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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화가 피었다. 김지명
한국섬유 주식회사 생산과 최태수는 직원을 가족처럼 대하면서 성실히 일하는 반장이다. 서상호 과장은 태수의 직속상관으로 평소에는 항시 웃는 얼굴로 순하게 대하더라도 빈둥거리는 모습을 보았을 땐 칼날 같은 성격으로 냉정하게 꾸짖는다. 상호는 카리스마를 가졌으며 덩치가 커고 우락부락하게 생겨 보기만 해도 두려움을 느낄 만한 사내다. 직원들은 일하는 현장에 상호 계장이 나타나면 성실함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게으르게 보이면 감봉당하기 때문에 열정적으로 일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상호는 눈알이 반짝거리며 일하는 직원을 무심코 바라보았다. 태수가 성실하게 일 잘한다는 모습을 멀리서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매사에 성실하다는 소문처럼 주어진 일에 조금도 소홀하지 않고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태수의 모습을 자주 보았다. 태수에게 가까이 다가가 대화할 때 마음씨까지 착하고 박꽃처럼 순박한 모습에서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직원을 잘 다루는 특별한 재능을 가진 태수가 눈에 보일 때마다 진급시켜야 하겠다는 생각이 자꾸만 발길을 멈추게 한다. 참다못해 작업장에서 태수에게 물었다. 퇴근 시간에 선약이 없으면 일마치고 한잔 하자고 단도직입적으로 둘만의 만남을 요구했다.
“태수야 퇴근하여 주점에서 만나자.”
“좋지 어디로 갈까요?”
“대연동에 오페라주점에서 만나자.”
“먼저 가서 기다릴게요.”
태수는 퇴근하면서 직속상관인 상호를 만나려가는 발걸음은 가볍기만 하다. 상호가 직속상관이지만, 어려서 함께 뛰어놀았던 고향 선배다. 잠시 후 기다리던 퇴근시간이 다가왔을 때 싱글거리며 동료들에게 먼저가라고 했다. 태수는 흥겨운 마음을 감추지 못해 휘파람을 불면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회사 앞 골목으로 빠져나간다. 한참을 걸어갈 때 어디선가 태수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오른쪽으로 고개 돌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길가의 포장마차에서 친구가 오른손을 높이 들고 흔들면서 반가움을 전한다. 태수가 다가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손을 잡고 아래위로 흔들며 오래만이라고 반가워했다. 오늘은 선약이 있어 곧바로 가야하니 다음에 만나자고 하고는 몸을 돌려 멀어져가면서 오른손을 높이 들고 좌우로 흔들었다. 친구는 자꾸 불렀으나 고개도 돌리지 않고 앞만 보면서 걸었다. 생산 과장은 태수와 식사하려고 먼저 퇴근하여 골목식당에 들려 창가에 자리 잡고 앉자 기다리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태수와 상호가 맞닥뜨리자 서로는 반가워서 얼싸안기까지 했다. 태수가 형님 정말 반갑다고 다가 올 때 상호는 그래 수고가 많았지 하면서 아우처럼 다독이며 손을 잡고 형제처럼 다정스럽게 마주 앉았다. 상호는 고향동생과 주석에서 만나니 너무나 반갑고 흐뭇한 마음이라고 하면서 이야기가 길게 이어졌다. 태수가 고향 형에게 술을 따르면서 우애가 깊은 형제처럼 따뜻한 정이 물씬 풍기는 주석이라고 했다. 상호가 고향 동생에게 잘 봐주려고 항시 신경을 쓰고 있다며 편안한 마음으로 근무에 임해달라고 하면서 너털웃음을 보였다. 과장은 술잔을 높이 들고 건강을 위해 파이팅을 외치며 가볍게 부딪쳤다. 과장인 상호는 생산 반장이 열정적인 모습으로 일할 때 직원들의 모범이 된다며 감사한 마음으로 술을 따르면서 일을 깔끔하게 잘 한다는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태수는 칭찬에 힘입어 빙그레 미소를 보이고 열심히 노력하겠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상호는 태수에게 기분 대화로 분위기를 띄웠다. 태수는 과장에게 술잔에 술을 가득 채웠다. 상호 과장은 얼굴이 붉어지자 창밖에는 어둠이 세상에 카턴을 치고 있으니 오늘은 그만 마시고 내일을 위해 집으로 가자고 했다.
며칠이 지나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정월 열사흘 날 태수는 언덕배기 앞에서 자동차가 멈춰 서서 붕붕거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타이어가 공회전하면서 오르막에 더 이상 오르지 못해 발버둥 치는 모습이 태수의 삶과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고 혼자서 중얼거리며 출근했다. 태수는 덩치가 아주 좋으며 몸매는 중앙아시아 무처럼 허리도 없이 쭉 빠졌지만, 성격은 잔잔한 호수처럼 순박하고 마음은 바다처럼 넓은 사내다. 생산계장은 퇴근하면서 통근버스 앞에서 오랜만에 태수를 만나 약주나 한잔 하고 가자고 제의했다. 태수는 상관의 말이라면 무조건 승낙하고 계장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생긋이 미소를 보였다. 회사 앞 골목에서 분위기 좋은 카페로 들러 아담하고 침울한 작은 방에 들러 테이블을 사이에 놓고 서로 마주 앉았다. 계장과 반장은 돼지갈비 찌게에 대선소주를 주문하고 태수와 이야기가 이어졌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직원을 진급시켜주려고 추천서도 자주 올렸는데 총무과에서는 반응이 없다며 불만을 터뜨린다. 열심히 살다 보면 곧 진급할 거라고 희망적인 말로 태수가 흐뭇하도록 기분을 양껏 돋우었다. 태수는 고맙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90도로 굽혀서 인사하면서 상관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고 미소를 보였다. 계장은 한마디 더 보태어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근무시간에 주변의 여직원에게도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칭찬해 주라는 말도 빠뜨리지 않았다. 상호는 맞아 바로 그거야 하면서 이야기가 이어진다. 누구든지 칭찬 밭았을 때 그 기분은 급상승하는 마음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태수는 일에 대한 성과를 끌어올릴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직원들에게 사기를 돋우고 일의 능률도 올릴 수 있도록 했다. 아가씨들은 태수의 생각이 흥미를 가져온다며 일에 재미를 느끼고 퇴근 시간도 모르고 제품생산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회사 직원의 대다수가 여자들이기 때문에 관리하기가 몹시 어렵다고 하지만, 태수는 여직원이 이기 때문에 일의 능률을 올릴 수 있었다고 좋아한다. 여자들은 틈만 있으면 윗사람의 눈치를 살피면서 한곳에 모여 수다로 시간을 녹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건성으로 근무하다가 태수 반장에게 들키기만 하면 혼나기 일쑤였다. 태수가 근무시간에 보이는 사람은 아가씨들뿐이니 처녀대합실에 온 느낌이라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듣고 있던 아가씨가 처녀대합실에서 고루고 골라도 부족하여 다른 회사까지 낚싯대를 던지는지 물었다. 태수가 웃으면서 살다 보면 그런 날도 있어야지 하면서 아가씨를 빤히 쳐다보면서 다가가 귓속말로 조용히 해라면서 어깨를 툭 쳤다. 회사 일을 내 집에 일처럼 열정을 갖고 노력하자며 아가씨들에게 조금만 더 열심히 하자고 웃으면서 부탁도 했다. 아가씨들이 태수반장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웃으면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은 직장 분위기가 아주 좋아보였다. 태수는 회사원 795명 중에 대다수가 여자지만, 남자는 고작 30명밖에 안 되는데 태수도 그 속에 포함되었다. 태수가 중간에서 교량적인 역할하면서 회사분위기를 아주 좋게 만들어놓았다. 남녀관계를 남매처럼 가깝게 지내도록 이성 관계의 만남을 자주 연결해 주면서 데이트도 하라고 부추겼다. 만남이 없는 사람은 앞으로도 가끔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하겠다고 떳떳하게 말했다.
시월이 저물어가던 마지막 날 사장은 바람둥이 태수반장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여자들과 잘 어울린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고 남녀가 함께 있는 모습도 가끔 지켜보았다. 사장은 회사원들이 작업 실적이 좋지 않아 수출해야할 물량이 모자라자 어떻게 할까 고민하면서 현장에서 일하는 모습을 둘러보았다. 일할 땐 항시 열정을 가지고 충실하게 노력하지만, 퇴근 시간만 되면 태수반장은 청춘사업을 위해 분주하게 설쳐댄다. 아가씨를 만나기 위해 분주하게 설쳐서 모든 면에 깔끔하게 꾸민다. 생산 계장은 어떤 일이 있어도 상호를 계장으로 진급할 수 있도록 추천서를 계속 올렸다. 언제나 말없이 부지런한 태수반장을 유심히 지켜보면서 진급을 시켜야 하겠다고 생각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사장은 집무실에서 비서에게 총무과장을 불러달라고 연락했다.
