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부산까지 - 속도에 대한 명상 10 / 반칠환
서울에서 부산까지
노란 실선을 긋는 것이 직업인 그 사내는
보았다
길 왼편의 암컷에게 가지 못하고
길 오른편에서 울부짖고 있는
오소리를, 개구리를, 도마뱀을
서울에서 부산까지
중앙 분리대를 쌓으며 가던 그 사내는
보았다
생명을 싣고 달리는 바퀴들이
생명을 밟고 다니거나
생명을 내동댕이치기도 하는 것을
서울에서 부산까지
아스콘을 새로 깔며 가던 그 사내는
들었다
수십 번의 봄이 지나갔으나
잎이 되지 못하고, 줄기가 되지 못하고
웅크려 앓고 있는 씨앗들의 음성을
그 사내 어느 날
서울에서 부산까지
둘둘둘 아스팔트를 말며 간다
젖은 흙살 위로 쏟아지는 저 붉은 햇살!
사내는 다시
부산에서 서울까지
나무를 심으며 온다
발자욱마다 질경이가 돋고
민들레 다시 핀다
꼭꼭 숨어 있던 동물과 곤충들
멸종 도감의 원색 화보를 밀치며
하나씩 둘씩 달려나온다
- 반칠환 시집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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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시┃
서울에서 부산까지 - 속도에 대한 명상 10 / 반칠환
빗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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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4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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