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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놀이 (200자 원고지 77 매)
이호길 지난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한겨울이라도 웬만해선 수도파이프가 동파하는 일이 없었던 부산의 날씨였지만 그때는 그럴 만큼 추워 웃바람에 보일러 온도를 높여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 쓴 채 잠을 청했던 일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줄곧 이곳에서만 살아온 향미로서는 이런 혹독한 추위는 처음이었다. 남편 없이 중학생인 딸, 일미와 초라하게 살고 있었으므로 더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긴 겨울을 보낸 박향미는 일미를 집에 남겨두고 어제 밀양 야시장 행사에 장사하러 왔었다. 이웃에 사는 제 이모의 도움을 받기는 하겠지만 왠지 혼자 두고 온 일미가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향미는 이 번 행사를 마지막으로 장돌림 생활을 그만 둘 참이었다. 여자 혼자의 몸으로 전국을 떠돌며 장사를 한다는 것도 어려웠지만 다 큰 딸아이의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서라도 안정적인 직업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향미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어젯밤 사람들의 시끌벅적한 소리가 멎어 고요하다 못해 적요하기까지 한 아침의 야시장 천막촌으로 들어섰다. 4,5 미터의 넓은 쇼핑 동선을 사이에 둔 여러 횡의 파란 천막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천막 앞에 선 향미는 두 손으로 바닥까지 내려진 천막 입구 끈을 풀었다. 옆으로 젖혀 끈으로 고정시켰다. 거기에 매달렸던 이른 봄 투명한 아침햇살이 밀물처럼 천막 안으로 와, 빨려 들어갔다 문득 봄기운을 느꼈다. 계절의 흐름은 정직했다. 지난겨울을 생각하면 다시는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봄은 자연의 이치에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곳에도 소리 없이 찾아오고 있었다. 향미는 안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몸을 뒤로 돌렸다. 저만치 자갈밭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은 마치 회색 도화지에 연초록 물감을 아무렇게나 뿌려둔 것처럼 자갈 사이로 군데군데 잡초가 자라 평화스러운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밤 새 찬 기운에 온 몸을 시리도록 맡겼던 촘촘한 자갈 위로 투명한 햇살이 쏟아지고 있다. 미처 느끼지 못했던 정감이었다. '이젠 봄이구나. 봄이야.' 아직 차가운 날씨지만 향미는 칼로 무 자르듯 오늘부터는 봄이라고 서둘러 단정하고 싶었다. 무서운 한겨울을 이겨낸 안도감과 새 생명을 창조하는 봄의 정취를 하루라도 빨리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타인들도 자신과 같은 마음일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 "박 여사님, 안녕하슈?" 누군가 자신을 호기롭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향미는 그 곳으로 목을 꺾었다. 몇 걸음 옆에서 사내 하나가 반가운 듯 한 손을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김태규였다. 그는 야시장 총무였다. 야시장에는 몇 명의 총무가 있었다. 오너가 행사 주최 측으로부터 사업권을 따내면 식당, 오락, 일반 잡화의 각 파트별 총무에게 이윤을 붙여 팔고 총무는 상인들에게 연락하여 이를 분양했다. 특히 오너는 장이 시작되기 며칠 전부터 관련업체에 연락하여 천막을 치게 하고, 바닥을 평평하게 고르게 하게 했으며, 발전기를 가동하여 상인들이 영업하는 각 천막으로 배전선을 설치하게 했고, 장을 알리는 애드벌룬을 띄우게 하는 등 야시장의 기본적인 업무를 맡기고는 이를 일일이 확인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다. 각 총무는 상인들에게 자리를 분양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장이 끝날 때까지 담당 상인들이 불편 없이 영업할 수 있도록 관리하는 오너 못지 않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태규는 일반 총무였다. 