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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교와 하나님의 진노
신 32:15-25
15 그런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
16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
17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귀신들에게 하였으니 곧 그들이 알지 못하던 신들, 근래에 들어온 새로운 신들 너희의 조상들이 두려워하지 아니하던 것들이로다
18 너를 낳은 반석을 네가 상관하지 아니하고 너를 내신 하나님을 네가 잊었도다
19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보시고 미워하셨으니 그 자녀가 그를 격노하게 한 까닭이로다
20 그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얼굴을 그들에게서 숨겨 그들의 종말이 어떠함을 보리니 그들은 심히 패역한 세대요 진실이 없는 자녀임이로다
21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내 질투를 일으키며 허무한 것으로 내 진노를 일으켰으니 나도 백성이 아닌 자로 그들에게 시기가 나게 하며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리로다
22 그러므로 내 분노의 불이 일어나서 스올의 깊은 곳까지 불사르며 땅과 그 소산을 삼키며 산들의 터도 불타게 하는도다
23 내가 재앙을 그들 위에 쌓으며 내 화살이 다할 때까지 그들을 쏘리로다
24 그들이 주리므로 쇠약하며 불 같은 더위와 독한 질병에 삼켜질 것이라 내가 들짐승의 이와 티끌에 기는 것의 독을 그들에게 보내리로다
25 밖으로는 칼에, 방 안에서는 놀람에 멸망하리니 젊은 남자도 처녀도 백발 노인과 함께 젖 먹는 아이까지 그러하리로다
신 32:15-25 / 그들은 이제 배불리 먹고 부유해졌다. 그들은 이제 행복하고 윤택하게 되었다. 사기꾼이라던 야곱이 `정직한 사람' 이라는 뜻을 지닌 여수룬으로 통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렇게 부와 명예를 차지하자 하나님을 배반하였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들의 목숨을 보호해 주는 반석과 같으신 분을 하찮게 여겼다. 16) 그들은 다른 신들에게 사랑을 바쳐 주님의 질투를 일으키고 더러운 우상들을 섬겨 주님의 속을 썩여 드렸다. 17) 그들은 신도 아닌 마귀들에게 짐승을 잡아 제물로 바쳤다. 아무도 도와 줄 수 없는 마귀들에게, 그들의 조상들도 모르던 것들에게, 최근에야 신이라고 나타난 마귀들에게 그들이 제물을 바쳤다. 18) 그들은 자기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배반하였고 반석처럼 튼튼하게 자신을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렸다. 19) 하나님의 아들딸들이 이렇게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속을 썩여 드리자 여호와께서 그 꼴을 보시고 진노하셔서 그들을 포기해 버리셨다. 20) 그래서 하나님이 이렇게 결심하셨다. `내가 이제 그들을 버리고 떠나 다시는 그들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 그들이 결국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보겠다. 그들은 모든 것을 뒤집어 놓았다. 반항과 고집으로만 가득차 있으며 감사한 줄도 모르고 진실한 마음도 잃어버린 자식들이다. 21) 그들이 신도 아닌 우상을 섬겨 내 질투심을 일으켜 놓고 나무나 돌로 허황한 신상들을 만들어 내 속을 썩여 주었으니 나도 내 백성 아닌 흉한 족속을 사랑하여 그들의 질투심을 일으켜 놓고 나무나 돌처럼 냉혹한 족속을 데려다가 그들의 속을 썩여 주겠다. 22) 그들을 미워하는 내 분노가 불길처럼 타올랐다. 내가 이 불길을 그들의 땅으로 분사하면 땅에서 자라는 것을 모조리 태워 죽이고 죽은 사람들이 자는 지하 세계까지 불질러 버리며 산밑바탕까지 뚫고 들어가 태울 것이다. 23) 내가 그들에게 온갖 재앙을 퍼붓고 내 화살을 있는대로 다 그들에게 쏘겠다. 24) 그러면 그들이 흉년으로 굶주려 죽고 무서운 열병과 전염병으로 죽을 것이다. 나는 또 그들에게 맹수들을 풀어 놓고 독사에게 물려 죽게 하겠다. 25) 길거리에서는 자식들이 칼에 찔려 죽고 집안에서는 겁에 질려 죽을 것이니 총각도 처녀도 죽고 젖먹이도 백발 노인도 다 죽을 것이다.
