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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적들에 대한 심판
신 32:26-35
26 내가 그들을 흩어서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에 대한 기억이 끊어지게 하리라 하였으나
27 혹시 내가 원수를 자극하여 그들의 원수가 잘못 생각할까 걱정하였으니 원수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수단이 높으며 여호와가 이 모든 것을 행함이 아니라 할까 염려함이라
28 그들은 모략이 없는 민족이라 그들 중에 분별력이 없도다
29 만일 그들이 지혜가 있어 이것을 깨달았으면 자기들의 종말을 분별하였으리라
30 그들의 반석이 그들을 팔지 아니하였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주지 아니하셨더라면 어찌 하나가 천을 쫓으며 둘이 만을 도망하게 하였으리요
31 진실로 그들의 반석이 우리의 반석과 같지 아니하니 우리의 원수들이 스스로 판단하도다
32 이는 그들의 포도나무는 소돔의 포도나무요 고모라의 밭의 소산이라 그들의 포도는 독이 든 포도이니 그 송이는 쓰며
33 그들의 포도주는 뱀의 독이요 독사의 맹독이라
34 이것이 내게 쌓여 있고 내 곳간에 봉하여 있지 아니한가
35 그들이 실족할 그 때에 내가 보복하리라 그들의 환난날이 가까우니 그들에게 닥칠 그 일이 속히 오리로다
신 32:26-35 / 내가 그들을 흩어서 아무도 더 이상 그들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리라 하였으나 27) 내 원수들이 기뻐하며 그들의 대적이 오해하고 저희가 강해서 이긴 것이지 여호와가 하신 것이 아니라고 떠들게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28) 원수들은 앞을 내다볼 줄 모르는 족속이요, 깨달을 줄 모르는 백성이다. 29) 그들에게 지혜가 있으면 이 일을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며 자기들의 최후를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30) 내가 만일 내 백성을 버리지 않았다면 반석처럼 안전하게 그들을 보호하던 내가 원수들의 손에 넘겨 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한명의 원수가 내 백성을 천 명이나 몰아내고 두 명의 원수가 내 백성을 만 명이나 도망치게 할 수 있었겠는가? 31) 원수들의 우상들은 신도 아니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고 보호해 주는 나 여호와와 비교도 안 된다는 것을 원수들도 분별해서 알게 되었다. 32) 그들은 옛날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처럼 타락하고 부패하였다. 그들의 포도나무는 단즙이 아니라 쓴즙과 독액만 가득찬 포도송이를 맺고 있다. 33) 그들이 맺은 포도송이를 짜면 독사의 독보다 더 무서운 독주가 나온다. 34) 내가 이것을 모두 기억하고 있으며 하나도 잊지 않고 내 창고에 밀봉해 두었다. 35) 내가 그들에게 보복하겠다. 그들이 비틀걸음을 칠 때에 그들의 모든 악행에 대하여 내가 중벌을 내리겠다. 이제 조금만 지나면 그들이 멸망할 날이다. 최후의 그 날이 정해져 있으니 그 날을 아무도 지연시킬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하려 하셨으나 자신의 영광을 위해 돌이키실 것입니다.
이방나라들의 오해(26-27)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하려 하신 계획을 돌이키실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방나라들로 오해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방나라들을 도구로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때, 원수인 이방나라들은 자기들이 힘이 강하여 승리하였다고 착각할 것입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구로 사용하셨을 뿐입니다. 그때에 이방나라들은 교만하여질 것이며, 승리의 영광을 자기의 신들에게 돌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자신의 영광을 이방의 신들에게 뺏기지 않습니다(사 42:8). 하나님께서는 도구로 사용하신 이방나라를 또 다시 심판하심으로써 역사의 주인공이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심을 보이실 것입니다.
분별력이 없는 민족(28-30) 이스라엘이 앗수르 또는 바벨론 군대에게 사로잡혀갈 때에도 왜 나라가 망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사 5:13). 그들에게 분별하는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조금이라도 지혜가 있다면 그들이 심판을 받아 멸망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입니다. “하나가 천을 쫓으며 둘이 만을 도망하게 한다”는 구절은 사실 이스라엘에게 적용되어야 할 말씀입니다(레 26:8; 수 23:10). 이스라엘이 언약의 말씀을 따른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싸워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린 지금 도리어 대적 하나에 천이, 둘에 만이 쫓기게 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방인들에게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망할 것입니다(호 4:14; 시 49:20).
