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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장 되돌아온 인연.
줄곧 꿔오던 꿈과 조금 다른 꿈을 꾸게 되었다.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곳에서 누군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그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따라 정처 없이 걷다 보니 눈앞의 그 곳에 그 남자가 서 있었다. 새하야리만치 창백한 얼굴과 붉은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옅은 갈색 빛을 띠우고 있는 남자는 나를 보며 손짓했다. 자력에 이끌리듯 남자의 앞으로 점차 다가갔다. 그러나 그럴수록 남자는 내 곁에서 멀어졌다.
돌연 들려오는 목소리가 잠식되어 있는 나를 온전히 일깨웠다. 내게 자신의 이름을 종용하는 그로인해 넋을 잃은 나는 그의 모습을 조감하듯 살펴보았다. 부각되지 않은 그의 이름이 내 육신 안에 깊이 잠들어 있음을 알고 있었으나,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물며 그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입술 사이로 나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그런데 금시에 남자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목소리는 애절하였으며 또 눈물겨웠다. 하지만 그의 음역과 함께 요란한 금속성의 소음이 연이어 들려왔기에 나는 두 귀를 막가 안고 제자리에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부름을 확고하게 전해들을 수 있었다. 곧 다시 한 번 나의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였으나, 괄목하게도 내게 비수처럼 돌아오는 그의 목소리 속에 감춰져 있는 나의 이름은 온전히 나의 것이 아니었다.
그 이름은 무척이나 존귀하여 나를 고립무의하게 했다.
“……이사벨라.”
그로 인해 나는 무척 외로웠다.
◈ 공 생
이런 악천후 속에서도 등교 길을 거닐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나는 짜증났다. 습기 가득한 마을을 보행하며 학교로 향하는 도중 나는 연신 구시렁거렸다. 그런데 몇 걸음 채 걷지 않은 곳에서 경천동지한 사건과 맞닥뜨릴 수 있었다. 무전기를 통해 사건의 진상을 보고하는 보안관들의 표정이 몹시 굳어있었다. 아무래도 짐승의 습격을 받아 가여운 생명이 흙이 되어 원천으로 되돌아간 모양이다. 하얀 시트에 가려진 채로 보안관에 의해 들것에 실려 가는 애처로운 시신을 바라보며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어리석은 사람들, 단순히 괴수에 의한 참사라고 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당신들은 어리석었다. 그러나 어쩌면 그들의 생각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매사에 충실했으며 현실을 직시했다. 하지만 나 역시 피해망상이라던가, 관대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여느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때때로 잘생긴 남자와 마주칠 때면 말 한 마디 정도 나누고 싶어 하는 설레임을 느끼곤 한다.
그런데 어째서 이상과 괴리되어 버린 내가 억측에 지나치지 않는 헛된 생각을 품고 있는지 모르겠다. 뭐, 괴리되어 버린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으니 조금 위안이 되는 점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말이다.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도원경이라 불리고 있으며 나와 렌이 공생하고 있는 이 곳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지도 위에서 모든 세상과 어긋나버린 저주받은 곳이었다.
우거진 수풀로 둘러싸여 있기에 타 마을로 벗어나는 데에 긴 시간을 소비해야만 하는 저주 받은 마을, 즉 프리마베라는 여름엔 무더위와 태양열이 작렬했으며 가을에는 바스락거리는 낙엽이 겹겹이 쌓여져버리는 탓에 사람들의 공무를 방해한다. 또 겨울에는 폭설이 끊이지 않아 외부로 발을 딛을 수조차 없는 열악한 환경이 되어버리곤 했는데 흰 눈이 수북이 쌓이는 아름다운 겨울의 날, 우리는 화톳불 앞에 가만히 앉아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송장이 되어야만 하는 것을 당연시 여겼다. 하물며 이 마을에는 기이하게도 봄의 계절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팔랑이는 나비와 벌의 행진은 물론이며, 달콤한 꽃의 향내도. 추위로 얼어붙은 가슴을 따뜻하게 감싸 안아 줄 볕의 광망 또한 쏟아져 내리지 않는다. 그래서 이 마을의 이름이 봄을 뜻하는 프리마베라가 되어버렸다고 내가 처음 이 곳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보안 서장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스스로의 힘에 이끌려 빠져버린 생각의 여념에서 허우적거렸다. 현실을 직시했을 때 렌은 나의 손목을 잡아끌며 걸음을 종용하고 있었다.