하나님을 배신하는 자들에게 복을 거두시고 재앙과 저주를 내리십니다.
여수룬의 배신(15-18) 여수룬은 의로운 자란 뜻으로 이스라엘의 애칭입니다. 좋은 뜻이지만(33:5) 여기서는 반어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살찌고 윤택해진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충성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업신여겼고, 이방신을 숭배함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시켰고, 하나님을 상관하지 아니하고 잊었습니다. 모세의 시점에서 이스라엘의 배신이 미래에 일어날 일이지만 그 확실성 때문에 과거시제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들이 찾은 대상이 무엇이며 그들이 버린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면 그들의 배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찾은 대상은 귀신들이며(17)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신들입니다. 반면 하나님은 그들을 낳은 반석입니다. 본 단락에서 ‘낳은’, ‘내신’이란 단어들은 ‘해산의 고통으로 출산하다’는 뜻으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강한 모성애를 나타냅니다(18).
하나님의 분노(19-22) 하나님을 버린 대가는 혹독합니다. 하나님께서 배신한 자들에게 전쟁을 선포하십니다. 사랑이 미움으로, 이스라엘을 향한 격노로 바뀔 것입니다. “얼굴을 숨긴다”는 말은 관계 단절을 의미합니다(20). 이로써 이스라엘이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의 결과는 심판과 재앙과 죽음입니다. 이런 혹독한 결과는 이스라엘이 스스로 자초한 것입니다(갈 6:7).
배신한 자들이 받을 재앙(23-25) 하나님께서 마치 군사처럼 배신한 이스라엘을 향해 화살을 쏠 것이며 이 화살을 맞은 배신자들이 죽어갈 것입니다. 굶어 죽고, 더워 죽고, 질병으로 죽고, 짐승에 찢겨 죽고, 독사에 물려 죽고, 칼에 맞아 죽고, 놀라서 죽을 것입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배신한 자들의 종말은 이와 같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저주는 모세를 통해 선포한 저주의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신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저주할 것이라고 모세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신 28:15-68). 에스겔 선지자는 이러한 저주의 말씀에 근거하여 네 가지 재앙, 곧 “칼과 기근과 사나운 짐승과 전염병”으로 유다가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습니다(겔 14:21).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이 저주이며 가까이 하는 것이 복입니다(시 73:27-28).
적용: 성도라는 이름은 존귀하지만 그 이름에 합당하게 살기는 힘듭니다. 지금 당신은 성도의 존귀한 이름에 합당하게 살고 있는지 말해보세요.
믿음으로 새롭게 된다는 것은 본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바 된 새 사람으로 갈아입는 것입니다. 새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거룩한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으며, 성령의 감동하심에 따라 살아가는데 강하고 담대할 수가 있습니다.
< 설 교 >
너무도 사랑하셔서
신 32:18-25 / 김진흥 목사(시온중앙교회)
1.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 즐거움은 자기가 챙기는 사람입니다. 남이 나를 즐겁게 해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어떤 상황이거나 조건이든 상관없이 행복할 방안을 찾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또한 어떤 행복의 조건들을 설정해놓고 그런 충분조건이 충족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행복보다는 불행에 가까워질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기준을 두지 마세요. 세상에는 지난 세월에도 그랬고 앞으로 올 세월에도 마찬가지로 별의별 일들이 다 일어납니다. 이 세상이 망하는 날까지 예상치 못한 별 희한 사건들은 계속 일어날 겁니다. 때문에 내 바라는 좋은 세상이 오면 그때서야 행복하겠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게 그런 좋은 세상은 절대로 오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런 분들에게는 행복한 날이 올 수 없는 것입니다.