그는 향미 보다 두 살 적은 서른네 살이었다. 장돌림으로서는 결코 많은 나이는 아니었으나 영달하고 매우 성실했다 상인들에게 천막을 분양할 때 매 번 이번에는 장사가 잘 될 것이라는 등 온갖 감언이설로 꼬드겨 자리를 채워 이윤을 남겼지만 상인들은 인정이 많은 그의 인간적인 순수함을 좋아했다. 간혹 영업이 부진한 상인들로부터 거친 항의를 듣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히죽히죽 웃으면서 다음엔 틀림없이 장사가 잘 될 것이라면서 별 무리 없이 받아 넘겼다. 그렇다고 상인들에게 사기를 치거나 무시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향미는 거친 상인들을 상대로 무난하게 장을 이끌어나간다는 것도 쉽지 않을 것아 그에게 늘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태규의 몸 어디서 저런 리드쉽이 나올까. 향미는 다가서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리다가 마침내 마른 감정으로 살아가는 야시장 바닥에서 어울리지 않는 그의 유순함과 유머스런 그의 입심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상인들을 사무적으로 대하다가도 어떨 땐 장난 끼가 철철 넘쳐 헤픈 사람이라고 오해를 사기도 했지만 결코 악의적이거나 남을 우롱하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나이에 걸맞지 않는 악동의 모습이랄까. 어쨌든 그는 단정한 용모에서 풍기는 귀족적인 인상이 남달랐다. 자기보다 두 살 아래였지만 리드쉽이 강한 사람이라고,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뭔가 배울 점이 많은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향미는 늘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향미는 그 앞에 서기만하면 작아지곤 했다. 다가온 그에게 "총무, 이 시간에 웬 일이야?" 향미는 의아스럽다는 듯 눈을 흘기면서 말했다. 아침 8시, 겨울에는 올빼미처럼전 날 일몰직전 시작해서 새벽 두 시까지 영업하는 야시장 상인들로선 한 밤중이나 다름없는 시간이었으니 당연한 질문이었다 "아, 글씨 행님들이 저녁부터 밤 새 저러니 신경이 쓰여 잠을 잘 수 있어야지요. 새벽에 겨우 눈 좀 붙였다가 지금 또 확인하고 오는 길입니다." 그는 몸을 돌려 한 손으로 향미의천막이 연결된 끝을 가리키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래? 시펄놈들이 또 붙었구나. 어제 처음 자리를 폈는데 마누라에게 좌판을 맡기고 첫 날부터 노름이라니...' 향미는 목까지 차오르는 말을 꾹 누르고 천막 끝동을 저주스런 시선으로 노려봤다. "그런다구 되나요? 벌건 눈으로 설치는데요." 태규의 이 말은 " 좀 말리지 그래." 라고 한 시원시원하고 컬컬한 향미의 걱정스런 말에 대한 짜증 섞인 답변이었다. "누구누구야?" 향미는 눈을 부릅뜨고 마치 그들을 자신이 월급을 주고 채용한 사람인 것처럼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다그쳤다. "오락 최 사장하구요, 김 사장, 그릇 사장, 또 천냥 사장, 요렇게 네명이더라구요" 그는 부르기 좋은 명칭으로 한 사람한 사람 말 할 때마다 손가락을 힘 있게 하나씩 접으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천냥 손 사장을 거명 하면서 약지를 접었을 때 향미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손 사장의 아내 순덕은 이 바닥에서 자기와 가장 친한 친구였기 때문이었다. 문득 어젯밤 그녀 천막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동선을 접한 좌판에는 목욕용품, 공구, 생활용품 등 시중에서 천 원이면 구입할 수 있는 수백 가지 상품들로 진열되어 있었다. 어떤 상품이건 한 개 천 원이었으니 팔기에도 좋았다. 손님과 거래를 하던 순덕은 향미가 좌판 끝 통로로 천막에 들어서는 것은 보고 잠깐 기다리라는 눈짓을 보냈었다. 향미는 빨간색 플라스틱간이 의자에 앉았다. 손님과 계산을 마친 그녀는 구석에 있는 의자를 끌어다가 힘없이 앉자마자 향미야, 넌 참 좋겠다. 했다. 지지배야,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나, 남편 때문에 미치겠어. 장에만 나오면 노름이니....' 순덕은 말을 다 잇지 못하고 땅이 꺼져라 한 숨을 내뱉었다. 남편 있다고 다 그런 건 아니잖아. 건, 그래. 잔소리 좀 하지 그래. 넌 몰라서 그래. .........? 노름을 하면 그냥 하는 줄 알어? 술까지 쳐 마신단 말야. 그래서? 