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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 as the Man of Sorrows by Quentin Metsys, 1520-30
캥탱 마시(Quentin Massys)는 네덜란드의 화가로 그가 화가가 되기 전에 대장장이로 훈련을 받았다는 주장이 있다. 마시는 20년 이상 안트베르펜(Antwerp)에서 활동하며 종교적 뿌리와 풍자적인 경향의 수많은 작품을 만들었다. 그는 16세기 초 플랑드르에서 회화의 선도적인 학파가 된 안트베르펜 화파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종교화와 초상화를 주로 그렸으며, 에라스뮈스의 <우신예찬>에 등장하는 어리석고 기괴한 인물들을 소재로 그로테스크한 주제를 탐구하기도 했다. 그는 전통을 완전히 깨지 않고 도덕적인 주제뿐만 아니라 새로운 기술과 모티브를 도입했다. 마시의 생애에 대한 초기 기록은 대부분 주로 전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의 활동이나 성격에 대한 동시대 기록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1466 Mary Magdalene / 1496 Jacob Obrecht / 1470 Virgin and Child / 1495 Cristo Salvator Mundi
요한 몰라누스(Joannes Molanus)의 <Historiae Lovaniensium>에 따르면, 1466년경 플랑드르(지금의 벨기에) 중부의 브라반트주(州)에 있는 루뱅(Leuven)이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대장장이며 시계 제조공인 아버지 요세 마시(Josse Matsys)와 캐서린 판 킨켄(Catherine van Kincken) 사이의 네 자녀 중 한명이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공예기술을 배웠고, 플랑드르파 화가인 디르크 보우츠(Dirk Bouts)의 작업실에서 일했다. 고향에서 직업기술을 익힌 그는 어느 화가의 딸과 사랑에 빠진 뒤 그림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마시는 그림이 좀 더 낭만적인 직업이라는 것을 알게해준 아내를 유혹하기 위해 대장장이로서의 경력을 포기했다고 한다.카렐 판 만더르(Karel van Mander)는 이것은 사실과 다르며, 진짜 이유는 병 때문이라고 주장했는데, 그는 너무 약해서 대장간에서 일할 수 없었고, 대신에 카니발 축하 행사를 위해 인쇄물을 채색했다.
1505 Maria in gebed / 1506-09 The Virgin and Child Enthroned, with Four Angels / 1505 The Virgin in prayer / 1509 Madonna and Child with Angels
문서화된 요세 마시(Josse Matsys)의 증여 재산을 보면 그의 가족이 상당한 수입을 가지고 있었고, 마시가 그림을 그리게 된 이유가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캥탱 마시는 1491년 안트베르펜 화가 길드에 가입한 후 활발하게 활동했다. 마시가 안트베르펜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그는 네 명의 제자만 받았다: 미술사학자들은 아드리앵 반 오버베케(Adriaen van Overbeke), 빌럼 뮐렌브로크 (Willem Muelenbroec), 에두아르 포르투갈루아 (Eduart Portugalois), 헤넨 보르마케르 (Hennen Boeckmakere)라고 믿고 있다. 요아힘 파티니르(Joachim Patinir)는 마시와 함께 공부했고 그의 경력 중 어느 시점에선가 그의 풍경들 중 몇 가지에 기여했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마시는 훈련의 일환으로 이탈리아와 저지대(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로 구성된 지역) 국가들을 여행했지만 이 기간 동안 길드 기록이 부족하기 때문에 마시에 대한 외국의 영향은 대부분 그의 그림에서 알 수 있으며, 16세기 화가의 훈련의 큰 부분으로 여겨진다.
