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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염화실 원문보기 글쓴이: 無憂手
世樂은 後苦어늘
세락은 후고어늘
世上樂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뒤에는 苦痛이거늘
何貪着哉며
하탐착재며
어찌하야 탐착하며
一忍은 長樂이어늘 何不修哉리요
일인은 장락이어늘 하불수재리요
한번 참는 것은 길이 즐거운 것이거늘 어찌 수행하지 않으리요. 자 이걸 많이 천번만번 읽어서 몸에 배게해야 되는데 그래서 아마 그 경허스님께서 평생을 이걸 그렇게 많~이 읽었던 것 같습니다. 一忍長樂이어늘 何不修哉리요. 어찌 修行하지 아니 하리요.
道人貪은 是行者羞恥요
도인탐은 시행자수치요
도인이 탐하는 것은 道 닦는 사람이 貪慾을 부리는 것은 이것은 수행하는 사람으로서 羞恥요
出家富는 是君子所笑니라
출가부는 시군자소소니라
출가한사람이 부유한 것은 이것은 군자들의 비웃는 바이니라. 세상 君子들도 비웃는 바다. 이거야. 신라 때도 아마 벌써 이런 경향이 있었던거 같애요. 그러니까 이런 것을 경계하는 말씀이 이렇게 있습니다.
遮言이 不盡이어늘
차언이 부진이어늘
遮言. 막는 말. 하지 말라고 하는 부정하는 말들이 하지말라, 하지말라 하는 것이 그런 말이 다함이 없거늘
貪着不已하며
탐착불이하며
요것도 이라고 해야 돼요. 불기(不己)가 아니고. 貪着하는 것을 말지 아니하며 그만둘 이(已)字니까 그만두지 아니하며
第二無盡이어늘
제이무진이어늘
第二 아이고 마 이번만하고 다시는 안 한다. 이런 식이죠. 다함이 없거늘 이런 식이죠
不斷愛着하며
부단애착하며
愛着을 끊지 아니하며
또
此事無限이어늘
차사무한이어늘
이 일만하고 그담엔 안한다. 그런 뜻이죠. 이 일, 이 일, 이 일이라고 하는 것이 한이 없거늘. 대개 우리 그런 경험 많이 하지요. 아이고 이 번만하고, 이 번만하고 다음에는, 다음에는, 이게 第二나 此事나 전부 같은 의미로 쓰입니다. 그럴 때
世事不捨하고
세사불사하고
世上事를 버리지 아니하고
彼謀無際어늘
피모무제어늘
저 도모(圖謀)하는 일이 끝이 없다. 도모하는 일이 끝이 없거늘. 아이 뭣도 하고 싶고, 뭣도 하고 싶고, 할 일이 많죠 뭐 하다보면은 이 일도 하고, 저 일도 하고, 특히 불사해보면 그렇지요. 아 요것 좀 고쳐놓으면 저거 고치고 싶고, 요쪽 지어놓으면 저쪽 또 짓고 싶고, 그런 것들이 다 圖謀하는 일입니다. 저 圖謀하는 일이 끝이 없거늘
絶心不起로다
절심불기로다
끊을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도다.
今日不盡이어늘
금일부진이어늘
오늘만 오늘만 하는 것이 또 다함(盡)이 없지요. 오늘 지나면 또 오늘인데요.
그래서
今日不盡이어늘 造惡日多하며
금일부진이어늘 조악일다하며
이 원효스님 글 중에 참 이 대목이 다른데서는 만나기 어려운 그런 좋은 내용입니다. 造惡日多라! 악을 짓는 것이 날로날로 많아지고
明日無盡이어늘
명일무진이어늘
명일명일 내일내일내일 하죠. 내일내일 해 봐야 또 내일이 있으니까. 내일이 또 다함(盡)이 없거늘
作善日少라
작선일소라
善을 짓는 일이 날로 줄어든다.
今年不盡이어늘
금년부진이어늘
금년만 금년만 금년만하면 내년부터는 내가 독하게 공부할거다. 뭐 이런 식으로 생각을 많이 하는데. 그것도 다함(盡)이 없다 이거야.