돈 잃고 술 취해 기분 엉망인 사람에게 또 바가지 긁으면 어찌 되겠니? 이 좌판을 다 날린 건 뻔해. 그러면 장사도 끝이야, 끝. 내가 눈꼴시어 더러워서라도 참고 있는 거야. 라고 한탄하면서 턱으로 천막 끝동을 가리켰던 어제의 모습을 떠 올렸다. 가슴이 아팠다. 당장 그곳으로 쫓아가서 판을 뒤집고 싶었으나 왠지 태규 앞에서는 그럴 용기가 나지 않는다. 또 작아진 것일까. 영업시간에는 그렇다 치더라도 끝나면 발전기를 끄는데도 어디서 전기를 당겨와 밤새도록 불을 켜놓고 저러는지 알 수 없었다. 태규는 알고 있을 것 같았으나 묻지 않았다. 남자상인들 중 몇은 장이 열리자마자 장사는 뒷전이고 노름을 하거나 인근 저수지에 낚시를 하러 가는 등 구겨진 삶을 이어가는 사람도 있었다. 인생을 계획 없이 그때그때 부딪치면 부딪치는 대로 되면 되어지는 대로, 안되면 안 되는 대로 무작정 살아가는 무계획주의자라고나 할까. 내림천에 몸을 맡겨 떠내려가는 물고기와같은 그런 막연한 존재들이었다. "그래, 총무 니 말이 맞다. 아무리 말려도 필요 없겠지. 오히려 욕만 바가지로 얻어먹지 않으면 다행이니까 말야 ." 향미는 총무의 말에 맞장구를 치면서 쓰게 웃고 말았다. 몸체를 돌려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세면도구가 든 비닐 가방을 찾아 숙소로 가 샤워를 할 참이었다. 태규는 그녀가 사라진 곳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그러믄요." 입구에 머리를 내밀면서 당연한 듯 말했다 "그런데 최 여사님 이른 아침에 천막엔 웬 일이세요?" "왜? 난 이 시간에 여기 오면 안 되나? 향미는 허리를 꺾어 불량품을 모아둔 상자를 뒤지면서 지나가듯 말했다. 태규는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그녀의 태도에 조금 움찔했다. 향미는 비닐 가방을 찾아들고 허리를 세웠다. 입구를 바라봤다. 머리만 삐쭉 들어와 있는 그의 우스운 모습을 보고 "왜 그러고 있어? 몸뚱이 잘린 귀신 같이." "그럼요?" 태규는 그녀가 방금 자신에게 말한 '왜 그러고 있어? 몸뚱이 잘린 귀신 같이.' 란 말에 이어 '들어오지 않구.' 말을 기다리는 듯한 눈치로 말했다. 들어오라는 신호만 떨어지면 지체 없이 들어갈 태세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그게 아니었다. 일의 경위야 어떻든 그를 천막 안으로 들어오게 해서 호젓한 아침에 단 둘이 자신의 천막에 있었다는 소문이 퍼지기라도 한다면 혼자 사는 향미로서는 이만저만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비록 자신이 마음에 담아둔 그일지라도 내색하지 않고 이미지 관리에 신경을 많이 써 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향미는 "나갓!" 명령하듯 단호하게 자르고 말았다. "내가 언제 들어갔슈?" "안 나갓! 누가 보면 어쩌려구!" 향미는 눈을 부라리며 악을 썼다. ".......아따 무서워라, 모가지만 내민 사람보구 정색은요." 태규는 장난스럽게 말하고 목을 밖으로 뺐다. 향미는 그의 목이 사라진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밖으로 나왔다. 저만치 걸어가고 있는 그가 한 번쯤뒤돌아볼 것을 바라는 향미의 기분과는 달리 아쉽게도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노름이 벌어지고 있는 끝동으로 힘없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향미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마치 사력을 다해 먹이를 쫓다가 그것을 놓친 굶주린 야수의 아쉬운 걸음을 연상했다. 기분 또한 허전할 것이라고 넘겨 생각했다. 그가 그런 기분이건 아니건 이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야릇한 감정을 가진 여자만의 특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이런 감정은 남자로서는 느끼기 힘든 부분일 거야,'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조금 전에 매정하게 자른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꼭 그렇게까지 매몰찰 필요가 없었는데.... 내가 너무했나?' 고개를 옆으로 조금 틀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둘 사이의 오해를 없애는 것이라고 자위했다. 박향미, 그녀는 누구인가. 그녀는 5년 전 지금처럼 야시장을 떠돌며 남편과 액세서리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때도 이곳이었다. 향미네는 열흘간의 행사를 무사히 마치고 새벽세 시에 부산으로 가려는 참이었다. 