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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덜어내기·2
이현애
난획이 설렁설렁 바람을 머금어 좋아 보인다는 스승의 덕담을 생각해내고 우쭐해졌음인가. 어젯밤 쳐 놓았던 난 한 폭이 ‘설렁설렁’하던 스승님 뒷모습처럼 좋아 보이더니 오늘 아침 눈을 뜨니 속기를 머금어 요염하기조차 하니 틀렸다. 다시 내리고 빈 화선지와 마주 앉는다. 다시 나를 바꿀 수 있게 한다. 회사후소繪事後素 하지 못한 소치所致 이리라.
무릇 모든 예술은 모방에서부터 시작하고 무에서 유를 창조했던 선지자들의 앞서간 발자취를 따라 걷다가 아주 조금씩 조금씩 나아갈 뿐이다. 10년은 보고 10년은 헤매고 10년을 다잡아야 비로소 조금 한다고 할 수 있다 했으니 인생의 어디쯤에서 조금 한다고 할수 있으랴. 아득하기만 하다. ‘스승 때문에 인생이 바뀐다’고 하며 말 한마디를 조심하던 스승을 뛰어넘는 모반은 아직도 일어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인생은 조금 궤도수정이 된 것도 같으니 스승께 덜 죄송한 것인가. 그 분의 덕스러운 일상까지를 닮으려 노력하며 수십 번의 반복과 모방 속에서 손이 저절로 움직여주는 신들린 듯한 모습을 상상해보는 일은 매우 즐겁다. 처음에는 철저히 스승과 닮으려 기를 쓰고 달려가지만 어느정도 닮아지면 또 있는 힘을 다해 스승에게서 멀어지려 낮 밤을 바꿔가며 멀리 멀리 도망간다. 철저한 자기 부정을 통한 닮아가기로 또 철저한 절망을 통한 스승을 부정하기로 긍정에 도달하려한다. 그러나 아무리 긍정을 위한 부정을 향해 달려가도 그 앞에 항상 스승이 있고 새로운 탄생을 위한 절차탁마切磋琢磨도 스승의 품안에서 이뤄진다. 부처님 손바닥 안이다. 다만 스승의 족적에 누가 되지는 말았으면 좋을 정도일 뿐이다.
스승으로부터 또 나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누구나 꿈꾸는 청출어람이청어람靑出於藍而靑於藍이란 말의 곁에 서보지 않을까. 청출어람靑出於藍을 모두 따르는 건 아니고 대부분의 스승과 제자 모두 두려워하며 조심스러워하는 것 같으니 어렵긴 정말 어려운 것인가 보다. 청출어람을 인정해주는 일이나 청출어람을 인정하는 일이나 모두 특별한 사고의 끝에 일어나는 일이겠거니 생각된다. 아끼는 제자일수록 늦게 인정해 주며 늦게까지 고생을 시킨단다. 크고 단단한 그릇을 만들기 위한 장인의 흙 어우르는 솜씨가 곧 스승의 뜻 아닐까.
어느 노 서예가는 화선지 삼만 장을 껌구기 전에는 글씨 쓴다 말거라 했단다. 조금 했다고, 칭찬 좀 받았다고 우쭐해져서는 앞뒤 분간을 못하는 재간쟁이가 되지 말기를 바란 것이리라. 선線으로부터 아집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데 삼만 장이나 없애서 되겠는가 수도 없이 자문하며 제법 오랜 시간을 천착을 했건만 언제나 제자리에서 쳇바퀴를 돌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단 한 장의 버림으로도 가능한 지혜로움이 내 안 어디엔가 숨어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판도라의 상자 속에 그대로 들어있는 한 붓을 꺾지 못한다. 벼루를 몇 개씩 구멍 내며 천착하는 서예가의 집념과 기다림에 경의를 표하며 좋은 작품을 골라 볼 줄 아는 안목을 가지고 그런 작품을 수도 없이 메타 텍스트화 시켜보는, 노력하는 이들에게 소외감을 느낀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벼루에 먹을 갈기보다는 손쉽게 시중에서 판매하는 먹물을 사용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니 벼루 한 장도 가볍게 해줄 수는 없을 터이며, 화선지든 공책이든 앞으로의 평생을 다 바쳐도 삼만 장을 채우기는 어려울 것 같아 많이 아프다. 누가 이런 아픔을 짐 지우는 것도 아닌데, 스스로 굴레를 쓰고 날마다 쓰고 버리고 다시 줍고 놓는 작업을 통해 나와 마주앉아 화두 하나를 던지고 받는다. 이것만큼은 제법이라 생각하며 가끔 쓴 웃음을 짓는다.