내가 보복하리라(31-35) 이스라엘의 종말보다 이방나라들의 종말이 훨씬 참혹할 것입니다. 그들이 반석이라고 믿는 우상들은 헛된 것이며 이스라엘의 참된 반석이신 하나님과 결코 비교될 수 없습니다. 이를 이방인 스스로도 잘 판단하고 있습니다(31). 또한 그들의 우상 숭배와 삶의 근본은 소돔과 고모라의 타락하고 죄악 된 문화입니다(32; 창 13:13, 18:20). 따라서 소돔과 고모라의 본보기처럼 그들도 멸망할 것입니다(창 19:24-25). 게다가 그들의 악행을 기록한 증거들을 하나님께서 쌓아두고 봉하셨습니다(34).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이를 근거로 그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때에 이스라엘에게 행한 그들의 잔인한 폭력과 교만을 하나님께서 보복하실 것이며(롬 12:19; 히 10:30), 마침내 하나님께서 홀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적용: 성도는 자신이 어떤 자리에 있는지 판단할 수 있는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 당신의 삶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리일까요?
안타깝게도 우리는 세상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고 성령님의 영향을 너무 적게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영적능력을 얻으려는 사람은 세상과 어정쩡하게 타협해서는 안됩니다. 성령님을 의지하여 빠지기 쉬운 죄의 유혹까지 완전히 이겨야 합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들로부터 돌아서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승리와 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 설 교 >
모락과 분별력이 있는 백성
신명기 32:28-30, 마태복음 16:2-4 / 이성희 목사
어떤 사람이 시골 상점에 들어서자 문 앞에 붙어 있는 표시를 보았습니다. ‘위험 개조심’. 그런데 전혀 무서워 보이지 않는 늙은 사냥개가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상점 주인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조심해야 하는 개가 저건가요?” “물론입니다.” “글쎄요, 내가 보기엔 전혀 위험해 보이지 않는데요. 저 경고문은 왜 붙였나요?” “저 경고문을 붙이지 않으면 사람들이 자꾸 개에 걸려 넘어지거든요”. 많은 경우에 가장 큰 위험은 시험에 의해 물리는 것이 아니라 시험에 걸려 넘어지는데서 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난 괜찮아’라는 자만심 때문에 걸려 넘어지기도 합니다. 실제로 이런 자만심이 부족한 신앙보다 더 위험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히신 날에 대제사장의 집에 들어갔다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베드로가 넘어진 것입니다. 들어가지 않아도 될 곳에 들어갔다가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이전에 예수님께 “다른 사람이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쓸데없는 자만심을 과시하다가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시험에 물린 것이 아니라 시험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자기 발에 자기가 걸린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경고를 무시하는 자체가 이미 시험에 넘어진 것입니다. 뱀에게 물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걸려 넘어진다는 것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경고의 나팔을 부는 자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선지자들이 수없이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깨어라”, “때가 임박했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보냅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요한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경고의 소리를 냈습니다. 수없이 나팔을 불어도 양심이 무뎌진 사람들이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나팔소리에도 깨지 않고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노아시대에 부패한 땅에 하나님은 경고하십니다. 노아를 통하여 멸망을 예고하신 다음, 방주를 짓게 하십니다. 노아가 오래 방주를 짓는 동안 사람들은 세상에 취하여 노아의 행동을 비웃었습니다. 세상 쾌락에 빠져 하나님의 경고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너무 부패하여 하나님은 멸망의 계획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롯의 가정을 구원하시기로 계획하셨습니다. 그런데 그의 사위들이 얼마나 세상에 빠져 있었는지 장인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경고를 듣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19:14에는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고 합니다. 그 시대뿐 아니라 이 시대도 바로 귀를 막고 사는 그런 시대입니다.
현대에도 수 없는 경고의 나팔이 들려옵니다. 아주 작은 일이지만 경고를 무시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미 10년 전에 담배에 ‘마일드’, ‘라이트’, ‘저타아르’라는 말을 쓰지 못하게 유럽회의에서는 반흡연법을 만들었습니다. 사망경고 문구와 사진을 담배에 넣기로 의무화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죽기를 각오하고 담배를 피웁니다. ‘추락위험’이라는 경고를 무시하고 올라갔다가 떨어져 죽습니다. 물과 전기가 곧 바닥이 날 것이라고 경고해도 아끼지 않고 물 쓰듯 물을 쓰고, 버리듯 전기를 씁니다.
모략이란 말은 영어성경에는 ‘sense’, ‘counsel’ 등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상담, 협의, 조언, 권고, 충고 등의 뜻입니다. 모략이란 경고 혹은 충고의 뜻입니다. 사람들은 분명히 경고를 해도, 충고를 해도 듣지 않습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력이 없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6:2-3에서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고 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의 변화를 보면서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분별력을 가지고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분별력이 있는 백성은 종말을 분별합니다.
신명기 32:29에는 “만일 그들이 지혜가 있어 이것을 깨달았으면 자기들의 종말을 분별하였으리라”고 합니다. 지혜가 있으면 자기의 종말을 분별하고 준비한다는 말입니다. ‘지혜’란 히브리어로 ‘호크마’라고 합니다. 지혜란 단순히 기교적인 지식, 사변적인 학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유지시켜 주는 총명함과 명철함, 슬기로움, 정직함, 성실함, 영적 온전함, 청결함 등의 총체적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란 세상에서 얻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로 부터만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이라”, “여호와를 아는 것이 지혜니라”고 합니다.
