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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없는 여 살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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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펌 절대 금지)
9. 무덤 속에서 다시
그 벙커가 왜 그런 곳에 은폐되어져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언제 만들어 진 것이며 누가 무슨 용도로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아는 것이라고는 그 벙커가 엄청 깊다는 것, 대략 지하 6미터 정도로 내려가야 한다는 것, 위에서 폭탄이 터져도 안전하겠다는 것 정도다. 내가 그 벙커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지독하리 만치 센 담력이 뜻밖의 사고와 우연찮은 만남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최근 마을을 공포에 떨게 하는 괴담이 있었으니 그 이름도 무시무시한 '목 없는 여 살인마' 괴담이었다. 85년도쯤에 나온 동명의 공포영화가 있는데 그 영화의 제목에서 이번 괴담의 이름을 따 온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런 식의 괴담 타령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일본에서 넘어온 장난이 아닌가 싶다. 그 쪽 애들은 그런 장난을 꽤 즐기는 편이다. '입 찢어진 여자'니 '행운의 편지'니 '화장실의 하나코'니 '분신'어쩌고 하는 것이니 뭐니 참 많이도 만들어 낸다. 왜 그런 것들을 만들어 내는지 사회 심리학적 이유는 모르겠다. 뭐 나름대로 어떤 재미가 있으니 그러는 것이겠지.
"오늘 밤 뒷산 공동묘지로 가는 거야."
학교를 그만 두던 날 나는 아이들을 불러모아 놓고 그렇게 말했다.
발단은 명태 노인에 의해서였다.
늘 소주 병나발을 불고 다니며 마른명태를 뜯는 고주망태 노인이 있었다. 그 노인이 왜 그렇게 알코올에 절어 사는지에 대해서는 약간 들은 얘기가 있었다. 제법 잘 나가는 무역 회사의 중역이었던 그는 어느 순간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다. 그가 왜 회사에서 명예퇴직을 당했는지, 그의 아내가 왜 다른 남자와 살림을 차렸는지, 그의 딸이 왜 가출을 했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아는 바는 없다. 다만 그는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아가던 평범한 중년의 회사원이었다. 그에게만 고의적인 시련이 던져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그만한 고통의 짐을 안고 살아가고 있지만 그처럼 모든 끈을 놓아버리느냐 아니면 고통마저 무감각해져 참고 버티느냐의 문제는 개개인의 선택 문제인 것이다. 사실 이 생각은 내 생각이 아니라 옆집 아저씨의 생각이지만 나 역시 그 생각에 동의하는 바이다.
아무튼 노인은 대낮부터 자기 얼굴조차 못 알아볼 정도로 취해서 공동묘지를 배회했고 역시 같은 장소를 배회하는 아예 얼굴이 없는 귀신을 보았다고 한다. 그 노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드물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던 것이 그 괴담이 우리마을에 미친 영향력이란 모 여자 연예인의 섹스 스캔들보다 더 막강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괴담은 내 또래의 아이들 사이에서 그 빛을 더 발했는데 무슨 괴기영화 속의 살아 꿈틀대는 포도 넝쿨처럼 줄기에 줄기를 쳐서 하나의 완전무결한 도시 전설로 진화를 거듭하고 있었다.
"명태 노인 헛소리야 한 두 번이 아닌데 일일이 확인하러 갈 필요 있을까?"
은근히 겁을 집어먹은 녀석의 자신감 없는 말투였다.
나는 그 녀석을 향해 분명하게 말했다.
"가기 싫은 사람은 안 나와도 좋아! 오고 가고 기다리는 시간 다 합쳐서 길어야 두 시간이야! 그 시간 동안 브라운관 앞에 죽치고 앉아 연예인 같지도 않은 연예인들 우르르 몰려나와서 꼴같잖은 헛소리나 지껄이며 지들끼리 낄낄거리는 멍청한 쇼를 꼭 봐야겠다는 사람은 안 나와도 돼! 착하고 순진하고 예쁘면서 소신 있는 캔디 아류가 돈 많고 건방지고 성격 있지만 사실은 심성이 올곧은 테리우스 아류와 우연히 만나 싸우다가 정든다는 유치찬란하고 쿨한 척 하는 미니시리즈를 꼭 봐야겠다는 사람도 안 나와도 돼! 그리고 또 하나, 무서워서 도저히 못 가겠다 싶은 사람도 안 나와도 돼!"
