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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韓中日近現代史 원문보기 글쓴이: 정암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인 사라예보를 방문했다. 세르비아의 검은 손이 지원하는 청년 보스니아 민족주의 단체의 암살단 6명 쳬베코 포포비치(Cvjetko Popović), 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 Princip), 무함마드 메메드바시치(Muhamed Mehmedbašić), 네델코 카브리노비치(Nedeljko Čabrinović), 트리프코 그라베츠(Trifko Grabež), 바소 쿠브릴로비치(Vaso Čubrilović)는 대공의 차량 행렬이 지나가는 거리에 서 있었다. 카브리노비치가 차에 수류탄을 던졌지만 차를 놓쳤다. 근처의 군중 몇몇이 부상을 입었고,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차는 계속 움직일 수 있었다. 다른 암살단은 차가 빠르게 지나쳐 암살할 수 없었다. 약 한시간 후, 페르디난트 대공이 사라예보 병원을 방문하고 돌아올 때 길을 잘못 들려 우연히 프린치프가 서는 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프린치프는 권총을 발사해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그의 아내 호엔베르크 여공작 조피가 사망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내에서 사람들의 반응은 거의 무관심한 듯 가벼운 반응을 보였다. 역사학자 즈비네크 제만(Zbyněk Zeman)은 나중에 "이 사건은 거의 어떠한 인상도 주지 못했다. 일요일과 월요일(6월 28일~29일)에 빈의 군중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음악을 듣고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라고 전했다.
그러나, 사라예보 내에서는 오스트리아 정부가 세르비아 주민들에 대한 폭력을 하도록 부추겼고, 그 결과 사라예보의 크로아티아인과 보스니아인이 세르비아인 두명을 죽이고 세르비아인 소유의 건물을 불태우는 사라예보 반세르비아 폭동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포그롬의 특성을 갖추었다. 작가 이보 안드리치는 "사라예보에서 증오의 열풍이 불었다"라면서 이런 폭력 사건에 대해 말했다. 세르비아 민족에 대한 폭력 행위는 사라예보에서 뿐 아니라 현대의 크로아티아 및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영토에 위치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대도시에서도 일어났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는 유명한 세르비아인 5,500명을 수감하고 송환했으며, 그 중 700명에서 2,200명이 감옥에서 사망했다고 통계내렸다. 세르비아인 460명은 사형 선고가 내려졌고, 이슬람교가 지배적이었던 지역에서는 슈츠크롭스(Schutzkorps)라는 민병대 집단이 형성되어 세르비아인들에 대한 핍박을 시작했다.
사라예보 암살 사건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제국, 독일 제국, 프랑스 제국, 대영제국 간 1달 동안의 외교 기동으로 이끌어졌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의 관리(특히 검은 손 조직의 임원들)들이 이 사건과 관련되었다고 판단하고 보스니아 내에서 세르비아의 영향을 줄이기 위해 세르비아에게 의도적으로 전쟁을 자극할 10가지 요구 사항으로 구성된 7월 최후통첩을 보냈다. 세르비아가 10가지 요구사항 중 8가지만 수락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914년 7월 28일 전쟁을 선포했다. 군사역사가인 헤우 스트라첸은 "세르비아의 초기 모호한 응답에 관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행동에 차이를 주었을 것인지 아닌지는 의심해야 한다. 프란츠 페르디난드 대공은 그리 인기있는 성격은 아니였으며 제국은 그의 죽음에 그렇게 애도를 표하지는 않았다"라고 말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발칸 반도의 영향력을 넓히는 것을 내키지 않고 세르비아 왕국의 오랜 지원국이었던 러시아 제국은 7월 29일 부분 동원령을 명령했다. 7월 30일 러시아 제국이 총동원령을 내리자, 같은 날 독일 제국은 동원령을 발동했다. 독일은 베를린의 대사를 통해 러시아에게 12시간 내에 동원령을 해제하지 않으면 전쟁 상황이 올 것이라는 최후 통첩을 보냈다. 러시아는 동원령을 해제하는 것에 협상하자는 응답을 보냈다. 그러나, 독일 제국은 협상을 거부하고 1914년 8월 1일 러시아에게 선전포고했다.
