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나 유럽, 혹은 가까운 일본의 박스 오피스 집계를 살펴보면 각각의 영화가 벌어들인 수익금의 순서로 흥행 위가 결정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국내 흥행 순위는 어떠한가? 우리는 [올드보이] 전국 200만, 이런 식으로 관객숫자로 집계한다. 역대 한국영화 흥행 1위, [친구] 전국 830만, 이렇게 그 영화를 본 관객수가 얼마나 많은가가 흥행 순위의 척도다.
엄밀하게 따지면, 관객수가 많다고 해서 반드시 박스 오피스 1위는 아닐 수도 있다. 지역마다 관람 요금 차이가 있고, 같은 지역에서도 극장마다 요금이 다를 수 있다. 또 같은 극장에서도 조조나 주말, 혹은 심야 요금이 다르다. 그러므로 반드시, 절대적으로, 관객수가 많다고 해서 그 영화가 벌어들이는 수익금이 흥행 순위 바로 아랫 단계의 영화보다 많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관객수에 집착하는 국내 박스 오피스는 우리가 실제보다 명분에 집착하는 문화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나마 관객수로 흥행 순위를 결정하는 지금 현재의 국내 박스 오피스 집계도 정확하지 않다. 추정치일 뿐이다. 각 영화사가 보내온 자료를 수합해서 흥행 순위를 발표한다. 어떤 영화사는 자사 영화의 관람객수를 실제보다 부풀리기도 한다. 이에 수긍하지 못하는 경쟁 영화사는 박스 오피스 집계 자료 자체를 보내지 않는 보이콧을 행하기도 한다. 이번주 박스오피스 순위에 [낭만자객]이 빠져 있는 것은, 배급사인 CJ엔터테인먼트가 순위 집계를 수긍할 수 없다고 이의제기했기 때문이다. 영화가 극장이라는 상업적 유통 시스템을 통해서 소비되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 첫번째 단계인 수익금의 투명한 집계가 불분명하다는 사실은, 한국 영화 산업의 발전을 저해하는 첫번째 요인이 아닐 수 없다.
정치자금도 투명해야 정치발전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거대제작비가 투입되는 영화산업에서 돈 문제는 아주 중요하다. 재정적 투명함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한국영화산업은 토대가 튼튼하게 구축될 수 없다.
한때 극장 로비 입구에 하루종일 앉아서 표를 내고 들어오는 관람객들을 힐끗 바라보며 노트에 무엇인가를 기록하는 사람들이 있던 때도 있었다. 외국 영화 직배가 실시되고, 우리나라 극장들의 양심을 믿지 못하는 직배사들은 자사의 영화를 상영하는 전국 각 극장에 아르바이트 일용직 근로자를 보냈다. 그들은 수작업으로 일일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극장에 들어오는 관객들을 바를 정(정)자로 표기했었다. 어떤 극장에서는 입구에서 받은 표를 그대로 몰래 매표소로 돌려보내, 실제로는 100명의 관객이 들어왔다면 표는 20장 밖에 팔리지 않는 경우도 있다. 흥행은 되었지만 영화사는 돈을 벌지 못하고 극장주만 배부르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 이런 불법 때문이었다.
지금은 서울 시내 극장에서는 모두 전산 작업으로 입장권을 발매하고 있다. 적어도 서울 관객수만큼은 정확하게 집계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대다수의 지역에서는 전산망 설치를 기피한다. 각 가정에 1대 이상의 컴퓨터가 보급되어 있고 또 초고속통신망이 깔려 있는 정보통신의 강국인 우리나라에서 극장에 들어오는 관객수를 집계할만한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극장주들 자신이 극장에 전산망이 깔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산망이 깔리면 수익금이 투명하게 공개되고, 극장에서는 관객수에 따라서 절반 정도의 수익금(외국영화의 경우 입장료의 60%, 한국영화는 50%)을 영화사에 돌려 주어야 하는데, 소위 삥땅칠 방법이 없고 탈세할 방법이 없다. 극장으로 봐서는 통합전산망 구축이 이로울 것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니까 너무 극장주들을 공격하는 것 같지만, 영화계에서는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다. DJ 정부의 공약사업이었던 극장통합전산망 구축은 1999년 문광부가 첫 삽을 뜬 후 업자들간의 이해가 얽혀 법정분쟁을 거쳐 지지부진하다가 현재는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주관해 곧 실시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 극장통합전산망 구축이야말로 다른 그 무엇보다 우선시되는, 한국 영화산업의 발전을 위한 초석이다. 시급히 시행되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