추석도 지나고 날씨가 시원해지던 80년 시월 보름 날 새로운 대책을 현장직원과 의논하려고 생산 반장을 불렀다. 사장은 직속 과장과 계장을 불러 대책을 의논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매월 수출물량이 부족하여 어떻게 할까 고민에 젖었다. 생각다 못해 현장을 돌아보면서 열심히 일하는 태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 한참을 지켜보았다. 퇴근시간이 지났는데도 하던 일을 내일로 미루지 않고 끝까지 직원을 부추기며 제품 생산에 조금도 소홀이 하지 않았다. 평소에 여자를 잘 다룬다는 소문과 행동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여직원과 함께 일하는 태수의 모습을 보면서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터득했다. 사장은 태수 곁으로 다가가 어깨를 다독이며 사무실에서 차 마시러 가자며 함께 집무실에 들렀다. 태수는 무슨 이유인지 알지 못해 약간 긴장한 모습으로 사장실까지 말없이 따라갔다. 사장은 태수를 곁에 앉히고 유머러스한 말로 바람둥이 반장이 있다던데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태수는 웃으면서 그 바람둥이 요즘은 보이지 않아도 부지런한 일꾼이 여기에 있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사장은 껄껄 웃으면서 그를 리가 바람둥이 근성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바람둥이가 없으면 태수반장과 이 어려운 문제를 대화로 풀어보려고 의논하고 싶다고 했다. 태수반장은 여유를 가지고 대화를 이어가려고 사장님에게도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회사일은 순조롭게 진행되며 모두가 열심히 하고 있는 모습을 자주 보셨잖아요, 하면서 당당하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하던 일 멈추고 고개를 돌려 사장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면서 미소를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사장은 그래 보았지 열심히 하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았으나 실적이 적으니 문제가 있다고 했다. 태수는 아가씨들을 달래고 타일러서 열심히 하자고 맹세도 했지만, 생산실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직원들 앞에서 투덜거렸다. 사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해도 수출 물량이 모자라 잔업을 해서라도 물량을 확보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다시 강조하였다. 태수는 알겠다며 발바닥에 땀을 흘리더라도 뛰어다니며 감시하여 반드시 물량을 확보하겠다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사장을 져다보았다. 사장은 태수에게 어떤 방법을 취하더라도 수출량을 충분히 확보하라고 명하고는 어그러진 얼굴에 웃음마저 사라지더니 자리를 떠났다.
비서실 아가씨가 태수를 보고 멋쟁이라며 단번에 호감정을 느꼈다. 태수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려고 은근히 미소를 앞세워 접근하여 말을 붙였다. 비서실 아가씨가 데이트가하고 싶어 태수에게 시간 좀 빌려달라고 물었더니 황소웃음처럼 비시기 웃는다. 아가씨는 좋은 점을 부추겨 이야기하면서 바람둥이의 기분을 맞추며 태수 반장과 긴 대화가 이어졌다. 비서실 아가씨가 사장의 면담이 있다고 전하여 즉시 데리고 오라는 명을 받았다고 태수에게 전했다. 태수는 대화를 나누던 아가씨를 멀리하고 얼른 비서가 오라는 곳으로 따라갔다. 작업복 차림으로 이유를 몰라서 긴장한 몸으로 비서실을 스쳐 가는데 아가씨가 오늘이 아니고 다음에 연락하겠다고 말을 증정했다. 태수가 아가씨를 빤히 바라볼 때 얼굴이 빨갛게 변하더니 수줍어하면서도 용기를 열배하여 말을 던진다. 보고 싶어서 순간을 참지 못해 그랬다고 하면서 시간이 허락하면 차라도 한 잔 하자고 만남을 요구한다. 여성상위시대가 되어 확실하다고 했더니 뱅긋이 웃으며 얼굴을 붉힌다. 이튿날 아가씨는 다시 태수에게 오늘은 사실이라고 이실직고 하면서 어서 들려달라고 부탁했다. 태수는 다시 찾아가 아가씨를 빤히 바라보면서 화난 얼굴로 사장실에 들렀다. 사장은 태수를 보더니 아주 반가워하면서 응접용 소파에 앉으라고 권하여 엉덩이를 살그머니 내려놓고 바른 자세로 앉았다.
“반장의 말이라면 아가씨들이 잘 따른다고 하던데.”
“제가 다루는 게 아니고 아가씨들이 저를 조절합니다.”
“각 부서에 팀장 아가씨를 개인적으로 만날 수 있는가?”
“시간만 있으면 노력해 보겠습니다.”
“부서마다 팀장을 데리고 서울 본사에 2박3일간 교육 단여오너라.”
“네 알겠습니다.”
“교육비는 줄여서 써라.”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생산과장은 총무과장에게 명단을 주면서 이 세 명을 본사 출장 2박3일간 연수 명령서를 발급해 달라고 가냘픈 목소리로 통화했다. 총무과의 아가씨가 명령서를 발급해 주면서 생긋이 웃으며 경비 문제는 경리과에서 의논하라며 오른손을 쭉 뻗어 위치를 가리키며 저쪽이라고 안내했다. 태수는 고맙다며 아가씨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출장 명령서를 받아들고 한쪽 눈으로 윙크도 아끼지 않았고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경리과에 들렀다. 경리과 아가씨에게 다가가 출장경비를 달라고 투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는 웃으면서 얼마나 필요한지 몰라서 마음대로 지출할 수 있도록 돈 대신 회사 카드를 전해준다고 하면서 즐거운 교육이 되도록 바란다는 말도 빠뜨리지 않았다. 태수가 고맙다고 하자 아가씨는 얼굴을 빤히 바라보면서 한쪽 눈으로 윙크도 빠뜨리지 않았다. 경리과에서 근무하던 아가씨가 태수를 다시 보더니 멋쟁이 총각이 여긴 왜 왔는지 물으며 생긋이 웃는다. 총각에게 녹아들겠다며 차라도 함께 나누고 싶다고 얼굴을 붉히면서까지 용기 내어 말을 전했다. 태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출장 떠나는 사람 앞에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며 다녀와서 보자고 했다. 업무를 마친 태수는 밖으로 나와 함께 떠날 아가씨를 만나러갔다. 태수가 사무실에서 돌아 서서 밖으로 나가면서 빙그레 웃으며 팀장을 만나려고 일하는 곳으로 찾아갔다. 출장 명령서를 보여주면서 장거리 여행에 멀미하거나 피로에 지치지 않도록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라고 전하면서 아가씨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아가씨는 별빛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를 굴리면서 태수를 바라보면서 말을 잇는다.
“우리와 함께 떠납니까?”
“그래요.”
두 아가씨는 퇴근하려고 작업복을 갈아입고 탈의실에서 밖으로 나왔다. 휴게실에서 두 아가씨가 들뜬 마음으로 함께 떠날 때 필요한 물건이 무엇인지 섬세하게 의논하고 있었다. 태수가 갑자기 들어가니 놀라지도 않고 웃는 얼굴로 잘 부탁한다며 동시에 고개 숙여 인사할 때 미소를 보였다. 한 아가씨가 고개를 많이 숙여 인사할 때 긴 머리칼이 테이블에 다였다. 태수는 웃으면서 그 아까운 머리칼 다시 빨아야 하겠다며 웃었다. 아가씨들은 함께 떠나게 되어 영광이라며 올 때까지 잘 지켜달라고 간청하듯 다시 고개 숙인다. 말만 잘 들으면 좋은 여행이 될 거라고 밝은 표정으로 아가씨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준비를 철저히 하라고 전하면서 여행 중에 먹거리도 챙겨왔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아가씨들은 바람둥이 총각과 여행사의 안내를 받으며 나들이 떠나는 기분이라며 미소를 가미하여 싱글거린다. 한 아가씨는 당장 떠나고 싶다며 하루가 지루하다고 당장이라도 출발했으면 좋겠다는 말로 구시렁거린다. 함께 떠날 두 아가씨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면서 지금은 좋지 않은가 하고 묻기도 했다. 아가씨들은 묻지 않아도 너무나 좋아 미소가 멈추지 않는다고 서로 얼굴을 바라보면서 흐뭇한 느낌이라고 한다.
며칠이 지나자 출장할 날이 훤하게 밝아왔다. 태수는 서둘러 두 아가씨를 만나려고 버스 정류장으로 쫓기듯 뛰어가면서 먼저가 기다려야한다며 마음이 급했다. 버스를 타려고 기다리는 시간이 3분후에 도착이라는 문고를 보고 지루하게 느껴졌다. 부산역으로 스쳐가는 버스가 도착하여 차에 올랐다. 버스 안에는 열두 명이 앉아 있어도 아무도 대화를 나누는 사람은 없었다. 조용한 분위기는 부산역까지 이어졌다. 역전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버스에서 급하게 내려 아가씨와 약속한 장소인 부산역 대합실로 뛰었다. 태수는 두 아가씨를 살피며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아가씨들이 다가와 반장님 오셨네요, 하면서 아주 반갑게 허리를 직각으로 굽혀 인사한다. 세 사람은 열차를 타려고 승강장이 있는 쪽으로 천천히 걸으면서 얼굴을 쳐다보고 미소를 보였다. 열차가 떠날 시간이 가까워오자 두 아가씨를 데리고 부산 발 서울행 무궁화열차에 올라 좌석에 세 명이 어깨를 맞대고 나란히 앉았다. 열두 시간을 달려야 서울에 도착하는데 지루하더라도 참으며 창밖에 풍경을 바라보자고 이야기가 오갔다. 아가씨들은 그렇게나 오래 걸려요, 하면서 서로 태수 곁에 앉으려고 하더니 잠시 후 한 아가씨가 화장실 간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곁을 떠났다.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더니 두 사람이 앉아있는 사이에 끼어들려고 엉덩이를 내밀고 앉으려고 억지를 부리자 한 아가씨가 궁둥이를 힘주어 밀어버렸다. 넘어질 뜻하면서 일어나더니 태수가 앉아있는 왼쪽에 덥석 앉아서 여기가 명당자리라고 하면서 좋아서 깔깔거리며 웃는다.