호세아 6:3에는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냥 아는 것이 아니라 깊이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호와를 아는 것이 지혜를 얻는 지름길입니다.
지혜는 분별력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지혜가 있어 깨달았으면 분별하였으리라”고 합니다. 지혜가 있으면 분별할 수 있습니다. 지혜가 있으면 무엇을 분별합니까? 자기들의 종말을 분별합니다. 사람이 분별해야 할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자기의 종말입니다. 자기의 종말을 분별하지 못하면 참 지혜 있는 자가 아닙니다.
분별이란 말의 헬라어는 ‘디아크리시스’입니다. 이 말은 영성 지도의 전 전통에 걸쳐 핵심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또 무엇을 원치 않으시는지 알게 하는 것이 분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성숙에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분별하는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이며,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통을 나누는 사람입니다.
사막의 은둔자인 수도자는 늘 세 가지 삶을 지향했습니다. 가난, 고난 그리고 지혜로운 분별력입니다. 성경에는 이 세 가지 덕목의 대표적 인물이 있습니다. 노아는 아무 것도 소유 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욥은 몹쓸 고난을 받은 사람입니다. 다니엘은 모든 일을 지혜롭게 판단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는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얻어지는 선물입니다.
전도서 7:2에는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라고 합니다. 7:4에는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고 합니다. 가장 지혜로운 마음은 초상집에 있습니다. 죽음을 알고 준비하는 마음이 지혜로운 마음입니다.
옛날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필립왕에게는 한 시종이 있었습니다. 이 시종은 매일 아침 왕이 잠에서 깨게 되면 제일 먼저 침상에 가서 “폐하여, 당신은 언젠가는 죽습니다”라고 한 마디 해 주는 신하였습니다. 이 시종의 역할은 왕이 부탁하여 매일 아침 이 한마디 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필립왕은 지혜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죽음을 늘 생각하고 죽음을 가까이 두고 산 사람이었습니다.
섹스피어의 ‘햄릿’에는 거트루드가 햄릿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죽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듯 살아갑니다. 아예 죽음을 무시하고, 부정하고, 거부하고 사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죽는다는 것은 거절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거절하는 것은 인간의 무지일 뿐입니다.
옛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지혜의 삶이란 곧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묘지를 사놓고, 수의를 준비하고, 장례비용을 준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죽음 이후에 가야 할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지혜의 삶은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삶입니다. 죽음 이후의 삶을 알아야 진정한 지혜입니다.
옛날 왕들은 자신이 즉위하면서부터 자신의 무덤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애급의 바로나 중국의 왕들이나 우리나라의 왕들도 그랬습니다. 그런다고 지혜가 있는 삶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후의 세계를 알고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해야 비로소 지혜가 충만해집니다.
요한복음 21:19에는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예고하셨지만 본인은 모릅니다.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난 2001년 11월 12일이 무슨 날인지 기억하십니까? 미국에서 911사태가 난 날입니다. 그 날 제가 잘 아는 목사님의 아들이 뉴욕 무역센터에 근무하는 인재였었는데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후에 얘기를 들어보니 그 아들이 죽기 전에 한국에 와서 그동안 한 번도 하지 않던 일을 많이 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에 가서 성묘도 하고, 그동안 못 보았던 친척들도 다 찾아보고, 미국에 돌아와서는 자신의 방과 물건을 다 정리했습니다. 우연이 아니라 사람은 정말 자신의 종말을 예감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잘 준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시편 90:12에는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나의 날 계수하는 지혜를 얻읍시다. 내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늘 헤아리며 삽시다. 미시건 대학교의 심리학자 크리스토퍼 페터슨은 “당신의 추모사를 쓰라”고 했는데 나의 추모사를 쓰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사는 분별력이 있는 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모략이 있는 백성은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신명기 32:30에는 “그들의 반석이 그들을 팔지 아니하였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주지 아니하셨더라면 어찌 하나가 천을 쫓으며 둘이 만을 도망하게 하였으리요”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 모략입니다. 모략이 있는 백성은 한 사람이 천명을 쫓으며 두 사람이 만 명을 도망가게 합니다.
