙니까? 사업도 잘되고 생활도 편안하고 좋아서 슬슬 걸어가면 이제 너무 피곤합니다. 인생이 이래 재미가 없냐. 슬슬 걸어가는데 재미가 없으니까 도박도 하고 술도 먹고 아편도 맞아보자. 그러나 주를 의지하고 성령바람 타고 나가면 잘살게 되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합니다. 그런 죄에 빠질 필요가 없습니다.
독수리 발톱의 은혜
신 32:10-12 / 김홍도 목사
전에 저를 금란교회로 파송해주신 고 이경재 감독님의 간증 가운데 “팔아먹은 은혜”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목사님이 학교에 다닐 때 공부를 잘했기 때문에 그 반에서 공부를 제일 못하는 학생이 연애편지를 써달라면 써주고 공부를 가르쳐 달라면 가르쳐 주었는데, 나중에 그 사람은 돈을 잘 벌어서 부자로 잘사는데 이 목사님은 전도사 생활을 하면서 너무나 가난해서 신혼생활에 땟거리가 없어 금반지도 팔아먹고 옷도 팔아먹고 심지어 놋대야도 다 팔아먹었다고 합니다. ‘저 형편없는 친구는 잘사는데 나는 왜 요 모양 요 꼴인가’ 하고 원망스러운 생각도 들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밤에는 하늘의 별을 쳐다보면서 찬송을 부르는데, “나의 모든 보배는 저 천국에 쌓였네. 나의 평생 자랑은 십자가뿐이로다” 하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부자 친구는 6.25 사변이 터졌을 때 재산 때문에 피난을 못 나왔고, 이경재 목사님은 가볍게 피난 나와서 축복 가운데 목회를 잘하며 잘살고 있다고 하시면서 “팔아먹은 은혜”도 있다고 하는 말씀을 감명 깊게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성경에 새 중의 왕이라고 하는 독수리 이야기가 여러 번 나옵니다. 특히 여호와 하나님을 독수로 비유한 말씀이 몇 번이나 나옵니다. 오늘 본문, 신명기 32장 11~12절에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한 말씀같이 독수리는 그 새끼를 모질게 훈련을 시킵니다. 절벽 바위틈에 집을 짓는데 제일 밑에는 가시나무 가지를 물어다가 얼기설기 둥지를 틀고 그 위에는 토끼 같은 짐승의 가죽을 덮고 그 위에 자기 가슴에서 털을 뽑아 푹신푹신하게 깔아놓고 알을 까서 부지런히 먹이를 물어다 키웁니다. 이제 웬만큼 자라면 새끼를 등에 업고 하늘 높이 올라가서 떨어뜨리면 새끼는 죽는 줄 알고 죽을 힘을 다 써서 날개를 파닥거리며 날아보다가 기진맥진하여 저 밑으로 떨어지려고 하면 어미가 지켜보다가 떨어지기 전에 쏜살같이 내려가 다시 등에 업고 높이 올라가서 또 떨어뜨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훈련시키려고 날갯짓을 하며 등에 업히라고 하면 푹신푹신한 둥지에만 앉아 있으려고 뒷걸음치며 새끼가 업히려고 하질 않는다고 합니다. 어미는 하는 수 없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부드러운 털도 흩어버리고 그 밑에 있는 짐승의 가죽도 들추어버립니다. 그러면 그 밑에 가시나무만 남으니까 찔려서 앉아있을 수가 없게 됩다. 그러면 하는 수없이 어미 등에 업혀서 나는 훈련을 받는다고 합니다. 어미 독수리는 그 새끼를 편안한 보금자리에 앉아만 있게 하지 않고 그 날카롭고 무서운 발톱으로 둥지를 다 흩어버리고 혹독한 훈련을 시킵니다. 본문 11절에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라고 한 말씀처럼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훈련시키시고 인도하신다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오늘날도 독수리와 같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우리의 안락한 보금자리를 무섭게 흩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건강을 흩어버려 장미빛 같던 얼굴이 창백해지며 건강을 잃기도 하고, 넓고 좋은 집에 살던 사람이 사업이 망해서 사글셋방살이를 하게도 되고, 반석같이 탄탄하던 사업이 하루에 부도가 나 무너지기도 하고, 수십 층 빌딩이 하루아침에 날아가 버리기도 합니다. 고통과 질병과 슬픔을 통하여 고통과 질병과 슬픔이 없는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면 안 되고 두려워하거나 낙심하면 안 됩니다. 그 무서운 독수리의 발톱이 하나님의 큰 은혜요, 축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경재 감독님 말씀대로 재물이 없어지는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시골에서 목회할 때 논에서 김을 매는 것을 보니까 뿌리가 지나치게 무성하고 깊이 뿌리를 내리면 손으로 끊어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땅 속 뿌리가 너무 무성하면 위에 있는 벼 이삭이 충실치 못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벼의 입장에서는 고통스럽지만 뿌리를 사정없이 끊어준다는 것입니다. 찬송가 534장 4절에 “큰 풍파 일어나는 것 세상 줄 끊음일세. 주께서 오라 하시면 내 고향 찾아가리” 하는 가사와 같습니다.
어느 맷오리 한 마리가 먼 나라를 향해 하늘 높이 날아가다가 너무나 배가 고프고 피곤하니까 혼자 떨어져서 쉬어가려고 어느 집 지붕에 내려 앉았습니다. 지붕에서 내려다보니까 마당에 자기와 비슷한 집오리들이 고생도 안 하고 편안히 먹고 잘 지내더랍니다. 그 맷오리가 주린 배나 좀 채우고 잠시 쉬었다 가려고 내려앉아 모이를 실컷 먹고 나서는, ‘조금만 더 쉬었다 가자’ 하고 하루 이틀 지나다보니 살이 뒤룩뒤룩 쪄서는 막상 날아가려고 해도 지붕 위에까지밖에 날 수가 없어서 포기하고 집오리들과 살다가 어느 날 잡혀서 오리구이가 되어 먹혀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과 달리 저 높은 곳, 천국을 향해 올라가야 합니다. “올라가. 올라가. 독수리같이…”. 여호와 하나님은 왜 독수리의 발톱같이 인정사정없이 보금자리를 흩어버리실까요?
1. 창공을 바라보게 하시려고
독수리 어미는 자기 새끼가 부드러운 보금자리에서 둥지 안만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원치 않고 높고 푸른 창공을 바라보고 힘 있게 날아오르기 원하기 때문에 그 날카로운 발톱으로 사정없이 보금자리를 헤쳐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도 이와 같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흉년을 맞아 국무총리가 된 요셉이 있는 애굽으로 이주해가서 편안히 살게 되니까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때에 요셉을 모르는 바로왕이 나타나 벽돌을 굽게 하며 채찍으로 내리치고 혹독한 노동을 시켰습니다. 그제서야 약속의 땅 가나안을 사모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출애굽기 3장 9절에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라고 했습니다. 애굽의 보금자리를 바로라고 하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흩어버리셨습니다. 이제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고 가나안 땅을 바라보게 되었고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부흥집회에 한 젊은 목사가 참석했는데 한쪽 눈이 돌아가서 잘 보지 못하더랍니다. 집회를 마치고 강사 방에 들어와 자기는 누이동생이 홧김에 집어던진 물건에 눈을 맞아 보지 못하게 되어서 그 후부터 누이동생을 걸핏하면 때리고, 비관하고, 폭악해져가고, 술만 퍼마셨는데 어느 날 교회에 나가 십자가를 발견하고 영의 눈이 열리게 되서 기쁨과 행복 가운데 살게 되었다고 하면서 “내 눈 하나와 그리스도와 바꾸었습니다”라고 하더랍니다. 패배와 실패를 당하여 “나는 별 수 없는 삼류인생이야” 하며 자포자기 하지 말고 눈을 들어 창공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큰 꿈과 기대를 가지고 멀리 바라보십시오.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린 것 같아도 사방이 꽉 막혀서 도저히 나아갈 길이 없어도 눈을 들어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이 절망적인 환경이 바뀔 것을 믿고 기대하십시오. 하나님께는 절망이 없습니다. 시편 121장 1~2절에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했습니다. 산과 바다와 별들을 창조하신 하나님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땅만 내려다보며 한숨만 짓지 말고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큰 기대를 가지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큰 기대와 소망을 품으라고 하십니다. “네 입을 넓게 열라”고 하십니다.
유명한 Oral Roberts 목사님은 언제나 시키는 인사말이 있습니다. “당신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Something good is goning to happen to you).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습니다. 바라는 것이 없고 기대하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도 어떻게 해 주실 수가 없습니다. 마귀는 시시때때로 찾아와 속삭입니다. “너는 별 수 없는 존재야. 네 인생은 끝장난 거야”, “너는 가방 끈도 짧고 특별한 재능이나 이렇다할 능력이 없지 않냐?”, 혹은 “너는 사실 가망이 없어. 기대하지 않는 게 좋아. 골치 아픈 세상 더 살 필요 없이 깨끗이 끝내버려”라고 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이런 마귀의 거짓말에 속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이 독생자까지 내어주신 귀한 존재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불안 마귀야, 의심 마귀야, 물러가라” 하고 꾸짖어 물리치고 “하나님, 나와 함께 하심을 감사합니다. 오늘날까지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앞길도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또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감싸고 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항상 나를 따라다니고 있음을 감사합니다” 하고 승리와 축복을 생각하십시오. 멋지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십시오. 암탉과 함께 모이를 쪼고 있는 한 독수리와 함께 하늘을 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눈을 들어 높은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독수리의 눈을 보십시오.
2. 믿음의 날개를 튼튼하게 하시려고
폭풍이 몰려올 때 다른 새들은 들어가 숨지만 독수리는 가슴을 펴고 그 폭풍을 타고 높이높이 오릅니다. 이렇게 새 중의 왕이 되려면 보금자리에만 편안히 있으면 안 되니까 독수리는 그 무서운 발톱으로 부드러운 보금자리를 사정없이 흩어버립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의 날개를 튼튼하게 하기 위해서 강제로 보금자리에서 나와 하늘을 날게 만드는 것입니다.
편안하면 믿음의 날개가 힘이 없습니다. 세상의 달콤한 것만 계속 먹으면 믿음이 약해집니다. 가끔은 즐거운 시간도 갖고 맛있는 것도 먹을 필요가 있겠지만 항상 맛있게 먹고, 편안하고, 육신쾌락만 추구한다면 영성이 쇠퇴합니다. 어려운 질병에 걸리거나 경제적으로 실패할 때, 사랑하는 식구가 위태로울 때,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기도하게 됩니다. 독수리는 폭풍이 불어올 때 그 폭풍을 타고 구름 위로 높이 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당하는 것이 좋아서 독수리의 발톱으로 보금자리를 흩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30~33절 “때리는 자에게 뺨을 향하여 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이는 주께서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실 것임이며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유익을 위해서 고난과 고통을 허락하시는 것이지 고통 받는 것이 좋아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또 시험 당할 때는 버림 당한 것 같고 도저히 일어날 수 없어 보이지만 반드시 이길 힘을 주십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의 지렛대를 활용하면 옮기지 못할 바위가 없습니다.
3.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시려고
부드럽고 폭신폭신한 보금자리면 의지하고 있던 새끼들이 무서운 발톱이 그 둥지를 다 흩어버릴 때 가시만 남아 찌르고 아프니까 마지못해 어미 등에 올라탑니다. 정말 새 중의 왕이 되는 길은 어미 등에 업히는 것인데 보금자리만 의지하고 안주하려들 때 하는 수 없이 무서운 발톱으로 보금자리를 흩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하나님 외에 사람이나 물질이나 권세를 더 의지할 때 괘씸히 여기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15일이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는데 40년이나 배회하며 광야에서 고생시킨 것은 하나님만 의지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광야에서는 집도 지을 수 없습니다. 즉시 세웠다 헐었다 하는 천막뿐입니다. 복덕방도 없고 은행도 없습니다. 슈퍼마켓도 없고 쌀가게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만나도 며칠 분씩 쌓아놓으면 즉시 썩어버립니다. 물질이나 사람이나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거나 사랑하면 안 된다는 것을 훈련시킨 것입니다. 최근 제가 만난 어느 목사님은 제일 사랑하고 믿었던 장로님이 갑자기 돌아가시더랍니다. 저도 헌금 많이 할 것이라고 믿고 의지했던 장로가 배신하므로 세계가 떠들썩하도록 고통과 시련을 당했습니다. 목사는 하나님만 의지해야지 사람이나 물질을 의지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17장 7절에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물질이나 재산을 아무리 쌓아놓아도 하나님이 부르시면 놓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안 먹고 안 쓰며 하나님께도 안 드리고 자식한테 물려줘봤자 다 쓸 데 없는 일입니다. 남편한테는 사랑 못 받았지만 자식한테는 효도 받으며 행복하겠지, 하지만 다 소용없는 일입니다. 친구도, 자식도, 아내도, 의지하지 마십시오. 세상 것은 의지한 만큼 상처를 받습니다. 영원히 실망시키지 않는 친구는 예수님뿐입니다. 만복의 근원 되신 하나님만 의지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참 만족을 주십니다. 할렐루야!