모두들 질려버렸다는 얼굴을 하고선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네가 정한 그 한심한 기준 셋 어느 것에도 해당사항 없지만 그냥 가기 싫은 사람은?"
돌아보니 실실거리며 웃고 있는 유난히 긴 얼굴 하나가 보였다.
"멸치 네가 웬 참견이야?"
"네 멋대로 지어낸 별명으로 함부로 부르지 마."
"생긴 게 멸치 같은데."
"네가 멸치 얼굴 같은 것을 그렇게 자세히 관찰했냐? 비교 분석이 가능하게."
"분석씩이나 할 것 없이 그냥 척 봐도 넌 생겨 먹은 게 에누리없는 멸치야!"
"뭐? 이 자식이!"
멸치는 내 멱살을 잡으려 했고 그 전에 내가 먼저 그를 밀쳐서 넘어뜨렸다.
격분한 멸치가 주먹 쥐고 일어서서 나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만류에 가로막혔다.
나는 억울해하는 멸치에게 말했다.
"정식으로 한판 붙고 싶으면 오늘 밤 너도 나와!"
그날 밤 약속 장소에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정한 세 가지 기준 어디에 해당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네들은 야밤에 공동묘지를 산책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공동묘지가 있는 뒷산으로 오르려는데 밤 부엉이의 울음소리와 나뭇가지 사이사이를 헤집고 나다니는 바람의 웃음소리가 꽤 그럴싸한 공포 분위기를 조장하고 있었다.
묘지 근처에서 희끗거리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소복 입은 귀신이 공중부양을 하고 있는 모습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서 관찰해보려는데 근거리에서 나를 응시하는 듯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엎어놓은 밥그릇 같은 무덤들만 빼곡할 뿐 움직임을 보이는 물체는 없었다. 물론 저쪽 덤불 어딘가에 누군가가 몸을 숨기고 몰래 움직이고 있다면 나로선 알 턱이 없을 테지만.
희끗거리는 것의 정체는 꽤 무시무시할 법도 한 허수아비였다. 막대기에 걸어놓은 그것은 하얀 천에 가짜 머리카락을 얼기설기 붙여놓은 것이었다. 명태 노인은 이런 것을 보고 착각을 한 것인가?
그런데 어째서 이런 것이 이런 곳에 있는 것일까. 무덤을 지킬 허수아비가 필요한 것인가. 조금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 때쯤 무언가 다른 생각 하나가 급히 떠올랐고 그와 동시에 내 몸은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넘어지면서 돌아보니 내 예상대로 멸치가 웃고 있었다.
저 자식이 먼저 와서 허수아비 같은 걸로 나를 유인했던 것이다.
내 몸은 비탈길 아래로 쭉 굴렀다.
가시와 돌멩이에 손과 얼굴이 긁혔다.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하늘과 땅이 뱅글뱅글 도는 듯한 기분이 잦아들었을 때 나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보았다. 신나게 굴렀던 비탈길을 올려다보니 경사 60도는 되어 보였다. 내가 당하는 모습을 관망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멸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를 밀치고 그대로 줄행랑을 친 모양이었다.
60도의 경사를 오르기는 무리일 것 같아 다른 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시계를 보니 열 시 정각이었고 주위는 너무 어두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한 번씩 넘어지게 만들 정도였다. 실제로 나는 열 번 정도는 넘어졌고 마지막으로 넘어졌을 때는 손에 차가운 금속의 느낌이 와 닿았다.
"이게 뭐지?"
넘어진 상태 그대로 손바닥 밑의 갈색 철판을 확인해보았다. 녹이 암세포처럼 뒤덮여 있었지만 가장 자리 한 곳에 군부대 마크 같은 것이 찍혀 있었다. 주먹으로 철판을 두드려보니 퉁퉁 울리는 소리가 났다.
뭘까? 군 보급품을 묻어둔 것인가? 아니면 군자금?
거의 부식되다 시피 한 열쇠를 돌멩이로 쳐서 깨뜨렸다.
