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집
조우연
나는 물집에 살아
눈물을 들키지 않는 물고기처럼
냄비의 귀에 댄 손가락
처음 신어 본 하이힐에 닿은 발뒤굼치
그런 곳에 물집을 짓곤 했어 터트리면 안 돼요, 하는 그 집
부르터 비로소 아늑한 장력이 완성되고
그 속에 내 생이 그렁그렁 잠겼어
사람이 없다고 여긴 아무도 없네, 하지 않는 집
빛이 부서지고 먼지가 부옇게 날리는 걸 봐
살고 있어 살아가고 있어 조용히 지나쳐 주는 집
거기 있냐? 문에 귀를 대고 고요를 기다리던 집
피 안에 생긴 집
피안彼岸의 집
바이칼호수의 푸른 물집
네가 자작자무랑 나란히 무릎까지 잠긴 집
그 집에서 우리는 사랑을 했지 가슴과 가슴을 맞대고 배와 배를 맞대고 네 안에 내가 잠겨 유영하는 집
물집의 벽시기계가 두 시를 가리키면
소나기가 지붕을 두드릴 거라는 예보가 있어
그걸 보려고 물집 뒤꼍에 자두나무를 심었지 레코드처럼
나이테를 돌려 퉁퉁 탕탕 음악이 흘러나오는 나무
거기 살아
슬픔의 파동이 빠른 집에
먹구름이 떨구는 부서진 마음을 없던 것처럼 빨아이는 집에
대문에 수성 사이펜으로 쓴 문패를 달고
말릴 필요 없는 하루들을 빼곡히 옷장 속에 개 놓은 집
피자두가 후드득 떨어져 물집이 터져도
눈을 감고 시간의 창문을 잘 닫고 있으면
흉터 없이 너를 간직할 수 있겠다
달인
달에 사는 한 사람이 있다
그는 고독의 달인
비 내리는 밤의 지구
그 빗살무늬토기를 깨뜨리지 않고 바라보기의 달인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망망대해 태풍의 눈을 응망하기의 달인
끝내 음음, 신음 한 마디 내뱉지 않는 달인
그는 진정한 쓸쓸의 달인이다
만월이 되면
깊어진 달의 명치 끝에서 발광하며
꼬꾸라지는 눈발을 쓸어 안는 파도와 밀고 당기는 내면의 소리를
담담히 듣는
혼밥 혼술 혼애 혼공 혼여 혼설 혼자 혼신을 다하는 그는 마치
순식간에 이쑤시개를 정리하거나 수십 개 만두를 빚는 그런 달인들보다 한 수 위의 달인
지구에 있는 누군가가 망원경으로 보았다
달 사막 한가운데 찍힌 그의 흰 발뒤꿈치를
그런데 그게 뭔지나 알까
오늘 달인은
초승의 가는 문지방에 구부리고 앉아
발톱을 깎는 중
똑똑, 지구로 보내는 쓸쓸한 타전 소리
― 조우연 시집, 『검정비닐새 요리』(걷는사람 / 2024)
조우연
충북 충주 출생. 2016년 《충북작가》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 『폭우반점』『검정비닐새 요리』 동시집 『겉바속촉 감정튀김』 . ‘엽서시’ 동인.
책 소개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2016년 《충북작가》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조우연 시인의 두 번째 시집 『검정비닐새 요리』가 걷는사람 시인선 121번째 작품으로 출간되었다. 시집 『폭우반점』 이후 5년 만에 우리를 찾아온 조우연의 신작은 떨어져 나간 빈칸의 자리에서 피어오르는 존재론적 슬픔으로 가득하다.
대상이 가진 고독으로부터 타자와 연결된 흔적을 발견하는 조우연 시인은 적막을 견디는 “생이 그렁그렁 잠”기는 모습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눈물을 들키지 않는 물고기”(「물집」)와 “날개는 찢어지고/날지 못하는 저 새”(「검정비닐새」), “바람에게/구멍 난 옆구리를 내주고 선 서어나무”와 “서서 자는 물소” 등, 자연의 생존 방식과 삶의 무게를 탐구하는 동시에 관찰자인 ‘나’와의 관계로부터 대상의 의미가 시작된다는 사유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것이다.
“서 있는 것들은/이름이 불릴 때를 기다려/몸을 돌려세울 준비가 되어 있”(「외로움은 대개 서 있다」)음을 알아보는 시인은 세계가 사물을 규정하는 정의를 비롯해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의미까지 탐색한다. 이 작업은 정의와 의미 사이에서 발생하는 기묘하고 고독한 충돌을, 대상과 타자가 연결되며 나타나는 보편성을 보여 주는 것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