오늘 성경에는 “모략이 없는 백성”이라고 하는데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모략이 없는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을 주로 깨닫지 못하는 백성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힘이 아닌 자기 힘을 의지하는 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자기 힘을 과시하고 자기 힘을 의지하는 사람이 사실은 가장 약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이 지혜로운 마음 품어 분별력이 있어서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고, 하나님이 그들의 대적의 손에 내어주는 일이 없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나님의 뜻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게 똑같은 마음으로 기대하십니다. 하나님을 불순종한 결과가 그들이 전쟁에서 패전합니다. 포로가 됩니다. 포로민과 아이들이 적의 노예가 됩니다. 그들의 땅이 적에게 지배당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모략이 있기를 기대하십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듣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진정성 있는 충고를 듣기를 원하십니다. 말씀을 벗어나지 않고 순종하여 축복받는 삶을 살기를 기대하십니다. 모략이 없어 벌 받고, 굶주리고, 다른 나라에 지배받는 삶을 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다윗은 유능한 싸움꾼입니다. 전쟁의 지략가입니다.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은 키가 여섯규빗 한 뼘이라고 하였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3미터 가까운 키를 가진 장군이었습니다. 사울왕은 전쟁에 나가겠다는 소년 다윗에게 자신의 투구와 갑옷과 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자신에게 맞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냇가에 가서 물맷돌 다섯 개를 가지고 와서 그 물맷돌로 골리앗의 머리를 맞춰 쓰러트렸습니다. 물맷돌이 골리앗을 이겼습니까? 하나님이 이기신 것입니다. 다윗은 왕이 되어서도 블레셋과 전쟁할 때에 일일이 다 하나님께 물어보고 하였습니다. “싸우러 갈까요?”, “어느 쪽으로 쳐들어갈까요?”, “언제 갈까요?” 다 물어보고 하나님 작전대로, 하나님의 지시대로 싸워 승리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물어보고 하나님의 뜻대로 싸우는 것은 모략이 있고 분별력이 있는 일입니다.
다윗은 후일에 승승장구하여 강한 나라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께 큰 실수를 합니다. 역대상 21:1에는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전쟁하던 다윗이 전쟁에 나갈 군인 숫자를 계수한 것입니다. 계수해보니 이스라엘에 전쟁에 나갈 만한 자가 110만 명이었습니다. 유다에 47만 명이었습니다. 이 일로 하나님은 노하셨습니다. 21:7에는 “하나님이 이 일을 악하게 여기사 이스라엘을 치시매”라고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 일을 악하게 여기셨습니까? 전쟁에 나갈 군인 숫자를 의지하였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은 이것이 사탄의 시험이라고 하지만 사탄의 시험에 빠지는 것도 피할 수 없는 잘못입니다.
이슬람은 ‘지하드’라는 전쟁을 합니다. ‘지하드’의 기본 의미는 ‘투쟁’인데 흔히 거룩한 전쟁이라는 뜻의 ‘성전’이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지하드’는 무슬림 극단주의자들의 꿈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슬람이 거둔 최대의 승리는 비잔틴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사건입니다. 동방정교회의 총대주교가 담당했던 거룩한 지혜라는 뜻의 ‘아야 소피아’가 이슬람의 점령으로 모스크로 바뀌었습니다. 거룩한 지혜라는 이름의 교회가 왜 모스크로 바뀌었습니까? 참 지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참 지혜가 없고, 모략이 없으면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교회가 모스크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이런 모략이 없는 백성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지배를 받게 되는 법입니다. 참 지혜와 모략이 있었더라면 반석이신 하나님이 그들을 이슬람에게 내어주지 않고, 하나님이 그들을 팔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싸움도 교회의 싸움에 비할 바가 못 됩니다. 교회가 싸울 때 제일 무섭습니다. 어떤 전쟁도 종교전쟁에 필적할 수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기독교 전쟁 같은 전쟁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사실은 역사상 가장 추악한 만행을 저지르고 또 묵인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위한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한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싸움이 아닌 싸움을 교회가 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20:15에는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고 합니다. 전쟁을 내가 하려고 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하시게 하면 그 전쟁은 반드시 승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아말렉과의 전쟁이 그랬고, 여리고를 함락할 때의 전쟁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하신 하나님의 전쟁이었습니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는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는 않는다”(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인간은 파괴되고 패배하지 않습니까? 인간은 파괴된 순간 패배합니다. 파괴가 패배입니다. 인간이 사탄에게 꼬여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께 범죄하여 파괴된 순간, 사탄에게 패배한 것입니다. 이 일로 인간에게는 구원이 절실해졌습니다. 모든 인류가 메시야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일시적인 패배, 한 번의 패배가 영원한 패배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아담은 죄를지어 패배했지만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패배한 것 같지만 승리하셨습니다. 아담 한 사람의 패배로 모든 인류가 멸망하고 패배하였습니다. 그리스도 한 사람의 승리로 모든 인류가 모두 구원을 받고 승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경고에 귀를 기울이고, 충고에 집중하여 듣는 예수를 믿어 구원받은 사람은 패배가 없는 승리, 영원한 승리를 누립니다.
마르틴 루터 킹 목사님은 흑인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 무저항적인 투쟁을 하였습니다. 그 분이 투쟁할 때에 많이 부른 노래가 있습니다. “우리 승리하리, 우리 승리하리”, “We shall overcome, we shall overcome, we shall overcome someday, Oh deep in my heart, I do believe, We shall overcome someday”라는 노래입니다.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승리합니다. 모략이 있는 백성은 절대 종이 되지 않고, 지배당하지 않고, 반드시 승리할 줄로 믿습니다.
