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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18,1-5.10.12-14
우리는 어쩌면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
내가 해야 하는 것을 먼저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것 같습니다.
자녀들을 챙기고,
부모님 걱정하고,
직장에서는 내 몫을 다해야 하고,
집에서도 해야할 일들을 묵묵히 하면서...
그렇게 하루하루 살다 보면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지 않던가요?
“그런데
정작 나는 누가 챙겨주지?”
아픈데도 괜찮다고 말하고,
힘든데도 별일 아니라고 말하고,
서운한 일이 있어도 그냥 그것을 삼키는 우리가 아닌가요?
가족에게는 든든한 사람이어야 하고,
직장에서는 책임지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자녀에게는 흔들리지 않는 부모여야 하는 우리들...
그런데 정작 내 마음은 지칠때가 있기도 한것 같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
혹시,
그 잃어버린 한 마리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는 아닐까요?
나는 내 가족을 위해 살아왔는데
정작 내 자신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느낌...
성당에는 나오고,
기도도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주님, 저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정말 괜찮은 걸까요?
우리는 사람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앞에서도 괜찮은 척 하는것은 아닐까요?
“주님, 아이들 잘되게 해주세요.”
“남편, 아내 건강하게 해주세요.”
“부모님 아무 일 없게 해주세요.”
“직장 생활 잘되게 해주세요.”
그런데 이렇게 기도해 본적이 있는지요?
“주님, 사실 저도 힘듭니다.”
오늘 복음의 하느님은
그 말을 기다리시는
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무너지지 않도록 멀리서 지켜보시는 분이 아니라,
길을 잃은 우리를 찾아 직접 길을 나서시는 분.
사람들은 우리가 잘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아십니다.
웃고 있는 얼굴 뒤에 있는 서운함도 아시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마음속 눈물도 아시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외로움도 아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단순히 “길 잃은 사람을 찾아가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먼저 하느님께서 나를 찾아오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잠시라도 주님앞에 머물러 나를 찾아오시는 그분께 내 속마음을 모두 털어놓아보면 어떨까요?
“주님,
오늘은 제가 괜찮은 척하지 않겠습니다.
저도 주님께서 찾아주셔야 하는
길 잃은 한 마리입니다.
저를 찾아와 주십시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 오늘 복음 환호송 마태 11,29참조)
(정루치아나 수녀님)
8월11일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에제키엘 2,8─3,4 마태오 18,1-5.10.12-14
어른이 미각을 끊으면 어린이처럼 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어린이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이처럼 된다는 말은 자신을 낮춘다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어린이처럼 되라는 말씀은, ‘겸손’하여지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자신을 낮추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사람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라고 하시며,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교만해지면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만 좋아하지만, 겸손하면 모든 이를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이 어린이처럼 되는 것입니다.
‘응웬 차우 로안’은 ‘골형성부전증’이란 장애를 지니고 태어난 베트남 여성입니다.
이 병은 특별한 원인 없이도 뼈가 쉽게 부러지는 선천성 유전 질환입니다.
뼈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해 키가 매우 작고 허리가 굽습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의 조롱으로 깊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응웬 반 부옹’이란 청년이 그녀를 사랑했습니다.
그는 “겉모습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녀는 누구보다 착하고 아름다운 여성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부옹은 로안과 결혼을 하고 함께 평생을 기약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로안은 부옹에게 평생 짐이 될까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2014년 4월 4일, 로안은 지인의 결혼식에 하객으로 초대받아 휠체어를 이끌고 결혼식장으로 향했습니다.
결혼식장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여있었습니다.
이때 로안의 앞에 예쁘게 차려입은 소녀들이
등장했고, 소녀들은 로안을 결혼식장 한가운데로 이끌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박수갈채를 보내며 로안을 환영했습니다.
로안은 어리둥절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저 멀리서 신랑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바로 자신의 남자친구 부옹이었습니다.
이것은 부옹이 로안을 위한 깜짝 결혼식이었습니다.
상처가 많아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하는 로안을 위해 부옹이 준비했던 것입니다.
모든 사실을 안 그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백년가약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결혼식 7개월 만에 부옹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만 것입니다.
갑작스럽게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로안도 병세가 악화하여 이듬해인 1915년에 남편을 따라 하늘나라로 향했습니다.
우리나라도 한쪽 얼굴에 붉은 모반을 가지고 태어났고 다른 쪽 얼굴은 암이 들어 뼈까지 깎아내는 수술을 해야 했던 김희아씨를 사랑해 결혼한 남편이 있습니다.
외모지상주의의 세상에서 이런 분들이 진정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이라고 여겨집니다.
받아들임이 곧 겸손입니다.
