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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압계서원(鴨溪書院)
종 목 : 지방문화재자료 제35호(전북)
명 칭 : 압 계 서 원
지정일 : 1984년 04월 01일 지정
소재지 : 전북 장수군 산서면 학선리 산76 (구암길 77-14)
압계서원 전경
입춘지나고 며칠동안 봄인듯 착각하여 날씨가 좋았건만 동장군이 시샘하여 세찬 바람과 함께
영하의 날씨로 바뀌어 살을 애미는 추위로구나 하고픈일 춥다고 안할소냐 고로 난 가야한다
오리털 잠바 걸치고 출발하련다 오늘은 1984년 전북문화재자료 제35호로 지정된 산서면
학선리에 있는 압계서원을 답사하려 한다 압계(鴨溪)란 “오리가 노니는 시냇물 뜻이라
풀이해도 될련지 ?
압(鴨)字가 오리를 뜻하니 그럴듯하다 아이런하게 오리털 잠바를 입고 오리떼를 구경하러
가는것 같구나 전편에 산서가는 길 꽤 많이 소개를 해서 생략하고 산서파출소와 호룡보루를
깃점으로 출발점을 잡고자 한다 파출소 막 지나면 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 정면에 오른측 방향
압계서원 안내 표지판이 2.1㎞ 써있다 압계서원은 행정구역상 장수군 산서면 학선리 산76번지다.
라디오에 흘러나온 구수한 노래소리에 장단맞춰 조금 가다보면 왼쪽으로 구암마을과 압계서원의
표지판이 있다 마을 들어가는 길 왼쪽에는 150년 된 버드나무가 있다 마을의 바람 피해를 막으려
방풍림으로 심어졌다고 전해지며 지금은 장수군 보호수로 지정되어 관리하고 있다
시멘트 포장길따라 500m쯤 마을로 진입하면 마을 중간에 남향으로 지어진 마을회관이 나온다
구암 마을회관이다 회관 왼쪽으로 100m쯤에 압계서원이 우뚝 서있다 회관 뒤쪽으로는 산서의
명산 장수 제7경이라 일컷는 영대산이 마을을 포근히 감싸며 든든히 지키고 있다.
장수군 산서면 학선리 (용전, 압곡, 구암, 동고) 네 마을을 합쳐서 학선리라 칭하며
이 곳의 구암마을은 1700년경에 경주김씨 세 가구가 모여서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어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마을입구 서남쪽에 남생이 모양의 바위가 있어 이를 남성바위라
불렀는데 45여년전 1971년 행정구역 개편시 거북구(龜)字 와 바위암(巖)字 를써서
이 마을 이름을 구암(龜巖)마을 이라고 했다고 한다 현재는 20여가구가 모여서 살고있다
이 마을은 모두가 한가족 처럼 가깝게 지낸다고 한다
우리 속담에 팔백금(八百金)으로 집을사고 천금(千金)으로 이웃을 산다는 말이 있다
집보다도 이웃이 더 필요하고 중요하다 그런 뜻 일거다 이곳에서 도회지에서 못느낀
시골의 정을 맘껏 느껴본다.
압계서원(鴨溪書院)
창건 : 최초창건 1789년, 중건 1958년
위치 : 장수군 산서면 학선리 구암마을 회관 왼쪽 100m 지점
건물 : 입구 - 3문(솟을대문)-진덕문(進德門)이란 현판있음, 외삼문
울흥재(蔚興齋) - 강당(회합, 강의 공간), 정면4칸 측면3칸 팔작지붕
압계서원 창건 10년후 건립함
산앙문(山仰門) - 압계사(사우)입구 문, 내신문(內神門) 또는 상의문
협 문(夾 門) - 압계서원 좌측의 옆문
고 사(庫 舍) - 울흥재 옆쪽에 있는 숙소 성경재(誠敬齋)라 부른다
사 우(祠 宇) - 정면3칸, 측면2칸 맞배지붕 압계사(鴨溪祠)를 말함
향 사(享 祀) - 매년 음력 3월 17일에 봉행(奉行)한다
제 품(祭 品) - 4변(籩) 4두(豆)이다
유 물(遺 物) -『죽림서원지(竹林書院志)』 1책 등 50여종의 문헌
재산으로는 전답 3,500여 평과 임야 5정보가 있다.
