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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우론
: 다큐멘터리 사진에서 리얼리티의 문제
이광수 (부산외국어대 교수. 사진비평가)
양승우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다. 다큐멘터리의 우선적 의미는 기록이니, 그는 어떤 대상의 실재를 자신이 판단하는 가치 위에서 사진으로 기록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가 작업의 소재로 삼아온 대상은 스스로 말한 바대로, 폭력과 섹스로 대변되는 소위 어둠의 세계다. 그 어둠의 세계를 관찰자의 전지적 시점으로 기록하지 않고, 그 안에 속한 1인칭 시점으로 찍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로부터 그 무서운 현장에 접근하는 태도가 치열하다는 것을, 무엇보다 높게 평가받아왔다. 그 스스로 용(龍) 문신으로 몸을 도배한 그 조폭들의 친구였고, 그 안에 들어가 살았으니, 치열한 작가 의식으로 무장하기가 비교적 충분하였다. 그러다 보니, 그 어떤 이도 감히 그들 앞에 카메라를 들이대지 못하는데, 양승우는 해낸, 어떤 신화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평가를 받곤 했다. 그런데 이는 어찌 보면 그의 작품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를 가려버리는 평가가 되기도 한다. 그의 작품을 잘 보면, 그 작품성은 단순히 어떤 어둠의 현장을 치열한 자세로 기록한 것에 지나지만은 않는다. 무엇보다도 그의 작품 안에 들어 있는 그만의 서사의 힘이 그의 현장에 대한 태도나 자세를 압도한다. 그 서사의 힘 안에 작품을 관통하는 진한 휴머니즘을 자아내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가 기록한 그 어둠의 세계 사람들의 장면들은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에겐 흔히 접할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이 사는 세계와 다른 어떤 세계고, 그러다 보니, 평가에 대한 갑의 권력을 가지는 그 보통 사람들 위치에서 볼 때, 그것들은 기괴하거나 추악하게 보인다. 양승우가 말하는바, 사회라는 톱니바퀴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세계 자체가 그렇게 평가되기 때문이다. 그 사람 아닌 사람들, 존재하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그가 택했고, 그들을 찍었다. 그러니 그들의 세계를 연속적으로 이어 보여주는 그 장면들은 마치 무슨 만화 같기도 하고, 허풍선이 쇼 같기도 하다. 그런데, 사진가 양승우의 눈과 카메라를 거쳐 나와 우리 앞에 선 그 모습들은 그렇게 기괴하거나 혐오스럽지 않다. 남자들이나 여자들이나 거리낌 없이 알몸을 드러내지만, 뭐 그다지 자극적이지도 않다. 음란하다기보다는 가식에 위선에 허위로 감추어놓은 것들을, 벗어던지는 장면으로 다가올 뿐이다. 그러니 그의 서사가 우리에게 전달하려는 것은, 그 혐오라고 규정한 데에서 맡는 ‘찐한’ 사람 냄새다. 그 ‘찐한’ 휴머니즘이 씁쓸하게 다가오는 건 또 다른 느낌일 테고. 전작 《청춘길일》에서부터 시작하여 지금 보여주는 《라스트 캬바레》에 이르기까지의 일련의 작품은 그 찐한 휴머니즘의 이야기다. 라스트 카바레가 문을 닫으면, 양승우는 호스트바로 달려갈 것이 틀림없다. 《라스트 캬바레》가 보여주는 여자 팬티 안으로 손을 집어넣거나, 끈 팬티 사이에 일만엔 짜리 지폐를 꽂아주는 풍경이 더는 혐오스럽지 않는 보통의 모습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혐오스러운 장면이 되려면 젊은 놈 빤스 안으로 늙다리 사모님 손이 들어가 꼼지락거리거나, 그 젊은 놈이 테이블 밑으로 기어들어 가 빅맥처럼 구겨진 어느 사모님의 허벅지 사이로 혀를 날름거리는 정도는 되어야 하니까.