생각보다 철판은 무거웠지만 간신히 밀어냈다.
우물 같은 속이 드러났다.
어두워서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하기란 힘들었다.
지하 통로인가? 아니면 땅굴? 간첩이 파놓은 땅굴이라면 발견한 자에게 포상금이 내려질텐데.
부푼 가슴을 안고 집으로 돌아와 밧줄로 된 사다리와 손전등을 챙겨들고 다시 그곳을 찾았을 때 시간은 열 한 시 반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그냥 아무 것도 아닌 곳이었다.
밧줄을 타고 바닥까지 내려가 보았지만 특별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냥 세월의 흙먼지만을 간직하고 있는 6미터 깊이의 지하 벙커에 불과했다. 6·25때 대규모 폭격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대피소인가.
엄청난 보물이 숨겨져 있길 기대했지만 실망감에 앞서 어떤 묘한 기분이 나의 마음을 착 가라앉게 했다. 벙커의 문을 닫고 아래로 내려와 완전한 어둠에 몸을 맡기니 그곳이 나의 무덤인 듯했다. 무덤 같은 어둠, 무덤 같은 고요, 무덤 같은 적막, 무덤 같은 단절, 무덤 같은 허무. 그런 생각을 하니 마치 나의 육신과 영혼 모두가 풀어헤쳐져 그렇게 어둠 속을 떠다니고 있는 것 같았다.
어찌됐건 그곳은 사색을 하기엔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내 안의 나, 그 안의 나, 또 그 안의 나, 끝없는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나는 정말로 죽음을 맞이한 사람처럼 지난 19년간의 생을 주마등처럼 떠올려보았다.
백열등.
30촉 백열등이 그네를 탄다.
거미도 거미줄 그네를 탄다.
윙윙거리는 똥파리들의 날쌘 움직임, 파닥거리며 분가루를 날리는 하얀 나방들의 날갯짓.
벽지가 떨어져 나간 허름한 단칸방, 내가 태어난 곳.
나를 안아주는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이 느껴진다. 어머니의 숨결이 내 온 몸으로 전해진다.
어머니의 젖은 맛있다. 젖꼭지를 무는 느낌도 좋다. 그렇게 맛있고 그렇게 좋은 느낌을 이후로 가져본 적이 있던가.
나비.
창문으로 날아 들어온 나비.
봄기운을 날개에 담아 왔는가. 하늘하늘, 나비는 고운 자태를 뽐내며 다시 날아간다. 창문 너머 햇빛 찬란한 하늘 너머로. 방바닥에 뒹굴며 나는 그런 것들을 바라보고 있다. 창을 통해 부셔져 들어오는 눈부신 햇빛의 찬란함. 저 찬란함 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내리막길 위에서 내리막길 아래를 내려다본다. 내리막길 위는 산그늘이 져서 춥지만 저 아래는 햇빛이 들어 따뜻해 보인다.
저 아래 아이들은 개 모양의 장난감 차를 타고 다니며 논다. 말 모양의 장난감 차를 타고 다니는 아이들도 있다. 저런 것들을 타고 다니면 어떤 기분일까. 한 아이는 개 모양의 장난감을 타며 한 손에는 빵빠레를 들고 있다. 빵빠레가 철철 녹아 흐르는데도 먹지 않는다. 이해할 수 없다. 저렇게 맛있는 것을 왜 안 먹고 녹여 없애는지. 또 한 아이는 로봇 장난감과 딱지를 들고 있다. 그 아이는 이런 말도 한다. 나 대공원에 갔다 왔다. 그 말을 들은 다른 아이들은 뽐내기라도 하듯 나도, 나도를 외친다. 그런 곳은 어떤 곳일까.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고 꽃동산이 펼쳐진 곳일까. 가슴이 두근두근해질 만큼 멋진 곳이겠지.
늙고 커다란 황색 개 한 마리가 다가와 버드나무 그늘 아래에 엎드린다. 나는 주머니에서 망개 열매를 꺼내 먹으며 개를 쳐다본다. 개의 등에 올라타 본다. 개가 기겁을 하며 몸부림을 친다. 나는 넘어지며 얼굴을 긁힌다. 망개 열매들이 우르르 떨어지며 내리막길 아래로 굴러간다. 참 개 같은 기분이다.