오 현(五 賢) - 육려(陸麗), 임옥산(林玉山), 박이항(朴以恒), 박이겸(朴以謙), 육홍진(陸洪鎭)
정문 솟을대문은 잠궈져 있어 들어갈수 없고 왼쪽 측면에 협문(夾門)이 있다
이 문을 통해서 들어서면 압계서원을 들어갈 수 있다 압계서원은 조선 정조13년(1789) 창건
되었으며 창건당시는 육려, 임옥산, 박이항, 3현을 모시고 있었으나 1798년(정조 22)에
박이겸(朴以謙) 1799년에 전설(全渫)을 추가로 배향하였고 강당인 울흥재(蔚興齋)를 건립하였다
훗날 고종5년(1868)대원군 전국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었다 비록 서원은 없어 졌으나
후손들과 유림에 의하여 유허지(遺墟地)에 제단을 마련하고 향사를 계속하여 왔다 광복후 1958년
복설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육홍진의 위패는 복설이후 1987년에 추가로 모신 것이며 이 때
원래 모시고 있던 전설(全渫)의 위패는 자손이 응하지 않아 유림들에 의해 제외되었다.
서원내에 들어서면 정면에는 정면 4칸 측면 3칸 팔작지붕으로 된 울흥재가 있다
울흥재는 서원의 강당으로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서원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강론 장소로 사용했다 울흥재 앞 마당에는 압계사 사적비(史蹟碑)가 있고
옆쪽으로는 숙소로 사용한듯한 고사(庫舍)가 위치해 있다 이 곳을 성경재(誠敬齋)라 부른다
강당 뒤쪽에 내삼문 솟을대문이 있다 산앙문(山仰門) 또는 상의문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산앙문(山仰門) 열고 들어가면 산쪽으로 양지 바른곳에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지붕으로된
압계사가 있다 이 곳에서 학문과 효행으로 뛰어난 다섯분의 위패를 배향하여 제사를 지내고 있다
매년 음력 3월17일 봉행(奉行)하며 제품은 4변(籩) 4두(豆)이다.
예전에는 이곳 압계사를 산서면향약소(山西面鄕約所)로 이용 되기도 하였다 전해진다
압계사(鴨溪祠)란 어원은 사당앞에 흐르는 천(川)의 이름을 압계천 이라한다 고로 냇가의
이름을 따서 “압계사(鴨溪祠)”라 칭했다고 전해진다 근래 들어서는 압계서원이라 표현한다
관리자는 옥천육씨 육종영, 육동수 두 분으로 되어있으며 소유자 “옥천육씨 덕곡공종중” 으로
되어있다 이 곳의 중요물건 유물로는 ≪죽림서원지 竹林書院志≫1책 등 50여종의 문헌이 있고
압계사사적비(鴨溪祠事蹟碑)가 있으며 재산으로는 전답 3,500여평, 임야(산) 5정보가 있다.
압계서원 사적비
1) 주벽- 덕곡(德谷) 육려(陸麗)
선생은 고려말 무신으로 본관은 옥천 성은 육(陸)씨 휘는 려(麗) 자는 일중(日中) 아호는
덕곡(德谷)이다 관성군(管城君) 보(普)의 후예로 서북면 도원수(西北面 都元帥)를 역임하고
5도관찰사(五道觀察使)의 직에 있었다 1384년 우왕(禑王)9년 만주적(滿州賊) 오랑케라 표현함
호발도난(胡拔都亂)에 황희석(黃希碩) 이지란(李芝蘭) 등과 함께 진격하여 공을 세웠으며
왜구 내침 때에도 경주에 가서 큰 공을 세웠다 공양왕(恭讓王)때에 척불(斥佛-불교를 거부함)의
상소(上疏)를 올리고 유학의 진흥에 힘썼다 조선 건국되고 이성계가 왕에 올라서 선생께 전라도
도관찰사 직을 명하였으나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공주 산내면에 은거하여 지냈는데
이로인하여 은거한 곳 이름이 육덕리(陸德里)라 지금도 전해진다.
2) 국헌(菊軒) 임옥산(林玉山)
조선전기 효자로 본관은 조양(兆陽)이며 자는 인보(仁甫) 호는 국헌(菊軒)이다
1432년(세종14년) 장수현 산서면 오산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행이 특출하여 칭찬이
자자했다 성년 20살 되던해 1451년 문종(文宗) 1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456년 세조(2년) 무과에
급제해 군기직장(軍器直長)이되었다 모친상을 당하자 홀로된 아버지를 모시기위해 시묘(侍墓)를
생략하고 대신 3년 성묘를 극진히 하였다 이후 1474년(성종5년)겨울에 선진관에 임명되어
상경하여 한달여 머물다가 아버지 봉양을 위해 사직서를 제출했다 성종은 국헌 선생의 효성에
감복하여 장수현감을 제수하여 하향하게 하였다 1469년부터 1475년까지 장수현감으로 6년간
재직했다 재직중 효행이 극진하여 부친 병환을 돌보기 위하여 현청에서 60여리 떨어진 곳에서
다녔다 장수읍 *구락마을의 유래(비둘기 떨어짐)에서 알수있는 장본인 장수현감 이다
훗날 1496년 연산군이 능주현감(綾州縣監)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임명 하였으나 끝내 출사하지 않고 고향 장수에 머물렀다 한다 1502년(연산군 8) 7월 16일
향년 71세로 유명을 달리 하셨다.
