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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33:13-17 - 요셉지파
신명기 33:13-17
(33:13) 요셉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원하건대 그 땅이 여호와께 복을 받아 하늘의 보물인 이슬과 땅 아래에 저장한 물과
(33:14) 태양이 결실하게 하는 선물과 태음이 자라게 하는 선물과
(33:15) 옛 산의 좋은 산물과 영원한 작은 언덕의 선물과
(33:16) 땅의 선물과 거기 충만한 것과 가시떨기나무 가운데에 계시던 이의 은혜로 말미암아 복이 요셉의 머리에, 그의 형제 중 구별한 자의 정수리에 임할지로다
(33:17) 그는 첫 수송아지 같이 위엄이 있으니 그 뿔이 들소의 뿔 같도다 이것으로 민족들을 받아 땅 끝까지 이르리니 곧 에브라임의 자손은 만만이요 므낫세의 자손은 천천이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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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지파가 받은 복은
실은 그들만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다이아몬드의 이웃한 각면처럼
하나의 복이 각 지파를 통해서 어떤 식으로 다양하게 표출되는가를 소개하는 겁니다.
복이란 복받을 짓을 했기에 주어지는 겁니다.
그리고 그 복이라는 것은 ‘저주’를 배경으로 해서 대비적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따라서 복을 언급할 때는 저주도 같이 언급해야 합니다.
저주의 원형은 창세기 3:22에 나옵니다.
“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기에 반복성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즉 ‘영생’이란 같은 질(質)의 반복을 두고 말합니다.
문제는 이 반복이 무한으로 계속 이어진다는 겁니다.
도중에 딴 곳으로 빠질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겁니다.
확정된 운명이 됩니다.
동일한 것은 반복이라면 이미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죽음이 덮친 처지에서
무한히 이 저주성이 반복됩니다.
바로 이 ‘영원한 저주성’이 저주라면,
이 저주를 배경으로 영원히 반복되는 복락의 성질이 곧 확정된 축복입니다.
즉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기 전의 혜택이 영원히 반복적으로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이렇듯 이 지상에서 벌어지는 저주와 축복은 인간의 요구에 의해서 진행될 일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결심에 의해서 시행됩니다.
인간은 축복을 요구할 권리나 자격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자신의 미래를 보장하기 위해서 필사적인 노력을 합니다.
그것이 바로 천국에 관한 정보를 확보하는 짓입니다.
소위 앎으로 구원을 따내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미 ‘안다’는 그 성질조차 저주로 오염된 앎이요 지식입니다.
저주를 이겨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성도의 구원은 이 지상에서 사랑으로 성취됩니다.
사랑 앞에서는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이 무의미합니다.
특히 요셉 지파에 있어 사랑이 두드려집니다.
그 사랑은 곧 ‘희생’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된 희생이 요셉에게 찾아듭니다.
창세기 37:6-8에 보면,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그의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의 꿈과 그의 말로 말미암아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요셉이나 형들이나 이 꿈에 대해서
요셉 개인적인 영달과 관련된 꿈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실은 이것은 요셉이 성취시킬 꿈이 아닙니다.
요셉의 무능을 보여줄 꿈입니다.
왜냐하면 이 꿈이 성사되려면
요셉으로서는 관여할 수 없는 또 다른 꿈이
바로왕과 바로의 신하들에게도 주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요셉의 꿈이 중심이 되어
다른 꿈들이 연계되는데
이 꿈들이 새로운 현실을 등장시키게 됩니다.
이 현실은 기존의 현실을 심판하는 현실상입니다.
이에 비해서 인간들이 개인적으로 꾸는 꿈은 그야말로 개꿈입니다.
왜냐하면 그 꿈의 내용이 본인을 주인공으로 세워놓고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꿈들은 본인들이 경험했던 상황들이 혼란스럽게 짜깁기 되어 진행됩니다.
이 와중에서 인간들은 자신을 그 상황의 주인공으로 활동하게 되는데
그것이 마음먹은 대로 주변 상황이 따라주지 않고 번민하고 안절부절하다가 꿈이 깨곤 합니다.
반면에 요셉의 꿈은 장차 오실 예수님이 주인공입니다.
