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작가 박경리의 사위가 김지하다.
나는 박경리의 소설 토지는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김지하를 눈여겨 보았다.
그러나, 김지하 시인이 박근혜를 지지했다고 한다. 그는 우리 세대의 영웅이고 나의 영웅이었다.
그의 감동적이고 해학적인 시와 글이 있었기에 20대의 우리는 지하 골방에 앉아서 마음껏 박정희 체제를 비웃을 수 있었고, 민주화 투쟁의 의지를 불태울 수 있었다. 그의 생명사상과 후천개벽 사상이 당시로서는 좀 뜨악하기는 했으나 지나고 보니 나름대로 혜안이 있었고,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시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1991년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을 때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는 그때 생명의 소중함이라는 보편적 담론을 펼쳤지만, 그것을 91년이라는 신공안정국의 국면에, 그것도 <조선일보> 지면에 실어서 보수에 큰 힘을 실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그의 변신 혹은 전향은 시작된 것 같다.
“인간은 후를 보아야 한다”
고 하니 아직 인생 후반부가 남은 나도 큰소리는 못 치겠지만, 그의 변신은 좀 이해하기 어렵다.
‘지식인은 자신을 알아보는 주군이나 군주에게 충성을 바친다’는 옛말이 있듯이, 그는 자신을 버린 옛 운동진영을 비판해왔고, 자신을 찾아주고 이야기를 들어준 보수세력의 품에 안겼다.
보수세력이 돈과 권력과 위세와 여유, 모든 것을 쥐고 있는 한국 땅에서 ‘인정받기를 원하는’ 똑똑한 지식인의 변신은 87년 이후 지금의 뉴라이트에 이르기까지 계속 있어왔고, 그의 변신도 그 흐름 속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내가 페이스북에 그의 행동을 ‘전향’이라고 했더니 어떤 페친은
“지식인이라면 적어도 사상적 ‘전향’을 해야 하는데… 변절이라는 생각만 듭니다”
라고 댓글을 달았고, 다른 친구는
“썩은 군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에게만 머리를 조아리는 법… 공자는 이를 ‘소인배’라 했죠”
라고 일갈했다.
그렇다. 늙고 외로워지면 사람은 보수화된다. 특히 어려웠던 시절의 동료들이 자신을 따돌린 채 자기들끼리만 한자리씩 해먹으면, 명성도 잃고 지위도 갖지 못한 지식인은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해 변절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세상이 힘들다고, 자신이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모든 사람이, 모든 노인들이 과거의 적에게 안기지는 않는다.
“지초와 난초는 매우 깊은 수풀에서 자라지만, 사람이 없더라도 자신의 향을 풍긴다. 군자가 도를 닦고 덕을 세우는데 곤궁하다고 해서 절개를 꺾어서는 안 된다”(芝蘭生於深林 不以無人而不芳 君子修道入德 不以困窮而改節)
는 공자의 말씀이 기억난다.
남이 알아주지 않고 경제적으로 곤궁하다고 변절하는 것은 글 읽는 자가 할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어린 시절과 청년기의 기본 교육과 인격도야가 중요하다는 경고로 들린다.
70~80년대는 참으로 험악한 시대였고, 90년대 이후 민주화가 되었다고 하지만 소수의 잘나가는 운동권 출신 외에 대다수 과거 운동세력은 여전히 힘겹게 살아간다.
김지하를 고문했던 세력은 과거의 운동권 명사들을 끌어들임으로써 여유와 아량을 과시하지만, 여전히 날을 세워야 하는 운동세력은 민주화 이후 지난 20여년 동안 자기편의 약간의 차이를 참지 못하고 거친 공격을 해댔고, 결국 상처를 안은 수많은 동료를 적의 품으로 쫓아냈다.
가버린 그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비난만큼이나, 그가 죽도록 고생하고 출옥했을 때 그를 따뜻하게 품어주지 못한 운동세력의 좁은 품이 한탄스럽다.
그리고 늙어서도 존경받을 수 있는 인물 한 사람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우리의 척박한 정치현실을 한탄한다.
민주화운동의 정신적·사상적 기반이 이렇게 취약했던가 되돌아보게 된다.
김지하의 죽음을 哀悼했던 것이 후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