대신, ‘난 어떤 날이든 행복할 거야.’ ‘나는 행복할 거야.’ ‘나는 행복하게 살 거야.’ 그렇게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시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스스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조건이나 방법을 찾는 사람은 제가 장담합니다. 그런 사람은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건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실 수도 있습니다만 적어도 하나님의 사람들, 예수의 사람들에게만큼은 절대로 속이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라는 약속의 말씀이 성도들에게는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인 사람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2. 오늘 읽은 신32,18-21 말씀은 모세가 죽기 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써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르쳐 그들의 입으로 부르게 하라고 하신(신31,19) 노래의 말 중 한 단락입니다. 이 노래는 신명기 32장에 기록이 있는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10절에서는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는데 마치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라고 합니다. 11-12절에는 독수리가 자기 새끼들을 훈련시키고 보호하는 것 같이 인도하셨다고 했습니다. 또한 13-14절에는 밭의 소산물과 소와 양의 젖과 기름을 먹게 하셨고 아름다운 밀고 포도즙의 술을 마시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생을 사랑하신다는 이 모든 표현보다 더욱 강력한 표현이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16절과 오늘 우리가 읽은 21절에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백성들 때문에 질투하신다는 표현입니다. 21절을 볼까요?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내 질투를 일으키며 허무한 것으로 내 진노를 일으켰으니 나도 백성이 아닌 자로 그들에게 시기가 나게 하며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리로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이 한 눈을 팔면 질투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질투(嫉妬)'라는 말은 인간의 이기심이나 성숙되지 못한 인격에서 비롯되는 잘못된 마음가짐을 뜻합니다. 혹은 열등의식에 사로잡힌 열등한 인생의 표출로 성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갈5,21 &26 딤전6,4 딛3,3 등에서 사도 바울께서는 성도들에게 투기하지 말라고 권하기도 하였습니다. 미국의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윈프리는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질투하시는 하나님’은 받아들일 수 없어서 성경의 하나님 믿기를 포기했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격이 성숙하지 못하거나 속 좁은 사람들이나 하는 질투라는 표현까지 동원하면서까지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귀한 사랑, 무슨 일이 있어도 포기할 수 없는 열렬한 사랑입니다.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일종의 ‘미스터리(mystery)’, 즉 ‘신비’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대체불가의 존재들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열심을 내셨다고 겔39,25에서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이제 내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열심을 내어 야곱의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하며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사랑을 베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우리 성도들이 불순종과 거역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을 때 성령은 탄식하시며 우리가 돌이키기를 원하시는데, 약4,5에서는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눈동자처럼 사랑하신답니다. 독수리가 새끼를 강하게 하기 위해 갖은 고생을 다 하듯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답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을 두고 질투를 하신답니다. 내가 생각해도 ‘못난 난’데 그런 나를 두고 질투씩이나 하신다는데, 그런데도 우린 우릴 낳은 반석을 상관하지 아니하고, 당신은 당신을 내신 하나님을 잊어버리시겠습니까? 하나님을 격노케 하여 미워하시게 하겠습니까? 패역하고 진실하지 않아서 하나님의 얼굴이 가려지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 아닌 허무한 것들로 질투를 일으키고 허무한 것들로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시겠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그 사랑을 받아 들이시시고 그 사랑 안에 거하십시오. 그분으로 인하여 무조건 행복하십시오. 그분으로 인하여 마냥 즐거우십시오. 그분 안에서 평안을 누리십시오.