절대로 팔면 안 될 것들
신32:10-12 / 김홍도 목사
전에 저를 금란교회로 파송해주신 고 이경재 감독님의 간증 가운데 “팔아먹은 은혜”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목사님이 학교에 다닐 때 공부를 잘했기 때문에 그 반에서 공부를 제일 못하는 학생이 연애편지를 써달라면 써주고 공부를 가르쳐 달라면 가르쳐 주었는데, 나중에 그 사람은 돈을 잘 벌어서 부자로 잘사는데 이 목사님은 전도사 생활을 하면서 너무나 가난해서 신혼생활에 땟거리가 없어 금반지도 팔아먹고 옷도 팔아먹고 심지어 놋대야도 다 팔아먹었다고 합니다. ‘저 형편없는 친구는 잘사는데 나는 왜 요 모양 요 꼴인가’ 하고 원망스러운 생각도 들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밤에는 하늘의 별을 쳐다보면서 찬송을 부르는데, “나의 모든 보배는 저 천국에 쌓였네. 나의 평생 자랑은 십자가뿐이로다” 하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부자 친구는 6.25 사변이 터졌을 때 재산 때문에 피난을 못 나왔고, 이경재 목사님은 가볍게 피난 나와서 축복 가운데 목회를 잘하며 잘살고 있다고 하시면서 “팔아먹은 은혜”도 있다고 하는 말씀을 감명 깊게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성경에 새 중의 왕이라고 하는 독수리 이야기가 여러 번 나옵니다. 특히 여호와 하나님을 독수로 비유한 말씀이 몇 번이나 나옵니다. 오늘 본문, 신명기 32장 11~12절에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한 말씀같이 독수리는 그 새끼를 모질게 훈련을 시킵니다. 절벽 바위틈에 집을 짓는데 제일 밑에는 가시나무 가지를 물어다가 얼기설기 둥지를 틀고 그 위에는 토끼 같은 짐승의 가죽을 덮고 그 위에 자기 가슴에서 털을 뽑아 푹신푹신하게 깔아놓고 알을 까서 부지런히 먹이를 물어다 키웁니다. 이제 웬만큼 자라면 새끼를 등에 업고 하늘 높이 올라가서 떨어뜨리면 새끼는 죽는 줄 알고 죽을 힘을 다 써서 날개를 파닥거리며 날아보다가 기진맥진하여 저 밑으로 떨어지려고 하면 어미가 지켜보다가 떨어지기 전에 쏜살같이 내려가 다시 등에 업고 높이 올라가서 또 떨어뜨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훈련시키려고 날갯짓을 하며 등에 업히라고 하면 푹신푹신한 둥지에만 앉아 있으려고 뒷걸음치며 새끼가 업히려고 하질 않는다고 합니다. 어미는 하는 수 없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부드러운 털도 흩어버리고 그 밑에 있는 짐승의 가죽도 들추어버립니다. 그러면 그 밑에 가시나무만 남으니까 찔려서 앉아있을 수가 없게 됩다. 그러면 하는 수없이 어미 등에 업혀서 나는 훈련을 받는다고 합니다. 어미 독수리는 그 새끼를 편안한 보금자리에 앉아만 있게 하지 않고 그 날카롭고 무서운 발톱으로 둥지를 다 흩어버리고 혹독한 훈련을 시킵니다. 본문 11절에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라고 한 말씀처럼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훈련시키시고 인도하신다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오늘날도 독수리와 같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우리의 안락한 보금자리를 무섭게 흩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건강을 흩어버려 장미빛 같던 얼굴이 창백해지며 건강을 잃기도 하고, 넓고 좋은 집에 살던 사람이 사업이 망해서 사글셋방살이를 하게도 되고, 반석같이 탄탄하던 사업이 하루에 부도가 나 무너지기도 하고, 수십 층 빌딩이 하루아침에 날아가 버리기도 합니다. 고통과 질병과 슬픔을 통하여 고통과 질병과 슬픔이 없는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면 안 되고 두려워하거나 낙심하면 안 됩니다. 그 무서운 독수리의 발톱이 하나님의 큰 은혜요, 축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경재 감독님 말씀대로 재물이 없어지는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시골에서 목회할 때 논에서 김을 매는 것을 보니까 뿌리가 지나치게 무성하고 깊이 뿌리를 내리면 손으로 끊어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땅 속 뿌리가 너무 무성하면 위에 있는 벼 이삭이 충실치 못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벼의 입장에서는 고통스럽지만 뿌리를 사정없이 끊어준다는 것입니다. 찬송가 534장 4절에 “큰 풍파 일어나는 것 세상 줄 끊음일세. 주께서 오라 하시면 내 고향 찾아가리” 하는 가사와 같습니다.
어느 맷오리 한 마리가 먼 나라를 향해 하늘 높이 날아가다가 너무나 배가 고프고 피곤하니까 혼자 떨어져서 쉬어가려고 어느 집 지붕에 내려 앉았습니다. 지붕에서 내려다보니까 마당에 자기와 비슷한 집오리들이 고생도 안 하고 편안히 먹고 잘 지내더랍니다. 그 맷오리가 주린 배나 좀 채우고 잠시 쉬었다 가려고 내려앉아 모이를 실컷 먹고 나서는, ‘조금만 더 쉬었다 가자’ 하고 하루 이틀 지나다보니 살이 뒤룩뒤룩 쪄서는 막상 날아가려고 해도 지붕 위에까지밖에 날 수가 없어서 포기하고 집오리들과 살다가 어느 날 잡혀서 오리구이가 되어 먹혀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과 달리 저 높은 곳, 천국을 향해 올라가야 합니다. “올라가. 올라가. 독수리같이…”. 여호와 하나님은 왜 독수리의 발톱같이 인정사정없이 보금자리를 흩어버리실까요?
1. 창공을 바라보게 하시려고
독수리 어미는 자기 새끼가 부드러운 보금자리에서 둥지 안만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원치 않고 높고 푸른 창공을 바라보고 힘 있게 날아오르기 원하기 때문에 그 날카로운 발톱으로 사정없이 보금자리를 헤쳐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도 이와 같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흉년을 맞아 국무총리가 된 요셉이 있는 애굽으로 이주해가서 편안히 살게 되니까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때에 요셉을 모르는 바로왕이 나타나 벽돌을 굽게 하며 채찍으로 내리치고 혹독한 노동을 시켰습니다. 그제서야 약속의 땅 가나안을 사모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출애굽기 3장 9절에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라고 했습니다. 애굽의 보금자리를 바로라고 하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흩어버리셨습니다. 이제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고 가나안 땅을 바라보게 되었고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부흥집회에 한 젊은 목사가 참석했는데 한쪽 눈이 돌아가서 잘 보지 못하더랍니다. 집회를 마치고 강사 방에 들어와 자기는 누이동생이 홧김에 집어던진 물건에 눈을 맞아 보지 못하게 되어서 그 후부터 누이동생을 걸핏하면 때리고, 비관하고, 폭악해져가고, 술만 퍼마셨는데 어느 날 교회에 나가 십자가를 발견하고 영의 눈이 열리게 되서 기쁨과 행복 가운데 살게 되었다고 하면서 “내 눈 하나와 그리스도와 바꾸었습니다”라고 하더랍니다. 패배와 실패를 당하여 “나는 별 수 없는 삼류인생이야” 하며 자포자기 하지 말고 눈을 들어 창공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큰 꿈과 기대를 가지고 멀리 바라보십시오.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린 것 같아도 사방이 꽉 막혀서 도저히 나아갈 길이 없어도 눈을 들어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이 절망적인 환경이 바뀔 것을 믿고 기대하십시오. 하나님께는 절망이 없습니다. 시편 121장 1~2절에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했습니다. 산과 바다와 별들을 창조하신 하나님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땅만 내려다보며 한숨만 짓지 말고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큰 기대를 가지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큰 기대와 소망을 품으라고 하십니다. “네 입을 넓게 열라”고 하십니다.
유명한 Oral Roberts 목사님은 언제나 시키는 인사말이 있습니다. “당신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Something good is goning to happen to you).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습니다. 바라는 것이 없고 기대하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도 어떻게 해 주실 수가 없습니다. 마귀는 시시때때로 찾아와 속삭입니다. “너는 별 수 없는 존재야. 네 인생은 끝장난 거야”, “너는 가방 끈도 짧고 특별한 재능이나 이렇다할 능력이 없지 않냐?”, 혹은 “너는 사실 가망이 없어. 기대하지 않는 게 좋아. 골치 아픈 세상 더 살 필요 없이 깨끗이 끝내버려”라고 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이런 마귀의 거짓말에 속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이 독생자까지 내어주신 귀한 존재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불안 마귀야, 의심 마귀야, 물러가라” 하고 꾸짖어 물리치고 “하나님, 나와 함께 하심을 감사합니다. 오늘날까지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앞길도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또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감싸고 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항상 나를 따라다니고 있음을 감사합니다” 하고 승리와 축복을 생각하십시오. 멋지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십시오. 암탉과 함께 모이를 쪼고 있는 한 독수리와 함께 하늘을 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눈을 들어 높은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독수리의 눈을 보십시오.
2. 믿음의 날개를 튼튼하게 하시려고
폭풍이 몰려올 때 다른 새들은 들어가 숨지만 독수리는 가슴을 펴고 그 폭풍을 타고 높이높이 오릅니다. 이렇게 새 중의 왕이 되려면 보금자리에만 편안히 있으면 안 되니까 독수리는 그 무서운 발톱으로 부드러운 보금자리를 사정없이 흩어버립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의 날개를 튼튼하게 하기 위해서 강제로 보금자리에서 나와 하늘을 날게 만드는 것입니다.
편안하면 믿음의 날개가 힘이 없습니다. 세상의 달콤한 것만 계속 먹으면 믿음이 약해집니다. 가끔은 즐거운 시간도 갖고 맛있는 것도 먹을 필요가 있겠지만 항상 맛있게 먹고, 편안하고, 육신쾌락만 추구한다면 영성이 쇠퇴합니다. 어려운 질병에 걸리거나 경제적으로 실패할 때, 사랑하는 식구가 위태로울 때,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기도하게 됩니다. 독수리는 폭풍이 불어올 때 그 폭풍을 타고 구름 위로 높이 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당하는 것이 좋아서 독수리의 발톱으로 보금자리를 흩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30~33절 “때리는 자에게 뺨을 향하여 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이는 주께서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실 것임이며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유익을 위해서 고난과 고통을 허락하시는 것이지 고통 받는 것이 좋아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또 시험 당할 때는 버림 당한 것 같고 도저히 일어날 수 없어 보이지만 반드시 이길 힘을 주십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의 지렛대를 활용하면 옮기지 못할 바위가 없습니다.
3.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시려고
부드럽고 폭신폭신한 보금자리면 의지하고 있던 새끼들이 무서운 발톱이 그 둥지를 다 흩어버릴 때 가시만 남아 찌르고 아프니까 마지못해 어미 등에 올라탑니다. 정말 새 중의 왕이 되는 길은 어미 등에 업히는 것인데 보금자리만 의지하고 안주하려들 때 하는 수 없이 무서운 발톱으로 보금자리를 흩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하나님 외에 사람이나 물질이나 권세를 더 의지할 때 괘씸히 여기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15일이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는데 40년이나 배회하며 광야에서 고생시킨 것은 하나님만 의지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광야에서는 집도 지을 수 없습니다. 즉시 세웠다 헐었다 하는 천막뿐입니다. 복덕방도 없고 은행도 없습니다. 슈퍼마켓도 없고 쌀가게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만나도 며칠 분씩 쌓아놓으면 즉시 썩어버립니다. 물질이나 사람이나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거나 사랑하면 안 된다는 것을 훈련시킨 것입니다. 최근 제가 만난 어느 목사님은 제일 사랑하고 믿었던 장로님이 갑자기 돌아가시더랍니다. 저도 헌금 많이 할 것이라고 믿고 의지했던 장로가 배신하므로 세계가 떠들썩하도록 고통과 시련을 당했습니다. 목사는 하나님만 의지해야지 사람이나 물질을 의지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17장 7절에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물질이나 재산을 아무리 쌓아놓아도 하나님이 부르시면 놓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안 먹고 안 쓰며 하나님께도 안 드리고 자식한테 물려줘봤자 다 쓸 데 없는 일입니다. 남편한테는 사랑 못 받았지만 자식한테는 효도 받으며 행복하겠지, 하지만 다 소용없는 일입니다. 친구도, 자식도, 아내도, 의지하지 마십시오. 세상 것은 의지한 만큼 상처를 받습니다. 영원히 실망시키지 않는 친구는 예수님뿐입니다. 만복의 근원 되신 하나님만 의지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참 만족을 주십니다. 할렐루야!
인정받는 일꾼
신 32:10-12 / 김철한 목사
일본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집의 벽을 수리하기 위해 뜯었습니다. 일본 집의 벽은 소위<오가베>라 하여 중앙에는 나무로 얼기설기 대고 그 양쪽에 진흙을 발라 만든 것으로 항상 속이 비어있다고합니다. 그런데 벽을 뜯다보니 벽 속에 한 마리의 도마뱀이 갇혀 있더라는 겁니다. 그것도 보통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쩌다가 벽 밖에서 안으로 박은 긴 못에 꼬리가 물려 꼼짝도 못하고 갇혀 있더라는 것입니다. 집주인은 도마뱀이 가엾기도 하거니와 호기심이 생겨 그 못을 조사해 보았더니 놀랍게도 그 못은 십년 전 그 집을 처음 지을 때 박은 못이었습니다. 캄캄한 벽 속에서 십년 동안을 무얼 어떻게 먹고 살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어디에선가 다른 도마뱀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그 입에는 먹이가 잔뜩 물려 있었습니다. 무려 십년 동안을 먹이를 물어다 살린 것입니다. 변함없는 진실한 사랑은 누구에게나 감동을 줍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 참으로 각박하고 사랑이 메말라갑니다.