“저, 렌 있잖아. 어제 그 남자 말이야. 그러니까 그 뱀파이…….”
“아니야.”
렌은 빠르게 반문했다.
“뱀파이어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타락한 괴물이야.”
“렌.”
“제라.”
문득 렌이 걸음을 멈췄다. 돌연 두 사람의 어깨에 공허하리만큼 서늘한 냉기가 내려앉았다. 이내 허공으로 분산되어 가는 발치의 보안관의 발소리가 못내 아쉬운 내 마음을 빠르게 관통하고 지나가 렌의 목소리가 되었다.
“이 세상이 변화하는 만큼 우리들이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지상 위에는 그에 마땅한 이치가 있어.”
“…….”
“그 이치가 어긋나게 된다면 더 이상 우리가 살아갈 수 없을 만큼 참혹하고 황폐한 삶이 눈앞에 다가와 있겠지.”
“…….”
“그런데도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는 이유는.”
“……렌.”
“전설은 그저 하나의 전설로 남아있기 때문이야.”
대답할 수 없었다. 단연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 같았지만 마음과 다르게 입술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오늘은 다른 날보다 렌의 오드아이가 더욱 매섭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왼쪽의 붉은 눈은 음영이 내려앉은 양지의 수풀 너머를 지그시 바라보며 점차 핏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으며, 습기로 인해 수중기가 내려앉은 그의 짙은 머리칼 위에 부슬거리는 물방울이 이내 이마를 타고 내려와 오똑하니 선 그의 콧날에서 멈췄다.
화가 난 거야? 내가 짜증이 나? 묻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배반을 당한다는 것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제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악몽이었기에. 나는 여차하면 나를 두고 묘연히 사라질 것만 같은 렌의 뒤를 바짝 쫓았다. 발걸음을 옮기는 내내 나의 시선은 시신이 이송되어 가는 사건의 발단의 장소와 조금 전까지 렌이 응시하고 있던 나투라 숲에 머물고 있었다. 엄연히 마을 내부에 속해져 있기에 노변이 이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투라 숲의 온도와 습도는 마을과 확연히 달랐다. 그랬기에 수중기가 내려앉은 수풀의 곳곳에 맺혀있는 이슬이 내게는 부슬부슬 내리는 장대비와 다를 것 없이 느껴져 금방이라도 뇌성벽력이 들려올 것만 같았다.
천지가 흔들리고 산짐승이 포효할 것만 같은 착각이 이는 가운데 나는 나무 사이에 그을린 검은 인영을 목격했다. 인영의 머리카락은 대체로 붉은 빛을 띠우고 있었으며, 그의 입술은 옅게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 모습이 백미처럼 느껴져 차마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무엇보다 혼미해진 나의 머릿속에 스며드는 꿈속의 남자와 비등했기에 나는…….
“제라.”
렌의 부름에 나는 화들짝 놀라 무의 존재로부터 급거 시선을 거두었다.
“응?”
“…….”
“왜?”
금시에 렌은 커다랗고 하얀 손을 뻗어 나의 얼굴을 감쌌다. 이 상태로 내 머리가 그의 가슴에 맞닿는다면 조금 어설프고도 떨떠름한 장면이 연출되어 수줍음이 많은 내 얼굴을 잘 익은 토마토처럼 붉게 물들여 놓았겠으나, 다행히도 내가 생각하는 그런 미묘한 자세는 형성되지 않았다.
“렌, 왜 그래?”
“…….”
“힘들어 보여. 괜찮은 거야?”
렌은 아랑곳 하지 않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라.”
“응.”
렌의 얼굴이 몹시 슬퍼보였다. 나는 선뜻 렌의 어깨를 다독여주지 못했다. 멍청하게 서서 그의 얼굴을 관망할 뿐.
“모든 걸 다 잊었을 때, 그 기억 속에 내가 잔존하고 있다 해도.”
“…….”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악몽들은 모두 잊어버리는 거야.”
“렌.”
“날 잊어도 좋아.”
“…….”
“그러니까 잊어라, 제발.”