남편은 그의 곤함을 알고 하룻밤 자고 아침에 가자는 향미의 제의를 완강하게 뿌리쳤다. 아내를 위해서라면 몰라도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어떤 일도 철저히 배제시키는 그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을 마치자 곧 짐을 정리하고 무리하게 집으로 가던 중이었다. 차는 짐을 실을 수 있는 파란색 1톤 트럭이었다. 그런데 부산 시가지에 들어선 남편은 첫 교차로에서 신호 대기를 하던 중 운전대를 잡고 고개를 숙였다. 향미는 처음에 피곤하여 조는 줄만 알았다. 하지만 남편은 그 후로 아무리 흔들어도 깨어나지 않았다. 비로소 호흡이 멈춘 것을 안 향미는 당황했다. 운전을 할 줄 몰랐던 그녀가 태규에게 전화를 넣어 차를 부탁하고 병원으로 향하는 앰뷸런스 안에서 남편의 시신을 붙들고 대성통곡했었다. 남편은 그렇게 영영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혼자 훌쩍 떠나고 말았다. 뇌출혈. 남편이 갑자기 사망한 것으로 보아 심한 스트레스와 피로가 쌓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이런 생각은 병원에서 주검을 확인한 의사도 공감했다. 남편의 이름은 정성일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더 잘 살아 보려고 억척같이 일만해 온 부지런하고 오달진 사람이었다. 비가 와 땅이 질퍼덕하여 손님이 적을 지라도 천막을 열지 않거나 일찍 마치는 일이 없었으며 어쩌다 찾아오는 손님에게도 반갑게 대하면서 허리를 굽히는 공손함을 보인 그였고, 차를 정비하는 기술도 뛰어나 타고 온 차가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을 경우 엔진을 수리한다든지 아주 큰 정비가 아니면 절대로 정비소에 수리를 맡기지 않고 악착같이 손수 수리를 하고 마는 그였다. 그리고 장을 오갈 때 차 소리가 조금만 이상해도 신경을 곤두세워 기억해뒀다가 장기간 주차시키는 장날이면 어디에 어떤 부속이 고장 났는지를 기어코 알아내어 필요한 부속을 교체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그래서 차에 들어가는 비용을 최대한 절약할 수 있었다. 전국 행사장 손님들은 이런 그의 악착같음과 성실함을 알고 찾아주곤 했었다. 그는 이런 손님에게 반갑게 대하는 세심함도 잊지 않았다. 이 뿐이 아니었다. 모진 고생을 하는 자신은 뒷전이고 같이 장을 다니느라 고생하는 향미를 끔찍이도 배려했던 그였다. 대부분의 상인들은 숙소 경비를 아끼려고, 오가는 시간이 귀찮아 장을 파하면 목욕탕이나 사우나를 이용했으나 그는 피로는 확실하게 풀어야 한다며 그녀를 위해 가까운 곳에 따로 여관방을 얻어 숙소로 사용했다. 이처럼 악착같이 돈을 벌려는 그였지만 그녀에게 들어가는 비용은 아까워하지 않았다 향미가 남편이 죽기 전 2 년 간 빠지지 않고 그를 따라 장에 나오게 된 것도 자신을 끔찍이도 사랑하는 그를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녀는 묘하게도 태규만 보면 죽은 남편이 생각났다. 언제부턴가 그는 향미에게 상인들이 눈치 채지 않을 범위 내에서 잘해주고 있었다. 여자의 직감이었다. 행사 장소에 따라 혹은 위치에 따라천막 가격은 달랐으나 보편적으로 한 동에 40만 원이었다. 어제 자리를 편 이곳도 40만 원짜리였으나 30만 원으로 깎아주었고 거기다가 고맙게도 최고로 좋은 위치를 며칠 전 전화로 배정해 줬다. 그리고 말미에는 항상 다른 상인들이 알면 큰일 난다고 보안을 신신당부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향미는 이런 그의 호의가 부담스러워 처음에는 거절했었다. 하지만 그가 죽은 남편에게 진 신세를 갚는다는 순수한 뜻을 거듭 전했으므로 향미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남편은 향미 보다 세 살 많았다. 그러니까 태규와는 다섯 살 위인 셈이다. 남편과 태규는 총무와 상인이라는 보이지 않는 필연적인 고리를 떠나 형님 아우라는 인간적인 고리로 연결하고 지냈었다. 남편은 그의 차가 고장이 났을 때 성심껏 고쳐주었고 부속이 들어갈 경우에는 그에게 부속을 사오게 하여 바꿔주기도 했으며 그의 동생이 운영하는 업체에서 임대한 발전기가 고장이 났을 때에도 남편은 군소리 없이 고쳐주는 성의를 보였다. 물론 향미네는 그에게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가 우리에게 도움을 준 건 행사에 관한 자질구레한 정보 뿐 자릿세 등 공적인 부분에서는 다른 상인들처럼 공평하게 대했었다. 자신이 받은 가치를 생각하면 향미네에게 뭔가 대우가 달라야 할 터인데 그는 냉정하게도 그러지 않았다. 하지만 호의를 바라지 않았기에 마음은 편했다 태규가 자릿세를 깎아 주는 선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남편이 죽고 난 뒤의 일이었다. 