사장은 재단부서나 재봉틀을 다루는 부서 재품검사 검사부서 등 각 분야에서 아가씨들에게 일을 잘할 수 있도록 부축일 수 있는지 태수의 눈동자를 보면서 조용히 물었다. 태수가 긴장한 느낌이 들어 사장은 유머러스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수탉이 이 동네 저 동네 암탉을 다 품어보더니 피곤한지 그늘에 누워 쉬고 있는 닭에게 오리가 다가와 물었다. 수탉아! 그토록 물불을 가리지 않고 올라타더니 피곤해서 누웠구나하고 안타까워했다. 수탉은 잔소리 하지 말고 조용히 해라, 하늘에 날고 있는 매를 꾀려고 노리고 있으니 가리지 말라고 부탁했다. 어서 비켜달라는 부탁의 말을 전했다고 하던데 태수도 그와 조금도 다를 바 없구나 하면서 껄껄거리고 웃었다. 사장은 역시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더니 태수반장이 다를 바 없다고 하면서 웃는다. 바람둥이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리 지키고 품위를 갖추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덧붙였다. 태수는 빙그레 아무런 말도 못하고 빙그레 웃는다.
이 동네에서 활동하는 태수에게 아가씨가 모자라 이웃동네까지 진출하여 이틀이 멀다하고 한 아가씨씩 품어보는 재미에 흠뻑 빠졌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인가 하고 사장이 물었다. 태수는 웃으면서 사람마다 체질이 달라서 치솟는 성적인 에너지를 아무리 참아도 별수 없으니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은지 되물었다. 사장은 웃으면서 사업에 관한 이야기는 가능하지만, 연애에 대해서는 반장에게 배우고 싶다고 태수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태수는 쑥스러운 듯 고개 숙이고 멀뚱하게 다른 방향으로 쳐다보고 섰다. 사장은 자리에서 일어날 때 허리를 앞으로 꾸부리고 엉덩이를 들고 의자에서 앞으로 몇 발자국 걸어 나왔다. 태수와 함께 재내시스 승용차와 함께 기사가 기다리는 현관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태수는 뒷문을 열고 사장이 승차하여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잠시 후 재내시스 승용차 뒷좌석에 앉자 태수는 문을 닫고 앞으로 가서 조수석 문을 열고 안으로 들러 의자에 앉았다.
운전기사는 승용차를 운전하여 운전면허시험장을 지나 광안대교위로 시원하게 달려갈 때 사장과 태수는 차창밖에 보이는 요트들의 나들이를 구경한다. 광안 대교를 지나 수영강변로로 빠르게 달려가면서 기사는 어디로 모실까요? 하고 물었다. 사장은 소고기로 유명세를 타는 철마 불고기 단지로 가자고 했다. 태수는 달리는 재내시스 승용차에 앉아 차 창밖으로 내다보면서 스쳐가는 자연의 풍경이 너무 좋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고급 승용차는 도시고속도로와 만나는 시점에서 조금 더 가다가 우회전하여 철마 쪽으로 다렸다. 터널을 지나 철마 쪽으로 빠져 불고기로 유명한 한정식 식육식당으로 들렀다. 고택처럼 지워진 집에는 한국의 전통적인 가옥으로 지붕은 검정색갈로 만들어진 토기와로 덮였다. 넓은 마당에는 불고기 먹으려고 찾아온 손님들이 몰고 온 차량이 여러 대가 주차되었다. 그 언저리에서 기사가 차를 멈추자 조수석에 앉은 태수가 먼저 내려서 뒷문으로 다가가 문을 열어 사장이 내릴 때까지 기다렸다. 사장이 차에서 내려 식당으로 들어갈 때 태수도 그림자를 밟으며 함께 동행 했다.
사장과 태수는 음식점 홀 안으로 지나 작은 방에 들렀다. 방에는 두터운 방석이 있어 테이블 앞에 여러 개가 놓여서 하나를 깔고 자리에 편안하게 앉았다. 주변에서 불고기 굽는 냄새와 소리가 입맛을 돋우며 군침을 돌게 한다. 사장이 편안하게 자리 잡고 앉는 모습을 보고 태수도 그 언저리에 앉으면서 사장의 눈치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불고기집 서빙 아가씨가 무엇을 주문하겠는가 하면서 메뉴판을 내밀었다. 갈매기살로 주문하고 사장의 얼굴을 바라보아도 아무런 말이 없어 조용히 기다렷다. 불고기판을 가져와 갈매기살을 가득하게 펼쳐놓고 익어갈 때 태수는 왕소금을 엄지와 인지 손가락으로 잡고 눈짐작하여 간을 맞추었다. 불고기를 충분히 익혀가면서 양면으로 놀놀하게 빛깔 좋게 구웠다. 사장은 태수가 구워주는 고기가 더욱 맛있겠다고 하더니 젓가락을 잡고 소고기를 맛보며 참으로 맛깔 난다고 했다. 상치에 익혀진 갈매기살과 마늘 게다가 잘라진 고추토막을 넣고 쌈장을 추가하여 입에 넣었을 때 양쪽 볼때기가 볼록하게 튀어나왔다. 한참을 맛나게 먹느라고 고기가 언제 없어졌는지 3인분을 먹어도 모자라서 다시 2인분을 더 시켰다. 태수는 사장덕분에 갈매기살을 아주 맛나게 양껏 먹을 수 있어 너무 좋아했다. 기사는 홀에 앉아 갈비탕을 먹으면서 음악에 취하는 모습이 열린 문을 통해 훤하게 보였다. 사장은 유머러스한 말로 이어가면서 서로 웃는 얼굴로 술잔을 높이 들었다. 원샷 하고는 테이블에 툭하고 잔을 놓더니 곧바로 한잔 더 하자며 잔을 들 때 태수는 술병을 들고 잔에 술을 팔십 퍼센트 정도 채웠다. 태수와 함께 얼굴을 마주 보고 앉아서 반주(飯酒)로 시원소주를 마시며 제품생산에 대해 진지한 대화는 오래도록 이어졌다. 사장은 태수에게 수출물량 생산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하지 않겠다며 술잔을 높이 들었다. 시선은 술잔에 주시하고 웃으면서 잔을 부딪칠 때 회사를 위하여 일해 달라며 파이팅을 외쳤다. 태수도 사장의 기분이 좋도록 최선을 다해 비위를 맞추어 주점에서 행동을 같이 했다. 사장은 태수에게 회사에서 믿을 사람은 생산과 반장뿐이라고 호평까지 늘어놓으며 이야기를 이었다. 바람둥이라서 여직원을 잘 다루겠다는 둥 애매한 말만 자꾸 늘어놓던 사장은 태수반장에게 특별히 부탁한다며 말을 이었다.
각 부서마다 팀장 아가씨를 설득하여 부지런히 일할 수 있도록 설득할 수 있는지 묻는다. 태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가씨들을 타일러서 일을 열심히 하도록 부탁하겠다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수출할 물량이 부족하니 어떤 방법을 서더라도 생산실적을 올려주면 대가를 충분히 지불하겠다는 사장의 답답한 심정을 틀어놓았다. 태수는 팀장들과 어울려 열심히 노력해 보겠다고 말은 쉽게 했지만, 사실은 엄청나게 어려운 고민에 빠져들었다. 오찬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온 사장이 차에서 내릴 때 태수의 어깨를 다독이며 용기를 가지라고 충고한다. 태수는 웃으면서 네 그렇게 하겠다고 말은 했지만, 모텔에 들락거리지 않은 아가씨는 말을 잘 듣지 않았다. 생산실적을 많이 올리기 위해 온갖 방법으로 여러 가지 기획과 구상도 생각해보았다. 아가씨들은 잠시의 틈만 있으면 모여서 수다로 시간을 녹이며 회사 일을 대충해온 버릇을 갖고 있었다. 태수가 일찍 출근하여 늦게 퇴근하면서 일일이 간섭하면서 아가씨들의 버릇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태수가 아가씨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존재라서 아가씨들은 아이콘이라고 별명까지 지어서 불렀다. 생산 반장은 어떤 요구라도 낱낱이 들어주면서 여직원들의 기분을 돋웠다. 태수는 아가씨들에게 아이콘이라 불리면서 일하는 장소마다 웃음을 자아내게 하여 작업장 분위기가 아주 좋아 아가씨들에게 인가가 고도로 상승했다. 화합을 다지기 위해 남녀의 모임도 자주 만들어 가족적인 분위기로 일터를 만들었다.