독일의 전쟁계획인 슐리펜 계획은 러시아가 동부에서 진군하기 전에 프랑스 지역을 빠르고 대규모로 침공해서 서부를 미리 제압한다는 전략이었다. 따라서, 러시아의 동원령 선포와 동시에 독일 제국은 프랑스에게 중립을 유지하라는 요구를 보냈다. 프랑스 내각은 즉시 군사 동원령을 내리라는 군의 압박에 저항하여 사건을 막기 위해 프랑스 국경에서 10 km 밖으로 군대를 철수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독일 제국은 8월 2일 룩셈부르크를 침공했으며, 8월 3일에는 독일 제국이 프랑스에게 선전포고했다. 8월 4일, 벨기에가 자국의 영토를 통해 프랑스를 침공하려는 것에 대해 거부하자 독일 제국은 벨기에게도 선전포고했다. 영국은 벨기에의 중립 상태를 유지하라는 최후통첩을 독일 제국이 무시하자, 1914년 8월 4일 독일 제국에게 선전포고했다.
동맹국의 전략은 잘못된 의사 소통으로 혼란을 빚었다.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세르비아 침공에 도움을 주기로 약속했지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해석에 따라 달랐다. 이전의 군사 전개 훈련 계획은 1914년 초 개정되었지만, 개정 이후의 훈련 계획은 진행된 적이 없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휘관들은 독일이 러시아와 전투하면서 북부 전선을 지원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독일은 프랑스를 침공하는 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러시아군의 대부분을 막을 것이라 구상하고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혼란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육군이 세르비아 전선과 러시아 전선으로 병력이 나누어지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1914년 9월 9일 셉템베르프로그라암(Septemberprogramm)에서는 독일의 총리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가 독일의 전쟁 목적 및 승리할 경우 연합국에게 요구할 사항 등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는 계획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 문서는 공식적으로 채택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가 침공하면서 8월 12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과 세르비아군 간에 체르 전투와 콜루바라 전투가 발발했다. 이후 2주일 동안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은 대량의 인명 손실로 그치면서 전쟁 기간 동안 첫 번째 연합군의 주요 승리로 기록되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신속한 승리에 대한 희망이 없어지고 말았다. 그 결과, 오스트리아는 러시아 전선에 대한 방어를 약화시키고 대신 세르비아 전선에 상당한 병력을 유지시켰다. 191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세르비아 침공 실패는 지난 20세기동안 우월한 적을 상대로 승리한 전쟁 중 하나로 꼽힌다.
이 전역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가장 어린 군인이 참전한 전역이다. 츠부스니카에 태어난 몸칠로 가브리치는 1914년 8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게 그의 부모, 할머니, 형제 7명이 죽은 이후 8살에 세르비아 육군 제6 포병 사단에 입대했다. 10살때 그는 상병으로 승진했으며, 11살에는 하사 대리 병장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독일군(제7 야전군의 서부군)은 개정된 슐리펜 계획에 따라 진군하기 시작했다. 이 독일군은 중립국인 벨기에를 통해 프랑스 국경으로 진군, 독일 국경에서 프랑스군을 둘러싸 남쪽으로 포위시키는 작전에 투입되었다. 프랑스는 "독일과 러시아 사이 전쟁이 발발할 경우에는 우리는 완전히 자유로운 행동을 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독일은 한 전선에서는 프랑스를 공격하는 동시에 다른 전선에서는 러시아를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나리오를 충족시키기 위해, 슐리펜 계획은 1870~1871년의 보불전쟁과 같이 최대한 빨리 프랑스를 항복시키기 위한 계획으로 짜여졌다. 또한, 프랑스에서 빠른 승리를 위해 라인 강의 서부가 국경과 맞닫아 있는 알자스로렌의 험한 지형을 통해 공격하는 대신 영국 해협으로 진군하여 영국의 지원을 저지한 이후 파리를 공격한다는 작전으로 이루어졌다. 이후 대부분의 군대를 러시아로 보냈다. 러시아는 동맹국에게 위협을 줄 수 있는 동원령을 완료하는데 오랜 기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1914년, 전선으로 가는 길에 있는 화차에 있는 독일 군인. 전쟁 초기에는 양 측이 매우 짧은 전쟁으로 끝날 것이라고 예측했다.기존의 모든 독일의 전쟁 계획은 독일군이 벨기에를 통해 행군하는 것이었다. 독일은 프랑스를 침공할 때 벨기에를 통한 자유로운 행군을 원했다(원래는 네덜란드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이를 거부했다). 중립국인 벨기에는 이를 거부했고, 따라서 독일은 벨기에를 침공하고자 했다. 프랑스 또한 벨기에를 통해 프랑스군을 이동시키고 싶었지만, 벨기에는 자국 영토에서 전쟁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독일의 제안 뿐 아니라 프랑스의 제안 또한 거절했다. 결국, 독일의 벨기에 침공 이후 벨기에는 프랑스군과 함께 전투하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에는 벨기에군 대부분이 지원에 대한 모든 희망을 잃고 안트베르펜으로 후퇴하여 항복했다.
