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사이로 반딧불 떠다니는 저녁. 내가 그린 그림 속 어느 집에서 그녀는 초록 달개비를 키운다. 그림 속에서 흰 달이 떠오른다. 검은 밤이 펼쳐진다. 그녀의 집 앞 골목에 가로등이 켜진다. 밤이 오면 그녀는 내가 그린 침대에 누워 그림 밖 세상 어딘가에 있는 자신을 꿈꾼다. 그러던 어느 아침. 그림 속엔 아무도 없다. 그녀는 어떻게 그림 속에서 빠져나간 걸까. 내가 그린 달개비들을 그림 밖 세상에 옮겨심고 그녀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긴 장마 뒤 빠르게 번지는 달개비들로 무성한 늦여름. 울타리를 넘고 길을 건너 시소와 미끄럼틀을 휘감고 번지는 달개비들. 주차된 차를 휘감으며 쇳덩어리와 바퀴를 삼키고도 배가 고픈지. 식탁과 소파를 휘감고 번지는 잎들. 길고양이와 검은 개와 산책하는 사람을 휘감으며 퍼져나가는 무서운 잎들. 내가 그리고 그녀가 옮겨심은 달개비의 초록 잎과 그 잎끝에서 돋아 난 파란 꽃들로 뒤덮인 세상. 그 어딘가에서, 그녀는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외일보/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2023.04.19. -
누군가 머물렀던 자리에는 눈에 보이건 보이지 않건 흔적이 남기 마련입니다. 사람이 떠난 후에도 온기는 오래 남아 마음을 아련하게 하곤 합니다. 여자는 떠났지만 화자는 아직 그녀를 보내지 못했나 봅니다. 떠나버린 사람에 대한 그리움은 갈망이 되고 차츰 남자의 일상을 좀먹습니다. 자동차 안에서도 밥을 먹을 때도 여자를 생각합니다.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달개비 꽃처럼 남자를 둘러싼 세상을 휘감고 번지더니 마침내 슬프고 아름다운 “파란 꽃들로 뒤덮인 세상”으로 바꾸어 놓고 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