그러면서
無限煩惱라
무한번뇌라
限 없는 煩惱를 하고
來年無盡이어늘
내년무진이어늘
내년내년내년 자꾸 내년내년 미루죠. 내년도 또한 無盡이야. 다함이 없거늘.
不進菩提로다
부진보리로다
보리(菩提)에 깨달음에 나아가지 아니 하는도다.
時時移移하야 速經日夜하고
시시이이하야 속경일야하고
시간시간이 옮기고 옮겨서 하루 낮과 밤이 지나가고, 낮과 밤이 일야는 이제 낮과 밤이라고 해야 돼요. 낮과 밤이 빨리 지나가버리고. 하루가 빨리 지나가버리고.
日日移移하야
일일이이하야
그래서 하루하루가 옮기고 옮겨서
速經月晦하며
속경월회하며
보름과 그믐이 빨리 또 지나가며 여기 月자는 보름입니다. 그래서 보름이 오고 그다음에 그믐이 되죠. 그 한 달이죠. 보름과 그믐이 빨리 지나가며
月月移移하야
월월이이하야
그래서 보름지나고 그믐지나면 한달이죠. 그래서 한달한달 그런 것들이 또 반복돼서 한달한달이 옮기고 옮겨서
忽來年至하고
홀래년지하고
홀연히 한 해가 이르고
年年移移하야
년년이이하야
한해한해가 옮기고 옮겨서
暫到死門하나니
잠도사문하나니
잠깐사이에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나니
破車不行이요 老人不修라
파거불행이요 노인불수라
깨어진 수레는 行하지 아니하고 老人은 修行하지 못한다. 고장난 차는 어디 그 갑니까 못가지요. 그러니까 젊을 때, 강건(剛健)할 때, 열심히 하라는 겁니다. 공부를. 깨어진 수레는 行하지 못함이요 老人은 닦지 못함이라.
臥生懈怠하고
와생해태하고
나이들어서 뭐 늙고 병들고 하면 어떻게 그저 누워서 뒹굴뒹굴 누워서 해태심(懈怠心)만 내고
坐起亂識이니라
좌기난식이니라
또 앉아가지고는 어지러운 망상(妄想)만 일으킨다. 어지러운 妄想만 일으키니라. 그 뭐 젊을 때 해 놓은 그런 그 어떤 훈습(薰習)해 놓은게 없으니까 자기 薰習한대로 하거든요. 젊을때 산 대로 늙어서 생각하거든. 그러니까 평소에 業을 잘 지어야 되는 거에요. 요는. 그러니까 젊을 때 지어놓은 업대로 그대로 가거든요. 순전히 업입니다. 그래 뭐 우리 잘 쓰는 말에 향싼 종이에서는 향기가 난다 하듯이 그 우리가 좀 정신 있을 때 마음에다가 마음의 종이에 향을 싸야 人生이 늙었을 때 삶이 향기로울 수가 있는 거지요. 그래서 이제 이런 이야기가 그런 뜻이죠.
破車不行이요 老人不修라 臥生懈怠하고 坐起亂識이니라
파거불행이요 노인불수라 와생해태하고 좌기난식이니라.
누워서 해태(懈怠)만 내고 앉아서는 어지러운 妄想만 일으키나니라.
幾生不修코(하고)
기생불수코(하고)
몇 生을 얼마나 되는 生을 닦지 아니하고
虛過日夜하며
허과일야하며
헛되게 날과 밤을 지냈으며 하루해를 지냈으며
또
幾活空身이언데
기활공신이언데
얼마나 헛된 몸을 살았기에
一生不修오
일생불수오
일생을 닦지 않는가
身必有終하리니
신필유종하리니
이 몸은 반드시 반드시 마칠 때가 있으니
後身은 何乎아
후신은 하호아
그 뒤 이 몸이 죽고 나서는 무슨 몸을 얻을 것인가. 後身이 도대체 뭐가 될 건가 죽어서 무얼 할건가. 그러니까 흔히 우리가 하는 말로 欲知來生事(욕지내생사) 今生作者是(금생작자시)라. 내생(來生) 일을 알고자 한다면 금생(今生)에 하는 짓이 그대로 내생(來生)일이다. 그러니까 빤하지요 뭐. 내생(來生) 뭐 빤한 거에요. 금생(今生)에 지금 무얼 많이 마음을 쓰고, 무엇에 제일 많이 몸과 마음을 투자를 많이 했는가. 그것에 따라서 그 담에도 또 살게 되는 거지요. 그러니까 後身은 何乎아! 무슨 몸이 될 것인지, 어떤 삶을 살 것인지, 그 참 공부 안하는 사람은 암담(暗澹)하고 참담(慘憺)하다는 거지요.
