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서 경략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흔히, 이 주장을 입증할 만한 자료가 매우 많으며, 더구나 이를 반박할 수 없다고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요서경략설이라는 물건에는 사실 근원적인 문제점과 한계가 있습니다.
1. 무엇보다도, 요서(遼西)가 대체 어디이겠습니까? 요하의 서쪽입니다. 지방 군현으로는 요서군이었으며, 이는 난하에서 요하에 이르는 지역입니다. 백제가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그 지역을 본거지로 삼고 활동하고 있던 선비족을 퇴거시켜야 하며, 당연히 위진남북조 시대 북중국의 국가들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요서경략설이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라면 이는 북조계 사서에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한 번 살펴봅시다. 요서경략설의 사료라고 하는, 저 유명한 "요서, 진평 백제군" 이야기는 어디에 나오는 것입니까?
송서(宋書)에 나옵니다. 양서(梁書)에 나옵니다. (예, 송서를 베꼈습니다.) 남사(南史)에 나옵니다. (송서와 양서를 보고 썼습니다. 쓱삭쓱삭.)
보시다시피 북조계 사서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 의례 "북조는 백제에게 져서 영토를 빼앗긴 것이 창피해서 감춘 것이다." 는 식의 논변을 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만, 그런식으로 생각한다면 왜 그 반대는 안되겠습니까?
"남조가 북조를 미워해서, 욕보이기 위해 백제에게 땅을 배앗겼다고 날조했다." 는 것은 또 왜 안되겠습니까? 이성적으로 생각합시다. "조작입니다" 한 마디만 하면 뭔가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합리적인 태도가 못되지요. 뭔가 조작했다는 증거가 있어야 그런 결론을 내릴 것이 아니겠는지요.
사실 이러한 태도는, 중국의 역대 왕조를, 그 성격과 시기조차 고려하지 않고 모조리 등질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무책임한 태도와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5호 16국이 난립하던 시기, 어느 시점에 북중국의 어느 국가가 백제에게 공격당해 요서 땅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해 봅시다. 하지만 백제가 그 땅을 영구적으로 점령했던 것은 아니지요. 이를 중국측에 "도로 빼앗긴" 시점이 반드시 존재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대륙백제 실재론자들의 주장을 인정한다면 이는 근초고왕때부터 최소한 동성왕에 이르기까지 오래도록 존재한 셈인데 그렇다면 북조계 국가들의 수명을 생각해 볼 때, 어느 한 국가가 실지(失地)도 하고 나중에 복지(復地)도 했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잃어버린 녀석 따로, 되찾은 녀석 따로" 인 셈인데, 여러 나라들이 쟁패하며 서로 다투던 시절에, 누군가가 "백제에게 진 것이 창피해서" 요서를 잃어버린 사실을 감췄다고 해도, 나중에 이 땅을 되찾은 쪽에 의해 폭로되는게 더 자연스럽지 않겠습니까?
사실, 요서경략 긍정론자들의 주장을 몇 단계 덤핑해서 대단히 짧은 기간 동안만 백제의 해외 영토가 존재했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크게 줄어드는 것은 아니지요.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역사서는 후대의 왕조가 편찬하는 것이고, 동아시아에서 역사서를 편찬할 때, 망한 왕조의 결점을 들추어 내는게 드문 일도 아니고 말입니다.
역사서를 볼 때는 항상 그 안에 "오류"가 들어있을 가능성을 과소평가 해서는 안됩니다. 사실 이런 얘기도, 어디 가서 하게 되면 평소에는 늘 중국인들을 짱께라느니, 쥐나족이라느니 하고 부르며 무시하다가도 갑자기 흥분하며 "중국 역사관들이 바보란 말입니까? 예?!" 라면서 반발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말 하는 입장에서는 굉장히 답답하지요. 일단 그 남조의 사관들이 한반도의 국가를 이해하는 수준이 어떤 것이었는지 한 번 살펴봅시다.
其國在百濟東南五千餘裏 그 나라는 백제의 동남쪽 오천여리에 있다. (양서(梁書) 제이(諸夷)열전 동이 신라조)
......뭐지, 이 아름다운 바보들은.
사실 굳이 천 수백년 전 사람들의 무식을 들출 것도 없이, 어느 한 책에는 나오는데 다른 곳에는 나오지 않는다면, 양측의 정보가 그렇게 틀어지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백제가 정말 요서를 약유했다면, 이해 당사자인 북조 국가들은 왜 기록을 남기지 않았는가? 혹시 송서(宋書)의 찬자가 잘못된 정보를 전해 듣고 쓴 것은 아닌가?
