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5】 "내면의 눈에 맡겨라"
5. 증시랑에게 답함(4)
보내온 편지를 자세히 읽고서야 사위의 가운 간단함이 없어서 번거로운 공무에 빼앗기지 않고, 급한 흐름 가운데 항상 맹렬히 살피고 다만 게으르지 아니하여 도심이 더욱 오래고 더욱 견고함을 알았습니다. 제 마음에 심히 맞습니다. 그러나 세간의 번뇌는 불 같이 치성하니 어느 때에 통달하겠습니까? 정히 시끄러운 가운데 있을 때에도 대나무 의자와 방석 위에서 공부하던 일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평상시에 마음을 고요한 데에 두는 것은 정히 시끄러운 가운데서 쓰기 위함입니다. 만약 시끄러운 가운데서 힘을 얻지 못한다면 일찍이 고요한 가운데서 공부를 하지 않은 것과 도리어 같게 될 것입니다.
받아 보니 과거 인연이 복잡하여 지금 이 과보를 받는다고 탄식하시니 유독 이 말만은 감히 듣기가 불편합니다. 만약 이러한 생각을 하면 도에 장애가 됩니다. 고덕이 이르기를 “흐름을 따라 성품을 알게 되면, 기쁠 것도 없고 또한 근심할 것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정명이 이르기를 “비유하자면 고원 육지에 연꽃이 피지 아니하고, 낮고 젖은 진흙에 꽃이 핀다”라고 했습니다. 노호께서 이르시기를 “진여는 자성을 지키지 아니하여 인연을 따라서 일체법을 성취한다”고 하셨습니다. 또 이르시기를 “인연을 따라 감응함에 두루하지 않음이 없되, 항상 이 보리좌에 처해 있다”고 하셨으니, 어찌 사람을 속이겠습니까?
만약 고요한 곳을 옳게 여기고 시끄러운 곳을 그르게 여긴다면, 이것은 세간상을 버리고 실상을 구하는 것이며 생멸을 떠나서 적멸을 구하는 것입니다. 고요함을 좋아하고 시끄러움을 싫어 할 때에 정히 좋게 힘을 써야 합니다. 문득 시끄러운 속에서 고요한 때의 소식으로 뒤집으면 그 힘이 대나무 의자, 방석 위에 앉아 하는 공부보다 천만 억 배나 강할 것입니다. 다만 자세히 들으십시오. 결단코 서로 그릇되게 하지 않습니다.
또 받으니, 노방의 두 글귀로 행주좌와의 교훈을 삼는다고 하니 좋기가 더할 나위 없습니다. 만약 시끄러울 때 싫어하는 마음을 내면, 이것은 스스로 그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만약 분별심이 일어날 때에 다만 노방의 두 글귀를 떠올리면 문득 열이 날 때 청량산을 한 번 복용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당신은 결정적 믿음을 갖추었으니 큰 지혜를 가진 사람입니다. 오랫동안 고요한 가운데 공부를 해 왔기 때문에 바야흐로 이런 말을 감히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만약 업식이 아득하게 많고 교만한 사람에게 이와 같은 말을 해주면 이것은 그에게 악업의 짐 덩어리를 더해주는 것이 될 것입니다. 선문의 갖가지 병은 이미 앞의 편지에 갖추어 말했습니다. 알지 못하겠습니다. 일찍이 자세히 이해했습니까?