바퀴벌레와 집게벌레가 기어다니는 방에서 상다리가 부서진 상위에 차려진 보리밥을 먹고 있다. 어머니가 시큼한 총각김치 조각을 내 밥 위에 올려놓는다. 나는 숭늉을 마셔가며 보리밥에 총각김치를 먹는다. 된장국을 먹으려는데 천장에서 떨어진 거미줄 한 가닥이 된장국 위로 낙하한다. 어머니는 그냥 젓가락으로 국을 휘휘 젓는다. 나는 거미줄이 녹아든 된장국을 먹는다. 보리밥도 시큼한 총각김치도 거미줄 된장국도 모두 맛있다. 왕 바퀴벌레 한 마리가 상다리가 부서진 상위를 기어다닌다. 어머니의 손이 파리채처럼 재빠르게 휘둘러진다. 왕 바퀴벌레는 쥐포처럼 납작하게 터져 있다. 어머니는 신문지 조각으로 잔해들을 쓱쓱 닦아낸다. 나는 그런 것을 텔레비전 보듯 감상하며 밥을 먹는다. 하지만 밥이 없다. 식욕은 아직 당기는데 나의 숟가락은 바닥을 긁고 있다.
찜통.
왜 그것을 그렇게 부른 건지는 알 수 없다. 알루미늄으로 된 20리터 짜리 대형 물통을 그렇게 부른다.
어머니와 나는 새벽 4시에 뒷산 약수터로 간다. 찜통과 1.5리터 짜리 물통 세 개를 들고서. 물은 고양이 오줌만큼 찔찔 나왔고 찜통 하나와 1.5리터 물통 세 개에 가득 받으려면 두 시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그렇게 물을 받으면 어머니는 묘기를 부리듯 찜통을 머리에 이고 1.5리터 짜리 물통 두 개를 각각 한 손에 든다. 나는 1.5리터 짜리 물통 하나를 양손에 바꿔 들며 산을 내려오는 내내 힘들어한다. 어머니와 나는 찜통 같은 더위를 느끼며 헉헉댄다. 그렇게 받은 물을 어머니는 누군가에게 판다. 돈을 받고. 주인댁, 건넛집 교장선생님 댁, 건너 건넛집 의사선생님 댁, 뒷집 새댁에게도. 그네들은 녹 맛이 나는 수돗물은 못 먹겠다며 어머니의 약수를 환영한다. 우리는 녹 맛이 나는 수돗물을 먹으며 새벽마다 그네들을 위해 약수를 뜨러 간다. 찜통에 1.5리터 짜리 물통 세 개를 들고서.
어머니의 물장사는 성공을 거둔다. 포장마차를 개업하면서 어머니의 물장사는 계속적인 성공가도를 달린다. 사실 정말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것인지는 모른다. 어쩌면 장사의 규모가 커진 만큼 빚도 커진 것일지.
머리카락을 중처럼 빡빡 깎은 나는 물장사를 하는 어머니가 싫다. 늘 기워 입는 교복도, 누군가가 쓰다 버린 학용품들도 싫다. 세상 만사가 다 싫다.
부응.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공부한다. 노름빚으로 도망간 아버지 얘기를 한다. 어머니가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한 것은 처음이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감당할 수 없는 노름빚 때문에 아버지는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나 더러 아버지처럼 도망 다니는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한다고 말한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서울대 법대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곳에만 들어가면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고 한다.
서울대 법대는 만능열쇠인가 보다.
새벽 세 시.
낡은 전등갓에 쌓인 먼지.
근거리에서 속삭이는 바퀴벌레, 거미, 나방, 그리고 모르는 벌레들의 속삭임.
두 시쯤에 돌아온 어머니는 죽은 듯이 잠을 자고 있다.
나는 좁은 다락방 앉은뱅이 책상 앞에 앉아 있다. 그냥 앉아 있다. 수북히 쌓인 책과 노트들을 바라보며 그냥 앉아 있다. 잠이 오는데 잠은 안 잔다. 그냥 앉아 있기만 한다. 공부를 안 하더라도 그래야만 할 것 같아 그러고 있다. 그리고 네 시가 되어서야 잔다. 지금 자면 두 시간 후에 일어나야 하는 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세 시간 자면 붙고 네 시간 자면 떨어진다고 하니 나는 어쩌면 붙겠구나 하는 생각도 하며 잠을 청한다.