사실, 송서에서 시작되는 요서 경략설이 실은 "개소문" 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게 할 증거가 몇 개 있지요. 다음으로 넘어가 봅시다.
2. 요서 경략설을 믿는 사람들이 또한 믿고 있는 것 가운데는, "사료를 편견없이 정확히 읽으면" 자연히 백제가 대륙 영토를 보유했음을 알 수 있고 이를 부정하는 것은 반도사관, 식민사관 때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만, 이는 사실과는 전혀 다릅니다.
요서 경략설은, 사료를 정확히 읽으면 읽을수록 점점 더 미궁에 빠져듭니다. 왜냐? 바로 흔히 인용되는 "진평군 진평현" 이야기 앞에는, 백제가 요서를 언제 점령했다는 것인지 알 수 있게 해 주는 문구가 같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죠.
其後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그 후 고구려가 요동을 약유하며, 백제는 요서를 약유하였다. (송서 이만열전 백제)
晉世句驪既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 진나라때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약유하니, 백제 역시 요서를 점거하여 영유하였다. (양서 제이열전 동이 백제)
이것을 보면 백제의 요서 약유는 항상 고구려의 요동 점령과 같은 시기인 것으로 지적되고 있으며, 양서에서는 아예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한 후에 백제가 요서를 점령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한 것은, 주지하다시피 광개토왕이 후연과의 전쟁에서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광개토왕 초년부터 백제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연전연패하며 국세가 쇠약해지고 있었는데, 갑자기 대규모 선단을 동원해서 밑도끝도없이 해외로 원정을 떠났다는게 과연 가당키나 하냐는 문제가 떠오를 수 밖에 없지요.
사실 이런 애기 하면, "어? 백제가 요서에 진출한 건 근초고왕 때 아닌가요?" 라며 의아해 하는 사람이 있겠지요. 그 주장은 사실, 해외 영토 경영이라는 놀라운 일을 가능케 하려면 최고 전성기였던 근초고왕 때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인식에서 나온 "해석" 이지, 사료의 어디에도 없는 얘기입니다.
자! 그러면 정직하게 얘기해 보죠.
그러니까 지금 "요서경략" 이 실재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송서에도 쓰여있습니다. 양서에도 쓰여 있습니다. 이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라고 말 하다가도, "그럼 언제...?" 라고 물으면, "그야 당연히 백제가 최전성기였던 근초고왕때이겠죠." 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 사람들이 떠받들고 있는 송서니, 양서니 하는 책에는 분명히 고구려가 요동을 약유하였을 때(혹은 그 후!) 백제가 요서를 점유했다고 되어 있는데도 말이지요. 이 기사를 그대로 신용하게 되면, 북쪽으로 광개토왕에게 하루가 멀다하고 털리던 주제에 경악스럽게도 백제의 군대는 엉뚱한 요서 땅을 정복하러 떠났다는 바보같은 스토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요서 경략 긍정론자들은 아예 사료 자체를 에누리 해서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는 사실상 송서, 양서의 기록이 지닌 신뢰성이 보통의 "사료" 보다 떨어진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요서 경략 시점에 관한 이러한 진상은, 앞의 1번 논의와 관련하여 또 하나의 미궁을 만들어냅니다.
3. 양서에는 요서 영유 시점이 진나라 때(晉世)라고 되어 있지요. 양직공도에는 더욱 구체적으로 진말(晉末)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동진은 420년에 망했으니까 진말이면 광개토왕이 백제를 관광보내던 바로 그 때로군요... 사실 근초고왕때건 뭐건 마찬가지이지만. 이 시기의 역사는 진서(晉書)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진서에는 백제가 요서를 영유했다는 말 따위는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왜 안나올까? 창피해서 감추려고?
하지만 당시 진(晉)나라는, 북중국을 이민족에게 빼앗기고 양자강 남쪽으로 도망가서 동진(東晉)이 된 상태였습니다. 백제에게 요서를 빼앗긴건 바로 진나라의 적인 북중국의 오랑캐 종족들인데, 대체 무슨 의리가 있어서 그들의 창피함을 덮어준다는 것이겠습니까....
게다가 진서에는, 진나라가 북쪽 이민족에게 허다하게 패배한 것도 일상 다반사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체 무엇 때문에 백제의 요서 영유를 감추어야 한다는 것인지 납득하기 힘듭니다.