1490 Saint Christopher / 1500-10 Portrait of a Man with a Pink / 1513-15 An Old Woman (The Ugly Duchess) / 1513 A Bagpiper
15세기 중반 동안 저지대의 화가들이 가장 많이 모인 중심지는 투르네(Tournai), 브뤼주(Bruges), 겐트(Ghent), 브뤼셀(Brussels)이었다. 루뱅(Leuven)은 이 시기 말에 마시를 포함한 모든 공예가들을 고용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16세기 초가 되어서야 안트베르펜(Antwerp)은 브뤼주(Bruges), 겐트(Ghent), 브뤼셀(Brussels), 메헬렌(Mechelen), 루뱅(Leuven)을 상대로 주도권을 잡았다. 1494년 이전에는 길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루뱅(Leuven)에서 마시가 그곳에서 마스터의 지위를 얻었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 안트베르펜의 성 루크 길드(Guild of Saint Luke)의 일원으로서, 마시는 최초의 주목할 만한 예술가들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화가이자 저술가인 카렐 판 만더르(Karel van Mander)의 <화가들의 생애 Schilderboeck (1604)>에 따르면 마시는 스승없이 예술을 공부했다고 하지만, 16세기 길드의 법과 규정에 대한 현존하는 기록은 마시가 독학했을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한다.
1511 Joiners' Guild Altarpiece / 1514 The Moneylender and His Wife / 1511 Lamentation of Christ
그는 곧 지역화파의 핵심 구성원으로 떠올라 안트베르펜과 루뱅의 공예 길드로부터 수많은 주문을 받았다. 마시의 훈련의 뿌리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스타일은 한스 멤링(Hans Memling)과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Rogier van der Weyden)의 영향을 루뱅에 가져온 플랑드르파 화가인 디르크 보우츠(Dirk Bouts)의 예술적 자질을 반영한다. 마시가 25세의 나이에 안트베르펜에 정착했을 때, 그의 스타일은 판 에이크(Van Eyck)와 판 데르 베이던(van der Weyden)의 계보를 따라 플랑드르 미술을 되살리는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마시는 1491년 안트베르펜에서 화가 조합의 거장이 되었을 때 루뱅(Leuven)을 떠났다. 그의 가장 잘 알려진 풍자적인 작품들은 <못생긴 공작부인 The Ugly Duchess (1515)>, <노인의 초상 A Portrait of an Elderly Man (1513)>, 그리고 <환전업자와 그의 아내 The Money Changer and His Wife (1514)>를 포함하는데, 이 모든 작품들은 인간의 감정과 사회 전반에 대한 해설을 제공한다. 그는 또한 종교적인 제단화와 세 폭의 패널화를 그렸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루뱅의 성 베드로 교회를 위해 제작되었다.
1510-1515 Christ Carrying the Cross / 1517 Portrait of an Old Man / 1515 The Crucifixion / 1517 Desiderius Erasmus (1466-1536)
마시의 작품은 전통적인 플랑드르 작품의 특징인 강한 종교적 감정을 담고 있다고 여겨지며, 종종 그로테스크를 선호하는 사실주의를 수반한다. 마시의 윤곽의 견고함, 명확한 모델링, 그리고 디테일의 철저한 마무리는 판 데르 베이던(van der Weyden)의 영향에서 비롯되었다; 투명 색소의 빛나는 풍부함은 디르크 보우츠(Dirk Bouts)를 통한 판 에이크(Van Eyck)와 한스 멤링(Hans Memling)의 영향으로 보인다. 마시의 작품은 표현에 있어 진지함, 세밀한 묘사, 명암에서의 절제된 효과를 반영하고 있다. 당시 대부분의 플랑드르 예술가들처럼 그는 보석, 옷의 테두리, 그리고 일반적인 장식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1517 Portrait of Peter Gillis / 1518-20 Christ presented to the People / 1520-25 Ecce Homo / 1520-25 Christ as the Man of Sorrows-
그의 작품에서 강조되는 대부분은 분위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 거의 관심을 받지 않지만 성인의 우울한 세련됨, 간수들과 처형자들의 잔혹한 몸짓과 인상을 강조하는 문자 그대로의 캐리커쳐에 있다. 개인의 성격 표현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루브르 박물관과 윈저궁에 있는 기업은행가들의 그림에서 그들의 식탐과 탐욕을 드러내는 풍자적인 경향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부드러움의 감정을 강조하는 그의 또 다른 자극은 베를린과 암스테르담에 있는 두 개의 성모자 (Virgin and Child) 복제품에서 볼 수 있는데, 어머니의 황홀한 키스가 다소 어색해 보인다. 극심한 절망의 표현은 비엔나의 박물관에 있는 루크레티아(Lucretia)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들에서의 색채의 눈부신 빛은 마니에리즘적인 과장을 맛갈스럽게 만든다.