사람은 사랑받고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사람을 경멸하고 심지어는 살인의 도구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현실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며칠 전에 부녀자들을 7명이나 납치해서 죽인[강호순]이라는 희대의 살인범이 또 잡히면서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 등장하는<사이코패스(Psychopath)>라는 말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여자들만 보면 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고 말하는 그에게서 섬뜩함을 느끼지 않습니까? 이처럼 반사회적인 인격 장애를 가진 사람을<사이코패스(Psychopath)>라고 하는데 이 사람들은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며 주로 거짓말에 능하고 충동적이며 책임감이 결여되어 있으며 폭력적인 성향이 강하다고 합니다. 결국 이런 장애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인간존재 이하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흔히 하는 말입니다만“인간도 아니라.”는 말처럼 비참하고 가슴 아픈 말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서 알아야 할 몇 가지의 조건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 첫째가 뭐냐 하면 중요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생에 의미가 있고 삶에 뜻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존재의 의미를 느낄 수 있어야 하고 자기 존재의 가치를 생각할 수 있어야만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것을 가장 크게 느낄 수 있는 것이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사랑을 먹고 산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삽니다. 그러다가 동생이 태어나면 사랑을 빼앗기게 되고 그때 아이들이 그걸 견디지 못해서 병도 나고 혹은 이상 성격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내가 받던 사랑을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어렸을 때는 무조건 사랑을 받아야 살고 그 다음에는 사랑을 하면서 존재의 의미를 느끼게 됩니다. 독신녀와 결혼한 여자 중에 누가 더 건강하고 누가 더 오래 살 것 같습니까? 아이들한테도 시달리지 않고 남편에게도 시달리지 않고 오직 자유롭게 훨훨 자기 마음대로 사는 독신여자가 건강할 것 같지만 통계학적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독신여자가 병이 많고 단명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이란 미워할 사람이 있든 사랑할 사람이 있든 뭐 하나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겁니다. 인간존재의 가장 기본은 사랑하며 살고 사랑 받으며 사는데서 자기존재의 중요성을 아는 것이고 삶의 보람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값을 지불했습니다. 그렇다면 내 값이 얼마입니까? 예수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실 만큼의 값입니다. 그리고 그 지불된 대가에 내 존재의 의미가 있는 것이고 그 의미를 알고 그 중요성을 알고 사는 사람을 바로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 존재의 두 번째는 안정성입니다. 여기서 안정성이란 단순히 동물적인 의식주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걱정과 근심으로부터 자유 하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평안한 마음을 원합니다. 화목하지 않고는 살수가 없습니다. 원수 맺고는 살수 없는 게 인간입니다. 불안정한 마음으로는 병에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늘 남을 죽여야겠다고 독을 품고 있으면 자기가 먼저 죽습니다. 이런 불안정한 마음으로는 인간존재를 말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평안을 원하고 평안 속에서 살아야 됩니다. 그래서 평안을 추구하고 평안을 필요로 하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이것이 곧 안정성입니다.
그리고 인간존재를 느끼는 세 번째는 소속감입니다. 끈끈한 정을 가지고 가정이라고 하는 연대 속에 살고 친구와 더불어 직장과 더불어 나라와 더불어 민족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자만 살겠다는 고독은 죕니다. 사람이 고독을 느끼는 순간 그 존재는 벌써 떨어지고 있고 타락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형태로든지 사람은 절대로 고독해서는 안 됩니다. 아니 정말 인간존재를 의식한다면 고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은 혼자일 수 없습니다. 더불어 살아야 할 분명한 소속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내가 사랑해야 할 가족이 있고, 내가 사랑을 나누어 주어야할 이웃이 있으며,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 그분이 계십니다. 이 소속감이 나를 세워가고 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자, 이제 깊이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라고 하는 존재의식 속에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바로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다 만들어진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존재가 아니라 여전히 만들어져 가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끝난 것도 아니요, 우리의 인생도 끝난 것이 아니라 아직도 계속 되어져 가고 있고 우리는 그 속에서 여전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일꾼 되는 것이 중요하고 더욱 더 인정받는 일꾼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어쩌면 여기엔 많은 시간도 걸리고 많은 공부도 필요할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울 것입니다. 그 사실을 믿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43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셨습니다. 430년이라는 숫자는 중요합니다. 물론 나이를430살 먹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노예의 아들로 태어나고 노예의 손자로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수십 대를 지나면서 노예로 태어났고 노예로 성장했고 노예로 살았을 뿐입니다. 노예 생활이 아주 체질화되고 문화화 되어 버린 불쌍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셨다는 기적입니다. 이렇게 기적으로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이 그들을 광야에 갖다 놓은 다음에 이제 그들을 훈련시키십니다. 이런 저런 여러 가지의 훈련을 다 시켰고 그럴 때마다 이스라엘은 이런 불만 저런 불평을 늘어놓았었습니다. 그런 중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을 훈련시키셨고 이제 하나님의 사람으로 훈련시키는 그 총체적 의미를 모세가 그 백성들에게 말해주는데 그것이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11절과 12절입니다.“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가 바로 이러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출19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지 3개월 만에 시내 광야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모세를 불러서 말씀하시기를“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출19: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독수리 날개라고 하는 상징적 용어로 하나님과 이스라엘백성과의 관계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은 그 이후에 모세가 사십년 동안을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인도하면서 지도자로 살다가 나이가 많아서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죽기 직전에 사십년의 생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그 백성들에게 명확하게 심어주는 이야기입니다.
독수리는 둥지에 알을 낳고 부화하면 어느 정도 먹이를 줘서 날 때쯤 되면 새끼를 벼랑에서 떨어뜨립니다. 그러면 새끼는 죽지 않으려고 퍼덕거립니다. 그러나 아직 날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박차고 올라 올 기운이 없습니다. 그냥 그 높은데서 땅바닥으로 추락합니다. 어미는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다가 땅에 닿기 직전에 휙 내려와서 등에 업고 올라갑니다. 그리고 둥지에다 조금 쉬게 했다가 또 합니다. 거의 하루 종일 며칠 동안 이 짓을 계속합니다. 새끼가 혼자서 날수 있을 때까지 합니다. 그것이 바로 날개를 강하게 해서 혼자 나는 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마치“이렇게 사는 게 독수리다. 독수리로 태어났다고 다 독수리가 아니다. 훈련을 통해서 견뎌야 진짜 독수리가 된다.”는 것을 말하는 듯합니다.
이렇듯 어미 독수리는 진짜 독수리를 만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새끼에게는 고통을 가합니다. 그러나 독수리에게는 이것이 사랑입니다. 버둥거리며 살기 위해서 날아오르려고 하는 그 과정을 보면서 어느 정도의 힘이 있는지 어느 정도에 날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를 확인합니다. 중요한 것은 마지막까지 지켜보다가 떨어지기 직전에 내려와서 그를 등에 업고 올라간다는 사실입니다. 절대 땅에 부딪쳐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반드시 보호하기 위하여 눈을 떼지 않고 보고 있습니다. 혼자서 날아오를 때까지 말입니다. 모세는 이것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사랑하여 은혜 베푸시는 모습임을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누에고치가 나비가 되는 것을 보면 신기합니다. 처음에는 바늘 구멍만한 게 뚫립니다. 그 작은 구멍에서 번데기가 변해서 나비가 되어 나오는데 하루 종일 걸립니다. 몇 시간 걸려서 조금씩 고생하면서 나옵니다. 날개 죽지 하나가 나오고 퍼덕거리다가 또 한쪽이 나오고 퍼덕거리다가 또 몸이 안 나와서 퍼덕거리고 고생을 하면서 겨우 나옵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게 안쓰러워서 가위로 구멍을 크게 뚫어 주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구멍이 크니까 나비가 쑥 나옵니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나온 나비는 날지를 못합니다. 빙빙 돌다가 그대로 죽어 버립니다. 그 나비가 작은 구멍으로 나오면서 몸부림을 칠 때 번데기 몸에 있던 영양이 날개로 건너가면서 날개가 힘을 얻습니다. 그 좁은 공간으로 나오느라고 몸부림을 치는 가운데 온몸이 운동을해서 힘을 얻어가지고 나와야 그 다음에 날아 갈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때로 신앙 생활하는 우리에게도 가혹하리만큼 어려운 일들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꼭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를 강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이 속에 하나님의 일꾼 삼으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것입니다. 이 계획을 알고이기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요, 비로소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일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나는 중요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있게 하신 목적과 의미를 알고 나니 내 존재의 중요성을 알겠습니다. 나는 샬롬의 사람입니다. 내 마음에 평안과 사랑을 가지고 나누며 살아야 할 귀한 존재임을 알겠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일꾼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나로 하여금 인정받는 일꾼으로 세우시기 위하여 오늘도 독수리날개 같은 은혜로 때로는 훈련시키시며, 때로는 인도하시며 이끌어가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겠습니다. 이 깨달음으로 하나님의 인정받는 일꾼이 되기까지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았다
신 32:9-14 / 노경모 목사
‘하나님을 얼마나 잘 알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렇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우리의 좁은 지혜와 적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어떻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마저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너무나 광대하신 분입니다. 우리의 머리에 다 담을 수가 없고 우리의 마음에도 다 담을 수가 없는 크신 분입니다. 우리의 생각에도 다 품을 수가 없습니다. 그 만큼 하나님께서는 광대하시고 위대하시고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가 안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 중에서도 모세처럼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구와 마주 보고 이야기 하듯이 모세와 대면하여 이야기하실 정도로 모세와 친밀했습니다. 출애굽기 33:11에는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과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무엇을 좋아하시고 무엇을 싫어하시는지를 훤히 알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성품이 어떠한 가를 잘 알았습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과 교제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누구신가를 잘 알고 있는 모세가 이제 그의 인생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모아놓고 하나님에 대해서 노래를 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32장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보호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설명합니다.
9-10을 볼까요?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황무지에서 지키셨고, 짐승들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주시고 마치 군대들과 경찰들이 경호원들이 호위하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호위하셨고 보호하셨고 눈동자같이 지키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길을 지나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까지 이런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 나라들이, 원수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감히 손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동일하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금까지 보호하셨습니다. 위험과 사고로부터 원수와 마귀로부터, 절망과 두려움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없었다면 우리가 지금 여기까지 올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둘째,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이라고 설명합니다.
11-12절이 그 내용입니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훈련 하시되 독수리가 그 새끼를 훈련하듯이 훈련시키신다고 하셨습니다.
셋째, ‘만족하게 먹여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설명합니다
13-14절을 볼까요. ‘여호와께서 그로 땅의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시며 밭의 소산을 먹게 하시며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서 기름을 빨게 하시며 소의 젖 기름과 양의 젖과 어린 양의 기름과 바산 소산의 수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밀을 먹이시며 또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우셨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굶기지 않으시고 좋은 것으로 먹이셨습니다. 광야길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셔서 먹이셨습니다. 동일하게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우리들을 먹이셨습니다. 육의 양식으로 먹이셨고 영의 양식으로 먹이셨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모세는 하나님을 보호하시고 훈련시키시고 먹이시는 하나님으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하나님에 대해서 다른 두 가지 측면보다 잘 알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이라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시고 먹이시는 분이심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목자되신 하나님께서 양인 우리를 보호하시고 먹이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을 자세하게 알려드리고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이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입니다. 저는 ‘추락하는 것이 날개가 있다’라는 소설이나 영화를 이야기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소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한비야씨가 무릅팍 도사에 나와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지만, 내가 두려워하던 곳으로 추락하게 되면 스스로 깨닫게 될 거예요. 나에게 날개가 있었음을 ...."
우리도 인생을 살다보면 올라가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발버둥을 치는데도 불구하고 올라가지 않고 계속 추락하는 거와 같은 상황을 만날 수 가 있습니다. 물론 그런 경험을 이미 하신 분들도 있을 것이고 현재 그런 상활가운데 있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그러한 상황 가운데 있는 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그러한 상황에 비추어서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우리 자신을 향한 물음입니다.
오늘 본문 11절에 ‘독수리’가 등장합니다. 독수리는 그 보금자리를 높은 절벽이나 벼랑 위에 만듭니다. 난공불락의 위치에 둥지를 틀고, 자기의 부드러운 깃털로 푹신한 침대를 놓아 알을 낳고 새끼를 기릅니다. 새끼들은 위로 푸른 창공을 올려다 보며 아래로 광활한 벌판을 내려다보며 꿈같은 날을 지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어미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보금자리에 있는 새끼들을 어지럽게 합니다.