즉 친히 하나님께서 자기 나라를 지상에 건설하시겠다는 겁니다.
따라서 요셉의 꿈의 성취는
꿈을 꾸게 하시는 분, 곧 하나님과 꿈을 꾸었던 요셉과 따로 떼놓는데서 완성이 됩니다.
요셉은 자신이 새로운 현실의 주인공이 아님을 알아가야 했습니다.
그 꿈의 내막을 위하여 요셉은 역사라는 현장을 관통했어야 합니다.
그는 꿈으로 인하여 종으로 팔려나갑니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시 105:17-19)
요셉은 어디까지나 종의 역할에 충실해야 합니다.
종이 노력한다고 해서 국무총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국무총리가 되려면 추가적인 꿈이 연이어 삽입되어야 합니다.
즉 성도가 이 세상에서 요셉처럼 새로운 현실에 입성하려면
지속적으로 추가적인 하나님의 꿈이 찾아들어야 합니다.
마치 성도가 예수님을 업고 살아가는 식입니다.
과연 인간의 힘으로 감당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주신 계획을 위해 죄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분은 죄의 종으로 팔렸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그를 종처럼 다루었고 조롱했고 무시했습니다.
하나님인 줄도 모르고 뺨을 갈겼습니다.
그게 바로 저주받은 자라는 속성을 여지없이 드러낸 겁니다.
이 세상은 이 저주의 속성을 반복되어야 합니다.
마치 여자 아이들이 노는 고무줄 놀이 같습니다.
고무줄 끝지점을 이미 고정되어 있습니다.
아이들은 그 고정된 고무줄에 뛰어들어 반복적으로 노래를 부르며 고무줄을 제칩니다.
하나님 노래는 완성을 나타냅니다.
새롭게 다가선 현실은 기존의 저주스러운 현실과 확연히 다릅니다.
이 새로운 현실은 ‘희생’으로 가득채워져 있습니다.
희생의 반복입니다.
무한한 반복입니다.
예수님의 대한 찬미의 노래가 무한히 반복됩니다.
고정적이고 확정된 희생 정신으로 복락을 누립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집니다.
사도행전 2:17-19에 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 초대교회는 ‘예수님 다시 오심’이었습니다.
그들은 참는 가운데 감사했고 기뻐했습니다.
이 세상은 이 천국을 모독하는 세상입니다.
성도를 말로서, 신체적으로 때립니다.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세상이 때리는 ‘맷값’으로 사는 겁니다.
하지만 무한히 반복되지는 않을 겁니다.
181강ㅡ신 33장 13-17절(요셉지파의 축복)20180422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33장 13-17절입니다. 구약성경 317페이지입니다.
“요셉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원하건대 그 땅이 여호와께 복을 받아 하늘의 보물인 이슬과 땅 아래에 저장한 물과, 태양이 결실하게 하는 보물과 태음이 자라게 하는 보물과, 옛 산의 좋은 산물과 영원한 작은 언덕의 보물과 땅의 보물과 거기 충만한 것과 가시떨기나무 가운데에 계시던 이의 은혜로 말미암아 복이 요셉의 머리에 그의 형제 중 구별한 자의 정수리에 임할지로다, 그는 첫 수송아지 같이 위엄이 있으니 그 뿔이 들소의 뿔 같도다 이것으로 열방을 받아 땅 끝까지 이르리니 곧 에브라임의 만만이요 므낫세의 천천이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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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나오는 복의 내용을 보면서 우리는 시간이 정지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해야 됩니다.
복이라는 것은 시간 따라 복이 달라졌다가 많아졌다가 적어졌다가 하는 것이 아니라
확정적이 되어 버립니다. 복이 확정되어 버리면 그 복이 우리에게 반복적으로 주어지게 되죠.
이 반복적이라고 하는 것은
창세기 3장에 보면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인간에 대해서
그 형편을 이렇게 이야기 한 대목이 나옵니다.
창세기 3장 22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선악을 아는 상태에서 생명나무를 따 먹어 버리면
저주 받아야 될 “죽으리라, 따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의 영원한 반복이 되어 버립니다.