1515-20 Christ Shown to the People / 1520 John the Baptist and St Agnes / 1520 Portrait of a Woman / 1520-30 Saint Mary of Egypt
한스 홀바인(Hans Holbein)과 뤼카스 판 레이던(Lucas van Leyden),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같은 화가들과 가깝게 사귀며 우정을 나눴다. 홀바인(Holbein)이나 뒤러(Dürer) 같은 북부 르네상스 예술가들과 비교해 볼 때, 마시는 정제되고 절묘한 디테일을 피한다. 그러나 그와 이들 거장들 사이에는 수많은 연관성이 있기 때문에, 그의 기술 이탈은 고의적인 것이지 무지한 행위가 아니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는 영국으로 가는 길에 홀바인(Holbein)을 한 번 이상 만났을 가능성이 높으며, 뒤러(Dürer)는 1520년 안트베르펜에 있는 그의 집을 방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시는 1524년 동료 화가 요아힘 파티니르(Joachim Patinir)가 사망한 후 그의 자식들의 보호자가 되었다. 요아힘 파티니르(Joachim Patinir)는 마시의 그림들 중 풍경화 몇 개를 작업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520s Christ Driving the Money-changers from the Temple / 1520s Madonna and Child Kissing / 1525 Head of an Old Man / 1523 Portrait of a Canon
그의 <성모와 그리스도 Virgin and Christ>, <면류관을 쓴 그리스도 Ecce Homo>, <슬픔에 잠긴 성모 Mater Dolorosa>는 그의 성숙기의 작품에 섬세함과 뉘앙스가 더해지면서 평온하고 위엄 있는 숙련도로 유명하다. 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의 작품을 북부 예술가들 사이에서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형태로 알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다 빈치(da Vinci)의 작품을 접하고 그의 미술에 관심을 기울였고, 그의 <어린양과 성모자 (Madonna and Child with the Lamb)>, <성안나와 성모자 The Virgin and Child with St. Anne>는 다 빈치(da Vinci)의 영향을 반영한다. 특히 <성모와 아기예수 Virgin and Child>의 인물들은 확실히 다 빈치의 <바위 산의 성모 Virgin of the Rocks>를 모방한 것이다. 이것은 마시가 주로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받았으며, 그가 적어도 얼마간은 이탈리아를 여행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증거로 여겨진다.
1509-13 The Rest on the Flight into Egypt / 1530 Ill-Matched Marriage / 1525 Ill-Matched Lovers / 1524 The Temptations of Saint Anthony the Abbot
마시는 경제적으로도 크게 성공하여 1521년 안트베르펜 중심부에 호화로운 저택을 구입하여 여유로운 삶을 살았다. 마시는 1529년 안트베르펜에서 사망했다. 그의 두 아들 얀 마시(Jan Matsys)와 코르넬리스 마시(Cornelis Matsys) 역시 화가였다. 이들은 아버지의 화풍에 뿌리를 두면서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회화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그는 신앙심 깊은 신자였지만, 그의 친인척 중 몇 명이 신앙의 결과로 죽었다. 그의 여동생 캐서린(Catherine)과 그녀의 남편은 1543년 루뱅에서 당시 성경을 읽었다는 심각한 범죄로 목이 잘리고, 그녀는 교회 앞 광장에 산 채로 묻혔다고 전해진다. 1629년 마시 사망 100주년 기념식은 안트베르펜 대성당 정면에 비문이 새겨진 릴리프 명판을 세우기 위한 의식으로 거행되었다. 후원자인 코르넬리우스 판 데르 게스트(Cornelius van der Geest)는 마시의 보잘것없는 시작을 둘러싼 전설로 전해지는 "그의 시대에는 대장장이였고 이후에는 유명한 화가였다"라는 단어 선택에 책임이 있다고 한다.