莫速急乎며 莫速急乎아
막속급호며 막속급호아
急速한 일이 아닌가! 急速한 일이 아닌가! / 급속한 일이 아니며 급속한 일이 아닌가! / 뭐 빠르고 급한 일이 아닌가! 또 빠르고 급한 일이 아닌가! / 제일 빠르고 빨리해야하고 급하게 서둘러야하고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해야할 일이 바로 修行의 일이다 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다시 한번
홀연히 백년에 이르거늘
어떻게 해서 배우지 아니하며
일생이 얼마기에 닦지 아니하고 방일하는가!
마음가운데 애착 떠난 것을 이것을 이름해서 사문이라하고
세속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을 이것을 이름해서 출가라 하나니라.
수행하는 사람이 그물에 걸리는 것은 개가 코끼리의 가죽을 입음이요.
도인이 이성을 그리워하는 것은 고슴도치가 쥐구멍에 들어가는 것이니라.
비록 재주와 지혜가 있으나 읍가에 거하는 사람은
모든 부처님이 이 사람에 대해서 슬퍼하고 근심하는 마음을 내시고.
설사 도행이 없더라도 산실에 머무는 사람은
뭇 성인들이 이 사람에 대해서 환희심을 내나니라.
비록 재주와 학문이 있으나 계행이 없는 사람은
보배가 있는 곳에 인도하나 그러나 일어나서 행하지 않는 것과 같고.
비록 부지런한 행이 있으나 지혜가 없는 사람은
동방으로 가고저하나 그러나 서쪽을 (향하는) 향해서 가는 것과 같음이니라.
[같을 여(如)자를 두 곳에 새기면 좋습니다.]
지혜있는 사람의 소행은 쌀을 쪄서 밥을 지으며
지혜없는 사람의 소행은 모래를 쪄서 밥을 지음이니라.
밥을 먹어서 주린 창자를 위로할 줄 알되
법을 배워서 어리석은 마음 고칠 줄은 알지 못함이로다.
행과 지혜가 구비한 것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고
자기도 이롭고 남에게도 이롭게 하는 것은 새의 두 날개와 같음이니라.
죽을 얻어서 축원호대 그 뜻을 이해하지 못 하면은
또한 단월들에게 응당히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며,
밥을 얻어서 창패호대 그 기취를 통달하지 못함은
또한 성현들에게 응당히 참괴한 것이 아닌가!
사람들은 미충이 청정하고 더러운 것 가리지 못함을 미워하고,
성인들은 사문이 청정하고 더러운 것 가리지 못하는 것을 미워하나니라.
세상의 시끄러움을 버리고 공천상에 오르는 것은
계가 좋은 사다리가 되나니,
이러한 까닭에 파계하고 다른 사람의 복전이 되는 것은
날개 부러진 새가 거북을 등에 지고 하늘을 날으는 것과 같음이니라.
자기의 죄를 벗지 못하면, 다른 사람의 죄를 소멸하지 못함이니라.
그러니 어찌 계행이 없고 다른 사람의 공급을 받으리오.
수행이 없는 헛된 몸은 길러야 이익이 없으며,
무상한 뜬 목숨은 사랑하고 아껴야 보존되지 아니함이니라.
용상의 덕을 바라보아서 능히 오랜 고통을 참고,
사자의 자리를 기약해서 영원히 욕락을 등질지어다.
행자가 마음이 청정하면 모든 (하늘이) 천신들이 같이 찬탄하고,
도인이 색을 그리워하면 선신이 버리고 떠나나니라.
사대가 홀연히 흩어지니라.
보존하여 오래 머물지 못함이니,
금일도 이미 늦었음이라.
