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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마지막 노래(2)
신 32:1-14
1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
2 내 교훈은 비처럼 내리고 내 말은 이슬처럼 맺히나니 연한 풀 위의 가는 비 같고 채소 위의 단비 같도다
3 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전파하리니 너희는 우리 하나님께 위엄을 돌릴지어다
4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5 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고 삐뚤어진 세대로다
6 어리석고 지혜 없는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네 아버지시요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 그가 너를 만드시고 너를 세우셨도다
7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
8 지극히 높으신 자가 민족들에게 기업을 주실 때에, 인종을 나누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백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9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
10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11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12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13 여호와께서 그가 땅의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시며 밭의 소산을 먹게 하시며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서 기름을 빨게 하시며
14 소의 엉긴 젖과 양의 젖과 어린 양의 기름과 바산에서 난 숫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밀을 먹이시며 또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게 하셨도다
< 설 교 >
너는 날 수 있다
신 32:9-14 / 노경모 목사(초대교회)
성경은 하나님을 비유하는 말로 여러 단어를 사용합니다. 양인 하나님의 백성들을 잘 양육하고 보호하고 인도하신다는 뜻으로 하나님을 목자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시편 23:1의 말씀은 참 유명한 말씀이지요.
하나님을 우리의 왕으로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을 잘 다스리신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성경에는 하나님을 독수리와 같은 큰 새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어 주소서’,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나이다.’, ‘주의 날개 아래에 숨나이다.’, ‘주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는다.’, ‘주의 날개 아래 모은다.’, ‘주의 날개로 덮는다.’ 라는 표현들이 시편을 중심으로 해서 참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폭풍우가 불어오면 다른 새들은 전부 둥지를 찾아 숨어버립니다. 그러나 독수리는 날개를 펴고 그 폭풍우를 향해 날아오릅니다. 바람이 강하게 불면 불수록 더 높이 올라갑니다. 그리고 저 높은 하늘 꼭대기에 올라가서 구름 아래 폭풍우가 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유유히 날아다니는 것입니다. 이렇게 때문에 독수리를 새 중의 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이 하나님을 닮기를 바라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자꾸만 하나님을 닮아 가야합니다. 하나님의 아버지의 성품을 닮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이 추구해가야 할 당연한 신앙의 자세입니다.
어미 독수리는, 강인함, 높이 비상하는 것, 높은 하늘에서의 여유로운 자태, 비바람과 폭풍우를 이겨내고 멋지게 나는 그 모습을 새끼 독수리가 닮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자녀인 우리가 강인해 지기를 바랍니다. 작은 비바람에도 갈대처럼 흔들리는 것이 믿음에 견고히 서는 그 강인함을 우리가 갖기를 원하십니다. 땅에 것만, 세상 것에만 목을 매고 염려와 근심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위엣 것을 찾으며 창공 위를 유유히 날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조그마한 상처에도, 작은 어려움에도 충격을 받아 비실비실 거리는 유약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힘차게 비상하는 그러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를 믿고 나를 바라보는 자는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하늘을 높이 나는 거와 같은 그러한 힘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그런데 우리는 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믿음이 약해서 나는 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은 지 오래되지를 않아서 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성격상 소극적이라서 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여러 가지 면에서 어리고 부족하기 때문에 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날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날 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아니 날기를 시도해 보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나는 날 수 없다는 식으로 하나님께 말했다가 야단을 맞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세가 그랬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왕궁에서 바로 왕의 아들로서 40년간 애굽의 학문과 무술을 배우고 혈기와 의협심이 불 타 올랐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애굽에서 고생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해내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애굽 사람을 쳐 죽이고 바로 왕이 두려워 도망을 칩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양을 치는 일을 합니다. 이제 그는 노인이 되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바로 왕의 손에서 구해 내라고 했지만 모세는 할 수 없다고 여러 번 거절을 합니다. 나중에는 하나님께서 화를 내십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내가 주는 말을 선포하라고 사명을 주셨지만 예레미야는 못하겠다고 버티었습니다. 아이라서 자기는 말을 할 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야단을 치셨습니다. 내가 네 입에 할 말을 줄 것인데 왜 그렇게 염려하고 두려워하느냐고, 너 자신을 아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이 하나님 처럼 높이 날기를 원하십니다. 높이 비상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날 수가 있다고.. 네가 너희를 날게 해 주겠다고.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날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날 수 없다는 부정적이고 불신앙적인 생각과 말과 자세를 다 청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날게 하기 위해서 몇 가지 일을 행하십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잘 깨닫고 준비하면 저와 여러분이 참 멋지게 날 수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로 날게 하기 위해서 때로는 우리의 둥지를 어지럽히십니다.
오늘 본문을 흔히 "모세의 유언의 노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생활 40년 동안에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시고 보살피시고 채워주셨습니다. 얼마나 멋지게 그리고 아름답고 풍성하게 인도하셨는가를 13-14절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가 땅의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시며 밭의 소산을 먹게 하시며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서 기름을 빨게 하시며 소의 엉긴 젖과 양의 젖과 어린 양의 기름과 바산에서 난 숫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밀을 먹이시며 또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게 하셨도다'
여기서 '땅의 높은 곳'은 가나안 땅을 말합니다. 가나안을 땅을 정복하고 다스릴 것을 말합니다.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게 기름을 빤다.’는 말은 자갈과 바위가 많은 가나안 땅에서 조차 축복을 받아 많은 소산물을 얻을 수 있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최고의 소젖과 어린양을 기름을 먹게 하셨고, 최고의 수양과 염소를 먹게 하셨고 아름다운 밀과 최고의 포도즙을 마시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즉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최고의 좋은 것과 풍족한 것으로 채우셨다는 밀씀입니다.
그런데 이런 좋은 것으로 주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하신 것이 있습니다. 즉 '연단'이요 '훈련'이었습니다. 그냥 좋은 것을 주신 것이 아니라 이것을 받을 만한 그릇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독수리가 날아야 하는데 날지 않으려고 합니다. 날아야만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약속과 기업들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날지 않고 그냥 둥지에 있으려한다면, 보금자리에만 머무려고 한다면 새끼 독수리는 점점 날 수가 없게 됩니다. 날개가 필요 없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어미 독수리는 새끼 독수리가 날도록 보금자리를 흩어버리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11절의 말씀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입니다.
독수리는 높은 나무 꼭대기나 절벽에 둥지를 트는데, 둥지 바닥은 거친 나뭇가지와 가시를 엮어서 만듭니다. 그리고 그 위에 부드러운 털과 풀로 덮습니다. 겉은 푹신하지만 그 속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숨겨져 있습니다. 여기에서 부화된 새끼 독수리가 어느 정도 자라서 날 때가 되면 어미 독수리는 둥지의 부드러운 털과 풀을 다 날려버립니다. 그러면 밑바닥에 숨겨져 있던 가시가 드러나게 되지요. 이것을 본문에서는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제 새끼 독수리는 움직일 때마다 가시에 찔리게 됩니다. 도저히 둥지에 앉아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를 쓰고 어미 독수리의 등에 올라갑니다. 그러면 어미 독수리는 새끼를 태우고 높이 올라가서 밑으로 떨어뜨립니다. 새끼 독수리에게 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가 날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믿음이 게을러지고 나태해 질 때, "그냥 이대로가 좋사오니" 하고 신앙의 잠을 자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둥지를 어지럽히십니다. 날카로운 가시들로 우리를 찌르게 하십니다.
우리들 중에는 날카롭게 찔러대는 가시가 있어서 고통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것은 더 이상 그 자리에 누워 있거나 주저 앉아 있지 말고 하나님의 등에 업히라는 하나님의 신호입니다. 하나님의 등에 업혀서 나는 것을 배우라는 신호입니다. 우리들이 지금까지 믿고 살았던 것이 갑자기 사라지고 날카로운 가시만이 남아 나를 찔러올 때, 바로 그때가 지금까지 나태하였던 믿음생활, 게을리 했던 믿음생활을 벗어버리라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십니다. 그때는 우리는 두려워하거나 염려하고 걱정해서는 안됩니다. 바로 하나님이 나를 날도록 하시기 위함이구나 생각하고 더 이상 둥지에 안주하지 말고 거기 나오십시오. 그 순간 우리가 나는 것을 체험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날게 하기 위해서 때로는 우리 위에 너풀거리십니다.
11절에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라는 말씀이 나오지요. 이것은 어미 독수리가 둥지에 있는 새끼들에게 날개를 펴서 나는 시범을 보이는 것입니다. "날개는 이렇게 움직이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너도 날을 수 있다." 이렇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끼들은 어미가 하는 것을 보고 날개짓을 하다가 나중에는 결국 날게 되는 것이지요. 움직여 보고, 나는 시늉을 하다가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사는 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값지게 사는 것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사람은 누군가를 닮습니다. 자식은 부모를 닮고, 제자는 스승을 닮습니다. 부부가 오래 살면 생긴 것도 서로 비슷하게 닮아갑니다. 사람은 서로 보면서 닮아가는 것입니다. 좋은 것도 닮아가고 나쁜 것도 닮습니다. 생각도 닮고 행동도 닮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정말 모범으로 삼고 닮아갈 수 있는 대상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우리가 정말 모범으로 삼고 닮아갈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 세상에 어떤 성자라도 그가 한 시간 동안 생각한 것들을 종이에 적으라면 자신 있게 적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루는 어미 게가 새끼 게에게 야단을 쳤습니다. "너는 어째서 똑바로 걷지 못하고 자꾸만 옆으로 걷느냐? 똑바로 걸어라." 그러나 새끼 게는 아무리 노력해도 똑바로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보다 못한 어미 게가 "에이그 한심한 것, 지금부터 내가 하는 것을 잘 보아라." 하면서 시범을 보였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우리가 진정으로 모범을 삼고 본받아 닮아갈 수 있는 완전한 분이 계실까요?
우리가 정말로 닮아야 할 분, 우리가 정말로 우리 미래를 믿고 맡길 수 있는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그 주님의 말씀 그 말씀만이 우리를 바르게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시편 119:105에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들의 인생을 독수리처럼 훨훨 날아가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이렇게 날갯짓을 해보아라." "이렇게 날아보아라." 가르쳐주십니다. 다른 사람은 못 믿어도 하나님은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하면 우리는 얼마든지 푸른 창공을 날아다니는 독수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항상 생각하고 바라봅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나의 자녀야 너는 날 수 있단다. 이렇게 해 보렴’
셋쩨, 하나님은 우리가 날게 하기 위해서 그 날개를 펴서 우리를 받아 엎습니다.
11절 끝 부분에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말씀에 집중해 보십시오. 어미 독수리는 새끼를 등에 업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떨어뜨립니다. 그런데 처음 날아보는 새끼 독수리가 제대로 날 수가 없지요. 몇 번 푸덕거리다가 땅으로 곤두박질칩니다. 그러면 어미 독수리는 재빠르게 날아가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아 등에 다시 업고 올라갑니다. 훈련을 시키되 절대로 땅에 떨어져 죽게 만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들에게 믿음의 훈련을 시키십니다. 가시같이 찌르는 것을 만나게 하시고, 그래서 그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하십니다.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게 하십니다. 그 동안의 게으름을 떨쳐 버리고 믿음의 열심을 내게 만드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합니다. 굳게 결심을 했다가도 어느새 허물어집니다. 주님을 사랑하노라고, 주님 뜻만 따르겠노라고 다짐했다가도 어느 순간 세상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말씀대로만 살겠노라고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다짐했지만 어느새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내 욕심이 앞서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다시는 이런 죄를 짓지 않겠노라고 애통해하며 회개했지만 어느 새 또 그 자리에 가 있는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안간힘을 써서 날개를 푸덕여 보지만 어느새 다시 곤두박질치는 모습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이러한 연약한 모습을 보면서 낙심합니다. 절망하기까지 합니다. ‘나는 결국 날 수 없는 존재이구나.’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다시 한번 날개를 펴서 우리를 받아주시고 등에 업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다시 한번, 또 다시 한번, 우리가 날 수 있을 때까지 기회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새끼 독수리는 이제 떨어 질 때 살기 위해서 죽을 힘을 다해 날개 짓을 하지 않을 수 없듯이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이제 스스로 영적인 날개 짓을 하게 하십니다. 스스로 기도하게 하십니다. 스스로 전도하게 하십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게 하십니다. 스스로 수요예배 금요기도회에 나와서 말씀을 배우고 교회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세계선교를 위해서 기도하게 하시고 헌신하게 하십니다.
드디어 하나님이 열심히 우리늘 날게 하시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19:31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하셨나이다.’ 말씀처럼 말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기필코 날아야 합니다. 아니 반드시 날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마음에 새겨 이 좋은 계절인 6월에 우리 모두 비상하는 역사가 우리에게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너를 독수리같이
신 32:8-12 / 이필재목사
5월은 가정 문제에 관한 많은 관심이 교회를 통해 사회를 통해 실천되어지는 달입니다. 오늘 본 교회는 상담 봉사회 주관으로 가정문제의 권위자를 강사로 1시 30분에 세미나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많은 참석을 바랍니다.
오늘 성경말씀의 내용은 하나님과 하나님 자녀의 관계를 독수리라는 동물의 특성과 연결해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를 독수리가 그 새끼를 훈련시키듯 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 군데에 하나님 자녀를 독수리에 비유하였습니다. 시편 103편 5절에도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 도다.” 이런 말씀이 있고, 이사야 40장 31절에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라고 독수리에 비유하였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이렇게 독수리가 등장한 이유는 독수리의 모양이 아름답다든지 평화스럽다든지 그런 이유는 아니라고 봅니다. 독수리는 그 모양이 소름이 끼칠 만큼 매섭고 날카로운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눈이나 주둥이나 발톱은 쳐다보기에도 힘들만큼 사나운 몸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성경에 하나님과의 관계 설명에 독수리가 많이 이용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그 새가 지니고 있는 하나의 특성 때문에 그렇게 비유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새끼 독수리에 대한 어미 독수리의 마음과 행동이 간단하면서도 확실하게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가정의 달에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연결해서 생각하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먼저 독수리는 새끼를 낳을 집을 아주 높은 곳을 선택한다는 것이 있습니다. 천야만야한 절벽의 윗부분을 선택하거나 나무 중에서도 가장 높은 위치에다가 둥지를 만드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이 둥지를 만드는 재료 선택도 다른 동물들과 다른 방법을 씁니다. 처음에는 가시나무 물어다가 둥지의 모형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위에 나뭇잎이나 헝겊쪼가리 같은 것을 물어다가 둥지를 만들고, 마지막에는 토끼 같은 동물을 잡아서 고기는 다 뜯어먹고 그 부드러운 털이 있는 가죽을 깔아놓고 자기 앞가슴에 있는 아주 보드라운 털을 뽑아 자리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 곳에다 새끼를 낳게 됩니다. 그래서 새끼는 아주 보드랍고 편안한 침대 같은 분위기에서 어린 시절을 자라게 됩니다. 일정한 시간을 먹이는 물어다 먹여서 키우고, 어느 정도의 날개 형성이 될 때, 오늘 성경말씀대로 새끼가 보는 앞에서 날갯짓을 많이 합니다. 날개를 펴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을 계속 보여줌으로 새끼가 그 방법을 보고 배우도록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새끼들도 엄마를 보면서 따라서 날개 짓을 해봅니다. 그러나 새끼들은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면 너무나도 무서워서 도저히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시간이 되면 오늘 말씀대로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이 말은 무슨 말인가 하면, 보드랍고 편안하게 만들어준 자리의 깃털과 보드라운 물질을 모두 없애버립니다. 제일 처음에 물어다 만든 가시나무만 남도록 험악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면 새끼들은 가시가 몸을 찌르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떠나기 위해 필사적인 날갯짓을 하기 시작합니다. 앉으면 찌르고 안 날면 안 되고 그렇게 했는데도 날려고 노력을 하지 않을 때는 그 사나운 발톱으로 집어서 절벽 아래로 사정없이 집어 던져 버립니다. 새끼들은 이때 이해할 수 없는 엄마의 무자비한 행동에 원망을 하면서도 비명을 지르며 반항하면서도 살기 위해서 죽을힘을 다해 떨어져 죽는 것을 모면하는 필사의 노력을 합니다. 거의 땅에 떨어질 무렵이면 오늘 11절 말씀에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랬습니다. 그런 무자비한 훈련을 계속 시키므로 마침내 땅 위에 살고 있는 모든 동물 중에 왕으로 군림하게 만드는 그것이 독수리의 특성입니다.
우리가 동물 세계에 대한 TV 프로그램에서 보듯이 독수리는 동물의 왕입니다. 이 동물 세계는 철저한 먹이사슬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순환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는데, 힘이 조금이라도 더 강한 짐승이 약한 짐승을 잡아먹도록 되어 있고, 다른 동물을 잡아먹을 수 없는 동물들은 풀을 뜯어먹고 사는 초식동물입니다. 그런데 독수리를 잡아먹는 동물은 하나도 없습니다. 날짐승이기 때문에 호랑이와 사자로 독수리 사냥을 할 수가 없습니다. 어쩌다가 뱀 같은 동물이 기어오면 그것은 아주 반가운 독수리의 먹이감이 됩니다. 하늘 높이 그 넓은 날개를 펴고 멋진 폼으로 비행을 하면서 눈에 먹이가 포착되면 순식간에 낙하해서 먹이를 낚아채고 하늘 높이 올라가는 동물 세계의 왕 노릇을 한단 말입니다. 어떤 때는 물 속에 다니는 물고기조차도 독수리의 밥이 됩니다. 잘 보고 있다가 얼른 채 가지고 하늘 높이 꿈틀거리는 물고기 한 마리를 잡아들고 올라가는 멋진 모습의 독수리를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떤 동물이든 모두 독수리의 밥이 됩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의 교훈이 무엇인가? 이 성경말씀의 목적은 우리도 독수리의 삶의 특성을 이해시키려는데 있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이러한 독수리 방식의 훈련을 시키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으로 아기일 때는 영적으로도 폭신폭신한 보금자리에 두신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어도 먹이를 잘 갖다 주고, 내 신앙 성장에 필요한 모든 영적 양식을 때마다 잘 먹여주십니다. 제가 어느 교회든지 가보면 그 곳에서 가장 대우를 받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제 처음으로 교회 나오시는 분들입니다. 그분들이 마음 상할까봐서 교회는 온갖 신경을 쓰고 우리 갈보리교회 주보도 보면, “새로 오신 교우들은 비상등을 켜고 들어오십시오. 그러면 알아서 모시겠습니다.” 이렇게 주보에 썼잖아요? 우리 교회만이 아니고 모든 교회가 그러더라고요. 왜? 영적으로 아기이기 때문에 잘 모셔서 잘 모셔서 고이고이 잘 자라도록 그렇게 하려는 뜻입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성장하면 그 따뜻한 보금자리를 헤쳐 버리시고 가시 돋친 고난을 경험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지금 세계는 아주 후진국을 제외하고는 어느 나라나 자연 보호와 동물 보호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특별히 인정이 많아서 자연 동물들에게도 먹이를 던져주는 일을 아주 풍성하게 하고 재미를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선진국의 많은 자연 공원에 가보면 가장 많은 “주의 간판”이 뭐냐? 제발 동물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고 아주 호소를 하듯 써 붙였습니다. “그것은 동물을 멸종시키는 일입니다. 절대로 주지 마십시오.” 자신이 노력해서 찾아먹도록 해야 동물 세계는 오래 가고 건강하고 번식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서 편안하게 먹이를 풍성히 던져 주면 얼마 안 가서 동물들이 이 지구상에서 멸종한다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서부영화가 없어진 것 같아요. 30년 전까지만 해도 미국이나 한국이나 세계 어디서나 사람들이 제일 관람하기 좋아했던 영화가 서부영화입니다. 그 영화를 보면 인디언들이 나와서 소리를 지르면서 전쟁하는 것을 보면 신이 나고 또 얼마나 재미있고 흥미가 있는지 최고 신나는 영화입니다. 젊은이들에게 너무나도 인기 있고 돈 많이 벌고 그러던 영화 산업이었습니다. 인디언들은 자연과 싸우며 자연의 혜택을 몸으로 부딪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결과 세계 모든 인종 가운데 신체적 조건이 가장 우수하고 건강한 종족들입니다. 특별히 미국 인디언들은 얼마나 신체적으로 건강한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신체적 조건을 잘 갖추고 사는 그런 종족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인디언이 가장 많던 미국에서 인디언이 멸종위기입니다. 이제 멸종 위기가 되어서 다 없어지지 말라고 ‘인디언 보호구역’이 생겨서 거기 가야만 인디언들을 볼 수 있습니다. 세계에서 신체적 조건이 제일 좋은 사람들인데 왜 멸종했는가? 미국 정부에서 먹이를 너무 많이 주었기 때문에 일 안 해도 먹이가 항상 나오니까 거의가 다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서 거의가 다 멸종했습니다. 비판론도 많습니다. 다 멸종시키려고 정부가 일부러 그런 정책 쓴 것 아니냐고 비판론도 많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녀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 때로는 가시로 찌르십니다. 병원에서 수술 받기가 너무 어려워서 고통스러워서 통곡을 하고 있는 소녀에게 의사가 말을 했습니다. “그래, 분명히 너는 아플 것이다. 나는 너를 아프게 해야만 되는 입장에 있다. 그러나 내가 주는 이 잠깐의 아픔을 통해서 너는 평생 아파야 되는 것을 고칠 것이다.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이냐?”