태수가 멀리하던 아가씨까지 모두 포용하니 작업장의 분위기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아가씨들은 항시 자기 일처럼 열정을 쏟아 노력하는 모습에서 생산실적은 급속도로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월말 통계에서 수출한 물량이 남아돌자 사장은 태수에게 고마움을 심리적으로 보답하겠다고 약속했다. 태수의 인기가 올라가자 아가씨들도 덩달아 좋아하면서 태수에게 회식하자고 부추겼다. 퇴근 시간에 분위기를 보면서 회식할 때 아가씨들은 태수를 친구처럼 만만하게 대하면서 축하주를 권하기도 했다. 아가씨들은 태수를 헹가래로 높이 던져 올리면서 환호하는 느낌으로 고성으로 소리 지르기도 했다. 태수가 기분이 좋아 웃음을 참지 못하고 허허야고 껄껄거렸다. 그의 날마다 개인적으로 가정방문도 빠뜨리지 않고 찾아다니며 경사나 우안에도 함께했다. 태수는 직원들의 가정환경을 알아보려고 여직원을 개인적으로 만나 집으로 동행했다. 집에 찾아간 태수는 직원의 부모에게 큰절로 인사하고 아저씨에게는 더욱 반갑다며 오른손을 마주 잡고 아래위로 한참동안 흔들었다. 아저씨는 무슨 일인지 의아해 하면서 사윗감이라도 되는지 물었다.
“내 딸을 사랑합니까?”
“아니 그게 아니고 직원들의 사기를 돋우려고 합니다.”
“총각 같아 보이는데 친구 한사람 소개해주면 좋겠다.”
“중매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딸이 나이가 들어가니 걱정입니다.”
“인연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어요. 곧 되겠지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태수는 직원의 부모에게 좋은 일이 있기를 부처님과 하느님께 기도 올리겠다고 웃으며 말했다. 직원 부모에게 건강하게 지내라고 하고는 집밖으로 나왔다. 아가씨의 아버지는 대문 밖에까지 따라 나오더니 총각 같은 사내가 있으면 중매를 부탁하자고 안타까움을 전한다. 태수는 아저씨와 하직 인사하고 혼자 걸었다. 중매가 얼마나 어려운지 참으로 기이하다며 알다가도 모르는 일이 중매라고 중얼거리며 걸었다. 외동은 외동끼리, 맏이는 맏이끼리, 양인은 양인끼리 아무리 조건이 좋아도 부모는 대리만족할 뿐이다. 서로 만나보고는 절대로 부부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당사자들은 단번에 알게 된다고 했다. 중매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음양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이해시켜야 만남을 주선할 수 있다고 했다. 저물어 가는 저녁하늘엔 붉은 노을이 눈을 부시게 하지만, 아가씨의 아버지는 혼례를 시키지 못해 애간장이 타는 듯하다. 혼자 걸으며 비 맞은 중처럼 중얼거리며 골목을 나와 버스정류장으로 걸었다. 길가에 가로등은 하나 둘 환하게 불을 밝히지만, 세상엔 먹물 같은 어둠이 빠르게 카턴을 친다.
가정방문 마치고 집으로 향하여 터벅터벅 발걸음 옮기면서 깊은 상념에 젖었다. 태수는 직원의 절반이나 되는 가정을 집집마다 둘러보아도 모두가 하나같이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연탄불이 꺼져가는 느낌을 체험했다. 가정방문을 마치고 집에서 나오면서 여직원에게 어깨를 다독이며 몇 장의 연탄이라도 사라고 돈 몇 푼을 주었다. 가난하게 살아가는 그 탁한 심정을 충분히 위로하고 집에서 나왔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집집마다 생활상을 둘러보고 너무나 딱해 태수의 월급을 쪼개고 또 나눠서 집집마다 조금씩 다 갈라주었다. 직원들은 그 후부터 태수에게 고마움을 전하려고 회사에서 잠시도 쉬지 않고 열정을 쏟아 일하면서 생산실적을 많이 올렸다. 사장은 갑자기 생산실적이 넘쳐나자 비서를 통해 알아보라고 했다. 비서는 점심시간에 식당에서 여직원과 나란히 앉아 생산 실적이 좋은 이유를 물었다. 여직원은 사실대로 낱낱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어 비서실 아가씨에게 이실직고 했다.
태수는 직원들의 가정방문을 대다수 마치고 곰곰이 생각했다. 회사에서 주는 상여금보다 태수가 여직원에게 직접전하니 열배의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태수는 사장을 면담하기 위해 비서실에 들러서 아가씨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생긋이 웃었다. 아가씨는 무슨 일로 오셨나요? 하면서 태수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더니 얼굴을 붉히면서 어쩌면 이토록 멋지게 생겼을까 하면서 넋을 잃었다. 한참을 기다린 후 정신을 차린 후 면담이 접수 되었다며 안으로 들라고 아가씨가 공손히 말했다. 사장실로 들기 전에 비서실 아가씨의 손을 잡고 고맙다고 했다. 아가씨가 영광이라고 하면서 휴일에 커피대접 하겠다고 덧붙였다. 태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꺼이 승낙하고 있다 보자고 하면서 사장실로 들어갔다.
사장은 태수를 아주 반갑게 맞아주면서 소파에 앉으라고 권한다. 태수가 네 하고는 소파에 엉덩이를 먼저 내리고 가볍게 앉아서 사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장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직원들에게 용기를 불러주었는지 궁금하다며 태수에게 원인을 물었다. 사실은 그냥 말로만 했더니 행동에 옮기지 않아 개개인의 가정방문에서 친밀성을 가지려고 부모를 만나 편안하게 대했다고 전했다. 태수는 대화하면서 크고 작은 일에 함께하겠다고 약속하니 아주 좋아하더라고 했다. 집에 우안이나 경사가 있을 때는 반드시 불러달라고 부탁도 빠뜨리지 않았다고 사장 앞에 이실직고 했다. 몇몇 집을 방문하고 대화했을 때 대문은 낡아 삑 하는 소리 나지만, 사람들은 청순한 마음으로 대화에 응하더라고 했다. 딸을 맡긴 아비의 마음은 항시 불안했는데 이렇게 찾아와 편안하다고 말해주니 안정감이 느껴진다며 기분이 아주 좋다고 미소를 보이더라는 말도 덧붙였다. 사장은 태수의 입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조리 있게 말도 잘한다며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태수는 직원들의 가정에 이집 저집으로 들러 보고 느낀 점을 사소한 이야기까지 한마디도 빠뜨리지 않았다고 이실직고 했다. 태수는 어른들과 대화에서 여직원들과의 친밀감이 부족하다는 느낌에서 생각을 달리했다. 회사에서 아가씨들에게 일을 시킬 때 내 가족처럼 미소를 보이면서 부드러운 인사말로 먼저 전했다. 우리 함께 부지런히 일하자며 수고 한다는 격려의 말도 빠뜨리지 않았다. 사장은 빙그레 웃으며 수고 했으니 퇴근하고 함께 저녁 먹으로 가자고 권했다. 태수는 사장의 말에 무조건 따르겠다고 했다. 음식점에 마주 앉은 태수는 사장의 말에 주눅이 들어야 하는데 태연하게 연출하면서 친구처럼 만만하고 자신 있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태수가 가정방문이나 개인적인 만남에서 애정으로 대했던 이야기와 아가씨들을 유혹하여 일의 능률을 올렸다고 낱낱이 보고 하듯 털어놓았다.
태수가 회사에서 작업보고서를 제출할 때 이렇게 어려운 사실을 알렸다. 대다수 직원의 가정방문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직속상관에게 알렸다. 아가씨들은 회사 일을 내 일처럼 열정을 가지고 일에 임했다. 모두가 열심히 일하는 덕분에 회사에서는 수출물량을 충분히 확보해놓았다. 생산과장은 좋은 이미지를 남겼다고 회사 간부들의 회의에서 태수의 생각을 발표했더니 모든 중역들이 아주 좋아한다. 이런 이야기의 사실을 사장이 알고 업무시간에 태수를 불렀다. 태수는 미소를 머금고 환한 얼굴에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사장 앞에 태연하게 다가섰다. 사장은 태수에게 고맙다며 금일봉을 수고비로 전하면서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희망적인 말을 남겼다. 태수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주 궁금하여 아무리 생각하고 온종일 머리를 굴려도 답을 찾지 못했다. 며칠이 지나자 총무과장이 불러 사무실에 들렀더니 진급을 축하한다며 반장에서 계장으로 발령이 났다고 알려주었다. 이제야 화두를 풀었다고 태수는 얼마나 기분이 좋았으면 과장의 손을 잡고 몇 번이나 감사하다고 고개 숙였다.
태수는 진급해도 타고난 버릇은 고칠 수도 없고 바꿀 수는 더더욱 없었다. 태수는 콩 심은데 콩 난다는 옛말이 떠올라서 빙그레 웃었다. 함께 모텔로 드나들던 여자 직원에게 농으로 이렇게 말했다. 다른 회사 친구가 그토록 예쁘다고 자랑만 하지 말고 구경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여직원이 친구를 소개해주면 내가 개밥에 도토리처럼 따돌림 받을 것이 번하다며 극구 사양하겠다고 한다. 아가씨는 태수에게 비웃기라도 하듯이 왜 결혼하여 함께 인생을 즐기고 살면 될 텐데 바람만 피우려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며 아쉬움을 털어놓는다. 인연은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져 있으므로 아무나 속궁합이 맞는다고 부부 이연이 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양극과 음극이 만나야 하나의 완성된 물체가 이루어진다. 우리는 서로 음인이기 때문에 속궁합은 아주 잘 맞으나 하나의 형태를 갖출 수 없는 미완성 작품으로 남아야 한다. 억지로 맞추면 머지않아 깨지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태수는 악착같이 달라붙으려는 아가씨에게 연애와 결혼에 대하여 충분히 알아듣도록 설득할 때 여인의 얼굴이 붉어지도록 언급했다.