렌의 눈동자가 또 다시 교교하게 본연의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가만히 렌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렌을 기억하지 못하게 되면, 렌은 슬퍼하지 않을 거야?”
렌은 고개를 저었다. 당착되지 않는 그의 말에 조금 혼란스러웠다. 그가 나에게 무슨 말을 건네고 싶어 하는지, 그 속뜻까지 헤아릴 수 없었다. 단지 그의 말이 조금 모순되어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렌.”
“…….”
“…….”
“…….”
“오늘의 렌은 이상해.”
정말로 이상해.
후로 나와 렌은 학교에 도착해 강의실에 안착할 때까지 단 한 마디도 주고받지 않았다. 수업은 이미 시작되고 난 후였고,불어를 담당하는 스테파니 교수님은 지침서를 손에 얹어놓고서 탐탁치 않은 표정으로 우리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금세 시선을 거두었다. 그 틈에 나는 빈자리를 찾아 엉덩이를 붙였다. 덩달아 렌 역시 내 곁에 남아있는 빈자리에 졸속하게 앉았다. 불어와 더불어 유럽의 역사를 가르치는 교수님의 맑은 목소리가 쉬지 않고 연이어 귓가를 때렸다.
어느 정도 수업이 진행되고 나서 나는 밀려오는 졸음을 견디지 못해 꾸벅, 꾸벅 고개를 떨어뜨리며 졸았던 것 같기도 하다. 어느 순간에는 현실을 분간할 수 없는 몽롱한 정신 속의 또 다른 내가 조금씩 흐려지더니 이내 들려오는 교수님의 음역에서 완전히 멀어지고 말았다. 허나, 나는 이상하리만치 의아하게도 교수님의 목소리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진행하는 수업의 내용이 무엇이었며, 어떠한 뜻을 담고 있는지. 사소한 것 하나 빼놓지 않고 낱낱이 머릿속에 꿰고 있었다.
루마니아에서부터 비롯된 흡혈귀에 대한 이야기도 얼추 들려온 것 같기도 했다.
아주 유명한 가문이 있었는데, 가문의 당주와 부인 사이에서 어여쁜 딸아이가 태어났다는 것을 시작으로 궁색하지 않은 살림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닥친 운명의 고리와 벗어날 수 없는 혈의 족쇄가 그들에게 한없이 갈망을 아우성쳤다고 한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서도 쉬이 눈을 감지 못하는 비극적인 불멸의 힘. 평범한 인간과는 괴리되어 있는 이상적이지 못한 존재.
이윽고 두 부부는 사랑하는 자신의 딸아이만큼은 곳곳에 배어있는 혈흔의 흔적을 쫓아 한사코 갈망하고 또 갈구하는 피의 노예로 만들어버리고 싶지 않았기에 혼신의 힘을 다해 아이의 몸속에 내재되어 있는 뱀파이어의 힘을 완전히 봉쇄 시켰다고 한다. 뱀파이어에 대한 호기심이 뛰어난 스테파니 교수님이었기에 그만큼 그의 목소리는 들 떠 있었다.
물론 이 이야기는 내게 있어 생소하리만치 낯설었지만.
“그리하여 완전히 뱀파이어의 힘을 상실하게 되어버린 그녀의 이름은.”
미세하게나마 변개하지 않은 이 이야기를 어째서 나는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구구절절 지침서를 읊어대며 읽기를 반복하는 아이들과 다르게 내 머릿속에는 지침서에 빽빽이 적혀져 있는 글자 하나하나가 반흔처럼 각인 되어 있었다. 문득 자력에 이끌려 고개를 치켜들었다. 마치 이 이야기가 금영간 나의 심장 속으로 전해져 온 것만 같은 착각이 혼비백산하여 굳어버린 내 육신을 집어 삼켰다.
그리고 그때였다.
“이사…벨라 헤니.”
저택의 백작이자, 허름한 공간에 외로이 남아있는 그녀의 초상화가 문득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나는 시공을 초월하는 순간을 맛보았다. 지끈거리는 머리와 혼미해져 가는 정신을 꽉 붙잡고 고개를 들었을 때, 내 앞에 드러나는 것은 놀랍게도 희미한 꿈속에서 어른거리는 헤니 백작의 저택이었다. 급작 현기증을 일었다. 입술을 뒤틀며 렌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어지러워, 아파. 렌…….