이게 바로 지옥이죠. 죽음이라 하는 것은 아침에도 이야기 했지만, 자살한다고 아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지옥의 심판이 곧 죽음이라는 것을 지금은 우리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무엇의 반복이냐 하면,
끝이 없어요, 한번 갇혔다 하면 10년 복역하고 나와야 하는데
그게 없이 계속 반복을 해버리는 겁니다.
매크로처럼. 댓글 달면 계속 반복 되듯이.
계속해서 반복 반복을 시켜버리는 겁니다.
영원토록.
이것은 계속 반복되는 구조 안에서
인간은 처음부터 거기에서 만들어 졌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된 반복이냐, 아니면 저주의 반복이냐,
어쨌든 남는 것은 반복밖에 없어요.
구조 자체가.
만약에, 정말 만약인데 선악과를 안 따 먹었으면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반복해서 영원히 살았을 거예요.
단 조건이 선악과 안 따 먹는 조건 하에 영원히 살다가
만약에 한 2500만년 살다가 선악과 따 먹으면 그 다음부터는 죽음이죠.
그래서 이 반복적인 것을 끊어주는 거,
이게 사실은 사랑이라는 겁니다.
반복되는 저주를 끊어주는 이게 바로 사랑이죠.
그런데 인간이 이미 선악을 알고 있는 입장에서는
자기가 아는 것을 가지고 자기를 끄집어내야 되는 그 방식 외에는
다른 방식은 대안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물에 빠졌는데 잡히는 것은
자기 운동화 끈 밖에 없다면, 그래서 같이 빠진 운동화 끈 잡아당기면
그 사람이 그 물에서 빠져나올 수 있겠느냐 하는 겁니다.
자기 몸을 자기가 붙들고 나오면 그게 구원이 되겠습니까?
안되지요.
똑같은 같은 동질이기 때문에. 같은 동질성이거든요.
안다는 것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나의 동질성에서 일부를 안다는 거예요.
어느 정도까지 알면 그 아는 것이 나를 구원하겠는가.
그런데 그 앎은 이미 나에게서 반복되는 저주에서 나오는 앎이기 때문에
그 저주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이 만큼 알면 또 더 알아야 되고, 그 만큼 알면 또 더 알아야 되고,
그 안 만큼 또 모르는 게 또 생겨버리고
도대체 어디까지 알아야 다 알 수 있는 겁니까?
그 모든 앎을 종결시키고 그 안다는 것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은 사랑밖에 없습니다.
사랑은 우리가 아는 것이 아무짝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솔로몬이 온갖 것 다 알았어요.
책도 많이 보고, 책도 많이 쓰고, 꼭 누구 같이 그렇게 책도 많이 보고 쓰고 했는데
헛되고 헛되니 그건 시력만 나빠질 뿐,
몸만 지치고 피곤할 뿐이라는 겁니다.
그게 어떻게 자기를 구원하느냐 하는 겁니다.
주어지는 허무, 그 허무를 아는 것으로 다 정복을 하겠습니까?
허무는 넓고 아는 것은 얼마 안 되는데
어떻게 그 아는 것으로 허무를 다 지배를 할 수 있겠습니까?
안됩니다.
그러나 안 된다고 할지라도 인간이 이쪽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그 아는 것밖에 없으니까
결국에 이거는 주변에서 사랑이 와야 돼요.
아는 것을 무의미하게 할 뿐만 아니고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의 모든 활동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고 했잖아요.
그게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들어서 그래요.
그러면 사랑이 오게 되면
그 다음에는 우리가 ‘사랑이 오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라는 질문이
자동적으로 나오게 되는데
그 사랑이 오늘 처음에 이야기 한 것처럼
시간 따라 사랑이 변해버리면 이건 소용이 없어요.
그런 사랑은 사랑이 아니죠.
고정적이어야 해요.
그걸 가지고 세 글자로 ‘안정성’이라고 합니다.
안정성이라는 것은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상관없는 거.
하늘에서 이미 안정적이라면 지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 하늘에 안정성 때문에 오히려 지상에서 요동친다 할지라도
그럴 때마다 하늘의 확정된, 이미 굳히기 들어간 그 안정성이 안정성답게 두드러질 뿐이에요.
