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조우 (4) – 백발 도사
“누구예요? 여기는 어떻게 올라왔어요?”
갑작스러운 사람의 출현에 정훈이 급히 태권도 방어 자세를 취하고 경계를 편다.
두꺼비 바위에 소리도 없이 올라와 눈앞에 우뚝 서 있는 사람은 머리칼이 허옇고 긴 남자다.
아래위 옷차림새는 개량한복이나 중국 무협 영화에 나오는 도복처럼 생긴 연한 갈색 옷을 입고 있다.
얼핏 보니 올려 묶어 상투를 튼 것처럼 보이는 머리만 희지, 약간 붉은 기운이 도는 얼굴은 수염과 주름도 없는 40대 초반으로 보인다. 준수한 용모를 지닌 사내는 뒷짐을 진 채 가는 눈으로 가만히 정훈을 노려보고 서 있다.
공격할 의도는 없다는 뜻이거나 당신보다 한 수 위니까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뜻이 담겨있는 자세다.
“누구세요? 이 산 주인이세요?”
정훈이 경계 자세를 풀고 호의적인 태도로 바꿨다.
“-안심하시오. 그대를 해치려는 사람은 아니오.“
사내가 뒷짐 졌던 왼손을 앞으로 내밀어 손바닥을 보이며 정훈을 안심시킨다.
그런데 목소리가 꼭 가면 쓰고 말하는 합성된 기계음처럼 부자연스럽게 들린다. 입술을 거의 열지 않고 말해서 그런가?
“그런데, 어떻게 올라오신 겁니까? 인기척도 없이…”
정훈은 사내의 차림새로 보아 지리산에서 수련을 닦고 있는 도인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3m가 넘는 바위를 단숨에 뛰어올라 설 수는 없을 것이다.
정훈이 안심을 하고 자기가 올라온 반대편 쪽으로 목을 빼고 두리번거리며 살펴본다.
분명 반대편에 사다리를 세우고 올라왔는데, 타이밍이 아주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는지도 모른다.
“-나는 밑에서 올라온 게 아니오. 위에서 내려왔소.”
백발의 사내는 별로 표정의 변화도 없이 말을 이었다.
“위에서 내려와요?… 무슨, 드론이라도 타고 온 겁니까?”
정훈이 주변을 두리번거려 살펴보아도 아무런 비행체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아직은 사람을 실어 나를 정도로 개발된 드론 완제품은 국내에는 없다.
“-아니요, 더 멀리, 아주 먼 지구 밖에서 날아왔소.”
말을 마친 사내가 실눈으로 정훈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반응을 살핀다.
“지구 밖이요? … 하하, 우주에서 온 외계인이란 말씀입니까?”
가만히 사내를 훑어보던 정훈은 이 아저씨가 수련입네 하고 산속에서 오랜 시간 홀로 기거하다가 약간 맛이 가버린 돌팔이 도사가 아닌가 싶어 웃고 말았다.
-쉬익. -슛!
그러자 갑자기 백발 사내가 십 일자형 다리로 왼손을 옆으로 뻗쳐 방어 자세를 취하더니, 연이어 오른손으로 상단 방어 자세를 취하며 오른발을 정훈 앞으로 내밀고 반보 전진한다.
“어, 뭐요? 한판 하시겠소?”
갑작스러운 백발 사내의 변화에 정훈이 끔쩍 놀라 반보 오른쪽으로 비켜서며 얼떨결에 방어 자세를 취했다.
-휘리~익, 휙!
그 순간 사내는 정훈이 서 있던 곳으로 한걸음 달려 나오는가 싶더니 훌쩍, 정훈을 스쳐 두꺼비 바위를 떠나 공중으로 솟구치는 게 아닌가?
‘어, 뭐야? 뛰어내려? 높은.. 데!’
바위 높이가 3m가 넘어 그냥 뛰어내리기가 만만한 정도가 아니다.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사내가 어느새 건너편 미륵암 쪽 신랑 모자 바위 중간에 올라서 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야? 저기까지 금세 날아갔어? 헉, 세상에!’