4. 위에서 잠시 언급한 양직공도는, 백제의 풍속을 언급한 남조계 자료로는 최초의 것으로, 여기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百濟舊來夷馬韓之屬 晋末 駒驪略有遼東 樂浪 亦有遼西晋平縣 백제는 옛날 내이 마한의 후예이다. 진말에 고구려가 요동을 약유하니, 낙랑 역시 요서 진평현을 영유하였다.
이 말은 뭔가 굉장히 이상하지요. 백제 얘기하다가 갑자기 웬 낙랑? 더구나 낙랑은 이미 동진 초인 313년에 고구려에 의해 축출되어 요서로 이치되었으니 전혀 이런 곳에 나올 맥락이 아닌데 말이지요. 여기서 떠오르는 강렬한 의심은, 바로 이런 것이지요.
" 이 작자들, 지금 혹시 낙랑하고 백제를 혼동하고 있는거 아냐?! 혹시 낙랑군이 요서 여기 저기 떠돌던걸 잘못 전해듣고, 백제가 요서를 점령했다고 착각한 거 아냐??"
이 풀리지 않을 의심을 더욱 부채질하는 진서의 한 대목.
六月, 遣使拜百濟王餘句為鎮東將軍, 領樂浪太守 6월, 사신을 보내 백제왕 여구(근초고왕)를 진동장군령낙랑태수로 봉하였다. (진서 제기9 간문제 건원 2년)
5. 이번에는 남제서에 나오는 백제와 북위의 전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만, 사실 이게 왜 대륙백제의 증거가 된다는 것인지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 전쟁이 과연 실제로 있었는가? 백제와 싸운 적국이 북위가 맞는가? 하는 문제를 떠나서 말입니다.
사실 남제서의 어디에도 백제가 요서에 영토를 가지고 있다는 말 같은 것은 없으며, 문제의 전쟁 묘사 가운데는 "목간나가 대선(臺船)을 격파했다" 는 말도 나오고, 또 표문을 가지고 남제에 파견된 사신이 바다를 건너갔음도 지적되어 있기 때문에, 북위가 실제로 쳐들어왔다 해도 바다를 건너서 쳐들어왔다고 보기에 무리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길, "북위의 군대는 기병 수십만이다. 그렇게 많은 기병이 해상으로 이동할 수는 없다. 이동할 수 있다 해도 고구려 연해를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백제의 요서 영토에서 전쟁이 일어났다고 해야 설명이 된다." 라고 하지만.....
이미 그 표문 자체에도 船이라는 말이 나오므로, 북위의 침략군에 수군이 있었다는게 분명한데도 자꾸 "기병 수십만" 이 글자 그대로의 사실이라고 우기는 것도 못봐줄 노릇이고, 더구나 "기병 수십만을 이기는 군대" 를 백제쪽에서 출격시키려면 역시 고구려 연해를 통과해서 요서까지 가야하겠지요.
6. 백제가 보유했다는 "진평군 진평현" 이라는 것도 역사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첫째, "진평현" 은 진(진)나라때 설치된 울림군 산하 진평현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오늘날의 광서에 있던 지명이고,
"진평군" 은 유송때 진안군을 개명하여 만든 지명인데 복건에 있었으며, 그 산하에는 "진평현" 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둘 다 요서와는 아무 관계 없는 곳.... "백제가 만들어 붙인 지명이다" 라고 하면 빠져나갈 구멍은 되겠지만 그렇게 하면 더 이상 사료를 통해 백제군의 존재를 추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더구나 소위 광서의 "백제허", "백제향" 이라고 하는 것은 백제의 흔적이 아니라 광서 장족의 토착어에서 나온 말입니다. 사실 백제허와 관련된 우리나라의 방송 내용은 비웃음거리가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요. ㅡㅡ;;
안습의 백제향(링크)
요서 경략설을 주장하고 싶은 사람들은,
1. 사료가 자신들의 편이라는 믿음을 버려야 함. 사료를 그대로 믿겠다면 백제의 요서 약유 시점이 고구려의 요동 약유 이후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 때 백제는 이미 고구려한테 관광당하고 있었는데다 요서에는 후연(後燕)이 떡하니 자리잡고 있어서(이 나라의 수도가 바로 전통적으로 요서의 중심지였던 조양(朝陽)이었음) 백제의 진출은 사실상 불가능함.
2. 조작론에 대한 허망한 믿음을 버려야 함. 중국인들이 수치를 감추려고 역사서를 조작했다면, 제일 먼저 뜯어고쳤어야 할 남조계 역사서들은 왜 조작하지 않았을까?