기분 좋지요.
온갖 변화가 일어난다 할지라도
고개 쳐들고 잠시 하늘만 쳐다보게 되면
‘아, 이래서 지상에서는 안정한 게 없구나, 확고한 게 없구나.’ 라는 것을 새삼 느끼면서
그야 말로 자이로톨 껌처럼 휘산 작용이 일어나요. 우리 몸에. 확 퍼지지요.
온 몸에 확 퍼지면서
‘죽을 자는 죽고,
돈 버는 자는 돈 벌고,
가난한 자는 가난해라’라고 하는 거죠.
어차피 그건 안정성하고 거리가 먼 거니까, 안정성하고 상관없으니까.
고정된 반복.
이 고정된 반복을 사실은 우리 어릴 때부터 많이 겪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아이들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골목에 나가면 여자 아이들이 고무줄놀이 하죠.
‘푸른 하늘 은하수~’하면서 하는데 고무줄놀이 하면 양쪽 처음과 끝이 고정되어야 해요.
고정되고 그 아이들은 노래 부르면서 계속 반복 합니다.
‘푸른 하늘 은하수~’하면서 치마 펄럭이면서 계속 뛰고 있고, ‘무찌르자 오랑캐~’
매번 같은 노래 ‘푸른 하늘 은하수~’ 계속해서 같은 노래를 반복하죠.
그게 끝이 언제냐 하면 “야, 밥 먹으로 와라” 하면 그때 철수합니다.
고정된 거. 시작과 끝이 확정될 때 고무줄놀이가 시작되는 겁니다.
고무줄놀이의 노래가 신명기 33장이에요.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겁니다.
여기에 나오는 요셉이라고 하는 것은
요셉을 본인들이 갖는 것이 아니고
요셉을 대표자로 해서 이스라엘 전체가 공히 드러내는 고정된 거, 안정적인 것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안정적인데 이 다이아몬드에 보면 면이 다양하잖아요.
각 면마다 옆에 이웃하고 있는 면과 다른 색깔을 내듯이
열두 조각의 열두 면의 다이아몬드가 사실은 하나인데요,
각자 보여주는 기능에 따라서
이쪽에는 요셉 지파를 통해서 안정성,
저쪽에는 베냐민 지파를 통해서
안정성이라는 것은 완료성,
또 다른 말로 하면 반복성,
영원한 새로운 길인 영생의 반복성,
축복의 반복성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계속해서 나오는겁니다.
그러면 이것을, 이제부터 좀 어려운 데요,
‘이스라엘이 복을 받았으면 이스라엘은 더 이상 나라가 진척될 필요가 없지 않느냐’라고 하는데 이 내용을,
고정된 반복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역사라는 것을 관통하게 되어 있어요.
역사를 관통하게.
역사를 통과하면서 그들은 뭐냐 하면,
하늘이 주는 꿈과 자기들이 꾸는 개꿈과의 그 차이성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마치 다니엘 세친구가 불속에 들어갔죠,
죽으면 죽으리라 하면서.
이것은 에스더도 마찬가지예요, 죽으면 죽으리라.
뭔가 ‘역사의 시간의 흐름에도 달라질 것 없어요.’ 라고 외칠 수 있는 요소가 우리 안에 있어야 되고
이스라엘 전체에 있어야 되는데
그것을 ‘시간이 지나고 역사가 흘러도 달라질 것 없습니다.’ 라고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주변 역사 속을 그냥 관통을 해줘야 합니다.
그 방식이 뭐냐 하면 예수님의 공생애 방식이에요.
예수님은 구원자 이면서도 인간의 역사 속에 그곳을 몸소 힘들게 살았습니다.
온갖 수모가 있고 억압이 있었지만 달라질 것 없어요.
여러분들도 달라지지 않는 것을 믿어야 돼요. 달라지지 않는 것.
그러면 달라진 것과 달라지지 않는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달라지는 건 뭐냐?
우리 성깔이죠. 우리 성깔이에요.
인간의 신체는 주변의 습도와 온도 세세한 날씨
그거 하나로도 우리의 감정은 수시로 들락날락 변합니다.