등단 전에 이미 몇 백 편의 시를 쓰고 지우고 했어야하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을 남긴 시인도 2~3백 편의 시를 남길 뿐이라니 노상 가슴이 뛴다. 과연 몇 편을 쓰고 지워야 2~3백 편이라도, 혹은 2~3백 편이나 남는 것인지 가슴에 소름이 돋는다. 그 소름은 가끔씩 돋아나 몸속 깊숙한 곳까지 유영을 하곤 했다. 그리고 내가 그 유영의 미세한 움직임을 제어하려고 한다거나 눈을 감아버리려 하면 할수록 나의 가슴은 조금씩 무너져 내렸다. 물론 나는 자주 일어나 걷기도 했고 손을 맞잡고 심호흡을 하며 지워버리려고 애를 써보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딴전을 피우며 외면해도 그것의 움직임은 작아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다. 그 소름은 끝까지 머리 위로 몸속으로 들락거렸다. 내면의 공허가 점점 더 자리를 넓혀가는 것을 느꼈으나 내버려두는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이것도 나의 스승이 되었을 터이니.
옛 시대의 선비라 함은 글이나 서예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을 일컬었으며 그들은 시詩, 서書, 화畵를 삼절三絶이라 하여 세 가지를 똑같이 중시하였다. 나아가 학예일치學藝一致, 서화일치書畵一致, 화선일치畵禪一致를 꿈꾸며 그림을 단순히 그림 자체로만 생각하지 않고 마음을 갈고 닦는 하나의 수단으로 여겼다. 선비 곧 문인들은 사군자를 주로 치고 그림에 관련된 내용의 한시를 자작하여 다양한 글씨체로 화제畵題를 써 넣었다. 먹과 담백한 물을 주된 재료로 사용하여 그들의 변화미와 소박함으로만 자신의 철학과 품격까지를 녹여 넣어 표현하고자 했다. 따라서 당시는 시와 글씨와 그림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격조 높은 그림으로 칭송을 받았으나 이 세 가지를 고루 다 갖추기는 쉽지 않았을 터, 그림이 좀 괜찮다 싶으면 시와 글씨가 좀 뒤떨어지고, 시를 좀 읊었다 하면 그림과 글씨가 좀 아쉬운 예가 많았을 것이다. 이 때문에 시, 글씨, 그림이 모두 뛰어난 사람도 ‘삼절’이라 일컬어 예禮를 갖추었다. 그래서 문인화가로서 삼절이라 불리는 것은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었으며, 선비들은 먹과 물의 간솔簡率함까지도 담아내려 애를 썼다. 이런 까닭에 선비들의 문인화를 평가할 때도 그림의 겉모습에 관심을 두기보다 그 작품 속에 깃든 선비의 고아한 인품까지를 읽고 닮으려 노력했다.
우리나라 서예가 창암 이삼만 선생은 병석에 누워 있을 때라도 하루에 천자씩 쓰는 자기와의 치열한 싸움을 통해 솔선을 보였으며, 또 벼루 세 개를 구멍내지 아니하고는 글씨의 도를 이룰 수 없다고 가르쳤다. 또한 글씨를 배우러 찾아오는 이에게 한 획, 한 점을 각각 한 달씩 안고 뒹굴게 하였다고 한다.槿域書畵徵 인내심과 꾸준한 자기와의 싸움을 필요로 하는 작업에 처음부터 된 바람으로 고독한 행로임을 깨우치려 했던 것일 게다. 이런 엄격한 스승의 문하에서 배출된 제자가 스승의 뜻을 이해하고 학맥學脈을 잇는 것 아닐까. 대게는 이렇게 스승 같아지지도 못하며 아쉬워하는 나처럼 스승이 바라는 바보다는 자기 자신의 시계나 심력의 한계점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만다. 평생 배워도 모자란다 했던가. 그 길이 지독하게도 멀다.