제가 늘 가서 이발을 하는 이발소가 제가 사는 아파트 주변에 있습니다. 거기 가 보면 요금이 싸서 그런지 아이들이 많이 와요. 어떤 때는 아이들이 십여 명씩 오는 때 가위를 가지고 엄마가 붙들고 있고 아이들 이발을 시키려 하면 이 아이들은 틀림없이 웁니다. “으앙~” 잡아먹으려고 하는 것 같이 웁니다. 그러면 나는 옆에서 “너무 울지 마라. 인생이 다 그런 거다. 기다려라.” 그런데 이 칼 가지고 덤벼드는 이발사가 그 아이를 못 쓰게 만듭니까? 예쁘게 만들어 준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때로 우리는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앙앙~” 우는 거예요. “조금만 기다려라. 네가 더 좋아질 것이다.” 통계는 이렇습니다. 누가 더 기도를 많이 드리는 영적 인간이 되는가? 아픔이 있는 사람이랍니다. 인간은 얼마나 간사한 존재인지 사정이 조금만 편안해져도 다른 생각을 합니다. 만약 어미 독수리가 그 보드라운 보금자리를 끝까지 헤쳐 버리지 아니하고 평생 먹이를 날라다 주었다면 그 새끼 독수리는 영원한 소아마비 독수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너는 네 몸을 찌르고 훈련을 받아서 동물의 왕자가 되어야 돼! 빨리 날아라! 안 날면 내가 집어던지겠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나를 절벽 아래로 끝없는 추락을 시킬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아파하고 찌르는 그 가시는 하나님이 아프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어떤 아픔도 이겨낼 수 있는 영적 능력의 하나님 자녀로 온 세계 우주 만물 속에 가장 큰 하나님 자리의 왕자 자리에 앉히려고 그렇게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때 살기 편안했던 역사가 있었습니다.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강대국이면서 경제대국이었던 애굽을 요셉이 통치하고 있던 시절입니다. 먹을 양식이 없어서 식량을 구하러 애굽에 갔다가 요셉을 만나므로 야곱의 70인 가족은 초청 이민을 가게 되어 애굽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47장에 보면 이민 간 야곱 가족들에게 바로왕의 특혜가 주어집니다. “애굽 왕이 네 앞에 있으니 땅의 좋은 곳에 네 아비와 형들로 거하게 하고 고센 땅에 그들로 거하게 하라.” 이 고센 땅은 아프리카에서 제일 좋은 땅입니다. 살기 좋은 비옥한 땅으로 아프리카 중앙에서부터 흘러 내려오는 나일강 물줄기가 강으로 흘러 들어와서 모든 나뭇잎을 실어다 고센 땅에 와서는 여섯 갈래로 갈라져서 들판들을 비옥하게 만들었습니다. 지금도 계속됩니다. 요셉은 경제대국의 통치자요, 차지한 땅은 기름진 옥토요, 왕의 절대적 후원이 있으니 정말 잘 먹고 평안한 삶을 누렸습니다. 출애굽기 1장 7절에 보는 대로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어떤 문제가 영적으로 생겼습니까? 모두가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조상 때부터 섬겨오는 송아지 신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시내산 밑에까지 왔을 때 모세가 이 산에 들어가 40일 기도를 드립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폭동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들이 평소에 해왔던 애굽의 우상을 섬기는 일을 하는데 자기들이 가장 아끼는 재산인 금 덩어리를 모두 내놓아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춤을 추면서 하는 말이 “이것이 우리를 인도할 신이라”라고 말합니다. 그러한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 백성의 영적 훈련을 위해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따뜻한 보금자리를 빼앗아 버리시게 됩니다. 바로왕이 학대를 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그 백성들은 가시나무에 몸을 찔리게 됩니다. 배고프게 만들고 매 맞고 극심한 노동에 시달리고, 자유에 구속을 당하고 눈물을 흐르게 될 때 그들은 조금씩 조금씩 하늘을 쳐다보며 믿음의 날갯짓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현대인은 교회도 날씨 봐가면서 나오고 기분 따라 믿음 생활을 하고 서비스 차원으로 교회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의미가 점점 흐려지고 있습니다. 제 설교도 TV로 방영하고 있지만, 본래 그것은 환자나 교회 출석이 불가능한 사람 혹은 전도용으로 하는 것입니다. 건강하고 시간이 넉넉한 신자들이 편안하게 TV로 설교를 들으면서 주일 예배용으로 이용하는 숫자가 늘어가기 때문에 한국에도 교인수가 늘지 않을 것이라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좋잖아요? 집에서 TV 켜놓고 “TV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안락한 소파에 눕게 하시며 편안한 예배 자리로 인도하는도다. 내가 비록 누워서 예배를 드릴지라도 괜찮은 것은 최고의 설교가 계속 나오는도다. 내 영혼과 마음이 불편하지 아니한 것은 헌금도 봉사도 필요치 아니함이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자리에 있을 때에도 TV는 내 곁에 있을 것이니 내가 영원히 TV 곁에 거하리로다.”
여러분이 세계 여행을 다니시면서 확실하게 파악되는 것이 계실 것입니다. 자연 조건이 좋은 지역과 열대 지방은 발전이 안 됩니다. 고난이 닥쳐와야 그 고난을 이겨내기 위해 투쟁적 노력의 문명과 문화를 발전시켜 왔는데, 좋은 지역에 사는 사람일수록 발전이 안 됩니다. 역사학자들의 평가는 “이 지구상에 모든 인종 가운데 가장 강인한 종족이 어느 종족인가? 유태인이다. 왜 그렇게 강인한 종족이 되었는가? 가장 고난을 많이 겪었기 때문이다.” 유태인보다 더 강인한 종족 없습니다. 로스앤젤레스 뒤쪽에 매우 험악한 산이 있는데, 유태인들이 그곳을 샀어요. 그곳에 유대인 전용 사격장을 만들어서 12살이 되면 누구든지 부모가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남자든 여자든 사격 훈련을 시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교육합니다. “나도 험난한 투쟁의 역사를 살아왔다. 너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우리 민족이 어떤 고난을 당할 때면 이 총을 들고 현장에 투입되어야 한다.” 얼마나 강인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누구나 국민 한 사람이 외국에 살아도 다 회비를 내서 본국에 국방비로 보내고 있어요. 못 당해요. “엔테베 공항의 작전”이라는 이스라엘 인질을 구출하는 영화를 여러분이 보셨을 것입니다. 외국에 살고 있는 한 유대인 청년이 그 소식을 듣고 황급히 짐을 꾸려서 이스라엘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서는데 가방에다 자동 소총을 감추고 나갑니다. 아버지한테 말 안하고 “놀러 갔다 오겠습니다.” 아버지가 벌써 알아요. 나가는 아들에게 말하죠? “Be careful! 조심해라! 나도 그렇게 살았어! 괜찮다. 가거라!” 그래서 가서 구하잖아요? 물고기조차도 양식장에서 기른 것과 자연 산은 맛이 다르다고 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6~7절에 보면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야고보서 1장 12절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위해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이 선택하셨는데 영적 소아마비 환자 같이 주님을 위한 일에는 한번 일어나지도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은 한국보다 중국에 먼저 들어갔습니다. 중국 교계에 아주 널리 세계적으로 알려진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도 전도를 많이 해서 그 사람의 이름이 ‘전도’라고 그랬어요. 성이 송씨라도 ‘송 전도’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전도를 하던 사람이 젊은 나이에 자녀들을 남겨놓고 그만 일찍 죽었어요. 사람들이 심심찮게 그 집을 놓고 야유적인 말을 합니다. “아니, 너희 아버지는 하나님을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일을 했는데 그러면 너희 집안에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지, 너희 아버지 같이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어째서 하나님이 일찍 데려가시고 너희 어린 몇 남매를 이렇게 고생을 시키느냐? 그 어디 하나님 믿겠냐? 안 믿는 게 훨씬 낫겠다. 아마 우리 중국에서 너희 아버지보다 더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한 사람이 없을 것 같은데, 그러면 너희들이 믿는 하나님은 도대체 무슨 하나님이냐?” 이 아이들은 갈등이 생겼어요. ‘그래, 왜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를 그렇게 일찍 데려가셨을까? 80~90세까지 살게 하셨으면 더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많이 하셨을 텐데 그리고 우리들도 조금은 편안히 살았을 텐데…….’ 그러나 그 아이들은 아버지를 본받아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역사가 많이 흘렀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지금까지도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물으면 ‘손문 선생’이예요. 제가 손문 선생의 묘지를 찾아가던 날 어찌나 사람이 많이 줄을 섰는지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서 참 곤란했는데, 그 무덤이 좀 특이하게 생겼단 말이에요. 큰 건물 안에 깊이 무덤을 파놓고 그 깊은데다가 관을 하나 공개해 놓은 것입니다. 그 관을 보려고 다 그렇게 줄을 서있는 거예요. 365일 세계인이 몰려와서 손문 선생의 그 관을 들여다보고 가고, 중국인들도 365일 찾아오고 그렇습니다. 그렇게 관을 공개한 이유가 뭐냐고 안내인에게 물었더니 “그를 보라!” 그런 뜻이라고 합니다. 손문 선생이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중국인들의 아버지의 위치에 있단 말이에요. 이 송 전도의 큰 딸 송경령이 손문 선생의 부인이 되었어요. 송전도의 아들 송자문(송쯔원)은 중국의 4대 재벌 중의 하나예요. 그는 국민당 정부의 중요인물이 되었고, 재정장관이 되어서 국민정부 입법 위원이 되었고, 중앙당 평의원으로서 미국의 협조를 얻어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중국을 이끌어 가는 그런 사람이 되었어요. 막내딸 송미령(쏭메이링)은 장개석 총통의 부인입니다. 한때 중국은 그 집 송 전도의 삼 남매가 다스리는 세상이 되었어요.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가? 하나님이 그들을 그렇게 쓰시기 위하여 아버지를 일찍 데려가셨고 그들에게 고난의 가시를 주어서 영적 훈련이 되었어요. 그러고 나서 삼 남매가 한 나라를 통치하는 가장 중요한 위치에 그들이 있었습니다. 여기 연세대학교 출신 학생들 또는 우리가 미국에 많이 갔다 왔는데 연세대학교, 미국 같은 나라의 학교 상징, 국가 상징 마크가 독수리죠? 그게 무슨 뜻이죠? “하늘 높이 날아 세계를 향하여”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언제나 가장 좋은 것을 주십니다.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서 때로는 우리의 따뜻한 보금자리를 헤쳐 버리고 가시나무에 찔려 피가 흐르도록 하십니다. 때로는 절벽 아래 집어던져서 비명을 지르게 하십니다. 그러나 결국은 왕 같은 백성이 되도록 하십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핍박받는 흩어진 크리스천 나그네를 향하여 너희는 누구냐?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정해주고 있습니다. 믿음의 시련을 통해서 왕 같은 백성을 만드신다고 했습니다. 나의 삶의 고난 부분이 여러분, 오늘 말씀 안에서 영적 해석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시여,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가장 사랑하고 계시며, 내가 왕 같은 제사장, 독수리 같은 왕자가 되라고 영적 훈련을 계속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지금 아파하고 있는 부분이 하나님의 사랑의 관심의 초점인 것을 우리가 생각하면서 현실의 고난스러운 부분들을 통해서 훈련되는 영적인 사도적 관찰을 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생각을 조절하라
신 32:7(사 43:18) / 김홍도 목사
한 사람의 생애와 운명은 그 사람의 생각 여하에 따라서 결정되어 지는 것입니다. 즉 좋은 생각과 긍정적인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성공과 승리가 있게 되는 것이고 반대로 나쁜 생각과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찬 사람에게는 실패와 어두움의 그림자만이 찾아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어떤 외부 환경에 의하여 좌우되거나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점령하고 있는 생각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행을 만들어 내는 생각만을 하는 사람은 필연코 그의 생애가 불행하게 되고 맙니다. 그러나 행복을 만드는 생각만을 하는 사람은 분명히 행복하게 되고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을 나는 대로 들어오는 대로 행동할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잘 조절해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마치 방안에 에어콘(air Condition)을 설치하면 밖의 날씨가 아무리 무더워도 시원하게 할 수 있고 또 아무리 춥다고 하더라도 방안의 온도를 덥게 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도 조절할 줄만 알면 우리의 주의 환경이 아무리 변하고 어려운 문제에 부딪혀도 창조적이고 성공적이며 평안한 생활을 영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써 우리의 생각을 잘 조절하면 우리의 생각을 언제나 맑게 할 수 있고 정신적으로도 새 힘을 얻을 수 있으며 마음의 평안도 몸의 건강도 따라서 모든 생활에 활력소를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도 우리의 생각을 통해서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통하여 깨닫게 해 주시고 알게 해 주시고 생각나게 하셔서 우리의 마음과 의지에 어떤 결단을 내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탄 마귀도 우리의 생각의 줄을 타고 침투해 들어와 우리의 마음을 혼돈케 하고 불안하게 하고 우리의 심령과 생활을 더럽히고 나아가서는 불행과 패망을 가져다 줍니다. 성경에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에게 마귀가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라고 한 것을 보면 악령이 얼마나 우리의 생각을 점령하려 드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생각은 마치 군대로 말하면 사령부와 같습니다. 그런고로 우리 생각 하나만 점령하면 그 후에는 우리 몸과 인격 전체를 다 지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욱이 영적인 싸움에서 마귀와 싸워 이기려면 생각을 잘 지키고 조절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요사이 청년들 중에 이상한 성격을 소유한 사람을 많이 보게 됩니다. 인질극을 벌여서 사회를 떠들석하게 하고 총기난동 사건으로 민심을 소란케 하고 어린 처녀가 포드 미국 대통령을 저격하려고 한다든지 괴이한 음란죄가 성행하는 것 이것을 심리학적으로 성적장애니 혹은 정신착란이니 하고 말합니다만 우리가 영적으로 볼 때 이것들은 다 악령에게 그 생각이 사로잡혀서 하는 행동들인 것입니다.
마귀에게 잡혔던 자가 나은 후에 하는 말을 들어보면 마귀가 들어올 때는 벌써 생각을 통해서 교만한 생각이나 복수심 억울한 생각 죄책감 같은 것이 스며들어 오고 나중에 심해지면 발작까지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사람은 그의 생각이 먼저 성령의 지배와 조절을 받아서 믿음과 용기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깨닫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승리인 신앙 생활을 하고 창조적이고 성공적인 삶을 살려고 하면 우리의 생각을 절대로 되는 대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어디까지나 잘 조절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생각의 조절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서로 반대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얼핏 보면 이율배반적인 말씀이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먼저 읽은 신명기 32장 7절에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고 했고 이사야43장 18절에는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서로 모순되는 말씀도 아니요, 배타적인 의미도 아닙니다. 이 두 말씀은 곧 신앙 생활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 우리가 반드시 생각해야 할 것은 생각하고 잊어버릴 것은 잊어버리고 지워버릴 것은 지워버리면서 우리의 생각을 잘 조절해야 된다는 말씀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을 조절하기 위해서 몇 가지 유의할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① 생각하고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신명기에 나타난 옛날을 기억하고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는 말씀은 곧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의 보호하심을 기억하고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환난의 날에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그 은혜에 대하여 깊이 감격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 그 사람은 성령이 충만해지며 따라서 그 심령과 정신과 육체는 튼튼해 집니다. 죽음의 골짜기에서 살아났다던지, 비오듯 쏟아지는 폭탄과 총알 속에서 하나님이 구원해 주셨다던지, 죽을 병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나았다던지, 극심한 가난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부요해졌다고 하면 이러한 모든 것을 잊지 말고 자꾸 생각하며 감사 감격해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옛 속담에 개구리가 올챙이적 생각을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신앙 생활에 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연단과 시련을 통과한 후 축복을 해 주면 인간은 간사해서 그 시련의 날도 하나님의 은혜도 다 잊어버리고 만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임금 두 사람을 비교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다윗왕을 보십시다. 그는 훌륭한 왕이 된 후에도 과거를 생각해 보곤 했습니다. 이새의 막내 아들로서 양이나 치면서 보잘 것 없었던 천한 목동의 옛 시절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이같이 보잘 것 없는 나를 무엇이관대 존귀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나이까 하고 감격한 마음으로 평생을 살면서 하나님만을 굳세게 의지했던 짓입니다. 그랬기에 하나님도 그가 잠시 실수한 적도 있으나 버리지 않고 끝까지 와석종신하면서 승리의 생활을 하도록 축복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왕을 보십시다. 그도 처음엔 왕으로 기름 부으려 할 때 겸손해 했고 심지어는 숨기까지 하면서 나같은 사람이 무슨 왕이 되겠느냐고 했으나 나중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 버리고 옛날 일을 생각지 못하고 교만해져서 사무엘과 같은 하나님의 사자의 말씀도 듣지 않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다가 비참한 종말을 가져오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가운데 행여나 과거를 생각지 못하고 교만한 마음을 가진 자는 없습니까? 또 어리석게 원망과 불평과 근심 걱정으로 한숨 쉬고 눈물 흘리는 사람 있습니까? 생각을 바꿔서 영화 필림을 돌리듯이 지금까지 살아오 는동안에 하나님의 구원해 주심과 은혜와 기도의 응답과 보호해 주신 것들을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때에 그런 자에게는 새 힘과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항상 자기를 가리켜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와 같다고 했고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으며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고백하면서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그 앞에서 겸비한 자세를 가졌던 것입니다.
신명기 8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누누히 부탁한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배불리 먹게 되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은금이 증식되어 평안히 잘 살게 되면 옛날 광야의 생활을 잊어 버릴까 봐서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고 했습니다. 계속해서 보면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에게는 은혜가 되고 축복이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② 잊어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본문 이사야 43장 18절에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건강한 영과 마음을 소유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려고 하면 과거의 실수와 실패를 멀리 옮겨 버리고 잊어버려야만 합니다. 대개 마귀에게 사로잡혀 미치는 사람들을 보면 죄책감을 해소하지 못하거나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풀어 버리지 못하고 오래 지속하다가 그렇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귀는 과거를 생각나게 하면서 우리를 괴롭히고 나중에는 좌절감을 안겨다 줍니다.
그러나 우리 성령님은 미래를 바라보며 소망을 가지게 하며 새 힘을 얻게 합니다. 그런고로 잊어버릴 것은 다 잊어버리고 억울하고 분한 생각은 털어 버리십시요. 혹시 여기 앉아 있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 돈을 사기당했다거나 도적을 맞아서 억울하고 분한 사람 있습니까? 돈과 물건은 사기당하고 도적을 맞았다 하더라도 마음까지 마귀에게 사기당하거나 빼앗기지 마시기를 축원합니다.
실수하고 실패했어도 좌절감을 갖지 말고 속히 털어 버리고 잊어버리십시요. 낙심하고 좌절감을 갖게 하고 집착하게 하는 것은 마귀가 갖다 주는 것입니다. 혹 어떤 무서운 큰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무겁게 살지 마시고 철저히 회개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방향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먹장같은 검은 구름이 나를 뒤덮고 아침 안개가 내 눈앞을 가로 막는다고 하더라도 강한 바람에 구름이 날아가듯 아침 밝은 햇살에 안개가 사라지듯이 우리가 잊어버릴 것을 잊어버리고 하나님께 향하면 다 씻어 주시고 새 힘과 새 소망을 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떤 공적을 세우고 잘한 일이 있어도 잊어버리고 부족을 더 깨닫고 앞의 일만 생각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마귀가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를 망하게 하고 수치를 당하게 하고야 맙니다. 또 누구에게 대해서 증오심과 복수심이 일어날 때에도 이것은 분명히 악령의 역사임을 알고 즉시 잊어버리고 그를 위해 기도하고 축복하십시요. 마귀는 공연히 하찮은 일을 가지고도 오해하게 만들고 곡해하게 만들어서 증오심을 일으킵니다.
누가복음 13장 10절 이하에 보면 18년 동안이나 귀신들려 허리가 꼬부라진 여자를 고쳐주신 말씀이 있는데 마귀는 육체만 꼬부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성격도 꼬부라지게 만들어서 공연히 남을 오해하고 곡해하고 걸고 넘어지게 만든다는 사실을 아시고 주님의 말씀으로 활짝 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③ 생각을 바꾸도록 힘쓰십시요.]
우리가 생활해 나가다가 잘못된 생각이라고 생각될 때에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빨리 바꾸어야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은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꾸십시요.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십시요. 불평 원망의 마음을 감사한 마음으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낙심과 좌절감이 들 때에도 우리 주님은 어떠한 사람에게도 소망이 되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31절에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l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고 말씀하셨고 계속해서 14장 27절에 보면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 하지도 말라"고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실상 낙심과 절망, 좌절감 그 자체가 문제이지 그외에 아무것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절망은 오히려 하나님의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성경 말씀과 기도로써 잘못된 생각을 바꾸어 감으로써 승리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오늘 여러분에게 드린 이 말씀을 명심하시고 생활에 응용하여 성공적이고 축복된 삶을 살아 나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
옛날을 기억하라
신 32:7-15 / 김상복 목사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그러한데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 신명기 32:7-15
오늘이 6월24일, 내일은 6월25일, 57년 전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난 날입니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 시에 한국전쟁 기념공원이 있는데, 미군들이 6.25때 판초를 입고 철모를 쓰고 진흙탕 속을 걸어 다니는 동상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공원의 이름이 “The Forgotten War,” 즉 잊혀진 전쟁입니다. 그들은 제2차 대전과 베트남전쟁은 기억해도, 그 사이에 낀 한국전쟁은 거의 잊어버렸어요. 그래서 얼마나 많은 미국 젊은이들이 한국을 살리기 위해 죽었는지 잊지 말라고 그 공원을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잊어버린 것은 한국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6월은 호국의 달인데 6.10항쟁 행사와 6.15남북정상회담 이야기들은 많으나 6.25전쟁 이야기는 어디로 갔는지... 내일 시작할는지 모르겠지만, 사실상 한국인들의 마음속에서도 6.25는 잊어졌어요. 우리나라 초등학교 3-6학년생 3,6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6.25전쟁이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에 38%가 “조선시대에 일어난 전쟁,” 20%는 “일본과 우리나라가 싸운 전쟁”이라고 답했습니다. 6.25가 어디로 갔는지 우리 아이들 사이에서도 잊혀져버렸어요. “남북한의 경계선이 어디입니까?” 라는 질문에 휴전선이 아닌 “38선”이라고 많이 답했어요. 본래는 38선이었지만 전쟁 끝에 휴전선이 경계선이 되었잖아요. 이걸 모르고 있어요. 18세 이상의 성인들에게 “6.25전쟁이 어느 해에 일어났습니까?” 물었더니 66%만이 “1950년도”라고 정확히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20대 중에는 46%가 모릅니다. 6.25전쟁이 잊혀져버렸습니다.
제가 6.25전쟁에 대한 인터넷 검색을 해 봤습니다. “6.25전쟁은 누가 일으켰는가?” 라는 질문에 여러 명이 여러 대답을 올려놓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6.25전쟁은 미국인들이 일으켰다”고 길게 써 놨더군요. 그 어떤 사람은 “6.25전쟁은 이승만이 일으켰다”고 주장했습니다. 북한의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글은 없었습니다. 젊은 세대가 역사를 왜곡하고 있습니다. 또는 수정주의적 역사관을 가진 사람들이 역사를 고쳐 쓰고 있습니다. 최근에 올라온 글들 중에는 1950년 6월 25일에 북한의 김일성이 남침했다고 쓴 글이 없어요. 제가 좀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 이게 어떻게 된 것인가? 이게 어느 나라 인터넷인가?’
성경에는 “기억하라”는 말이 많이 나타납니다. 신명기 32장 7절,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와 연대를 생각하라.” 즉 역사를 정확하게 알라는 겁니다. “네 아버지에게 물어보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어 보라. 그들이 네게 일러주리라.” 그런데 한국의 젊은 세대는 6.25를 경험한 아버지들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6.25전쟁은 “일본과 우리나라가 한 전쟁”이라고 잘못 말합니다. 또는 “북한이나 김일성이 시작한 것이 아니라 남한이 침략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또는 “미국인들이 일으킨 전쟁이다,” 이렇게 수정주의적 역사관으로 역사를 재해석하고 부인하고 왜곡하여 어른들과 자기 세대와 후배들에게 이야기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저는 ‘어떻게 이렇게 쓸 수 있나? 참 이해하기가 힘들구나!’ 이런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옛날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기억하라는 것입니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찾아보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기억하라!” 하신 말씀이 220번 정도가 있더군요. 그것을 몇 가지로 분석해보았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과거 고난의 역사를 기억하라” 하셨습니다.