자못 빨리 행할진저!
세상락은 뒤에 고통(이어늘)이거늘 어찌 탐착하며,
한번 참는 것은 길이 즐거움이거늘 어찌 닦지 아니 하리요.
도인이 탐하는 것은 이것은 수행하는 사람의 수치요,
출가한 사람이 부유한 것은 이것은 군자의 비웃는 바니라.
막는 말이 다함이 없거늘 탐착을 그만두지 아니하고,
제이가 다함이 없거늘 애착을 끊지 아니하며,
이 일이 다함이 없거늘 세상일을 버리지 않고,
도모하는 것이 끝이 없거늘 끊을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도다.
금일도 다함이 없거늘 악을 지음이 날로 많아지고,
내일도 다함이 없거늘 선을 짓는 것이 날로 적으며,
금년도 다함이 없거늘 무한히 번뇌하고,
내년도 다함이 없거늘 보리에 나아가지 아니하도다.
시간과 시간이 옮기고 옮겨서 하루가 빨리 지나가고,
하루하루가 옮기고 옮겨서 한 달이 빨리 지나가며,
한달 한달이 옮기고 옮겨서 홀연히 한해에 이르고,
한해한해가 옮기고 옮겨서 잠깐사이에 죽음의 문에 이르나니,
깨어진 수레는 행하지 못하며 노인은 닦지 못함이라.
누워서 해태심만 내고 앉아서는 어지러운 망상만 일으키나니라.
몇 생을 닦지 않고 헛되이 일야를 보내며,
몇 번이나 헛된 몸으로 살았기에 일생을 수행하지 않는가!
몸은 반드시 마칠 때가 있으리니 후신은 무엇이겠는가!
빠르고 급한 일이 아니며, 빠르고 급한 일이 아닌가!
自警文의 양이 상당히 많아서 오늘도 좀 해야 되겠어요. 이 여기서 이렇게 모처럼 信心내서 어려운 시간들 내셨는데. 나는 그 늘 관심사가 그겁니다. 처음부터. 어떻게하면은 이 분들이 어디 다른데 가서 공부하는 것보다 가장 所得이 있는 그런 공부가 되도록 해야할텐데... 정말 속이 꽉 찬, 실속이 있는 그런 공부라고 하는 그런 마음이 늘 들어야 서로가 다 이롭고, 또 이제 이 서울 불교 전문강당이 지속적으로 쭉 잘 될 것이 아닐까. 와서 강의 듣고 어려운 시간 냈는데, 그래 소득이 그 뭐 별로 없고 실속이 별로 크게 없다고 생각이 들까봐 사실은 상당히 염려하고 있습니다.
소득이 많게 하는데는, 또 공부하는 사람들도 그 뭐 예습복습 같은 거 충분히 하면은 그것도 보탬이 돼요. 설사 강의는 조금 부실하더라도 그런 점이 있습니다. 하이튼 강의 하는 사람이나 주관하는 교육원측에서나 늘 어떻든 소득있는 좀 실속있는 다른데서 공부하는 것보다 훨씬 실속이 많은 그런 공부가 되도록 할려고 생각은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이제 誡初心學人文이 끝났고, 發心修行章도 끝났고, 그다음이 自警文인데요. 스스로를 警責하는 글이라. 그래 돼있습니다. 스스로를 경책하는 글이라. 여기에 이제 야운 비구(野雲 比丘)라는 분이 썼는데 뭐 고려때 스님이다 이 정도로 공통적으로 그렇게 알고 있고요. 정확하게 그 인적사항이 어떤지는 좀 구구합니다. 異說이 많고요. 그러니까 그런 것들도 다른 참고서를 참고하시고. 여기서 그런거 뭐 가지고 이야기 좀 하다보면 시간 다 가니까, 그런 인적사항은 여러분들이 사전같은거 다른 참고서를 봐 주시기 바랍니다.