퇴근 시간을 기다리는 태수의 얼굴엔 언제나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태수는 보통 사람과 아주 다른 체질을 가진 유명한 바람둥이다. 덩치는 작고 못생겼지만, 기이하게도 아가씨들이 탐내는 모습에서 사내들은 웃지 않을 수 없다. 길이는 짧아도 어깨가 떡 벌어지고 개미허리처럼 날씬하기 때문이다. 아가씨들이 몹시 좋아하고 따르므로 서로 질투심에서 언성을 높이는 일이 잦았다. 태수는 근무시간에 예쁜 아가씨가 먼저 인사하고 데이트하자고 말하면 망설임도 없이 미소를 앞세워 기꺼이 승낙한다. 오늘 만난 이 아가씨도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태수의 외모에 매료되어 데이트하면서 고혹적인 말과 유머러스한 이야기에 본의 아니게 녹아들었다. 태수는 상대의 심리를 이용하여 감정을 자극하여 거리감을 최대한 좁혔다. 편안하게 대할 수 있도록 배려하므로 아가씨가 태수의 질문에 순순히 응하다가 꼬임에 넘어가 조용한 모텔 방에서 함께 잠들었다. 밤이 깊어 고요하고 적막은 깊어가고 있었지만, 아가씨는 어떻게 갈까 고민하고 걱정했다. 아가씨는 생각다 못해 태수를 깨워 집으로 가자고 부탁했다. 태수가 눈을 비비며 몸을 돌려 일어나 샤워장으로 들렀다. 아가씨는 몸과 마음을 다 주었다고 결혼할 생각으로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자고 가다가 카페에 들어 쉬었다 가자고 한다. 밤이 늦어 카페에도 문을 닫았으니 다음에 만나서 이야기 하자고 아가씨의 마음을 달랬다. 아가씨의 시무룩한 얼굴은 심각한 표정으로 굳은 느낌이었다.
바람둥이 태수는 이해심은 태산 같으나 책임감은 아주 적다. 아가씨와 연애하면서 임신했다고 달라붙은 아가씨가 한두 명이 아니었다. 그 어려운 사건을 어떻게 처리 했는지 무사히 해결하고 회사에 떳떳하게 출근하는 모습을 총각들은 기이하다고 이구동성으로 수근 거린다. 새로 입사한 비서실 아가씨가 달걀처럼 갸름한 얼굴에 눈꼬리가 아래로 쳐져 아주 순한 모습의 이미지를 가졌다. 게다가 입술이 볼록하여 속궁합이 아주 잘 맞겠다는 느낌에서 태수는 눈을 떼지 못한다. 어느 날 퇴근 시간에 어쩌다 운이 좋아 아가씨와 맞닥뜨릴 때 예쁘다고 부추기며 저녁 같이 먹자고 제의했다. 아가씨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기꺼이 승낙하고 태수의 의견에 따랐다. 거리감을 두었던 처녀와 총각이 갑자기 남매처럼 가까워진 이유를 아가씨는 웃으며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말한다. 인연은 이루어지는 것이지 만들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사실이다. 예쁜 아가씨는 연인이라 생각하고 처음 보았을 때부터 아주 가깝게 지내려고 노력했기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태수가 예쁜 아가씨를 보고 마음이 끌려 무엇이든 하고 싶다는 소원을 다 들어주었다. 아가씨는 태수가 좋다고 하면서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마음의 문을 열고 결혼이라도 하려고 허심탄회하게 대화에 임했다. 아가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는 했으나 결혼하겠다는 약속도 받기 전에 가족이라고 생각한 것이 화근을 불렀다. 태수의 말만 믿고 모텔로 따라가면서 느긋한 마음에서 여유를 갖고 인정스러운 이야기도 덧붙인다. 성급한 생각에서 부부라 생각하고 팔짱끼고 발맞추면서 어디든 함께 다녔다. 두 번째 모텔에 들렀을 때 태수의 행동이 달라 보여 조심스럽게 물었다. 언제 결혼할 것인지 양가 부모를 한 자리에 불러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정성스레 물었다. 태수는 당장 결혼이라도 할 것처럼 말과 행동을 앞세웠다. 결혼한다는데 무엇이 두려워 못 가겠는가 하면서 모텔에 가자는데 동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수는 어떤 아가씨라도 순간을 즐기기만 하고 돌아 서버리는 파렴치한 사내였다. 노총각이 되어도 장가갈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아가씨를 만나도 성적인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순간을 즐기고 살았다. 아무튼 태수는 여복이 많은 사내임은 누가 보아도 확연히 알 수 있다. 태수와 함께 수년 동안 사랑에 깊이 빠진 생산부서에서 일하는 아가씨가 임신하고 말았다. 아가씨는 결혼하자고 한 말을 진심으로 믿었기에 다른 아가씨와 섬싱이 있어도 충분히 이해하고 태연하게 행동했다. 모텔 방에 누워서 배가 불러온다고 하면서 결혼할 날과 예식장을 찾아보고 의논하자고 해도 태수는 모른 체하면서 고개 돌렸다. 아가씨는 결혼을 재촉하지만, 태수는 남의 일처럼 건성으로 대하고 말았다. 아가씨는 태수를 너무나 믿고 따랐으나 순간을 즐기고 돌아 서버리는 모습이 너무나 미웠다. 아가씨는 태수가 멀어져가자 삶의 의욕을 잃고 방황하다 마지막으로 생각을 달리했다. 아가씨는 부모가 임신 사실을 알면 집에서 쫓겨날 처지가 확실하였기 때문에 죽음을 무릅쓰고 태수에게 매달렸다. 태수를 만나서 대화로 결혼할 날짜를 잡으려고 했으나 낫은 사람처럼 대하는 태도에서 죽이고 싶은 심정이라고 한숨을 쉬면서 따졌다. 아가씨가 상황이 급해지자 태수에게 애원하고 간청했으나 말없이 돌아 서버렸다. 생각다 못해 퇴근 시간에 태수에게 억지로 카페로 가자고 하면서 곁에서 팔짱을 끼고 발을 맞추었다. 아가씨는 카페에서 태수와 나란히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심각한 이야기를 전했으나 태수는 건성으로 듣고 거짓말 같은 대답만 되풀이 한다.
아가씨는 태수의 손을 잡고 배에 갖다 대면서 배속에 우리의 이세가 자라고 있다고 자랑삼아 말했다. 우리 결혼식 올리자고 태수를 설득했으나 끝까지 들어주지 않았다. 생각다 못해 수개월에 걸쳐 매달리고 설득하고 해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아 아가씨는 피가 말라가는 심정이었다. 참다못한 아가씨가 점심시간에 태수의 팔을 잡아끌고 4층 옥상에 올랐다. 마지막 본다고 하면서 다시 대화로 화합을 요구했으나 먼 산에 불구경하듯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아가씨는 타협도 해보고 협박도 했으나 조금도 달라진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가씨는 한순간에 생각을 달리했다. 아버지에게 맞자 죽는 것보다 스스로 죽는 것이 현명한 생각이라고 판단했을 땐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한순간을 참지 못하고 앞에 서 있는 태수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치면서 책임지지 못할 일을 왜 했느냐고 큰소리치며 따졌다. 귀싸대기를 얻어맞고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멍청하게 서 있는 모습이 처량하고 불쌍하게 보였다. 태수는 아가씨가 무슨 말을 해도 남의 이야기처럼 들렸다. 아가씨가 옥상 난간에 매달여서 결혼을 허락하지 않으면 회사 앞마당으로 뛰어내리겠다고 허심탄회하게 말을 전했다. 태수는 설마 하면서 잡으려고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먼 산에 불구경하듯 보고만 있었다. 아가씨는 배신당하는 서러움이 북받쳐 회사건물 옥상 난간에서 양팔 벌려 허공에 몸을 던졌다. 그때서야 아니 이 아가씨가 정말로 행동에 옮겨버리네, 이를 수가 하면서 뒤늦게 사람이 떨어진 곳으로 내려다보다가 계단으로 급하게 뛰어서 마당에 다다랐다. 회사에서는 갑자기 직원들이 아우성을 지르며 우르르 몰려들었다.