신명기 15장 15절에 “너희가 옛날 애굽 땅에서 종살이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잊어버리지 말라.” 이렇게 하셨어요. 역사를 잊어버리고, 역사를 왜곡하고, 역사를 마음대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역사는 한번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부인해도, 왜곡해도, 재해석해도 역사는 역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난 날 너희가 고난당했던 역사를 잊지 말고 기억하라” 하십니다.
우리 한국은 고난의 역사가 있습니다. 수 천 년 동안 몽고와 러시아와 중국과 일본에 의해 많은 피해를 입고 고생한 민족입니다. “잊어버리지 말라. 기억하라!” 우리는 일제 36년 동안 엄청난 피해를 입고 고생을 하였습니다. “옛날을 기억하라!” 쓰라린 과거의 역사를 잊어버리는 민족은 자유를 또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또 고생을 할 수 있습니다. 기억하지 않고 잊어버리면 그 민족은 망합니다. 우리는 북한 때문에, 6.25전쟁 때문에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기억하라. 잊지 말라.” 잊어서는 안 됩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너희 적들이 어떻게 너희에게 했는지 기억하라” 하셨습니다.
신명기 25장 17절에 “너희가 애굽에서 나오는 동안 아말렉이 즉, 너희 적이 너희에게 어떻게 했는지 기억하라.” 얼마나 너희에게 아픔을 줬고, 얼마나 슬픔을 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지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6.25 때문에 말로 다 할 수 없는 어려움과 피해를 입었습니다. 16개국의 젊은이들이 이 땅에 와서 죽고 부상을 입었습니다. 아직도 그 부상이 낫지 않아서 육군 병원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이 제법 있습니다. 또 노르웨이, 이탈리아, 인도, 덴마크, 스웨덴, 이렇게 다섯 나라가 의료지원을 해주었습니다. 이렇게 총 21개국이 우리를 도와서 살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으로 군인 사망자와 실종자가 230만 명입니다. 민간인 350만 명이 죽었고, 피난민 370만 명이 생겼고, 학살당하고 납치당한 사람들이 20만 명, 전쟁고아가 10만 명, 이산가족이 1천만 명입니다. 모든 것이 부서졌고, 불에 타버렸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가난한 나라가 이 전쟁으로 이렇게 큰 어려움을 입었습니다. 6.25전 월남자가 100만 명이었는데, 전쟁 중에 또 100만 명이 남하했습니다.
그런데 누가 이 전쟁을 일으켜 이런 엄청난 피해를 일으키고 백성을 고생시켰습니까? 북한의 김일성이지요. 이승만이 어떻게 전쟁을 일으킵니까? 북한의 20만 군대를 상대로 남한의 10만 군대가 어떻게 전쟁을 일으킵니까? 일으킬만한 군사력이 없었습니다. 남쪽 이승만에게는 탱크가 한 대도 없었습니다. 북쪽 김일성은 242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남한에 연락기라는 비행기 22대가 있었습니다. 북한에는 211대가 있었습니다. 10대 1입니다. 남한에는 자주포가 한대도 없었지만 북한에는 176대가 있었습니다. 남한에 곡사포는 91문이 있었지만 북한에는 무려 552문이나 있었어요. 당시에 어떻게 남쪽에서 먼저 북쪽에 전쟁을 일으켜 이길 수 있었겠습니까? 이승만 대통령이 무슨 힘으로 전쟁을 일으킬 수 있었겠습니까?
북한은 1950년에 시작한 거짓말 - 남한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거짓말을 - 아직까지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남한에 그 거짓말을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주일아침, 저는 평양에서 중학교 1학년이었는데, 그 날 우리 형제들이 교회에 가려고 집을 나섰습니다. 아주 맑은 날이었는데 어른들이 전봇대 밑에 모여 있었어요. 그 전봇대 꼭대기에 스피커 시스템이 있었거든요. 평양 거리에는 옛날에 그랬어요. 그래서 제가 어른들에게 물었죠. “선생님, 무슨 일이 있어요?” “김일성 수령께서 중요한 발표를 하신단다.” 그래서 저도 들으려고 우리 형제들이 다 서서 기다렸어요. 조금 후 9시쯤 되니까 김일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사랑하는 인민 여러분, 오늘 아침에 저 남조선 괴뢰군이 우리를 침략했습니다. 그래서 용감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인민군 우리들이 반격을 하였습니다!”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속으로 ‘나쁜 남한 놈들, 우리를 치다니!’ 했어요. 몰랐으니까요. 후에 보니까 새빨간 거짓말이에요. 그 거짓말을 57년 동안 반복하니까 남한의 젊은이들이 믿는단 말이에요. 그래서 미국이 시작했다느니, 이승만이 시작했다느니 하는 거짓 글을 오늘도 인터넷에 올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미국이 어떻게 그 전쟁을 일으킵니까? 미국은 그때 한국에 없었어요. 1949년에 미국은 남한에서 군대를 완전히 철수했습니다. 1950년 초에 미국 애치슨 국무장관이 “한국과 대만은 미국의 방어선이 아니다”라고 발표를 했어요. 그 말을 누가 들었을 것 같아요? 김일성이 들었죠. “옳거니!” 미국은 남한을 포기했다고요. 그래서 북한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킨 것입니다. 지금은 역사의 모든 것이 밝혀졌고, 김일성이 스탈린과 만났던 그 장면과 장소와 나눴던 대화가 기록에 다 나타나 있습니다. 김일성이 모택동과 했던 말이 전부다 이제는 문서로, 증거로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6.25를 미국이 시작했다느니 이승만이 시작했다느니 하는 말을 이 땅에서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니요! 제가 왜 이렇게 화를 내지요? “김일성이, 북한이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제가 이런 말을 여기에서 할 필요가 있나 이런 생각이 들어요. 딴 사람은 몰라도 할렐루야교인은 역사를 바로 아십시오. 옛날을 잊지 마십시오. 너무도 뻔한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얼마나 멋쩍은지.
소련은 6.25 직전에 소련군을 철수시켰습니다. ‘아, 이제는 전쟁이 없겠구나. 소련 사람 물러가는 것 보니까 걱정하지 말라!’ 했지요. 전쟁 직전의 평화전술이었죠. 또 북한은 남한에 “조만식 선생을 보낼 테니까 모여서 회의합시다” 그랬습니다. 평화를 내세운 연막작전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미가 안 좋았기 때문에 남한 군대는 비상경계령을 선포하여 남한 군인들은 밤잠을 못 자고 깨어 경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아무 일 없으니까 6월 24일, 전쟁 하루 전 날, 바로 오늘이죠. 비상경계령을 해제하고 전부 휴가와 외출을 내보냈습니다. 부대에 군인들이 몇 명 안 남아있었어요. 어떻게 남한 군대가 전쟁을 일으킵니까? 바로 다음 날 새벽에 김일성이 탱크를 몰고 쳐들어와 전면전쟁을 일으킨 것입니다. 군인들이 다 나가 있었던 남한군대, 군사력이 없는 군대는 방어능력이 전혀 없었어요. 이것이 역사입니다. 이것이 사실입니다. 역사를 왜곡해서는 안 됩니다. 단 며칠 만에, 6월29일에 북한 군대가 서울을 점령하지 않았습니까? 전쟁을 일으킨 나라가 몇 일만에 이렇게 당할 수 있습니까?
북한은 전쟁 전에 이미 지리산에 빨치산 병력을 보내서 10차례 이상 약탈 사건을 일으켰고, 1948년부터 남한에서 제주 반란 사건, 여수/순천 반란사건, 대구 반란사건들을 통해서 남쪽을 흔들어 놨습니다. 구체적으로, 치밀하게 계획된 전쟁이었지요. 6.25전쟁을 누가 일으켰나? 미국이, 이승만이 일으켰나? 아닙니다! 북한의 김일성과 스탈린과 모택동이 삼자 연합해서 일으킨 전쟁입니다. 역사는 역사로 정확하게 알아야 됩니다. “옛적을 잊지 말라. 기억하라.” 역사를 잊는 나라는 망합니다.
하나님은 “적이 너희에게 어떻게 했는지 기억하라” 하셨습니다.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 아말렉 군대가 어떻게 너희를 힘들게 하였고, 피해를 주었고 고생을 시켰는지 기억하라!” 기억을 해야 합니다. 잊어버리지 않는 백성들은 평안을 누릴 준비가 되어 있지만, 잊어버리는 백성들은 다시 자유를 뺏길 가능성이 있습니다. “옛날을 기억하라. 고난의 역사를 기억하라. 적들이 너희에게 어떻게 했는지 기억하라.” 일본이, 북한이 어떻게 우리 민족을 괴롭혔는지 잊지 말라.
셋째로, “너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기억하라” 하셨습니다(역대상 16:2; 욥 36:24; 시 77:11).
풍전등화(風前燈火) 같던 남한을, 이제 망하게 된 남한을,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 우리가 기도하고 예배하는 하나님, 우리가 찬양하는 하나님께서 남한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남한에 은혜를 베푸시사 구원해 주셨고 초토화 되었던 남한을 일으켜 세워 세계 12위권의 경제대국을 만들어 주셨고, 그 고난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크게 일으켜 주셨고, 한국 교회가 세계선교대국이 되었습니다. 만약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시지 않아서 우리가 공산국가가 되었다면, 여러분, 공산주의 독재체제 하에서 말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까? 마음대로 다닐 수 있습니까? 원하는 곳에서 살 수 있습니까?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까?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과 저도 오늘의 북한 사람들처럼 부자유와 굶주리는 고난의 하루하루를 힘들게 보내고 있을 것입니다.
나라의 모든 것이 부서셨고 불탔을 뿐만 아니라, 개인들도 얼마나 많은 피해를 봤습니까? 저도 개인적으로 제 아버지께서 저희 집에 떨어진 폭탄에 맞아서 즉사하셨습니다. 제 여동생 한 명은 폭탄에 바람에 날려 앞집 지붕위로 올라갔다가 떨어지면 왼쪽 손목이 날아가 여자가 일평생 한 손 없이 살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저의 네 형제는 북한에서 먹을 것이 없어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남한은 건강을 위해 무엇을 안 먹을까 걱정하는데 북한은 무엇을 먹을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미국과 유엔군을 통해서 우리를 살려주셨습니다. 21개국 젊은이들을 통해서, 희생한 우리 젊은 아들과 딸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오늘의 이 좋은 나라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기억하라. 그리고 하나님 섬기기를 잊지 말지어다” (역대하 6:42; 시편 25:6).
하나님의 자비, 은혜, 친절을 알고 잊지 말고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와 남한의 교회는 은혜와 자비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을 잊지 말고 끝까지 섬기고 사랑하고 더 열심히 예배드려 하나님의 축복의 손이 이 남한 땅에 계속 되기를 원합니다. 한국이 완전히 문화의 선진국, 경제의 선진국으로 도약해서 그 힘으로 주님 다시 오실 때를 준비하는 세계 선교 대국이 되기를 원합니다.
10절에 보니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황무지에서 건져주셨다고 합니다. 황무지와 같은 역사 속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짐승들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주시고 호위해 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자기 눈동자와 같이 지켜주셨도다.” 여러분과 저의 역사예요. 13절에 “여호와께서 그로 땅에 높은 곳을 다니게 하시고 밭의 소산을 먹게 하시고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서 기름을 빨게 하시며 소의 젖기름과 양의 젖과 어린양의 기름과 바산 소산의 수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밀을 먹이시며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우셨도다.”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기적들, 경제적인 기적들, 오늘까지 이 나라를 보호하여 주신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본문 15절처럼 큰일 납니다. “그런데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이스라엘이 잘 먹고 잘 사니까 하나님을 저버립니다. 하나님을 발로 차 버렸다고 했어요.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소홀히 여겼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입니다.
우리 한국의 기독교인들과 대한민국 국민은 절대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소홀히 하고 저버리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오늘 이 아침에 성찬을 받을 때 여러분이 새롭게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헌신 때문에 앞으로 하나님이 계속해서 이 땅을 축복하시고, 여러분의 하는 일을 축복하시고, 여러분이 손대는 일 마다 번창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북한도 살려낼 수가 있는 강력한 나라가 되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 세계에 전하는 민족이 되도록, 오늘 받는 이 성찬을 통해서 우리가 새로워지고 깨끗해지고 하나님과 우리가 영원히 하나가 되는 축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내 평생 살아온 길
신 32:7-14 / 김광일목사 (벧엘교회)
빌리 그래함 목사님과 사역을 같이 하는 부흥단원 가운데 킴 윅스라는 한국인 시각장애자가 있습니다. 그녀는 6.25 전쟁 때 실명을 하고 고아원에서 자라났는데, 미군의 도움으로 미국 인디아나 주립대학을 졸업하고 오스트리아에서 성악 수업을 하여 성악가가 되었습니다. 그 후 그녀는 빌리 그래함 목사님과 함께 집회를 하면서 찬양과 간증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간증하기를 "사람들이 장님인 나를 인도할 때, 100미터 전방에 뭐가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앞에 물이 있으니 건너뛰라고 말하고, 층계가 있으니 발을 올려놓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나는 나를 인도하시는 분을 믿고 한 걸음씩 걸음을 옮기기만 하면,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꼭 도착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10년 후를 알지 못합니다. 20년 후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오늘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그 하나님께 믿음으로 순종하며 오늘을 살면, 하나님은 내일을 인도하셔서 마침내 내 생애를 하나님이 계획하신 그곳에 도달케 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진정한 가이드가 되어 주십니다.
본문의 말씀은 모세의 고별 설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으로부터 인도하여 낸 모세는 120세가 되어 자신의 운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자신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알고 나서 사랑하는 동족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하고 있습니다. 7절에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즉 "과거를 돌아 보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섭리하셨는지를.”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해 본다면 "2003년 한해를 돌아 보라! 하나님이 어떻게 함께 하셨는지를.”여러분, 살아 온 과거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내 평생 살아온 길 뒤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남겨진 자국을 보시기 바랍니다. 과거가 우리의 미래를 보장해 주지는 않지만, 과거를 돌아보며 그 과거를 거울삼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 과연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눈동자같이 보호하셨습니다
서로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던 두 친구가 만나자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 약속장소에서 만난 한 친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오다가 하마터면 오지 못할 뻔했다네. 타고 오던 말이 뭔가에 깜짝 놀라 뛰는 통에 내가 말에서 떨어져 버렸다네. 아무 데도 다친 데가 없었기에 다행이라며 일어나서 주위를 둘러보고는 깜짝 놀랐다네. 내가 말에서 떨어진 곳에서 몇 발자국 떨어진 곳이 바로 낭떨어지가 아닌가? 나는 즉시 무릎을 끓고 하나님께 나를 기적적으로 살려주신 것에 대해 감사를 드렸다네." 그러자 그 말을 듣고 있던 다른 친구도 말했습니다. "여보게, 자네 말을 들으니 나는 자네보다 훨씬 놀랍고 기적적인 하나님의 도우심을 겪은 것 같네. 내가 탄 말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날 떨어뜨려 본 적이 없다네. 아무 사고 없이 나를 이곳까지 데려다 주었다네. 그 덕분에 나는 위험스런 상황에 조금도 빠져들지 않았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안전하게 인도하신 일을 생각하면 어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있겠나."
우리는 지난 한해 동안 살면서 힘든 문제 가운데에서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도 해야 하지만, 평탄하게 오늘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도 감사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문제를 만나든 만나지 않았든지 간에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도우심으로 오늘 여기까지 온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에 "하나님께서 눈동자같이 지켜주셨다"는 말은 '최우선적으로 아끼며, 아주 조심스럽게 보호해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생활 40년 동안 눈동자같이 보호해주시고 지켜주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 숨 쉬는 것까지도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느 글에 보니까 성인을 기준으로 심장은 하루 동안 자그마치 10만3천6백89번을 뛴다고 합니다. 밥을 먹을 때에도, 일을 할 때에도, 운동을 할 때에도, 무의식중에도, 잠을 잘 때에도 10만3천6백89번을 뛰고 있습니다. 또 하루 동안 2만3천40번 숨을 쉰다고 합니다.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 내가 무슨 수고를 해서 심장이 이렇게 잘 뛰고 있습니까? 내가 무슨 수고를 해서 나의 폐가 호흡을 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나는 아무 수고도 하지 않았는데도, 나는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는데도, 하나님께서 나의 심장을 움직여 주시고, 폐를 움직여 주셔서, 내가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보호하심과 도우심입니다. 지난 한해동안, 년 초부터 오늘까지 우리의 가정과 사업을 인도해주신, 우리 교회를 이 시간까지 이끌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진심으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으로 연단하셨습니다
독수리는 보금자리를 높은 절벽이나 벼랑 위에 만든다고 합니다.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는 곳에 튼튼한 둥지를 치고 자기의 털이나 부드러운 물질로 푹신하게 보금자리를 마련합니다. 그 다음 거기에다 새끼를 기릅니다. 독수리 새끼는 튼튼한 집에서 어미 독수리가 물어다 주는 음식을 받아먹으면서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그렇게 사랑으로 돌보던 어미 독수리가 날개를 퍼덕이며 보금자리에 있는 새끼를 못살게 굴기 시작합니다. 어미 독수리는 새끼를 끌어내기 위해 푹신푹신한 깃털 침대를 전부 다 밖으로 물어 던져 버립니다. 그러면 새끼 독수리가 견디다 못해 기어 나온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어 나오다가 밑으로 곤두박질치며 떨어지게 됩니다. 새끼 독수리는 열심히 날개를 움직여 날려 하지만 날지 못하고 땅으로 떨어집니다. 어미 독수리는 공중에서 새끼가 떨어져 내리는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다가 땅바닥에 부딪혀 박살날 것 같으면 쏜살같이 내려가 커다란 날개로 새끼 독수리를 안전하게 받아 다시금 높이 하늘로 솟아오릅니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나 다시 새끼를 떨어뜨립니다. 그러다가 땅바닥에 부딪히려 하면 날아와서 받아주고 또 다시 떨어뜨리기를 반복합니다. 결국 어미 독수리는 이런 훈련을 반복함으로써, 새끼를 강하고 튼튼하게 키운다고 합니다.
모세는 바로 이러한 사실에 비유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강하게 양육하기 위하여 광야에서 연단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 40년 동안 보호하시는 과정에 있어서 갈증과 배고픔, 전쟁과 질병 등의 온갖 고초를 겪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사랑으로 연단 시키는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천국시민으로 양육하기 위해 때때로 환난을 주십니다. 당신의 일꾼으로, 당신의 그릇으로 만들기 위해 연단을 하십니다. 지난 한해동안 가슴아팠던 일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갑자기 경영하던 사업이 문제가 생기고, 사랑하는 자녀에게 문제가 생기고, 건강에 문제가 생겼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그런 환난들은 우리를 연단 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물 가운데로 지나게 하기도 하시고 불 가운데 통과하게도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 시키시는 분명한 뜻을 알아야 합니다. 이 연단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훈련시키시기 위한 것임을 믿으시면서 오히려 연단 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계획대로 인도하셨습니다
이차대전 당시 중요한 임무를 띤 영국의 기선 한 척이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항로가 매우 위험한 길이었기 때문에 선장에게 비밀 메시지가 전달되었습니다. "여기에 나타나 있는 항로를 따라서 똑바로 갈 것. 무슨 일이 있어도 좌우로 벗어나서는 안됨. 도움이 필요할 때에는 비밀부호로 즉시 무전을 칠 것." 이 기선은 며칠 간을 항해하여 미국으로 가던 중, 적의 군함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선장은 즉시 비밀부호로 무전을 쳤습니다. "적의 군함이 보임. 어떻게 할 것인지 지시 바람." 그러자 어디선가 알 수 없는 곳에서 회답이 왔습니다. "똑바로 갈 것. 우리가 옆에서 다 알고 지키고 있음." 사방을 둘러보아도 영국 전함은 한 척도 없었지만 기선은 지시에 따라 계속 똑바로 갔습니다. 드디어 목적지인 미국의 항구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기선을 따라서 영국의 잠수함 한 척이 바다 밑에서 올라오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이 잠수함은 기선이 도착할 때까지, 보이지 않는 바다 밑에서 계속 기선을 지켜 주고 필요시에 도와주려고 따라 왔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바로 이와 같으십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으시지만 성령으로 항상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의 땅인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하나님의 계획대로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올해 한해 동안 보호하시고 지켜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새해에도 우리를 인도하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향한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따르기만 하면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체험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송년주일을 맞이하여 지나간 한 해뿐만 아니라 평생 살아온 날들을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구비 구비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께서 손잡아 인도하시고 함께 해 주셨기에 현재가 있음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새해에는 믿음으로 바로 살아야 합니다. 지난날의 악하고 게을렀던 것들을 다시 되풀이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 항상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옛날 일을 기억하라,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신 32:7-14 / 석원태 목사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신 32:7)! 이 위대한 영감 선언은 저 출애굽 운동의 기수요, 이스라엘 법치국가의 창설자요, 광야 교회의 아버지였던 모세가 그의 사랑하는 백성들, 곧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여수룬(신 32:15)을 향하여 던진 역사적 회고의 선언입니다. ‘옛날 일’ 그리고 ‘역대의 연대’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선민에게만 주신 위대한 구속사를 이름입니다. 한 세대, 한 세대로 엮어져 내려온 선민 구원 역사를 말함입니다. 예컨대 아브라함 시대, 그리고 종이 되었던 애굽 시대, 영광의 출애굽 시대, 시련의 광야 시대, 약속의 땅 가나안 정착 시대 등을 일컫는 말입니다.
‘기억하라’는 말은 신명기에 16번이나 반복되는 말로서 과거 언약적 관계에 씌어지는 말입니다. ‘생각하라’는 말은 ‘유의하라’, ‘되새겨라’ 하는 말로 ‘기억하라’는 말과 동의어 개념입니다. ‘네 아비’와 ‘네 어른들’은 같은 의미로 선조들을 뜻합니다. 저들은 그 선조들에게 지난날의 하나님의 구속사를 물어야 하고, 또 그 이스라엘의 아비들은 자손들에게 위대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歷史)를 반드시 설명하고 가르쳐야 된다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은 아비가 없는 자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저들에게는 혈통적 아비가 있고, 또 그 위에 이스라엘의 존재적 근원이신 하나님 아버지가 있는 백성이라는 뜻입니다(신 32:6). 다시 말하면 족보 있는 백성이란 말입니다. 역사와 전통을 가진 뼈대 있는 가문의 자손이란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저들이 소유한 유업이요, 영예요, 자랑이 된다는 말입니다. 바로 저들에게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는 영광이 있었고, 종되었던 애굽에서 구원을 받은 찬란한 구원사가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 백성들에게 자랑스럽게 저들의 역사를 회고하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옛날 일을 기억하고, 역대의 연대를 생각할 역사적 회고가 있습니다. 비록 장구한 2,000년 기독교 역사에 비하면 한 점과 같은 짧은 경향의 30년이지만, 경향의 30년 역사가 2,000년 기독교 역사와 맥을 같이 하는 역사적 계승과 전통이라고 생각할 때, 우리 경향인의 회고는 큰 의미와 감사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경향 30년의 역사 속에는 경향교회가 탄생하던 을지로 시대(1973. 4. 15-1974. 2. 16) 10개월이 있습니다. 그리고 경향교회가 교회로서의 그 기능이 형성되던 동자동 시대(1974. 2. 17-1976. 10. 24) 2년 8개월이 있습니다. 경향교회의 정착과 성장기를 이루었던 여의도 시대(1976. 10. 25-1998. 4. 5) 21년 5개월이 있습니다. 그리고 경향교회 부흥과 대 확장기를 맞고 있는 강서 시대(1998. 4. 6-현재) 5년 6개월이 있습니다. 역사 속의 경향 30년은 이런 움직임 속에서 우리에게 회고와 감사를 불러일으키게 합니다.