1526 The Adoration of the Magi / 1532-35 Portrait of a Scholar / 1525 Saint Mary Magdalen / 1529 Christ the Saviour
마시의 대표작으로는 <환전업자와 그의 아내 The Money Changer and His Wife (1514)>, <로테르담의 에라스뮈스 Erasmus of Rotterdam (1517)>, <어울리지 않는 연인 The Ill Matched Lovers (1520~1525)>, <기괴한 노인 A Grotesque Old Woman (c. 1525)> 등이 있다. <기괴한 노인>은 아마도 그의 작품 중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일 것이다. 그것은 존 테니얼(John Tenniel)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공작부인을 묘사할 때 기초로 삼았다. 이 그림은 파제트병을 앓고 있는 실제 인물을 묘사한 것일 가능성이 높지만, 때로는 마울타쉬(Maultasch)로 알려진 티롤 백작부인 마르가레테(Margaret)의 은유적인 초상화라고 일컬어지는데, 마울타쉬(Maultasch)는 말 그대로 "satchel mouth(입이큰놈)"으로 번역되지만 그녀의 결혼 스캔들 때문에 "못생긴 여자" 또는 "매춘부"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의 두 개의 큰 세폭 제단화인 <성 안나 제단화 The Holy Kinship or Saint Anne Altarpiece (1507–1509)>와 <주의 무덤 The Entombment of the Lord (1508–1511)>도 매우 유명하다. 루뱅의 성 베드로 교회에서 의뢰받은 이 작품들은 강한 종교적 감정과 정확한 세부 사항을 반영하고 있다.
캥탱 마시(네덜란드어: 퀸텐 마체이스[?])(1466~1530)는 플랑드르 지방에서 활약한 화가로, 안트베르펜 화파의 창시자다. 출생지가 뢰번, 곧 루뱅인데, 그곳 야사에 따르면, 대장장이를 하다가 화가가 되었다고 한다. 마시는 안트베르펜에서 20년 넘게 활약했다. 그 과정에서 종교화와 풍자화가 다수 제작되었다.
초기 생애
마시의 유년기 및 청년기를 소개하는 기사의 거개는 야사 수준이다. 그가 어떻게 살았고, 개성과 인격이 어떠한지에 관한 당대의 기록이 전무한 실정이다. J. 몰라누스의 <히스토리아이 로바니엔시움>, 곧 '루뱅 시사'에 따르면, 마시는 루뱅 토박이로, 비천한 대장장이 출신이었다. 오스트 마시(1483년 사망)와 캐서린 판 킹켄 슬하로, 1466년 4월 4일부터 9월 10일 사이 언젠가에 태어난 마시는 동기가 셋이었다. 야사에 따르면, 마시는 아내가 될 사람의 사랑을 얻으려고, 대장장이직을 그만뒀다. 여자가 화가를 더 낭만적인 직업으로 생각했다나 어쨌다나. 하지만 카렐 판 만더는 이를 거짓부렁이라고 치부했다. 와병이 진짜 이유라는 것이다. 대장간에서 일하기에는 몸이 너무 약해졌고, 사육제 용 인쇄물을 만들다가 화가가 되었다는 게 만더의 판단이다. 오스트 마시의 재산과 기부 내역이 자세한 문서로 남아 있는데, 이를 보면 다음을 알 수 있다. 첫째, 마시 집안은 수입이 풍족했고, 둘째, 따라서, 마시가 화가로 전향한 게 돈 때문은 아닐 가능성이 많다. 마시는 안트베르펜에서 활약하던 당시에 도제가 불과 4명뿐이었다. 보자. 아리안 판 오버베케(1495년 등록, 1501년 마스터 등재), 빌렘 뮐렌브뢱(1501년 도제 등록), 에두아르 포르튀갈루아(1504년 도제 등록, 1506년 마스터 됨), 헤넨 뵉마케레(1510년 도제 등록). 요아힘 파티니르가 경력 중의 특정 시기에 마시와 공부했고, 풍경화 몇 점에 참여했다는 것이 널리 인정된다. 그 시기를 알 수 있는 길드 기록이 거의 없거나 없다. 마시가 수련 과정에 이탈리아와 네덜란드 각지를 여행했는지 여부는, 그래서, 잘 모른다. 마시가 외국 화풍의 영향을 받았다는 결론은 거개가 그림으로부터 추론하는 것이다. 평자들은 외국 작풍이 마시의 수련기에 큰 몫을 차지했을 것으로 본다.