자경문이기 때문에
주인공아! 이 自警文이라고 하는 것은 옛날 선비들이 대개 자경문 하나쯤은 가지고 있습니다. (자경문이라는 것이 아니라)다른 사람에게도 공감을 하고 이거는 누구에게나 다 자경문으로 손색이 없다 이런 그 생각이 드는 그런 자경문들도 있습니다. 유교에서도 그렇고요 불교에도 그렇고. 특히 우리 불교에서 이 自警文은 참~~ 글이 이거 너무 의도적으로 그 잘 Tm여진 그런 글입니다. 내가 보기엔 뭐 發心修行章보다 오히려 더 잘 된 글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렇게 아주 좋~은 글이에요.
그리고 조금 그 의도적인 것이 너무 눈에 이제 드러나는게, 요렇게 뭐 序論이 딱 있고, 그담에 이제 本論에 들어가서 열 개의 章으로 이렇게 나눠가지고, 十門이라고 해가지고 열 개의 장을 나눠가지고, 하나하나 우리 생활을 이렇게 警責하고, 그리고 마지막에 또 結論에 가서 역시 이제 주인공아! 처음에 주인공아! 하고, 그 다음에 또 마지막에 끝에 가서도 역시 주인공아! 해가지고 결론을 이렇게 탁 이렇게 맺는 서론, 본론, 결론이 너무 아주 정확하게 탁~ 나타나 있습니다.
처음에 주인공아! 부터 선성십문(選成十門)하야 그다음에 이제 경계한다 하고 其一은 하는 것부터 본론에 들어가는 거지요. 한 장 넘겨서 그 끝에 줄에 있지요. 其一은 연의미식(軟衣美食)을 절막수용(切莫受用)이어다. 여기서부터 이제 본론이 돼요. 고 前이 이제 서론이라고 볼 수가 있고, 그 다음에 제일 또 끝에 가서 끝에서 두 번째 장 그 보면은 그 여섯 번째 줄 주인공아! 汝値人道함이 거기서부터 이제 結論이 됩니다. 거 이제 서론, 본론, 결론으로 나누자면 고런 조직이 너무 아주 자로 잰듯이 뚜렷하게 이렇게 나타나 있어요. 고런 것들이 좀 조금 눈에 너무 의도적이라 해서 눈에 약간 뭐 거슬린다면 거슬릴 수가 있는데 그래도 이제 글을 워낙 잘 쓰는 분들은 또 이렇게 될 수밖에 없어요. 그런 내용 참 자경문으로서 자기 자신을 타이르는, 또 경책하고 주의를 주는 내용으로써, 더 높을 수 없는 좋은 글입니다.
主人公아 聽我言하라.
주인공아 청아언하라.
자기 자신보고 하는 거죠. 자기가 자신이 주인공이니까 주인공아 청아언하라. 나의 말을 들어라.
幾人이 得道空門裏어늘
기인이 득도공문리어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幾人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뜻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空門 속에서 道를 얻었거늘. 사실 우리가 뭐 道 닦는다, 佛法 修行한다, 어쩐다 하지만 뭐가 있습니까? 뭐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는게 없잖아요. 구체적으로 뭐에요 도대체. 그 아무것도 없는 거에요. 그래 空門이라고 하는 거라. 또 그게 뭐가 이것이다라고 고정된 것이 있으면 그건 또 이미 아니야. 그래서 무유정법 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無有定法 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는 말도 있듯이 그렇습니다. 空門속에서 得道했거늘
汝何長輪苦趣中고.
여하장륜고취중고.
다른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 많은데 너는 어찌하야 苦趣중에서 길이 윤회하는가! 苦趣. 괴로움의 길에서 길이 윤회(輪廻)하는가!
생각해보니
汝自無始已來로 至于今生히
여자무시이래로 지우금생히
그대 너는 無始已來로부터 그러니까 아주 오랜 세월 이전부터 今生에 이르기까지
背覺合塵하고
배각합진하고
覺을 등지고 塵과 合했다. 진과 합하고. 塵世와 합했다. 각은 깨달음의 세계고, 塵은 진세, 세속의 길이고, 涅槃의 길과 世俗의 길이라고나 할까요. 그래 요 원칙 때문에 그 우리 사찰에서는 큰 방에 앉을 때도 부처님 탁자 밑에 앉는 사람들은 背覺이야 부처님을 등지고 앉거든요. 부처님을 등지고. 문 앞에 이렇게 앉는 큰 스님들은 배진합각(背塵合覺)이라 背塵合覺. 그러니까 부처님을 마주하고 부처님과 합해있다 이거야. 거의 부처경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세속은 등졌다. 그래 배진합각으로 그렇게 이제 보잖습니까.