3. 하나님은 왜 그렇게 질투한다는 표현까지 쓰시기까지 성도들 사랑하시는 걸까요? 그 답이 오늘 산상변모주일에 있습니다. 산상변모주일이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을 때에 갑자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고 예수님의 형상이 눈이 부셔서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변모하셨던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이 산상변모주일의 핵심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하나님께서 명확하게 보여주셨다는 것에 있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세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변모하시고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보고 덜덜 떨고 있는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17,5)라고 하였습니다. 에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이며, 또한 몹시도 기뻐하는 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말을 듣고 그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또한 너희 구원을 위해, 그토록 소중하고 아끼는 예수를 우릴 위해, 그리스도로, 구원자로,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당신의 독생자를 죄의 값으로 희생시키면서까지 구해낸 사람들이 성도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야, 이눔아. 넌 내 독생자까지 희생하면서 취한 눔이야. 그런데 내 사랑을 못 믿어? 뭘 어찌하면 내 사랑을 믿을 건데? 그가 하는 모든 말을 들어. 들어, 들으라고. 듣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어라.’
옛날에 어른들이 아이들을 놀릴 때에 ‘넌 다리 밑에서 주워왔어.’라는 말을 많이 했었습니다. 어떤 부모가 아이에게 진지하게 넌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하면서, ‘봐라. 네 동생 아기 사진도 있고, 네 형 아기 사진도 있는데, 너 아기 때 사진은 없잖아.’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이 아이가 엉엉 울면서 자기는 자기 진짜 엄마 아빠를 찾아 간다면서 집을 나가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니라고. 너도 내 배 아파 낳은 내 새끼라고 설명을 하고 설득을 하는데 거짓말 할 때보다 해명하는데 진땀을 뺐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어떤 집에 아들이 있는데 이 녀석이 아이 없는 이웃집 부부가 이뻐하니까 심심하면 그 집에 놀러가고 또 가끔은 그 집에서 자고 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더니 어느 날 진지하게 말하기를 자기는 그 이웃집 아들이 될 터이니 자기를 그 집 아들로 호적을 옮겨달라고 떼를 쓰기 시작하더랍니다. 아무리 이웃과 잘 지내기도 해야 하고 어른들 말씀도 잘 들어야 하지만 어떤 부모가 아들이 원하는 대로 보내주겠습니까?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 중에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21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내 질투를 일으키며 허무한 것으로 내 진노를 일으켰으니...” 외형적인 형상의 우상을 섬기는 사람도 있고 재물을 주인으로 섬기는 어떤 사람들도 있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자신의 삶의 주인이라며 자기 마음대로 살겠다고 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세상의 향락을 좋아하여 그 향락 속에 빠져 살면서 저마다의 우상을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우리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무엇도 우리 안에 우상으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안에 우상을 두었을 때 하나님은 가장 불쾌해 하십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일체의 것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첫 서신, 요한일서를 끝맺을 때,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요일5,21)는 권면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열정이 질투가 아니라 더 뜨거운 열심이 되게 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십시다.
4.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또 다른 질투를 말하고 있습니다. 21절 하반절입니다. “... 나도 백성이 아닌 자로 그들에게 시기가 나게 하며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리로다” 이 말씀이 롬10,19절에 인용이 되었고 롬11,11-14절에 부가되어 하나님의 신비한 사랑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질투는 하나님의 사람들 마음 속에 질투를 불러일으키는데 백성 아닌 자들, 어리석은 민족, 즉 진리를 모르는 민족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 마음속에 시기심이 일어나게 하여 그 시기심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롬11,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롬11,14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이제 이번 주 수요일부터 2021년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우리가 뭘 잘해서 그렇게 고난을 당하시는 것으로 사랑을 보여주신 게 아닙니다. 우리가 뭘 잘하기 이전에 우리 존재 자체를 기뻐하십니다.