이렇게 대부분의 스승들은 서화든 학문이든 도道의 경지에서 이뤄져야 하는 것으로 고결한 인품이 닦아진 후에라야만 묘경妙境에 들 수 있다고 가르쳤다. 또한 잔재주로 익힌 기교를 부리지 말아야하고 소박한 기풍을 본받아야만 될 것으로 속기俗氣와 손잡는 것을 경계했다. 지적 예술적 활화산을 지니고 있으며 아직 스승의 뜻을 확실하게 붙잡지 못한 제자에게는 무엇보다 세인의 갈채와 밥과 명예가 우선순위가 되기도 해서,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이 커다란 틈을 만들기도 한다. 쉽게 조율되지 못하는 그 틈 때문에 스승은 제자를 파문하고 제자는 스승을 부인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제자가 또 스승이 되어 제자를 기르고 참 스승이 되는 것이니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우고 또 깨우쳐야 한다는 말이 나온 것이리라. 서화를 예로 들어 설명하였으나 어디 서화뿐이랴. 모든 예술 작업이 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우리나라 조선 후기의 학자이며 서예가인 석담과 고죽의 사이도 그랬던 것 같다. 스승인 석담은, 예술은 예술 그 자체로서 존립 할 수 있으며 다른 어떤 것의 수단과 방법이 될 수 없다는 예술 지상론을 펼치려 했고, 고죽은 생계조차 제대로 꾸려나가지 못하면서 도道만을 강조하는 스승의 초라한 모습에 반발, 회의를 느끼고 두 번이나 파문하고 나갔다가 깨닫고 돌아와 다시 제자가 된다. 스승은 제자의 큰 그릇이 혹시나 금이라도 갈까, 임종 시에사 제자의 재능과 실력을 인정해 주며 제자도 임종 시에 스승의 뜻을 깨닫는다. 이렇게 스승만 좋은 제자를 이끄는 게 아니고 그 스승 밑에 좋은 제자가 청어람靑於藍 하며 스승을 더욱 스승답게 이끈다. 청어람 할 수 있는 제자 하나라도 두기를 스승들은 얼마나 소원하는가. 가끔 뜨는 해 와 지는 해의 논쟁이 있으나 뜨는 해가 찬란하면 할수록 지는 노을이 더 아름답고, 지는 노을이 제 본래의 붉은 빛을 잃지 않으며 져 내릴 줄 알아야 뜨는 해를 더 빛나게 떠 올릴 수 있다.
이러한데 스승이 아무나 되겠는가.
스승이란 말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말이다. 중국에서는 사부師傅, 영어권에서는 tearcher라는 말로 대신 표현하는데, 어찌 스승에 대한 이러한 어의語義가 잘 전달 될 것인가. 어느 나라나 국가와 사회는 교사에게 특별하게 완성된 인격과 품성을 요구한다. 가르침을 받는 사람 이외에도 누구에게나, 교과서 밖에서까지도 그의 태도와 행동에 본本을 보여야만 한다. 바르고 소박한 차림새와 부단한 인격 관리를 요구받는다. 어느 상황에서든 윤리 도덕을 저버리지 않아야 되고, 아무리 죄가 미워도 극한 상황까지 몰고 갈 수 없으며, 아무리 굶주려도 남의 빵을 욕심낼 수 없다. 자신의 자녀들보다 사랑하는 제자를 위해 가슴 아파할 줄 알아야 하고 자신의 영달에 앞서 제자의 앞날을 위해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몸은 물론 마음조차 가난하고 궁핍할지라도 온 정신을 다 태워 제자들의 가슴에 지혜의 촛불을 켤 수 있어야 하고 아무리 척박한 세상에 던져졌어도 한 줌의 소금 같아야 한다는 자긍심도 가져야한다. 대강 이러한 말들이 교사가 된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들이다. 선생 하기도 이리 어려운데 스승의 자리를 넘볼 수는 더구나 없지 않은가. 스승으로 누군가의 가슴에서 영원한 숨을 쉬는 모든 분들께 경외심敬畏心을 느낀다.