결 론
엠마누엘 스베텐보리는 기독교 역사 상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선다싱과 함께 삼대 신비주의자로 불립니다. 그 분은 원래 아이작 뉴턴에 버금갈 만큼 훌륭한 물리학자였지만 신비한 영의 세계를 경험한 다음 27년 동안이나 영계를 오갔다고 합니다. 그 분이 쓴 책에 보면 사후 세계에 대해 전하고자 하는 것이 몇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영계는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사람의 몸은 육신과 영체 둘이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사람이 죽으면 영체는 육신으로부터 분리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망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죽는 것은 육신이며 영체는 영계로 이동해 영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영원한 생명이며 영원한 승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여 모략과 분별력이 있는 백성은 영원히 사는 승리의 삶을 삽니다. 절대 패배하거나 적에게 지배당하지 않습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백년을 살 것같이 일하고 내일 죽을 것같이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분별력이 있어 자신의 종말을 준비하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에게 모략이 있어 말씀으로 영원히 승리하는 백성이 다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의 반석과 대적의 반석
신 32:28-31 / 피영민 목사
신명기 32장은 모세의 고별 설교이자 노래입니다.
역사상 모세처럼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일대일로 많이 체험한 사람은 아마 드물 것입니다. 신명기의 마지막 세 구절은 모세를 다음과 같이 평가합니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더라”(신 34:10-12) 이와 같이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이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부른 노래이니 그 마음이 얼마나 긴박하고 진실하겠습니까?
마지막 노래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바로 ‘반석’입니다. “그는 반석이시니”(신 32:4).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서 기름을 빨게 하시며”(신 32:13).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신 32:15). “너를 낳은 반석은 네가 상관치 아니하고”(신 32:18). “그들의 반석이 그들을 팔지 아니하였고”(신 32:30). “대적의 반석이 우리의 반석과 같지 못하니 대적도 스스로 판단하도다”(신 32:31). “그들의 피하던 반석이 어디 있느냐”(신 32:37). 반석은 ‘큰 바위’(rock)라는 뜻입니다. 설교자가 본문을 읽으면서 이 본문에서 무엇을 설교할 것인가를 묵상할 때, 그 본문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를 찾고 그 단어를 중심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할 수 있게 됩니다. 바로 모세가 여섯 구절에서 반복하여 강조하는 말씀이 ‘반석’입니다. 하나님은 반석이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반석을 경홀히 여기고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방의 원수와 대적들에게 팔아버리셨습니다. 원수들 한 명이 와서 이스라엘 백성 천 명을 쫓을 수 있었던 것은 이방 나라의 신들이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반석이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버렸고 징계했기 때문입니다. 31절에 “대적의 반석이 우리의 반석과 같지 못하니 대적도 스스로 판단하도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의 반석은 이스라엘의 반석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대적의 반석은 이방 민족들이 섬기는 그들의 신을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이방신이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대적들도 스스로 판단해서 아는 사실입니다.
성경에는 이방인들이 섬기는 신에게도 ‘대적의 반석’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왜 이방인들의 섬기는 신에도 반석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요? “나는 내 자신의 힘으로 내 인생을 개척하여 스스로 굳게 살리라”고 말하는 사람은 인생을 살다가 역경과 환난이 오면 어두운 곳에 가서 쓸쓸히 울고 말 것입니다. 외롭고 무력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만 살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반드시 의지해야 할 존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1. 거짓된 모조품 반석
모든 인간에게는 반석이 필요합니다. 그 반석이 참된 반석인지 거짓된 반석인지, 의지할만한 반석인지 넘어지는 반석인지의 차이가 있을 뿐, 모든 사람들은 반석을 붙들고 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종류의 이름을 가진 신들을 섬기면서 그 신들을 자기의 반석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섬기는 수많은 신과 사상은 대체로 네 가지 범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무신론(atheism, 無神論)입니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어리석은 사상입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말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시 14:1). 혹시 여러분들 중에 예배에 참석하긴 했지만 하나님은 없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자’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한 무신론자에게 사랑하는 어린 아들이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여섯 살 된 이 아이가 그만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아빠에게 묻습니다. “아빠. 내가 의사도 포기한 불치병에 걸렸는데 혹시 나를 기적적으로 고쳐주실 하나님이 계실까요?” 그 때 무신론자 아빠는 “아니, 안 계셔”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 아이가 “아빠. 내가 죽으면 죽은 후의 세계가 있을까요?”라고 물어도 무신론자 아빠는 “아니. 그런 세계는 없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또 “아빠. 내가 죽은 후에 부활해서 아빠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다고 해도 무신론자 아빠는 “아니. 그런 일은 없을거야”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이가 “아빠. 그러면 내가 죽으면 끝인가요?”라고 묻는다면 결국 무신론자 아빠는 죽어가는 아이를 향해 “그럼. 끝이지”라고 쓸쓸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무신론은 사람이 의지할 반석이 아닙니다. 이런 담을 의지하다가는 담도 넘어져서 자기도 다치고 말 것입니다. 무신론은 우리의 반석이 될 수 없습니다.