그래서 향미는 그의 저의를 더욱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혼자 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정신 나간 사람처럼 찝쩍이는 남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녁에 천막을 아르바이트에게 잠깐 맡기고 식당에서 태규를 만났다. 향미가 만나자고 한 것이었다. 아침의 일을 사과도 할 겸 자신에게 호의를 베푸는 일이 진정으로 죽은 남편을 생각해서 그런지 본심을 알고 싶어서였다. 그동안 그의 말대로 별 생각 없이 호의를 받아들였지만 오늘은 기필코 그 저의를 알고 싶었다. 식당이래야 천막 예닐곱 동을 이은 것에 불과했다. 안에는 손님들이 테이블 몇 개를 차지하고 있었다. "박 여사님이 우짠 일로 날...." 그는 주방 가까운 자리에서 이미 기다리고 있던 향미의 앞자리에 슬그머니 엉덩이를 걸치자마자 그녀만 겨우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로 말꼬리를 남겼다 "아침에 미안했어." 거두절미하고 말했다 ".....무슨?" "........?" "아! 빽, 고함지른 것 말요?" "....그래" 향미는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겨우 말했다. 그는 마음에 걸리는 일은 자신이 손해가 가더라도 반드시 해결하고 넘어가는 그녀의 깔끔한 성격을 알아차리고 "아하, 천하의 박 여사님이 보잘 것 없는 내게 사과를 다하구, 이거 낼 아침에 해가 어디서 뜨나 봐야겠습니다, 그려." 태규는 부들부들 야들야들 조금은 익살스런 어조로 말했다. "총무!" 향미는 갑자기 사람을 불러 세우 듯 언성을 높였다. 주방에서 일을 하던 허 사장 내외가 무슨 일인지 확인하려는 듯 놀란 눈으로 이 쪽을 보다가 별 일 아니라는 것을 알고 제 할 일을 했다. "왜요?" "이 누나가 미안하다고 힘들게 말했는데도 넌 딴청만 피울 거야?" "아이쿠 누님, 사과 할 일도 받을 일도 아닌 걸 가지고.... 울 여사 님 그 깔끔한 성격은 아무도 못 말린다니 까요. 어쨌든 사과했으니 받아야지요. 됐어요, 마." 태규는 아침에 향미의 일로 기분 나빴었다. 분명 기분이 뒤틀렸지만 그녀 앞에서 내색할 수 없었다. 태규가 그녀의 사과를 받고 배려하는 듯한 말을 하는 동안 그녀의 눈초리가 빛나고 있었다. 컬컬한 그녀의 성격으로 볼 때 '너, 내게 마음 있어? 자릿세 깎아주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이게 몇 년째야? 도대체 그 저의가 뭐야?' 말하고 싶었으나 그는 지난번처럼 '아이쿠, 박 여사님 이거 왜 이러십니까. 난 뭐 빚만 지고 살란 말입니까?' 라고 유리알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5년 전의 신세진 허울 좋은 뻔한 답변만 늘어놓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그만두었다. 차라리 장난기가 철철 넘치는 그의 어투와 어조에서 진실을 찾기로 마음먹었다. 가까이서 본 그의 눈은 차라리 맑은옹달샘이었다. 눈 어디에서도 그늘진 곳이나 거짓과 가식을 찾아 볼 수 없었다. 다만 평소에 엷게 느꼈던 따뜻한 감정이 오늘은 분수처럼 솟구치고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느꼈을 뿐이었다. 도대체 무슨 뜻일까. 저 강렬하게뿜어대는 눈빛 속에 감춰진 감정의 근원은 무엇일까. 가정을 가진 사람의 눈매라기엔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의 눈망울은 진주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위선일까. 그럴 리 없어. "너, 지금 내게 속이는 게 있지?" 향미는 목소리를 깔았다. "네? 누가 누굴 속여요?" "못 알아들어? 총무 니가 날 말야!" "알아... 듣기야 했지만... 제가 뭘 속인다고 그러시는지...도대체가." 태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향미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하지만 내면 깊은 곳에 감춘 그의 감정을 파악하려고 필사적으로 에두르는 그녀의 말에 위선의 방패로 가릴 수는 없었다. 시침을 떼느라 '도대체가'에서 옥타브를 반쯤 올리기는 했으나 어조로 보아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눈치 빠른 향미가 이것을 놓칠 리없었다. '그래, 그랬구나. 