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760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2 : 전라도 향일암과 한려수도
해돋이의 명소로 널리 알려진 영구암(靈龜庵)은 돌산읍과 용림리 금오산 중턱에 있는 절로, 사람들에게는 향일암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선덕여왕 13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했을 당시에는 원통암(圓通庵)이라 불렀으며, 고려 때 윤필거사가 중창한 뒤에는 금오산의 이름을 따서 금오암(金鰲庵)으로 바꿔 불렀다. 임진왜란 때 승군의 본거지로 사용되었던 영구암이 향일암으로 바뀐 것은 일제강점기였다는 말이 있다. ‘일본을 바라보자’는 뜻에서 향일암이라 했다는 설과 한려수도 중에서도 가장 넓게 펼쳐진 바다에서 떠오르는 천하절경의 해돋이를 볼 수 있기 때문에 향일암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향일암 © 여수시청대웅전을 뒤에 두고 바다를 바라다보면 바다는 나직하게 넓고, 눈 아래 기암절벽에는 동백나무 숲이 꽃을 피운다. 마을 쪽을 더 자세히 보면 거북이가 불경을 등에 지고 바다로 헤엄쳐 들어가는 형세가 그대로 눈에 들어온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임포마을의 상가마다 돌산 갓김치에서 미역에 이르기까지 온갖 식품이 수북하게 쌓여 있고, 가파른 진입로에는 사람들이 좌판을 벌이고 있다. 15분쯤 오르면 금오암의 일주문을 대신하는 바위문이 나타나고, 두 개의 바위 사이로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큼 좁다란 기이한 문을 지나면 영구암이 나타난다. 대웅전을 뒤에 두고 바다를 바라보면 바다는 나직하게 넓고, 눈 아래 기암절벽에는 동백나무 숲이 꽃을 피우고, 마을 쪽을 더 자세히 보면 거북이 불경을 등에 지고 바다로 헤엄쳐 들어가는 형세가 그대로 눈에 들어온다.
우리나라 현대사에 ‘여수순천 10ㆍ19사건’이라고 명명된 일이 일어난 날은 1948년 11월 19일이다. 그해 4월 제주에서는 ‘제주도 4ㆍ3사건’이 일어나 토벌대와 유격대 간의 밀고 밀리는 싸움이 전개되었고, 유격대의 끈질긴 저항에 봉착한 이승만 정부는 계속하여 군 병력을 증파하였다. 10월 중순께 군대 통수권을 쥐고있던 전 군정장관 W. F. 딘 소장은 여수에 주둔 중이던 제14연대 제1대대에 출동 명령을 내려 제주를 진압하라고 하였다. 그들에게는 MI 소총과 60밀리 박격포 그리고 수많은 탄약과 카빈 소총이 지급되었다.
그러나 출발을 준비하던 중위 김지회의 주동으로 남로당 출신 군인 40여 명이 신속히 병기고와 탄약고를 점령하는 동시에 제1대대 장병 전원을 집결시켰다. 제14연대 2개 대대가 합류하면서 장병 수는 5천여 명에 이르렀고, 지창수 중위가 연단에 올라서서 제주 출동 거부와 경찰 타도 그리고 남북통일을 위해 민중의 군대로 행동하자고 호소하였다. 이어서 행동 통일을 거부하는 하사관 40여 명을 처단한 뒤 경찰서와 관공서 등의 기관을 점령하였고, 다음 날인 10월 26일 오전 9시경에는 여수시내 전체를 장악하였다. 이 사건을 전해 들은 순천에서는 죽도봉 서쪽에 있는 순천교와 광양 삼거리에 경찰 병력을 배치하였으나 세 방향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민중의 군대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당시 순천역 쪽에 2개 중대의 군부대가 주둔 중이었지만 그들은 같은 군인끼리 싸울 수가 없었고, 더구나 상관의 지시를 받지 못했다는 이유를 내세워 순천경찰의 지원을 받지 않았다. 20일 오후쯤 순천까지 접수한 반란군은 곧이어 보성군 벌교읍까지 손아귀에 넣었다.
처음에 봉기군은 눈에 띄는 대로 경찰들을 쏘아 죽였지만 나중에는 한꺼번에 모아 떼로 죽이기도 하였다. 사건이 발발한 지 2~3일 만에 경찰관 4백여 명과 우익 인사 5백여 명이 여수와 순천 일대에서 목숨을 잃었다.
국군은 광주에 전투사령부를 설치한 후 진압 작전을 지도할 특수부대를 파견하였으나, 작전을 실질적으로 구상하고 총지휘한 것은 미군사고문관 제임스 하우스만 대위와 그 외 7명의 미군 장교였다. 22일에 여수, 순천 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제12연대 연합군에 의해 23일 순천이 점령되었다. 치열한 싸움 끝에 25일에는 여수의 일부가 점령되었으며, 27일 오후에야 진압군은 여수를 완전히 점령할 수 있었다. 여수시내는 폐허를 방불케 하였으며, 희생된 봉기군의 시체가 즐비하였다.
진압군에 의해 붙잡힌 5만 명의 순천시민이 순천북초등학교에 강제 집결되었다. 그들은 심사를 받고 타살되거나 총살되었으며, 계엄군과 경찰에 넘겨져 재판을 받았다. 그때 백두산 호랑이로 악명이 높았던 김종원 대대장은 중앙초등학교의 버드나무 밑에서 일본도를 휘둘러 봉기군들을 즉결처분하기도 하였다. 그때 학살된 사람이 정부의 축소된 발표에 따르더라도 6천여 명에 이르렀고, 2만 3천여 명이 체포, 투옥되었으며, 6천여 호의 가옥이 방화로 소실되었다.
백도 등대 © 여수시청여수순천 10ㆍ19사건으로 엄청난 희생을 치러서인지 이 지역 사람들은 이후 광주나 목포 사람들과 달리 정치와는 관련이 없다는 듯이 조용히 살고 있다. 사진은 여수 거문도.
여수순천 10ㆍ19사건으로 이렇게 엄청난 희생을 치러서인지 이 지역 사람들은 이후 광주나 목포 사람들과 달리 정치와는 관련이 없다는 듯 조용히 살고 있다. 그러나 제주도 4ㆍ3사건과 거창양민학살사건을 5ㆍ18민주화운동같이 특별법 제정을 하기 위해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나서고 있고, 그 연장선상에서 동학농민운동도 특별법 제정을 위해 지역 주민들이 나서고 있음을 보면 여수, 순천 사람들도 언젠가는 한 목소리를 내며 특별법 제정을 위해 발 벗고 나설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