둘째는 범신론(pantheism, 汎神論)입니다. 범신론자들은 이와 같이 주장합니다. “나는 신을 믿습니다. 나도 신이요, 당신도 신이요, 우리 모두가 신입니다. 산천초목도, 일월성신도, 나무도, 바람도, 해와 달도 모두 신입니다.” 이들은 땅에 침을 뱉으면 왜 신의 얼굴에 침을 뱉느냐고 따집니다. 소를 잡아서 갈비탕을 끓여먹으면 왜 신을 잡아서 갈비탕을 끓이느냐고 따집니다. 인도에서 시작된 힌두교가 그와 같은 사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힌두교도들은 소를 신이라고 섬기면서 소를 잡아먹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돼지는 잡아먹으니 이 얼마나 모순되고 허무맹랑한 사상입니까? 우리 조상들도 이와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어머니들은 달이 휘영청 밝은 날이면 정화수 한 대접을 떠서 상 위에 놓고 자녀들과 가정의 만복을 빌곤 했습니다.
또 산에 올라가서 오래된 나무에 새끼줄과 색색의 댕기 줄을 두른 후에 돌을 잔뜩 쌓아놓고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범신론의 일종입니다.
모세는 이와 같은 범신론을 어리석다고 평가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로 나의 질투를 일으키며 그들의 허무한 것으로 나의 진노를 격발하였으니”(21절). 하나님이 아닌 허무한 것을 섬기는 범신론자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합니다. 이처럼 범신론도 우리의 기댈 언덕과 반석이 되지 못합니다.
셋째로 이신론(deism, 理神論)입니다. 한국에서는 이신론자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이런 사상을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영국과 미국은 기독교 국가이기 때문에 많은 국민들이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은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교육받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신론자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이신론자들이 믿는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하기만 하셨을 뿐, 더 이상 돌보시거나 관여하지 않으십니다. 마치 시계를 만든 사람이 시계의 태엽을 한 번 감아놓으면 태엽 감긴 것이 풀리면서 시계가 저절로 돌아가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자연법칙을 주셨기 때문에 이 세상은 자연법칙을 따라 저절로 잘 돌아간다는 것이 이신론자들의 주장입니다. 그래서 이신론의 신관을 ‘시계태엽신관’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이신론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하나님은 멀리 떠나 계신 분이기 때문에 선지자를 택하여 계시를 주신다거나,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 오시는 일은 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세계 역사를 통치하시거나 병든 사람을 기적적으로 치유하시는 일 등도 하나님과 는 관계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이신론자들은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믿지 않습니다. 이신론자들은 계시가 이방 미신과 같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이방 마술사와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신론이라는 말 자체가 신을 이성으로 만들어낸 허황한 사상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미국의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토마스 제퍼슨, 엄격한 삶을 살기로 유명했던 벤자민 프랭클린과 같은 사람들이 이신론자였습니다.
이신론은 우리의 반석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이 갈 길을 몰라서 기도해도 이신론의 신은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습니다. 병이 들어서 죽게 되어도 이신론의 신은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멀리 가서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너를 낳은 반석은 네가 상관치 아니하고 너를 내신 하나님은 네가 잊었도다”(18절)라고 말하며 이신론의 어리석음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넷째로 불신론(infidelity, 不神論)입니다. 불신론자들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성경이 진리라고 할지라도 믿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본문에 불신론자들의 태도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한데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15절)
우리나라에는 불신론자들이 많은데, 이들을 가리켜 무종교인들이라고 말합니다. 강인철 교수님이 펴낸 「한국 무종교인에 대한 연구」라는 논문에 의하면 대한민국의 무종교인 비율이 세계에서 1위입니다. 무종교인의 비율이 무려 45%입니다. 네덜란드가 36%로 2위를 기록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 비하면 작은 수치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무종교인들은 결국 무신론자로 전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가 잘못되면 다른 것도 잘못되는 이치입니다.
한 아버지가 초등학생인 아들을 데리고 조깅하러 공원에 나왔습니다. 이 아버지는 두개의 운동화를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는 15만 원짜리 고급 운동화였고, 다른 하나는 만 원짜리 싸구려 운동화였습니다. 둘 중 하나를 골라 신고 공원에 와서 아들과 조깅을 하는데 사람들이 자꾸 자신의 발을 쳐다보며 웃고 지나가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상해서 발을 쳐다보고서야 그만 운동화가 짝재기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급히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내가 그만 운동화를 짝재기로 신고왔구나. 네가 얼른 집에 가서 운동화를 좀 가져다줘야겠다.” 아버지의 말을 들은 아들은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아들이 왔는데 아무 것도 가지고 오지 않은 빈손이었습니다. “아니? 운동화는 어쩌고 그냥 왔니?” 아버지의 물음에 아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빠, 아무 소용없어요. 집에 있는 것도 짝재기던데요?” 짝재기라도 들고 와야 나머지 짝을 맞출 수 있는데 착각한 아들이 아무 것도 가지고 오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가 잘못되면 다른 것도 잘못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무신론이나 범신론, 이신론이나 불신론은 모두 넘어지는 담이요, 흔들리는 울타리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의지할 반석이 되지 못합니다. 신명기 32장 35절과 37절은 각각 이 사실을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보수는 내 것이라 그들의 실족할 그때에 갚으리로다 그들의 환난의 날이 가까우니 당할 그 일이 속히 임하리로다”(35절). 하나님께서 환난을 주시고 그들에게 복수를 할 때, 그들이 피하던 바위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신들이 어디 있으며 그들의 피하던 반석이 어디 있느냐”(37절)고 말씀하십니다.