루뱅에서
15세기의 상당 기간 동안 저지대(니덜란트)에서 화가들이 가장 많이 운집해 있던 중심지는 투르네, 브루헤(브뤼즈), 헨트(겐트), 브뤼셀이었다. 루뱅이 그 세기가 끝나갈 무렵 지명도를 높였다. 마시를 포함해 온갖 장인 공예 분야의 전문가들이 루뱅으로 모여들었다. 16세기 초두에는 안트베르펜이 그 흐름의 선두를 차지했고, 이후로도 브루헤, 헨트, 브뤼셀, 메크를렌, 루뱅을 발 아래 두었다. 루뱅의 경우 1494년 이전까지는 길드가 있었어도 기록을 작성하고 보관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시가 마스터의 지위를 과연 거기서 획득했는지 알 수 없는 실정이다. 어쨌거나 역사가들은 루뱅이 그가 수련한 장소일 것으로 본다. 마시는 안트베르펜에서 도제로 등록된 적이 없다. 마시는 안트베르펜 성 루크 길드에 참여했고, 일급의 저명 화가로 인정받는다. 길드의 법률과 규정을 담고 있는 16세기의 기록을 보면, 마시가 독학자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물론 카렐 판 만더의 <쉴더뵉>(1604)에는 마시가 자수성가형이라고 나오기는 한다.
양식
마시가 어떤 수련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방법과 기예를 살펴보면 디르크 보우츠의 자질을 읽을 수 있다. 보우츠가 루뱅(루벤)에 멤링과 판 데어 베이덴의 작풍을 소개, 도입했다. 마시가 안트베르펜에 정착한 게 스물다섯, ...... 그의 스타일이 각광을 받았고, 판 에이크와 판 데어 베이덴이 주창한 플랑드르 회화가 부활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마시는 1491년 루뱅을 떠나 안트베르펜에 정착했는데, 그곳 화가 길드의 마스터로 가입했다. 마시는 풍자화가 유명한데, 인간 성정과 사회를 논비평하는 내용이다. <추녀 공작>(1515), <노인>(1513), <환전상과 아내>(1514)를 보라. 종교화도 그렸는데, 루뱅에 있는 성 피터 교회의 세폭 제단화가 유명하다.
마시의 작품은 종교 정서가 강렬하고--플랑드르 전통 회화 고유의 특징이다--, 동시에 리얼리즘적인데, 그 리얼리즘에는 엽기 취향이 가득하다. 스텐이나 오스타데가 그린 천박한 이들의 얼굴이 마시의 그림에 또 나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지만 그가 똑같이 뻔한 방식을 의도하지는 않았다. 마시는 윤곽이 선명하고, 입체감이 명확하게 표현되며, 세부 마감도 철저했다. 이런 스타일은 판 데어 베이덴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디르크 보우츠를 매개로 해 판 에이크 형제와 멤링한테서 받은 영향도 볼작시면, 안료의 투명성을 통해 풍요롭게 반짝이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마시의 작품들은 표현이 정직하고, 세부 묘사가 정밀하며, 빛과 그림자의 효과가 억제돼 있다. 마시는 보석류, 등장인물이 착용한 복장의 가장자리 윤곽, 각종의 장식을 무척 공들여 묘사했는데, 이는 당대 플랑드르 화가 대다수가 보인 경향이다.
