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들이 별난 건가요? 잘 성장하고 있나요?”
우리 부부는 자식이 두 명이다. 딸 하나, 아들 하나. 연년생이다. 대망의 1990년, 내 나이 35살에 결혼하여 부지런히 자식을 두었다. 같은 자식이지만 딸과 아들은 전혀 다르다. 딸은 자기가 쓰던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소중하게 간직한다. 학창시절 사용하던 책과 공책 등 사용하던 물건이 그대로 있다. 아들은 당장 필요하지 않는 물건은 버린다. 자칭 미니멀라이프 생활을 한다. 둘 다 미혼이다. 우리 부부는 현재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아빠, 내 방 들어왔었지?” “아니.” “그럼 이거 뭐지?” 아들의 손에는 작은 손톱조각 하나가 들려 있다. 어떤 때에는 참외 씨 한 개를 들고 아빠를 추궁한다. 출입했던 증거를 갖고 몰아붙이는 것이다. 나는 억울하기만 하다. 손톱을 아들 방에 가서 깎은 적도 없고 참외 씨를 아들 방에 버린 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들은 귀가하면 아침 출근 전 자기 방의 외부인 출입 흔적을 민감하게 찾아낸다.
아들은 자기의 소중한 사적 공간이니 “제발 들어오지 말라”고 한다. 만약 들어오게 되면 미리 문자나 카톡으로 신고하고 출입하란다. 나의 생각은 다르다. 부모가 자식 방 출입을 하는데 무슨 신고나 허락이 필요하냐고 되묻는다. 때론 방 정리가 안 되어 있으면 정리도 하고 청소도 하고 부모로서 관리 감독할 의무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들과 임시 협정을 맺었다. 여하튼 아들 방 출입하지 않기로.
얼마 전 우리 집은 대대적인 공사를 했다. 거실 리모델링을 하는데 디자인 계획 및 업자 선정, 예산 부담은 아들이 맡았다. 부모에 함께 사는 대신에 지식이 특기를 발휘하여 거실을 현대적 감각으로 바꾸어주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벽지와 장판, 싱크대를 교체하는데 1주일이 걸렸다. 작업 순서는 싱크대 철거, 벽지 교체, 장판 교체, 싱크대 설치였다. 아내는 1주일 간 가스를 사용할 수 없어 음식조리에 애를 먹었다.
아내와 아들은 출근하였기 때문에 공사 현장을 지켜보는 것은 나였다. 씽크대의 상부장과 하부장을 철거하였다. 아파트 씽크대 뒷면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씽크대가 놓였던 부분은 타일이 없다. 설계가 그렇게 되었는지 몰라도 안 보이는 부분은 타일 공사를 생략한 것이다. 그렇게 해는 것이 시공 관례인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공사비는 절감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떼어낸 자리가 흉하다. 보이지 않는 곳까지 철저하게 하는 것이 선진국 아닌가?
아들은 떼어 낸 곳에 하부장만 설치한다. 그러면 상부장 있던 곳은 흉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여기엔 환풍기도 있는데 공사가 끝난 지금도 어수선한 모습이다. 대안으로는 타일을 바르던가, 페인트를 칠하던가. 벽지를 발라야 한다. 아들은 그대로 쓰자고 주장한다. 아내와 나는 보기 흉하니 대책을 강구하자고 한다.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우리 집 거실과 싱크대 다른 집과는 완전히 다르다. 거실에 걸레받이가 없다. 걸레받이란 벽과 바닥을 경계 짓는 것으로 청소할 때 걸레가 지나치는 곳이다. 이것이 있으면 벽지를 보호할 수 있다. 아들은 이 걸레받이가 눈에 거슬린다고 없앤 것이다. 도배하는 사람은 “이렇게 하는 집은 100 집 중 한 곳이예요. 보통사람들은 걸레받이를 하지요.”라고 말한다.
우리 집 씽크대 하부장. 밑부분이 뻥 뚫려있다. 대부분의 집은 씽크대 밑이 막혀 있다. 먼지나 이물질이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헤서다. 우리 집은 바닥이 훤히 보인다. 청소기나 걸레가 들락거릴 수 있게 해 놓았다. 아들은 밑부분을 막아 놓으면 속에서 바뀌벌레가 자랄 수 있고 청소를 하지 않기 때문에 비위생적이라고 한다. 바닥이 보여야 청소를 할 수 있다는 것. 설치업자에게 물으니 이렇게 하는 집은 0.1%라고 한다. 그러면서 아들의 생각이 일리가 있다고 한다.
장판 교체 후 일이 발생했다. 시공된 장판이 아들이 지정한 장판이 아니었던 것. 아들은 엷은 갈색 계통으로 해 달라고 계약했는데 엷은 회색 계통의 장판이 시공된 것. 계약 위반이다. 이럴 경우엔 어떻게 해야 하나? 귀가한 아들은 계약업자와 통화한다. 업자는 잘못을 시인하고 공사비의 15만원을 되돌려 주겠다고 한다. 우리 부부가 두 가지 장판을 비교해보니 이미 시공된 것은 현대적 분위기가 나고 아들이 정한 것은 따뜻한 분위기다. 50보, 100보이다.
업자와 다시 통화하니 80만원을 되돌려 주겠다고 한다. 아들은 우리 부부의 의견을 묻는다. 우리 부부는 “그게 그거이고 재시공하면 시간도 걸리니 돈 아낀 셈치고 그대로 쓰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장판비용 120만원에서 2/3를 절약한 것이다. 아들은 하룻밤 자고 나더니 처음 자기가 정한 것으로 제시공해야겠다고 한다. 부모세대와 자식세대가 이렇게 다른 것이다. 부모가 실리파라고 한다면 아들은 줏대파인가. 자신의 뜻을 그대로 관철한다.
아들은 대학시절 서울 사당동 원룸에서 수원으로 통학을 한 적이 있다. 수원 집 가까이 있는 대학을 두고 서울에서 통학을 한 것. 아들의 말이 지금도 귀에 들린다. “수원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이제 세상 보는 눈을 넓혀야겠다” 보증금과 월세는 부모가 부담했다. 용산 옥탑방에서는 자기 돈 돌여가며 리모델링하며 자취 생활을 한 적이 있다. 용산 전세보증금 역시 부모 부담이다. 난 혼자서 중얼거린다. “우리 아들 복에 겹구나!”
우리 아들, 제대로 자라고 있는 것인지 특별난 것인지? 우리 부부는 그것을 모르고 있다. 다만 함께 살면서 사는 맛을 느끼고 결혼하기 전 가족의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고 있다고 여기고 있다. 딸은 대학 때부터 서울 제기동에서 살았는데 올해 직장을 옮겨 성남 분당 아파트에 살고 있다. 딸 자취방 방문 횟수를 보니 서울 7년간보다 분당 4개월간이 더 많다. 부모와 자식은 가까이 살아야 하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