압계서원 이모저모
3) 비암(秘岩) 박이항(朴以恒)
1555년(명종 10)∼1608년(선조 41) 조선 중기 유학자 자는 덕구(德久)이고 호는 비암(秘岩)
또는 고재(顧齋)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부친은 박충현(朴忠賢)이고 형은 삼암(三巖)
박이겸(朴以謙)이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 하였으며 학식과 덕망을 겸한 선비로
추앙 받았다 1584년(선조 17)에 활계(活溪) 이대유(李大甹) 등 13인을 규합하여 덕업계(德業稧)를
조직하고 백록동규약(白鹿洞規約)을 실천하며 교우했다 임진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고
군수품을 조달하였다 형님과 같이 친병(親病)에 효행이 있었고 시묘도 극진히 했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고 덕망이 높았으며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가
증직되었다 그의 문집으로《비암선생유고(秘巖先生遺稿)》가 전해진다 1921년에 간행한
박이겸 저서《삼암유고(三巖遺稿)》가 간행되었는데 이 책의 하편 권 3에 동생 박이항의
《비암유고(秘巖遺稿)》가 수록되어 있다 압계서원 (鴨溪書院)에 배향되었다.
4) 삼암(三巖) 박이겸(朴以謙, 1553∼1613)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덕후(德厚) 호는 의재(毅齋) 또는 삼암(三巖)이다
옥천(沃川) 삼암리(三巖里)에서 태어나 주계(朱溪:전북 무주)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충좌위부사직(忠佐衛副司直) 박충현(忠賢)이고 모친은 의흥박씨 화순현감 박준(埈)
딸이다 4형제 중 셋째로 태어난 선생은 삼종숙(三從叔)인 사종(嗣宗)의 문인이다
그가 20세 되던 해에 영남을 돌아 다니며 당시 거유들을 찾아뵈면서 조식(曺植)에게는
출처(出處)의 의리를 정구(鄭逑)에게는 성리설(性理說)과 예악형정설(禮樂刑政說)등을 듣고서는
집에 돌아와 과거에 뜻을 완전히 버리고 1580년 고향 삼암(三巖)에 정자를 짖고 후생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33세때 1585년 암행어사 목장흠(睦長欽)의 천거로 정릉참봉(貞陵參奉)이
제수 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이듬해 안읍(安邑)으로 중봉 조헌(重峯 趙憲)을 찾아갔다.
평생 性理學을 공부하면서 後學의 양성에 힘썼다 ≪중용≫과 ≪대학≫에 특히 조예가 깊었으며
그에서 얻어진 공부를 한글로 <입덕문가 入德門歌>라는 가사(歌詞)로 옮겨 누구나 쉽게 학문을
터득하도록 읽혔으며 또 세속이 술을 너무 쉽게 마시는 것을 금지 하려고 향음주례(鄕飮酒禮)를
베풀어 이의 폐단을 바로 잡으려 하였다
박이겸은 타고난 성품이 순수하고 비범 하였으며 어지러운 나라에 관직을 택하지않고 평생
야인으로서 위기지학(爲己之學 - 말과 행동이 일치된 삶)에 매진 하였다 평생 주자(朱子)를
존경하였으며 주자와 같아지기 위해 노력하였다 저서로는 ≪삼암유고≫ 2권이 있다
유림들의 건의에 의해서 장수군 산서에 있는 압계서원에 동생 비암(秘岩) 박이항(朴以恒) 같이
배향 하였다.
5) 문암(文巖) 육홍진(陸洪鎭)
선생의 휘는 홍진(洪鎭) 자는 경초(景初)이며 처음의 호는 랑옹(浪翁) 이라했으나
뒤에 문암(文巖)이라 고쳐불렀다 관향은 옥천이다 선생은 1748년 10월에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체모가 비범하고 천성이 효행으로 충실하고 학업전념에 소홀함이 없었다
삼종조(三從祖) 모아공(慕窩公)에게 입학하여 학문의 기초를 다듬어 장성하여 당대의 석학인
역천 송명흠(宋明欽)선생에게 사사하여 성리학을 터득하였다 선생께서는 산수(山水)를
사랑하시어 현 무주 문암(文巖)에 가택을 지어 거주하면서 스스로 호를 문암(文巖)이라 지었다
선생께서는 1810년(순조10년) 9월23일 서거하여 장수군 산서면 마하리에 안장 하였다
선생은 문암유고(文巖遺稿) 단권이 간행되었다 선생의 학식과 덕망은 사람들의 사표가 되어
유덕이 인면하게 전래되어 1987년에 장수유림들의 발의에 의하여 뒤늦게 이곳 압계사에 추가로
배향하였다.