잠시 후 앰뷸런스가 왱왱거리며 달려오고 경찰차가 뒤따라 사무실 앞마당까지 들어왔다. 경찰차에서 내린 형사는 주변을 둘러보면서 사건의 원인을 분석하기 위해 곁에 서 있는 직원에게 물었다. 직원들은 두 사람의 사이를 알고 있었으나 그 순간을 보지 못해 아무도 말하지 않고 수건거리기만 했다. 한 아가씨가 평소에 태수를 짝사랑하면서 여러 번 만남을 요구했으나 이렇다 할 대답이 없었다. 바람둥이 태수를 어떻게 하면 골탕을 먹일까 고심하면서도 곁을 지날 때마다 눈길이 떠나질 않았다. 이런 사실을 조금도 알아주지 않고 곁에 있어도 눈도 돌리지 않아 미운 감정이 쌓여있었다. 태수를 짝사랑했던 아가씨는 고인과 둘도 없는 친구였으므로 서로의 내막을 훤히 알고 있었다. 결혼하지 않으면 함께 죽을 거라는 이야기를 들은 가끔 들었다. 경찰서에서 나온 모 형사는 고인의 주변에 모인 직원들에게 이 아가씨가 왜 죽었는지에 대해 질문했다. 태수를 짝사랑했던 아가씨가 모 형사 앞에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태수와 결혼하지 않으면 함께 죽겠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며 점심시간에 두 사람은 옥상으로 가더라고 했다. 친구가 의심스러워 옥상까지 미행하여 그들이 보이지 않은 곳에서 지켜보았다. 아가씨가 태수 앞에서 무릎 꿇고 앉아서 두 손 모아 싹싹 빌어도 고개 돌려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아가씨가 한참동안 밀고 당기면서 서러운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발버둥 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때 태수가 골치 아프게 하지 말고 죽으라고 했다.
를 밀었다며 살인자라고 덧붙여 이야기했다. 아가씨가 보는 앞에 태수가 애인처럼 가까이 지내던 여성을 데리고 갔기 때문에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태수는 어디에도 하소연하지 못하고 현장에서 형사에게 체포되었다. 수갑을 채우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며 사건을 인정하듯 형사의 말에 순순히 따르면서 경찰차에 올랐다. 경찰서로 간 태수는 진술서를 쓰고 경찰서 내에 보호실에 감금되어도 가족들은 아무도 몰랐다. 몸에 모든 것을 압수당하면서 전화기도 빼앗겼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연락이 차단되었다. 태수는 주례교도소에서 며칠이 지나자 죄질이 나쁘다며 청송교도소로 이송되었다. 태수는 수년 동안 햇빛을 보지 못하고 교도소에서 독방에 갇혔다. 수감한 지 5년이란 긴 세월에 형을 살고 교도소에서 풀려났다.
태수는 수개월에 걸쳐 옛날에 다니던 회사에 드나들며 복직을 요구했으나 끝까지 승낙을 받아내지 못했다. 몇 주가 지나자 회사에서 총무과장이 태수에게 전화로 연락을 했다. 내일부터 회사로 출근하라는 명이었다. 태수가 생산부서에서 원무과로 복직 발령이 났다. 부서를 옮겨 열정을 쏟아 일할 때 함께 일하던 직장동료가 의아해서 물었다.
“태수야 너는 보였다 안 보였다 하네.”
“응 몸이 좋지 않은 병원에 오래 있었다.”
“나 장가가서 아이가 네 살이다.”
“벌써 그렇게 되었나?”
“너도 장가가야지.”
“중매해 줄래?”
“아가씨를 몰고 다니는 총각이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가?”
태수는 고개 숙여 가느다란 목소리로 정신을 차려야지 하면서 말끝이 흐렸다. 교도소에서 풀려나 다시 회사로 돌아온 태수는 모두가 색다른 눈으로 바라보면서 대화마저 끊겼다. 회사로 돌아오니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칼날 같아 피할 곳이 없었다. 태수가 범죄자라도 아내 복은 있어 나이가 많아도 외모에 반한 신입사원 아가씨에게 장가간다고 소문이 났다. 아가씨는 태수에 대한 내막을 아무것도 모르고 오로지 외모에만 매료되어 쉽게 결혼했다. 아내가 된 후에 회사에서도 축하객이 거의 없어 너무나 이상하게 생각했다. 태수가 가정생활에 임하면서도 몇 개월 되지 않아 바람기가 발동하기 시작했다. 삶의 행로에서 억제해왔지만, 바람둥이 행각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가 개미허리만큼도 없었다. 아마도 유전인자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본인도 그런 이유를 잘 모르고 다시 바람을 피운다는 것이 참으로 기특한 일이다. 콩 심은 데 콩 난다는 말처럼 바람둥이 집안에 청순한 사내가 절대로 태어날 리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느낌이다. 더욱 이상한 것은 기이하게도 아가씨들이 왜 태수를 좋아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한다. 태수와 함께하길 바라는 여자의 심리를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투덜거렸다. 나이가 들어도 자존심은 생각도 하지 않고 오로지 여인과 함께 데이트할 땐 하루가 모자란다. 개인적인 즐거움은 연속적으로 이어졌지만, 가정생활에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직장생활 시작하면서부터 환갑에 가까운 날까지 가정에는 무관심하고 남의 여자와 인생을 즐기면서 세월을 보냈다. 아내는 남편의 좋지 않은 행동에 몇 번이나 주의하라고 했는데 말을 듣지 않아 결국엔 이혼하고 말았다. 인생은 태어날 때 가져온 복대로 살아야 한다는 데 태수는 여복이 있어 장가는 갔지만, 이혼당한 딱한 사내였다. 조선방직 주식회사에 근무하다 살인 협의로 인정받아 감호소를 다녀온 후로 아무도 인간답게 대하지 않으니 회사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태수는 운동화생산 공장인 태화 고무공장으로 직장을 옮겼다. 직장을 옮겼으니 조용히 살아보려고 여자와의 만남을 멀리하고 수십 년을 참고 살았다. 옮겨온 회사에서 태수의 내막을 잘 몰라 직원들은 살인범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 여인들은 태수의 외모를 보고 멋쟁이 같다면서 친구처럼 가까이 지내자고 부탁한다. 태수는 직장을 옮겼으니 마음 편하게 근무할 수 있었다. 친구들의 입소문에 들통이 날까 걱정되어 항시 조심스럽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나이가 들어도 돈을 벌어야하기 때문에 근무를 소홀히 할 수 없다. 태수는 삶을 위해 어떤 고난도 참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앞으로 어려운 고비가 닥쳐도 무조건 여자와의 만남이나 대화도 하지 않겠다는 집념이 대단하였다. 집에서는 가장이라는 책임감 때문에 가족을 위해 앞니를 물고 참았으나 아내마저 남편을 바람둥이라고 떠났으니 삶의 의욕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태수에 대한 정보를 잘 모르는 한 여인이 외모에 끌려들었다. 호감정을 느끼며 가까이하려고 노력하면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태수가 바람기를 발휘하면서 예쁜 여인과 함께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남다르지 않게 보였다. 마음에 드는 아가씨를 만나자 미소를 보이면서 모처럼의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가 대단하였다. 바람둥이가 여인을 꾀는 정성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태수의 눈에는 친구 하려고 접근하는 여인은 모두가 성적으로 갈증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다. 태수는 여인과 데이트하면서 상대의 의견에 아무런 조건 없이 무조건 따랐다. 이름난 공원이나 유명한 명소로 따라다니면서 청년도 아니고 이순을 넘어서는 사내가 여인과 연인처럼 지냈다. 개 눈에 똥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처럼 여인들은 태수의 내적 심정을 잘 모르면서 외모에 반해 좋아하면서 달콤한 말만 믿고 따랐다. 태수를 보는 여인들은 생김새와 달리 영혼에 끌려들어 그들이 보는 눈에는 보석처럼 빛났기 때문에 모두가 가까이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15년 가을이 시작되던 9월 초이렛날 정년퇴직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즐거웠던 직장생활이 한순간 멀어져 갔다고 생각하니 삶의 종말이 다가왔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직장생활 오래 하다가는 복상사로 죽을지도 모르는 상태였기에 차라리 정년퇴직이 잘된 일이라고 생각을 바꾸니 만사가 편안한 느낌이다. 무엇보다도 본인의 건강에 더욱 열정을 쏟아야 하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여인과 거리를 멀리하려고 아파트에 경비직을 선택했다. 태수는 막상 회사를 떠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하지만, 세월을 잡을 수 없어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기로 편안하게 생각했다.
사회인으로서 새로운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가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환갑에 가까운 나이지만, 아직도 여인들을 멀리하지 못하고 개인적으로 만나기만 하면 모텔로 들락거리며 세월을 보내는 일류 바람둥이 기질을 버릴 수 없다. 늙어도 여인들과 자주 모텔로 드나들면서 즐거움을 함께했기에 자꾸만 찾아와도 거절하지 못하고 친구처럼 대하면서 즐거운 대화로 이어졌다. 태수는 나름대로 여인들의 유혹에 넘어가는 척하면서 성적 갈증을 해결해줄 때 좋아죽겠다고 찬탄을 아끼지 않던 여자들에게 육체적인 보시로 즐거움을 함께하고 살았다.