수시로. 좀 돈 벌면 좋아가지고 ‘주여, 감사합니다.’하면서 감사헌금 챙기고
좀 안되면 ‘이 저주 받을 인간들’하면서 나자빠지고.
본인도 세상에 일조하면서 세상 따라 같이 변덕을 부리는 그런 변덕쟁이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 속에 ‘무찌르자 오랑캐’ 노래가 절로 매일같이 나오도록 확정된 것이 있어야 되는데
제가 처음에 그걸 ‘사랑’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여기 본문에서는 요셉지파라고 했으니
신명기 오기 전에 창세기에서 요셉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봐야죠.
창세기 37장에 보면 요셉은 꿈을 꿉니다.
이 꿈이 인간들이 흔히 꾸는 개꿈하고 달라요.
인간의 꿈을 분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프로이드라는 사람이 분석을 했는데
그 프로이드라는 사람이 분석하면서
결론 내는 부분에 있어서 자기도 못 뽑아 낸 것이 있어요.
꿈을 한 2만 가지를 분석했어요.
지독하죠? 2만 가지. 꿈의 해석이라는 책을 보면 2만 가지니까
어지간한 꿈은 다 포함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 결론을 정리하는데 있어서 성령을 안 받아서 그런지 크게 정리를 잘 못하고 있어요.
그 사람이 정리를 어떻게 했느냐 하면
이 세상의 모든 의식은 무의식에서 편집되어서
자기가 조작한 것이 나온다는 겁니다.
따라서 밑에는 무의식이 작용하고 있는데
의식이 있는 그것이 사람의 전부가 아니다,
인간은 의식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보는데,
자기 자신은 사실 자기 자신을 모르고,
꿈에 나타난 무의식이 있는데,
꿈을 해석하면서 의식적으로 해석을 해버리니까
이건 무의식이 들어가도 의식의 일부로 포함되어서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면 모르는데 무의식적으로 나타난 게 있다는 거예요.
갑자기 욕설이 나온다든지,
평소에 아무 생각 없이 하는 행동들,
그리고 이상하게 누굴 보았는데 어릴 때 아픔과 트라우마가 있어가지고
이유 없이 그 사람에게는 확 달라드는 거예요.
저 사람은 내가 어릴 때 나를 괴롭히던 내 옆 짝꿍하고 많이 닮았는지 잘 모르겠는데
얼굴 낯짝만 봐도 꼴 보기 싫은 거 있잖아요.
얼굴만 봐도 싫은 거. 다른 사람은 괜찮은데 그 사람은 발짝을 일으키는 거.
그런 것이 바로 인간의 정서를 자극한다고 이렇게 이야기 했는데
그 사람은 가장 중요한 걸 놓쳤어요.
그게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의 개꿈은 주인공이 본인이에요.
여러분 제 말을 듣고 오늘부터 한번 실습을 해보고 분석해 보세요.
모든 꿈에는 본인이 주인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 현장에 주인공이 된 냥
지가 자꾸 역할을 하고 그 속에 끼어 들어요.
주인공 노릇도 못해요.
사실은. 못하면서 자기가 관계도 없으면서 주인공 노릇하면서
그 일을 감당을 못해가지고 ‘우짜꼬, 우짜꼬’ 하다 깨보면 꿈이에요.
모든 꿈에 보면 다 그래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은 꿈속에서 자기가 대장질 하고 있다는 겁니다.
아니면 대장질 하고 싶은 욕망이 그 역할을 하고 싶어 해요.
꿈에 내가 어릴 때 어떤 지점이,
내가 살던 그 동네가 꿈에 나타났다면
그때는 어릴 때이기 때문에 주인공이 될 수 가 없어요.
어른들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그런데 꿈속에서는 어린 내가 그 지역에,
어릴 때 놀던 그 지역에 주인공으로 살아가요.
주인공으로.
어릴 때 내가 어떤 2층 집에 간 적이 있는데
그 2층 집에 내가 주인공으로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 꿈을 분석하면서 해석해 보세요.
본인이 2층집에 친구 집에 놀러 갈 때
그 때 점심 먹었나, 저녁 먹었나, 이런 것은 꿈에 안 나타나거든요.