수평거리로 7m는 더 돼 보인다. 점프 전에 뛴 도약 거리가 2m도 안 되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저기까지 날아갔다니? 정훈이라면 충분한 도약 거리를 달려서 날아올라도, 수평거리 4m 이상의 점프는 어림도 없다.
‘야, 저 사람 보통이 아니네! 거의 경공술을 터득한 수준 같은데, 도대체 지리산에서 몇 년이나 수련했으면 저 정도로 날아다닐 수 있는 거야?’
정훈은 어이가 없어 얼이 빠진 채 멍하니 백발 사내를 바라보았다. 절로 감탄이 나올 만큼 놀라울 뿐이다.
사내는 신랑 모자 바위 중간에 자란 작은 낙락장송 곁에서 여전히 뒷짐을 진 채 정훈을 지긋이 응시하고만 있다.
“아저씨, 진짜 도사예요? 거기를 어떻게 건너뛰어 갔어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정훈이 자신의 솔직한 놀라움과 경탄의 심정을 전하며 손을 모아 손뼉을 치고 칭송했다.
그러자 백발도사가 허리를 굽혀 낙랑장송을 거머쥐더니 별로 힘들이는 기색도 없이 쑥 뽑아 올리는 게 아닌가? 바위틈에 오랜 세월 내린 갈퀴 같은 소나무 뿌리가 저렇게 쉽게 빠지는가 싶다.
도사는 소나무를 파낸 바위틈에 손을 집어넣고 뭔가를 찾는 것 같다. 잠시 후 원하는 걸 찾았는지 눈앞에 들어 올려 보더니, 소나무를 도로 제자리에 꽂아놓고 다시 뒷짐 진 자세로 정훈을 응시한다.
모든 동작이 적당한 배속으로 틀어놓은 슬로비디오를 보는 것처럼 무리 없이 매끄럽고 부드럽게 흘러간다.
“이왕 뽑은 소나무, 저 주시면 안 돼요? 분재 화분에 심어서 감상하게요.”
정훈이 웃으며 도사에게 낙락장송을 가리키며 손짓을 했다.
-휘리~익, 슉!
도사가 몸을 앞으로 움직이는가 싶더니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정훈이 놀란 눈으로 어~어, 하고 감탄할 사이도 없이, 도사는 정훈의 오른쪽 신랑 모자 바위로 걷듯이 날아와 사뿐히 멈춰 섰다.
‘이게 뭐야?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지! 어떻게 이럴 수가?’
무슨 무술 영화를 보는 것과 꼭 같은 장면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다. 아무리 지리산에서 수십 년간 무공을 쌓았어도 저렇게 날아다닐 수는 없다.
현실적으로 물리법칙에 어긋나는 황당한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자 정훈은 경악을 금치 못한다.
-휘리~익, 슉, 쿵!
정훈이 머리를 흔들어 도리질하며 정신을 집중하려는 순간, 백발도사는 또다시 공중으로 뛰어올라 정훈이 서 있는 두꺼비 바위 위로 건너와 우뚝 멈춰 섰다.
정훈은 너무 놀란 나머지 아연실색하여 두 걸음 물러서 자기도 모르게 방어 자세를 취했다.
“-자, 이거 팔목에 차시오. 그러고, 그대가 직접 가서 낙락장송 들고 오시오.”
도사가 정훈에게 팔찌처럼 생긴 물건을 불쑥 내민다.
“그게 뭐, 뭐요? 뭡니까?”
정훈이 완전히 쫄아서, 말까지 더듬고 버벅거린다.
“-그대에게 주는 선물이오. 팔뚝에 차면 체력이 다섯 배 이상 증가할 것이오. 우선 뛰어내려서 감을 잡고 저쪽 바위로 올라가 보시오.”
얼떨결에 받아서 살펴보니 가느다란 손목형 스마트시계처럼 생겼다.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나? 나한테 해코지하려면 이거 아니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정훈이 시계 팔찌를 손목에 끼워 찼다. 별다른 느낌은 없는데 기분 때문인지, 뭔가 조금 뜨듯한 기운이 전신을 타고 흐르는 것 같기도 하다.