11절에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히고 그 새끼위에 너풀거린다’고 했습니다. 어미의 큰 날개가 너풀거리면 깃털로 만든 침대가 다 날라 갑니다. 갑자기 돌변한 어미를 보고 새끼 독수리들은 어리둥절할 뿐입니다. 왜 그렇게 하는지를 모릅니다. 어미 독수리는 아랑곳없이 새끼들을 둥지 밖으로 밀어냅니다. 새끼들은 빠져 나오지 않으려고 소리를 지르며 몸부림칩니다.
어떤 학설에 의하면 어미 독수리는 새끼들을 둥지 밖으로 밀어내려고 깃털 침대를 흩어버리기도 하고 가시나무 가지를 둥지에다 집어넣어 새끼들이 찔리게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결국은 새끼들이 따듯한 보금자리에서 계속 누워 있었으면 하던 생각을 단념하고 불평을 늘어놓으면서 기어 나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종종 이렇게 훈련하십니다. 우리들은 본능적으로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대부분이 보금자리 속에서 “이대로 살았으면 좋겠다. 나는 만족해!” 하며 꿈같은 세월을 보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건강에 이상이 생깁니다.. 불안 속에 잠을 이룰 수 없게 됩니다. 사업이 무너집니다. 부부간에 심각한 오해가 일어납니다. 자녀들에게 부모가 원치 않는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도대체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런 경우의 대부분은 하나님이 날개로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히는 것이라고 보아도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에 가장 구체적으로 개입하시는 징조이요, 나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내 옆에 매우 가까이 와 있는 징조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 동안 여기가 좋다, 이것이 좋다 하고 머물고 있는 그 자리에서 우리를 들어 내시려는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봅시다. 만약 우리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잘 되었다면 두 손 들고 예수님을 찾아 나왔을까요? 이렇게 주일 예배에 참석하러 교회에 나왔을까요? 쉽지가 않지요. 우리 자신과 우리 가정과 내 생업과 내 주변을 어지럽히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기 때문에 회개하고 돌아온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도 이 사실은 적용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잘하다가 가끔 잠을 잘 때가 있습니다. 방학할 때가 있습니다. 독수리 새끼가 둥지에서 잠만 자듯이 우리도 태평스럽게 육신의 깊은 잠에 취해 있을 때가 있습니다. 즉 게으름, 나태, 불성실과 죄악의 잠이지요. 대개가 세상적으로 형통하면 이런 시험이 옵니다. 그런데 주님은 무엇이라고 경고하셨던가요?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도 못하고 하나님의 법에 절대로 굴복도 아니한다’고 로마서 8:7-8에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가끔 우리는 바로 이러한 육에 속한 사람으로 돌아가는 영적 위기를 맞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우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보금자리를 어지럽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징계”라고 부릅니다.
사실 우리는 이것을 싫어하고 두려워합니다. 어려운 시련입니다. 고통스러운 연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정신 차리게 합니다. 빠져있던 자리에서 빨리 나오라고 깨우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생각을 버리고 나오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생활방식을 일단 정리하라는 것입니다. 잠을 깨고 하나님 앞으로 더 가까이 나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싸인을 빨리 알아 차려야 합니다.
또한 어미 독수리는, 새끼들이 할 수 없이 둥지에서 나오면 긴 날개 위에 새끼를 얹어 높은 고공으로 올라갑니다.
11-12절에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그 길을 인도하셨다.’는 말씀이 나오지요. 이렇게 새끼를 날개에 업고 높이 올라가면 새끼는 겁에 질려 웅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미가 새끼를 사정없이 떨어뜨려 버립니다. 그러면 새끼는 “나 죽는다!”하고 비명을 지르면서 떨어집니다. 어미 독수리는 보고 있다가 쏜살같이 내려가 긴 날개로 떨어지는 새끼를 받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고공으로 올라갑니다. 얼마 지나 새끼를 또 떨어뜨립니다. 몇 번이나 그렇게 하는지는 잘 모르지만 분명한 사실은 새끼가 자기 힘으로 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한다는 것입니다. 즉 반복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이와 흡사한 방법으로 우리를 훈련시키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가정에 어려운 풍파가 잠재워지질 않습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여도, 어떤 것은 들어 주시지도 않고, 또는 긴 세월을 끄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즉시 고쳐주실 질병인데도 오랫동안 고통을 계속될 때가 있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불평을 그치고 잠잠히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이 왜 그러시는지를!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일까요?
우리는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공중에서 우리를 반복으로 떨어뜨리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겐 대단히 견디기 어려운 시련의 연속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나를 떠나거나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가장 가까이서 나를 다스리고 계신다는 확신을 가지면서 하나님이 결코 우리가 추락사 할 때까지 버려주실 하나님이 아니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독수리가 그 새끼를 땅에 부딪치게 하여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아니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망하도록 방관하지 않으십니다. ‘큰일났구나!’ 하는 그 절박한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반듯이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려운 고난을 통해서 계속 연단시키시지만 절대로 망하게는 아니하십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믿음이라는 것은 한 순간에 금방 자라지 않습니다. 새끼 독수리가 수없는 반복훈련을 통해서 날개에 힘을 얻는 것처럼 우리도 시련과 역경을 거치면서 믿음의 날개 짓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날마다 땅에서만 허우적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환경이 아무리 절망적이고 어려운 문제들이 산적해 있을지라도 여호와를 앙망하여 믿음으로 이 훈련을 받읍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놀라운 평화의 경지까지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련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의 날개에 힘을 주십니다. 스스로 날 수 있게 하십니다. 이 사실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어려운 문제가 반복된다고 해서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결국 우리에게 힘있는 날개를 달아주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드디어 독수리 새끼는 고공훈련을 통해서 날개에 힘이 생깁니다. 날기를 시작합니다. 어미가 나는 데로 따라 날아갑니다. 높은 고공을 향해 힘차게 솟아 오릅니다. 얼마나 멋집니까!
믿음의 날개를 달고 높이 날 수만 있게 되면 독수리가 폭풍우 속에서 가지는 여유를 우리도 맛볼 수 있게 됩니다. 독수리는 멀리서 폭풍우를 알아채고 곧 날개의 각도를 조정하고 대기하며 기다립니다. 그리고 폭풍우가 자기 앞으로 불어 닥치면 그 힘에 몸을 싣고 높은 창공으로 올라갑니다. 그 다음에는 그 폭풍우 위에서 유유히 아래를 내려다보고, 푸른 하늘을 나는 즐거움을 누립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와 마찬가집니다. 믿음의 날개를 타고 높이 솟을 수만 있다면 인생의 어떤 폭풍우를 만나더라도 그 위에서 찬송하며 감사하는 차원 높은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삶이 바로 크리스천이 보여줘야 할 진면모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런 신앙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두더지처럼 땅만 파고 사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믿음의 날개를 달고 높이높이 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독수리의 새끼가 어미 등에서 추락하는 것은 독수리 새끼에게 날개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날개가 있기 때문에 어미는 계속해서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떨어지고 있다면 추락하고 있다면 우리에게 바로 날개가 있다는 징조입니다. 잘 훈련만 되면 멋지게 날 수 있는 믿음의 날개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라는 말의 성경적 의미를 이제 아시겠지요?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이 하나님의 훈련을 힘들더라도 멋지게 잘 받읍시다. 그래서 멋지게 하늘 나는 성숙한 신앙인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 마리 더 잡읍시다
신 32:9-12 / 송영태 목사
새벽기도회 시간에 묵상하는 역대하에 나타난 유다왕들은 보면 한결같이 말씀하는 것이 오만한 왕은 다 망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했던 왕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잊은 배은망덕으로 교만해지면 하나님은 버리셨습니다.
이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성경 볼 때, 설교를 들을 때, 나의 마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지 않는다면 이미 현재적으로 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영성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 이렇게 현대인을 진단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가까이 귀담아 듣지 못하는 이유가 2가지 있다.
첫째는 Too busy, 너무 바쁘다는 것입니다. / 일 자체에 몰두하고 성과주의에 빠지고 성공에만 관심을 갖고 있기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noisy라고 했습니다. 너무 산만하다는 것입니다. / 이번 여름에 경포대 해수욕장이나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을 텔레비전을 통해서 보셨습니까? 놀랐습니다. 물은 거의 안보이고 사람만 보입니다. 그게 재미라는 것입니다. 와글와글 시끌시끌해야 사람이 몰린답니다. 이러한 시끄러움과 많은 볼거리를 두고 언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겠습니까?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면 깊이 묵상하고 기도해야 하는데 안됩니다. 그래서 영혼이 황폐해지고 병이 생기면서 이기심에 빠지고 자기 우상화가 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짜증이 나고 교만해집니다. 낙심도 절망도 다 교만에서 옵니다.
요즈음에 한국에서 성공하려면 “ㄱ”으로 시작되는 여섯 가지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꿈 - 이상이고, 꾀 - 지혜이며, 꼴 - 외모가 있어야 하고, 끈 - 연고, 줄이 있어야 하며, 끼 - 소질이 있어야 한다, 깡 - 그야말로 깡인데 끈기나 뚝심이겠지요? 오늘 본문에 탕자도 “ㄱ”이 있었는데 “고집”입니다. 이것은 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가지고 계십니까? 성도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 그 빽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의 행동이 미래를 결정합니다. 때문에 오늘은 미래의 첫날인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어느 부자에게 건강한 두 아들이 있습니다. 그 들이 건강하고 훌륭하게 자라는 것을 인생의 낙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둘째 아들이 자기 몫으로 분배해 놓은 재산을 달라는 것입니다. 이제 자랄 만큼 자랐으니 독립하여 스스로 살아보겠다는 것입니다. 자식이기는 부모가 없다고 말합니다. 잘못되는 줄 알면서도 자식의 요청을 들어줍니다. 이제 둘째 아들은 희망과 기대를 품고 늘 동경하고 그리워하던 도시에서 마음껏 혼자서 계획하고 실천하였습니다.
그러나 고인 물을 퍼내듯이 있는 돈을 다 쓰고 나니 돈이 떨어지고 그러자 모여들었던 친구도 여자도 다 떨어져 나가고 급기야 밥 한술 얻어먹기가 힘들게 되었습니다.
밀리고 밀려서 돼지를 기르는 집에서 돼지와 함께 지내면서 목숨을 부지해 나가는 가련한 신세가 된 것입니다. 돼지는 배가 고파 울어대면 주인이 먹을 것과 보살펴 주지만 이 탕자는 때가 되어도 먹을 것을 주는 자가 없습니다. 버려진 인간이 된 것입니다.
너무도 슬픈 시간들을 보내고 나서야 아들은 고향 땅에 계신 아버지가 생각나고 그리워지기 시작합니다.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도 풍족한데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물이 쏟아지듯이 탄식이 터져 나왔습니다.
면목도 없고 얼굴을 들 수도 없지만 “그래도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결심하고 일어납니다. 희망과 기대 속에 떠나온 고향이고 아버지 집이지만 이제 돌아가려고 할 때는 거지요, 탕자요, 실패자요, 버려진 소망 없는 인간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과연 이 꼴을 하고 아버지께 가면 아버지가 받아주실까? 형의 얼굴은 어떻게 보며, 동네 사람들의 빈정대는 비웃음이 들리는 듯합니다. 그러나 돼지우리에서 굶어 죽는 것보다는 아버지 앞에 가서 무릎 꿇고 사죄하여야 한다고 마음을 가다듬고 발걸음을 옮깁니다.
이제 아버지는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는 몰골로 터벅거리며 걸어오는 아들을 발견합니다. 아들이 집을 떠난 후로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걱정이요, 비가 오면 오는 대로 염려요, 추우면 추운대로, 더우면 더운 대로 집 떠난 아들을 위해 기도하시던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눈물로 범벅이 되어 아들을 영접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일꾼들을 불러 동네 사람들을 부르게 하고 잔치를 벌였습니다. 신발을 신기고, 새 옷을 입혀 주고, 반지를 끼워주며, 살진 송아지를 잡고, 풍악을 울리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아들을 다시 얻은 아버지는 기쁘고 기뻤습니다.
목이 메인 감격이요, 죽어도 원이 없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도 함께 좋아하며 기뻐하였습니다. 모두가 함께 춤을 추고 축하하며 잔치가 무르익어 갈 때에 들판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온 큰 아들이 보니 성경 말씀대로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나쁜 동생을 위하여 잔치를 열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광경을 본 큰 아들은 속이 뒤틀리기 시작했습니다. 함께 즐기자고 권하는 아버지께 말합니다. 그렇게 나쁜 동생에게는 이렇게 큰 잔치를 베풀어 주고, 아버지 집에서 죽도록 일만하는 나를 위해서는 염소새끼 한 마리 잡아 주어 동무들과 즐기게 하신 적이 있었느냐고 따지며 아버지에게 항의합니다.
그러자 31-32절에 아버지는 말씀합니다. “얘야! 이 모든 것이 다 너의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나 네 동생은 잃었다가 찾은 아들이요, 죽었다가 다시 얻은 아들이 아니냐?”라고 하시면서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오히려 애원을 하였습니다.
본문 28절에 보면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아니 하거늘”이라고 큰 아들의 마음 상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근거해서 분노하는 큰 아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함께 묵상하려고 합니다.