그래서 차츰차츰 연륜이 높아갈수록 차츰차츰 돌아오지요. 저쪽에 뭐 오관짜리로 해서 탁자 밑으로 해서 차츰차츰 세월이 갈수록 돌아와 가지고 나중에 이제 옆으로 돌아서 끝내는 이제 세속을 등지고 부처님을 이렇게 마주보고 앉는 그 자리에 오게 되는데 그 자리에 오면 이제 멀지 않은 거지요. 또. 인생사가 그렇습니다. 고 배각합진(背覺合塵)이니 배진합각(背塵合覺)이니 하는 고런 것하고 우리 절 생활 뭐 심지어 계단 하나에서부터 그 큰 방에 발 들여놓는 문제, 또 앉는 문제, 그 발 들여 놓는 것도 어느 발부터 먼저 들여놓느냐? 하나하나가 그 참 법도가 다 있는 거지요.
背覺合塵이라
배각합진이라
각을 등지고 부처님의 境地는 등지고 塵世와 合하고
墮落愚癡하야
타락우치하야
우치한데 어리석은데 떨어져서
恒造衆惡而入三途之苦輪하며
항조중악이입삼도지고륜하며
항상 중악(衆惡). 여러 가지 악한 것만 짓고, 중악만 짓고
三途之苦輪하며
삼도지고륜하며
三途의 苦輪. 지옥 아귀 축생, 그 삼도의 고통의 윤회에만 들어가며
不修諸善而沈四生之業海로다.
불수제선이침사생지업해로다.
諸善. 여러 가지 善行은 닦지 아니하고, 四生의 業海에 沈沒하는도다. 태란습화(胎卵濕化), 이것이 이제 四生이죠. 衆生으로서 태어나는 네 가지 조건들. 사생의 업해에 침몰하는도다
身隨六賊故로
신수육적고로
이 우리의 몸이 육적을 따르는 까닭에 육적은 안이비설신의 이 육근이 전부 자기 하자는 대로 우리가 다 하다보면은 결국은 우리의 진성 우리의 지혜와 덕은 도적맞게 돼있다 이거에요. 그래서 여섯 가지의 도적이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것들이 하자는 대로 안이비설신이가 하자는 대로 내버려두면 안돼요. 입은 입 좋아하는 대로하고, 귀는 귀 좋아하는대로 뭐 좋은 음악이나 자꾸 들어쌌고, 그거 해보면 그담엔 뭐 그 남는게 없어요. 결국은. 내 주인공은 도대체 어디 가 있는지 찾을 길이 없다는 그런 뜻으로 육적이라고 이렇게 봅니다. 몸은 육적을 따르는 고로
或墮惡趣則極辛極苦하고
혹타악취즉극신극고하고
혹은 악취에 떨어지니 그렇게 살다보면 악취에 떨어지죠.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 극신극고라. 지극히 힘들고, 지극히 고통스럽다.
그리고
心背一乘故로
심배일승고로
마음이 일승을 등진 까닭에
或生人道則佛前佛後로다.
혹생인도즉불전불후로다.
마음이 일생을 등진 까닭에 혹 인도. 사람이 사는 세상에 태어나더라도 부처님 전이거나 부처님 후가 된다. 이거 뭐 일승이야기 하기는 해야 되는데 하기는 / 불교는 한 마디로 말하면 일승 일불승 뿐입니다. 법화경에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무이역무삼. 이승 삼승 성문 연각도 없고 또 보살마저 없다. 오직 일불승 부처의 삶을 드러낼려고 우선 방편으로 그렇게 이야기 한 것이다. 라고 누차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그게 이제 불교 궁극의 그 목적이죠.
일불승에 대한 그 이해. 일불승이란게 뭐예요? 부처님이란 사실인데. 부처님 이외에 사람위에 사람없고 사람밑에 사람없다고 하듯이 부처님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법화경 안목은요. 그게 불교 궁극의 안목이에요.