Ⅰ.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이심을 회고하게 됩니다(잠 16:9).
1973년은 저의 생애 중에 실로 큰 변화의 해였습니다. 제가 우리 나이로 마흔 살 되던 해였습니다. 그것은 제가 복음 전도자로 소명을 받고 사명의 길로 나온 후, 서울로 교회 개척의 걸음을 옮겨 걷던 해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적으로 바보의 행진이었습니다. 서울에로의 개척의 걸음은 100% 아무런 여건이 없었습니다.
인적 자원의 연고나, 경제적 여건이나, 아니면 저 자신에게 어떤 특별한 재능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완전히 백지 상태요, 백무 상태에서 여섯 가족이 서울 개척의 모험(?)을 단행하였습니다. 서울로 옮기고자 하는 어간에 옮길 수 없는 결정적인 사유들이 이미 생겼습니다. 그럼에도 서울 개척이라고 하는 강한 사명감에 눌려서 외상으로 임대해 놓은 을지로 3가에 소재한 건물 3, 4층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실로 저 스스로에게도 예측불허의 걸음이었습니다.
와서 보니 을지로 3가는 교회 개척에 적합한 지역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월 20만원의 임대료에 압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의 순서는 예배 처소를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찾은 곳이 전농동 로터리에 위치한 덕화빌딩 3, 4층에 있는 60평의 다방이었던 공간으로 옮기기로 하였습니다. 을지로에서의 120평 건물의 반인 60평으로 줄이고 옮기는 형편이었습니다.
계약을 약속한 날에 김상오, 박세철 집사(당시)와 하성락 선생(당시 대학생)은 그곳으로 바로 가기로 하고, 저와 함께 당시 서울대 학생이었던 김준식 선생(지금은 在美 목사)은 같이 그곳으로 가서 함께 만나 계약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전농동 로터리로 가는 버스노선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에게 오기로 약속한 김준식 선생이 한 시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때 저는 검은 오버코트 주머니에 넣으려던 도장을 보고 ‘세상에 주의 종 석원태 목사의 도장이 을지로의 120평짜리에서 60평짜리 공간으로 줄여서 임대하는데 찍히다니…’라고 중얼거리다가 그 순간에 “주여! 저를 축복하셔서 이 도장이 더 큰 축복을 받는데 찍히도록 해 주십시오…” 하는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도장은 현재도 사용 중인 인감입니다. 그런데 그 시간에 기다리던 사람은 나타나지 않고, 뜻밖에 제가 부산 남교회에서 전도사 일을 볼 때 집사 일을 보았던 김창숙 집사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지금 자기가 교회 아래 한일은행 옆에 있는 길다방에 있으니 급히 내려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예배당 임대 계약하러 가는 일 때문에 바쁘다고 하니, 바로 그 일 때문에 왔으니 빨리 내려오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만나본즉 어제 주일 오후예배에 자기 부인이 우리 교회 예배에 참석했다가 우리가 전농동 로터리에 있는 빌딩을 예배실로 임대 계약한다는 광고를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서울 역전 동자동에 대한기독교여자절제회관이 있는데, 거기에 어느 목사가 개척을 하다가 떠나고 지금 비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당장 ‘돈’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거절했더니 가보자고 저를 강권하여 데리고 갔습니다. 결국 제 생각과는 정반대로 더 넓고 좋은 위치에 150만원 보증금에 10만원 월세로 계약하여 옮기게 되었습니다. 을지로에서 꼭 10개월만에 서울 역전 동자동에 소재한 대한기독교여자절제회관으로 옮기게 된 것입니다(1974. 2. 16). 우리 경향의 걸음이 이렇게 된 것은 교회로 와서 저와 함께 가기로 했던 김준식 선생이 강아지 심부름 때문에 고모 집에 갔다가 늦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약속대로 왔다고 하면 우리 교회 걸음의 진로가 크게 달라질 뻔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가리켜 하나님의 섭리의 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자동으로 옮긴 후 2년 8개월을 머물면서 교회가 조직되고(당회, 제직회, 각 기관…), 내일의 경향교회를 꿈꾸면서 교회당 건축위원회가 발족되어 건축연보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현재 우리 교회의 지도급에 있는 사람들(고 우종선 장로, 김상균·방상복·최창식·강병길·정겸효 장로… 등)을 보내 주셨습니다. 남녀 장정들과 학생들까지 400여 명에 이르는 교세를 주셨습니다. 그러던 중 현재 미국에 있는 합동측에 소속되어 있던 석태운 목사가 우리 교회 대학부를 맡아서 오게 된 일이 있었는데, 그가 저를 자극하여 여의도로 교회를 옮겨야 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실로 저에게는 또 한번 충격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꿈에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걸음을 인도하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한강도하작전(?) 그리고 여리고성 함락(여의도 복음 공략)이라고 하는 부푼 꿈에 가슴이 설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른바 21년 5개월이라고 하는, 우리 경향 30년 역사의 2/3가 넘는 시간의 여의도 시대를 기록하게 되었습니다(1976. 10-1998. 4). 실로 여의도 시대의 경향은 정착과 성장의 축복을 받는 시기였습니다. 현재 우리 교회와 신학교 그리고 교단의 역사가 이루어진 어간이 여의도에서였습니다.
처음에 여의도 주부생활빌딩 3층 100평을 임대하였다가(1976. 10. 31), 다음에 우정빌딩 4층 117평을 완전매입하고 이전하였습니다(1977. 12. 18). 그리고 사실상 그 건물 전체를 다 매입하고 때가 오면 헐어버리고 유리빌딩 건물을 만들어 세계선교의 센터로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건물이 생기는 대로 매입하든지 아니면 임대하든지 하였습니다. 우리가 강서로 오기 전까지 610평의 공간을 확보하였습니다. 그 중에 450평은 우리 교회 소유였고, 160평은 임대였습니다.
그러던 중 1985년 5월과 6월, 8월 당회에서 서울 관악구 신림9동에 소재한 땅 3,000여 평의 대지를 확보하고, 그곳에 경향가든교회를 건축하기로 하였습니다. 마침내 1985년 12월 25일 성탄절 오후에 기공예배를 드리고, 다음 해 1986년 1월 24일에 경향가든교회당을 착공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신림9동 주민들의 결사적 반대에 부딪쳐 그 꿈이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 1988년 8월 28일 제384회 당회에서 현재 문산(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눌노리 산 2번지) 지역에 임야 59,520평을 매입하고, 1989년 7월 17일 경향수양관건립 기공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90년 12월 21일에 경향수양관 공사 완료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날은 그곳에서 성탄축하 예배도 겸하여 드렸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그로부터 4년이 되던 1994년 8월과 9월에 현재 이 학원을 인수하게 하시고, 1995년 7월 17일에 교회 기공예배를 드린 후, 1998년 4월 15일에 준공을 하고, 다가오는 2003년 12월 6일(토) 오후 2시에 역사적인 헌당예배를 드리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경향 30년의 걸음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시작한 여로였습니다. 그러나 그 중간에 사람, 특히 여러분의 지도자인 석 목사에게는 그 뜻을 찾아 그 길을 가는데 착오가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전농동 로터리가 아닌 서울 역전 동자동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강아지 심부름 때문에 시간에 착오가 생기게 하여서 교회의 걸음을 재조정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문산에 있는 6만여 평의 땅을 먼저 확보하여 21세기 세계 지도자 양성의 기지를 확보하게 해 놓고, 그 다음에 강서로 향하게 하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신림동을 향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신림9동의 사람들을 시켜서 우리를 신림동에서 철수하게 하고, 먼 장래를 위하여 문산에 기지를 먼저 확보하게 하고, 지상에서 경향의 영원한 정착지가 되는 이곳으로 우리를 섭리하시고 인도하셨습니다. 그 결과 큰 축복의 떼를 이루게 하시고, 아니 현재보다 천배나 더하는 미래의 문을 활짝 열어 놓고 계십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16:33)!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잠 16:1)! 그렇다면 개인의 걸음이나 공동체의 걸음은 결코 사람이 주인이 아니고 하나님이시란 말이 아닌가!
역사의 여로는 우연이 아니고 필연이란 말이 아닌가! 역사는 맹목적이 아니고 목적적이란 말이 아닌가! 무의미의 반복이 아니고 의미를 담은 진행이고, 기계론적 진화 과정의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 통치란 말이 아닌가! 절대하신 하나님이 연대를 정하셨다는 말입니다. 거주의 경계를 정하셨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의 이동과 이주와 정착을 하나님이 친히 통치하시고 주장하시고 섭리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만이 역사의 주시라는 말입니다. 개인과 일반은총의 역사도 그러하겠거든 하물며 역사 중의 역사인 하나님의 구속사 운동의 표적인 교회의 행방이 어찌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경향 30년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경향 30년의 역사를 기억해야 합니다. 특별히 경향 30년 여로의 길을 기억하고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그 길과 시간은 하나님 자신이 주장하고 인도하였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교회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향교회의 미래는 21세기를 받은 축복의 불기둥이 될 수 있다는 우리들의 확신입니다. 이것이 경향 30년 역사의 길을 하나님이 인도했다는 우리 경향인의 역사적 회고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감사입니다.
기억하라! 생각하라!
신 32:7-14 / 조상호 목사
옛날 중국의 양나라에 장승요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나라를 위해 충성스럽게 일한 관료이기도 했지만, 산수화 등의 그림을 신기에 가깝게 그려내어 중국의 전설적인 대화가로서 더 알려진 사람입니다. 어느 날 그가 남경 근처의 안락사라는 절에서 용을 그려 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 절의 벽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검은 먹구름을 뚫고 하늘로 치올라 가려는 두 마리의 용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그가 얼마나 그림을 잘 그렸는지 비늘 하나 하나에도, 날카로운 발톱에도 강한 생명력이 넘쳐 나고 있었습니다. 다만 한가지 이상한 것은 용의 눈동자가 그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에게 눈동자를 왜 그리지 않았느냐고 하면서, 그 용 그림에 눈동자를 그려 놓으라고 졸라댔습니다. 결국 그가 사람들의 성화에 못 이겨 눈동자를 그려 넣자, 우레 소리와 함께 용이 벽을 박차고 뛰쳐나와 하늘로 올라 버렸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전설입니다. 벽에 그린 용이 하늘로 올라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용을 얼마나 잘 그렸는지,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보였다는 의미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일로 해서 그 유명한 고사성어인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이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용의 그림에 눈동자를 그려 넣는다'는 뜻이 있지만, 좀 더 넓게 보면 '어떤 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말합니다. 또한 '모든 것의 마지막 마름질'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용의 그림에 눈동자를 그려 넣는 마무리가 중요한 것처럼,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도 마지막을 잘 정리하는 마무리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오늘을 포함해서 지난 364일, 51주 동안 많은 부분을 그렸습니다. 그러나 하루가 남은 이 시점에서 마지막 한 점을 잘 그려 넣어야 합니다. 마무리를 잘하지 못하면 작품이 완성이 되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한 해의 마무리를 잘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오늘 이 시간이 금년도에 가장 중요한 시간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금년도 마지막 주일예배인 이 시간이 화룡점정의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2001년도 마지막 화룡점정의 예배에서 '기억하라 생각하라'는 제목을 가지고 함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모세의 고별 설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으로부터 인도하여 낸 모세는 나이가 120세가 되었습니다. 이제 자신의 운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자신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알고 요단강 건너편에 서서 사랑하는 동족들에게 마지막으로 유언을 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마지막에는 시시한 말을 하지 않고 가장 중요한 말을 유언으로 남기기 때문에, 오늘 본문은 그가 지금까지 120년 동안 살면서 이야기한 다른 어떤 말씀보다도 가장 중요하고 가장 필요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본문 7절에서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좀더 쉽게 표현하면 이렇게 말할 것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를 돌아 보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섭리하셨는지를......” 또 모세의 이 말을 우리 각자에게 적용해 본다면 "2001년 한해를 돌아 보라! 하나님이 어떻게 함께 하셨는지를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 교회에 적용해 본다면 "지난 한해를 돌아 보라! 하나님께서 크라이스트처치순복음교회를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여러분! 뒤돌아 보셨습니까? 과거가 우리의 미래를 보장해 주지는 않지만, 우리는 과거를 돌아봄으로, 그 과거를 거울 삼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 과연 우리를 어떻게 보살피시고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호하셨다
본문은 과거 이스라엘의 받은 바 은총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즉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얼마나 뜨거운 사랑으로 보호해 주셨는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7절의 "옛날을 기억하라!”로 시작하는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여 당신의 백성 삼아주신 것부터 출애굽 한 후, 40년의 광야생활 동안 끝까지 보호해 주신 사실을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10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이 말씀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메마른 사막, 아무런 수확도 기대할 수 없는 단지 짐승의 울음만이 들리는 바로 그 광야에서 하나님께서는 세심한 배려와 극진한 사랑으로 만나주시고, 호위해주시고, 보호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하시되, 어떻게 지키셨다고 합니까? 당신의 눈동자같이 이스라엘을 지키셨고 합니다. 이 눈동자는 인간의 신체 부위 중 가장 귀중한 것입니다. 또한 가장 쉽게 다칠 수 있는 약한 부위입니다. 오늘 주보에 금주의 추천 테잎으로 소개하고 있는 강영우 박사의 간증을 들으면 눈이 얼마나 연약한 부위인지 알 수 있습니다. 강영우 박사는 국민학교를 다니던 때, 축구공에 맞아 어느 날 갑자기 실명을 하게 되어 맹인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 분은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으로 후에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현재는 부시 대통령이 이끄는 미국 정부의 장애인정책 차관보와 유엔 세계장애위원회 부의장으로 미국에서, 한국인으로서는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르기도 했지만, 그 분은 실명한 이후부터 인생이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다고 했습니다. 축구공 한방에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장애인,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장애인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눈은 우리의 많은 신체부위 중에 가장 중요한 부위에 속하며, 가장 연약한 부위에 속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이 어두우면 온 몸이 어둡게 된다고 말씀하시면서 눈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눈동자같이 지켜주셨다"는 말은 '최우선적으로 아끼며, 아주 조심스럽게 보호해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 생활 40년 동안 눈동자같이 보호해주시고 지켜주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중에 아무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 하다못해 숨을 쉬는 것까지도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2001년도를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느 잡지에 보니까 성인을 기준으로 심장은 하루 동안 자그마치 10만3천6백89번을 뛴다고 합니다. 내가 밥을 먹을 때에도, 내가 일을 할 때에도, 운동을 할 때에도, 무의식중에 잠을 잘 때에도 10만3천6백89번을 뛰고 있습니다. 또 하루 동안 2만3천40번 숨을 쉰다고 합니다. 또 하루에 700만개의 두뇌 세포를 사용하며 산다고 합니다.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 내가 무슨 수고를 해서 심장이 이렇게 많이 잘 뛰고 있습니까? 내가 무슨 수고를 해서 나의 폐가 호흡을 하고 있습니까? 내가 무슨 노력으로 두뇌세포를 700만개씩이나 사용합니까? 아닙니다. 나는 아무 수고도 하지 않았는데도, 나는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는데도, 하나님께서 나의 인체를 만들어 주시고 나의 심장을 움직여 주시고, 폐를 움직여 주시고 두뇌세포를 움직이셔서, 내가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보호하심과 도우심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도와주셨기에 우리가 지난 1년 동안 살게 된 줄로 믿습니다.
서로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던 두 친구가 모년 모월모일 모시 어느 장소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했습니다. 드디어 약속한 때가 되어 두 친구가 약속장소에서 만났을 때, 한 친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내가 오다가 중간에 겪은 일을 들어보게! 난 하마터면 여기에 오지 못올뻔 했어. 갑자기 내 말이 길을 가다가 뭔가에 깜짝 놀라 뛰는 통에 내가 그 자리에서 땅에 굴러 떨어 버렸지 뭔가. 다행히도 아무 데도 다친 데가 없었기에 망정이지. 사람도 거의 지나다니지 않는 곳에서 다리라도 부러졌더라면 큰일날 뻔 했지 뭔가! 다행이다 싶어 일어나서 주위를 둘러보니까 난 까무라칠뻔 했다네. 내가 말에서 떨어진 곳에서 몇 발자국 떨어진 곳이 바로 낭떨어지더란 말일세. 나는 즉시 무릎을 끓고 하나님께서 나를 그렇게 기적적으로 살려주신 것에 대해 감사를 드렸다네." 그러자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다른 친구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여보게, 자네의 말을 들으니 나는 자네보다 훨씬 놀랍고 기적적인 하나님의 도우심을 겪었노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네. 내가 탄 말은 여기까지 오는 동안 한 번도 날 떨어뜨려 본 적이 없다네. 그 녀석은 아주 침착하고 안전하게 아무 사고 없이 나를 이곳까지 데려다 주었다네. 나는 위험스런 상황에 조금도 빠져들지 않았네.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안전하게 인도하신 일을 생각하면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 우리는 지난 한해 동안 살면서 힘든 문제 가운데에서도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해야 하지만, 평탄하게 오늘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문제를 만나지 않았든지 간에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도우심으로 우리는 오늘까지 온 줄로 믿습니다. 우리 가정적으로도 눈동자같이 보호해주신 주님의 은혜로 오늘까지 온 줄로 믿습니다. 우리 교회적으로도 정말 많은 주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이 있었다고 믿습니다. 내일 송구영신예배 때, 지난 한해동안 우리 교회에 부어주셨던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VTR을 시청하며 직접 눈으로 확인하겠지만, 지난 1년을 돌아보면 어느 것 하나 하나님께서 도우시지 않은 것이 없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지난 한해동안,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기억하고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년 초부터 오늘까지 우리의 가정을 인도하신, 우리 교회를 이 시간까지 이끌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람을 기억하고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연단하셨다
지난 한해 동안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도우셔서 오늘에 이르렀다는 저의 말에 어떤 분들은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목사님, 하나님께서 도우셨다고요. 웃기지 마십시오. 2001년을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합니다. 더 이상 기억하기도 싫습니다. 빨리 2002년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고, 기쁨도 많고, 슬픔도 많았던 지난 한해였습니다. 어쩌면 그와 같은 시절이 다시 올까 두렵기만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기억하기조차 싫은 과거라 할지라도 미래를 위해서는 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신다고 해서, 항상 평화롭고 만사 형통하게 이끄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연단 하십니다. 11절을 보겠습니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 어떤 하나님이라고 합니까? 독수리가 자기 새끼를 다루듯이 우리를 다루시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얼른 들으면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독수리의 생태를 알아야 합니다. 독수리는 생태학적으로 보금자리를 높은 절벽이나 벼랑 위에 만든다고 합니다. 아무나 접근하지 못하는 곳에 튼튼한 둥지를 치고 거기에 자기의 털이나 부드러운 물질로 푹신한 침대를 마련합니다. 그 다음 거기에다 알을 낳고 알을 오랫동안 품은 후, 알에서 나온 새끼를 기릅니다. 독수리 새끼는 튼튼한 집에서 어미 독수리가 물어다 주는 음식을 받아먹으면서 하루 종일 기분 좋게 지냅니다. 눈만 뜨면 파란 창공이 올려다 보이고 둥지 아래에는 광활한 벌판이 펼쳐집니다. 독수리 새끼는 날마다 행복입니다. 난공불락의 요새 같은 집에서 새끼는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그렇게 자기를 사랑스럽게 돌보던 어미 독수리가 날개를 퍼덕이며 보금자리에 있는 새끼를 못살게 굴기 시작합니다. 새끼 독수리는 갑자기 변한 어미를 보고 "아니 저 엄마가 미쳤나? 왜 나를 못살게 하지?" 어리둥절해 합니다. 어미 독수리는 새끼 독수리가 아랑곳하지 않고 날개를 계속 펄럭이기도 하고, 입으로 새끼를 둥지 가장자리로 마구 밀어내기도 합니다. 새끼는 어미가 왜 그렇게 하는지 모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보금자리에서 빠져 나오지 않으려고 기를 쓰며 소리를 지릅니다. 어떤 조류학자의 말에 의하면 어미 독수리는 새끼들을 끌어내기 위해 푹신푹신한 깃털 침대를 전부 다 밖으로 물어 던져 버린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제는 바닥이 딱딱해지니까 새끼들이 견디다 못해 기어 나온다고 합니다. 또 다른 학설에 의하면 어미 독수리는 가시나무를 그 보금자리에다 집어넣어 새끼들이 찔리도록 한다고 합니다. 결국 새끼 독수리는 안락한 보금자리에 계속 누워있으면 하던 생각을 단념하고 불평을 늘어놓으면서 둥지 밖으로 기어 나오다가, 밑으로 곤두박질치며 떨어집니다. 새끼 독수리는 '나 죽는다!'하고 열심히 날개를 움직여 날려고 하지만, 날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면서 땅으로 떨어집니다. 어미 독수리는 공중에서 새끼가 떨어져 내리는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기만 합니다. 조금만 지체하면 새끼가 당장 땅바닥에 부딪혀 박살날 것 같습니다. 그 때 어미 독수리는 손살같이 내려가서 커다란 날개로 새끼 독수리를 안전하게 받아 다시금 높이 하늘로 솟아오릅니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나 다시 새끼를 떨어뜨립니다. 그러다가 땅바닥에 박살이 나려고 할 때, 날아와서 받아주고 또 다시 떨어뜨리기를 반복합니다. 결국 어미 독수리는 새끼를 이런 훈련을 반복함으로써, 새끼를 독수리답고 튼튼하게 키운다고 합니다.