부산 서면에서 직장생활 시작한 해수가 수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남매처럼 지내던 여직원들을 뒤로하고 떠난다고 생각하니 아쉬움에 눈앞이 캄캄하다. 여인들은 곁에서 떠난들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퇴근하면 함께한다며 조금도 슬퍼하거나 아쉬워하지 않았다. 한 여인은 태수를 절대로 멀리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어떤 환경에서도 변하지 않는 굳은 마음은 한결같았다. 회사에서는 그동안 수고 많았다고 태수의 정년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회식 자리를 만들었다. 태수가 회사를 떠나는 날 여직원들은 모두 회식 자리에서 태수에게 하직 인사로 미소를 보였다. 섬싱[something]이 많았던 여직원은 태수와 함께 술잔을 높이 들고 파이팅을 외쳤다. 회사 직원들은 대다수가 여자들이었으므로 남매처럼 대하던 바람둥이도 함께 고마움의 인사를 나누었다. 회사에서는 착한 직원이라고 감사패까지 전달했다. 회사에 다니던 시절에 여직원들의 집안에 크고 작은 우안이나 경사가 있을 때 일일이 찾아다니며 함께 울고 웃었던 결과였다. 사장은 개인적으로 집에 찾아가 우안이나 경사에 도움을 준 태수에게 고마움을 전하려고 상패를 전달했다. 여직원은 남매처럼 대해준 태수가 고마워서 회사에서는 본인의 일처럼 열정을 쏟았다. 이것뿐만은 아니었다. 성적으로 갈증을 느끼는 노처녀에게도 충분히 해결해 주었으므로 주치의 같은 느낌에서 인기는 아주 대단하였다. 직원들의 노력에 힘입어 생산실적은 평소보다 점점 많아졌으므로 태수는 사장에게 칭찬을 들었다. 태수는 여직원들과의 모임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로지 여직원들의 열정적인 노력에 회사가 좋아졌다고 과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장은 여직원을 잘 다룬 태수에게 공장장까지 진급시켰다. 태수는 그 고마움을 여직원들과 회식 자리를 자주 마련해놓고 함께 즐거워했다. 남매 같은 분위기에서 미련 없이 떠나려니 섭섭한 마음 감출 수 없어 자꾸만 뒤돌아 보였다. 다시 만나길 바란다는 인사말과 함께 손을 흔들었다. 다른 회사의 바람둥이 여직원이 그동안 수고 많았다고 격려와 함께 마지막 인사차 회식이 끝나고 다른 카페에서 만났다.
정년으로 퇴직한 태수가 집에서 대화의 상대가 없어 무료하게 세월만 보내고 있었다. 아내는 병원에서 노모를 병간호하느라 몇 달째 집에 오지 않아 외로움은 더욱 심해졌다. 오늘은 무엇으로 시간을 보낼까 고심하고 있을 때 친구로부터 주머니 전화기에 음성이 날아들었다. 친구가 서면에서 하얀 심리상담소를 운영하면서 오전엔 조용하다고 놀러 오라는 연락이었다. 평소에는 영업에 방해가 될까 가지 않았는데 오늘은 당사자의 부탁이라 무조건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어서 만나보고 싶은 마음에서 급하게 외출준비를 하고 대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왔다. 날씨가 생각보다 쌀쌀하게 느껴진다. 다 익은 소슬바람이 낙엽을 이리저리 끌고 다닐 때 체감온도는 차갑게 느껴졌다. 버스를 타려고 가는 골목길에 사람이 보이지 않으니 잎이 다 떨어진 나뭇가지처럼 앙상하게 느껴진다. 골목을 지나 버스정류장에 도착하니 아주머니가 미소를 보이며 고개 숙여 인사한다. 태수는 한쪽 눈으로 윙크하면서 오른손을 들어 반가움을 전하고 말없이 스쳐 갔다. 정류소에 도착하자 서면으로 가는 버스가 도착했다. 기다리던 사람의 다수가 버스에 올라갈 때 태수도 따라 올랐다. 버스 안에는 열댓 명이 타고 있어도 아무도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없어 조용한 분위기는 서면까지 이어졌다.
버스가 서면 정류장에 도착하자 태수가 가장 먼저 차에서 내렸다. 서면은 대다수 빌딩이 고층으로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한국빌딩을 찾아 17층에 올라 승강기에서 내려 1705호실에 친구가 운영하는 하얀 심리상담소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사무실에는 상담을 밭기 위해 중 노년의 아주머니들이 의자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는 상담에 깊이 빠져 태수 친구가 와도 대화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손만 들었다가 내렸다. 태수는 마지막 손님의 상담이 끝날 때까지 대기실 소파에 앉아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려 오전 상담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을 때 친구가 대기실로 나왔다. 태수는 오랜만에 상담자 친구를 만나 얼싸안고 웃으면서 인사를 나누었다. 친구가 손님은 기다림이 지루하다며 이곳에 나와서 이야기로 심심함을 달래주라고 부탁한다. 태수는 흔쾌히 승낙하고 출근하기로 생각을 굳혔다. 외로움을 털어버리고 심심한 순간을 해결하려고 찾아갔다가 취업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태수는 날마다 같은 시각에 어김없이 찾아와 환한 미소를 앞세워 친구의 사무실에 나타났다. 어떤 날에는 같은 버스 안에서 내담자를 만나 서면까지 가면서 상담이 이루어질 때도 있었다. 2016년 가을이 짙어가던 어느 날 버스를 타고 서면으로 가고 있을 때 상담실을 운영하는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은 예약한 손님이 없으니 오지 말고 쉬라는 연락을 반갑게 전해 받았다. 태수는 알았다며 서면에 내렸으나 사무실에 들어가지지 않았다. 초읍 유원지에 놀러 가려고 사직동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면 거리는 인도가 복잡할 정도로 오가는 사람이 많았다. 버스 정류장에 서서 사직동 방향으로 가는 차를 기다렸다. 등산객들은 대다수 어린이 대공원 앞에서 내렸다. 태수의 목적지도 같은 곳이라 그들과 함께 버스에서 내리려고 문 쪽으로 갔다. 등산로 입구에는 산에 오르는 사람들의 대기실 같은 장소에서 수많은 등산객이 북적거린다. 태수는 등산할 준비를 하지 않아 혼자서 터벅터벅 백양산 기슭 저수지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계단으로 올라 넓은 호수를 바라볼 때 그 넓은 저수지에서 물안개가 피어나고 있었다. 등산객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무어라 속삭이며 태수 곁을 스쳐 간다. 산에 오르는 사람이 너무나 많아 멈추지 못하고 뒷사람에게 떠밀려 파도처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올라간다. 태수는 호수 언저리로 정처 없이 걷다가 오솔길을 벗어났다. 호수 언저리에 빈 벤치가 보여 그곳으로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태수는 누구와의 약속도 없이 막연히 호숫가에 와서 의자에 앉아 망상에 젖었다. 회사에 다닐 때 수년을 사귀어온 아가씨와 모텔로 가자고 할 때 부끄러워 머뭇거렸던 시절이 잊히지 않고 떠오른다. 그땐 왜 그런지 이유는 몰라도 여직원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여직원 중 콧대 높은 한 아가씨가 평소에 태수를 짝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았다. 기회를 노리고 있던 아가씨가 어느 날 아양을 떨면서 태수 곁으로 다가와 기분을 돋우며 대화를 유도했으나 반갑게 맞아주지 않았다. 태수가 건성으로 대해도 밉지 않고 좋아서 자꾸만 대화도 하고 싶고 만나고 싶었다. 어느 날 할머니로 위장하여 태수의 그림자를 밟았다. 같은 버스를 타도 태수는 몰라보고 엉뚱한 곳으로 보고 앉았다. 태수가 내리자 아가씨도 얼른 뒤따라 내렸다. 태수는 낫은 할머니가 보여도 몰라보고 마을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가씨는 마을 앞 작은 구멍가게에서 태수와 나이가 비슷하게 보이는 한 남자를 만났다. 이 마을에 사는 태수라는 총각을 아는지 물었다. 친구라고 하면서 불러줄까 하고 되물었다. 아니요‘사랑한다.’ 말을 적은 쪽지를 내밀면서 이것을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총각은 얌전한 친구가 바람났네 하면서 껄껄거리며 웃었다. 의자에 홀로 앉은 태수가 지난날을 추억하면서 그때가 좋았다고 생각하니 미소가 절로 나왔다. 청년 시절엔 아가씨와 함께했던 생활이 좋았는데 노년기에 접어드니 대화의 상대가 없어 심심하기 그지없다고 구시렁거렸다.
태수는 호숫가로 걷다가 빈 의자에 앉아 망상에 젖었다. 누구라도 잡고 말할 수 있는 동지가 그리워서 의자에 앉아 젊은 한때를 추억했다. 그때 태수 앞으로 긴 머리칼을 흩날리는 여인이 스쳐 갔다. 그 순간 망상에서 벗어나 여인의 모습을 무심코 바라보았다. 혼자서 저수지로 나들이 나온 여인은 사십 대 초반으로 보였다. 여인은 무표정으로 호숫가로 걷더니 멀리 떨어진 곳의 빈 의자에 가방을 놓고 섰다. 나무 의자에 무엇이 있는지 두리번거리며 살피더니 손수건을 펼쳐놓고 엉덩이를 돌려 살며시 앉았다. 그 여인을 오래도록 지켜보아도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쓸쓸해 보였다. 혼자 망상에 젖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는 모습이 석불처럼 보였다. 태수는 한참 동안 여인을 바라보다 외모에 매료되어 호기심이 발동하였다. 혼자 앉아있는 모습을 아무리 보아도 대화를 나누고 싶은 생각이 앞섰다. 여인의 외모가 아주 매력적으로 보였기에 동석하고 싶은 생각이 행동으로 옮겨졌다. 몸매가 날씬한 데다 볼록한 가슴과 개미허리처럼 가느다란 모습이 모델을 방불케 하는 여인을 그냥 바라볼 수만은 없었다. 태수는 외모에 매료되어 이야기가 나누고 싶어 가까이 다가갈까 한참 동안 망설였다. 그녀는 긴 시간에도 불상처럼 움직이지 않고 호수만 바라보는 모습이 아주 궁금했다. 한참을 바라보다 여인 곁으로 살며시 다가가 곁에 앉아도 되는지 물었다.