압계사 답사를 마치고 서원 뒤쪽에 우뚝 서있는 영대산을 등반 하려고 한다 영대산은
장수8경중 제 7경인 산서의 명산이다 예전에는 영태산이라 불렀다 구암마을 회관에서
영대산 등산로 입구까지 600m쯤 올라가면 나온다 이곳 영대산 정상은 해발 666 고지다
등산로 안내판을 보면 쇠종골(구암마을)→무수밭골→열두구부→큰영두→뒷재→666고지
(영대산)이라 표기 되어있다 걸어서 천천히 정상에 갔다와도 약 2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압계서원 답사후 쉬엄쉬엄 영대산 정상에 올라 정기받고 건강도 챙기고 정신도 가다듬고 ...
호남의 진산이 팔공산 한 맥이 서향하여 갈무봉이 솟아 있고 갈무봉이 다시 서향하니
산세가 마치 용이 서리고 범이 꿀어 앉은듯 하여 장차 이름있는 땅과 큰터를 만들 증거인 듯 하다
산맥이 힘주어가다 다시 일어서니 수려해 보이고 인자해 보이는 모습은 글로써 아무리 표현해도
제대로 설명 하기란 부족하다 이 산을 보면 마치 장삼을 떨쳐입고 가사를 매고 백팔염주를 목에건
관음보살이 중생을 구제코자 백일 기도를 올린 듯 하며 깨끗이 소복한 어머니가 어린 자녀의
잠자리를 굽어살피듯 하여 어찌보면 그렇게 인자하고 어찌보면 그렇게 처량하게 보이는 산이
산서의 진산이고 장수의 5악 중 하나인 영대산이다 이 산에서 보는 달은 더욱 아름답고 산에서
보는 해는 더욱 멋이 난다 창공을 무시한 듯 의연히 솟은 팔공산을 넘어 찾아오는 보름달은
장엄한 고아경 보다 오히려 교교한 감흥을 솟구치게 한다 영대산을 이렇게 표현한다.
위에서 언급한 장수현감 임옥산의 구락마을 유래를 간단히 알아보고자 한다.
구락마을(鳩落) -
구락마을은 행정구역상 전북 장수군 장수읍 송천리 구락마을이다 장수읍 송천리는 원송천
이교마을, 용추동마을, 구락마을 4개마을을 합쳐서 송천리라 칭한다
장수읍 출발하여 남원방향으로 19번국도 약 3㎞쯤 오른쪽으로 마을이 있다 이 지역일대를
수남이라 부른다 예전에 장수읍을 둘로 나누었는데 하나는 水南面(물이 있는 남쪽에 있다)과
하나는 水內面(물이 있는 안쪽)이라 했다 훗날 수남과 수내를 통합하여 장수면이라 했다가
장수읍으로 승격했다 임옥산 현감은 부친을 극진히 봉양하는 효자로 알려져있다
부친을 조석으로 문안하기 위하여 산서에서 장수관아까지 60리를 매일 출. 퇴근 하였다
현감이 부친의 병환에 산비둘기가 효험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구할길 없어 안타까워 했다
그러던 어느날 퇴근을 하고 장수에서 산서로 가는길 이 마을앞 지날때 산비둘기가 임 현감의
도포자락으로 떨어졌다 현감은 비둘기를 부친께 정성으로 봉양했다고 한다 그래서 임현감은
이 마을 지명을 일컬어 비둘기 구(鳩), 떨어질 락(落)으로 써서 구락(鳩落)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조선문화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지명을 저그 맘대로 고치어서 아홉구(九)를
써가지고 지금까지도 구락(九洛)이라고 쓰고 있다 인근의 용계마을 이름도 이성계장군이 지명한
마을이다 고려말 왜놈들이 경상도를 거쳐 호남으로 진격할 때 남원 운봉에서 왜군을 전멸시켜
대승을 거둔 황산대첩이다 이성계장군 일원이 남원 운봉을 가기전에 용계마을 앞 산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피곤에 잠들어 있을때 닭이 울어서 깜짝놀라서 일어나 서둘러서 적이 오기전에
매복하여 대승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닭이 울어서 전쟁을 이기게 되었다 하여
이성계장군(훗날 조선 건국자) 이 마을 이름을 용용(龍)자 닭계(鷄)를 써서 용계마을 이라고
하사했다 즉 닭이 용의 화신이 되어 울어주어 서둘러 행동하여 전쟁 승리를 이끌었다는 것이다
일본놈들은 누구의 허락도 없이 닭계자를 시내계(溪)로 바꾸어 용계(龍溪)로 표기했다
불행중 다행으로 현재 도로명 주소지 표기법에 일부는 원래대로 바꿔서 표기한다.
~ 장수에서 호롱불 최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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