애타게 그의 이름을 불러보아도 따스한 렌의 손길은 내게 향하지 않았다. 시공을 뛰어 넘어 지금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곳이 더 이상 렌과 공존하는 강의실이 될 수 없었으니 말이다. 허망한 꿈이라는 흩어진 조각이 완성도를 높인 직후 내 앞에 닥친 것은, 그리고 내가 머물고 있는 이 광망하기 그지없는 곳은 이사벨라 헤니 백작이 머물고 있던 거대한 저택의 내부였다. 붉은 카펫을 밟고 올라 2층으로 향하는 문턱에 다다르기 채 전에 보이는 초상화 속의 여자는 오늘도 나를 보며 웃고 있다. 그리고 현실이 된 양 눈앞에 어른거리는 그녀의 미소 띤 얼굴에 놀란 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는 찰나였다. 강의실 문이 열리면서 안내 교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나의 이름을 나직한 목소리로 불렀다.
“제라 디 이세프?”
어안이 벙벙해진 내가 얼얼한 뺨을 세차게 내려치며 흐트러지는 정신을 바로 잡기도 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들부들 거리는 두 다리는 온전히 노면을 밟고 지탱하고 서 있으면서도 위태롭게 비틀거리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려오는 손끝을 타고 저릿한 통증이 어깨 위에서 머물렀다. 나는 오른손을 들어 그녀에게 내 모습을 부각시켰다.
“너를 찾아온 손님이 계시니 잠시 나와 함께 가주겠니?”
◈ 공 생
프리마베라 마을에 몸을 들인 이래 감금되어 있는 사람처럼 멍청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나는 이따금씩 떠오르는 부모님의 얼굴에 머리를 꽁꽁 싸매고 기억을 되새기곤 했다. 그런데 웃기게도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부모님의 얼굴과 내 몸에 남아있어야만 하는 그들의 흔적들은 잔존하지 않았다. 분명 그들의 아이로 태어났기에 세상밖으로 나의 존재를 알리고 있거늘, 의아하게도 나는 나의 부모가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했다.
교통사고로 인해 나를 완전히 잊어버린 부모님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들은 엄연히 사고라는 발단과 그로 인해 나를 잊었다는 결과가 있었지만, 반면 나에게는 어째서 그들을 기억하지 못하는지 따위에 대한 발단과 결과가 존재하지 않았다. 안내 교사를 따라 접대실로 들어왔다. 커다란 문이 벌컥 열림과 동시에 창틀에 난반사 되어 시야를 뒤덮는 광망이 제일 먼저 나를 반겼다. 손을 들어 안검 위를 덮었다. 내 손바닥으로 그늘진 인영으로 인해 그제야 나를 찾아온 손님과 대면할 수 있었다.
“잠시 나가주시겠습니까?”
들리는 대로 나의 손님은 중년의 남성이었다. 그러나 그의 외형에서는 젊음의 패기가 넘쳐났다. 창백한 피부와 눈 밑이 검게 그을린 것을 보니 이 곳까지 도착하는데 오랜 시간을 소비한 모양이다. 단순히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남자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인사를 대신해 가볍게 고개 짓을 했다. 남자는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고맙다.”
그리고 이것이 남자가 내게 건넨 첫 마디였다.
“네?”
나는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말에 반문했지만 그는 그저 인자한 미소를 입가에 옅게 띠울 뿐이었다.
“이리 와서 앉겠니?”
“아, 네.”
나는 남자가 가리키는 소파를 향해 다가가 조심스럽게 몸을 앉혔다. 그리고 남자의 말문이 열리면서 이야기의 흐름이 시작된 시점은 그가 나의 맞은편에 앉는 순간부터였다.
“미안하다.”
“…….”
“아비가 되서 감히 너를 잊어버리다니…….”
그 때 처음으로 나는 내 앞에 앉아 나와 마주하고 있는 이 남자가 나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금 웃긴 면이 없지 않아 남아있었지만 크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와 나는 누구 하나 탓할 수 없을 정도로 어리석었으니 말이다.
“네 엄마가 아직도 병실 안에 갇혀 있는 터라, 회복을 되찾은 나라도 일찍이 너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아.”