여태 네가 날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 지금 용광로처럼 뜨겁게 타오르는 너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거야' 향미는 불결하게도 그의 눈에 빠지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넓은 그의 가슴에 안겨 허우적거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을 때 향미는 얼마 전 기혼자 남녀간의 애정행각을 미화시킨 텔레비전 드라마를 떠 올렸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고 그것을 보고 즐겼던 기억을 되살리면서 태규와의 일도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주제로 한 한 편의 드라마로 자기의 머리 속에 장식하고 싶었다. 욕설을 스스럼없이 뱉을 정도로 당찬 그녀였지만 그를 보면 간혹 자신이 작아지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은 그런 느낌이 더 크게 더 짙게 밀려왔으나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다 '나는 왜 저 사람만 보면 남편 생각이 날까.' 남편도 태규처럼 심장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의 깊은 눈을 보면서 그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는 자신의 내심을 알고 스스로 놀랐다. 일종의 애정 같은 것이었다. 문득그를 티켓 다방 여종업원처럼 돈을 주고 살수만 있다면 많은 돈을 들여서라도 그러고 싶은 결코 건전치 못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는 가정이 있는데... ' 향미는 곧 이래선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어 생각을 지우고 있었다. "박 여사님,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요?" 태규는 향미가 생각에 잠긴 틈을 타 말머리를 엉뚱한 곳으로 돌렸다.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그녀의 질문에 부담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고민 없는 사람이 어딨어?" "무슨 고민요?" "니가 알아서 뭘 해?" 거칠게 잘랐다. 향미는 이렇게 말하고 금방 또 후회했다. 무안을 줬구나. 사정없이 그의 기분을 망가뜨렸구나. 향미는배달된 커피를 서둘러 마시고 벌써 가느냐는 그의 흔들리는 시선을 무시한 채 자기 천막으로 돌아왔다.
며칠이 지났다. 어제는 태규가 보이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온 향미는 소녀처럼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시작하면서 남편과 결혼 전에 느꼈던 분홍빛 감정이 스물스물 되살아났다. 식당에서 그를 대면하기 전까지만 해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내가 왜 이러는 걸까, 이래선 안 돼!' 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이미 깊이 바지고 있다는 생각에 몸서리치고 있었다. 제어할 수있을까. 마음에 담아 두기로만 했다. 더 이상의 진전은 그의 행복을 앗아가는 가증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향미가 태규의 전화벨 소리를 들었을 때는 아침햇살이 커튼사이로 새어 들어와 잠에서 깬 듯 만 듯 했을 때였다. 휴대 전화기를 들었다. __박 여사님, 접니다. 김 총무 저쪽에서 태규의 강강한 목소리가 전해왔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덜 깬 목소리로 물었다. __여긴 평택입니다 "무슨 일이냐니깐?" __아, 예. 부탁 좀 드릴까 해서요 상체를 부스스 일으켰다. 그리고 그가 왜 평택에 갔는지 궁금했으나 전화한 이유를 먼저 다그쳤다. 생각 같아선 차근차근 소곤소곤 찹쌀떡처럼 끈끈하게 정겨운 어조로 말하고 싶었으나 자신을 숨겼다. "뭔데?" __내가 천막에서 아침까지 눈 좀 붙이고 일보러 여길 왔는데 이제 생각하니 전기장판 스위치를 안 껏더라구요. 그래서..... "나보구 꺼 달란 말이야?" 향미는 그의 말을 자르고 자신 있게 말했다 __네, 누님. 눈치 하난 빠르시군요. "넌 궁할 때만 내게 누님이라구 할 거야? 평소엔 못해? 그리고 하필이면 나야?" __건 내 맘이죠. "못하겠다면?" __야시장 불나는 거니까 알아서 해요." "근데 넌 숙소 안 잡았어?" __아이구 박 여사님 제가 뭐 대단하다구 숙솔 잡고 그래요. 남자 혼잔데.... 천막 하나면 딱 입니다. 여름이면 몰라도. "청승이다. 청승, 으응! 청승이구말구. 어느 천막이야?" __.......행님들 노름하는 옆 천막입니다. 지금은 아마 없을 겁니다. "알았어." __그럼 부탁드립니다. 