첫째로 큰 아들은 아버지에게 큰 실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큰 아들은 착한 아들입니다. 그리고 작은 아들은 애당초 몹쓸 아들이었습니다. 이런 못된 자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때문에 작은 아들은 어쩌면 잃어버린 자식이요, 버린 자식입니다. 그러기에 작은 아들이 돌아 왔을 때 아버지는 기쁜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큰 아들은 죽은 아들을 다시 찾은 아버지의 감격스러운 기쁨에 동참하지 못하는 아들이 되었을까요? 아버지가 그렇게도 기뻐하고 좋아하는데 그래 아들이란 놈이 아버지의 기쁨에 동참할 수 없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아버지를 대신하여 오히려 아버지 역할을 감당해야 할 큰아들이 왜 함께 기뻐하지 않았을까요?
돌아온 탕자는 말이 없는데, 아버지를 위해서 일하고 효도했다는 사람이 이렇게 불평하고 분노해야 되겠습니까? 재산을 털어 먹었어도 동생이 형의 것을 털어 먹은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아버지의 재산을 털어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온 아들을 인하여 아버지는 이토록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보세요! 아버지의 기쁨에 함께 할 수 없는 큰 아들은 아버지에게 또 다른 못된 탕자요, 더 큰 실망과 슬픔을 안겨준 자식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한 신앙고백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말로만 100번, 1000번, 사랑하고 충성하겠노라고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기쁨에 함께 참여할 수 있는 마음과 삶임을 오늘 성경은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이 믿음의 고백이요, 신앙적인 삶인 것을 알아야합니다.
아버지의 안타까움에 함께 안타까워하는 마음이요, 아버지의 기쁨과 축제에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아들! 이 아들이 진정한 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돌아온 것만으로도 고맙고 기쁜 것입니다.
묻습니다. 여러분! 인간이 살아온 역사속에서 범죄함이 없이 살아온 적이 언제 있었습니까? 인간의 역사자체가 죄요 삶 자체가 허물 투성입니다. 그러나 이토록 실수와 허물이 범벅된 인간일지라 해도 돌아오기만 하면 아버지는 용서하셨고, 받아주셨고, 기뻐하셨으며, 잔치를 열어 축복해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과 잔치에 동참할 수 있는 성도요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정말 기쁨으로 참여하여 오늘 우리 교회를 통해서 열어 놓으신 하나님의 구원의 잔치에 함께 참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합니다. 우리를 비방하는 이들과 함께 춤을 출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을 갖고 살아야합니다.
때로는 주님의 고난에 함께 참여해서 고난에 현장에도 기꺼이 나가야 하며, 주님의 기쁨에 함께 기뻐하고, 주님의 사랑과 용서에 함께 참여하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함을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귀중한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둘째, 큰아들은 천만번 생각하고 돌아온 동생의 용기를 꺾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어쩌다 잘해보려고 했던 생각이 잘못된 인생길이 되어서 돌이킬 수 없는 죄와 허물을 안고 천근 만근 되는 발걸음을 옮겨 고개를 들지 못하고 죄인되어 찾아온 동생의 용기를 집안에 있는 형이 꺾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죄인이며, 탕자이고, 부끄러운 자기를 이토록 환영해주고 잔치를 열어주며 좋아하시는 아버지 앞에 이 둘째 아들은 송구스럽고 죄송스러운 얼굴을 듣지 못하고 참회의 눈물로 얼굴을 적시었습니다.
그런데 형이란 사람이 들어와서 아버지 앞에 분노를 터뜨리고 아버지 살림을 창기와 함께 다 먹어버린 놈을 무엇 때문에 받아 들였느냐고 소리를 지를 때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동생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차라리 이럴 줄 알았으면 돼지우리에서 혀를 깨물고 죽을지언정 돌아오지 않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돌아왔던가? 나 때문에 가정에 불화가 일어나고 아버지 입장이 곤란해지고 형이 분노하니 무엇 때문에 돌아왔단 말인가!”하며 탄식하였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안 계시면 대신하여 아버지의 역할을 감당해야할 형이란 사람이 돌아온 동생을 받아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형이란 사람은 아버지가 그립고 형이 보고 싶어 용기를 내어 돌아온 동생을 받아들이지 못한 몰인정한 인간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동생의 가슴에 불안을 주었습니다. 부끄러워하는 동생을 더 부끄럽게 만들었고, 참회하며 후회하는 동생의 눈에서 피눈물이 나게 했습니다. 결국 아버지를 찾아 돌아온 동생의 용기를 꺾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 형이란 인물은 평생 이 입장을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입장이 되려고 하지 않은 것입니다. 착한 동생 아벨을 때려 죽였던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질문하셨습니다. “너의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을 받은 가인은 말하길 “내가 내 동생 아벨을 지키는 자이니까?”라고 항변합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네가 네 동생을 지켜주지 않으면 누가 네 동생을 지켜준다는 말이냐?”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버지가 안계시면 형이 대신해야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형은 어렵게 돌아온 동생에게 용기를 주고 격려를 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동생의 용기를 꺾어놓고 분노를 일으키는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나는 형제와 이웃들에게 용기를 주기는커녕 실망과 불안을 주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난 주 오후에 한양대학병원에 입원하신 집사님을 심방하려 병실에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옆 환자 가족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얼마나 비난을 하는지 모릅니다.
비난의 내용인 즉 이런 종류입니다. 어느 교회의 이 집사는 교회의 일꾼입니다. 주일학교에서 교사로 성가대원으로 구역의 일까지 열심히 참여합니다. 수요일, 금요일, 토요일, 주일엔 교회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그 집사의 열심은 성도들의 칭송을 받고 그 교회 목사님은 설교 때마다 그 집사의 헌신을 예화로 삼습니다. 하지만 그 집사의 가족들은 불만이 많습니다. 남편과 다정하게 이야기할 시간이 없습니다. 퇴근하는 남편 저녁상 제대로 차려주지 못합니다. 가족들의 건강과 가정의 축복을 위해 기도하러 가는 것이니 당신이 이해하라고 합니다.
남편이 속옷을 언제 갈아입었는지, 와이셔츠는 언제 갈아입었는지 한번도 남편에 물어보지 않고는 늘 우리 목사님의 설교이야기와 교회이야기만 합니다. 아이들의 불만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마와 놀이터와 시장을 가본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형제가 입원해 있는데 교회 일 때문에 바빠서 한번도 안와 보았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이런 실망을 주면 어떻게 합니까? 오늘 우리 성도와 교회가 우리의 형제와 이웃들에게 용기를 주고 격려하며 희망과 위로를 주지 못하고 오히려 아픔과 상처와 실망을 안겨 주고 있다는 가슴 아픈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천번 만번 생각하고 어려운 발걸음으로 교회를 찾아 나온 형제와 자매들에게 위로와 격려는 주지 못할망정 오히려 실망과 불안을 안겨준 잘못이 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신앙의 형태가 다양합니다. 그 모든 다양성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큰아들은 모두 기뻐 즐거워하는 잔치상에 찬물을 끼얹고 말았습니다.
동네 어른들과 이웃들이 돌아온 아들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잔치를 열고 있는 이 마당에 형이란 사람은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어째서 이 큰 아들은 모두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고 분노하는 것일까요?
보세요!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단지 아들을 찾아서 좋아하는 아버지의 즐거움에 함께 기뻐하고 춤을 추는 사람들입니다. 실상 이 집이 경사와 아무런 관계가 없지마는 같은 땅에 살고 있다는 인연 때문에, 같은 시대에 살고,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는 것 때문에, 함께 기뻐하고 모두가 나의 즐거움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잔치를 주도하고 더 흥겹게 해야할 형이 찬물을 끼얹어 싸늘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가정의 부끄러움이요, 아버지의 수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로부터 자식 놈을 잘못 두었다는 비난의 수군거림에 아버지는 마음이 아픕니다.
교회 공동체는 아주 보잘것없는 작은 소자의 삶에 함께 해야합니다. 드러나지 않는 작은 성도의 기쁨에 온 교회가 참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타나지 않는 이름 없는 이웃의 슬픔에 교회와 온 성도가 동참하여야합니다. 작은 자의 아픔과 슬픔을 나의 아픔과 슬픔으로 받아들여야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실천해야할 교회 공동체의 삶입니다. 기쁨과 감격을 더 크게 함께 하지 못할 지언정 마음에 상처를 주는 자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돌아온 동생에 대해서 지금까지 보여준 형의 태도를 잊어버리고 이제 어떻게 하면 가장 멋진 형다운 태도를 보여 줄 수 있을까요?
저는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있는 자는 더 받아 풍족하게 되는 성경의 진리를 기초해서 돌아온 아들로 인하여 잔치를 벌이고 있는 아버지에게 가서 “아버지! 얼마나 좋으십니까? 얼마나 기쁘십니까? 이렇게 기쁜 날 잔치가 이 정도가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저에게 돌아올 살진 송아지를 한 마리 더 잡읍시다. 그래서 더 큰 잔치를 열어 이 기쁨을 크게 더하시지요?”라고 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 큰아들이 아버지 앞에서 “아버지! 살진 몸으로 한 마리 더 잡아 잔치를 더하시지요?”라고 했다면 아버지는 아마도 이 큰아들을 껴안고 통곡하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어차피 지금은 내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것이지만 기분 좋게 쓰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감격해서 그래 고맙다 내 아들아 내지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 너 같이 착한 형이 있는데 내가 무엇이 걱정 되겠느냐?
이제 아버지는 잃어 버렸던 둘째 아들과 또한 다시 한번 큰아들의 사랑을 확인하고 믿음을 확인한 큰 아들로 인해 기쁨과 감격은 배나 넘쳤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만약 이 말을 동생이 들었다면 비록 탕진하고 돌아왔지만 가슴에 복 받치는 뜨거운 사랑으로 형과 동생은 감격의 눈물바다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세상에 형밖에 없구나!”라고 생각하고 형의 가슴에 머리를 묻고 춥고 배고프고 서러웠던 슬픔을 다 씻어버렸을 것입니다. 얼마나 고마웠겠습니까?
그리고 잔치에 참여하고 춤을 추고 좋아했던 동네 사람들이 이 말을 들었다면 어떠했겠습니까? “한마리 더 잡읍시다.” 이 말 한마디가 아버지의 기쁨과 돌아온 동생의 감격과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더 큰 행복과 기쁨과 감격이 넘쳤을 것입니다. 우리와 같이 한번 해 보십시다. “한 마리 더 잡읍시다” -할렐루야-
신앙의 훈련
신 32:9-12 / 송영태 목사
“휴가”란 노는 시간이 아니라 돌아보고 내다보는 시간이라면, 인생의 진정한 챔피언이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20년전 실제로 권투시합을 하다가 결국 사망한 김득구 선수의 생애를 다룬 영화가 “챔피언”이란 제목으로 상영되고 있습니다.
14세에 강원도의 바닷가 마을 거진에서 무작정 상경한 득구는 당시 권투를 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꾸던 꿈을 꿉니다. 맨주먹으로 세계 챔피언이 되어서 부와 명예를 얻겠다는 것인데, 사실 이것은 오늘 우리시대 사람들의 가장 일반적인 꿈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그 성공, 즉 “챔피언”의 개념을 의미 있게 선정합니다. 체육관에 입관하려는 득구와 몇 젊은이들에게 김현치 관장이 말합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 똥지게를 져도 그 분야에서 최고면 그 사람이 바로 챔피언이다”
김득구가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할 수 없어서 방황할 때 관장은 거울 앞에 득구를 세워놓고 말하길. “권투선수는 미스 코리아보다 더 거울을 많이 본다 그 이유는 싸워야 할 상대가 바로 거기 있기 때문이다. 거울 앞에 있는 바로 그 사람. 자기 자신과 싸워서 이기는 것이 승리다. 최선을 다하는게 승리이고 그렇게 하는 자가 바로 챔피언이다”
챔피언 맨시니 선수를 그로기 상태로까지 몰고 가며 선전했으나 결국 14라운드에서 다운당했고 마지막까지 다시 일어나려고 링줄을 붙잡고 안감힘을 쓰다 결국 쓰러지고 말았던 김득구의 삶이 바로 최선을 다한 챔피언의 모습이었습니다. 시신을 화장을 해놓은 김득구의 주검 앞에서 관장은 말합니다. “수고했다. 이제 집에가자”
김득구는 꿈을 추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세계 챔피언이 되지 못했지만 사실 챔피언이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골로새서 3장 23절의 말씀입니다. 바로 이것이 챔피언 정신이며, 믿음의 역사를 이루는 근거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말씀이 바로 신앙의 훈련입니다. 신앙의 챔피언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독수리를 가리켜 “새 중의 왕”이라고 부르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단순히 독수리가 덩치가 크다거나 사납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아닙니다. 독수리는 다른 새들과는 전혀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폭풍우가 불어오면 다른 새들은 전부 둥지를 찾아 숨어버립니다. 그러나 독수리는 날개를 펴고 그 폭풍우를 향해 날아오릅니다. 바람이 강하게 불면 불수록 더 높이 올라갑니다. 그리고 저 높은 하늘 꼭대기에 올라가서 구름 아래 폭풍우가 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유유히 날아다니는 것입니다. 이렇게 독수리는 다른 새들과는 전혀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새 중의 왕”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인생에 환난이 몰아치고 풍파가 닥치면 낙심하고 절망하고 숨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환난과 시련을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환난이 우리를 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한 단계 높은 곳으로 올리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인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은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말씀했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환난과 고통은 오히려 우리에게 새로운 소망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여러분이 겪고 있는 환난과 고통이 있다면 그것을 독수리처럼 이겨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흔히 “모세의 노래”라고 불리어집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생활 40년 동안에 이스라엘 민족을 보살펴 주신 은혜를 독수리가 자기 새끼를 훈련시키는 것에 비유해서 묘사한 것입니다.