그래 내가 근래 법화경을 번역하면서 그 부제로 이것이 불교다. 그랬어요. 법화경을 보다가 아 이것이야말로 바로 부처님의 속마음이고 이게 진심이구나. 불교의 진심이 바로 법화경 안에 있구나. 이걸 내가 철두철미하게 느꼈어요. 느껴가지고, 그 출판사에다 책을 보내놓고 나중에다 이제 그 부제로 이제 이것을 달아라. “이것이 불교다”라고 달아라. 그렇게 이야기를 했는데 정말 진정한 불교는 법화경 안에 있다. 라고 하는 것을 스스로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여기 一乘이라고 하는 것. 이것 제대로 이야기 할라면 법화경 다 이야기해야 될 판인데 어려운 문제고 요는 부처님 하나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외 뭐 수다원(須陀洹), 사다함(斯陀含), 아나함(阿那含), 아라한(阿羅漢)이니 그 뭐 별별 이야기들, 전부 근기에 맞춰서 그저 적당하게 말한 그런 어떤 그 듣는 사람 수준에 맞춰서 만들어낸 그런 이야기뿐이고 진실은 이 一佛乘뿐이에요. 부처님 하나라는 사실 이거뿐입니다.
그래서 뭐 화엄경에서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심불급중생 시삼무차별)이다. 그런 말을 곧 잘 쓰잖습니까. 사실 알고 보면 부처님 하나뿐이에요. 중생이고, 부처고, 뭐 보살이고, 성문이고, 연각이고 할 거 없이 오로지 부처님이라고 하는 사실. 聲聞도 부처님이요, 緣覺도 부처님이요, 菩薩도 부처님이요, 衆生도 부처님이요, 부처님도 부처님이고 그렇게 돼 있는게 이게 一佛乘 思想(일불승 사상)입니다.
그 一乘의 이치를 마음에 등져버리면은 혹 人道에 사람으로 태어난다 하더라도 부처님 못 만난다 이거에요. 그 아주 이 말 속에는 태어나는 이야기가 있지만은 그 내용은 아주 무서운 뜻이 담겨 있습니다.
一佛乘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은 부처님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부처님 前도 되고 부처님 後가 된다. 라고 이렇게 이제 태어나는 것을 가지고 말하면서 내용으로는 부처님 때 태어나도 부처님 모르는 사람이다. 이런 의미가 속에 포함되어 있어요.
今亦幸得人身이나
금역행득인신이나
지금 또한 다행히 人身을 얻었으나
正是佛後末世니, 嗚呼痛哉라!
정시불후말세니, 오호통재라!
바로 부처님 후 말세니
嗚呼痛哉라! 是誰過歟아!
오호통재라! 시수과여아!
이 누구의 허물인가! 이건 이제 뭐 액면대로 이렇게 어떤 시대적인 그런 상황으로 일단 그렇게 이제 이해하는게 일단 바람직하지요.
雖然이나
수연이나
비록 그러나
汝能反省하야
여능반성하야
그대는 反省하야 그대는 능히 반성해서
割愛出家하며
할애출가하며
愛着을 끊고 出家를 했으며
受持應器하고
수지응기하고
應器를 바리때. 응기를 받아가지고, 應器. 자기 양에 맞는 그릇이 아니고, 양에 맞출 수 있도록 되어있는 그릇이에요. 크죠 그릇이. 크니까 적게 담을 수도 있고 많이 담을 수도 있고. 이걸 또 어떤 사람이 (번역을) 해석을 해놨는데 딱딱 자기 양에 맞는 그릇이라고 이렇게 이제 해석을 했는데, 양에 맞출 수 있도록 여유있는 그릇입니다. 그래서 應器에요. 應器를 받아가지고
着大法腹하야
착대법복하야
大法服. 가사(袈裟)지요. 대법복을 입어서. 사실 우리 복으로선 이쪽에 와서 僧服이 됐지 본래는 승복이 아니죠. 진짜 승복은 가사(袈裟)뿐입니다. 그 외에는 승복이 아닌데, 그러나 동양에서는 우리가 그렇게 정해놓고 또 그것이 이제 관습이 됐으니까 할 수 없이 僧服이라고 하지만은. 본래 승복은 가삽니다.