자기가 어른 행사하고 주인공 행사하는 것만 나오지
저녁 먹고 갔는지 점심 먹고 갔는지 안 나온다고요.
그러면 점심이나 저녁을 안 먹게 되면 무슨 힘으로 2층 집에 놀러 가겠습니까?
그러니까 현실은 뭐냐 하면 2층 집에 갈 수 있어요.
그러면 점심이나 저녁을 사먹고 가야 돼요.
점심 사 먹을 만 한 돈이 있어야 돼요.
그러면 현실은 뭐냐,
2층 집에 놀러가는 그 돈을 벌기 위해서 사는 게
이게 현실입니다.
현실에서는 자기가 주인공이 아니에요.
뭔가 돈을 계속 벌어야 한다는 이 실감나는 현실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낮이거든요.
낮인데 밤에 잠을 자게 되면
밥은 엄마 아빠가 주니까 기본으로 먹는 거고
나는 밥 먹고 난 뒤에 나는 이렇게 낭만적인 생활을 하고 싶다는
그것이 꿈에 나온다는 말이죠. 꿈에.
꿈은 뭐가 필요하냐 하면
돈 벌면서 세상에서 고생하는 게 꿈에 안 나타난다 말이죠.
돈 버는 게 아니고 자기 즐기고 싶은 동화 같은 세계와
즐기고 싶은 것만 꿈에 남아 있다 이 말입니다.
여러분 세상이라 하는 것은 매 맞는 시간들이에요.
월급은 매 값입니다.
온갖 사람이 말로, 폭력으로, 물 컵 던지면서 그것을 견뎌야 월급날 돈을 쥘 수 있다고요.
그런데 왜 그렇게 수모 당하면서 온갖 더러운 소리 다 들으면서 왜 삽니까?
어릴 때의 신데렐라 꿈을 놓치기 싫어서.
어릴 때 마음껏 들판을 헤매던 그 시절,
밥은 부모가 제공 하니까 밥걱정, 돈 걱정 안하고
그냥 마음껏 내 몸을 자연에 맡기면서 활개 치던
그 때의 그 꿈은 무의식 속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죽을 때까지.
어릴 때 꿈은 장기 기억 속에 남아 있다고 하잖아요.
그 꿈이 뭐냐 하면 자기가 주인공 되고
거기선 전부다 자기가 중심이 되고
세상은 자기중심으로 돌아가고, 그게 바로 개꿈이죠. 개꿈 되는 겁니다.
이것은 ‘무찌르자 오랑캐~’ 하면 자기가 오랑캐예요.
그거는 절대 범죄 한 인간, 죄 짓고 난 뒤의 인간이 인간의 현실을 토로하는 거,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예요.
그렇게 밤에 꿈꾸고 어릴 적 꿈꾸다가 아침 되고 낮이 되면
‘그래, 가자. 오늘도 매 맞으러. 오늘은 또 누가 때릴까.’ 그렇게 매 값 벌로 갑니다.
물 컵도 몇 개 맞고. 더러워도 참아야지 어쩌겠습니까.
아이가 방금 대학 들어갔는데 이 물 컵 정도야 뭐. 이런 식으로.
그게 현실입니다.
그런데 프로이드는 그걸 모르는 거죠.
인간은 영원히 자기가 주인공이라는 이 사실을 부정을 안 하는 겁니다.
왜냐면 그걸 부정해 버리면 “우리가 주인공이지 그럼 누가 주인공인데”라고 하면서
그 사람은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주인공이 따로 없다고 생각하고
인간인 내가 주인공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요셉은 꿈을 꿨는데 다른 꿈을 꿨어요.
본인이 주인공이 아닙니다.
본인이 주인공 같으면 주인공이 되어서 낭만적으로 펼쳐야 되는데
요셉이 꾼 꿈은 그야말로 하나님이 장차 모든 것을 완성 시키고 확정되고 난 뒤의 꿈을
요셉이 미리 꿈을 꿔 버려요.
자기 꿈 아닙니다.
주님 꿈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당시 메시아의 꿈을 요셉이라는 개인이 같이 꿈에 들어오니까
요셉이 여기서 착각을 일으키는 겁니다.