내 얼굴을 숨기리라
신명기 32:15-25 / 코너스톤 교회
사람이 들어올 때 마음하고 나갈 때 마음이 같아야 합니다. 그러나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들어올 때 마음하고 나갈 때 마음이 다릅니다. 예를 들면 힘들고 어려울 때는 겸손했던 사람이, 잘 나갈 때는 교만하게 변화합니다.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못한다’는 말처럼 이전에 가난하고 고생할 때 가졌던 겸손했던 태도는 온데 간데없고, 세상에 자기가 제일 잘 난 것처럼 남들 무시하며 제멋대로 살아갑니다. 먹을 것이 없을 때는 눈물에 젖은 땅 하나 나눠주고, 밥풀만 몇 개 떼어줘도 평생의 은혜라 여기리라 다짐했건만, 배부르고 등 따뜻해지니까 지나온 은혜를 잊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저지른 죄악입니다. 애굽에서 노예로 살아갈 때는 “주여! 주여!”하고 부르짖으면서 살려달라고 애절하게 간구하더니, 이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니까 하나님 은혜를 입 씻은 듯 다 잊어버리고 나 몰라라 하고 자기 멋대로 살아갑니다.
모세는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훗날 하나님을 떠나 범죄할 것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15절 봅시다. “(신 32:15) 그러한데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 ‘여수룬’이란 말은 ‘의로운 자’, ‘정직한 자’라는 뜻으로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별명입니다. 여수룬과 이스라엘의 앞에 자음 세 개)(ㅇ,ㅅ,ㄹ)가 같고 발음이 비슷해서 부르는 별칭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이스라엘은 별명대로 의로운 자도 아니고 정직한 자도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별명을 통해 이들이 하나님에 대한 신의를 저버렸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먹을 것이 많아지고 부해지고 삶이 윤택해지자,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애굽에서 구원해주신 하나님을 업신여기며 무시하고 살아갑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원수로 갚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먼저 그들은 우상을 섬겼습니다. 16-17절 봅시다. “(신 32:16)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 (신 32:17)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마귀에게 하였으니 곧 그들의 알지 못하던 신, 근래에 일어난 새 신, 너희 열조의 두려워하지 않던 것들이로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사람들이 최근에 새롭게 만들어낸 우상들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인도자 공급자 하나님께는 제사 지내지 않고, 하나님께서 복으로 주신 소와 양과 염소를 우상에게 제사 드리는데 바쳤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완전히 잊고 살았습니다. 18절을 봅시다. “(신 32:18) 너를 낳은 반석은 네가 상관치 아니하고 너를 내신 하나님은 네가 잊었도다” 자식이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잊고 산다고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저 타국에 이민 간다 해서, 적금 깨고 집에 있던 금반지 귀중품 다 팔아서 손에 쥐어 주고 떠나보냈는데 어떻게 된 것이 부모에게 편지 한 통도 없고, 연락 한 통도 없습니다. 부모를 잊는 것이죠. 부모 속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죽는 순간까지 자신을 버린 자녀를 둔 부모의 아픈 심정이란, 가슴에 비수를 꽂아도 그보다 아프겠습니까?
하나님께서도 이 배은망덕한 이스라엘을 미워하시고 괘씸한 이 사람들을 향해 크게 진노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전에는 그들에게 복을 주셨으나, 이제는 이스라엘에게 벌을 내리십니다. 20-21절을 봅시다. “(신 32:20)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하고 그들의 종말의 어떠함을 보리니 그들은 심히 패역한 종류요 무신한 자녀임이로다 (신 32:21)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로 나의 질투를 일으키며 그들의 허무한 것으로 나의 진노를 격발하였으니 나도 백성이 되지 아니한 자로 그들의 시기가 나게 하며 우준한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격발하리로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이스라엘은 악한 백성이고, 부모를 버린 자녀나 똑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님의 얼굴을 가리십니다. 이 말은 이제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고, 주님의 임재가 떠나가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지 못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이는 성도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심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버린 자의 최후는 비참합니다.