톱니바퀴의 질서에 끼지 못하는 혐오의 인간 군상에 관한 기록을 해 온 다큐멘터리 사진가 양승우는 작품 ‘B side’와 동남아와 아프리카로 보이는 곳에서, 찍은 사진들을 통해 서사 방식에서 상당한 변신을 꾀한다. 어둠의 장소에 들어가 1인칭 시점으로 기록한 서사의 방식을 벗어나, 보통 사람들의, 그러나 여전히 사는 방식이 우리나 일본의 보통 사람들이 사는 선진 자본주의 사회와는 크게 달라, 역시 기괴하고, 혐오스럽게 보이는 그 세계에서 뭔가를 잡아내 서사를 꾸린다. 기록에서 해석으로, 사실에서 스토리텔링으로 옮겨간 것이다. 사람들은 이를 보고 양승우답지 않은 사진이라 궁시렁거린다지만, 정작 사진가 스스로는 이렇게 작품을 만든 자신을 천재라고 킥킥거린다. 그러면서, 이 작품은 열심히 하지도 않았다는 말을 전하는데, 나는 작가의 이런 고백이 좀 못마땅하다. 작품성이란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나오는 게 아니고, 결과물로서의 작품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가 열심히 했는지 안 했는지는 별 의미 없는 기준 아닌가 말이다.
사진가는 누군가의 얼굴을 파버리고, 예쁜 여자아이 인형의 목을 매달고, 목이 따인 도마뱀을 석쇠에 굽고, 돼지를 자루에 집어놓고 숨구멍을 터 코만 나오게 묶어 놓고, 돼지 두 마리를 쇠꼬챙이로 관통하는 장면들을 채집해 이미지로 만든다. 사진가는 그곳 사람들이 사는 삶의 세계를 기록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는 노가다 일하러 갔고, 거기서 사람들을 만났고, 그 속에서 카메라를 들고 그들과 부대끼면서 그들을 찍었지만, 그는 그곳을 기록한 것이 아니고, 이곳을 말하려 그곳을 채집 전유한 것이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곳에 관한 것이 아니고, 여전히 일본과 한국에서 쓰레기 취급을 당해 온 이곳의 그 탈락자들이다.
사진가 양승우가 이곳의 톱니바퀴 질서에서 탈락한 사람들의 세계에서 그런 기괴한 장면을 택하지 않고, 저 먼 곳에서 사는 보통 사람들의 세계에서 그런 실제 의미와 전적으로 다른 어떤 장면들을 골랐다는 사실이 양승우 사진에 관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출발선이 되어야 한다. 글이라면 그냥 써버리면 되고, 그림이라면 그냥 그려버리면 되고, 영화라면 그냥 연기하는 것을 찍으면 될 일인데, 사진가는 뭔가 저 장면을 보여주고 싶으면 주변의 일상에서 저 장면을 채집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사진가는 본질적으로는 전혀 닿지 않은 어떤 뜬금없는 장면을 채집, 전유하여 그 실재와는 전혀 다른 맥락으로 의미화를 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는 그 뜬금없는 전유를 사실 그 자체의 객관적 기술의 장면들과 한 공간에서 섞어버리기도 한다. 양승우는 지금까지 간간이 기록에 다른 실재를 전유로 섞여 놓긴 했는데, 이번에는 노골적으로 통째로 둘을 섞어버린다. 단순히 서로 다른 작품이 하나의 화이트 큐브 벽면에서 같이 전시되어서 하는 말은 아니다. 작업하는 시선이 기록에서 전유로, 해석으로 본격적으로 옮겨갔다. 양승우는 왜 저 먼 곳에서 보통 사람들의 세계에서 채집한 이미지를 어둠의 세계를 기술하는 이야기로 전유한 것일까?