마시의 작품은 정조가 주안점이 아니다. 분위기는 안중에 없고, 축자적 희화에 집중하는 것이다. 마시는 성인들을 우울한 정서로 재탄생시켰고, 옥리와 망나니 들의 끔찍한 몸짓 및 우거지상을 표현했다. 그는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등장인물의 개성을 드러냈다. 상인과 은행가 들을 묘사한 그림을 보면(원저와 루브르에 소장돼 있다), 풍자적 요소도 찾을 수 있다. 욕심과 탐욕이 읽히는 것이다. 베를린과 암스테르담에 소장돼 있는 '성모와 성자' 모작 두 점을 통해서는 그의 다른 감정 충동도 확인할 수 있다. 다정함, 온화함 따위 말이다. 그런데, 사실 성모가 키스하면서 보이는 황홀경은 좀 난감한 측면도 있다. 빈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루크레티아>에서는 깊은 절망감이 읽힌다. 이들 작품은 채료의 광택이 돋보인다. 요컨대, 이를 통해 매너리즘적 과장이 비위에 맞아 즐거워지는 것이다.
마시는 초상화가로서 기량이 출중했다. 토머스 모어가 라틴어 운문으로 지은 찬양글을 바탕으로 그린 <아이기디우스>(피터 길레스)가 대표적이다. 암스테르담 갤러리에 소장돼 있는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을 지목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마시의 초상화는 당대의 두 인물 루카스 판 레이덴과 얀 마부제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마시의 초상화는 대상 인물의 인격과 개성이 밝히 드러나며 정서가 주조되는데, 그가 리얼리즘에 천착했다는 것이 확실하다.
마시의 영향
마시를 다른 북유럽 르네상스 화가들인 홀바인이나 뒤러와 비교해 보면, 정묘한 세부 묘사와는 거리가 있다. 세 사람이 빈번히 교류했기 때문에, 마시가 일부러 테크닉을 멀리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모르고 안 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홀바인이 잉글랜드로 가는 중에 한 번 이상 마시를 만났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뒤러의 경우는, 1520년 안트베르펜의 마시 자택을 방문했을 것으로 보인다. 마시는 요아힘 파티니르의 자식들을 거두기도 했다. 마시의 여러 그림에서 풍경을 담당한 것으로 여겨지는 요아힘이 죽었던 것이다.
마시의 그림들인 <성모와 성자>, <엑케 호모>, <마테르 돌로로사>는 대가다운 평정과 품위가 돋보인다. 성숙기의 마시 작품은 섬세함과 미묘함이 탁월하게 구현돼 있다. 연구자들은 마시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본다. 인쇄물의 형태로 제작돼 북유럽 화가들 사이에서 유통되었던 것이다. 마시의 작품 <성모자와 양>은 레오나르도의 <성모자와 성녀 안네>를 모티프로 삼았고, 다 빈치의 영향이 분명하게 느껴진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들이 마시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고, 비록 단기간이었을지라도 그가 이탈리아를 여행했을 가능성이 많다는 판단도 대체로 인정되는 분위기이다.