왜 어린이와 같은 이들은 세속적으로는 전혀 매력이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어린이들은 세속적인 ‘맛’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끔 예전에 청년이었다가 결혼하여 아기들을 데리고 나오는 신자들을 만납니다.
아기들은 식당 밥을 먹지 못합니다.
엄마가 미리 이유식을 준비해 오는데 저는 거저 줘도 안 먹을 전혀 간이 되지 않은 보기만 해도 맛이 없어 보이는 음식입니다.
그러면서 어른이란 세상의 맛에 길든 사람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미 아름다운 여인들의 모습에 길들었다면 그 사람은 어른이고 그러면 예쁘지 않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눈은 잃습니다.
자신은 예쁜 여자와 결혼해야 하는 사람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교만은 사람을 받아들일 그릇을 좁힙니다.
우리는 여기서 어떻게 어린이처럼 될 수 있는지 알게 됩니다.
바로 세상의 맛을 끊으면 됩니다.
요즘 좀비 영화가 한창입니다. 좀비는 사람을 만나지 않고 사람을 먹습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사람을 음식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좀비는 인간이 아닙니다.
어린이의 마음을 잃은 사람들은 좀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통해 맛볼 무언가를 만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실 선물을 바라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결혼을 하니 그 찾는 맛을 더는 발견할 수 없게 되면 곧 이혼을 생각하게 되고 다른 누군가에게서 그 허기를 채우려 합니다.
그렇게 누구와도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요즘 초등학교 3학년부터 사춘기가 시작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이 말은 부모님과 세상이 빨리 아이들을 성인으로 만들고 있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통해서 만들까요?
바로 스마트폰을 통해서 아이들에게 세상의 맛을 빨리도 맛보게 만듭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말투와 표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유튜브에 나오는 캐릭터들의 말투를 따라 합니다.
유아용 방송이라고 해서 세상의 맛이 없을까요?
교묘하게 숨겨진 유혹이 더 많습니다.
아이들은 그런 방송과 게임 등을 통해 세속-육신-마귀의 맛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깊이 각인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스마트폰을 빼앗는 엄마까지도 미워하게 됩니다.
엄마도 이제 스마트폰이라는 맛을 주는 도구에 불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절대 7살 이전에는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을 쥐여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을 쥐여준다는 것은 아기들을 빨리 어른으로 만들어 자신들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어렸을 때 맛 들인 것들을 끊는 것은 매우 힘이 듭니다.
10분에 맛 들인 맛을 끊는 데 10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저는 시간이 나면 아직도 영화를 보는 게 낫지 따분한 활자들의 조합인 책을 읽으려 하지 못합니다.
억지로 노력하는데도 아직 잘 안 됩니다.
‘어렸을 때 TV를 보지 않고 책을 읽는 습관을 들였더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합니다.
겸손함이란 많은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의 크기입니다.
그 크기는 세상의 맛을 알수록 줄어듭니다.
겸손은 세상의 맛을 끊는 것과 하나입니다.
그 맛 때문에 사람을 있는 그대로 공감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의 맛을 끊어가야 하는 이유이고, 어린이처럼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강론>
(2026. 8. 11. 화)(마태 18,1-5.10.12-14)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지 마라.>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에 세우시고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5.10.12-14)>
1)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라는 말씀에서, ‘업신여기다.’ 라는 말은, ‘멸시하고 천대하는 것’뿐만 아니라, ‘억압하고 착취하고 박해하는 것’도 포함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천사들’은 ‘수호천사들’입니다.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라는 말씀은,
수호천사들이 ‘자기들이 맡고 있는 작은 이들’의 사정을 언제나 곧바로 하느님께 말씀드린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사실상 “하느님께서 작은 이들을 늘 보고 계시고, 작은 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곧바로 합당한 조치를 취하신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서, ‘토빗’과 ‘사라’의 이야기가 연상됩니다.
두 사람이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면서 울며 기도할 때, 그 기도가 곧바로 하느님께 전달되었습니다.
“바로 그때에 그 두 사람의 기도가 영광스러운 하느님 앞에 다다랐다.
그래서 라파엘이 두 사람을 고쳐 주도록 파견되었다(토빗 3,16-17ㄱ).”
모든 일이 다 잘 마무리된 다음에 라파엘 천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 이제 보라, 너와 사라가 기도할 때에 너희의 기도를 영광스러운 주님 앞으로 전해 드린 이가 바로 나다.
네가 죽은 이들을 묻어 줄 때에도 그러하였다. 그리고 네가 주저하지 않고 잔치 음식을 놓아둔 채 일어나 가서 죽은 이를 매장해 줄 때, 너를 시험하도록 파견된 자도 나였다.
또 하느님께서는 나를 파견하시어 너와 네 며느리 사라를 고쳐 주게 하셨다.