2. 참된 반석이신 하나님
인간이 의지하고 피할 수 있는 반석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가장 잘 아는 모세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의 반석이라는 사실을 담대하게 선포합니다. 사무엘을 낳은 한나도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삼상 2:2) 뿐만 아니라 다윗도 시편을 통해 “주는 나의 반석, 나의 산성, 나의 피난처, 나의 높은 요새”라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뇨”(시 18:31).
그렇다면 모세는 반석이라는 단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였을까요? “그는 반석이시니그 공덕이 완전하고 그 모든 길이 공평하며 진실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직하시도다”(신 32:4). 바위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바위는 늘 그 자리에 서있고 변함이 없습니다. 십년이 지나도, 이십년이 지나도 동일합니다. 이처럼 바위는 진실한 것이 특징입니다. 우리 하나님께도 거짓과 어두움과 굽은 것과 숨긴 것과 삐뚤어진 것이 없습니다.
이처럼 모세가 반석에 부여한 첫 번째 의미는 신실함(Sincerity)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며 진실하신 분이십니다. 거짓된 존재는 의지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모두 거짓되더라도 오직 하나님만은 참되신 분이십니다. 신실한 존재라야 의지할 수 있는 반석이 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 의미는 구원자(Savior)입니다. “그러한데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신 32:15).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반석이십니다.
세 번째 의미는 축복의 근원(Source of blessings)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로 땅의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시며 밭의 소산을 먹게 하시며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서 기름을 빨게 하시며”(신 32:13). 반석은 축복의 근원입니다. 바위에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는 것 같지만, 성경을 보면 바위가 소출해 내는 것이 많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바위를 쳤더니 생수가 나왔다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저는 등산을 가도 흐르는 물은 잘 마시지 않습니다. 오염되었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위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마십니다. 그것은 약수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위는 꿀을 냅니다. 먹는 사람에게 힘과 영양을 공급하는 최고의 토종꿀입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저보다 10년 선배이신 동기생 목사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방학 때 40일 금식기도를 하시다가 마치시는 날에 그만 불고기를 먹어버렸습니다. 원래 40일 동안 금식기도를 하면 아무것도 마음대로 먹어서는 안 됩니다. 자칫하면 장이 꼬여서 사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분은 불고기를 먹고도 살아났습니다. 궁금해서 40일 금식기도를 마치고도 불고기를 먹을 수 있었던 비결을 물어보았습니다. 그 목사님의 대답인즉, 자기가 금식기도 하기 전에 강원도에 가서 큰 병에 담겨 있는 토종꿀을 앉은 자리에서 혼자 다 먹은 적이 있었답니다. 토종꿀 한 병을 다 먹고 나니 혀가 굳어져서 말도 못 하고 있다가 그만 졸도하고 말았는 데, 3일 만에 깨어나니 놀랍게도 몸이 너무 가볍고 피로도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배도 부르고 힘도 나는 김에 금식기도를 시작했는데 40일을 하고 나서 불고기를 먹어도 위장이 튼튼하고 아무런 탈도 없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처럼 꿀은 먹는 이에게 힘과 용기를 얻게 해줍니다.
또한 바위에서는 기름도 나옵니다. “젖으로 내 발자취를 씻으며 바위가 나를 위하여 기름 시내를 쏟아냈으며”(욥 29:6). 이처럼 모세는 하나님은 거짓이 없으신 분이시고, 구원자이시며, 모든 생명의 축복의 근원이시라는 의미로 반석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에게 있어서 반석은 어떤 의미일까요?