사진이 나온 지 200년이 되어가는 동안, 사진으로 재현하는 그 대상, 세계 자체가 크게 변했다. 세계가 변하다 보니,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도 변하고, 재현의 대상도 변한다. 세계는 이제 로버트 카파가 기록하고자 했던 전쟁이 어떤 기록 가치 판단의 중심이 아니고, 도로시아 랭이나 루이스 하인이 정부를 설득하고 대중에게 호소한 가난과 노동자에 대한 휴머니즘이 그 중심을 이룬 것도 아니고, 복합적이고 이질적이고 중층적인 그래서 뭐가 뭔지 단순하게 재단할 수는 없는 세상이 되었다. 양승우는 이 세계를 추잡하고, 부패하고, 더러운 자들이 찐한 사람 냄새나는 사람들을 속이고, 꾸짖는, 마치 엊저녁에 퍼마신 술 다 게워놓은 공중변소 화장실 같은 세상으로 본다. 그는 한때 저 세계에 속해 있었다. 사진가로 명성을 떨치면서, 한순간 이쪽 세계로 넘어온 듯 보였지만, 기본적으로 호스트빠 호스트 혼자 올리는 매상이 2억4천만 엔인 세상에서 하루 노가다로 1만5천만 엔을 버는 한 여전히 저쪽 세계에 속한 사람이다. 그러니 카메라를 든 채 하루, 하루 노가다 노동을 하러 세계 각지로 떠난다. 호구지책이면서 동시에 카메라맨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곳은 양승우가 카메라를 들이대는 톱니바퀴에서 벗어난 자들의 세계가 아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여전히 그는 두고 온 그 탈락자들의 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을 손에서 놓을 수 없다. 뭔가를 말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뜬금없는 것으로도 말할 수 있고, 심지어는 침묵으로도 말을 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현의 길잡이로 잡은 것이 전유다. 존재란 누구나 보는 객관화의 대상일 수만은 없다는, 그래서 존재란 읽는 사람의 해석에 따라 그 성격이 규정된다는 인식이다. 양승우의 사진을 읽는 주변 사람들은 리얼리티를 원하지만, 정작 자신은 리얼리티란 해석에 달린 것일 뿐 그것이 단독자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여긴다. 사진에서 리얼리티란 무엇인가? 리얼리티는 피사체의 리얼리티인가 아니면 그 이미지를 만들어 보여주는 사진가가 의도하는 리얼리티인가, 아니면 그것을 보고 해석하는 읽는 이의 리얼리티인가의 문제인가? 피사체와 사진가와 독자, 3자 사이에서 리얼리티를 두고 간극이 발생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대상에 대해 사진가는 관찰자가 되고, 그 관찰자가 관찰한 것에 대해 독자는 또 다른 관찰자가 되니, 두 번의 시점 사이에서 간극이 생기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절대 리얼리티가 아니고, 전달해야 하는 그리고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변하는 상대적 리얼리티가 사진의 재현과 독해의 담론에서 중심에 서 있다. 사진은 설사 재현된 것이 같다더라도, 그것을 똑같은 느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매체다. 그 대상을 재현하는 이로부터 그만의 시선을 제거하는 기계적 객관화라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마찬가지 맥락으로 보는 이에 따라 서로 다른 감정이입이 일어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국, 사진에서 리얼리티란 상존(常存)하는거고, 변화하는 것이다. 그 다큐멘터리의 세계를 사진가 양승우가 좇는다.
양승우의 다큐멘터리 작업은 사라지는 것에 대한 비망록도 아니요, 역사적 의미 부여도 아니요, 뭔가 사람들을 설득하려는 운동 수단도 아니다. 그의 다큐멘터리는 자본주의 톱니바퀴 세계의 밖으로 탈락한 사람들에 대한 휴머니즘을 이야기로 전하는 것이다. 누구나의 태도와 취향, 아니 더 고상한 말로 하면 문명 속 보편이라는 카테고리 속에서 똬리를 틀고 있는 그러나 스스로는 짐짓 보여주지 않고 감추는, 한발 더 나아가면, 인간을 버리고, 짐승을 택한 그 기묘한 세계를 이야기로 전하는 것이다. 길바닥으로 내몰려 폐지처럼 구겨진 채 살아가는 자들을 게으르고, 더럽고, 무능력하다고 지적질하는 그 속물적이고, 퇴폐적이고, 잔인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앞뒤가 다른 그 양두구육의 세계를 재현하는 것이다. 기록 다큐멘터리스트가 스토리텔링 다큐멘터리를 품어가는 사진가 양승우의 폭과 깊이를 계속 더 보고 싶다.