“미안하구나.”
아버지는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는 거죠, 그리고 사고였잖아요.”
“……정말 미안하구나.”
“난 정말 괜찮아요. 그러니까 고개 들어요.”
그제야 아버지는 고개를 들어 아련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후로 나와 아버지는 홀로 지새워야만 했던 각자의 삶에 대해 실토하듯 털어놓았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나의 아버지였기에 나는 더없이 행복했다. 나를 사랑으로 보듬어주는 이 사람을 나는 정말로 사랑한다. 그렇기에 두 번 다시 그의 이름을, 그의 얼굴을 잊을 수 없도록 가슴 깊이 각인시켰다.
아버지와 나는 서로에게 있어 좀 더 가까운 시간을 필요로 했다. 안내 교사에게 말을 전한 뒤, 잠시나마 학교 밖을 벗어나왔다. 아버지를 따라 걷는 노변은 산뜻했다. 습기로 가득해 온몸은 축축했으며, 괜스레 기분까지 암울해져만 가던 순간에 찾아온 아버지는 그야말로 내게 있어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천사였다. 별안간 아버지는 우거진 수풀을 가리키며 저 곳을 거닐자고 했다. 나는 조금 떨떠름한 표정과 함께 고민에 빠졌다.
‘그러니까 이 길은 안 된다고 말했잖아, 제라.’
문득 며칠 전, 다그치듯 무서우리만큼 음산한 목소리로 내게 말하던 렌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랫마을과 이어지는 위험천만한 곳이었기에 언제 어디서 뭇짐승들이 출현해 습격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오직 인간만을 타깃으로 살인을 일삼는 괴수의 정체는 짐승 따위가 아닌 뱀파이어였지만 말이다. 나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꺼내 아버지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는 것인지 생각했으나 마땅한 답문이 생각나지 않았다.
“왜, 싫으니?”
이렇게 말하는 아버지의 뜻을 어찌 거역할 수 있을까.
“아니요. 좋아요. 다녀와요.”
“프리마베라 마을에 있는 동안 자주 오 다니던 곳이라서 싫증이 나겠지, 미안하다.”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괜찮아요.”
왜냐하면 저 곳은 섣불리 오고 다닐 수 없는 금단의 영역이거든요.
분비물처럼 고인 그 한 마디를 내뱉지 못해 서러운 나는 애써 히죽 웃으며 아버지의 뒤를 쫓았다. 부스럭거리는 나무 가시를 밟고 무성한 나무 그늘을 스쳐 지나갔다. 아버지는 두 손을 등 뒤로 거둔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울창한 숲을 거닐며 아버지는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다. 나는 가만히 그의 뒷모습을 보며 머뭇거릴 뿐이다. 채 가시지 않은 어색한 한기가 우리 두 사람의 곁을 한없이 배회했다. 지표면에 스며든 습기로 인해 발끝이 얼어붙었다. 습기로 가득 찬 끈끈한 대기 속에 각종 풀 냄새가 섞여 후각을 자극했다.
온몸에 배어있는 지독한 악취를 맡으며 미간을 구기다가 문득 아버지의 걸음이 어느 한 곳에서 정지하였음을 느꼈다. 나는 아버지의 곁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왜 그러세요?”
내가 물었다. 아버지는 대답이 없으셨다. 내가 또 한 번 물으려는 찰나였다. 아버지의 입 꼬리가 씩 말아 올라갔다. 아버지는 악천후 속에 제 모습을 감춘 태양의 그림자를 턱없이 올려다보고 있었다.
“제라.”
“네, 아버지.”
교통사고로 인해 기억을 잃은 부모님이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탓에 이 곳으로 연행되어 오듯 끌려올 수밖에 없었던 내 인생이, 내 삶이. 무엇보다 나를 낳아주신 소중한 혈육임에도 그들의 얼굴을, 그들의 존재를 기억하지 못하는 내 존재가 혐오스러웠다. 한사코 그들의 존재를 감지하고 있음에도 그들과 함께 했던 사소한 추억도, 기억도 모두 떠오르지 않는다. 어쩌면 나는 죽어 마땅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인간이 가질 수 없는 힘을 갈구하는 자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니?”
“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아버지의 말에 반문했다. 아버지는 희끗희끗 날리는 버드나무 아래 서 종용하듯 내게 물었다.