서장5 - 증시랑에 대한 답서(4)
좌선도 방편…내면의 눈에 맡겨라
“눈먼 자가 사람들에게 잘못 지시하는 것은 모두 고기 눈알을 밝은 구슬로 잘못 알고서 명칭에 머물 러 이해한 것이요, 사람들에게 맡아 유지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곧 눈앞의 지각(知覺)에 머물러 이해한 것이요, 사람들에게 쉬고 또 쉬라고 가르치는 것은 곧 생각을 잊은 텅 비고 고요함에 머물러 이해한 것이요, 쉬어서 감각도 지식도 없는 곳에 다다르면 흙이나 나무나 기와나 돌과 같은 것이나, 바로 이 러한 때에 혼미한 상태가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은 묶인 것을풀 어주는 방편의 말을 잘못 이해한 것이요, 사람들에게 인연따라 비추고 돌아보되 악한 생각이 앞에 나타나게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은 정식(情識)에 집착하여 이해한것이요, 사람들에게 다만 놓고 비워버려서 자연에 맡겨두고 마음을 내거나 생각을 움직임에 관여치 말 것이니생각은 일어나고 사라지지만 본래 실체(實體)가 없는 것이므로 만약 이것을 진실하다고 여겨 집착한다면 생사심(生死心)이 생긴다 라고 가르치는 것은 자연체(自然 體)에 머물러 그것을 구경법(究竟法)으로 여겨 이해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여러 병은 도를 배우는 사람의 탓이 아니라, 모두 눈먼 스승이 잘못 가르친 때문입니다.”
<금강경>에 ‘머무름 없이 그 마음을 낸다’고 하였듯이, 깨끗한 마음 바탕에 계합하려면 머무름이 없어야 한다.
마음에 머무름이 있다는 것은 곧 어떤 모양의 식(識)을 붙잡고 있다는 것이다.
모양 있는 식(識)이 아닌 본래 깨끗한 마음바탕은 허공과 같아서 붙잡을 것도 머물 곳도 없다.
그러므로 마음은 깨끗하다고 여겨도 안되고 더럽다고 여겨도 안되며, 흘러간다고 여겨도 안되고 머물러 있다고 여겨도 안되며, 이렇다고 해서도 안되고 이렇지 않다고 해서도 안되고 이렇기도 하고 이렇지 않기도 하다고 해서도 안된다.
즉 마음은 어떻게도 규정할 수가 없으니, 어떻다고 규정하면 그것은 이미 식(識)이 되어 허공과 같이 깨끗한 마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관(觀)하고 저렇게 유지하며, 이렇게 챙기고 저렇게 놓아버려야 마음을 깨닫게 된다고 가르치는 것은 모두 잘못된 견해와 집착을 풀어주기 위한 방편상의 말일 뿐, 공부인이 진실로 의지 할 진리는 아니다.
방편이란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한 가짜돈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방편이 인연이 되어 도(道)에 들면 다행한 일이지만, 방편을 도에 들어가는 참된 길이라고 여겨 붙잡고 의지한다면 방편은 또 하나의 장애가 될 뿐이다.
이처럼 선문에 들어가는 정해진 길이나 문은 없기 때문에 선문 (禪門)은 문 없는 문이다.
즉 특정한 수련의 과정을 아무리 오래 거치고 특정한 수행방법에 아무리 익숙해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선문에 들어가는 것을 보증해주지는 않는다.
이러한 수행이라는 것은 모두 일정한 형식의 조작의 과정으로서 특정한 병통의 치유에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그것이 선에의 입문과 직접적 관계를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선이란 특정하게 조작된 마음[有爲法]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조금도 더하거나 덜할 수가 없는 완전무결한 본래의 마음[無爲法]이기 때문이다.
선은 지금 자신의 마음이 이러한 본래의 마음임을 자각(自覺)하는 것이지, 특정한 이미지[相]의 상대적 마음을 취하는 것이 아니다.
즉 선은 취사선택(取捨選擇)의 행위를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진실을 깨닫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진실을 깨닫기만 하면 어리 석음은 본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조용한 곳에서 좌선(坐禪)하는 행위도 “병을 따라 약을 쓰는 하나의 방편”일 뿐이다.
만약 그 것이 곧 선이라거나 선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여긴다면 이것은 수단에 머물러서 목적을 상실하는 어리석은 짓일 따름이다.
선 공부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방편을 얼마나 오래 동안 갈고 닦았느냐가 아니라, 선을 향한 얼마나 “진실하고 견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문 없는 관문[無 門關]을 통과하는 길은 눈을밖으로 향하여 이리저리 살피고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눈에 자신을 맡겨버리는 것이다.
원래 갖추고 태어난 내면의 눈만이 본래부터 그 길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