첫째로 성도들은 반석을 피난처(Refugee)로 삼습니다. 등산하는 중에 광풍이 불고 벼락이 치면 큰 나무 밑에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큰 바위 밑 샘솟는 그늘 아래로 피해야 합니다. 반석은 피난처가 되므로 거기에 가면 안전합니다. 원수들이 우리에게 달려올 때, 인생의 폭풍우가 불 때 우리는 반석으로 피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내 마음이 눌릴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심이니이다”(시 61:2-3)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여러분, 기도할 때 마다 “하나님은 나의 반석이십니다. 내가 오늘도 하나님께 피합니다. 나를 더 높은 바위로 이끌어 주시고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가 되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성도들은 반석에서 새 힘을 얻습니다(Refreshment). 반석은 목마른 자에게 물을, 피곤한 자에게 꿀과 기름을 주어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합니다. 살아갈 용기를 잃고 좌절하신 분들이 있다면 반석으로 나아가십시오. 방석 한 장 들고 강대상 앞에 나와 일주일 동안 무릎을 꿇어 하나님께 기도해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꿀과 생수와 기름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제가 아는 순복음교회 장로님이 한 분 계십니다. 이 분은 건축업을 하셨는데, 학교도 지어서 이사장까지 지냈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IMF 때문에 사업이 망하게 되었습니다. 빚 독촉으로 시달리던 장로님은 어느 날, 자신의 승용차에 기름을 가득 넣고 무작정 경부고속도로를 달려 내려갔습니다. 마음속으로 ‘기름이 떨어지는 곳에서 죽으리라’고 생각하며 달리다가 옥천이라는 곳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산길을 따라 달리던 도중 작은 침례교회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그냥 그 교회에 들어가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무작정 앉아 있었습니다. 목마르면 물도 얻어먹으면서 그렇게 예배당 안에 앉아 있는데 목요일쯤 되니 자기의 문제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금요일에는 용기가 생기고 토요일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우실 것이라는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서울로 올라가라는 음성을 듣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더니 친구들이 몰려와서 자신을 도와주고 빚도 갚아주는 바람에 건축업도 다시 일으키고 학교도 다시 세워 이사장도 되었습니다. 재기한 후에 이 장로님은 옥천에 있는 그 조그만 침례교회에 헌금도 보냈습니다. 그래서 그 옥천 교회의 목사님이 산 속에 예배당을 지어놓으니까 이런 일도 다 있다며 좋아 하시던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성도들은 반석에서 새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성도들은 반석에서 휴식(repose)을 얻습니다. 반석은 휴식처가 되어 줍니다.
이사야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우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사 32:2).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신약에서 재확인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인생을 살다가 지치신 분이 계십니까? 그리스도 앞에서 쉬시기를 바랍니다.
작고하신 이중표 목사님께서 사모들을 대상으로 쓰신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목사님 두 분이 어느 날 함께 산기도를 가게 되었습니다. 한 목사님은 산에 올라가자마자 방석을 깔고 “주여! 부흥을 주시옵소서”라며 밤새 철야기도를 하고 교회에 내려갔습니다. 반면에 다른 목사님은 산에 도착하자마자 그냥 이불을 깔고 자리에 누워서 주무시고 다음 날 아침 10시에 일어나서 내려가셨습니다. 푹 쉬고 내려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잠을 푹 잔 목사님의 교회는 부흥되고 밤새 철야기도를 한 목사님의 교회는 별 변화가 없더라는 것이었습니다. 밤새 기도하신 목사님은 날마다 피곤한 표정으로 설교를 하는 바람에 성도들에게 감화를 주지 못한 반면에, 잘 쉬면서 목회하시는 목사님은 늘 밝은 얼굴로 설교하고 심방하셨기 때문에 성도들이 많이 모인 탓이었습니다. 이 예화를 통해서 이중표 목사님은 사람에게 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하셨습니다. 반석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고, 새 힘을 주시는 분이시며, 우리의 휴식처가 되는 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반석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신약성경을 보게 되면 이 반석은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4). 예수님께서도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고 말씀하십니다. 가톨릭교회는 이 구절을 근거로 베드로 위에 교회가 세워졌다고 주장합니다. 헬라어로 베드로는 ‘페트로스’, 즉 작은 바위라는 의미입니다. 물론 교회는 반석 위에 세워집니다. 그러나 작은 반석이 아닌 큰 반석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페트라’, 즉 큰 바위가 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교회의 반석이 되시니 음부의 권세가 흔들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 구원의 반석이 되시지만, 믿지 않는 자에게는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 되십니다.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9:33). 여러분들은 반석에 걸려서 넘어지는 사람이 아니라 구원의 반석 위에 든든히 선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 론
인류의 역사는 이방신을 섬기고 의지하는 일이 축복과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반석으로 삼고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피난처와 축복의 근원과 휴식처가 되어주십니다. 대한민국의 역사도 이를 증명합니다. 한일합방과 을사조약 이후, 백성들이 의지할 곳을 찾지 못해 하나님께 모여서 기도하고 회개할 때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 피해야 합니다. 죄악이 몰려와서 우리를 유혹하고, 원수가 몰려와서 우리를 멸망시키려 하며, 폭풍우가 몰려와서 우리를 절망시키고자 할 때, 어느 때든지 반석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 피해야 합니다. 반석 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수와 꿀과 기름을 제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과 같이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물을 저축하지 못할 웅덩이를 파는 개인과 국가는 망하게 될 것입니다(렘 2:13). 모세의 마지막 노래처럼 반석을 경홀히 여기거나 떠나지 말고 반석을 시시때때로 의지하며, 반석 되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수와 꿀과 기름을 맛보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