하나님을 버린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또 다른 재앙들이 무엇인지 22-23절 이어서 봅시다. “(신 32:22) 내 분노의 불이 일어나서 음부 깊은 곳까지 사르며 땅의 그 소산을 삼키며 산들의 터도 붙게 하는도다 (신 32:23) 내가 재앙을 그들의 위에 쌓으며 나의 살을 다하여 그들을 쏘리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사는 땅과 밭 그리고 농사 지은 곡식과 열매를 다 불로 태워버리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화살로 이스라엘을 공격하십니다. 이게 끝이 아닙니다. 24절을 봅시다. “(신 32:24) 그들이 주리므로 파리하며 불 같은 더위와 독한 파멸에게 삼키울 것이라 내가 들짐승의 이와 티끌에 기는 것의 독을 그들에게 보내리로다”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벌하사 이스라엘은 이제 기근이 찾아와 굶주리게 되고, 죽음의 전염병이 온 땅에 찾아오게 됩니다. 25절에 보면 길에서는 사람이 칼에 죽고, 방 안에서는 병과 굶주림으로 인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죽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에게 내릴 재앙과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이스라엘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도 이스라엘을 향해 얼굴을 가리시고 그들에게 진노하사 벌을 내리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이 가리우지 않도록 언제나 주님 안에서 살아가야합니다. 죄의 문제는 빨리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은 넘치는 복과 은혜로 우리 삶에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이 귀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도록 언제나 하나님과 동행하며 주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신명기 32:15-29
찬송가 369장 ‘죄짐 맡은 우리 구주’ / 조광묵 목사
신명기1장에서 30장까지 모세의 설교에 대한 기록을 마치고 32장에서는 모세의 노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이 노래는 시적인 형식과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제 살펴본 32장 전반부는 여호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이스라엘 족속에게 베푸신 은혜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족속이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후반부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이스라엘 족속을 징계하시지만 버리지 아니하시고 구원을 이루실 것이라는 내용으로 마무리를 합니다.
이 노래는 모세가 이스라엘과 함께한 40년 간의 경험을 통한 경고만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31장 19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르쳐 그들의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고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예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족속이 하나님을 버리고 업신여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15)
(15) 그런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
이스라엘을 “여수룬”이라고 부릅니다. 여수룬은 이스라엘에 대한 시적 표현으로 성경에서 총 4번 나오는데 신명기에서만 3번 사용됩니다. 그 뜻은 ‘옳은 자’라는 의미인데,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별명의 고유명사입니다. 이 여수룬이라는 표현은 다른 사람이 이스라엘을 부를 때 쓰이지 않으며,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서만 불리는 별명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족속 사이에 별명이 쓰인 다는 것은 그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 기도 합니다. 이 별명의 뜻만으로 봤을 때는 긍정적인 의미이지만, 문맥에서는 이스라엘을 책망하고 있기에 반어적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옳은 자”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업신여기게 됩니다. 업신여긴다는 말은 무시하고 경솔하게 함부로 대한다는 의미입니다.
먼저 살펴볼 부분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업신여기게 되는 이유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해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살찐 소로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눈에 보기에 기름기가 흐를 정도로 비대해진 살찐 소의 모습을 상상하게 만듭니다. 이 소는 먹을 것을 충분히 먹었고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에 자기를 치는 목자를 따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발로 차버립니다. 이는 이스라엘 족속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누리는 풍요와 그로 인한 태도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삶이 부족함이 없이 윤택해질 때, 우리에게 하나님은 어떤 존재가 되는 지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삶에 부족함이 있고 힘이 들 때는 하나님을 찾지만, 그것이 채워지면 자신만만해져서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패턴은, 모세가 신명기에서 계속해서 반복하는 경고입니다. 8장 12-14절에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31장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라고 노골적으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은 실제로 이 말씀과 같이 가나안 땅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이 부분이 역설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어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 역설은 신약에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설명이 됩니다. 윤택하고 형통한 삶을 살기에 하나님을 찾지 않게 된다면 오히려 불행한 삶이 됩니다. 반대로 궁핍하고 불행하더라도 그로 인해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 사람은 복된 사람이 되는 역설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죄를 지은 여자가 올바르게 사는 바리세인들 보다 복된 사람입니다. 우리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또한 윤택하며 부족함이 없게 된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소홀히 하고 업신여기는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16-21)