본문 11절을 다시 봅니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첫째는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하였습니다.
독수리는 높은 나무 꼭대기나 절벽에 둥지를 트는데, 둥지 바닥은 거친 나뭇가지와 가시를 엮어서 만듭니다. 그리고 그 위에 부드러운 털과 풀로 덮습니다. 겉은 푹신하지만 그 속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숨겨져 있습니다. 여기에서 부화된 새끼 독수리가 어느 정도 자라 나는 것을 연습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미 독수리는 둥지의 부드러운 털과 풀을 다 날려 버립니다. 그러면 밑바닥에 숨겨져 있던 가시가 드러나게 됩니다. 이것을 본문에서는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하였습니다.
이제 새끼 독수리는 움직일 때마다 가시에 찔리게 됩니다. 도저히 둥지에 앉아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를 쓰고 어미 독수리의 등에 올라갑니다. 그러면 어미 독수리는 새끼를 태우고 높이 올라가서 밑으로 떨어뜨립니다. 새끼 독수리에게 나는 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게을러지고 나태해 질 때, “그냥 이대로가 좋사오니”하고 신앙의 잠을 자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둥지를 어지럽게 하십니다. 날카로운 가시들이 우리를 찌르게 하십니다.
‘요나’라는 선지자가 있습니다. 하루는 하나님께서 요나를 부르셔서 니느웨라는 성읍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니느웨의 죄악이 극에 달하여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시려고 하니 가서 “이 성이 곧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니 회개하라” 외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니느웨로 가기가 싫었습니다. 니느웨는 이스라엘과 원수지간입니다. 니느웨가 망한다면 당연히 기뻐해야 할 일인데 무엇 때문에 가서 회개하라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니느웨로 가는 대신에 정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그리고 배의 맨 아래층에 내려가서 누웠습니다. 이렇게 누워있다 보니 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여기 이렇게 숨어 있으면 하나님도 나를 못 찾으실 것이고, 가기 싫은 니느웨로 가서 회개를 선포하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편안한 마음으로 깊이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나가 탄 배를 흔들어 놓으셨습니다. 사나운 폭풍우가 불어서 요나가 잠들어 있는 둥지를 흔들어 놓으셨습니다. 가시에 찔리게 하셨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이 폭풍이 나의 연고라.” 고백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요나를 니느웨로 가게 하셨고, 회개를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이 일로 인해 니느웨는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뜻과 계획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을 망각하고 “그냥 이대로가 좋다. 이렇게 하루하루 편하게 사는 것이 좋다.”하면서 게으름의 잠을 자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누워있는 둥지를 흔들어 놓으십니다. 날카로운 가시들이 돋아나서 찌르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날지 못하는 독수리가 아니라 저 푸른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니는 독수리로 만드시기 위해 여러분을 훈련시키십니다. 가정을 뒤흔들고, 직장과 사업이 여기저기 찔려서 도저히 견딜 수 없도록 만드십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에 날카롭게 찔러대는 가시가 있습니까? 그것은 더 이상 그 자리에 누워있지 말고 하나님의 등에 업히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등에 업혀서 나는 것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믿고 살았던 것이 갑자기 사라지고 날카로운 가시만이 남아 나를 찔러올 때, 그것이 지금까지의 게을렀던 믿음생활을 벗어나라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다음으로 본문은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어미 독수리가 둥지에 있는 새끼들에게 날개를 펴서 나는 시범을 보이는 것입니다. “날개는 이렇게 움직이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너도 날을 수 있다.” 이렇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끼들은 어미가 하는 것을 보고 날개도 움직여 보고, 나는 시늉도 해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사는 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값있게 사는 것인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사람은 누군가를 닮게 되어 있습니다. 자식은 부모를 닮고, 제자는 스승을 닮습니다. 부부가 오래 살면 생긴 것도 서로 비슷하게 닮아가고 생각도 닮아갑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하나의 원칙이 있는데, 그것은 부부사이는 절대로 안 끼여든다는 것입니다. 목회 초년생 시절에 어떤 부인이 찾아와서 자기 남편을 야단을 좀 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유를 들어보니 정말 못된 남편이었습니다. 그래서 부탁 받은 대로 불러다가 야단을 쳐서 보냈습니다. 그 다음 주일이 되었습니다. 저는 은근히 그 부인이 찾아와서 고맙다고 할 것을 기대했는데 웬걸 다짜고짜 막 뭐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니 목사님이 우리 남편을 어떻게 했기에 저렇게 풀이 죽어서 축 늘어져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남편에 그 부인입니다. 그 사건 이후로 저는 다시는 남의 부부관계에 끼어 들지 않습니다.
사람은 서로 보면서 닮아갑니다. 좋은 것도 닮아가고 나쁜 것도 닮아갑니다. 생각도 닮고 행동도 닮아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정말 모범으로 삼고 닮아갈 수 있는 대상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우리가 정말 모범으로 삼고 닮아갈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성자라도 그가 한 시간 동안 생각한 것들을 종이에 적으라면 자신 있게 적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루는 어미 게가 새끼 게에게 야단을 쳤습니다. “너는 어째서 똑바로 걷지 못하고 자꾸만 옆으로 걷느냐? 똑바로 걸어라.” 그러나 새끼 게는 아무리 노력해도 똑바로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보다 못한 어미 게가 “에이그 한심한 것, 지금부터 내가 하는 것을 잘 보아라.” 하면서 시범을 보였습니다.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우리가 진정으로 모범을 삼고 본받아 닮아갈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앞길을 제대로 인도할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경험하는 바와 같이 세상에 믿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무리 좋은 부모라 해도 자녀의 장래를 책임질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선생님도 제자들의 미래를 인도해 줄 수는 없습니다.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우리는 서로에게 실망하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한계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닮아야 할 분, 우리가 정말로 우리 미래를 믿고 맡길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여러분의 인생을 독수리처럼 훨훨 날아가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이렇게 날갯짓을 해보아라” “이렇게 날아보아라” 가르쳐 주십니다. 다른 사람은 못 믿어도, 하나님은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하면 우리는 얼마든지 푸른 창공을 날아다니는 독수리가 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아들 이삭을 낳았습니다. 얼마나 예쁘고 귀엽든지 말 그대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매일매일 인생을 사는 것이 그렇게 즐겁고 기쁠 수가 없었습니다. 아들을 낳고 나서 아브라함은 뛰어 다니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밖에 나갔다가 돌아올 때 아들이 보고 싶어서 급히 오느라고 생긴 버릇입니다. 이렇게 일년이 지나고 이년이 지나 이삭은 걷기도 하고 말도 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총명하고 귀여운지 온 동네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브라함은 공연히 어깨가 으쓱해졌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이삭은 소년의 티를 벗고 청년의 모습으로 변해갔습니다. 이런 이삭을 바라볼 때마다 아브라함은 가슴이 뿌듯해지며 사는 보람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청천 벽력같은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네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 아들을 죽여 칼로 각을 뜬 다음 불에 태워서 제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마음 속에는 수많은 생각들이 오갔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하나님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하실 수 있는가? 분명히 이 아들을 통해서 내 후손이 하늘의 별들처럼 번성하리라고 약속하지 않으셨는가? 그런데 이제 와서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니” 아무에게도 말못하고 하룻밤을 꼬박 뜬눈으로 새우며 고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동이 터 올 무렵 아브라함은 결심을 합니다. “그래,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대로 해야지.” 그리고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산을 향해 떠났습니다.
그 결과 무엇입니까? 창세기 22장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만이 살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만이 복을 받습니다. 여러분이 때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를 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를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생각과 다를 때 여러분의 뜻을 꺾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십시오.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분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다가 죽을 위기에 놓인다면 하나님께서 구해주십니다. 하나님은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 분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다가 위기에 빠진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구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는 분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다가 손해를 보게된다면 하나님께서 몇 백 배 몇 천 배로 채워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만이 여러분이 살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아브라함처럼 순종하십시오.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복이 오늘 여러분에게도 임할 것을 분명히 믿습니다.
이어서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라고 했습니다.
어미 독수리는 새끼를 등에 업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떨어뜨립니다. 그런데 처음 날아보는 새끼 독수리가 제대로 날을 리가 없습니다. 몇 번 푸덕거리다가 돌멩이처럼 땅으로 곤두박질칩니다. 그러면 어미 독수리는 재빠르게 날아가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아 등에 다시 업습니다. 훈련을 시키되 절대로 땅에 떨어져 죽게 만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들에게 믿음의 훈련을 시키십니다. 가시같이 찌르는 것을 만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하십니다.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게 하십니다. 그 동안의 게으름을 떨쳐 버리고 믿음의 열심을 내게 만드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합니다. 굳게 결심을 했다가도 어느새 허물어집니다. 주님을 사랑하노라고, 주님 뜻만 따르겠노라고 다짐했다가도 어느 순간 세상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말씀대로만 살겠노라고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다짐했지만 어느새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내 욕심이 앞서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다시는 이런 죄를 짓지 않겠노라고 애통해하며 회개했지만 어느새 또 그 자리에 가 있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안간힘을 써서 날개를 푸덕여 보지만 어느새 다시 곤두박질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다시 한번 날개를 펴서 우리를 받아 주시고 등에 업혀 주셨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한번, 또 다시 한번, 우리가 날 수 있을 때까지 기회를 주시는 분입니다. 느헤미야 선지자는 “오직 주는 사유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 저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못남과 연약함을 아시는 분입니다. 한없이 은혜를 베푸시며 긍휼을 베풀어주십니다. 우리가 제대로 날개를 펴고 나는 날까지 인내로서 기다려주시는 분입니다.
마음껏 나르는 연습을 하십시오.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보십시오. 말씀대로 살다가 떨어지면 하나님께서 그 날개로 받아주십니다. 마음껏 사랑해 보십시오. 사랑하다가 혹 배신을 당하여 낙심이 된다해도 하나님께서 다시 등에 업어주십니다. 마음껏 베풀며 사십시오. 남에게 베푸는 것 때문에 가난해지면 하나님께서 다시 채워주십니다. 마음껏 용서하며 사십시오. 용서해서 내가 손해보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대신 갚아주십니다.
더 이상 둥지에 앉아서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여 날개를 펴고 드높은 창공을 날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선민입니까, 이방인입니까
신 32:9~12, 마 6:31~34 / 이성희 목사
1990년 걸프 전쟁이 한참일 때 영국군 세 명이 길을 잃고 비틀거리며 사막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부대 대열에서 이탈되어 굶주림에 기진하여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사막에서 미군 대장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병사들은 물었습니다. “여기가 어디입니까?” 미군 대장은 병사들의 무례함에 기분이 언짢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자네들, 내가 누군지 아나?”하고 말했습니다. 그 때 한 병사가 옆에 있던 다른 병사의 옆구리를 치면서 중얼거렸습니다. “이제 진짜 큰일 났다. 우리는 여기가 어딘지 모르고, 저 사람은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여러분은 구원받은 자입니까? 아직 구원받지 못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긍심으로 살고 있습니까? 우리 가운데 마귀의 자녀는 없습니다.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방인은 없습니다. 다 하나님의 선민입니다. 선민의 자긍심과 자녀의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누구인가?” 이 문제는 하나님을 알 때에 비로소 알 수 있는 문제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발견하였을 때 자신을 발견하고 고백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발견하였을 때에 자신을 발견하고 고백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시편 22:6에는 시편의 기자가 말합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디모데전서 1:15에는 바울이 고백합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알아야 당당히 살 수 있습니다. 자신감과 자존감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비로소 자신을 알게 되니 너무 기뻐서 당당히 외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정죄하리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한 스승이 있었습니다. 이 스승은 사람들이 그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하여 정말 무감각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제자 하나가 찾아와서 어떻게 내적인 자유의 단계에 도달했는지 물었습니다. 그는 큰 소리로 웃고 나서 말했습니다. “나는 스무 살 때까지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관심 없었다. 스물이 지난 후 나는 끊임없이 이웃들이 생각하는 것에 대해 걱정했다. 그리고 나서 쉰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나는 그들이 나에 대하여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내 자신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자신감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보는 내가 아니라 내가 보는 내 자신이 어떤 모습입니까? 선민입니까, 아니면 이방인입니까?
첫째, 이방인은 육을 염려하고 영을 염려하지 않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이방인들은 이것 외에 구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구하는 것은 오로지 육체를 위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것밖에 모릅니다.
사람이 돼서 동물적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동물과 사람의 다른 점이 많이 있습니다. 동물과 사람의 다른 것이 많은 것 가운데 사람은 육체적인 것만 추구하고 살지 못한다는 것이 다릅니다. 사람은 위를 향한 존재입니다. 사람이란 말의 헬라어 ‘안트로포스’는 바로 그런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래 만드신 사람은 영적 존재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이 생영이 된지라”고 합니다. 사람은 살아있는 영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살아야 참 사람의 가치가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주셔서 만든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적인 것만으로는 절대로 만족할 수 없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스펄전은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는 세상 염려의 삼위일체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한국인의 삼위일체는 조금 달라요. 입고, 먹고, 사는 집 문제 즉 의식주가 염려의 삼위일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만 해결되면 되는 줄 알지요? 그래서 오로지 이 염려에 매달립니다. 그러나 이 셋은 우리에게 영원한 만족과 안식을 주지는 못합니다.
