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말의 해
민수 6,22-27; 야고 4,13-15; 루카 12,35-60 / 설; 2026.2.17
오늘이 양력으로는 2026년 2월 17일이지만, 음력으로는 1월 1일 즉 정월 초하루입니다. 양력과 음력은 역법상 태양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하느냐 아니면 달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시간 질서입니다. 전 세계가 양력을 기준으로 삼기에 국가와 사회의 질서는 양력에 따라 움직이지만, 우리 민족으로 포함한 동아시아의 민속은 수천 년을 이어 내려온 정신 전통에 따라서 음력에 따라 움직이기에 설이나 추석 같은 큰 명절은 반드시 음력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법전에 명시되지는 않지만, 새 해 달력이 나오면 반드시 설과 추석 명절은 국가 공휴일이라고 빨간 글씨로 표시되고는 합니다.
음력으로는 십간 십이지(十干 十二支)에 따르는데, 십간 십이지는 동아시아 전통 역법에서 연, 월, 일, 시를 표기하는 22개의 글자 체계입니다. 하늘의 기운을 뜻하는 10개의 천간(天干)은 갑(甲), 을(乙), 병(丙), 정(丁), 무(戊), 기(己), 경(庚), 신(辛), 임(壬), 계(癸)를 말합니다. 땅의 동물을 상징하는 12개의 지지(地支)는 자(子-쥐), 축(丑-소), 인(寅-호랑이), 묘(卯-토끼), 진(辰-용), 사(巳-뱀), 오(午-말), 미(未-양), 신(申-원숭이), 유(酉-닭), 술(戌-개), 해(亥-돼지)입니다. 십간과 십이지를 순서대로 조합하여 60개의 조합을 만들어 해의 이름을 붙이는데, 올해는 병오년(丙午年)에 해당합니다.
2026년 병오년은 '붉은 말의 해'로, 불(火)을 상징하는 '병(丙)'과 말(馬)을 뜻하는 '오(午)'가 만나 열정, 에너지, 힘찬 도약, 그리고 강한 추진력을 의미합니다. 60년에 한 번 돌아오며, 역동적인 기운으로 개척과 성취, 변화를 상징하는 희망찬 한 해로 해석됩니다. 그 의미와 특성을 살펴보면, 붉은색은 열정과 에너지를 상징하고 말은 멈추지 않고 달리는 기운을 상징하여 도전 정신이 강한 해입니다. 그래서 거침없이 나아가는 적토마(赤兎馬, 붉은 털을 가진 토끼처럼 빠른 말로서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전설 속의 동물)처럼, 목표를 향해 과감히 실행하고 돌진하는 에너지가 역동성과 추진력이 가득한 해입니다. 그러니까 붉은색은 태양과 영원불멸의 힘을 상징하여, 멈추지 않는 노력으로 성과를 낼 수 있는 성취와 성공의 기운이 가득 찬 해로 여겨집니다. 60년에 다시 돌아온 붉은 말의 해는 열정적이고 주도적인 기질이 강해,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활기찬 에너지로 충만한 도전적인 분위기가 형성됩니다. 역법과 민속상의 뜻이 그렇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붉은 말의 해’에 담긴 민속 상의 뜻을 소상히 살펴보는 이유가 있습니다. 민속(民俗, Folklore)은 민간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고유한 생활 양식, 풍습, 신앙, 예술, 구전 문학 등을 총칭하며, 특정 집단의 역사와 삶을 담고 있는 문화적 특징으로서, 과거의 전통에 국한되지 않고 현대인들의 일상적 삶과 문화를 포함하는 생동감 있는 개념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민속에서는 생활 속의 지혜와 공동체 의식이 강조됩니다. 설 명절 풍습에서도 조상에게 공경하는 의식을 포함하여 가족이 모두 모여 어른들에게 세배를 드리고 떡국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 의식이 강조됩니다.
그런가 하면 하느님께 대한 흠숭지례를 가르치는 종교에서는 민속이 잡신에 대한 미신과 우상 숭배로 떨어지지 않도록 민속의 중심을 잡아 줍니다. 한국의 천주교는 18세기 말 자생적으로 수용된 이후, 조상 제사를 금지한 교리(조선 시대 유교 문화와의 갈등)와 한국 고유의 민속신앙(무속, 굿 등) 사이에서 토착화 과정을 거쳤습니다. 충효 사상과 결합하여 한국 문화 속에서 성모 신심과 성지 순례 등 독특한 신앙 형태로 정착하며 한국의 기층 문화와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천주교인들은 설 명절에도 가족이 함께 미사에 참례하여 하느님의 복을 받고 나서 조상께 올리는 차례 상에서 감사를 드리고 그 복을 세배와 음복으로 함께 나눕니다. 한국의 천주교는 전통 민속 및 유교 문화와 갈등을 겪으면서도, 이를 한국적인 방식으로 수용하여 고유한 신앙 형태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종교 질서와 무관한 민속은 사람들의 마음에서 중심을 잡아주지 못합니다. 신앙심이 없는 무신론자들이 갈수록 명절 행사를 소홀히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한편 민속을 무시한 종교는 외래 종교라는 이미지만 풍기게 되어 민족 구성원들의 마음에 뿌리를 내릴 수 없습니다. 명절에 성당에 와서 미사만 드리고 가족 행사를 소홀히 하는 신자들의 경우에 어린 자녀들에게 민족 전통은 물론 신앙심도 전수하지 못하는 일이 그것입니다. 민속과 종교는 한 민족의 삶과 정신세계를 지탱하는 두 축으로서 서로 깊은 영향을 주고 받으며 발전해 왔습니다. 제대로 된 가정에서는 미사를 봉헌하는 종교 행사도, 조상 공경과 세배와 음복과 놀이를 하는 가정 행사도 다 소중히 치룹니다. 하느님 신앙, 조상 공경 그리고 가족 화목은 우리 모두의 정신적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천주교의 가정 제례 의식은 미사에 참례하여 하느님께 복을 받은 후, 가정에서 상을 차려 놓고 십자가와 조상 사진을 모시고 시작–하느님 말씀–조상 추모 순서로 진행하며 위령 기도 즉 연도로 마치는 순서로 진행됩니다. 의식을 마친 다음에는 어른들에게 세배를 올리고 자손들에게 덕담을 베풀고 세배 돈을 나누어 주는 순서가 이어집니다. 올해는 붉은 말의 해이니만큼 이와 관련한 덕담이 오고 가야 하겠지요. 그러고 나서는 가족이 함께 떡국이나 만두국 등을 나누어 먹고 윷놀이, 널뛰기, 연날리기, 팽이치기 등의 놀이가 자유롭게 펼쳐집니다. 이렇게 설 명절은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며 조상의 은덕을 기리고 가족 공동체의 유대를 강화하는 중요한 날입니다.
교우 여러분!
병오년 설 명절을 맞이하여 온 가족이 모여 가문의 신앙을 확인하고 집안 식구들의 화목을 도모하는 따뜻한 자리를 마련하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새벽에 미사 참례하고 왔습니다.
항상 감사드리며 건강한 몸으로 우매한 저희들 일깨우시느라 혼신을 다하시는 열정 식지 않기를 소망하며 새해인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명절을 보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