나는 영광스러운 주님 앞에서 대기하고 또 그분 앞으로 들어가는 일곱 천사 가운데 하나인
라파엘이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는데, 그것은 내 호의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니 날마다 그분을 찬미하고 찬송하여라(토빗 12,12-15.18).”
혹시라도, 토빗과 사라와 라파엘 천사의 이야기를
‘옛날이야기’나 ‘동화’ 같은 것으로 생각할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만일에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믿음 없는’ 태도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수호천사에 관한 예수님 말씀도 믿어야 하고, 수호천사의 일을 구체적으로 전해 주는 구약성경의 이야기도 믿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수호천사가 있고, 수호천사가 사람들을 늘 도와주고 있다는 것이 우리 교회의 믿음입니다.
그러니 ‘작은 이들’을 멸시하고 박해하는 것은, ‘작은 이들’을 특별히 더 보살피고 계시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큰 죄’입니다.
2) 사람에 따라서, “나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수호천사의 도움을 받은 적이 없다.” 라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지만, 수호천사의 도움을 생생하게 체험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많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운이 좋았다.
우연이다.’ 라고 말하면서 그 체험을 깎아내립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에게는 ‘운’이나 ‘우연’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섭리와 자비와 은총이 있을 뿐입니다.
3)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라는 제자들의 질문은, 하늘나라에 대한 궁금증이나 호기심 때문에 한 질문이 아니라,
자기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장 높은 사람인지
알고 싶어서 한 질문입니다(루카 9,46).
제자들의 논쟁을,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일에(마태 16,18) 연결해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그 일이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가장 높은 사람’으로 임명하신 일인지 알고 싶어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일은 베드로 사도를 가장 높은 사람으로 임명하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제자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당사자인 베드로 사도 자신이
“내가 제일 높다.” 라고 주장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질문에 직접적인 답변을 하지 않으시고, ‘어린이’가 되라는 가르침만 주셨습니다.
이 가르침은 “겸손한 사람이 되어라.” 라는 가르침이기도 하고, “하느님 앞에서, 인간은 누구나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라.” 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끼리 서열 문제로 다투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8월11일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복음: 마태 18,1-5.10.12-14: 보잘것없는 사람들이라도
오늘 복음은 제자들의 질문에서 시작한다.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1절) 인간은 본능적으로 서열을 묻고, 비교하며, 더 큰 자리를 찾으려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시선을 완전히 뒤집어 놓으신다. 한 어린아이를 가운데 세우시며,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3절)라고 선언하신다. 하늘 나라의 위대함은 세속적 경쟁과 권위가 아니라, 겸손과 단순함, 그리고 작은 이들에 대한 사랑에 달려 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본보기로 삼으신다. 아이는 부모의 말에 순수하게 믿음을 두고, 온전히 사랑한다. 이런 단순한 신뢰와 겸손이야말로 신앙인의 핵심이다. 예수님께서는 “종의 모습을 취하시어”(필리 2,7) 자신을 낮추셨고, 하늘 나라의 위대함은 바로 이런 낮춤을 통해 드러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10절) 작은 이들은 사회적으로 보잘것없고, 쉽게 무시되는 이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느님을 뵙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 각자가 하느님 앞에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를 드러낸다. 예수님은 작은 이들의 소중함을 잊어버린 양의 비유로 다시 설명하신다. 아흔아홉을 두고서라도 잃은 하나를 찾으시는 아버지의 마음이 곧 복음의 핵심이다. 구원은 다수를 위한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아버지의 집요한 사랑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주님은 제자들이 큰 자리를 다투자, 어린이를 가운데 세우셨다. 이는 그들에게 단순함과 겸손을 배우게 하기 위함이었다.”(Hom. in Matt. 58)라고 한다. 성 이레네오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어린이와 같이 단순한 마음 안에 더욱 완전하게 드러내신다.”(Adversus Haereses, IV 요약)라고 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지 말라.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오히려 더 크게 현존하신다.”(Sermones 요약)라고 하였다.
교리서는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린이들을 당신께 가까이 오도록 초대하시며, 그들 안에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을 보여 주신다.”(526, 2785항 참조) 사목 헌장은 이렇게 선언한다. “인간의 존엄은 사회적 지위나 능력으로 결정되지 않으며,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기에 누구도 업신여김을 받아서는 안 된다.”(12, 27, 29항 참조) 교회의 전통은 언제나 가장 작은 이들, 가난한 이들, 목소리 없는 이들을 우선으로 돌보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가르쳐 왔다.
잃은 양의 비유는 우리 각자가 하느님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보여 준다. 아흔아홉이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해 주님은 찾아오신다. 그래서 우리는 절대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하며, 동시에 다른 이들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