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혹(不惑)의 나이가 되면 후회만 할 것이 아니라
마지막 심판을 받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재물을 우상으로 섬기며 교만을 버리지 못하고
죽지 않을 것처럼 살고 있는 인간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IV
쉰 번째 해를 보낸 후,
나는 북적거리는 런던의 어느 찻집에 외롭게 앉아 있었는데
대리석 탁자 위엔 펼쳐진 책과 빈 잔만 있었소.
가게와 거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갑자기 내 몸이 달아올랐소.
이십여 분은 족히 되었을 것이오.
행복감에 흠뻑 젖은 나머지 나는 축복받은 느낌이었고 그래서 축복할 수 있었소.
(지천명(知天命)의 나이가 되어 하늘의 뜻을 알게 되었지만
깨달은 사람이 흔치 않아 외롭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깨달음의 황홀경을 전하고 있습니다)
V
여름 햇살이 하늘의 나뭇잎 같은 구름들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거나,
겨울의 교교(皎皎)한 달빛이 폭풍으로 어질어진 들판을 덮고 있어도,
책임감이 날 짓누르고 있기에 그 장관(壯觀)을 지긋이 바라보지 못하고 있소.
오래 전에 한 말이나 행동
또는 말하지도 행하지도 않았지만 말이나 행동으로 옮기려 했던 일들이
이제 와 날 짓누르고 있소.
무언가 회상하지 않고 지나치는 날이 하루도 없기에
나의 양심과 허영심이 끔찍하게만 느껴진다오.
(나이가 들면서 어리석음을 깨닫고 과거에 얽매여 살면서
하느님께서 만드신 아름다운 세상을 보지도 못하고 살고 있음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VI
유유히 강물이 흐르고 있는 들판이 펼쳐져 있는 가운데,
위대한 주공(周公; 중국 주(周)의 정치가)이 새로 벤 건초(乾草) 내음 들이마시고
산의 눈 털어내며 소리 지르고 있소.
‘모든 것을 놓아 보내십시오.’
우유 빛 나귀들이 마차 끌고 가는 그 높은 곳에,
바빌론(Babylon)이나 니네베(Nineveh)가 있었소.
한 정복자가 말고삐 휘어잡고 지친 병사들을 향해 소리질렀소.
‘모든 것을 놓아 보내십시오.’
피에 젖은 인간의 심장에서 밤과 낮의 나뭇가지들이 돋아나고,
거기에 교교(皎皎)한 달이 걸려있소.
그런데 모든 노래는 과연 무엇을 노래하고 있을까요?
‘모든 것을 놓아 보내십시오.’
(과거의 부귀공명(富貴功名)은 덧없음을 말하고 무사(武士)와 같이 잔인한 인간들이
사랑을 어떻게 노래할 수 있는가 하고 묻고 있습니다)
VII
영혼: 허상(虛像)을 쫓지 말고 실상(實像)을 추구하시오.
마음: 뭐라고, 소리꾼으로 태어난 내가 아무 까닭도 없이 노래하고 있다는 것이오?
영혼: 인간이라면 이사야의 숯불 외에 더 이상 무얼 바라겠소?
마음: 불꽃의 단순함 속에서는 말문이 막히는 법이오!
영혼: 구원(救援)이 걸어가고 있는 저 불꽃 속을 보시오.
마음: 호머(Homer)가 다룬 것은 원죄뿐 다른 주제가 있었던가요?
(이사야의 숯불 속에 구원이 있다는 ‘영혼’의 주장에 대해 ‘마음’은 “호머(Homer)가 다룬 것은
원죄뿐 다른 주제가 있었던가요?”하고 되묻습니다.
여기에서 ‘영혼’이 언급하는 불은 ‘이사야의 숯불(Isaiah’s coal)’로
천사가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이사야의 입술에 숯불을 갖다 대자
그의 죄가 없어지고 죄악이 사라지면서 하느님의 음성이 들리게 된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사야가 맡은 사명이 결코 쉽지 않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언자의 입을 통해 선포될 하느님의 말씀은 완고한 인간들의 마음에
반항과 거부를 일으키리라는 것을 예고한 것입니다.