딸깍, 저쪽에서 전화기 폴더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향미는 서둘렀다. 불이 날 것 같아서가 아니라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태규의 잠자리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자야 할 시간을 뒤로 조금 미룬다고 손해볼 건 없었다. 아무도 없는 야시장의 아침은 그야말로 적요했다. 태규의 천막을 찾았다. 그의 말대로 옆 천막에서는 기척이 없었다. 천막 입구를 묶은 노끈을 풀고 안으로 들어갔다 바깥보다는 어두웠으나 사물을 분별하기에 충분했다. 그의 말대로 전기장판 스위치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온도조절기를 우측으로 끝까지 돌려 전원을 차단 시켰다. 주위를 살폈다. 잠자리는 생각보다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이불과 베개는 구석에 잘 개켜 있었고 옷도 걸이에 걸어 천막 한 쪽 벽에 가지런히 걸려있었다. 베개가 놓였을 듯한 자리 위쪽에 작은 조명 스탠드가 처연하게 앉아있었다. 그 옆에는 몇 권의 책이 보였다. 향미는 허리를 굽혀 무슨 책인가 보려다가 제일 아래에 숨겨 둔 스프링 노트를 발견했다. 꺼내 펼쳤으나 어두워 글자가 잘 보이지 않았다. 스탠드 단추를 눌러 조명을 밝혔다. 일기장이었다. 긴장되었다. 남의 일기장을 본다는 것은 상대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향미는 그것을 보고 싶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지로 눌러 무릎으로 앉았다. 가장 최근에 쓴 것을 보려고 페이지를 넘겼다 2005 년 2월 14일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2년 전 내가 장가드는 것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어머니가 가슴 시리도록 보고 싶었다. 뒤늦게 불효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 때 서울 여자와 결혼을 했더라면이 같은 불효를 하지 않았을 텐데.... 별 사람이 있을까. 이제는 욕심 부리지 않고 웬만한 사람이면 결혼해서나란히 어머니 산소에 찾아가는 것만이 늦게나마 효도하는 길일 것이다. 박 여사는 날 어떻게 생각할까. 향미는 소스라치지 않을 수 없었다. 뒤에 글이 더 있었으나 노트를 떨구고 말았다. 정신이 혼미해 왔다. 14일이라면 식당에서 만났던 날이었다. 태규가 아직 미혼이라니...정말일까. 정말이라면 어쩌면 그렇게 철저히 상인들과 나를 속일 수 있을까. 5년 전 남편이 죽기 전까지는 미혼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 후 언젠가 이웃의 아는 아주머니로부터 소개받은 서울 여자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었다. 일기장 내용을 보면 결혼을 하려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만 둔 것 같았다. 왜 그랬을까. 향미는 떨리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고 일기장을 다시 집었다. 앞으로 몇 장 더 넘겼다. 2005년 2월 8일 며칠 후면 밀양 장이다. 박 여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겠다고 했다. 이 번에는 더 깎아 주겠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속보일 것 같아 그만 두었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곧 후회했다. 그녀에게 가슴 깊이 숨겨둔 마음을 털어놓은 것이 왜 이다지도 어려운 것인가. 혹시 거절이라도 한다면 망신살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무엇보다도 성일 형님에게 미안한 생각이 앞섰다. 언젠가는 거쳐야 할 일인데.... 향미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몸에서 근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천장에 시선을 꽂았다. '보기보단 소심한 사람이구나. 그제 식당에서 본 너의 눈빛을 내가 오해했었구나. 바보! 내가 날 사랑하는 너의 속뜻을 알아차린 것처럼 너는 왜 널 마음에 두고 있다는 내 눈빛을 몰랐니? 너는 얼마든지 내게 다가올 수 있지만 난 그럴 입장이 아니었잖아. 바보, 넌 바보야!' 향미는 이렇게 속으로 외쳤다. 일기장을 본래 자리에 두고 밖으로 나왔다. 심호흡을 했다. 이른 봄 싱그러운 아침 공기가 폐 속 가득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