모세는 바로 이러한 사실에 비유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기 백성답게 양육하기 위하여 광야에서 연단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 40년 동안 보호하셨던 것은 사실이지만, 보호하시는 과정에 있어서 때로는 갈증과 배고픔, 전쟁과 질병, 등의 온갖 고초를 겪게도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연단 시키는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천국시민으로 양육하기 위해 때로 우리에게 환난을 주십니다. 당신의 종들로 만들기 위해, 당신의 그릇으로 만들기 위해 연단을 하십니다. 여러분! 지난 한해동안 우리의 가정에 가슴아팠던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갑자기 경영하던 사업이 문제가 생기고, 사랑하는 자녀에게 문제가 생기고, 건강에 문제가 생겼던 적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적으로도 때로는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분이 떠나가기도 하고, 말씀으로 잘 양육되던 형제가 떠나기도 하고, 하루아침에 예배생활을 등한시하는 성도들을 보고 가슴이 아프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난 1년을 돌아보면, 그러한 환난이 우리를 연단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물 가운데로 지나게 하기도 하시고 불 가운데 통과하게도 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러한 연단의 과정을 가리켜 (벧전1:7)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시키시는 분명한 뜻을 알아야 합니다. 이 연단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훈련시키시기 위한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지난 한해 연단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여정에 내내 함께 하실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신다
이스라엘 광야 생활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언제까지나 이리 찢기고 저리 터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약속의 땅 가나안의 입성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목적지를 위해 무려 40년을 몸부림쳤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행진 방향이 가나안과 정반대일 때, 많은 고난이 닥쳤을 때, 목표가 멀게만 느껴졌을 때, 하나님을 의심하기도 하였고 배반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변치 않으시고 결국 당신의 계획대로, 조금씩 조금씩 그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12,13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여호와께서 그로 땅의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시며 밭의 소산을 먹게 하시며,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서 기름을 빨게 하시며”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현재 어려움 가운데 있을지라도 좌절하지 않을 수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며 우리를 인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자주 드리는 예화 하나가 있습니다. 2차대전이 심하던 때에 중요한 임무를 띤 영국의 기선 한 척이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항로가 매우 위험한 길이었기 때문에 그 배의 선장에게는 다음과 같은 비밀 메세지가 전달되었습니다. "여기에 나타나 있는 항로를 따라서 똑바로 갈 것. 무슨 일이 있어도 이 길에서 좌우로 벗어나서는 안됨. 어떤 도움이 필요할 때에는 다음의 비밀부호로 즉시 무전을 칠 것." 이 기선은 며칠간을 항해하여 미국으로 가던 중, 하루는 적의 군함 한 척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선장은 즉시 비밀부호로 다음과 같이 무전을 쳤습니다. "적의 군함이 보임. 어떻게 할지 지시를 바람." 그러자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는 어느 배에서 무전으로 회답이 왔습니다. "똑바로 갈 것. 우리가 옆에서 다 알고 지키고 있음." 사방을 둘러보아도 눈에 보이는 영국의 전함이 한 척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기선은 지시에 따라 계속 똑바로 갔습니다. 드디어 목적지인 미국의 항구에 도착하여 항구에 입항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선을 따라서 영국의 잠수함 한 척이 같은 항구로 입항해서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이 잠수함은 비록 눈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기선이 영국을 떠나 미국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옆에서 지켜 주며 필요시에는 언제나 도와주려고 따라 왔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바로 이와 같으십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으시지만 성령으로 항상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의 땅이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2001년도 한해동안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보호해주시고 연단시켜 주신 하나님께서 2002년도에도 인도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사람을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과 사역을 같이 하시는 분 가운데 한국인 아가씨가 한 분 있는데, 킴 윅스라는 맹인 아가씨입니다. 한국전쟁 때 실명을 했고 고아원에서 자라났는데, 어떤 미군 중사의 도움으로 미국에 가서 인디아나 주립대학에서 공부하고 또 오스트리아에서 성악 수업을 하여 훌륭한 성악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그녀가 예수를 믿고 놀라운 간증을 갖게 되어 빌리 그래함 목사님과 함께 집회를 할 때마다 간증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은 간증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장님인 나를 인도할 때, 저 100미터 전방에 뭐가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앞에 물이 있으니 건너뛰라고 말하고, 층계가 있으니 발을 올려놓으라고 말합니다. 내가 나를 인도하시는 분을 믿고 한 걸음씩 걸음을 옮기기만 하면, 나는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꼭 도착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10년 후를 알지 못합니다. 20년 후도 알지 못합니다. 또 알고자하지도 않습니다. 오늘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그 하나님께 믿음으로 순종하며 오늘을 살면, 하나님은 내일을 인도하셔서 마침내 내 생애를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계획하신 그곳에 도달케 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인생의 진정한 가이드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연단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2023년도에도 우리의 길을 예비해주시고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2021년도 마지막 화룡점정의 주일예배를 드리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난 한해 동안 보호하시고 연단시켜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새해에도 우리를 인도하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실로 과거나, 현재나, 영원토록 불변하시는 분이십니다. 과거 이스라엘에 대한 이러한 섭리는 오늘 우리 시대에도, 그리고 내일에도 변함없이 계속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대한 마스터 플랜을 가지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해야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단지 영국의 기선이 잠수함에서 명령하는 대로 나갔을 때,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여 따르면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2022년 한해의 생애가운데 경험할 줄로 믿습니다.
한 해의 매듭을 잘 지으려면
신명기 32:7-12 / 조영선 목사
천재 화가인 미켈란젤로가 바티칸의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에 벽화를 거의 완성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작품은 이제 거의 다 끝난 것으로 보여졌습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아직도 천정을 향해서 마지막 finish 터치를 위한 손질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를 도왔던 조수들 가운데 한 사람이 “선생님, 이젠 거의 끝나지 않으셨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미켈란젤로는 “자네 눈에는 끝난 것으로 보이는가? 내 눈에는 아직 끝나지 않았네”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리고 몇 달을 계속해서 그는 이 작품에 더 매진하게 되고 마침내 작업은 완전히 끝난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작업 도구를 치우지 않고 계속 천정을 응시 하면서 그 장소를 맴돌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또 조수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이제는 정말 다 끝나지 않았습니까?” 그때 미켈란젤로는 이런 유명한 대답을 남겼다고 하죠.
“내 눈에는 다 끝났는데 주님 보시기에는 어떨지 모르지, 주님 보시기에는 어떨지 모르지” 여러분, 한 해를 보내는 이 마당에 우리는 거의 다 끝났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우리 주님이 보시기에 어떠하겠습니까?
우리 주님이 끝났다고 해야 끝나는 것입니다.
12월은 한 해를 결산하는 달입니다. 그리고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은 송년주일이라고 합니다. 비록 우리는한 해를 매듭 짓고 있지만, 언젠가 우리 모두는 80-90평생을 결산하는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마지막 결산을 잘 하려면 우리는 한 해 한 해를 돌이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마지막 그날에 후회 없는 결산을 위한 일종의 중간 결산과 같은 의미를 가지는 작업입니다.
여러분들 뜨개질 해 보신적 있으시죠. 실타래로 스웨터도 떠서 입기도 하고 모자도 떠서 쓰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뜨개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지 아십니까? 매듭입니다. 아무리 뜨개질을 잘 했을 지라도 이 매듭을 짓지 않으면 언제든 다시 풀려 질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면 애써 만든 것들이 다 헛수고가 되는 것이죠.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매듭을 잘 짓고 마무리를 잘 져야 합니다. 한 해 한해 매듭을 잘 짓다 보면, 마지막 주님 앞에서 인생을 마무리 할 그 때에 주님께서 “다 끝났다” 고 하셔야 정말 끝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주님으로부터 괜찮은 인생을 살았다고 칭찬을 듣게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렇다면 이 한해를 마무리 하면서 우리는 어떻게 마지막 매듭을 잘 지어야 하는지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만 찾아 보며 살펴 보기를 원합니다.
1) 첫째로 한 해를 잘 마무리 하기 위해서는 옛날을 기억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과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얼마나 뜨거운 사랑으로 보호해 주셨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말씀입니다. 7절을 보시면 “옛날을 기억하라” 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셔서 자녀 삼아 주시고 그것도 모자라 40년의 광야생활 동안 하나님께서 눈동자와 같이 보호해 주셨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10절에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눈에는 30만개의 회로가 있고 1억 개의 신경세포가 있다고 하죠. 그래서 우리의 눈 속으로 무엇인가 들어오려고 하면 눈이 자동으로 감기면서 보호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자동적으로 지켜 주셨다는 것입니다.
왜 지켜 주셨을까요? 연약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눈은 우리의 신체 중에 가장 연약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또 가장 귀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 6:22절에 “눈은 몸의 등불이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눈이 귀하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들을 눈동자처럼 보호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한국인으로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을 꼽는다면 강영우 박사를 꼽을 수가 있습니다. 이분이 과거 부시 대통령 시절에 대통령 자문위원까지 지내셨는데, 맹인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맹인이 되었냐면, 초등학교 시절 축구공에 머리를 맞았는데 갑자기 눈이 안보이더라는 거예요. 그 후로 그는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와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고 부시 대통령 시절에 장애인정책 차관보와 유엔 세계장애위원회 부의장으로 한국인으로서 미국에서 성공한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이분이 그의 자서전에서 뭐라고 말하냐면 ‘하나님께서 나를 눈동자 처럼 보호해 주셨다’ 고 말했어요.
이분이 사실 맹인으로 살면서 얼마나 불편했겠습니까? 원망하고 불평도 할 만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분은 하나님이 나를 보호해 주셨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있다’ 는 것입니다.
한해를 보내면서 여러분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십니까?
우리 중 아무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 하다못해 숨을 쉬는 것까지도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하루도 살 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심장이 자그마치 하루에 10만 번 정도를 뛴다고 합니다. 내가 밥을 먹을 때에도 뛰고, 내가 일을 할 때에도 뛰고, 운동을 할 때에도 뜁니다. 심지어는 무의식 중에 잠을 잘 그 때에도 쉬지 않고 심장이 펌푸질을 합니다. 내가 펌푸질을 해서 심장이 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무슨 수로 이렇게 잠 잘 때도 뛰게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장을 움직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지난 1년을 살게 된 줄로 믿습니다.
제가 지난 한해 동안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도우셔서 우리가 오늘에 이르렀다고 말씀 드리면 이 말에 쉽게 동의하지 않는 분도 있을지 모릅니다.
‘저는 2012년을 생각하면 지긋지긋 합니다. 더 이상 기억하기 싫습니다.’ 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분들이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힘들고 어렵고 근심 가운데 살았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옛날을 기억하라’ 고 하신 것입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기억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옛날을 기억하라’ 고 하지 않으셨을 거예요. 오히려 ‘나의 은혜를 기억하니 기쁘다’ 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왜 우리들에게 ‘기억하라’ 고 하셨냐면 하나님께서 나를 좀 알아달라고 하신 뜻에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다 우리를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옛날을 기억하다 보면, 내일의 실패를 미연에 방지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고 불평할 때, 하나님께서는 옛날에 내가 너희들에게 어떻게 했는지 기억해보라고 말씀합니다.
‘너 옛날에 근심 가운데 어떻게 했니?’ 더듬어 보라는 것입니다.
‘인관 관계가 틀어 지려고 할 때’ 과거에 어떻게 했는지 더듬어 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내려가고 시험 들려고 할 때’ 과거에 어떻게 극복했는지 기억해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서 불평이 올라오고 믿음이 내려가려고 할 때, 그때를 회상하며 잘 이겨 내라는 것입니다.
낚시하시는 분들이 고기를 낚을 때보면 같은 미끼로 계속 유혹을 합니다. 물고기는 여러
번 입질을 하다가 끝내 그걸 물게 되는데 동료가 낚시에 물려서 끌려나가는 것을 보고도
역시 다른 물고기도 걸려듭니다. 그리고 고기를 놔주면 또 다시 그 낚시에 걸릴 때도 있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물고기의 지능은 기억하는 기억력이 3초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다.
이렇게 옛날을 기억하지 않으면 앞으로 살아가는데, 자주 실패할까봐, 자주 넘어질까봐 하나님께서 기억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2012년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기억하며 2013년에는 넘어지고 실패하지 않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그러면
2) 두번째로 한 해를 잘 마무리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지럽게도 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요, 하나님의 자녀들을 항상 평화롭고 만사 형통하게 이끄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은 근심 중에도 있게 하시고, 오늘 본문 11절의 말씀처럼 “어지럽게” 도 하시는 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지럽게” 라는 표현을 더 연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1절을 보겠습니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독수리가 자기 새끼를 다루듯이 우리를 다루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독수리의 생태를 알아야 합니다.
독수리는 생태학적으로 보금자리를 높은 절벽이나 벼랑 위에 만든다고 합니다. 아무나 접근하지 못하는 곳에 튼튼한 둥지를 치고 거기에 자기의 털이나 부드러운 물질로 푹신한 침대를 마련합니다. 그 다음 거기에다 알을 낳고 알을 품은 후, 알에서 나온 새끼를 기릅니다.
독수리 새끼는 튼튼한 집에서 어미 독수리가 물어다 주는 음식을 받아먹으면서 하루 종일 기분 좋게 지냅니다. 눈만 뜨면 파란 창공이 올려다 보이고 둥지 아래에는 광활한 벌판이 펼쳐집니다. 독수리 새끼는 날마다 행복입니다. 난공불락의 요새 같은 집에서 새끼는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그렇게 자기를 사랑스럽게 돌보던 어미 독수리가 날개를 퍼덕이며 보금자리에 있는 새끼를 못살게 굴기 시작합니다. 새끼 독수리는 갑자기 변한 어미를 보고 “아니 우리 엄마가 미치셨나? 왜 나를 못살게 하지?” “왜 나를 어지럽게 하지?” 하며 어리둥절해 합니다.
그래도 어미 독수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새끼 독수리를 어지럽게 만듭니다. 그리고는 결국에는 그 벼랑에서 밀쳐서 떨어뜨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은 이렇게 어지럽게 해서 떨어뜨리기도 하신 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12절에 “인도했다. 함께했다” 라고 말씀합니다.
아니, 벼랑에서 떨어뜨리고는 인도했다니요. 우리를 근심 가운데 있게 하시고, 인도했다니요?
우리 주머니에 돈이 마르는데도, 하나님께서 함께 했다니요? 우리의 상식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지만, 이것이 우리를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면, 나에게 조그만 환난이 오면 하나님을 떠나고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독수리 얘기를 좀 더 하겠습니다.
새끼 독수리가 떨어질 때, 어떻게 합니까? ‘나 죽는다!’ 하며 열심히 날개를 움직여 날려고 하겠죠. 그래서 한번에 날라버리면, 다행이지요. 그렇지 못하고 약한 새끼 독수리는 땅에 곤두박칠 칩니다. 그러면 땅에 떨어질 즈음에 어미 독수리가 쏜살같이 내려가서 커다란 날개로 새끼 독수리를 안전하게 받아 다시금 높이 하늘로 솟아오릅니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나 다시 새끼를 떨어뜨립니다.
그러다가 땅바닥에 박살이 나려고 할 때, 날아와서 받아주고 또 다시 떨어뜨리기를 반복합니다. 결국 어미 독수리는 새끼를 이런 훈련을 반복함으로써, 새끼를 독수리답고 튼튼하게 키운다고 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천국시민으로 양육하기 위해 때로 우리에게 환난을 주십니다.
당신의 종들로 만들기 위해, 당신의 그릇으로 만들기 위해 연단을 하십니다. 여러분! 지난 한해 동안 우리의 가정에 가슴 아팠던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갑자기 경영하던 사업이 문제가 생기고, 사랑하는 자녀에게 문제가 생기고, 건강에 문제가 생겼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1년을 돌아보면, 그러한 환난이 우리를 연단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물 가운데로 지나게 하기도 하시고 불 가운데 통과하게도 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러한 연단의 과정을 가리켜 벧전1:7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오실 그 때에, 장성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서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연단을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기억하며, 나를 연단하시는 하나님을 이해한다면, 그런 사람은 매듭을 잘 지을 것입니다. 또한 매듭을 잘 지은 사람은 다가오는 2013년에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혹시 실패하더라도, 옛날을 기억하며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이렇게 옛날을 기억하는 사람이 성공할 수 있습니다.
또 연단의 하나님이신 것을 깨닫는 사람이 교회를 떠나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주님 만나는 그날까지 매듭 잘 지으며 살다가, 주님으로부터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는 복 받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기억하라
신 32:7 / 강성찬 목사
가리발디는 19세기 이탈리아의 개혁과 통일운동에 공헌한 국민적 영웅이라 합니다. 어느 날 가리발디가 청년들을 모아놓고 조국을 위해 싸우자고 역설하자 한 청년이 나와 [ 만일 내가 조국을 위해 싸운다면 그 대가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가리발디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 칼에 베인 상처, 심한 부상, 끝내 죽음이 대가로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그대들의 상처와 죽음으로 이탈리아는 자유로운 나라가 될 것이요, 우리의 후손은 평화롭게 살 것입니다]
가수 싸이의 병역특례 비리가 여론에 보도었습니다. 가수 싸이(본명 박재상)가 산업기능요원 복무 기간 제대로 근무하지 않은 정황을 포착, 조만간 소환조사할 방침이라는 것입니다. 검찰은 최근 싸이가 2003년 1월부터 2005년 11월까지 근무한 교육용 소프트웨어 개발업체인 F사 대표와 매니저 등 관계자들을 소환해 특례자로 채용된 경위와 근무실태를 조사한 데 이어 이날 F사 사무실을 압수수색하고 “F사가 제출한 출퇴근 대장 등 관련 자료를 분석한 결과 부실 근무한 흔적이 있어 좀더 자세한 증거를 수집하고자 압수수색하게 됐다”면서 “통신사실 조회, 계좌 추적 등도 병행하고 있는데, 이번주 내로 (싸이를) 소환할 예정”이라고 하며 1999년 정보처리기사 자격증을 취득한 싸이는 복무 기간 대전, 대구 등 지방과 평일에도 이뤄진 대학축제 공연과 콘서트를 100차례 이상 해왔고 리메이크 앨범을 발매하는 등 영리활동을 해 부실 근무 의혹 등이 제기돼 앞으로 싸이는 병역법상 복무가 취소되고 현역병으로 입대하게 된다는 사연입니다.
1958년 ‘왕’은 ‘일등병’이 됐다는 미국과는 대조적입니다. ‘로큰롤의 제왕’ 엘비스 프레슬리가 미 육군에 입대했던 것입니다. 스타덤에 오른 지 불과 2년 만의 군 입대는 자칫하면 아직 확고하지 못했던 그의 인기를 물거품처럼 만들 수도 있는 ‘위기’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국가의 부름을 받아들였습니다. 육ㆍ해ㆍ공군이 저마다 엘비스를 차지하려고 경쟁했습니다. 해군은 엘비스가 살았던 멤피스 출신 사병들을 모아 ‘엘비스 프레슬리 중대’를 만들어 주겠다는 등 여러 곳에서 ‘엘비스 모셔가기’에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엘비스는 모든 제의를 뿌리쳤습니다. 그리고 ‘특별서비스부대’ 배속도 거절했습니다. 이 홍보부대에서는 노래도 부르고 신문, 방송에도 나갈 수 있었지만 그는 ‘특별대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여느 사병과 똑같이 훈련받으며 서독 미군기지에서 복무했습니다. 군 복무 중에는 한 차례의 레코드 취입 외에는 일절 활동을 중지했습니다. 그럼에도 엘비스의 인기는 시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야한 몸놀림과 소란스런 음악으로 인해 그에게 거부감을 갖고 있던 보수층에 자신을 새롭게 각인시켰습니다. 엘비스는 ‘애국심이 강하고 건전한 미국 청년’으로 모든 연령층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실제로 서독 주둔 제32전차대대에서 엘비스와 같이 근무했던 윌리엄 테일러는 엘비스를 “병사로서, 미국 시민으로서 훌륭한 남자였다”고 회고했습니다. 그의 군복무를 놓고 한 여성 팬은 대통령 부인에게까지 편지를 보내 “제발 남편에게 엘비스를 돌려주라고 말해 주세요”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군은 엘비스를 다른 사병들과 똑같이 대우했고 엘비스 역시 특별함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엘비스를 우러르는 많은 청소년들이 훗날 군 생활에서도 그의 본을 따를 것”이라는 당시 육군 문서의 기록처럼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성실히 이행했다합니다.(21세기예화- 애국청년 엘비스)
미국민의 애국심을 부추기는 말 들은 끊임없이 생산되었고, 알라모 요새의 죽음은 "알라모를 잊지 말라(Remenber the Alamo)"는 텍사스 민병대의 표어로 이어졌다합니다. 나중에 이 표어는 제2차 세계대전의 "진주만을 기억하라(Remenber the Pearl Harbour)"로 다시 재생산되었고, 이런 미국식 정의와 애국심은 다민족국가의 민족주의로 그 생명을 지속하고 있다합니다.
19세기 초엽까지, 광활한 오늘의 텍사스 땅은 멕시코의 영토였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이주해 온 미국의 개척민들은 어느 누구의 속박도 받지 않고 자기네 방식대로 살아가기를 원했습니다. 멕시코 정부로서는 심히 껄끄러운 일이 어서 미국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을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1821년 멕시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하면서 국내적으로 혼란한 상태에 빠지자 미국계 주민들은 자기들 또한 멕시코로부터 독립을 하겠다고 나섰고, 1835년에는 샘 휴스턴(Sam Houston, 1793-1863) 장군을 텍사스 독립군 총사령관으로 세우고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멕시코 정부는 산타 아나(Santa Anna)장군에게 이 사태를 진압하도록 전권을 위임했습니다...이때 산 안토니오(San Antonio) 지방에 있는 알라모(Alamo) 성당 안에는 미처 200명도 못 되는 독립 의용군들이 모여 있었는데, 산타 아나 장군은 우선 이들부터 괴멸시키겠다는 결심으로 진격해 왔습니다. 병법에는 중과 부적이라고 200대 4.000의 싸움은 처음부터 상대가 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알라모의 용사들은 20배가 넘는 적을 맞아, 무려 12일 동안이나 버티다가 한 사람 예외 없이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이 장렬한 전투소식을 들은 휴스턴 장군은 부하장병들을 향하여 "알라모를 기억하라"(Remember the Alamo)는 피맺힌 절규를 발했고, 지면 알라모 전사들같이 전멸한다는 생각으로 새롭게 정신무장을 갖춘, 텍사스 독립군은 마침내 산 저신토(San Jacinnto) 전투에서 깨끗이 승리함으로써, 대망의 텍사스 독립을 성취했다합니다. 종종 미국의 거리에선 자동차 뒤 범퍼에, "알라모를 기억하라"는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는 자동차를 발견할 수 있다합니다.
1945년 12월 7일 일본군의 비행기가 진주만을 기습하여 미국이 패잔한 사건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일본군의 기습을 미국은 어느 정도 짐작은 하였지만 그리 쉽게 기습 할 줄은 모르고 주말이 되면 모두 술을 마시고 댄스파티를 밤늦게까지 즐기다가 아침 잠에 취하여 떨어져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일본 항공모함으로부터 수많은 비행기가 진주만을 향해서 공격해 오고 있었습니다. 이 때 마침 레이다 조종을 연습하던 어떤 견습병이 레이다를 보니까 태평양쪽에서 많은 비행기가 오는 것을 보고 재빨리 상부연락을 취하였지만 응답이 오기를 '그것은 아마 아군의 연습기일는지 모르니 관계없다' 고 묵살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으니 일본군 비행기는 기습하여 진주만을 일시에 폭격을 가하여 미국 군인들은 눈뜰 사이도 없이 가만히 기습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정박 중이던 기함 애리조나오는 십분만에 침몰되어 타고, 거기에 있던 병사 천 이삼백이 그대로 죽고 그 외 많은 병사들은 블구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6.25를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엄청난 피해를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1950년 6월25일, 만물이 평화롭게 잠든 주일 새벽에 소련제탱크 500대를 앞세운 인민군은 남한을 향하여 불의의 총 공격을 개시하여 이 강토를 동족상잔의 처참한 싸움터로 몰아넣었습니다.