이사야의 타는 숯불의 도움을 받아 초월을 추구하라는 ‘영혼’의 권유에
‘마음’은 인간존재의 불가피한 요소이자 예술의 진정한 주제는 ‘원죄’라며
초월을 통한 영혼의 구원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깨달음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으로 깨달음을 얻기가 쉽지 않음을 말하고 있습니다.(이사 6,6-10))
VIII
폰 휘겔(Von Hügel; 오스트리아의 평신도 신학자),
우리 둘 다 성인(聖人)들의 기적을 받아들이고
신성(神聖)을 숭배하는 등 닮은 점이 많긴 하지만,
이제는 그만 헤어져야 하지 않겠소?
데레사 성녀의 시체는 기적(奇蹟)의 성유(聖油)를 흠뻑 발라
썩지 않고 무덤에 누워 있고
거기에서 향기로운 향 내음 피어 오르고,
비문이 새겨진 비석(碑石)에서는 치유의 기적이 나온다고들 하지요.
어쩌면 옛날 이집트 황제의 창자를 꺼내고 미라를 만들었던
바로 그 손이 우리시대 성인의 몸을 영원케 했을지도 모르지요.
내가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어 무덤에서나 환영을 받는다면
마음에 위안이야 되겠지만 나는 이미 운명 지워진 역할에 충실해야겠소.
나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물들지 않은 호머의 마음을 본 받고 살고 있소.
성경에는 사자와 벌집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나요?
그러니, 폰 휘겔, 이제 그만 가보소. 그대 머리에 축복이 내리기를 비오.
(폰 휘겔(Friedrich Von Hügel)처럼 신비주의 사상에 이끌리면서도
그리스도교적 내세관에는 동조할 수 없었던 예이츠가
이제 “헤어지자”며 폰 휘겔에게 결별을 선언합니다.
신성(神聖)이나 영혼의 불멸을 추구하기보다는 그리스도교 사상에 물들지 않은 호머를 모범으로 삼아
시(詩) 창작에만 몰두하겠다는 결의를 천명한 것입니다.
신비주의의 영향은 많이 받았으나 옳은 종교를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또 사자와 벌집 즉 무력(武力)과 평화는 공존할 수 없으며 무력은 덧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판관기(14,8)에 삼손이 죽인 사자의 시체에 벌의 무리와 꿀이 있었다는 기사가 나옵니다))
첫댓글 무애진인으로 살고잡다. - 지리산속에는 연못이 있는데, 그 위에는 소나무가 주욱 늘어서 있어 그 그림자가 언제나 연못에 쌓여있다. 연못에는 물고기가 있는데 무늬가 몹시 아롱져서 마치 스님의 가사와 같으므로 이름하여 袈裟魚(가사어)라고 한다. 대게 소나무가 변화한 것인데, 잡기가 매우 어렵다. 삶아서 먹으면 능히 병 없이 오래살수 있다고 한다. -
뭇 위로 허구헌 날 비치는 소나무 그림자를 보다가 - 우리가 주님을 보면서 앙망하면서 살다가 - 제 몸의 무늬마저 그 그림자와 같게 만든 물고기가 살고 있다. 사시사철 푸르른 낙락한 소나무의 기상을 닮아, 삶아 먹으면 병도 없어지고 오래 살수 있게 해준다는 물고기가 살고 있다. - 아! 나도 그 못가에서 살고 싶구나. 그래서 그 무늬를 내 몸에도 지녀두고 싶구나. 날로 가팔라져만 가는 비명같은 삶의 속도 속에서, 우리는 한 번 쯤 이런 생각을 하며 생할의 숨결을 골라보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예이츠는 실제로 오래된 성을 사서 거기서 살면서 낚시와 등산을 많이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