양승우론
: 다큐멘터리 사진에서 리얼리티의 문제
이광수 (부산외국어대 교수. 사진비평가)
양승우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다. 다큐멘터리의 우선적 의미는 기록이니, 그는 어떤 대상의 실재를 자신이 판단하는 가치 위에서 사진으로 기록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가 작업의 소재로 삼아온 대상은 스스로 말한 바대로, 폭력과 섹스로 대변되는 소위 어둠의 세계다. 그 어둠의 세계를 관찰자의 전지적 시점으로 기록하지 않고, 그 안에 속한 1인칭 시점으로 찍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로부터 그 무서운 현장에 접근하는 태도가 치열하다는 것을, 무엇보다 높게 평가받아왔다. 그 스스로 용(龍) 문신으로 몸을 도배한 그 조폭들의 친구였고, 그 안에 들어가 살았으니, 치열한 작가 의식으로 무장하기가 비교적 충분하였다. 그러다 보니, 그 어떤 이도 감히 그들 앞에 카메라를 들이대지 못하는데, 양승우는 해낸, 어떤 신화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평가를 받곤 했다. 그런데 이는 어찌 보면 그의 작품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를 가려버리는 평가가 되기도 한다. 그의 작품을 잘 보면, 그 작품성은 단순히 어떤 어둠의 현장을 치열한 자세로 기록한 것에 지나지만은 않는다. 무엇보다도 그의 작품 안에 들어 있는 그만의 서사의 힘이 그의 현장에 대한 태도나 자세를 압도한다. 그 서사의 힘 안에 작품을 관통하는 진한 휴머니즘을 자아내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가 기록한 그 어둠의 세계 사람들의 장면들은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에겐 흔히 접할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이 사는 세계와 다른 어떤 세계고, 그러다 보니, 평가에 대한 갑의 권력을 가지는 그 보통 사람들 위치에서 볼 때, 그것들은 기괴하거나 추악하게 보인다. 양승우가 말하는바, 사회라는 톱니바퀴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세계 자체가 그렇게 평가되기 때문이다. 그 사람 아닌 사람들, 존재하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그가 택했고, 그들을 찍었다. 그러니 그들의 세계를 연속적으로 이어 보여주는 그 장면들은 마치 무슨 만화 같기도 하고, 허풍선이 쇼 같기도 하다. 그런데, 사진가 양승우의 눈과 카메라를 거쳐 나와 우리 앞에 선 그 모습들은 그렇게 기괴하거나 혐오스럽지 않다. 남자들이나 여자들이나 거리낌 없이 알몸을 드러내지만, 뭐 그다지 자극적이지도 않다. 음란하다기보다는 가식에 위선에 허위로 감추어놓은 것들을, 벗어던지는 장면으로 다가올 뿐이다. 그러니 그의 서사가 우리에게 전달하려는 것은, 그 혐오라고 규정한 데에서 맡는 ‘찐한’ 사람 냄새다. 그 ‘찐한’ 휴머니즘이 씁쓸하게 다가오는 건 또 다른 느낌일 테고. 전작 《청춘길일》에서부터 시작하여 지금 보여주는 《라스트 캬바레》에 이르기까지의 일련의 작품은 그 찐한 휴머니즘의 이야기다. 라스트 카바레가 문을 닫으면, 양승우는 호스트바로 달려갈 것이 틀림없다. 《라스트 캬바레》가 보여주는 여자 팬티 안으로 손을 집어넣거나, 끈 팬티 사이에 일만엔 짜리 지폐를 꽂아주는 풍경이 더는 혐오스럽지 않는 보통의 모습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혐오스러운 장면이 되려면 젊은 놈 빤스 안으로 늙다리 사모님 손이 들어가 꼼지락거리거나, 그 젊은 놈이 테이블 밑으로 기어들어 가 빅맥처럼 구겨진 어느 사모님의 허벅지 사이로 혀를 날름거리는 정도는 되어야 하니까.