그녀에게 말을 시켜도 아무런 반응이 없어 곁에서 머뭇거리다가 다시 물었다. 남자가 곁에서 말을 해도 두려움이나 반가움 따위는 간데없는 것으로 보였다. 아무리 말을 시켜도 대답은 하지 않고 호수만 바라보는 모습이 몹시 쓸쓸해 보였다. 옆자리에서 팔을 슬쩍 건드려도 무감각인 사람처럼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태수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심장의 박동 수가 빨라져도 서슴없이 인사말을 전했다. 나이가 환갑을 넘겨도 쑥스러움은 변하지 않았는지 떨리기는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태수는 여인에게 호수에 무엇이 보입니까? 하고 예기치 못한 질문을 던졌다. 메아리처럼 대답이 돌아올 거라고 믿고 반갑다며 인사말도 덧붙였다. 아무런 말이 없던 여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터벅터벅 발걸음 옮겨간다. 무심코 따라나선 태수는 그녀 곁에서 발을 맞추며 말을 하도록 유도했으나 처음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도 돌리지 않으며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안전한 길이라도 천천히 앞만 보고 걷는다. 고갯마루로 한참을 올라가더니 전망이 좋은 곳이라 생각하고 엉덩이를 돌려 의자에 내려놓는다. 태수는 여인 곁에 다가앉아 심리상담자라고 강조했다. 여인은 참아오던 입을 들썩거리며 망설이더니 태수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태수가 우울증은 대화가 필요하여 상담을 자주 나누는 것이 가장 좋은 치료 방법이라고 전했다. 말이 없던 여인이 생각을 바꾸었는지 혼잣말로 입을 비쭉거리며 구시렁거린다. 그녀에게 다시 말을 시켜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태수는 우울증은 말하지 않는 사람에게만 생기는 병이라고 덧붙였다. 그녀는 대답은커녕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여자 화장실 쪽으로 흔적을 감추더니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튿날 태수는 어제 앉았던 자리를 찾아 약속하지 않은 여인을 기다렸다. 저녁 무렵이 가까워지자 그 여인은 어김없이 그 자리에 나타났다. 태수는 말없이 여인의 행동만 바라보았으나 어저께와 조금도 다르지 않아 보였다. 약속도 아니고 혼자 오는 것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수는 다시 그녀가 앉은 자리로 다가가 살며시 곁에 앉았다. 인사말을 전하고는 왜 우울해하는지 그 이유를 물었다. 게다가 어저께도 말했듯이 심리상담자라고 한 번 더 알려주었다. 여인은 아주 귀찮은 듯 쳐다보고는 어디론가 자리를 옮기려고 떠난다. 따라갔으나 여인들 틈에 끼어 화장실 쪽으로 가는 모습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보이지 않아 처음 앉았던 곳으로 돌아왔다. 호숫가 의자에 앉아 망상에 적어 하루해가 저물어 저녁 하늘엔 붉은 노을이 해넘이를 알린다. 태수가 집으로 가면서 눈에는 왜 그 여인만 아롱거리는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튿날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 저수지가 있는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사무실에 출근할 생각은 져버리고 사흘째 초읍 저수지 쪽으로 가면서 왜 그녀를 찾아가는지 스스로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사흘째 기다리다 나타난 여인은 퇴근한 직장인 같아 보였다. 태수는 그녀 곁으로 다가가 인사마저 각설하고 말을 시켰다. 그토록 말이 없던 그녀가 드디어 태수를 쳐다보며 말문을 열었다.
“왜 자꾸만 귀찮게 하오?”
“병을 치료하려고요.”
“때가 되면 낳겠지요.”
“미루면 몹시 악화합니다.”
“…”
여인은 대화를 몇 마디 나누더니 목구멍을 닫아 버렸는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태수는 무엇 때문에 심기가 괴로운지 알고 싶다고 다시 물었다. 그녀는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든지 쳐다보지도 않았다.
태수를 외면한 여인이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멀리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겨간다. 태수는 놓치지 않고 따라붙어 옆자리에 다가가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여인은 끈질긴 사내의 성격을 참다못해 무거운 입을 열었다. 괴로운 심정이니 그냥 두었으면 좋겠다고 경고하듯 말한다. 태수가 이유는 몰라도 온종일 곁에서 조잘거리고 싶다며 환자를 치료하겠다고 되받았다. 웃음이 없던 그녀가 엷은 미소를 보이면서 다시 태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있더니 무거운 입을 열면서 잘 알았으니 제발 좀 따라오지 마세요. 하면서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혼자서 터벅터벅 산마루 쪽으로 올라간다. 태수는 동행자처럼 곁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발을 맞추며 걸었다. 여인은 쇠미산 동쪽 마루에서 고개 들고 명륜동 방향으로 푸른 산과 회색 빌딩이 즐비한 풍경을 바라본다. 태수는 귀찮아하는 그녀 곁에 앉아서 부디 말씀 좀 하시라고 사정하듯 말을 시켰다. 여인은 그토록 고집을 부리던 침묵의 시위를 끝내고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분이 말이 많아서 대화가 싫다며 자꾸만 혼자 있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게다가 더 말하고 싶지 않으니 제발이지 내 곁에서 멀어지라고 경고하듯 말했다. 심리치료를 하려면 말이 필요하여 원인을 묻고 있다고 반박했다.
여인은 끈질기게 달라붙는 태수에게 대하는 태도를 달리하려고 생각을 바꾸었다. 아저씨의 얼굴이 보기 싫지 않고 호감정을 느끼게 하는 스타일이라고 미련을 남겼다. 게다가 바람둥이 같은 아저씨가 무지하게 싫다고 덧붙였다. 태수는 껄껄거리며 바람둥이는 구하려고 해도 어려울 텐데 잘 되었네요. 은근히 말문을 열어갈 듯이 미련을 남긴 그녀에게 같은 질문을 중언부언했다. 태수는 여인에게 질문했다.
“바람둥이 같은 사람을 싫어하세요?”
“네, 바람둥이는 질색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토록 고민하는지 알고 싶어요?”
“제발이지 혼자 있게 해주세요.”
“병을 치료하려면 말이 필요합니다.”
“……”
태수는 말을 더 이어보려고 질문도 하고 유도심리를 이용하려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속세를 떠나 머리를 깎은 사람처럼 고뇌하고 사색하는 모습이 아주 심각해 보인다고 덧붙였다.
가을이 익어가니 고추잠자리가 호수 위에 무리를 이루어 날아다닌다. 그때 소슬바람에 느티나무의 노란 이파리 한 잎이 여인의 무릎에 떨어졌다. 그녀는 한 잎의 나뭇잎을 주워들고 요리조리 살피면서 망상에 젖었다. 곁으로 다가온 한 사내가 인연이겠다는 느낌이 들어 생각을 바꾸었다. 며칠 동안 같은 자리에서 오랜 시간에 곁에서 함께 했더니 결국은 그녀가 스스로 고개 돌려 쳐다보며 말문을 열었다.
“아저씨 무엇 때문에 이토록 귀찮게 하오?”
“귀찮아하는 여인을 치료하려고 해요.”
“남자가 무서우니 곁에 오지 마세요.”
“무슨 말을 하더라도 반드시 치료할 거예요.”
“제발이지 떠나주세요”
“아니 반드시 낳게 할 거예요.”
불혹의 나이로 보이는 그녀는 몇 마디 말을 하더니 조용히 입을 닫았다. 한참의 침묵이 흐르더니 다시 말을 붙인다. 아저씨가 상담자 맞아요, 하고 의심을 확인하듯 얼굴을 쳐다보면서 말을 시켰다. 태수는 여인의 말에 한숨을 쉬며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태수가 네, 맞아요. 이유는 몰라도 세상살이가 그렇지 않다고 삶의 체험담을 말했다. 여인은 낫은 사내의 질문에 답하려고 고개 돌려서 대화할 의미를 보였다. 태수가 세상은 자연의 섭리처럼 평형을 이루어야 살아갈 수 있다며 여러 가지 예를 들었다. 야간에 어디서든 빛을 밝혀주는 전등도 음전기와 양전기가 합쳐야 불빛을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러하듯이 여자는 남자가 꼭 필요하다고 기본적인 상식을 알렸다. 음인과 양인이 만나서 하나의 가정을 이룰 때 둥지 안은 불빛처럼 환한 웃음이 넘쳐난다며 미소를 보였다. 태수는 여인에게 반세기를 살아온 경험담을 자상하게 들려주었다. 심리학을 전공하였기에 우울해하는 여성의 마음을 잘 안다고 덧붙였다. 내담자와 상담자는 빙그레 웃으면서 대화가 시작되었다. 여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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