履出塵之逕路하며
이출진지경로하며
出塵. 여기도 이제 속진(俗塵) 뭐 진세(塵世), 진로(塵路), 어떤 망상의 세계, 번뇌의 세계를 그래 塵이라 그렇게 하죠. 진세를 벗어나는 그런 길을 밟으며
學無漏之妙法하면
학무루지묘법하면
無漏의 妙法을 배우면은 그러니까 世俗的인 일, 人間的인 일은 전부 자꾸 끝도 없는 그런 그 새버리는 그런 그 일 이라면은 이 마음공부의 일은 한번 깨달으면은 완전한 해결이니까 샐 일이 없는 거지요. 새서 달아날 일이 없는 거라. 한번 가득 채우면 그걸로 끝이라. 그래서 無漏라 그러는거죠. 그런 의미가 있고, 또 뭐 福德과 智慧가 새 나간다. 또 새 나가지 않는다. 그런 의미로도 쓰고 그렇습니다. 무루(無漏)의 묘법(妙法)을 배우면
如龍得水요 似虎靠山이라
여룡득수요 사호고산이라
마치 용이 물을 얻은 것과 같고 호랑이가 산을 의지한 것과 같음이라.
其殊妙之理는 不可勝言이니라.
기수묘지리는 불가승언이니라.
그 뛰어나고 묘한 이치를 말로 다 할 수 없나니라. 참 이 좋은 말이에요. 이 저 정말 우리가 마음놓고 승려생활을 하고, 또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여법하게 우리가 한다면은 그야말로 하루에 出家해서 수지응기(受持應器)하고 그리고 착대법복(着大法腹)하야 이출진지경로하고(履出塵之逕路하고), 학무루지묘법하면(學無漏之妙法하면) 제대로 우리 부처님의 가르침, 조사스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배울 것 같으면은 如龍得水요 似虎靠山이라. (여룡득수에 사호고산이라.)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이 말이야. 용이 물을 얻은 것같고 호랑이가 산을 의지한 거와 같다. 其殊妙之理는 不可勝言이니라. (기수묘지리는 불가승언이니라.)
그 아주 이거 뭐 사실 알고보면 검은 것은 글자고 흰 것은 종이에 불과하지만은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글자와 종이 거기에 담겨져있는 아주 뛰어난 정신 사상과 그 마음 부처님의 마음 조사스님의 깨달음의 지혜라고 하는 것은 이루 뭐 말 할 수 없는 거에요. 그래서 其殊妙之理는 不可勝言이니라. 말로 어떻게 다 표현하나 이거에요. 우리가 그 조사스님이나 부처님의 文章 하나를, 가르침 한 구절을 읽고 눈물을 흘릴 수도 있고, 가슴이 아주 떨리고 잠이 안 올수도 있는 그런 그 대목들이 참~ 많거든요. 그 수묘지리(殊妙之理)를 우리가 아주 뛰어나고 묘한 그런 이치를 느끼게 되면 그렇습니다. 가히 말로써 다 할 수 없음이니라.
人有古今이언정 法無遐邇하며
인유고금이언정 법무하이하며
사람에게는 古今이 있을지언정 옛사람, 이제사람이 있다 이거야. 그런데 法에 대해서는 멀고 가까움이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든, 부처님이 가르치는 眞理를 결국은 가르친 것이 되기 때문에 이 법하면 가르침과 그 가르침의 내용이 다 함께 포함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요건 뭐 가르침이라고 꼭 해야 될 대목도 있지만은 그냥 法이라고 해 두면은 좋아요. 법에는 멀고 가까움이 없으며
人有愚智언정
인유우지언정
사람에게는 어리석고 지혜로움이 있을지언정
道無盛衰니
도무성쇠니
道에는 성쇠(盛衰)가 없음이니. 盛하고 (쇠함이)쇠퇴함이 없음이니
雖在佛時나
수재불시나
비록 부처님 살아계실 때 있다하더라도
不順佛敎則何益이며
불순불교즉하익이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면 무슨 利益이 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