‘야, 내가 대단한 존재가 되는구나.’라고 착각을 일으키는 거죠.
착각을 일으키기 때문에 요셉의 꿈의 완성은
요셉의 꿈의 내용과 꿈의 주인공과 꿈을 꾼 요셉이라는 인간과
떼 놓는 이 과정이 마감될 때 비로소 요셉의 꿈의 실체가 드러나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요셉의 꾼 꿈과 같은 연결 된 꿈이 요셉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바로 왕에게도 꿈이 꾸어 진다는 사실이에요.
바로 왕에게도.
그러면 이건 요셉이 의도한 꿈이 아닙니다.
여러분 지금 피곤해서 제가 지금 무슨 말 하는 지 잘 모르겠죠?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이렇습니다.
2장 17절에 보면
“하나님이 가로되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할 때에
이 꿈은 우리들의 개꿈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숨겨진 진짜 하나님의 준비된 현실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 꿈이 없으면 여러분은 신자 아닙니다. 교회 나와도 소용없어요.
예수 이름으로 기도해도 소용없어요. 그건 전부다 개꿈입니다.
진짜 우리가 꿈을 꾸는 게 아니에요.
꿈이 우리를 갖고 노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죽을 지경이죠. 우리가.
우리가 언제 예수님을 짊어지려고 했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예수 짊어지는 거 감당하겠어요?
치매 걸린 노인네 업는 것도 감당 못하는데.
우리가 예수님을 짊어지고 평생을 살 자신이 있습니까?
갖다 버릴 수도 없고. 주님께서 갖다 버리도록 허락을 안 하죠.
“이랴! 이랴!” 하면서 회초리 막 돌리는 데요.
주님이 허락도 없이 어깨에 올라탔어요. 그리고 그게 꿈이에요.
그게. 그게 주님의 꿈이에요.
제가 제일 싫어하는 대중가요 중 하나가 ‘거위의 꿈’이라는 노래예요.
그런 거 있어요. 인순이가 부른 거위의 꿈. 가사 내용이 얼마나 거슬리는 지.
뭐 내용은 뻔하죠. 이거 참고 견디면 네가 성공한다는
뭐 그런 내용이에요. 마법의 성 비슷하게.
그게 바로 마귀가 준 저주의 반복이에요. 지옥의 반복이라니까요.
얼마나 받은 꿈이 없으면 억지로라도 옛날 신데렐라의 꿈, 백설 공주 꿈을 자기가 지어내겠습니까?
사람의 만남은 꿈과 꿈의 만남입니다.
세상에 가서 이야기 해 보세요.
너의 꿈 내놓고 나의 꿈 내 놓아요.
자기 꿈은 성공해야 하고 내 꿈은 실패해도 된다는 이야기예요.
대화가 될 리가 없고 거래가 성사가 안 되죠. 될 수가 없죠.
마지막 때에 모든 택한 백성에게, 성도에게 꿈을 꾸게 하는데
이게 요셉의 꿈도 마찬가지지만,
이 꿈은 나에게 주어졌다고 해서 나만 다루는 게 아니에요.
온 세상 전체가 나한테 준 그 꿈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면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요셉에게 준 꿈은 그것과 같이 동반해서 바로에게 꿈이 오지요.
그 바로의 꿈이 곧 요셉의 꿈을 중심이라고,
요셉의 꿈이 중심이라고 그쪽에서 고백하도록 만드는 겁니다.
정말 여러분들이 성령을 받았으면
이 세상은 ‘내가 꾼 꿈은 내 꿈이 아니고
주님 십자가 중심을 위하여 그 십자가 증거 하라고 주어지게 된 인생이
내 남은 인생입니다’ 라고 고백해야 돼요.
더 쉽게 정리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관련된 인생이라면
그 사람은 지금 성령의 꿈을 꾸고 있는 중입니다.
성령의 꿈을 꾸는 중이고 예수님을 업고 가는 거예요.
예수님이 끌고 가는지
예수님이 우리를 업고 가는지
하여튼 그렇게 예수님과 떨어질 수 없는 사이입니다.
그러면 이 요셉의 꿈의 내용은 뭐냐?