“이 썩어빠진 세상은 너에게서 나를, 그리고 나에게서 나의 아내를 빼앗아 갔지.”
“…….”
“그래서 나는 이 세상을 처 부술 생각이란다, 제라.”
“……아버지?”
“사랑하는 이와 영원히 함께 하고 싶음에도 그럴 수 없는 이 삶을 마감하고…….”
아버지는 뒤돌아 나를 바라보았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나를 마주하며 아버지가 고른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나의 아내와, 그리고 너와 영원히 함께 할 것이다.”
아버지는 맹목적으로 착근했다. 평생을 나와 그녀의 곁에 머물 것을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아버지의 모습이 조금 전과 다르게 서서히 변해가고 있음을 육감으로 느꼈다. 먹먹한 하늘의 구름이 높은 창공 위로 떠오르는 태양의 동태에 하얗게 물들어가다 이내 자신의 모습을 어김없이 감췄다. 그때 한줄기의 광망이 지표면 아래로 하염없이 쏟아져 내려왔다. 잠식되어 있던 그림자가 검은 인영이 되어 눈앞에 드리워졌다. 그런데 그러한 순간에 나는 괄목할 만한 뜻하지 않은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작열하는 빛줄기가 내려앉은 교교한 수풀 사이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의 그림자가 젖은 나무 그늘 아래를 가결하고 있음과 다르게 기이하게도 나는…….
“……아버지.”
“…….”
“…….”
“…….”
문득 아버지의 그림자가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감지하고 말았다. 아버지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운 채 여유롭게 내게로 다가왔다. 어째서, 어째서 나는 아버지의 곁에서 멀어지려 뒷걸음 치고 있는 거야?
“제라.”
“……오, 오지마세요.”
“내가 무서운 거니?”
“……오, 오지마세요!”
인간의 탈을 쓴 악마에게는 살아있음을 면밀히 알리는 그림자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의 숨결은 몹시도 냉랭했으며, 그들의 인격은 대체로 냉혈적이었다. 내 앞으로 다가와 깊게 숨을 내쉬는 아버지의 숨결이 차갑다. 서늘한 대기 중의 미세한 풍운과는 확실히 다르다. 나는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아니, 깨달아버리고 말았다.
인정해선 아니한 사실을.
“영원히 함께하는 거다, 제라.”
알아버리고……말았다.
“오, 오지마세요!”
그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아버지의 살가죽이 흉측하게 벗겨지면서 차면되어 있던 또 다른 그의 모습이 드러났다. 부서질 것처럼 메마른 육신 위로 도드라진 핏줄의 움직임이 짙어졌다. 농밀한 혈흔의 동태는 끝내 그가 나의 피를 갈구하는 순간까지 치닫게 하고 말았다.
풍진이 일어나고 있는 프리마베라의 마을을 사랑했다. 사랑하는 곳에, 내가 사랑하는 이가 잠시나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내게 있어 몹시도 뜻 깊은 일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오, 오지 마!”
“나와 함께 불멸의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거다, 제라!”
아찔한 순간이 찾아왔다. 맞닿은 노거수의 나이테로 인해 더 이상 물러설 길은 없었다. 그러는 사이 아버지는 나의 곁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인간의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섭게 달려와 나의 어깨를 짓눌렀다. 날이 선 그의 검은 손톱으로 하여금 나는 살갗이 찢어지는 고통을 오감으로 고스란히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당접 되어 있는 그의 곁에서 도망치려 했으나, 길게 뻗어져 나온 그의 힘줄이 나의 얼굴을 강하게 붙잡았다.
렌, 렌…….
“나와 함께 하는 것이다, 오랜 시간을 말이야! 크하하하!”
숨이 조여 왔다. 한없이 렌의 이름을 되풀이해 보아도 소리 내 그를 부를 수 없었다. 애가 타는 마음이 이내 곧 다급해지면서 눈앞에 어른거리는 죽음이라는 현실에 엄습하는 두려움을 배제하지 못했다. 기적이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
“…….”