멸
마시는 1529년 안트베르펜에서 죽었다. 마시는 상당히 독실했던 것으로 전한다. 그런데도 친척 여러 명이 신앙 때문에 죽었다. 누이 캐서린과 남편이 1543년 루뱅에서 고초를 겪었다. 성경을 읽는 대역죄를 범했던 것이다(당시에는 그랬다). 남편은 참수당했고, 캐서린은 교회 앞 광장에서 생매장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마시 사망 100주년인 1629년 그를 기념하는 경축 행사가 열렸다. 안트베르펜 대성당의 정면에 명판도 만들어 붙였다. 후원자인 코르넬리우스 판 데어 헤스트가 이런 제사를 썼다고 한다. "대장장이였지만, 이후 화가로 유명해졌다." 마시의 애초 신분이 초라했다는 야사와 일치한다.
유산
마시의 작품 하면, 1513년 작 <노인>, 1513년경 작 <추녀 공작>, 1514년작 <환전상과 아내>가 떠오른다.
<그로테스크 노파>라고도 하는 <추녀 공작>이 아마 가장 유명할 것이다. <앨리스의 놀라운 세상 모험>에 나오는 공작 부인을 존 테니얼이 그리면서 마시의 이 그림을 참작했기 때문이다. <추녀 공작>은 패짓 병을 앓는 실제 인물을 그렸을 것이다. 티롤 백작 부인 마가레트를 그렸을 거라는 말이 가끔 나오기는 해도 말이다. 마가레트는 마울타쉬로 유명했다. 이 독일어는, 문자 그대로는 '자주 주둥이'란 뜻이지만, '추녀'나 '매춘부'를 의도하며 사용됐다(여자의 부부 관계 스캔들이 한몫했다). 대형의 세 폭 제단화 두 점도 격찬을 받았다. <성 가족>(또는 <성녀 안네 제단화>(1507~1509))과 <그리스도 매장>(1508~1511)이 그것들이다. 루뱅의 베드로 교회에 걸려 있는 이 두 작품을 볼작시면, 강렬한 종교 정서와 더불어, 그의 작품 거개에서 확인되는 정확한 세부 묘사를 완미할 수 있다.
리스본에 있는 성모 수도원 제단화의 일부도 마시가 그렸다. 그 제단화는 <마테르 돌로로사>의 맹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패널들도 보고 있자면, 다음도 연상하게 된다. <성모의 슬픔>, <예수와 동방 박사>, <골고다로 가는 길>, <예수 수난>, <예수의 탄식>(전부 안티가 국립 미술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이집트 도피>. 해당 수녀원을 세운 것은, 마누엘 국왕의 동생으로 요한 2세의 미망인인 레오노르였다. 그때가 1509년인데, 이후로 이 패널들을 순서에 맞게 정렬한 것은 딱 한 번뿐이었던 것 같다. 일부 작가는 프레임 제작 연도를 1511년 이전으로 보기도 한다.
캥탱의 아들 얀 마시가 아버지의 예술가적 자질을 물려받았지만, 그 유산을 확대 계승하지는 못했다. 이른 시기의 작품인 <성 제롬>(1537, 빈)과 후대 작품 <토비아스 치유>(1564, 안트베르펜)를 보더라도, 독창성보다는 보고 베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것이다. 코르넬리스 마시라는 아들도 화가였다. 얀의 아들인 손자 캥탱 마시는 튜더 왕조의 화가로 채용돼, <엘리자베스 1세>를 그린다.
안트베르펜에는 성모 대성당 앞쪽으로 연철 장식이 붙어 있는 우물이 하나 있는데, 사람들은 이걸 가리켜 흔히 "마시 우물"이라고 한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마시가 아직 화가로 전향하기 전 대장장이 시절에 그 우물을 설치했다고 한다.
17세기의 안트베르펜에서 마시는 록스타처럼 숭배를 받았다. 그가 안트베르펜 화파의 창시자 가운데 한 명이라는 사실도 보태놓자. (안트베르펜 화파는 페터 파울 루벤스가 출세하면서 절정을 구가했다.)
소행성 9569에 캥탱 마시란 이름이 붙은 것은, 당연 그를 기념하기 위한 결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