공보부 발표의 피해상황은 남한에서 96만 명이 사망했고 가옥이 51만 동 파괴되었으며 886억원의 피해를 내었고 전쟁으로 생겨난 구제 대상자가 392만 명, 고아가 5만 명, 과부가 30만 명, 국군 전사자는 15만 명, 유엔군이 48,201명, 민간인이 37만 명, 전쟁 때 학살당한 사람이 12,000명, 납치된 사람이 15만 명, 행방불명이 30만 명이라 합니다.
북한의 경우 사살이 50만여 명, 귀순 4,700여명, 교회는 360여 곳이 피해를 입었으며, 교역자 60명이 총살되었고 옥중 희생자가 40여 명이나 되었다합니다.
6.25 때 영천 고개를 넘어 이북으로 끌려가던 애국자들의 납북 행렬은 흰옷 입은 민간인들이 4열종대로 쇠사슬에 묶여4,500미터나 되는 긴 행렬이었다합니다. 입은 죄수복에서 퀴퀴한 냄새, 걸을 때 마다 쇠사슬 소리는 차락차락 요란스럽고, 모두는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걷고, 여자들은 모두 울고, 피와 눈물의 죽음의 행렬이었고 한 구덩이 속에 할머니 어린이까지 100명씩 생매장하던 생지옥이었다고 합니다. 아사자와 병사자 그리고 폭격으로 말미암아 죽은 백성들의 시체가 들과 거리에 아무렇게나 널려졌으니 기나긴 민족의 고난의 역사를 더듬어 본다하더라도 이같이 처절한 사연은 다시 없었던 것입니다. 실로 피와 죽음으로 점철된 6.25동란이야말로 우리 한국 민족 사상 최악의 사건이었습니다. 우리 경제 문화가 발전하고 아무리 번영한대도 그 처참하던 납북 애국자들, 순교자들의 모습을 잊어버지 말고 기억해야합니다, 그 눈물, 그 피, 그 쇠사슬, 그 죽음의 소리는 영원히 우리 민족에게 사라지지 않는 경고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억하라
1950년 6월 25일은 한민족에게 비극의 날이었습니다. 꿈에도 잊지 못할 6.25 민족상쟁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남한의 군인들은 휴일을 맞아 영 밖으로 외출을 했기 때문에 무방비 상태였습니다. 잘 훈련받은 인민군이 하늘에는 비행기, 땅에는 탱크를 앞세우고 순식간에 남한으로 쳐내려왔다. 문자 그대로 물밀듯 쳐내려왔습니다. 남한의 정부와 국민은 졸지에 당한 변고라 속수무책이었고 정부는 수원으로, 수원에서 또 대전으로, 대전에서 대구로, 급기야는 부산으로 국민들을 피난시켜야만 했습니다. 그야말로 남한이 공산당의 천하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한국으로부터 구원병을 요청하는 전문이 미국의 투르먼 대통령에게 당도했습니다. 투르먼 대통령은 잠자리에 들었다가 다시 일어나 침실에서 왔다갔다하면서 어떻게 처리를 해야되는지 고심을 했다합니다. 그는 엎드려 기도를 드렸다합니다.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인 것이었습니다. 그의 결정 하나에 따라서 미국의 청년들이 수없이 피를 흘려야 할 것이요, 그에 따라 한반도의 정세가 왔다갔다하는 것입니다. 마침내 그는 결정을 내렸다합니다. “남한이 공산치하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없다. 한국동란에 미국이 개입하는 것이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길이다.” 6.25동란 때 미국군대가 손쉽게 참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한 정치가가 밤새껏 기도하는 가운데 내려진 결정에 따라 참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우리 한국 사람들이 그 덕을 입고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U.N군이 한국에 참전하게 된 것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합니다. 6월26일 날 미국 트루만 대통령이 소집한 "U.N 안전보장이사회"에서 U.N군의 한국참전 여부를 결정할 때, 소련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U.N이 한국에 군대를 파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날 아침 소련대표 아담 마리크는 안전보장이사회에 참석해서 거부권을 행사하려고 캐디락을 타고 뉴욕거리를 오는 데 이상하게도 엔진이 꺼져서 멈추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만져도 안되고 결국 고쳐가지고야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안전보장 이사회에서는 한국참전을 만장일치로 결정한 뒤였다합니다.
용서하되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미쯔오 후찌다 씨는 1941년 12월, 진주만에 공습을 감행했던 공군 비행대의 총 사령관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평상시 잘 알던 한 대령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미군 병영에서 전쟁 포로로 지내던 시절에 대해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의 친구는 그에게 뜻밖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얘기에 의하면 한 미국 여인이 규칙적으로 그 막사에 찾아와 죄수들을 위하여 여러 가지 일들을 해 주고 가곤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수들 중의 하나가 그녀에게 왜 그리 친절하게 하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여자는 대답하기를 '왜냐하면 저희 부모님도 일본군에게 죽임을 당하셨거든요.'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을 죄수들은 이해할 수 없어 어쩔 줄 모르며 당황하고 있을 때, 대략 20세가량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젊은 아가씨가 다시 설명을 했습니다. '저희 부모님은 전쟁이 발발한 무렵, 필리핀에서 선교사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지요. 그러다가 그들은 체포되어 스파이라는 명목으로 총살당했답니다. 저희 부모님은 당신들의 마지막 30분이라는 시간을 적들을 위해 기도하며 보내셨습니다. 처음에 그 얘기를 들었을 땐, 저도 너무나 분하고 억울했답니다. 하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제 마음속엔 분노가 사라지고 모든 사람을 심지어는 적까지도 사랑하는 마음이 싹트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아주 아름다운 얘기였지만 미쯔오는 그러한 일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있은 지 오래지 않아, 토오쿄오에서 기차역을 떠나려고 할 때에 그는 한 미국인으로부터 소책자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책자에는 야곱 디샬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었는데, 그 사람은 1942년 4월 18일에 토오쿄오에다 폭탄을 투하했던 두리틀 비행대원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또한 그 소책자 안에는 디샬이 40개월 정도 일본군의 포로로 있으면서 성경을 얻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그 성경을 읽기 시작했고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사로잡히게 되었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려 있었던 것입니다. 소책자를 받고 난지 얼마 안되어 미쯔오는 도오쿄오 신문에서 성경이 세계 최고의 베스트 셀러라는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는 즉시로 성경복사본을 사서 그것을 읽기 시작했는데, 특별히 다음의 내용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저들이하는 일을 알지 못하니이다.' 이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죽이려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 내용입니다. 그때에서야 비로소 그는 미국 여인의 깊은 사랑을 이해할 수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 날 미쯔오 자신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펜실바니아주 월킨스버그의 주미들은 1962년에 한가지 좋은 아이디어를 생각했습니다. 후세사람들을 위하여 그 마을의 역사를 보존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자료들을 수집해서 철제 용기에 넣은 뒤땅에 파묻었습니다. 1987년에 마을 축제 때에 이것을 파내려고 했지만 아무도 묻은 장소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시 78:9) 에브라임 자손은 병기를 갖추며 활을 가졌으나 전쟁의 날에 물러갔도다
(시 78:10) 저희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고 그 율법 준행하기를 거절하며
(시 78:11) 여호와의 행하신 것과 저희에게 보이신 기사를 잊었도다
북 이스라엘 왕국의 백성들도 역시 기억 상실로 인하여 후세에 나쁜 영향을 미친 분명한 예입니다. 에부라임의 자손들은 기억할 만한 사건들로 가득 찬 철제 용기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 즉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선을 일들을 잊었습니다. 오늘의 성경말씀에서 아삽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의 선조 때에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기억할 뿐 아니라 후세들에게 하나님의 위대하시고 신실하심을 전하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후세들에게 그의 진실하심을 계획해서 생명력 있게 나타내시게 합니다.
유명한 유태인의 명언 중에.."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말라"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2차 대전 당시 독일 아우슈비치 수용소에 수만의 유태인이 가스 살해를 당하고 전쟁이 끝난 후 유태인의 랍비가 수용소입구 벽에다 써놓은 말이라 합니다.
종교개혁 486주년을 맞이하여
신 32:7 / 석원태 목사
하나님이 만들어 가시는 구속사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세기적이었습니다. 그 중에도 역사의 문을 여시는 시작의 세기가 되는 창세기는 위대한 세기였습니다.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되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는 위대한 세기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의 원년이요 그리스도 역사(A.D.)의 원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6세기는 위대한 세기였습니다. 사도시대(복음의 원년) 이후로 가장 위대한 세기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구속역사의 현장에 나타내신 저 유명한 종교개혁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실로 16세기는 위대한 세기였습니다. 거대한 종교개혁의 사명을 위하여 그 어간에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은 강한 신앙과 확신과 사고력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높은 영지작용의 행동력과 위대한 도덕성과 정신적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받은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운동에 던져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실로 흥분적이고 영웅적인 신앙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실로 저들은 저들이 왜 그 시대에 태어나고 살아야만 했던가 하는, 존재론적 의미와 내용과 목적을 바로 알았던 역사의식이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Ⅰ. 1517년 10월 31일은 종교개혁의 날입니다.
지금으로부터 486년 전의 역사적 사건의 날입니다. 하나님은 저 독일의 젊은 신부였던 마틴 루터(M. Luther)로 하여금, 로마서 1장 17절에 기록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는 진리의 불을 받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영의 시대를 열어 제친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1,000년이 넘도록 역사 속에 자리잡은 로마천주교회의 반성경적이요, 반기독적이요, 반신적인 총체적 이단사상에 항전을 감행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로마가톨릭은 신론(神論)에 있어서 ‘하느님’이라고 하는 범신론이었습니다. 인론(人論)에 있어서 인간의 완전타락(전적부패)을 거절하였습니다. 기독론(基督論)에 있어서 예수만이 유일무이한 구세주임을 고백하지 아니합니다. 실로 저들에게는 죄를 사해주는 구세주가 수없이 많습니다. 구원론(救援論)에 있어서 이신득구(以信得救)가 아닌 이행득구(以行得救)주의였습니다. 교회론(敎會論)에 있어서 가견적 교회의 무오성을 주장하고 교회(종교회의)의 결의와 성경을 동일시하였습니다. 종말과 내세론(來世論)에 있어서 만인구원론을 주장함으로 결국 지옥은 존재할 수 없게 하는 교리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성경의 완전영감을 부인함은 물론이고, 가경을 정경 목록에 첨가시킴으로 절대계시 사상에서 멀리 떠나버린 이단의 공동체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와 같은 교리 면에서의 총체적 이단으로 말미암아 파생된 온갖 종류의 잘못된 교회의 관행들과 미신, 우상숭배사상, 성직자의 타락 등은 중세기의 영혼들을 암흑과 진노의 저주 아래로 전락시켜 버리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마침내 때가 찼을 때, 하나님은 루터의 가슴에 ‘오직 믿음’이라고 하는 진리를 불지르게 하였습니다. 오직 사도적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모든 사람은 다 복음의 제사장이라고 부르짖게 된 것입니다. 속죄권(면죄부)을 사거나, 십자군에 종군하거나, 이른바 거룩한 성 로마를 여행하거나, 성자숭배, 성골숭배를 함으로써는 결코 죄를 사함받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마침내 그가 제시한 95개 조항의 공개토론 제목은 4주 만에 독일을 불지르고, 8주 만에 전 구라파를 불지르고 말았습니다. 잠들었던, 아니 죽었던 구라파는 ‘오직 믿음’이라고 하는 복음의 불빛 앞에 깨어나게 되고, 새 역사의 아침을 맞게 된 것입니다.
Ⅱ. 1643년 7월 1일부터 1649년 2월 22일까지 모였던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는 위대한 종교개혁의 산물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126년이 되던 역사적 시점이었습니다.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에서 최대의 종교회의가 모였습니다. 마틴 루터가 점화한 종교개혁의 불길은 실로 대단하였습니다. 종교개혁은 이른바 프로테스탄트교회를 낳고 말았습니다. 루터파는 주로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지방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교리적으로는 주로 이신득구주의였습니다. 개혁파는 프랑스와 스위스, 화란과 스코틀랜드로 확산되어갔습니다. 교리적으로는 하나님의 주권사상을 강조하였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운동 이후에 교회들이 만난 과제는 성경에서 되찾은 진리를 신조와 교리형태로 정리하고 정립하는 일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많은 분량의 성경의 참된 진리를 총체적으로 체계화하여 바른 신앙신조와 교리를 고백하게 함으로 이른바 정통신앙을 수립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 이후의 시대를 신앙고백주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는 모든 평신도들에게도 성경신앙자유, 해석의 자유, 교회설립의 자유가 있었습니다. 그 성경을 믿고 고백하는 양심의 자유가 있었습니다.
이런 자유는 마침내 나라마다 성경을 믿는 저들의 신앙고백서를 작성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화란에서 알미니우스(J. Arminus)의 자유주의적 신앙과 신학사상에 반대하여 돌트회의(The Synod of Dort, 1618-19)를 열어 칼빈주의의 다섯 가지 교리(전적 타락, 무조건 선택, 제한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궁극적 구원(성도의 견인)을 채택한 일이었습니다. 영국 같은 경우는 대륙의 신학사상 문제보다는 복잡한 국내정치와 맞물려 개혁운동을 하게 되는 특수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1.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의 여러 상황적 배경
헨리 8세의 왕권지상주의로부터 엘리자벳의 국교주의, 그 뒤를 이은 제임스 1세로 계승되는(1603) 국교주의(성공회)의 감독제 정책 때문에 많은 지도자와 신자들이 박해와 고난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때 영국 청교도들은 ‘1,000인의 탄원서’(Millenary Petition)를 국왕에게 제출하여 영국 국교회(성공회)의 감독제도보다 스코틀랜드의 장로교제도를 도입할 것을 건의했으나 묵살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번역만은 허락되어 저 유명한 흠정역(King James Version)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후 1625년에 찰스 1세가 즉위하면서 ‘감독없이는 참 교회가 있을 수 없다.’는 절대왕권과 감독제도를 강화하면서 청교도들의 개혁운동에 탄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벳 여왕시대에 영국 런던에만 청교도 목사 20,000여 명이 지역 교회를 세워 설교를 할 정도로 개혁 교회는 부흥하고 왕성하였습니다. 찰스 시대에 와서는 더욱 그러하였습니다. 영국 의회는 다수의 청교도 세력이 지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1643년 7월 1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포함한 전 대영제국이 공통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신앙고백과 예배모범, 권징조례와 교회정치 등의 규례를 제정하고자 하였습니다.
신학사상은 물론이고 로마가톨릭적인 영국 국교회의 39개 신조 조항을 개혁주의적인 내용으로 개정하고, 로마가톨릭적인 예배의식 등을 일체 배격하기 위함이었습니다.
2.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 신학적 특징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의 신학적 특징은 종교개혁 사상의 금자탑이라 할 수 있는 칼빈주의 신학체계를 근간으로 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는 스코틀랜드의 요한 낙스 사상이 그 결정적 영향을 주었고, 요한 낙스는 제네바에 가서 칼빈의 신학사상을 전수한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당시 교회의 많은 지도자들이 대륙(구라파의 스위스 제네바,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등지에서 종교개혁 사상, 특히 칼빈의 신앙과 신학사상을 배워 와서 영국을 뜨겁게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3.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 내용들
(1) 발의자는 영국의회였습니다.
(2) 기간은 1643년 7월 1일부터 1649년 2월 22일까지 약 5년 8개월 어간이었습니다.
(3) 참석자는 151명이었습니다.
121명의 청교도 목사와 30명의 평신도 대표였습니다. 그 중에 10명은 상원의원이었고, 20명은 하원의원이었습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에서 4명의 신학자와 2명의 평신도 대표가 참관인 자격으로 참석하였습니다.
(4) 회의진행과정의 특징이 있습니다.
5년 8개월간 무려 1163회 이상의 공식적이고 정규적인 신학모임을 가졌습니다. 주중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까지 종교회의를 모였습니다. 토요일과 주일은 섬기는 교회로 돌아가 교회를 섬겼습니다. 교회가 먼 성직자들은 사원에 머물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길고 긴 회의는 성경에 기초한 교리적 발언을 무제한으로 허락하고, 모든 교리의 최후 채택은 만장일치제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단 비성경적인 발언의 경우는 즉시 언권이 중단되었습니다.
(5) 그 결과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제정하게 되었습니다.
① 신앙고백서(Westminster Confession) 총 33장으로 1646년 12월 4일에 완성된 후 신학자들이 의회에 보고하고, 1647년 8월 27일, ‘하나님의 말씀과 가장 잘 어울리며, 우리의 공인된 교리, 예배, 권징, 정치와 전혀 위배됨이 없다.’고 스코틀랜드 교회가 승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② 대요리문답(Large Catechism) 총 196문으로 1647년 10월 22일에 완성된 후 신학자들이 의회에 보고하고, 1648년 4월 14일 관주 구절이 완성된 후 최종 완료되었습니다. 목사 후보생들인 신학생과 목사들, 그리고 성인 신자들의 교리교육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③ 소요리문답(Shorter Catechism) 1647년 11월 25일에 완성되어 신학자들이 의회에 보고하고, 1648년 4월 14일 관주 구절을 완성하고 최종 완료되었습니다. 어린이들과 학생들의 신앙교육을 위해 제정되었습니다.
④ 공중예배 모범규례 제정 이것은 영국과 스코틀랜드 전교회가 로마가톨릭의 비성경적이고 미신적이고 이단적인 여러 예배 의식을 제거하고, 성경계시에 근거한 진리를 따라 하나님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의 예배의식을 제정하였습니다.
⑤ 권징조례와 교회정치 규례 권징조례와 교회정치 규례를 제정하였습니다. 이것들은 교회의 순결을 보전하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며, 교회의 질서를 위해서 제정되었습니다.
4.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의 교회사적 의의
(1) 칼빈주의 신학사상을 계승 발전시킴에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이래로 성경의 최대표현인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사상을 가장 완벽하게 표현한 표준문서들입니다.
(2) 현재 미국을 위시한 전 세계 개혁교회와 장로교회가 사용하는 교회사적 유산이 되고 있습니다.
(3) 한국 장로교회도 1907년 최초로 12신조를 작성할 때 그리고 신앙고백서, 大·小요리문답, 예배모범, 권징조례, 교회정치 등을 제정할 때 여과없이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의 표준문서들을 채택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오늘의 한국교회가 세계적 교회로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위대한 영국 교회사가인 크리스토퍼 힐(Christopher Hill)은 17세기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17세기는 영국과 영국교회에 있어서 결정적인 세기였다. 그리고 그 결정적인 세기인 17세기 중에도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가 열렸던 1640년대가 가장 중대한 시기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언필칭 교리는 딱딱하다, 사랑이 없다, 복음적이지 못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의 진리를 크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신조나 교리는 성경의 근본 뜻을 체계화 한 것입니다. 집에 비유한다면, 신조나 교리는 기둥과 대들보와 같은 것입니다. 인체에 비유한다면, 몸의 뼈대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건전한 신앙고백은 건전한 신앙신조와 교리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개혁의 위대한 산물 가운데 하나인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라고 하는 종교개혁의 사상을 체계화하여 세계 교회 발전의 유산이 된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는 확실히 교회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실로 위대한 종교개혁의 빛나는 유산입니다. 진리운동의 유산이요 계승이었습니다.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신 32:7)!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의 교회운동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이 있다는 말이 아닌가! 참된 진리운동의 보전과 계승을 알려주는 말이 아닌가! 오늘의 종교개혁의 과제와 방향을 제시하는 역사적 교훈이 아닌가! - 아 멘 -
부모에 보답하는 효행
신 32:5-6, 딤전 5:1-4 / 이성희 목사
효는 충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가치관입니다. 효(孝)의 정의는 부모의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모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고래로 효란 가족제도와 사회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효는 도덕의 기초이며, 예의범절의 기본입니다. 효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 자식이 부모를 대하는 이상적 태도를 말합니다. 부모와 자식의 이상적 관계를 의미합니다.
효는 유교만의 가르침은 아닙니다. 모든 종교, 모든 경전이 효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특히 성경은 효를 가장 강조합니다. 효는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열 가지 중요한 명령 가운데 하나를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신 명령으로 주셨습니다. 효행은 하나님의 명령의 10분의 1입니다. 우리가 부모님께 효를 다하면 하나님의 명령의 10분의 1은 지킨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효행설화는 삼국사기나 효경 등 고전에서부터 전해주는 효에 관한 이야기들입니다. 예부터 인간의 삶에서는 효행을 인륜의 귀감으로 삼았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에는 효행설화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만큼 효행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는 증거입니다.
‘향덕효행’이란 것이 남아 있습니다. 향덕이란 사람은 지금의 공주인 웅천주 사람입니다. 천보(天寶) 14년 을미(乙未) 흉년에 백성들이 굶주림 속에서 허덕이고 있을 때 역질(전염병)까지 돌아서 부모님이 굶주리고 병이 들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종기가 나서 거의 죽게 되자 향덕은 밤낮으로 정성을 다하여 섬겼지만 어머니 봉양조차도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어머니께 드리고, 어머니의 몸에 난 종기를 자신의 입으로 빨아내어 편안하게 해 드렸습니다. 왕이 이 사실을 전해 듣고 벼와 집과 밭을 내려주고 석비를 세워 이 사실 적어 후대에 알리도록 하였습니다. 참 지극한 효성입니다.
우리나라 효의 개념은 시대에 따라 변천했습니다. 효의 변천사를 보면 고대농경 사회에서 효란 조상숭배와 제례를 뜻했습니다. 삼국시대에는 효경은 필수과목이었고, 충의 개념까지도 효에 포함시켜 효사상이 확대되었습니다. 고려의 태조 왕건은 나라를 덕치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효도를 정치의 기본이념으로 삼았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받아들여 효를 실천하는 유교국가의 체제를 강화하였고, 효자, 효부, 효녀를 표창하였으며, 효도사상을 토착화하였습니다. 개화기에는 효와 충과 신을 가치의 덕목으로 삼았으며 효가 백행지본이란 사상을 준수하였습니다. 기독교가 전래된 이후에는 효에 대한 우리의 전통과 성경을 조화시켜 효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자의 효(孝)자를 보면 아들(子)이 늙은(老) 아버지를 업고 있는 모양입니다. 성경은 아버지를 업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효를 부모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은 효를 아주 강조합니다. 십계명의 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십계명 외에도 성경에는 부모공경에 대한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20:12에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합니다. 다른 계명에는 없는 약속이 5계명에는 있습니다. 십계명 가운데 약속이 있는 유일한 계명이 5계명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우리가 부모를 공경하여 그 약속을 누리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어버이주일을 맞이하여 부모공경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듣고 부모를 공경하여 하나님의 귀한 약속을 누리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부모가 아닌 어르신들에게 부모처럼 대하라.