(16-20)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귀신들에게 하였으니 곧 그들이 알지 못하던 신들, 근래에 들어온 새로운 신들 너희의 조상들이 두려워하지 아니하던 것들이로다 너를 낳은 반석을 네가 상관하지 아니하고 너를 내신 하나님을 네가 잊었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보시고 미워하셨으니 그 자녀가 그를 격노하게 한 까닭이로다 그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얼굴을 그들에게서 숨겨 그들의 종말이 어떠함을 보리니 그들은 심히 패역한 세대요 진실이 없는 자녀임이로다
부족함이 없어진 이스라엘 족속은 하나님을 업신여길 뿐만 아니라, 가증한 것과 귀신에게 제사하고 그것들을 섬깁니다. 가증한 것은 우상을 의미하고, 귀신들 또한 이방 족속들이 섬기는 우상들을 의미합니다. 근래에 들어온 새로운 신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알게 된 가나안 족속들이 섬기던 우상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족속은 조상 아브라함을 따라 유일신 여호와를 섬기는 족속입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400년을 지내면서도 애굽의 신들을 섬기지 않았고, 또한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며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훈련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우상숭배에 물들지 말라고 수없이 경고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
이 문제는 정말 어려운 문제입니다. 삶이 형통하고 부족함이 없어질 때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우상을 숭배하게 되는 것은 단순히 이스라엘 족속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매슬로의 ‘인간 욕구 단계 이론’에 따르면, 사람은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면 상위단계의 욕구가 나타나고 그것이 충족되면 또 그 위의 단계의 욕구가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생리적 욕구와 안전의 욕구가 충족되면, 사회적 욕구가 나타나고, 마지막으로 자아실현의 욕구가 나타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설명이 사람의 본성에 대한 완전한 설명은 아니지만, 일정부분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이러한 사람의 단계적인 욕구를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면, 하나님은 우상과 같은 존재가 됩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우상들과 동일선상에 놓여서 필요에 따라 선택적으로 섬김을 받는 신이 됩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해서안정을 누리게 된 이스라엘 족속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그런 존재로 전락한 것입니다.
우리도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이루려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인가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21)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내 질투를 일으키며 허무한 것으로 내 진노를 일으켰으니 나도 백성이 아닌 자로 그들에게 시기가 나게 하며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리로다
여호와 하나님은 인격과 성품이 있는 신입니다. 이 말씀에서 그의 성품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그와 언약을 맺은 사람이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두고 보지 않으십니다. 이것을 질투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질투한다는 말은 모든 것에 대한 질투와 시기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족속과 언약을 맺었고, 이 관계를 혼인의 관계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편이며 이스라엘은 신부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상 숭배를 간음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만일 이스라엘 족속이 다른 신을 섬기더라도 하나님께서 관여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아무런 관계도 아닐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질투하신다면 그 관계는 특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족속이 미약하고 작은 족속이지만, 그들이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질투하고 진노하십니다. 이 진노는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으로서의 진노가 아니라, 질투에 따르는 진노입니다. 그래서 이 진노는 그 관계를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 돌아오게 하여 회복시키려는 진노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질투를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수단으로 여길 때, 하나님은 질투하시고 진노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돌아오게 하시기 위한 방법을 내십니다.