전화벨 소리.
경찰서다. 어머니가 손님과 시비가 붙은 모양이다. 어머니는 발목을 다쳐서 잘 걷지를 못한다. 나는 어머니를 부축하며 경찰서를 나온다. 어머니에게서 술 냄새와 튀김 냄새가 난다. 어머니는 나더러 판사가 되라고 말한다. 꼭 판사가 되라고.
36등.
필요 없는 성적이다. 서울대에 가기에는. 판사가 되기에는.
나는 마을이 다 내려다보이는 내리막길 꼭대기에 있다. 오래 전 늙고 커다란 황색개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버드나무 그늘 아래 눕는다. 버드나무 잎사귀 사이사이로 하늘거리는 햇빛이 눈부시다. 황금빛 날갯짓을 하는 나비 같다. 손을 들어 그것을 잡아보려 한다. 잡힐 턱이 없다.
바람이 분다. 성적표를 갈기갈기 찢어서 바람에 날려보낸다.
집으로 돌아오니 어머니는 물장사를 하러 나가고 없다. 무덤 같이 컴컴한 방안이다. 헝겊 조각 같은 커튼을 친다. 창문에 내 얼굴을 비추어 본다. 얼굴이 잘 안 보인다. 주먹을 휘둘러 창문을 깨 버린다. 생각 만으로만.
친구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100일주 마시러 나오라고 한다.
친구녀석 하숙집에 가보니 소주 세 병에 새우깡 두 봉지와 참치 캔이 있다. 나는 거기에다 집에서 가져온 소주 두 병과 닭발 튀김 몇 개를 더한다. 넌 평소에도 그렇게 닭발하고 한 잔씩 하겠구나. 멸치 녀석이 말한다. 저 자식은 왜 데려 왔어. 내가 묻자 멸치는 누가 데리고 온 게 아니라 제 발로 걸어 온 거라고 항변한다. 잘 됐군, 안주 떨어지면 멸치 먹으면 되겠군. 멸치 녀석이 격분한다. 아이들이 멸치를 말린다. 다섯 병을 다섯이서 한 병씩 나눠 마신다. 머리통이 빠개지는 기분이다. 넌 대학 어디 갈지 정했니. 서로 서로 묻기 시작한다. 난, 서울대 법대 지원할거야. 내 말에 멸치가 박장대소를 한다. 소주병을 들었다. 아이들이 이번에는 나를 말린다. 녀석들은 이내 화재를 바꾼다. 어제 본 드라마 얘기, 쇼프로그램 얘기, 연예인 누구와 누구가 사귀고 있다는 얘기, 모 여가수가 상품적 가치를 잃자 소속사에서 누드집 제작을 강요했다는 얘기. 야, 그 소문은 들었냐. 목 없는 여 살인마 괴담. 누군가 화두를 던지자 불붙은 다이너마이트처럼 얘기들이 타들어 간다. 늦은 밤 어슥한 골목에 나타나는 얼굴이 없는 귀신. 목이 가득 든 커다란 가방을 질질 끌고 다니며. 한 손에는 엄청 큰 도살용 칼을 들고. 그거 다 헛소리들이야. 하지만 실제로 목이 잘려서 죽은 사람이 있다고 하던데. 아니 그 귀신에게 걸리면 그냥 사라져버린다던데.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사람들 기억에서 잊혀져 버리는 거지. 새끼들 주정하고 있네. 멸치가 독설을 실어서 말한다. 너희들이 직접 봤냐. 보지도 않고 그런 헛소문을 믿냐. 직접 보러 가볼까, 한번. 내가 제의한다. 명태 영감이 공동묘지에서 그 귀신을 봤다던데.
아이들 모두 입을 다문다.
외계인.
모두 외계인들이다. 나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고 그들은 나를 이해할 수 없다. 사실 나도 나를 이해할 수 없다. 나는 그들이 어디를 향해 가는지 모르고 그들은 내가 어디를 향해 가는지 모른다. 사실 나도 내가 어디를 향해 가는지 모른다.