염려란 헬라어 ‘메리스’란 말은 분열을 의미합니다. 마음이 온통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이 염려하는 것입니다. 먹는 문제 때문에 마음이 찢어지고, 마시는 문제 때문에 마음이 찢어지고, 입는 문제 때문에 마음이 찢어지고, 사는 집 문제 때문에 마음이 찢어집니다. 이것이 염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목숨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라고 하십니다. 세상에 우리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온 천하 다 얻고도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그런데 목숨 문제, 영혼 문제보다 세상에서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육적인 문제 때문에 염려하고 골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난 주간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어떤 여인에 대한 이야기에 나왔습니다. 42세의 한 여성인데 얼굴이 흉할 정도로 일그러지고 붓고 커진 여성입니다. 이 여성을 ‘선풍기 아줌마’라고 부릅디다. 아줌마란 말도 억울한 여성입니다. 이 여성은 20대에는 상당히 수준 이상으로 예쁜 얼굴을 가진 여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성은 다른 사람이 예쁜 걸 못 봐주는 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형을 시작했습니다. 성형도 제대로 했으면 그렇지는 않았을 텐데 흔히 “야매”라고 하는 부정시술을 한 것입니다. 자신의 얼굴에 실리콘을 주입한 다음부터 공업용 파라핀을 주사하고, 콩기름을 주사하였습니다. 정신 질환인 환청이 있어서 누가 “넣어라”고 하면 자신도 모르게 콩기름을 얼굴에 넣는 것입니다. 이 여성은 성형중독에 정신분열증까지 생기에 되었습니다. 지금은 이 여성이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정신과 치료를 마친 다음에 성형 치료를 받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정신과 치료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복음치료가 필요합니다. 여성이 예뻐지고자 하는 욕심은 누구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지나치면 병이 되는 것입니다. 이 여성의 관심은 육체적인 것, 예뻐지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이나 영혼에 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문제의 근원입니다. 얼굴이 예쁜 것이 얼마나 갑니까? 몸매가 아름다운 것이 얼마나 갑니까? 금방 사라집니다. 이야말로 풀의 꽃과 같이 시들고 맙니다.
베드로전서 1:24-25에는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라고 합니다. 우리의 염려가 금방 시들고 떨어지는 육체가 아니라 영원하고 세세토록 있는 말씀이어야 합니다.
2세기의 전승에 따르면 바울은 못생겼고, 키는 작고, 추하기까지 했으며, 대머리에, 눈썹은 짙고, 다리는 굽었으며, 매부리 코였다고 합니다. 바울은 인간적으로 보면 매력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혼도 안했습니다. 그는 결혼을 안 한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바울의 염려는 키 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멋있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염려는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영혼이었습니다. 복음이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7:10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합니다. 아무리 잘 먹고, 잘 마시고, 잘 입어도 결국은 죽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죽으려고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살려고 하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죽으려는데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이방인이며 하나님이 누군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느 부인에게 가정에서 하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자질구레한 것은 내가 하고, 큰일은 남편이 한다”고 하였습니다. 자질구레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집 사고팔고 땅 사고팔고 하는 것”등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남편이 하는 큰일은 무엇이냐고 했더니 “세계 평화와 남북통일 등을 염려하는 것”이라고 하였답니다. 우리가 좀더 큰일에 관심을 가지고 더 중요한 일에 염려해야 합니다.
경제가 염려되십니까? 더 중요한 우리 영혼에 대한 염려가 앞서야 합니다. 수능시험을 마친 자녀의 대학교 입학이 염려되십니까? 더 중요한 염려는 그들의 하늘나라 입학입니다. 자녀의 학사경고가 염려되십니까? 더 중요한 것은 학사경고가 아니라 구원경고가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둘째, 선민은 하나님이 채워주시므로 염려하지 않습니다.
염려는 이방인들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하십니다. 누구 아버지시라고요? 우리 아버지십니다. 누구에게 있어야 할 것이라고요?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아시고 채워주십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왜 아버지신줄 아십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려고 아버지 되십니다. 우리의 보호자가 되시려고 아버지가 되십니다. 아버지는 낳고 양육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도자, 구원자, 목자, 승리자이십니다. 이 모든 것이라도 아버지가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아니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받지 못할 것입니다.
아버지의 책임은 낳으시고, 먹이시고,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아버지라고 하십니다. 아버지가 부자인데 돈 걱정하면 아버지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의사인데 병을 걱정하면 아버지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450명의 바알을 섬기는 선지자와 대결하여 가뿐히 승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승리의 기쁨도 채 가시기 전에 악한 왕비 이세벨에 의하여 핍박을 받습니다. 그는 이세벨을 두려워하여 멀리 도망합니다. 로뎀나무 아래 앉아 삶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목숨을 거두어가 달라고 하소연합니다. 그리고 아예 죽기를 작정하고 먹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까마귀를 통하여 그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십니다. 까마귀까지도 하나님의 메신저였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도록 공급하십니다.
엘리사의 선지학교 제자, 요즘 말로는 신학생이 부인과 아들들을 남겨두고, 빚도 많이 진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신학생의 부인은 과부가 되었고 두 아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그런데 빚쟁이가 와서 그녀의 두 아들들을 데리고 가려고 합니다. 아들을 데리고 간다는 말은 아들들을 노예로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부인이 엘리사를 찾아왔습니다. 엘리사는 집에 무엇이 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 여인은 기름 한 그릇 외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 엘리사는 이웃에게 가서 그릇을 모두 빌려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들들과 함께 집에 들어가 문을 닫고 그릇에 기름을 부으라고 합니다. 그릇이 다 찰 때까지 계속 부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릇이 찰 때까지 기름은 계속 나왔습니다. 그릇마다 기름이 가득 찼습니다. 과부와 두 아들은 그것을 팔아 빚을 갚고 생활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빈 그릇도 차게 만드십니다.
마태복은 10:9에서 예수님은 “너희 전대나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가지지 말라고 하십니까?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다 알고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해롤드 스테판스는 “염려(worry)와 관심(concern)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염려하는 사람은 문제를 보고 관심가지는 사람은 문제를 해결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방인은 염려합니다. 선민은 관심을 가집니다. 우리 선민들은 하나님이 어떤 방법으로 우리에게 공급하시는가를 관심을 가지고 보는 사람입니다.
베드로전서 5:7에서 베드로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버리라”고 합니다. 베드로도 많은 염려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성숙한 다음에 보니 염려할 것이 아니라 염려를 맡길 것입니다. 아버지를 아는 사람은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알아서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선민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의 아버지입니다.
셋째,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해야 진정한 선민입니다.
결국 선민과 이방인의 차이는 우선법칙이 있습니다. 우선법칙 때문에 선민과 이방인이 구분됩니다. 쓸데없는 것을 구하고, 쓸데없는 것에 목숨을 걸고, 쓸데없는 것 때문에 기뻐합니다. 그러나 정작 목숨을 걸 데는 안 걸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선민과 이방인의 차이입니다. 먼저 구할 것을 먼저 구해야 진정한 선민입니다.
그 나라와 그 의는 물질보다 우선합니다. 그 나라와 그 의는 지식이나 학문보다 우선합니다. 그 나라와 그 의는 능력보다 우선합니다. 그 나라와 그 의는 우리의 명예나 인격보다 우선합니다. 영적인 것을 구하면 육적인 것은 저절로 해결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이 염려하는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선법칙은 베다니의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는데 열중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데 열중했습니다. 대접하는데 열중했던 마르다는 마침내 예수님께 자기 동생 일로 불평합니다. 대체로 덜 중요한 것 때문에 사람은 불평합니다. 사람들은 긴급한 것(urgency)과 중요한 것(importance)을 혼돈합니다.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 혼돈합니다. 최우선의 가장 큰 적은 차선입니다.
미국의 클로비스 채플이라는 목사님의 ‘두 척의 외륜선 이야기’라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 배가 멤피스를 출발하여 미시시피 강을 따라 뉴 올리언즈로 향하여 갑니다. 빠른 배에 타고 있던 선원들이 느린 배를 보며 비웃었습니다. 느린 배의 선원들은 은근히 화가 나서 더 빨리 가려고 애썼습니다. 결국 두 배는 시합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 한 배가 뒤로 처지게 되었습니다. 그 배에 싣고 있던 연료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목적지까지 가기에는 충분했지만 더 빨리 경주하기엔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선장은 배의 화물을 태우기 시작했습니다. 배는 빨리 가서 결국 경주에 승리했지만 수송해야 할 화물을 다 태우고 만 것입니다. 세상의 경주에 일등을 하기 위하여 화물을 태우고 있지 않습니까?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를 알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정신 차릴 겨를도 없이 빨리 달리고 있지 않습니까? 인생의 승리는 빠르게 가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가는 것입니다. 멋있게 가는 것이 아니라 방향이 확실해야 합니다.
제가 금요일이면 목장에 심방을 갑니다. 제가 간다면 좀 신경을 쓰는 것 같아요. 성경공부하고 기도하는데 가만 보면 성경공부나 기도보다 불에 올려놓은 밥에 더 신경 쓰는 것 같아요. 대추 넣고, 인삼 넣고, 오미자 넣고, 뭘 넣고 끓이는 차에 더 신경이 가 있는 것 같아요. 예배보다 식사나 차에 온통 신경이 가 있는 것은 우선법칙이 잘못된 것입니다. 잘 대접하려는 마음이야 고맙기 그지없지만 제가 더 기쁜 것은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말씀 듣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도 더 좋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딸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왔던 이방 여인, 가나안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께로부터 개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의 믿음은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방인이었지만 선민의 자격을 가졌습니다. 왜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믿음을 인정하시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다니엘 9:18에는 “우리가 주의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오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의 때문에, 주님의 긍휼을 의지하여 선민이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결 론
나폴레옹의 말이 도망쳤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날쌘 병사가 자기 말을 타고 가서 장군의 말을 잡아와서 말고삐를 장군에게 건네 주었습니다. 그 때 나폴레옹이 병사에게 “고맙네, 대위”라고 하였습니다. 이 병사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병사는 “감사합니다. 장군님”하고는 즉시 막사로 가서 짐을 챙겨서 장교 숙소로 갔습니다. 거기에서 병참병에게 대위의 군복을 받았습니다. 나폴레옹의 말 한마디에 장교로 바뀐 것입니다. 이 병사는 따지지도, 사양하지도, 의심하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아는 것은 힘을 가진 사람이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꺼이 받아 들였습니다. 왜 자녀가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너는 내 아들이다”, “너는 내 딸이다”라고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냥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렇게 할 만한 힘을 가진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선민이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너는 택한 족속이다”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외의 이유가 필요 없습니다.
에베소서 2:19에는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선포는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게 합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게 합니다. 어떤 이는 어릴 때 사진이 없다고 자기를 낳지 않고 데려온 게 아니냐고 부모님께 물어본답니다. 사진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모가 “너는 내 아들이야”, “너는 내 딸이야”라고 하는 한 마디입니다.
믿음은 이방인을 선민으로 만듭니다. 할례가 문제가 아닙니다. 족보가 문제가 아닙니다. 이방인처럼 염려하지 말고, 경제 때문에 움츠리지 말고, 선민의 자긍심을 가지고 당당하게 삽시다.
우리 앞에 모든 염려를 다 맡기고 모든 것을 주실 줄로 믿고 아버지를 따라 사는 좋은 아들, 예쁜 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훈련
신 32:9-12 / 피영민 목사
본문은 하나님께서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훈련시키셨는지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430년 동안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조직사회를 이루며 공생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200만이나 되는 애굽 탈출자들은 언제든지 폭도로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1장 2절에 기록된대로 호렙산에서 세일산을 지나 가데스바네아까지는 열 하루길이었지만, 그 길을 40년 동안이나 방황하게 된 것입니다.
40년 방황의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불신앙에 대한 형벌입니다. 그러나 더 큰이유가 있습니다. 마치 노예나 폭도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시를 주시고, 그 계시대로 국가를 이루며 살기에 합당한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특수 훈련기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자주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왜냐하면 애굽에서 우상숭배를 보면서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으시지만,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통해 당신의 존재하심을 알려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침마다 이슬처럼 만나를 내려주시고, 40년 동안 신발이 헤지지 않고 옷이 닳지 않도록 돌보아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보여주시는 증거임에도 불구하고 430년동안 우상을 보고 배우며 자라온 그들에게 아무 형상이나 상징도 만들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라는 명령은 하루아침에 따를 수 있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길의 특수훈련을 시키셨던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보호
군대에서 군인들을 훈련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하는 것은 모든 위험을 철저히 차단하고 훈련병들을 보호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훈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로다”(9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택하신 백성들을 훈련대상으로 삼으셨습니다.