디모데전서 5:1에는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버지에게 하듯 하며”라고 합니다. 5:2에는 “늙은 여자에게는 어머니에게 하듯 하며”하고 합니다. 이 말은 모든 어르신들이 부모라는 말입니다. 우리 주위에 자기 부모는 공경하고 다른 어르신들을 학대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자기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은 다른 어르신도 공경할 것이고, 자기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고 학대하는 사람은 다른 어르신도 공경하지 않을 것입니다.
“꾸짖지 말고”라는 말은 ‘에피플렉세스’라는 헬라어인데 이 말은 본래 ‘주먹으로 치다’, ‘말로써 때리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격적 심한 질책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아들 같은 디모데에게 보낼 때에 디모데는 연소하였습니다. 그러나 목회자로서 자신보다 연장자인 교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고쳐주어야 할 경우가 많은데 그 때 온유한 태도로 권할 것을 바울은 충고하고 있습니다.
“권하되”라는 말은 ‘파라칼레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곁으로 부르다’, ‘위로하다’는 뜻입니다. 그 사람을 곁에 오게 하여 충고하고 위로하고 따뜻한 권면을 하라는 의미입니다. 모든 어르신들에게 심하게 질책하지 말고 부드럽게 위로하고 권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사회에 문제가 되었던 막말 판사의 경우를 보세요. 자기 아버지뻘 되는 사람에게 막말을 마구 쏟았습니다. “버릇없네”, “늙으면 죽어야 한다”, “딸이 구치소에서 죽는 꼴 보고 싶냐” “왜 말귀를 못 알아들어요, 귀가 안 좋네” 등의 어르신들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한 것입니다. 극소수의 젊은 판사가 인격이나 윤리를 배우지 못하고 법전과 공부만 열심히 하다 보니 이런 결과가 초래되어 판사들 전체가 말을 듣게 된 것입니다.
최근의 남양유업 사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동안 잘못된 관행도 많이 있었지만 이번 사건의 불을 지른 것은 어느 영업 팀장이 아버지뻘 되는 대리점 사장에게 욕설을 한 것 때문입니다. 시민들은 남양유업 불매운동에 나서고, 경제민주화를 다시 논하고, 남양유업은 이틀 새 주가총액이 857억 원이나 증발했습니다. 이번 사태로 ‘갑의 횡포’니 ‘절대 갑의 횡포와 을들의 반란’이란 생소한 말도 들어봅니다. 젊은 영업 팀장이 대리점 사장을 자신의 부모처럼 대했으면 애당초 이런 사단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하듯”, “어머니에게 하듯”이란 말은 요즘에는 어울리지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 이 말도 요즘에는 절대적 신뢰성을 상실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어머니에게 하지 못할 일을 하는 자녀가 너무 많아졌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폭행하고 막말하는 자녀가 한둘이 아닙니다. 존속살해, 존속폭행이 통계적으로 매년 늘어가고 있습니다. 작년 한 해 동안 부모를 폭행한 사건이 500여건이나 되고, 존속살해 사건이 68건이었습니다.
아버지를 폭행한 이유도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설거지를 못한다고 폭행하였습니다. 여자 친구를 쫓아내고 잔소리 한다고 아버지를 살해하였습니다. “부모에게 하듯”이란 말이 안 맞는 시대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는 어른이나 윗사람 혹은 기성세대를 무시하는 경향이 만연합니다. 어른이 뭐라고 하면 “아버지 때하고는 달라”, “엄마는 우릴 몰라”라고 합니다. 그런데 보세요. 부모가 자녀를 잘 모를까요? 아니면 자녀가 부모를 잘 모를까요? 자녀가 부모를 아는 것보다 부모가 자녀를 아는 것 몇이 백배는 더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빠 엄마가 모른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7살 어린 시절에 나는 생각했다. ‘우리 아버지는 이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사람이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 17살 때 나는 생각했다. ‘우리 아버지는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많이 알고 계시지 않다.’ 21살 때 나는 생각했다. ‘우리 아버지는 나와 비교하면 아무 것도 모른다.’ 35살 때 나는 생각했다. ‘우리 아버지는 생각보다는 많이 알고 계셨다.’ 50살 된 지금 나는 생각한다. ‘우리 아버지는 항상 옳으셨다’.”멋있는 얘기지요? 그렇습니다. 부모님은 모르는 것이 아니라 다 알고 계시며, 자녀에게는 항상 옳으십니다.
욥기 12:·12에는 “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하는 자에게는 명철이 있느니라”고 합니다. 늙은 부모에게 지혜와 명철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세요. 내 부모가 아니더라도 어르신들에게서 인생의 경륜을 배우세요. 어르신을 가까이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을 풍요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르신들의 말을 귀담아 듣고 마음에 담아두는 것이 우리 삶을 유익되게 한다는 사실을 믿으세요.
조선시대 그림 가운데 ‘화성능행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낙남헌양로연도’라고도 하는데 정조대왕이 1795년 2월 13일, 화성에 행차하여 화성일대 노인 384명에게 잔치를 베풀고 선물을 주는 그림입니다. 왕은 노인들에게 노란 끈을 묶은 지팡이와 비단 1단씩을 주었습니다.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홍씨와 세상에서 자신의 수를 다 누리지 못한 아버지 사도세자를 그리워하며 노인들을 자신의 부모처럼 대접했다고 합니다. 우리의 옛 임금들에게도 이런 효행이 중요했고 실제로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디모데전서 5:17에는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고 합니다. “장로”라고 하는 단어는 “늙은이”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세상의 모든 어르신을 자신의 부모님처럼 공경하세요. 교회에서 모든 어르신들을 부모님 대하듯이 하면 하늘의 복이 있을 것입니다.
둘째, 부모에게는 효행으로 보답하라.
디모데전서 5:4에는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그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이 꼭 과부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겠습니까? 부모님께 그렇게 하되 특히 홀로 되신 어머니께 효를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라는 말은 집안에서 효를 행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우선되는 일이고, 중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효행하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부모에게 보답하는 것입니다. 보답한다는 것은 되돌려 줄 것을 주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모님께 되돌려 드려야 할 것을 되돌려 드리라는 말입니다. 자녀가 아무리 효행을 해도 부모가 자녀에 대한 일에 보답이 되겠습니까? 부모님의 자녀에 대한 사랑은 세상의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독일의 현대 영성가 안셀름 그륀은 우리 삶의 시작과 마지막에 어머니가 계시다고 표현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과 십자가로 끝나는 마지막 부분에 어머니 마리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자기 역할을 수행하는 유일한 모습입니다. 그는 어머니는 우리가 이 지상으로 들어오게 하는 문이요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우리 삶의 전부일 수도 있습니다.
어머니는 누구나 자식이 아프면 몇날며칠 잠을 못자고 애타합니다. 병들고 아픈 자녀를 위하여 몇 년씩 병수발을 합니다. 그러나 자식은 부모님이 편찮으시면 몇 날이 못 되어 싫증을 내고 이내 지칩니다. 그래서 옛말에도 “긴 병에 효자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 속담에는 “한 부모가 열 자녀를 기를 수 있어도, 열 자녀가 한 부모를 모시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새겨들어야 할 교훈입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효도를 하라는 말씀은 아주 강한 명령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장수의 비결입니다. 성경이 부모공경을 얼마나 강조합니까? 구약에 보시면 한 결 같이 강한 어조로 부모공경을 권합니다. 출애굽기 21:15에는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합니다. 출애굽기 21:17에는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합니다. 레위기 20:9에는 “만일 누구든지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 그가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였은즉 그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고 합니다. 반드시 죽이라고 하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죽이는 것을 좋아하신다는 말이 아니라 절대로 하지 말라고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러시아에서는 일반적으로 결혼을 할 때에 남자가 처가살이로 시작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장모와 사위의 갈등이 심하다고 합니다. 자동차에도 ‘장모자리’라는 게 있습니다. 운전석 바로 옆자리가 사고가 나면 가장 위험하다고 해서 그 자리를 그렇게 부릅니다. 러시아에 이런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남자가 길에서 여자를 때리고 있었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때리는 것을 보고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가 말렸습니다. 그 때 때리던 남자는 “내 장모입니다”라고 했더니 말리던 사람이 “하던 일 계속하세요”라고 하면서 가버리더라는 것입니다. 처가살이하면 사위가 장모님께 잘 해드려야지요. 장모님도 어머니입니다. 잘 해드려야 할 대상입니다.
성경에는 감사란 말이 다른 어떤 종교의 경전보다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감사의 종교라고 합니다. 감사란 은혜 받은 자가 은혜 베푼 자에게 고마움을 보답하는 뜻으로 마음과 행동과 입술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부모님께도 보답할 때에 마음과 행동과 입술로 표현해야 합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효행입니다.
유대인의 지혜서 탈무드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어디든지 있을 수 없어서 대신 어머니를 보내었노라. 나는 등이 없기에 어머니를 보내서 너희들을 업게 하였노라. 내가 가슴이 없음으로 어머니의 가슴으로 너희들을 품에 안았노라. 내게 생명의 젖줄이 없기에 어머니를 보내어 생명의 젖줄로 너희를 길렀노라. 내가 따뜻한 손으로 너희들을 보살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보내어서 어머니의 손으로 너희를 길렀노라”. 부모님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분입니다. 부모님을 공경함으로 하나님을 공경하게 됩니다.
우리나라는 효심의 나라입니다. 세계에서 생체 간이식이 1위입니다. 100만 명 가운데 13.64건이 성사되었습니다. 2위인 싱가포르의 두 배에 가까운 간이식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간의 일부를 이식해 주는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로부터 몸을 물려받았다고 하는데 부모의 몸이 상하게 되면 물려받은 몸의 일부를 드리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우리의 효성인지 모릅니다.
‘효행록’이란 책이 있습니다. 고려 충목왕 때 권부(權溥)와 그의 아들 준(準)이 효행에 관한 기록을 모아 엮은 책입니다. 효자 62명에 대한 전기를 모아 엮은 후에 권근이 주해의 발문을 쓴 책입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세종대왕 10년(1428)에 개정하여 중간하였습니다. 이 책에 있는 내용으로 아이들에게 노래로 불러 외우도록 하여 효도를 고취하는 자료로 삼았던 책입니다. 오랜 전통에서 우리나라는 효행을 극진히 여겼습니다.
신명기 32:5에는 “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고 삐뚤어진 세대로다”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악을 행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부모에게 악을 행하면 부모의 자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부모에게 극진한 효행을 하는 자녀가 되기를 바랍니다.
결 론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말이 있습니다. 못된 아들이 마지막에 효도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똑똑한 아들은 나라의 아들입니다. 돈을 잘 버는 아들은 사돈의 아들입니다. 병들고 실패하고 못 난 아들이 내 아들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못 난 아들이 효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똑똑하고, 돈 잘 벌고, 건강하지만 부모의 자녀로 효를 다 하고, 보답하는 마음을 가지고, 효행이 반듯한 자녀가 되기를 바랍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첫 계명을 잘 지켜서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장수하는 귀한 주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부모님들도 믿음으로 자녀를 잘 양육하고, 자녀를 위하여 기도하고, 믿음의 규범을 잘 전수하는 귀한 부모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은혜의 이슬
신 32:1-3, 호 14:5-7 / 박기완목사
이제 날씨가 제법 화창하고 신앙생활하기 좋은 계절이 왔습니다.
3월은 농부가 씨앗을 뿌리는 파종의 계절이며, 가을에 풍요로운 수확의 열매를 미리 바라보는 소망의 계절입니다.
이 소망의 계절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을 보면, 신앙의 삶을 농부가 농사를 짓는 것으로 많이 비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만 있는 그 지역의 독특한 특성, 그 나라의 특이한 기후들을 이용해서 종종 그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비유적으로 잘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의 기후나 그 지역의 특성들을 잘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역, 즉 팔레스틴 지역에서 농사를 짓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비가 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 지역은 사막으로 되어 있습니다. 1년 내내 거의 비가 오지 않고 비가 오는 계절이 따로 있습니다. 만약, 비가 오지 않게 되면 모든 농사는 헛된 수고로 끝날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비가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며 하늘을 바라보고 살 수 밖에 없는데, 이는 영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는.... 여러 가지 환경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고유한 특성, 그 지역에만 있는 특별한 기후 등을 통하여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팔레스틴 지방은 일년에 두 번의 우기가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이른 비'와 '늦은 비'라고 말하는데, 이른 비는 10월경에 오고 늦은 비는 4월경에 옵니다.
이와 같이 일년중에 이 우기 외에는 별로 비가 오지 않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이 지역은 아주 메마른 땅입니다.
이른 비가 오면 씨앗을 심고, 늦은 비가 오면 씨앗들이 자라서 열매가 익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른 비와 늦은 비 만으로는 물이 매우 부족합니다. 풀이나 곡식이나 산천 초목들이 자라기에는 너무 부족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팔레스틴 지방에는 이슬이 많이 내리기 때문에 초목이나 곡식이 매우 윤택하게 자라납니다.
하나님은 호14:5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이슬'은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백합화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고 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축복의 약속입니다.
신명기를 살펴보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세차례의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신32:2절에서 모세는 뭐라고 말씀했습니까?... 120세가 된 고령의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한 이 말씀은 "내리는 비"요, "맺히는 이슬"이라고 했습니다.
"나의 교훈은 내리는 비요 나의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 위에 가는 비요 채소 위에 단비로다"(신32:2)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오늘날 주의 종들이 주의 말씀을 전할 때, 그 말씀은 비요, 성도는 채소밭에 있는 채소와 같다는 것입니다.
채소는 비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똑같은 말씀을 듣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연한 풀 위에 가는 비' 같고, 어떤 사람에게는 '채소위에 단비'가 된다는 것입니다. 즉, 성도들의 신앙상태에 따라서 알맞게 전달하여 진다는 것입니다.
초신자는 이제 막 땅에서 나온 가늘고 연한 싹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소낙비가 내린다면 연한 싹은 곧 부러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보슬비와 같은 가는 비로 내려진다는 것이요, 오래되고 성숙한 성도들에게는 채소밭에 단비가 내리듯이 전하여 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단비'는 소낙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오래된 신자, 뿌리가 있는 신자에게는 전하는 자가 조용히 말씀을 전해도 그것은 채소밭의 단비, 소낙비와 같이 역사하고...., 전하는 자가 힘있게 전해도 초신자에게는 그 말씀이 가는 비와 같이 들려진다고 했는데, 이는 성령의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말씀은 같으나 성령의 역사로 적절히 임한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이 지역은 비가 부족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매일 밤마다 내리는 이슬은 얼마나 놀라운 은총인지 모릅니다.
비가 부족하지만 밤마다 내리는 이슬로 인하여 모든 식물들이 잘 자라게 된 것입니다.
영적으로 이슬은 매일 매일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심령과 우리의 삶이 항상 윤택하게 자라고 성장하는데는.... 무엇보다도 매일매일 내리는 이슬과 같은 하나님의 축복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이슬은 사람의 노력으로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슬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이슬은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내리는 것도 아닙니다. 이슬은 온 땅 위에 골고루 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슬은 곡식이나 채소가 마르고 시들어 죽을 때에 내리기 때문에 꼭 필요한 하나님의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슬은 어두운 밤에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내려지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축복의 이슬이 내려주셔서... 우리의 영혼에 힘을 얻고, 메마른 삶이 기름지고, 아름답고 싱싱한 축복의 열매를 맺는 역사가 우리의 삶속에 있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럼, 이런 이슬이 내리는 시기는 언제입니까?
이슬은 훤한 대낮에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슬은 어두운 밤중에만 내립니다.
밤이란, 도무지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두움의 때를 말합니다.
낮이 희망의 시기라고 한다면 밤은 절망의 시기입니다. 낮이 기쁨이라면 밤은 슬픔이요 고통입니다. 그래서 밤은 절망의 밤이요, 슬픔과 고통의 때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어두운 밤에... 하늘의 이슬은 내린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들에게도 어두운 밤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이 어두움의 밤은 찾아옵니다.
요즘 TV에서 방영되는 '병원 24시'를 보면, 참으로 극한 고통의 상황을 만나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의 한결같은 고백은 무엇입니까?....
"이런 일들이 다른 사람에게만 있는 줄 알았는데...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다니... 믿겨지지 않습니다!" 하는 얘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고통과 시련은 누구에게나 찾아 올 수 있습니다.
고난과 시련의 밤이 어느날 갑자기 나에게 찾아 올 때가 있습니다. 실패의 밤, 낙심의 밤, 고통의 밤, 질병의 밤, 물질의 밤, 절망의 밤이 찾아옵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는데도 이 어두움의 밤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이때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이슬을 받을 때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어두움의 때일수록 하나님을 더욱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약할 때 주님의 강함을 체험하게 되고,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주님의 전능하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 자신의 연약함과 무능력을 깨닫고.... 주님을 의지할 때, 주님의 도우심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 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했습니다(사55:6-7).
또 시편 50:15절에 말씀하기를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하고 말씀했습니다.
고난과 역경의 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이슬에 흠뻑 젖은 욥은 아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하고 증거했습니다(욥42:4).
어두운 밤을 맞았을 때, "왜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필이면 나인가!" 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을 했는데.... 그러나 지나고 보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계셨음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행 12장에 보면, 베드로도 죽음의 깊은 밤을 맞이했습니다. 헤롯왕이 교회의 몇몇 사람들을 해하기 위해서 야고보를 죽이니까, 유대인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를 잡아 옥에 가둔 것입니다. 손과 발에 쇠사슬로 묶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내일이면 이제 사형을 당할 처지에 놓였습니다. 절망의 밤, 고통의 밤을 맞았습니다. 온 교회가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 절망의 밤에.... 오히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이슬로 승리의 개가를 불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어 풀어주시므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야곱도 그의 인생의 여정 중에서 칠흙같이 어두운 밤을 맞았습니다. 모든 가족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는데, 얍복강에 이르렀을 때.... 형 에서가 4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이 밤은 일생에 다시없는 어두움의 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 절박한 어두움의 때를 만났을 때,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부르짖고 기도해서.... 이 밤에 하나님의 은혜의 이슬을 흠뻑 받게 되었습니다(창32:28). 그래서 야곱이 만난 절망의 밤은 하나님을 만나는 축복의 밤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네 형에서 만나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네 이름을 야곱이라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 하라! 이는 네가 나와 겨루어 이기었음이라!" 하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삶이 어두움의 때라고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실망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이 어두운 때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이슬이 내리는 때요,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시는 때요,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생활할 때에 그들에게 만나를 내려 주신 때에도 밤이었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잠을 잘 때, 밤에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민11:9절에 보면, "밤에 이슬이 진에 내릴 때에 만나도 내렸더라"했습니다. 하나님이 내려 주시는 '만나'는 캄캄한 밤의 때에 그들의 진중에 풍성하게 내려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광야와 같은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의 만나가 여러분의 삶속에 매일매일 풍성히 공급해 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에게 이런 하나님의 은혜의 이슬이 내립니까?
첫째로, 은혜의 이슬은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자에게 내려지는 것입니다.
행 16:25 이하를 보면, 바울과 실라가 주의 복음을 증거하다가 붙잡혀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 사건도 바울과 실라에게 있어서는 시련과 핍박의 밤을 맞이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밤중이 되자 옥중에서 찬송과 기도로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여기서 성경은 밤을 맞은 성도들이 취해야하는 태도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환난과 시련의 밤을 만날 때면, 곧잘 원망하고 낙심하면서... 긴긴 밤을 절망가운데 지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바울과 실라와 같이 그 밤을 찬송과 기도로 보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두운 시련의 밤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는 너무나 크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자기들에게 다가온 시련과 고난의 밤을 찬송과 기도로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찬송과 기도를 시작하자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더니 옥문이 열리고, 손과 발에 쇠고랑이 풀어졌습니다. 모든 옥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감옥을 지키던 간수들이 졸다가 깨어서 보니 옥문은 열렸고, 죄수는 다 도망한 것 같이 보였습니다. 이런 사실이 밝혀지면 여지없이 사형입니다.
그래서 간수장은 자결을 할려고 칼을 빼어 들었습니다. 그때, 감옥 안에서 바울이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여보시오! 당신의 몸을 상하지 마십시요! 우리가 다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간수가 보니, 사람들이 도망가지 않고 그냥 다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도대체 무엇을 믿기에 가만히 있는가? 참으로 이들이 믿는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이로구나!" 하고 생각한 간수는 바울과 실라 앞으로 달려와서 엎드리며 말합니다. "선생이여! 우리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으리까?" 하고 묻습니다.
간수는 주의 종을 죽이는데 있어서 동참한 자요, 그의 영혼은 흑암 중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옳고 그릇된 것인지 분별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실로 칠흙같이 어두운 영혼의 밤을 만난 자였습니다.
그러나 이 간수는 절망적인 순간에 하나님의 축복의 이슬을 받게 되었습니다.
"선생이여! 우리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으리까?" 하고 묻는 말에 바울은 말하기를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전했습니다. 할렐루야!
이와같이 주 예수를 믿으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구원의 이슬을 체험할 수가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은혜의 이슬은 부르짖고 기도하는 자에게 내립니다.
막 10:46 이하에 보면,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나옵니다. 성경은 이 사람에 대해서 무엇을 말씀할려고 하고 있습니까?...
성경은 그가 소경이라는 사실이나, 아니면 거지라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그가 지나가시는 예수님께 얼마나 간절하게 부르짖었는가에 대해서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소경 거지 바디매오는 지나가는 주님께 부르짖고 또 부르짖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해도 더욱 부르짖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땀을 흘리며 부르짖었습니다. 몸부림을 치면서 죽을 힘을 다해 부르짖었고, 사람들이 만류하니까 더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그 부르짖음이 가시던 예수님을 멈추게 했고, 그 부르짖음이 그의 눈을 뜨게 한 것입니다.
자칫했으면 바디매오는 지나가는 예수님을 놓칠 뻔했습니다.
바디매오가 부르짖는 것을 잠시라도 중단했으면, 또 조용히 하라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중단했더라면... 지나가시는 주님을 영영 놓쳐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언제나 우리 앞을 지나가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때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사 55:6절 말씀에 보면,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했습니다.
고후 6:2절에서도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기회의 때를 놓치지 말고, 부르짖어 기도하는 성도가 되어서 하나님의 은혜의 이슬을 흠뻑 체험하는 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은혜의 이슬은 변치않는 신앙의 사람에게 내립니다.