톱니바퀴의 질서에 끼지 못하는 혐오의 인간 군상에 관한 기록을 해 온 다큐멘터리 사진가 양승우는 작품 ‘B side’와 동남아와 아프리카로 보이는 곳에서, 찍은 사진들을 통해 서사 방식에서 상당한 변신을 꾀한다. 어둠의 장소에 들어가 1인칭 시점으로 기록한 서사의 방식을 벗어나, 보통 사람들의, 그러나 여전히 사는 방식이 우리나 일본의 보통 사람들이 사는 선진 자본주의 사회와는 크게 달라, 역시 기괴하고, 혐오스럽게 보이는 그 세계에서 뭔가를 잡아내 서사를 꾸린다. 기록에서 해석으로, 사실에서 스토리텔링으로 옮겨간 것이다. 사람들은 이를 보고 양승우답지 않은 사진이라 궁시렁거린다지만, 정작 사진가 스스로는 이렇게 작품을 만든 자신을 천재라고 킥킥거린다. 그러면서, 이 작품은 열심히 하지도 않았다는 말을 전하는데, 나는 작가의 이런 고백이 좀 못마땅하다. 작품성이란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나오는 게 아니고, 결과물로서의 작품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가 열심히 했는지 안 했는지는 별 의미 없는 기준 아닌가 말이다.
사진가는 누군가의 얼굴을 파버리고, 예쁜 여자아이 인형의 목을 매달고, 목이 따인 도마뱀을 석쇠에 굽고, 돼지를 자루에 집어놓고 숨구멍을 터 코만 나오게 묶어 놓고, 돼지 두 마리를 쇠꼬챙이로 관통하는 장면들을 채집해 이미지로 만든다. 사진가는 그곳 사람들이 사는 삶의 세계를 기록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는 노가다 일하러 갔고, 거기서 사람들을 만났고, 그 속에서 카메라를 들고 그들과 부대끼면서 그들을 찍었지만, 그는 그곳을 기록한 것이 아니고, 이곳을 말하려 그곳을 채집 전유한 것이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곳에 관한 것이 아니고, 여전히 일본과 한국에서 쓰레기 취급을 당해 온 이곳의 그 탈락자들이다.
사진가 양승우가 이곳의 톱니바퀴 질서에서 탈락한 사람들의 세계에서 그런 기괴한 장면을 택하지 않고, 저 먼 곳에서 사는 보통 사람들의 세계에서 그런 실제 의미와 전적으로 다른 어떤 장면들을 골랐다는 사실이 양승우 사진에 관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출발선이 되어야 한다. 글이라면 그냥 써버리면 되고, 그림이라면 그냥 그려버리면 되고, 영화라면 그냥 연기하는 것을 찍으면 될 일인데, 사진가는 뭔가 저 장면을 보여주고 싶으면 주변의 일상에서 저 장면을 채집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사진가는 본질적으로는 전혀 닿지 않은 어떤 뜬금없는 장면을 채집, 전유하여 그 실재와는 전혀 다른 맥락으로 의미화를 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는 그 뜬금없는 전유를 사실 그 자체의 객관적 기술의 장면들과 한 공간에서 섞어버리기도 한다. 양승우는 지금까지 간간이 기록에 다른 실재를 전유로 섞여 놓긴 했는데, 이번에는 노골적으로 통째로 둘을 섞어버린다. 단순히 서로 다른 작품이 하나의 화이트 큐브 벽면에서 같이 전시되어서 하는 말은 아니다. 작업하는 시선이 기록에서 전유로, 해석으로 본격적으로 옮겨갔다. 양승우는 왜 저 먼 곳에서 보통 사람들의 세계에서 채집한 이미지를 어둠의 세계를 기술하는 이야기로 전유한 것일까?