그런데 그 때였다. 아버지, 아니. 그의 육신이라는 가면 아래 감춰져 있던 뱀파이어는 곧 자신의 어깨에 와 닿는 햇살에 놀라 괴성을 내질렀다. 금속성의 목소리가 두 갈래로 갈라지면서 가늠할 수 없는 음역을 토해냈다. 가까스로 그의 곁에서 해방될 수 있던 나는 못 다한 호흡을 가쁘게 몰아셨다. 서둘러 이 자리에서 도망치려 했으나 비틀거리는 두 다리는 그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나무 그늘아래서 정착하고 말았다.
이가 떨려 맞부딪쳤다. 초점 잃은 시선으로 그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 순간 나는 별안간 햇살이 내려앉은 그의 어깨가 타들어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재가 되어 사라지는 흔적이란 자신의 티끌을 붙잡으려 남자는 허공위로 달려들었다.
“아아악! 크악!”
그러나 이미 볕이 가득한 지상은 선뜻 그가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금단의 영역이 되어 그의 심장을 옥죄었다. 그리고 한순간 나를 향해 돌아선 그가 내 곁으로 점차 다가오는 그의 육신은 절망이라는 이름 아래 전소하고 말았다. 그렇게 그는 내게 목불일견한 광경을 남겨두고 사라졌다.
건한 재가 되어 토지 아래로 사라진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면서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기억할 수 없었다. 그저 농후한 심장을 부여잡고 지그시 눈을 감았던 것 같다. 마른침을 삼키며 털썩 주저앉았다. 허나 안도의 숨을 내쉬기 전에 또 한 번의 기억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그것은 기적이라 일컫기에 조금 어색한감이 남아 있었지만 광망 속에서 유유히 모습을 드러낸 인영이 하얗게 번져가다 이내 그늘 아래로 모습을 드러냈는데, 어느새 내 앞에 당접한 남자의 얼굴을 멍청한 시선으로 가만히 올려다 보는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익숙한 느낌, 나의 시선을 이끄는 묘한 뉘앙스가 향수처럼 몸에 배어있는 사람……. 나는 그를 그 정도로 생각했다. 발치에서 서로를 응시했을 때와 다르게 내 앞에 서 있는 남자의 이미지는 화려했으며 또 뚜렷했다. 그러니까 남자는 조금 전 등교길을 거닐며 우연찮게 마주했던 백미를 소유하고 있는 바로 그 남자였다.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금빛이었으며, 매우 짙었다. 하물며 공허한 감정의 시선이 냉소하게 비춰지고 있었다. 그리고 붉은 빛을 띠고 있는 머리카락을 고의적으로 헝클어뜨리면서 별안간 남자는 내게 희고 커다란 손을 건넸다.
나는 두려웠다. 인간? 뱀파이어?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존재에 경계심을 늦추지 못했다. 그런 나에게 남자는 이렇게 말했다.
“두려워하는 건가, ”
문득 두 눈동자가 자력에 이끌리듯 그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느꼈다.
“그의 모습을.”
설령 그의 존재가 뱀파이어라 하더라도, 그의 미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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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와!!!!!!!!!!!!!!!!!!!!!!!!!!!!!!!
갈 수록 재미ㅋ비루ㅋ허섭ㅋ스레기~♡ 임이 분명한 소설이건데 1편에서 이러케 많은 댓글을..하 저 지금 몹시 기뻐서 흥분한 모양입니다. 시험기간인데 공부 하나 안하고 어차피 곧 종강이니까요..전 모든 걸 놨습니다!!!!!!!!!!!!!!!!! 진심으루 넘넘 감사합니다. ㅠ_ㅠ한 5편까진 지루하지 않을까 싶네용..뭐, 로맨스..어딧니 (-- )( --)(-- ) 사랑은 언제하니?(__)( --)(--) (__) 싶지만 곧 하겠습니당. 나름 1부, 2부 나누고 싶었는데 그럴만한 능력도 없고 벅차기도 할 것 같고..
오늘따라 주제에 안 맞게 주저리가 길어졌네욘. 무튼 넘넘 감사합니다!♡
업쪽=샌릐
샌릐 빨리 올려주세용
샌릐.. 하 .... ㄷ ㅐ박ㅠㅠㅠㅠㅠㅠㅠㅠ진짜 걍 대박..
샌릐 담편빨리요ㅠ.ㅠ
헐 더 담편 보러가요!!!!!!흥미 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