욥이라고 하는 사람은 동방의 의인이요 부자였습니다.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위대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의 자녀는 아들이 일곱이요, 딸이 셋이며, 재산도 많아서 양이 7천, 약대가 3천, 소가 오백, 암나귀가 오백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탄의 시험으로 시련의 밤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하루 아침에 집이 무너져 모든 자녀들이 죽고, 외적이 와서 모든 재산을 다 빼앗아 가 버리고, 종들을 다 죽였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동방의 거부요 재벌이...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환경 속에서도 욥의 신앙은 변치 않았습니다.
그는 온 몸에 악창이 돋아서 잿더미 위에 앉아 기왓장으로 몸을 긁으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찬송했습니다.
욥은 고백하기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했던 것입니다(욥1:21).
욥의 신앙은 변치 아니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어두움에서 더욱 빛을 발했습니다.
나라가 어려울 때 비로소 충신을 알게 되듯이.... 욥의 신앙은 어려울 때 더욱 빛이 났습니다. 그러자, 욥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이슬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욥42:1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욥의 노년에 복을 주사 처음보다 더하게 하시니 양이 1만 4천, 약대가 6천, 소가 1천, 암나귀 1천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칠흙같이 어두운 밤을 만나서 고통중에 있는 분이 있습니까?
육신의 질병으로 시련의 밤을 지내는 분이 계십니까?
물질의 밤을 만나고, 사업에 밤을 만나셨습니까?
소경 바디매오처럼 부르짖어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욥처럼 변치 않는 신앙을 가지고,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하는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영혼과 삶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이슬이 흠뻑 내려지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호세아14:5-7절에 보면, 하나님의 놀라운 이슬의 은혜에 대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이슬이 내리면 어떤 복을 받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저가 백합화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그 가지는 퍼지며 그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 그 그늘 아래 거하는 자가 돌아올지라 저희는 곡식같이 소성할 것이며 포도나무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같이 되리라" 할렐루야!
오늘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의 이슬을 흡족히 받으므로... 이 놀라운 약속의 말씀과 같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고난과 역경속에서도 백합화와 같이 아름답고 고귀하게 피어나고,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신앙과 믿음의 뿌리가 깊이 박혀서... 어떠한 환난이 와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가지가 번창하듯이 자손에 복을 받고, 꽃이 피고 열매맺음과 같이 우리들이 가정과 직장과 하는 모든 일들 위에... 꽃이 피고 열매를 맺으며.... 감람나무와 같이 아름답고, 레바논의 포도주와 같이 풍성한 열매가 맺어지는.... 이 엄청난 복을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후대의 축복을 예비하십시오
신 32:1-12 / 이한규 목사(분당샛별교회)
< 통전적 시각을 가지십시오 >
살다 보면 돈이 많고 성공했는데도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성공하고도 행복하지 못할까요? 대개 2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건강하지 못한 삶 때문입니다.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성공’과 ‘성공 후에 나눔이 없는 성공’은 오히려 불행을 초래합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건강하지 못한 눈 때문입니다. 하나만 알고 둘은 알지 못하고 하나만 보고 둘은 보지 못하면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건강한 삶에 필요한 중요한 영어 단어 2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perspective란 단어입니다. 영어에서 per는 ‘하나하나의’란 뜻의 어근이고 spect는 ‘본다’는 뜻을 가진 어근입니다. ive는 ‘속성, 성향’을 나타내는 접미어입니다. 결국 perspective란 ‘하나하나를 다 보는 성향을 가진 것’을 뜻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전체적(통전적) 시각’을 뜻합니다. 어떤 사람은 동쪽만 봅니다. 불행한 사람입니다. 동서남북을 다 볼 줄 알아야 행복과 평안을 얻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단어는 wholeness란 단어입니다. 제가 속한 미국 기독교 선교연맹 창시자인 심슨(A. B. Simpson) 목사님은 wholeness를 매우 중시했습니다. wholeness란 단어의 뜻은 무엇일까요? 영어 공부에서 ‘외래어(헬라어, 라틴어 등) 어근의 의미’를 아는 것이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의성어 어근의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단어는 ‘들리는 소리’로 뜻이 형성될 때가 많기에 발음이 유사하면 뜻도 유사할 때가 많습니다. 결국 whole은 발음이 유사한 all(모든)과 뜻도 유사합니다. 다만 all의 뜻에 holy(거룩한, 흠 없는)의 뜻이 가미된 단어가 whole로서 ‘모든 면에서 흠 없는’이란 뜻입니다. 이것은 ‘완벽한’이란 뜻보다는 ‘전체가 균형 잡힌(전인적인, 온전한)’이란 뜻입니다. 성도가 행복하게 살려면 전체를 볼 줄 아는 통전적 시각(perspective)과 전체적인 균형(wholeness)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하나만 보고 판단하는 사람입니다. “오직 성경!”이란 말도 성경책 한 권만 보라는 말은 아닙니다. 때로는 경건서적이나 주석도 봐야 틀린 해석도 막고 인생의 독단과 오류도 막을 수 있습니다. 한 가지만 보고 단정하면 히틀러처럼 됩니다. 히틀러는 어렸을 때 별명이 ‘꼬마 목사’였습니다. 그러나 자기 어머니가 이웃집 유대인 남자와 정을 통하는 것을 보고 유대인을 증오하며 자기가 당한 한두 가지 사례로 깊은 편견을 가지다가 마침내 유대인 대량학살을 자행했습니다. 그처럼 편견은 무서운 불행을 낳습니다.
하나님의 성회(순복음 교단)는 축복을 강조합니다. 물론 건전한 축복신앙은 필요합니다. 사실 순복음 교단은 저희 기독교 선교연맹과 같은 뿌리에서 나왔습니다. 저희 교단은 19세기 말 4중복음(중생의 주, 성결의 주, 신유의 주, 재림하실 주)을 주장하며 성결 및 선교 운동을 했습니다. 또한 저희 선교연맹에 속한 감리교 출신 선교사가 일본에 세운 신학교에서 신학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사람들이 성결운동을 펼치며 발전한 교단이 <성결교>입니다. 그래서 성결교의 4중복음(중생, 성결, 신유, 재림)은 저희 4중복음과 사실상 같습니다.
20세기 초, 순복음 교단과 저희가 갈라진 것은 방언 문제 때문입니다. 그때 저희 선교연맹에서는 “방언기도를 하라고 시키지도 말고(bid not), 방언기도 하는 것을 막지도 말라(forbid not)!”고 했습니다. 반면에 순복음 교단은 방언기도를 성령충만의 필수적인 외적 증거로 여겼기에 방언기도를 하라고 시켰습니다. 그래서 순복음 교단은 ‘성결 교리’ 대신 방언기도로 대표된 ‘성령충만 교리’를 삽입하고 그 4중복음에 ‘축복 교리’를 하나 더 첨부해서 ‘중생, 성령충만, 축복, 신유, 재림’의 5중복음을 내세운 것입니다.
믿음은 축복을 주지만 너무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축복에 집착하면 기복신앙이 됩니다. 기복신앙은 참된 신앙을 막기에 저는 기복신앙을 종종 비판합니다. 그러나 순복음 교단에서 강조하는 축복신앙과 기복신앙은 성격이 다름을 알기에 순복음 교단을 비판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제가 아는 순복음 교단 목사님들은 대부분 바른 축복 신앙을 가지고 건강하게 목회합니다. 그처럼 어떤 한 가지 면을 보고 싸잡아 단정하고 비판하지 않도록 ‘통전적 시각(perspective)’을 가지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요새 새벽마다 저희 교회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저의 중학교 동기이자 의형제인 친구는 약 400명 정도 직원이 있는 한 IT기업 계열사 사장입니다. 그는 공부를 잘해서 전국 예비고사 이과 2등을 했고 서울 공대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스탠포드에서 최단기간에 박사학위를 땄습니다. 그는 독실한 유교 집안 출신이었는데 스탠포드 다닐 때 주님을 만나고 지금은 독실한 성도가 되었고 앞으로 북한이 열리면 북한선교를 하려고 기도 중입니다.
그 친구는 모든 공부를 잘했는데 이상하게도 음악만 못했습니다. 중학교 때 선생님이 노래를 시키면 이상하게 노래해서 속으로 많이 웃었습니다. 그런데 약 4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해서 조금만 고음만 올라가도 다른 음이 나오고 이상한 소리가 나옵니다.
그 친구가 바빠서 새벽에 잘 못 나오면 따로 토요일 오전 10시에 부부가 와서 본당에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때 제가 목양실에서 말씀을 준비하는 줄도 모르고 크게 찬송하며 기도하면 그 소리가 다 들립니다. 저는 말씀 준비할 때 누가 크게 찬송하고 기도해도 말씀에 잘 집중하는 편인데 그 친구가 찬송하며 기도하면 음이 자꾸만 틀리고 이상한 소리가 나오니까 신경이 쓰여서 말씀 준비가 잘 안 됩니다. 그래도 짜증나지 않고 오히려 흐뭇합니다. ‘통전적 시각(perspective)’을 가지고 그 상황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 친구의 간절한 기도로 기도의 호흡이 교회에 넘치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그런 측면으로 보면 전혀 짜증나지 않습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만 보면 편견에 빠지고 실망도 잘하고 질투가 생기고 공동체에 도움도 안 되고 결국은 본인도 불행해집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면 ‘통전적 시각(perspective)’을 잘 길러주어야 합니다.
저는 형식적으로 교회에 다니다가 1984년에 은혜체험을 했습니다. 그때 얼마나 하나님과 교회와 성경 중심적으로 살려고 했는지 거의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처럼 살았습니다. 항상 입술에는 찬송이 넘쳤고, 범사에 감사했고, 경건한 생각만 했고, 수시로 금식했고, 성경을 짧은 시일 내에 수시로 독파했고, 심지어는 웃을 때도 경건하게 웃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막 뜨거워진 상태에서 아주 설익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사서삼경>이 읽고 싶었습니다. 그 책을 반면교사로 삼으면 불신자 전도를 잘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몇 주에 걸쳐 방대한 사서삼경을 다 읽고 몇 가지 반면교사로 삼을 교훈과 독후감을 써놓았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설교 때 언뜻 그 얘기를 하자 한 목사가 비방하고 다녔습니다. “이 목사님은 유교사상을 따르는 것 같아요.” 오래 전에 사서삼경 한번 읽었다는 얘기를 듣고 그렇게 왜곡해 비방하니 얼마나 불행한 모습입니까? 그래서 리더에게는 더욱 ‘통전적 시각(perspective)’이 필요합니다.
몇 년 전에 조엘 오스틴 목사님의 책 <긍정의 힘>이 천만 부가 넘게 팔린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되고 그 뒤로 계속 그분의 베스트셀러가 나왔지만 저는 그분의 책을 하나도 읽지 않았습니다. 그분과는 추구하는 사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찰스 스윈돌, 찰스 스탠리, 데이빗 제리마이어, 애드리언 로저스 등 수많은 건강한 목회자들의 설교를 들으면서 조엘 오스틴 목사님의 설교도 가끔 듣습니다. 그런데 조엘 오스틴 목사님 설교가 쉽고 발음도 명쾌해서 이번 <네트영어> 강좌에 그분 설교 한 편을 교재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한 목사님이 말해주었습니다. “이 목사님! 어떤 목사가 목사님이 조엘 오스틴 목사님의 긍정주의 사상을 따른다고 비판하고 다닙니다.” 저는 그분의 긍정주의 설교를 <반면교사>로 삼을지언정 그분과는 추구하는 길이 많이 달라서 제 설교에는 무조건적인 긍정주의와 기복신앙과 무속신앙을 질타하는 내용이 많습니다. 그런데 영어공부에 그의 설교를 한 편 썼다고 그렇게 왜곡해 비판하고 다닙니다. 얼마나 불행한 삶입니까?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은 한쪽 면만 보면서 자기를 기준으로 삼고 자기 세계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그들은 자기가 졸업한 신학교나 자기가 몸담은 교단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그러면서 총회에 가면 자기들끼리 싸움도 많습니다. 불행한 모습입니다.
한국에 유난히 대형교회로 인한 부작용이 많기에 무조건적인 긍정주의와 외형주의에 비판이 많은 것은 충분히 이해됩니다. 그러나 비판해도 자기를 돌아보면서 통전적인 시각(perspective)을 가지고 정확하고 바르게 비판해야 합니다. 통전적 시각이 없으면 지식은 지혜가 되지 않고 오히려 질투심과 열등감만 커지고 불행의 가능성도 커집니다. 그런 불행이 없도록 자녀와 후대들에게 끊임없이 통전적 시각(perspective)을 가르쳐야 합니다.
왜 차 사고가 납니까? 과속하거나 부주의하거나 졸거나 술에 취해 몰면 사고 가능성은 커집니다. 그러나 왜 초보자는 두 눈을 부릅뜨고 앞만 바라보고 천천히 주의 깊게 운전해도 사고가 납니까? 앞을 바라보면서 동시에 백미러로 뒤도 보고 옆도 살피고 심지어는 사각지대까지 보는 능숙한 운전자의 통전적인 시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그런 통전적인 시각이 없으면 계속 초보 인생으로 머물고 사고도 많이 당하기에 부모는 자녀들에게 통전적인 시각을 끊임없이 가르치고 도전해야 합니다.
얼마 전에 둘째 딸이 기숙사 생활에서 겪은 어떤 고충을 얘기했습니다. 그때 딸에게 ‘통전적 시각(perspective)’을 도전했습니다. 그러자 딸의 목소리가 밝아졌습니다. 왜 딸에게 통전적인 시각을 도전했을까요? 사랑하는 딸이 넓은 시각과 마음을 가지고 균형 잡힌 믿음 안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자녀와 후대에게 끊임없이 perspective(통전적 시각)와 wholeness(전체적인 균형)를 가르쳐야 합니다.
< 후대의 축복을 예비하는 삶 >
축복이 진짜 축복이 되려면 2가지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첫째, 축복이 옆으로 흘러나가야 합니다. 즉 축복을 잘 나눠서 내 축복이 남에게도 축복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축복이 후대로 계승되어야 합니다. 즉 축복이 자녀나 제자 등의 후대로 잘 계승되어야 진짜 축복입니다. 그처럼 후대의 축복을 예비하려면 어떤 삶이 필요할까요?
1. 말씀 중심적인 삶
본문은 가나안 땅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에게 들려준 모세의 노래 중의 일부분입니다. 이 노래에서 모세는 먼저 하늘과 땅을 향해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고 했습니다(1절). 그만큼 자신의 노래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교훈이 풍성한 생명을 주는 이슬과 단비와 같다고 했습니다(2절). 그처럼 말씀은 메마른 영혼을 소생시키고 생명력을 주는 원천입니다. 그러므로 자녀에게 끊임없이 말씀 중심적인 삶을 도전해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이 어떤 분임을 알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은 반석이시고 그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분입니다(4절). 그처럼 자녀들에게 끊임없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을 전해서 그들이 말씀을 붙잡고 앞날을 멋지게 개척해나가도록 힘과 격려를 주십시오.
2. 의리를 지키는 삶
하나님은 늘 진실했지만 그의 백성들은 악하고 삐뚤어지게 행동했습니다(5절). 그처럼 하나님 아버지를 배반하지 말고 힘써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며 살려는 의리가 있어야 합니다(6절). 왜 하나님이 의로운 소수를 좋아합니까? 은혜를 감사하며 의리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은 대개 소수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의리 없는 사람은 ‘다수의 대중’입니다. 대중은 유행과 유익을 따라 이리 저리 움직입니다. 그런 대중이 무슨 희망이 되겠습니까? 다수를 너무 믿지 마십시오. 다수를 너무 좋아하면 그 다수가 나중에는 자기를 배반하고 죽이는 다수가 될 수 있습니다. 여의도 순복음 교회에서 장로님들이 고발해 조 목사님이 구속 위기에 처한 것을 보십시오. 의리를 내세워 불의를 감춰주란 말이 아니라 그것이 대중의 모습이란 말입니다.
의리는 대개 ‘작은 것’과 ‘적은 것’에서 나타나고 훈련됩니다. 다수의 상황에서는 의리를 체감할 기회가 적습니다. 작은 교회에서 명절이 되면 어떤 성도는 생각합니다. “이번 주일은 명절 때문에 많이 빠져서 썰렁하겠구나!” 그래서 더 최선을 다해 주일성수를 합니다. 어떤 성도는 비바람이 치면 생각합니다. “오늘은 날씨가 나빠서 수요예배 참석률이 저조하겠구나!” 그래서 만사를 제쳐놓고 수요예배에 참석합니다.
그런 의리 있는 성도들이 리더에게 얼마나 힘이 됩니까? ‘의로운 성도’는 ‘의리 있는 성도’도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리를 언제 체감합니까? 소수일 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의로운 소수를 기뻐하십니다. 그처럼 의로운 소수의 길을 추구하도록 도전하고 격려하면 그렇게 배운 자녀와 후대에게는 분명히 복된 길이 열릴 것입니다.
3. 은혜를 기억하는 삶
이스라엘의 역사는 거듭되는 배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끊임없는 은혜와 사랑이 있었던 역사였습니다. 그래서 옛날을 기억하고 역사를 살펴봐도 그런 은혜를 깨달을 것이고 부모나 선대들에게 물어도 그 은혜를 말해줄 것이라고 노래하면서 모세는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고 했습니다(7절). 그처럼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말해주고 기억하게 할 책임이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민족과 인종과 경계를 분할하시고 통치하시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남다른 축복을 주셨습니다(8-9절). 어떤 축복입니까? 먼저 눈동자처럼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셨습니다(10절). 눈동자는 신체 부위 중 가장 귀중한 부위입니다. 위험한 것이 다가오면 눈을 순간적으로 감기에 아주 짧은 순간을 ‘눈 깜짝할 새’라고 표현합니다. 그만큼 신속하게 위험에서 하나님이 지켜주셨다는 뜻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독수리가 새끼를 업는 것처럼 이스라엘을 업어서 인도했습니다(11-12절). 어미 독수리는 일부러 둥지에서 새끼들을 떨어뜨리고 새끼들이 힘없이 떨어지면 재빨리 내려가 강한 날개로 새끼들을 업습니다. 그런 훈련으로 새끼를 강하게 키웁니다. 그처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키우려고 광야에서 훈련시키며 인도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은혜를 자녀들에게 말해주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게 하십시오.
< 하나님 편이 되십시오 >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은 반드시 얻게 하시지만 그 땅은 완벽하게 포장되어 주어진 선물이 아닙니다. 그래서 가나안을 앞두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고 한 것입니다. 약속된 땅을 얻으려면 땀과 용기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가나안 땅은 땀 없이 얻는 땅이 아닙니다. 요행에 의한 성공을 바라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은 기도만 하면 된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열심히 기도한 후에는 땀이 따르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땀이 없는 ‘불한당(不汗黨)’을 키워주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왜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피와 땀과 눈물을 통해 주십니까? 자녀를 자녀답게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독수리가 새끼를 강하게 훈련시키는 것은 새끼가 미워서가 아니라 독수리답게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강건한 자녀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약속하신 복된 삶을 완제품으로 주지 않고 바르게 살려는 노력과 수고를 통해 주기를 즐겨하십니다.
어느 날, 한 집사님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하나님이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요.” 무슨 말이냐고 하자 그 집사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그동안 복권을 여러 번 샀는데 하나도 안 맞았어요.” 그때 목사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집사님! 하나님이 집사님을 정말로 사랑하네요. 복권을 안 맞게 한 것이 더욱 큰 사랑의 표시입니다.”
이제 땀을 흘리고 지혜를 발휘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며 돈을 벌겠다고 하십시오. 역사를 보면 피와 땀과 눈물이 없이 위대한 일이 이뤄진 적은 없습니다. 약속의 땅을 얻으려면 전력투구의 정신을 가지고 땀과 용기와 노력을 앞세워 얻으십시오. 게으른 머리에서는 절대로 좋은 영감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사업을 할 때도 자나 깨나 사업을 생각해야 번뜩이는 지혜가 생깁니다. 축복은 요행이나 우연이 아닌 열정으로 주어집니다.
열정이 없으면 성공도 없습니다. 바울이 위대한 전도자가 된 것은 전도에 미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6장에서 베스도 총독이 말했습니다(24절). “바울아!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했구나.” 그때 사용한 미쳤다는 헬라어 ‘엔데오스’에서 영어의 ‘인뚜지애즘(enthusiasm, 열정)’이란 단어가 나왔습니다. 그 영어 단어도 ‘하나님(theos) 안에(in) 있기를 고수하는 상태임(iasm)’이란 뜻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즉 신앙 열정처럼 미치도록 추구하는 열정이 있어야 무엇인가가 된다는 말입니다.
옛말에도 미친 사람이 곰을 잡는다고 했습니다. 미쳐야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이뤄집니다. 사업에 미쳐야 사업에 성공합니다. 정치에서 성공하려면 정치에 미쳐야 하고 연예계에서 성공하려면 무대에 미쳐야 합니다. 체념, 의욕상실, 낙망, 권태 등의 단어들은 다 미치지 못해서 생기는 단어들입니다. 미치십시오. 물론 미칠 때는 좋은 뜻과 비전을 가지고 좋은 분야에서 건강하게 미치십시오. 목표에 미쳐야 목표에 미칩니다.
살다 보면 언제나 문제를 만납니다. 그때 신자와 불신자가 갈립니다. 문제 앞에서 불신자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그 문제를 건설적이고 창조적으로 활용합니다. 그처럼 어떤 문제에 부딪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나갈 때 조만간 축복의 문이 활짝 열릴 것입니다.
늘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자신만만하게 사십시오. 다윗 앞에서 골리앗은 자신만만했습니다. 반면에 골리앗 앞에서 다윗도 자신만만했습니다. 둘의 자신만만은 차이가 있습니다. 골리앗은 자신의 능력을 믿고 자신만만했지만 다윗은 하나님을 믿고 자신만만했습니다. 다윗의 자신만만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해도 때로 문제가 생기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최종승리를 주실 것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배에서 주무실 때 큰 풍랑이 일었습니다(막 4장). 그처럼 예수님이 탄 배도 풍랑을 만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만 믿으면 순풍에 돛단 것처럼 모든 것이 형통하고 돈도 많이 벌고 자녀가 좋은 대학에 간다고 하지만 성경에 그런 말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라고 했습니다. 성도도 환난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 말씀이 중요합니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환난 중에서도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을 붙잡고 늠름하고 씩씩하게 사십시오. 요셉은 감옥에서도 늠름하고 씩씩하게 살았습니다. 그처럼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세상에 자기 힘으로 마귀를 이길 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함께 하면 어느 마귀도 그를 이기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강하고 담대하게 나가십시오.
문제 앞에서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주셔야 할 텐데...”라고 너무 걱정하지 말고 “내가 먼저 하나님 편이 되자!”고 하십시오. 우리 앞에 놓인 찬란한 비전의 세계는 그냥 주어지지 않고 힘써 싸워서 차지하는 것입니다. 이제 어떤 고난과 시험이 와도 찬란한 꿈과 비전을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믿고 늘 하나님 편에 서십시오. 그래서 약속된 비전을 성취해서 당대에도 많은 영향력을 끼치고 후대들에게도 그 축복을 잘 전수함으로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