3. 앞의 1,2의 자연스러운 귀결로, 요서 경략 실재론을 주장하고 싶은 사람들은 5호 16국의 역사 속에서 백제가 요서에 잠시 진출했다가 어느 순간 소리소문 없이 스스륵 퇴거했어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 몇 년 정도의 타이밍을 골라내야 함. 과연 그게 언제일까? 아니, 그보다 그런 타이밍이 있기나 했을까?
4. 3번을 해낸다 해도, 양직공도에는 요서경략의 주체가 낙랑으로 나와있고 요서에서는 백제 관련 유적, 유물이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끝없이 까이는 것을 감수할 강인한 정신력을 지녀야 함.
부가. 역시 남조계 역사서인 <<건강실록>> 에 나오는, 백제 영토의 아스트랄한 위치.
起晉世受蕃爵自置百濟郡在高麗東北 진나라때 일어나 번작을 받았으며 백제군을 설치하였으니 고구려의 동북쪽이었다.
.....이인간들, 이번엔 대체 뭐하고 헷갈린거냐. 설마 부여냐.
하긴 백제가 남부여였지. (ㅡㅡ;;;;)
그나저나 대륙백제설은 "정설" 이 아닙니다.
국사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정설" 을 수록한 국사편찬위원회 발간 <<한국사>> 에서는, 오히려 대표적인 대륙백제 부정론자인 유원재 교수의 논문을 통해 백제의 요서경략과 관련된다고 믿어지는 사료의 가치를 하나 하나 부정하고 있으며, 더구나 유원재 교수는 남제서에 기록된 전쟁에서 백제와 싸운 나라는 실제로는 고구려였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특히 근래에는 종래의 근초고왕 마한정복설마저 사실상 무너지면서 "국력이 최강이었던 근초고왕때 요서에 진출했다" 는 애초의 명제마저 비빌 언덕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대륙백제설이 정설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은 대체 그게 어딜 봐서 정설이라는 것인지 설명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 네이트 지식QnA, SHaw [2차 인용 링크] -
첫댓글 정설로 받아 들여지지 않은데는 다 이유가 있었군요 좋은글 고맙습니다. 근초고왕의 마한정복설이 무너졌다는건 무슨 소리죠?
↑↑ http://orumi.egloos.com/214221
그런데 백제의 요서경략시기를 광개토대왕이 깡패짓하던 그 시기로 바로잡는건 약간 무리가 있는듯 싶네요. "고구려가 요동을 뺏으니까 낙랑(중국애들이 백제와 낙랑을 흔히 혼동하니 백제로 봐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애들도 진평군을 가져갔다" 라고 양직공도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게 고구려와 백제가 시간대를 약속해서 5분 간격으로 할리는 없을테고, 길게 보자면 1~2년의 시간간격이 아니라 20~30 간격일수도 있는 것이거든요. 확실히 백제는 광개토대왕한테 굴복하고 난 뒤로도 계속 고구려에게 저항을 해 왔고
후대 왕들도 외교에 힘을 쏟아부으면서 대외관계 개선에 노력했고(그당시 배띄워서 사신 보내는것도 엄청난 일일겁니다), 개로왕도 고구려의 필살 라이트훅에 당해서 그렇지, 참살 이전에는 도성 정비와 거대한 토목공사를 여럿 시행하며 국력을 과시하는 치적(?)을 남긴것을 보니 광개토대왕의 정벌이 개로왕 죽음 이후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하면서 궁성도 제대로 짓지 못하고 빌빌거렸던 정도는 아니었던것 같습니다. 물론 개로왕대까지는 70년이 지난 시간이지만 말입니다.
게다가 광개토대왕 이후 후연은 확실하게 정변에 내분에 나라 말아먹기 스킬트리를 착실하게 타고 있는데다 후연이 망하고 북위가 후연이 지배하던 일대를 홀라당 간단하게 편입했을리는 없을 것이니, 만약 백제가 요서를 경략했다면, 구이신왕과 개로왕대 사이, 그리고 더 가까이 가자면 후연멸망 이후 10년 이내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그리고 상당한 규모의 영토일지는 미슷헤리지만 북조 사서에 아무런 내용도 없는것을 보니 (있다는 전제하에) 북위가 볼때 별로 신경이 안쓰이는 지역, 아니면 백제가 영유한 후 친선도모를 위해 반환했을 가능성도 있겠죠.