철학자 플루타크는 ‘부모로부터는 생명을 받았으나 스승으로부터는 생명을 보람있게 하기를 배웠다’고 했다 우리나라 전통 가치 속에서도 스승을 부모처럼, 하늘처럼 존중했다. 더구나 선비 사회에서는 서로가 어느 스승의 문하생門下生인가를 자랑스러워했으며 그 속에서 서로 선의의 경쟁을 하며 바른 학통을 이어받아 더 푸른 쪽빛이 되기를 꿈꾸었다. 중증 장애인이었던 헬렌 켈러를 있게 한 이는 애니 설리번이라는 스승이며, 진화론의 창시자 다윈의 앞에서는 스승 헨슬로가 이끌고 있었고. 동양 5성 중 하나인 증자의 앞 뒤에는 공자와 자사, 맹자가 있어 스승과 제자 사이의 청어람의 예를 잘 보여준다. 우리가 어떤 길을 가던 그 길은 항상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기 때문에 스승은 언제나 필요하다. 그 길 위에서 방황하지 않고 따라 갈 수 있는 스승을 가슴에 품고 있다면 험한 길 위에서도 헛발을 딛지 않을 것이다. 스승을 스승으로 받들 줄 아는 혜안과 제자를 제자로 이끌 줄 아는 너그러움과 굽힘 없는 철학을 각자 정립하고 있다면 세상은 좀 더 밝아지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흠모하며 따르고 싶은 분 중에 초의선사가 있다. 조선 후기의 승려로 15세에 산문에 들어 20대 중반에 깨달음을 얻고 시, 글씨, 그림에 능한 삼절로 평가 받았을 뿐더러 다성茶聖으로도 꼽히니 참 욕심이 없다고는 못할 분이다. 찻물이 알맞게 식을 동안에 손수 그린 그림 속에 들어 장삼 소매 건듯 들며 범패 한 소리 주욱 그으면 시는 찻잔 속에서 저절로 우려지리라.
그분에게 알맞게 우린 차 한잔 건네받을 수 있다면 그까짓 세월쯤이야 간단히 건너뛸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아, 격格이 가로 막는다.
나도 평생 가르치는 입장에 서 있었는데 받는 그들에게 어느만큼의 무게로 남았을까. 워즈워드의 시처럼 ‘어른의 아버지’인 것을 잊고 그저 선생이고 말지 않았을까 부끄럽고, 어느 한 제자라도 깨어있는 그의 가슴 속에 스승으로 남았을까 심히 의심스럽다. ‘선생은 있으되 스승은 없다’라고 염려들을 하는데 선생도, 학생도, 그도 저도 아닌 이들에게도 제 나름의 도道가 있다. 우둔한 나에게는 보는 것, 듣는 것, 느끼는 것 중 어느 것 하나, 스승 아닌 것이 있으랴. 태어난 해가 먼저인가 나중인가를 따질 것인가. 귀, 천, 늙고 젊음도 따질 것도 없으며 곧 도道있는 곳에 스승이 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밖에. 스승이나 제자나 덜어내기를 잘 해야 되리라 본다.
여기까지 생각하다 보니 빈 화선지에 바람 한줄기 휘잉 궁굴고 지나간다. 무엇부터 덜어낼 것인가.
이현애 / 1998년 『시와산문』으로 등단했으며 시집 『가끔 길을 잃어버린다』, 『모든 것들은 뒤에 머문다』가 있다. 현재 <시의 밭>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