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7일 가끔 뒤도 돌아보고 자주 옆을 보고
성인이 되살아서 나와 함께 산다면 어떨까? 성인 밑에 순교자 난다고 하는데, 사는 게 정말 그렇게 힘들고 불편할까? 그의 놀라운 금욕생활과 사사건건 잘못한 걸 지적하는 통에 그와 함께 있으면 움츠러들어 그와 마주치기 싫을까?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서민들은 나쁘고 악해서가 아니라 먹고 사느라 바빠서 율법을 다 지킬 수 없었거니와 수백 가지 율법을 잘 알지도 못했다. 그런 그들을 두고 율법도 모르는 저주받은 이들이라고 했다(요한 7,49). 그러나 실제로 성인 같은 사람이 나와 함께 산다면 참 편하고 좋다. 일상이 평화로울뿐더러 아프지 않게 스스로 내 삶을 뒤돌아보게 되고 희망할 수 없는 데서도 희망을 가지 게 될 테니 말이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셨다.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었다. 반면에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는 그들을 멀리했고, 세리와 죄인들도 당연히 그들에게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았을 거다. 그들이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이들이었다. 그들은 율법의 짐이 너무 무거워 그것을 아예 땅에 내려놓았다. 그 짐을 내려놓았다는 건 구원의 희망을 버렸다는 뜻이다. 어차피 해도 안 되는데 그냥 이렇게 살고 말지 생각하는 거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그들을 찾아 회개시켜 회복시키러 오셨다. 아버지 하느님이 당신 집이 가득 차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성직자 수도자 앞에서 주눅들 필요 없다. 세속에서 살았다면 그들도 그랬을 거다. 수도회 입회 전에는 특별하고 거룩한 사람만 평일 미사 다니는 건 줄 알았다. 지금은 하루에 두세 번 미사 봉헌하는 때도 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죄인이다. 행위보다 마음이 중요하다. 예수님을,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그 마음에서 비롯한 행위가 하느님을 기쁘게 한다. 마지막 날 하느님 앞에 서면, 그 옥좌 오른편에 앉아 계신 분을 발견한다. 나는 그분을 바로 알아봐야 하고, 그분도 나와 반갑게 눈을 마주쳐야 한다. 그리고 그분이 아버지 하느님께 귀엣말로 나에 대해 말씀하시는 걸 봐야 한다. 내가 그분을 몰라보는 것도 문제지만 그분이 나를 모른다고 하면...
먹고사는 게 아무리 바빠도 하느님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앞만 보지 말고 가끔은 뒤를 돌아보고, 시간 나는 대로 주변도 둘러봐야 한다. 아니 시간 날 때를 기다리지 말아야 한다. 대부분 남는 시간은 없게 마련이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해서 내 주변에 어려운 이웃을 찾는 게 좋은 습관이 되기를 바란다. 그렇게 노력하지 않으면 열에 아홉은 항상 앞만 바라보고, 그러는 이유도 모르고 마음만 늘 동동거리게 된다. 그래서 하느님이 가끔 나를 넘어뜨리셨다는 말이 생겨났을 거다. 넘어져야 뒤도 옆도 보게 될 테니까.
예수님, 주님은 하느님은 무섭고 어려운 분이 아니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제가 아니라 주님이 먼저 저를 부르고 찾고 다가오십니다. 하느님과 함께 사는 건 불편한 게 아니라 평화롭고 행복한 거라고 믿게 해주십시오. 세 분이 하나가 되는 완전한 사랑 안에서 살게 되는 희망을 더 크게 해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어머니처럼 하느님을 신뢰하게 도와주소서. 아멘.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