지구과학시간이다.
선생님은 알아들을 수 없는 외계어를 하고 있다. 도무지 모르겠다.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지. 지구와 태양 사이의 거리를 구해보자고 한다. 그런 것을 어떻게 구할까. 이해할 수 없다. 외계인이다. 그러나 이해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도 외계인이다. 외계인이, 나를 지적한다. 뭐라고 외계어를 하며 답을 말해보라고 한다.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어 고개만 저었다. 외계인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노려본다. 그의 눈에는 내가 외계인인가보다. 몽둥이를 들고 나를 때리려 다가온다. 그 전에 나는 말한다. 그만두겠습니다. 그만 두면 될 일 아닌가. 나는 내 별로 돌아갈 것이다.
뚜벅뚜벅 걸어서 교실을 나온다. 아이들이 신기한 눈초리로 나를 본다. 저런 별종을 봤나, 저런 외계인을 봤나, 하는 눈빛이다. 복도를 걸어 계단을 내려간다. 텅 빈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을 나선다. 무언가 홀가분한 기분이다. 텅 빈 오전 거리의 눈부신 햇살이 그렇게 기분 좋은 것일 줄은 몰랐다. 그 옛날 어머니의 젖꼭지를 물던 그 때만큼이나 기분이 좋았다. 그런 기분을 느끼며 대로변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무언가를 찾으려는 사람처럼.
눈을 떴다.
나는 바닥에 반듯이 누워 있었고 가슴에는 십자가처럼 손전등을 꼭 쥐고 있었다. 손전등의 빛이 기력을 다해가고 있었다. 몸을 일으켜 보았다. 정말로 죽었다 깨어난 사람처럼 온 몸이 뻐근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러고 있었는지 궁금해 시계를 보니 열 두 시 정각이었다. 삼 십 분 정도. 그다지 오래 있었던 게 아니었다. 지나온 인생을 통째로 한 번 더 산 듯한 기나긴 느낌이었는데 실제로는 굉장히 짧은 시간이었나 보다.
밧줄 사다리를 타고 벙커 위로 올라왔다.
사위는 고요했고 세상은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어떤 변화가 있었다.
내가 지하에 있을 동안 지상에서는 무슨 일인가 벌어졌던 것이다.
산을 내려와 마을로 접어드니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처음에는 세일러복을 입은 여학생이었다. 여학생은 희미한 가로등 아래에 기대어 서서 지친 듯한 몸을 잠시 쉬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여학생은 얼굴이 없었다. 목이 잘려나가고 없었던 것이다.
저것이 말로만 듣던 목 없는 여 살인마인가?
그런 생각을 했을 때쯤 나는 거리 곳곳에 밤 고양이처럼 어슬렁거리는 그것들을 발견했다. 그것들은 모두 목이 잘려나간 시체들이었다. 그네들은 자신들의 목이 잘려나간 줄도, 자신들이 시체인 줄도 모르고 어기적어기적 제 할 일들을 하고 있었다.
세상의 종말인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계속>
첫댓글 ㅎㅎㅎ 대단하십니다. 언제나 이런 소설을 써볼지.... 아 글구요.... 어머니와 손님과 시비가 붙은 모양이었다. ->어머니와 손님이 시비가 붙은 모양이었다. 가 맞는 듯.....
"와"....라는 감탄사 밖에는.....^^
정말 존경스러운 ㅠ 재밌게 읽었습니다
허.. 정말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너무 재미있어요.!> ㅁ<)/ 제이슨님 건필하시구요- 다음편도 얼른얼른.ㅎㅎ
흑흑..ㅠㅠ 제이슨님 요새 또 못봐요ㅠㅠ 별이 너무너무 슬프네요ㅠㅠ 참! 저 알바 바꿨어요~ 글 너무너무 멋져요~^^
답글 주신님들 모두 감사합니다. 편안한 주말 되세요~!~~
아...심각하게 읽다가 그만 '멸치로 안주하면 된다'는 구절에서 웃어버렸네요...그 부분이 너무 웃기면서 멸치라는 학생의 얼굴이 자꾸만 상상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