백성이 아닌 자로 시기나게 하며(22-29)
(22-26) 그러므로 내 분노의 불이 일어나서 스올의 깊은 곳까지 불사르며 땅과 그 소산을 삼키며 산들의 터도 불타게 하는도다 내가 재앙을 그들 위에 쌓으며 내 화살이 다할 때까지 그들을 쏘리로다
그들이 주리므로 쇠약하며 불 같은 더위와 독한 질병에 삼켜질 것이라 내가 들짐승의 이와 티끌에 기는 것의 독을 그들에게 보내리로다 밖으로는 칼에, 방 안에서는 놀람에 멸망하리니 젊은 남자도 처녀도 백발 노인과 함께 젖 먹는 아이까지 그러하리로다 내가 그들을 흩어서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에 대한 기억이 끊어지게 하리라 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족속이 다른 족속을 시기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족속에게는 어려움을 주고, 다른 민족에게는 형통함을 주어서 그들이 다른 민족을 시기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다루는 주제 중에 하나가 악인은 형통하고 의인은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욥은 “어찌하여 악인이 생존하고 장수하며 세력이 강하냐”(욥21:6)고 하며, 시편 73편에 시인은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다”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하박국도 왜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냐고 하나님께 묻기도 했습니다(합1:1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난을 주시고 그들의 원수에게 형통함을 주시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악인들이 다 고난을 당해야 한다면, 고난을 당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의롭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고난을 주시고 악인에게 형통을 허락하심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지 않게 하십니다.
이 부분에서 하나님께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한 은혜만으로 그의 백성을 구원을 이루시는 이유를 볼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2:8-9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고 증언하십니다.
또한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은 상관하지 않으시고 내버려주시는 것은 아니며, 그들에 대해서는 심판의 진로를 하십니다.
(27-29) 혹시 내가 원수를 자극하여 그들의 원수가 잘못 생각할까 걱정하였으니 원수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수단이 높으며 여호와가 이 모든 것을 행함이 아니라 할까 염려함이라 그들은 모략이 없는 민족이라 그들 중에 분별력이 없도다 만일 그들이 지혜가 있어 이것을 깨달았으면 자기들의 종말을 분별하였으리라
하나님께서 이방 민족을 사용해 이스라엘 족속을 징계 하셨습니다. 이 때 이방 민족들의 죄와 방종을 경계하시고 그들의 죄에 대한 심판을 또한 내리 십니다. 세상에는 어떤 누구도 자신을 스스로 의롭다고 높이거나, 자신이 의롭기 때문에 복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 민족이나 사람은 없습니다. 오늘 모세로 하여금 부르도록 한 이 노래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족속은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앗수르와 바벨론도 타 민족에 의해 멸망됐습니다.
오늘 모세의 노래에서와 같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의 모든 산당과 우상을 깨뜨린다 하여도, 자신의 마음에 자라나는 우상은 깨뜨리지 못했습니다. 가나안에서 자리를 잡고 안정돼 갈수록 하나님을 소홀히 여기고 자신을 위한 우상들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에 다시는 우상이 자라지 못하게 하시려고, 오히려 그들의 원수들에게 형통한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다시는 이스라엘 백성이 내가 의로워서 복을 받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만으로 구원을 베푸십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자는, 의롭다고 여기기는커녕 그 누구보다 자신의 죄가 크다고 여겼기에 복된 사람입니다. 그 여자의 죄가 정말 다른 누구보다 큰 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여자는 자신의 죄가 가장 크다고 생각했기에,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했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탕감 받은 죄인으로 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하루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스라엘 족속은 자신 밖에 있는 우상은 제거하면서도 그들 안에 있는 우상은 제거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자신을 위하는 그 우상으로 부터 돌아오게 하시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오직 그 은혜로만 구원을 베푸심에 감사드립니다. 오늘 이 하루도 용서받은 그 사랑에 힘입어, 사랑하며 살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묵상을 돕는 질문
1. 모세는 왜 모든 설교를 마치고 이 노래를 기록하여 부르고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2. 이 노래에서 이스라엘 족속은 가나안에 들어가 무엇때문에 하나님을 업신여기게 되는지 생각해보고, 우리에게는 그런 부분이 없는지 묵상해 봅시다.
3. 하나님께서는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진노하시는데, 그 이유는 바로 질투로 인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질투를 하시는지 묵상해봅시다.
4.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 족속으로 하여금 다른 이방족속을 시기하도록 하는 방법으로 우상으로 부터 돌이키도록 하시는데, 왜 그러한 방법을 쓰시는지 묵상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