“내 체력의 다섯 배로 향상돼요? 내가 서전트 점프가 60cm 정돈데, 그럼 3m 이상 제자리 뛰기가 된단 말입니까?”
“-천천히 무리 안 되게 뛰어 보세요.”
백발도사는 눈도 끔쩍 안 하고 정훈에게서 조금 비켜 서준다.
“음 흠. 엇싸!~”
정훈이 무릎을 조금 구부렸다 일어서며 농구 슛 동작을 취했다.
“어, 어어!~”
놀랄 일이다! 정훈의 몸이 1m를 훌쩍 넘겨 솟구쳐 올랐다.
“이거 정말 희한한데요! 어떻게 된 거죠?”
정훈은 자기가 겪고서도 실감이 나질 않는다. 조금 더 세게 뛰었으면 분명히 2m도 넘게 솟아올랐을 것 같다.
“-감 잡았으면 뛰어내려서 건너편 바위로 올라가 보세요. 다녀오면 내가 설명해 주리다.”
백발도사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거의 다물다시피 한 입술을 움직이며 웅얼거렸다.
“그러죠. 갔다 오면 아저씨가 누군지 자세히 알려주세요!”
정훈은 몇 번 깡충거리다 바위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냥도 이런 3m 정도는 떨어질 때 낙법으로 굴러서 착지할 수도 있는 높이다.
그런데 공중에 뜬 몸이 중력을 거부하는 것처럼 가볍고 천천히 내려앉는다. 10배도 더 빠른 속도로 찍어서 초당 24 프레임으로 틀어보는 고속 카메라 영상을 보는 느낌 그대로다.
어느새 두꺼비 바위 아래에 안착한 정훈은 놀라워하면서도 신비한 기운에 휩싸여 자신도 모르게 신랑 모자 바위로 향했다.
평지를 걷는 발걸음도 발바닥이나 발목에 부담이 느껴지지 않고, 마치 부드러운 양탄자 위를 걷는 가뿐한 기분이다.
신랑 모자 바위 아래에 도착한 정훈이 잠시 멈춰 서서 호흡을 조정한다.
소나무 있는 중간지점까지 높이가 3m 정도니까, 조금 힘주어 뛰어오르면 단숨에 올라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요상한 팔찌를 차지 않았다면 어림도 없겠지만!
“으랏, 챠아!~”
정훈이 기합 소리와 함께 제자리에서 서전트 점프로 뛰어올랐다.
솟구친 정훈의 몸이 커다란 황새가 나뭇가지로 날아와 앉는 것 같은 우아한 자세로 솟구쳐 올라 살포시 신랑 모자 바위에 안착해 내려앉는다.
‘햐아!~ 이거 정말 놀라운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이 팔찌는 뭐며, 저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정훈은 모자 바위 위에서 건너편 두꺼비 바위 위의 백발도사에게 손을 흔들어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도사는 말없이 손짓으로 정훈에게 지시를 내린다.
그 자리에서 아까 자기가 한 것처럼 오른쪽 신랑 모자 바위로 건너와서 다시 두꺼비 바위로 옮겨오라는 뜻 같다.
모자 바위에서 모자 바위까지의 거리는 거의 17m 정도나 된다.
`못할 거 뭐 있나? 저 양반 누군지는 몰라도 최소한 나쁜 사람은 아니다. 어쩌면 완전히 도통해서 후계자 찾는 진짜 지리산 도사 일지도 모르지! 이참에 제대로 해서 눈에 들고 나도 도사 제자 되어보는 거지 뭐. 가다가 떨어지면 낙법으로 굴렀다가 다시 뛰어올라도 되고! `
정훈은 마음속으로 다짐을 하고 손목 팔찌를 꽉 눌러 힘을 준 다음, 한 걸음 도움닫기로 바위를 힘껏 박차고 떠서 맞은편 신랑 모자 바위로 날아올랐다.
지상 4m의 높이다. 이 위치에서 만약 팔찌의 마법이 풀린다면, 그대로 추락해서 낙법으로 굴러도 늑골이 으스러질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