한마디로 희생이에요. 희생. 희생입니다.
시편 105편에 보면 그런 말씀 나오죠.
이 꿈이 요셉으로 하여금 본인이 원치 않는 길로 가게 만듭니다.
베드로처럼.
시편 105편 17~18절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러니까 요셉이 종으로 팔렸다는 것을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종으로 팔렸다고 보면 돼요.
어떤 사람의 시집을 봤는데 시가 굉장히 짧아요.
시 내용이 ‘어떤 주인이 낫을 들고 무식한 종에게 ‘ㄱ’ 자 모른다고 놀리다가
그 주인이 그 낫에 한 칼에 베었다‘라는 시예요.
지은이가 김남주라고 민중 운동하다가 나이 50도 안 되서 죽은 사람 있어요.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에
로마 군병이 예수님 무시하면서 뺨 때리고 옷 벗기고 했잖아요.
그게 주님의 종으로 팔린 희생을 위한 꿈의 일부라는 사실을 모르고 까불까불 하다가
빌라도와 같이 저주 받지요.
이 세상은요 사람들이 나름대로 어릴 때 꿈을 이루기 위해서
어른이 되어서 취미생활이라는 것을 해요.
어떤 사람은 ‘빠라바라 빠라밤’ 하면서 오토바이 타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스포츠카 타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야구에 빠지는 사람,
아침 조기 축구에 빠지는 사람 등 온갖 사람들이 있는데
그 무수한 취미생활을 미세먼지가 와서 싹 덮어버리듯이
하나님의 저주가 고요하게 소리 없이 접근해서
그 모든 자기 꿈을 이루기 위한 것들을 저주의 꿈으로 덮어 버립니다.
그 저주의 꿈은 어디서 나오는 가.
주님의 십자가에서 나온 거예요.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는 뭐냐,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그들의 공통된 꿈이 어서 와 달라는 거예요.
아주 작살을 내 달라는 거예요.
작살을. 사적인 개인적인 취미나 취향 그런 것이 의미 없음을 공개적으로 뜯어내고 밝혀 주시옵소서.
우리의 더러운 몸을 옷이 가리고 있는데 옷을 뜯어보세요.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 했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리의 수고하고 노력한 모든 덮어있는 이것을 뜯어내는 것은
어떤 고통이냐 하면 억지로 주님이 우리를 지옥에서 떼어 내는 고통이에요.
이거는 예수님이 십자가 지는 고통을 우리가 같이 맛보게 하는 겁니다.
뒤돌아보지 마란 말이죠.
이제는.
그 소돔과 고모라에 뒤돌아 볼 거 뭐 있어요?
제가 또 사해바다 가 봤잖아요.
또 자랑 질 인데. 완전히 지독하고 짠 소금물에 소돔과 고모라가 다 잠겨 있어요.
그렇게 화려하고 취미생활 많이 했고 다양하게 자기 폼 내던 사람들
그 짠 소금물에 다 잠겨 있듯이,
옛날에는 물로 심판했지만 소돔과 고모라는 불로 심판하는 겁니다.
이거 우리가 일부러 생각하게 되면 그건 꿈 아니에요.
그건 아까 이야기 했지만 하나의 정보이고 지식에 불과해요.
그 지식을 뜯어내고
진짜로 이 꿈, 영원히 안정성 있는, 영원한 복락을 받는, 희생이 주어지는 그 축복을 받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모든 축복,
반복적인 이 축복, 천국의 축복을 집어넣기 위해서 뜯어내는 작업,
그 작업은 주어진 영생의 반복, 축복의 반복에 비하면 그 고통은 고통도 아닙니다.
뭐 고생해도 죽을 때까지만 고생하고 매 값 맞아도 죽을 때 까지만 취직되어 있는 동안은 월급 나오니까
그냥 살면 돼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바르게 살기 운동, 남에게 훌륭한 사람 되기 이런 쓸데없는 짓 하지 마시고
아플 때 그냥 ‘주께서 이렇게 아파했구나.’ 하고
그걸 그냥 이 지옥 살 때, 군대 생활 할 때만 견디면 되는 겁니다.
언젠가는 이 교도소 생활도 끝날 때 오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