대한민국의 군대가 북한 군인들을 훈련시키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군인들을 잘 훈련시켜서 강한 군대로 만드는 것이 대한민국 군대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택하신 백성이기 때문에 훈련을 시키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되었다면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훈련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먼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디를 훈련장소로 택하셨을까요? 본문 10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훈련시킨 곳은 광야였습니다. 낮에는 햇빛을 가릴 것이 없고, 밤이 되면 짐승이 부르짖으며, 아침이 되어도 먹을 것이 없는 황무한 곳이 바로 광야였습니다.
군대에 가서 훈련을 받아본 사람들은 훈련장이 얼마나 황무지 광야 같은지 잘 알 것입니다. 사회에서는 오월의 봄바람이 따듯하다고 말하지만, 훈련받는 사람에게는 그 봄바람이 매서운 추위로 다가옵니다. 얼마나 추운지 귀에 동상이 걸린 사람도 있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저의 군대 시절 오월달 훈련기간 중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땅바닥에 붙어 있을 때였습니다. 땅바닥에 누워서 총을 앞으로 잡고 데굴데굴 구르는 ‘굴러 이동!’이라는 훈련을 조교들이 시켰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싫다는 굴러 이동을 저는 가장 좋아했습니다. 왜냐하면 굴러 이동을 하는 동안에는 땅바닥에 누워있기때문입니다. 땅이 그처럼 따듯하고 편안한 곳인지 그 때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5개월 동안 혹독한 훈련을 받고 계급장을 달고 나면 훈련병들마다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가 훈련소 방향으로 소변이라도 본다면 사람이 아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황무지 광야는 떠올리기도 싫은 괴로운 장소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었더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 하루도 생존할 수 없을 만큼 척박하고 괴로운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황무지 같은 광야에서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본문 10절에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관한 4가지 중요한 동사가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첫째로 광야에서 어떤 구렁텅이에 빠져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먼저 만나주시고 찾아내십니다(find). 둘째로 찾아내신 후에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보호해 주십니다(shield). 셋째로 택한 백성들이 굶어 죽거나, 얼어 죽거나, 짐승에 물려죽지 않도록 돌보아 주십니다(care for). 그리고 마지막으로 눈동자처럼 지켜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guard). 눈동자는 매우 예민한 기관입니다.
작은 먼지 하나만 들어가도 고통스럽기 때문에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서 작은 먼지 하나를 씻어내고 맙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택한 백성들을 예민하고 신속하게 보호해주십니다.
성도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해있던 광야나 황무지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짐승이 위협하고, 적들이 공격해오기도 하며, 때로는 배고프고, 춥고, 질병에 시달릴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정신적인 고통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고통과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곳이 광야요, 황무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딘가에서 쓰러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디에 쓰러져 있든지 간에 찾아내시고, 방패막이가 되어 주시며, 돌보아 주시고, 눈동자처럼 지키시는 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눈동자입니다. 스가랴서에 “무릇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슥 2:8)고 기록되었습니다. 또 시편 기자는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시 17:8)라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을 찾아내서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훈련시키십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고 부르실 때에는 곧바로 “예!”라고 대답하며 하나님께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마귀와 세상이 부르면 “나는 예수님과 함께 죽은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하고 나가지 말아야 합니다. 마귀가 부르는 데 “예”라고 대답하면 안 됩니다.
어떤 목사님의 재미있는 경험담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이 고속도로를 주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볼일이 급해져서 휴게소를 찾아가 급하게 차를 주차시킨 후에, 화장실에 들어가서 용변을 보았습니다. 용변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옆 칸에서 어떤 사람이 큰 소리로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그래서 이 목사님이 엉겁결에 “예. 안녕하세요”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속으로 ‘목사는 화장실에서 일을 보는 중에도 사람들이 알아보는구나’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옆 칸에 있는 사람이 또 질문을 하였습니다. “목사님. 점심식사 하셨어요?” 그래서 이 목사님이 “아닙니다. 볼일 보고나서 식사할 예정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잠시 잠잠해지더니 조금 후에 옆 칸에 있던 사람이 조용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이제 그만 전화 끊어야겠습니다. 어떤 이상한 사람이 자꾸 옆 칸에서 말대답을 하네요.”
자기를 부르는지, 남을 부르는지 알지 못하고 대답하다가는 이렇게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에피소드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부르실 때, “예”라고 대답하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의 훈련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찾아내시고, 불러내셔서, 보호하는데 그치시는 것이 아니라, 또한 강하게 훈련시키십니다. 모세는 그 훈련을 독수리 훈련이라고 말했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이스라엘 백성의 인도자로서 40년, 도합 80년의 세월을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그 긴 세월동안 광야에서 독수리를 수 없이 많이 보아왔을 것입니다.
모세는 독수리가 어디에 집을 짓는지, 어떻게 새끼를 기르고 훈련하는지를 너무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 아버지를 아비 독수리에 비유합니다.
예레미야서 49장 16절의 말씀처럼 독수리들은 대체로 높은 산꼭대기에 집을 짓습니다. 혹 바위가 있으면 그 바위 꼭대기에 집을 짓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땅에서 사는 뱀이나 짐승들이 습격할 수 없는 안전한 둥지가 됩니다. 아비 독수리는 이 높은 곳에 만들어진 안전한 보금자리에서 때가 되면 새끼들을 훈련시키기 시작합니다. 모세는 이 독수리 훈련을 3단계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첫째 단계는 보금자리를 어지럽히는 것입니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11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30년 동안 애굽의 고센 땅에서 살았습니다. 어떤 곳이든지 사람이 2, 3년만 살게 되면 타향일지라도 마치 고향처럼 편안하게 살 수 있게 됩니다. 제가 1986년에 미국 유학길에 올랐을 때, 큰 아이의 나이가 5살이었습니다. 저와 제처, 그리고 큰 아이, 이렇게 세 식구가 함께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도착한 첫날밤에 잠을 자는데 갑자기 큰 아이가 울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를 달래다가 그만 제 처도 울고, 저도 눈물이 나서 함께 울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낯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낯선 미국 땅이었지만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적응을 하게 되었고, 삼 년 정도가 지났을 때에는 아주 편안하게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미국에서 5년을 공부한 후에 한국에 들어왔더니 한국이 더 낯설기까지 했습니다. 한국에서 문화충격을 이기고 적응하는데도 1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430년 동안을 고센 땅에서 살았으니 그 곳이 얼마나 편안한 곳이 되었겠습니까? 눈을 감아도 길거리가 훤히 보이고, 낯익은 부추와 양파와 마늘 냄새가 정겹게 풍기는 고향과도 같은 곳이 고센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편안하던 보금자리를 하나님께서 어지럽히기 시작했습니다. 요셉을 모르는 애굽 왕이 등극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노예가 되어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짓기 위해 동원되기 시작했습니다. 흙을 이기는 일, 벽돌을 굽는 일, 농사일 등 시키는 일마다 가혹하고 엄한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후손을 잘 낳았기 때문에 인구가 번성하는 것을 두려워한 바로는 히브리인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나일강 하수에 던져 죽이고, 여자아이들만 살려둘 것을 명령했습니다. 보금자리로 여기고 살던 고센 땅이 심하게 어지럽혀졌습니다.
독수리의 습관을 잘 아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아비 독수리는 새끼가 어느 정도 크면 밖에서 가시나무를 물어 와서 둥지 안에 넣어둔다고 합니다. 그래서 새끼들이 점점 커 가면 자꾸 가시에 찔리게 됩니다. 거기 계속 있다가는 피를 흘리고 죽게 되니 보금자리에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훈련시키기 위해서 때로는 보금자리를 어지럽혀 놓으십니다. 건강하던 몸에 원치 않는 질병이 생기기도 하고, 잘 되던 사업이 갑자기 꼬여 어렵게 되기도 합니다. 잘 되라고 양육하던 자식들이 갑자기 삐뚤어지기도 하고,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배반당하기도 하며, 평안하던 직장 생활이 고통이 되기도 합니다. 저지른 죄로 인해서 마음의 평안이 없을 때도 있고, 기쁨을 상실할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보금자리를 흔들어 놓으시는 방법입니다.
다윗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시 30:6-7). 어떤 사람들은 재물이 요동하지 않는 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녀가, 어떤 사람들은 직장이 요동하지 않는 산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한 번 어지럽히기 시작하시면 이 세상에서 요동하지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진동하고 요동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독수리 훈련 제 1단계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수리 훈련을 통해서 우리를 망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영적차원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시고자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보금자리가 어지럽혀진다고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독수리 훈련의 둘째 단계는 새끼들이 가시에 찔려 피를 흘릴 때에 아비, 혹은 어미 독수리가 그 새끼 독수리 위에서 너풀거리는 것입니다. 고통 받는 새끼들 위에서 날개를 퍼덕이면서 새끼들이 보금자리에서 나오기를 기다립니다. 커다란 날갯짓으로 새끼들이 날아오를 수 있도록 모범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주셔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모범을 다 보여주셨습니다. 밤이 맞도록 기도하시는 기도의 모범,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용서하시는 용서의 모범, 믿음의 모범, 사랑의 모범, 사역의 모범과 헌신의 모범까지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모범을 보여주시면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고, 기도해야 합니다. 또 사랑해야 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단순히 성경의 지식을 늘리기 위해, 자신의 관용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모범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아비 독수리가 둥지 위에서 너풀거리면 새끼 독수리들도 비로소 보금자리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아비 독수리를 따라 날개를 펄럭거리며 날아봅니다. 그러나 날개에 힘이 없기 때문에 여지없이 높은 곳에서 아래로 떨어집니다. 바람이 부는 대로 휩쓸려가며 계속 떨어집니다. 그러나 결코 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비 독수리가 날카로운 눈으로 새끼를 지켜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부터 훈련은 3단계로 넘어갑니다.
독수리 훈련의 셋째 단계는 아비 독수리가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아 그 날개 위에 얹는 것입니다. 날개에 힘이 없는 새끼 독수리는 한없이 추락합니다. ‘아, 이제는 죽었구나. 내 날개의 힘으로 안되는구나. 내가 저 바위에 부딪히면 산산이 부서져서 죽겠구나.’ 아마도 새끼 독수리는 추락하는 순간에 이와 같이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추락하던 새끼 독수리는 거대한 아빠 독수리의 날개 위에 업혀 다시 하늘로 비상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보금자리를 흔들어 놓으실 때, 계속 날개짓을 해도 힘이 없어 자꾸만 떨어진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은 결코 절망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한없이 추락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어느 순간이 되면 전능하신 하나님의 날개 위에 업혀서 다시 하늘을 나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새끼 독수리는 이와 같은 3단계 훈련을 통해서 스스로 날 수 있는 장성한 독수리가 되어 자생력을 갖게 됩니다. 자생력을 가질 뿐만 아니라, 다른 독수리와 함께 지낼 수 있는 공생력도 갖게 됩니다.
결 론
옛날에 어느 산꼭대기에 독수리 둥지가 있었습니다. 어미 독수리가 그 곳에 알을 4개 낳았는데, 그만 산에 지진이 나는 바람에 알 하나가 굴러서 닭 농장으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독수리 알을 달걀로 착각한 늙은 암탉 하나가 그 알을 품게 되었고, 몇 일후에 독수리 새끼가 태어났습니다. 늙은 암탉은 독수리 새끼도 자기 새끼인줄 알고 기르기 시작했고, 이 독수리도 자기가 닭인 줄 알고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새끼 독수리가 문득 하늘을 쳐다보자 높은 곳을 날고 있는 독수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하늘을 나는 독수리를 보자 부러운 생각이 들어 “나도 저렇게 날 수 있을까?”라며 탄식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닭들이 새끼 독수리를 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기 하늘을 나는 멋진 새는 독수리고 너는 닭이야. 닭 중에서도 덩치가 크고 못생긴 닭이지. 그렇기 때문에 너는 결코 하늘을 날 수 없어.” 다른 닭들의 핀잔을 들은 새끼 독수리는 결국 자기가 평생 닭인 줄 알고 살다가 달걀도 하나 못 낳아보고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성도들은 닭이 아닙니다. 아무리 새끼라고 할지라도, 어제 예수님을 믿고 갓 구원 받은 성도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독수리입니다. 그러므로 때론 우리의 보금자리가 어지럽혀지더라도 날개짓을 해야 합니다. 믿음의 날개, 기도의 날개, 용기의 날개를 펼쳐야 합니다. 날개를 펴도 힘이 없어 떨어진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망하거나 죽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날개 위에 업혀서 다시 하늘을 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의 이주선 집사님은 예전에 간암을 앓았던 분입니다. 간암 3기가 되어서 암이 여러 군데로 전이되는 바람에 의사들도 수술을 포기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생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맨발로 청계산을 등산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청계산 정상에 도착하면 힘들어도 크게 웃었습니다. 꾸준히 맨발로 청계산을 등산하시고, 기도회가 있으면 나와서 부르짖고 기도하시다가 암이 전부 치료되는 기적을 체험하셨습니다. 작은 날개라도, 힘이 없는 날개라도 믿음의 날갯짓을 해야 합니다. 인간은 안 된다고 할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은 하실 수 있을 줄 믿고 기도의 날개를 펴야 합니다.
좌절해도 용기의 날개를 펴고 일어나야 합니다. 날다가 떨어질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아비 독수리가 날카로운 눈동자로 지키다가 어느 순간 새끼를 등으로 받아 업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큰 날개로 우리를 업으시고 다시 하늘로 날게 하실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날개 치며 올라가는 독수리와 같은 삶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 4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