물론 관련 유물이 지역에서 나오지 않는 데다가, 진평군은 어디인지(한조에는 진평군이 있긴 합니다만 그게 남북조까지 유래되진 못하고 완전 내륙 노른자땅이라=_=), 그리고 그 역사적 의의를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는 도통 미스테리입니다. 게다가 고구려가 중국내 세력과 요동을 주거니 받거니 한것도 사실이니 "백제가 언제 요서로 진출했을까요?"도 추정이 어렵고, 낙랑을 그냥 낙랑군으로 보자면 양직공도에서 어떤 의도로 백제국사쪽에 (백제아해들이랑 하등 상관이 없는) 고구려와 낙랑군을 같이 기입했는지도 아리송하니 당췌 끝까지 수렁속으로 빠져드는 문제이지 말입니다.
음. 이런 반박 자료도 올려주시고...잘 읽었습니다.
애초에 반박할 가치조차 없는 주장이었어요.
원래 카페 방침은 환Q들은 상대조차 안하고 씨를 말려버린다..는 것이지만, 원문을 올려주신 분이나 Highly 님의 경우에는 골수 환Q라기 보다는 환Q적인 것에 '혹하는' 단계에 있는 정도라고 판단되어 따로 답글을 작성한 것입니다.
구제할 바 없이 넘어가버린 놈들은 상대조차 안하겠지만, 아직 완전히 넘어가지 않은 분들은 정성을 다해 진실을 알려주고 구제할 수 있도록 노력함이 당연한 것이겠지용.
광개토대왕때 두들겨맞은 백제긴 하지만 개로왕때도 제법 치고 올라가 예성강선까지는 다시 수복을 했다더군요. 그러나 해안가 각 방어선 복구가 안되고, 북한강-남한강 상류지역의 토착세력에 대한 영향력 회복도 안되 고구려는 예성강 라인까지 둘러쳐 놓은 백제 방어선을 그냥 무시하고 우회해 한성을 공략했다고 들었습니다.
Temuchin/ 저 네이트 글의 원작자로서(bnbm6이라는 분은 누구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제 생각을 말씀을 드리자면, 일단 후연이 망한 뒤에 그 영토는 북연에 승계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북위가 이 땅을 점거하기까지 여러 세력이 난립해서 백제도 한 몫 낄 수 있는 것 같은 그런 여지는 없었다고 여겨집니다. 북연 정권이 아예 망할 때 까지 기다린다면 너무 시간차가 길어지는데다, 그 때 진은 이미 망했으므로 진세라던가, 진말이라고도 할 수가 없어져 버립니다.
아, 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 북연 정권이 망했을때 아마 난립했을까? 였습니다. 북연 멸망과 진조 멸망은 20년 내외로 완투쓰리로 같이 나가 떨어지는데, 제 생각엔 그것을 통틀어 진말이라 서술했을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유물이 없는점이나 북조 기록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점을 보면 뭐 이것저것을 먼저 가정한 후의 추측일뿐 무게가 실리는건 아니지요. 유물은 그렇다 치고 북조 사서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것은 데미지가 크지 말입니다.
원작자분이라고 하셨는데, 제 개인적인 의문점은 왜 양직공도 백제국사편에서 고구려와 '낙랑' 이라고 했는지 궁금합니다. 이미 백제라는 명칭으로 국제사회에서 불리는데, 어찌 그당시 (대방과 함께 흔히 붙는 백제의 책봉지이긴 합니다만 백제가 복속한적이 없고 오히려 고구려가 넉아웃시킨)낙랑을 백제와 혼동할지, 그리고 혼동이 아니라면 왜 백제와 전혀 상관없는 고구려와 낙랑을 백제국사편에 같이 기입했는지도 궁금합니다. 개인적으로 그정도로 쓴 사람이라면 공부도 많이 했을것이고 국제사회 일도 빠삭할텐데 바로 옆동네인 백제와 낙랑을 혼동하는 쪼다짓을 해버리니;;
Temuchin /(1)엄연히 진이 망한 뒤이므로 진말이라고 쓸 수는 없습니다.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_-a 어익후.. 저 bnbm6 이라는 사람이 쇼님 글을 무단도용 한 것이였군요... 잽싸게 원저자를 수정하겠심더.
Temuchin/(2)그 당시 남쪽 사람들은, 한반도의 정세에 대해 뭔가 잘못된 정보랄까, 인상이랄까, 그런 것을 갖고 있었던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수 있는데, 위에 제시한 진서 간문제기, 양서 제이전 신라, 그리고 건강실록의 기록이 어느 정도는 그 실상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중국 사료에서 외국에 관한 기록은, 중국과 직접 교섭한 내용의 경우에는 사료적 가치가 높지만 그 나라의 내부 사정 같은 문제에 있어서는 종종 오류가 나타납니다. 이런 것은 당시의 교통 사정이나 통신 기술에 의해 정보력에 한계가 주어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