이 계획은 독일의 우측이 프랑스군을 우회하기 위해 진군해야 했고(프랑스군의 대부분은 프랑스-독일 국경에 몰려 있었다) 이후 파리까지 남쪽으로 진군해야 했다. 8월 11일부터 24일까지 국경 전투에서 독일군은 승리를 거뒀다. 9월 12일, 프랑스군은 영국 원정군의 도움을 받아 9월 5일부터 12일까지 이루어진 1차 마른 전투에서 독일군이 파리 동부로 진격하는 것을 방어했고 다시 독일군을 전선에서 50 km 후퇴시켰다. 이 전투는 서부 전선에서 기동전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프랑스군의 알자스 남부 공세는 8월 20일 뮐루즈 전투로 시작했지만 제한적인 성공만 거두었다.
동부전선에서는 독일 장교들이 예상한 것과는 달리 매우 일찍 2개 군으로 프랑스 침공을 시작했다. 프랑스 침공에 동원되기로 예정되었던 제8 야전군을 철도를 통해 재빨리 오스트프로이센 지역으로 이동시켰다.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이끄는 이 군은 8월 17일부터 9월 2일까지 이어진 일련의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했다. 러시아의 침공을 좌절시켰지만, 지치지 않은 독일군을 동부로 이동시킨 결과 1차 마른 전투에서 연합국이 전술적 승리를 이끌었다. 동맹국은 프랑스에서 빠른 승리를 거두는 데 실패하고 2개 전선에서 전쟁을 시작해야 했다. 독일군은 프랑스 내의 방어하기 좋은 지역에서 전투를 했고, 영구히 잃어버린 것보다 더 많은 23만명의 프랑스군 및 영국군을 무력화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신 문제 및 납득하기 어려운 명령 결정은 독일군이 전쟁 초기 승리하는데 어려움을 주었다.
뉴질랜드는 1914년 8월 30일 독일령 사모아를 점령했다. 9월 11일, 오스트레일리아 해군 및 군사파견군(AN&MEF)이 독일령 뉴기니의 뉴포메른 섬(나중에 뉴브리튼 섬이 됨)에 상륙했다. 10월 28일, 페낭 해전에서 독일 순양함 SMS 엠덴이 러시아 순양함 젬추크를 침몰시켰다. 일본군은 독일의 미크로네시아 식민지를 장악하고 칭다오 전투를 통해 중국 산둥 반도에 위치한 칭다오를 점령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정부가 칭다오에 있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순양함 SMS 카이저린 엘리자베스의 철수를 거부하자, 일본은 독일 뿐 아니라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도 전쟁을 선포했다. 1914년 11월 이 함선은 칭다오 방어전에 참여했으며 나중에는 침몰했다. 몇 달 이내에, 연합군은 태평양의 독일령 지역을 장악했다. 오직 독일령 뉴기지 지역에서만 고립된 상선 기습 및 방어 태세만 있었다.
전쟁의 첫 번째 충돌로는 아프리카에서 영국, 독일, 프랑스 사이 식민지 세력의 충돌이었다. 8월 6일~7일에 프랑스와 영국군은 토골란드 및 독일령 카메룬 지역을 침공했다. 8월 10일,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의 독일군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전쟁의 나머지 기간 동안 산발적이고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다. 대령 파울 폰 레토우보르베크(Paul von Lettow-Vorbeck)가 이끄는 독일령 동아프리카 식민지군은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유격전을 이끌었고 유럽에서 휴전이 이루어진 지 2주가 지나서야 항복하였다.
영국 정부가 인도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두려움과는 달리, 인도에서는 영국에 대한 충성과 전례없는 호의가 나타나게 되었다. 인도 국민 회의 및 기타 단체의 인도 정치 지도자들은 열심히 영국의 전쟁 노력을 지원했으며, 영국에 대한 전쟁 지원이 인도 자치 운동을 이끌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영국령 인도 제국군은 전쟁 초기에는 영국군보다는 열세였다. 인도 중앙 정부 및 인도 토후국이 많은 음식, 돈, 탄약 보급을 보내주는 동안 130만명 가량의 인도군 및 노동자가 유럽, 아프리카, 중동 등지에서 자원군으로 활동했다. 총 14만명이 유럽의 서부 전선으로 보내졌고, 70만명이 중동 전선으로 보내졌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인도인 47,746명이 사망했고 65,126명이 부상을 입었다. 전쟁 자체로의 고통 뿐 아니라, 전쟁 이후에도 영국 정부가 인도 자치에 관해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자 인도 자치 운동은 마하트마 간디가 주도하는 인도 독립 운동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