사진이 나온 지 200년이 되어가는 동안, 사진으로 재현하는 그 대상, 세계 자체가 크게 변했다. 세계가 변하다 보니,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도 변하고, 재현의 대상도 변한다. 세계는 이제 로버트 카파가 기록하고자 했던 전쟁이 어떤 기록 가치 판단의 중심이 아니고, 도로시아 랭이나 루이스 하인이 정부를 설득하고 대중에게 호소한 가난과 노동자에 대한 휴머니즘이 그 중심을 이룬 것도 아니고, 복합적이고 이질적이고 중층적인 그래서 뭐가 뭔지 단순하게 재단할 수는 없는 세상이 되었다. 양승우는 이 세계를 추잡하고, 부패하고, 더러운 자들이 찐한 사람 냄새나는 사람들을 속이고, 꾸짖는, 마치 엊저녁에 퍼마신 술 다 게워놓은 공중변소 화장실 같은 세상으로 본다. 그는 한때 저 세계에 속해 있었다. 사진가로 명성을 떨치면서, 한순간 이쪽 세계로 넘어온 듯 보였지만, 기본적으로 호스트빠 호스트 혼자 올리는 매상이 2억4천만 엔인 세상에서 하루 노가다로 1만5천만 엔을 버는 한 여전히 저쪽 세계에 속한 사람이다. 그러니 카메라를 든 채 하루, 하루 노가다 노동을 하러 세계 각지로 떠난다. 호구지책이면서 동시에 카메라맨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곳은 양승우가 카메라를 들이대는 톱니바퀴에서 벗어난 자들의 세계가 아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여전히 그는 두고 온 그 탈락자들의 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을 손에서 놓을 수 없다. 뭔가를 말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뜬금없는 것으로도 말할 수 있고, 심지어는 침묵으로도 말을 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현의 길잡이로 잡은 것이 전유다. 존재란 누구나 보는 객관화의 대상일 수만은 없다는, 그래서 존재란 읽는 사람의 해석에 따라 그 성격이 규정된다는 인식이다. 양승우의 사진을 읽는 주변 사람들은 리얼리티를 원하지만, 정작 자신은 리얼리티란 해석에 달린 것일 뿐 그것이 단독자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여긴다. 사진에서 리얼리티란 무엇인가? 리얼리티는 피사체의 리얼리티인가 아니면 그 이미지를 만들어 보여주는 사진가가 의도하는 리얼리티인가, 아니면 그것을 보고 해석하는 읽는 이의 리얼리티인가의 문제인가? 피사체와 사진가와 독자, 3자 사이에서 리얼리티를 두고 간극이 발생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대상에 대해 사진가는 관찰자가 되고, 그 관찰자가 관찰한 것에 대해 독자는 또 다른 관찰자가 되니, 두 번의 시점 사이에서 간극이 생기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절대 리얼리티가 아니고, 전달해야 하는 그리고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변하는 상대적 리얼리티가 사진의 재현과 독해의 담론에서 중심에 서 있다. 사진은 설사 재현된 것이 같다더라도, 그것을 똑같은 느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매체다. 그 대상을 재현하는 이로부터 그만의 시선을 제거하는 기계적 객관화라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마찬가지 맥락으로 보는 이에 따라 서로 다른 감정이입이 일어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국, 사진에서 리얼리티란 상존(常存)하는거고, 변화하는 것이다. 그 다큐멘터리의 세계를 사진가 양승우가 좇는다.
양승우의 다큐멘터리 작업은 사라지는 것에 대한 비망록도 아니요, 역사적 의미 부여도 아니요, 뭔가 사람들을 설득하려는 운동 수단도 아니다. 그의 다큐멘터리는 자본주의 톱니바퀴 세계의 밖으로 탈락한 사람들에 대한 휴머니즘을 이야기로 전하는 것이다. 누구나의 태도와 취향, 아니 더 고상한 말로 하면 문명 속 보편이라는 카테고리 속에서 똬리를 틀고 있는 그러나 스스로는 짐짓 보여주지 않고 감추는, 한발 더 나아가면, 인간을 버리고, 짐승을 택한 그 기묘한 세계를 이야기로 전하는 것이다. 길바닥으로 내몰려 폐지처럼 구겨진 채 살아가는 자들을 게으르고, 더럽고, 무능력하다고 지적질하는 그 속물적이고, 퇴폐적이고, 잔인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앞뒤가 다른 그 양두구육의 세계를 재현하는 것이다. 기록 다큐멘터리스트가 스토리텔링 다큐멘터리를 품어가는 사진가 양승우의 폭과 깊이를 계속 더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